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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속(?)
'무엇이 나를 다시 여기로 오게 했을까?' 장 기로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나저나, 내가 몇 년 만에 여기에 다시 오는 거라지? 그 약속 같지 않은 약속 때문에......'
언뜻 생각해도, 강산을 변하게 한다는 10 년은 넘은 세월이었다. 그렇지만 기로는,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그놈의 세월 타령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호수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파란 가을 하늘을 담고 있어서 색깔마저도 그대로인 듯 보였지만,
여기서 몇 굽이는 돌아가야 했던 옛 27번 국도는 자리까지 옮겨 4 차선 육중한 다리로 호수를 가로질러 자신 앞에 턱 버티고 괴물처럼 위협을 가하려는 모양새여서,
'세월이 강산도 변하게 한다는데, 이까짓 거 가지고, 뭘......' 하고 짐짓 태연한 척 마음을 추스리기까지 하면서, 극구 나오려던 한숨마저 삼키고는,
'더구나 오늘은 이런 거 말고도 허무할 일이, 어디 한둘이겠어?' 하고도 있었다.
사실 장 기로가 이곳이 천지개벽이 되듯 바뀐 걸 전혀 모른 채 온 건 아니었다.
그 사이에도 차를 타고 바로 이 새로운 다리를 몇 차례 지나면서는,
'아, 이 마을에서 내가 1 년을 살았었는데...... 근데, 그 양반은 잘 지내실까?' 하는 감상에 젖곤 했으니까.
다만 그 때는 다른 일로 가다가 이 다리를 건넜던 것이고, 오늘은 그 스스로 일부러 이곳을 찾아왔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그런데도 본인이 직접 자신의 두 발로 그 다리 입구 위로 가로지르는 지방도로(호반도로)를 건너면서 보니,
그 새로운 다리마저 건설 된지 몇 년은 된 것 같은 흔적이 역력했고, 그 너머 멀리에 조그맣게 보이는 구 '운암대교'는, 이제는 차라리 없어진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추레한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저 옛 모습을 일깨워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그 신구(新舊) 두 다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기로는,
'내가 여기 살 때가 마흔아홉이었는데, 그 당시 예순이던 그 양반은 이제... 갔고, 내가 그 당시의 그 양반 나이가 돼서야 이곳에 다시 찾아온 것이로구나......' 하다 보니,
어쩌면 공교롭게도 자신 역시 10 년쯤 뒤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고 내가 뭘 어쩌겠어? 그런 게 인생인 것을......' 하면서도, 누군가와 그런 넋두리라도 하염없이 늘어놓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는,
'그래! 지금 이 순간이라면, 그 대상이 바로 그 양반, '산장 아저씨'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하는 간절함이 느닷없이 가슴을 억누르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지금 그 양반 '산장 아저씨'인, '박 만석'의 묘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장씨, 여그가, 내가 나중에 죽은 뒤 묻힐 장소여. 미리 ‘가묘(假墓)’를 만들어 둔 것이제......” 하고, 그 해 박 만석이 일부러 기로를 데리고까지 와서 가르쳐 주었던, 바로 그 곳인 묘지로,
'아, 어쨌거나 저 육중한 다리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산장 아저씨가 조금 답답한 면도 없지는 않을 것 같고, 시끄러워도 보통 시끄럽지 않겠구나...... 근데,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산장아저씨’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데, 그건 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허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처음 본 그 당시부터 이미 그렇게 굳어져버린 일인 걸...... 그나저나 도대체 그 양반과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을까? 아니, 그 당시의 우리는 무슨 관계였을까? 친구였을까? 그래, 친구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10년도 더 차이가 나기 때문에, 친구라는 표현을 쓰기엔 (한국인의 정서로써는)건방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뭐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단어 자체가 없으니... 그렇잖으면, 이런 산골에서의 ‘이웃’? 그런데 그것도 좀 이상하긴 하다. 어쨌거나 그런 저런 거 다 떠나서, 우리는 너무 잘 통해서 단짝친구 같은 사이였던 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어쨌든 그 양반과 나는 뭔가 심상찮은 전생의 인연이 있었기에 그렇게 4계(四季)를 지지고 볶아가며, 마치 아이들처럼 낄낄대며 지냈던 것이었겠는데...... 근데,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게, 그 양반은 흥이 날 때마다 혼자서,
"짜 짜 짜 짜......"
소리를 내며 콧노래를 부르거나 흥얼거리곤 했는데,
흔히 남들은 다, ‘랄 랄랄 라......’ 하는데,
그 양반은 왜 ‘짜 짜 짜 짜......’ 라고 했을까? 그 당시에도 웃긴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웃기기는 매 한가지네...... 좌우간 참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양반이었지......' 하고 고인의 묘지를 찾아가면서도 그 당시 박 만석의 모습이 떠올려지자, 기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혼자서도 웃기까지 했는데,
'허기야... 어쩌면 그런 기억이 바로 나에게 여기를 찾아오게한 이유일지도 모르지......' 하고 있었다.
‘섬진강 댐’으로 불리면서 ‘옥정호’ 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는 이 호숫가에 살고 있는 기로의 친구 유 범상, 그가 ‘산장 아저씨’의 죽음을 알리려고 기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기로는 한국에 없었다.
동유럽 불가리아 '흑해' 연안의 작은 휴양지 '소조뽈(Созопол)'이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차피 그런 사실은 기로의 집안(형제들)에서조차 알지 못했으므로, 범상의 입장에서는 다소 속이야 탔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기로의 행방을 추적해가면서까지 연락할 이유도 없었을 터였다.
다만 범상은, 친구 기로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호숫가에 와서 그해(2003 년) 1년을 살면서 박 만석과 함께 했던 이야기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박 만석의 죽음을 알리려고 했을 뿐이지, 기로가 이렇게 박 만석이 묻혀있는 묘까지 찾아올 줄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니까.
(허기야 기로 역시도 지금, 박 만석의 묘를 찾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 행위조차 충동적이었을 뿐더러, 설사 묘지에 간다고 해도 들렀다 바로 이 곳을 떠날지, 아니면 일을 본 뒤 친구 범상의 집에 가서 오늘 하룻밤이라도 머물다 갈지는... 정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맡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기로가 불가리아에서 귀국한 보름 여가 지난 어젯밤, 친구 범상에게 뭔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었다가,
"야, 기로! 이 날도깨비 같은 놈아!" 하는 듣기 좋지 않은 소리부터 시작되어,
“니가 이 마을까지 다시 올지 안 올지도 모르긴 했다만, 내가 산장 아저씨 죽었다고 너한테 연락을 하려고 했었는데, 전화가 돼야 말이지." 하고 짜증섞인 투로 말하다가, " 뭐, 정지됐다는 안내만 떠서, 당연히 니가 또 외국에 나갔겠거니 하고는 있었다만... 그렇다고 니네 누님 집 전화번호를 찾을 수도 없고 해서, 관둘 수밖에 없었다. 근데 너는 어떻게 된 놈이, 최근엔 외국을 그렇게 뻔질나게 나다니면서도 나한테는 말 한마디 없냐? 한두 번도 아니고. 근데, 이번엔 또 어딜 나갔다 돌아온 건데?” 하는, 박 만석의 죽음을 알린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로에 대한 원망이거나 섭섭함이 더 강한 불평을 했는데,
"뭐라고? 산장 아저씨가 죽었다고?"
기로에게는 그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전혀 현실감 없이 스쳐지나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 두 달 전에...”
“으응?”
범상이 다시 한 번 그 말을 확인해 주는데도,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 건 물론, 정신조차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잠시 전화를 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사안일 것 같았는데,
“그래서?” 하고 묻긴 했지만, 그 스스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뭐가, '그래서'란 말이지?' 하고도 있었다.
“응...” 범상도 잠시 멈칫 하는 것 같더니, “그 양반이... 너하고 그렇게 찰떡 같이 붙어 지내던 양반이, 허망하게 죽었다고! 그러니, 최소한... 너한테 알리기라도 해야 하지 않았겠느냐고, 내 입장에서!"
"그래서?"
"너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그런데, 그 양반이 죽고나자, 이 마을이 온통 다 썰렁해, 두 달쯤 지난 아직까지도. 뭐랄까? 기둥이 하나, 아니 통째로 빠진 거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우리 나이가 이제 60인데, 요즘 세상에 70이 조금 넘은 양반이 그렇게 갑자기 간 게... 상당히 빠를 수도 있다고 보지만, 사람의 목숨을 어쩌겠어? 그렇게 건강하던 양반이 또 그렇게 쉽게 갈 줄을 또 누가 알았겠느냐고...... 어쨌거나 그 양반이 가고 나니, 이 마을이 텅 텅 빈 거 같다. 항상, 이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바지런을 떨던 양반이라......” 하고 어느새 처음과는 사뭇 달리 평온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기로는,
“그래서?” 하고 다시 물었다.
“뭐, 허무하다는 거지. 멀쩡하던 양반이 갑작스럽게 죽은 게 좀 의외이긴 하지만, 왜 그런 말이 있잖아? 병치레 오래 하는 빌빌거리는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더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바로 딱 그 양반을 두고 했던 말 같아......”
“그래서?”
“근데, 넌, 뭐가 자꾸.. 그래서야?” 범상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뭐가 알고 싶은 건데?” 하고, 오히려 캐묻는 것이었다.
“아니, 뭔가...”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던 기로는 또 갑작스럽게, “특별한 건 없었어?” 하고 물었다.
그러자,
“뭐가? 무슨 얘기야?” 범상이 다시 물었다.
“... 응... 뭐랄까? 혹시,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나에 대해 뭔가 얘길 했다거나... 그런 건 없었는지......” 하고, 결국 기로는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뭐? 아니, 그런 건 없었는데! 게다가 최근 1-2 년 사이엔 그 양반과 나 사이도 틀어져서... 그 전처럼 가깝게 지냈던 것도 아니고...... 돈밖에 모르던 구두쇠 영감, 그 재산 모아서 어따 쓸려고 그랬는지...... 근데, 듣기론... 그 양반이 갑자기 죽어서, 그 집에도 뭐 특별히 남긴 말이 없었다나 봐... 그러다 보니, 그 재산 처리로, 가족 간에 문제가 보통 심각하지 않다고도 하고...... 근데, 그런 거야 요즘, 어떤 집이거나 다 마찬가지 아냐?" 하더니, "글쎄, 너에 대해선... 뭐, 그 전에도 내가 너에게 전달했다만... 가끔, '장씨는 잘 있디야?' 하고 물어본 기억은 있지만, 최근에는... 서로가 말도 잘 않고 지내서, 모르겠는데? 근데, 너하고 뭐... 무슨 일이 있어? 뭐, 중요한 거라도?” 하고 범상이 태도까지 바꿔가며 아주 흥미롭다는 듯 캐물었다.
“아니.. 그 전에 내가 거기서 살 때.. 우리, 약속한 게 있었거든......” 하고 기로는 말은 했지만, 사실, 그 얘기도 꼭 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뭔데? 무슨 약속?” 범상이 달라들 듯 물어왔다.
“글쎄, 약속이라고 하기에는......” 하다가, "내가 말을 잘 못 했나?" 하고 기로가 다소 애매하다는 듯 말을 빼자,
“뭐, 중요한 거야?”
“아니,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듯한데......”
“뭐야? 중요하면 중요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너, 혹시... 그 양반하고 무슨 돈 문제, 아니... 채무 관계로 얽혀있었던 거 아냐?” 범상이 호기심 가득한 투로 넘겨짚으며 달라 들었다.
"아냐! 무슨......" 하고 단호하게 말하자,
"그렇긴 하겠지. 니가 돈 문제로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 그럼, 뭐야?"
“응, 별 거 아냐......”
“뭐가, 별 거 아니라는 거야? 실컷 지 스스로 말을 꺼내놓고선... 어서, 말 해!”
“별 거 아니래도......”
“야! 지금, 그 게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니가 그렇게 물어보는 데에는, 틀림없이 뭐가 있을 거 아냐? 뭐, 내가 알아선 안 될 일이라도 되냐? 둘이 무슨 숨겨 놓은 비밀이라도 있었던 거야?" 하더니, "허기야, 니가 여기 살 때부터 둘이서 맨날 붙어다니면서 뭔가 심상찮은 일을 꾸미는 모습들이긴 했으니까......” 하고 범상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라니까... 비밀은 무슨......”
“근데, 왜 그래? 아니면, 얘길 해 봐! 뭔가 수상해...... 니네들, 아니, 너하고 그 양반하고 유난히 낄낄대면서 붙어다녔잖아? 동네 불알친구들처럼......” 범상은 여전히 성화를 부렸다.
“그러긴 했지만, 그랬던 게 뭐, 어때서? 그리고, 뭐... 니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별 거 아니라니까!”
“야! 별 거 아닌데, 니가 그래? 수상해. 이건 분명, 뭔가가 있어. 그렇잖고선 니가 이렇게까지 어물어물 버벅대며 말하지는 않을 테니......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봐도, 뭔가... 둘 사이에는, 심상찮은 일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냥... 정말, 별 거 아닌데... 그분이 그 때 그랬거든... 한 번." 하고 잠깐 멈췄다가, "자기 죽기 전에, 나를 한 번 정도는 더 만나고 싶다고... 정확히 말하면, 나를 한 번 부를 테니, 거기 '둔터니'로 찾아오라고......”
“그래에? 뭣 땜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뭐야? 야! 그런 대답이 어딨어? 너도 모른다고? 그게 약속이야? 아니, 뭔가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랬을 거 아냐?"
"글쎄,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그걸 나도 모른다니까."
"그럼, 혹시... 그 자린고비 영감탱이가 돈은 많으니까... 너한네 한 재산 남겨주려고 오라고 했던 거 아니냐? 하 하 하......” 그제야 범상은 갑자기, 그리고 다소간 의심을 푼 듯 웃으며 농담까지를 했다. 그런데 '영감탱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범상 역시 박 만석과의 마지막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는 걸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알려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근데, 아무리 내가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그냥 여태까진, 언제라도 그 양반을 만나면, 무슨 얘기든 하겠지... 하고 있었는데, 이젠 돌아가셨다 하니,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 돼 버린 것 같네...... 나도 그 양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한 건 마찬가진데, 이젠... 없던 일이나 마찬가지네. 참내, 허탈하네!”
“단지, 그것 뿐이야?”
“그렇다니까! 그래서 나도 좀 그래. 그 양반이, 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할말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글쎄, 하도 나하고 친하게 지냈으니까, 죽기 전에... 그저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간다는 뜻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구만, 이제는......”
“그게 무슨 약속이야? 에이, 설마 그랬을까? 무슨 대단한 사랑을 하는 사이도 아니고...... 근데, 정말... 그게 전부야?” 차라리 싱겁다는 투로 범상이 물었다.
“그렇다니까! 그게 전부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랬다.
박 만석은 그랬고, 장 기로는 그 말을 믿었고(그래서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고)... 비록 그들 둘 사이 역시 좋지 않게 헤어져서 기로가 지난 10 여 년간 둔터니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로는 박 만석이 했던 말을 가슴속에 두고 살아왔는데, 박 만석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기로는, 어쩌면 못 지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죽었다고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로는 자신이 박 만석에게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지금 그가 묻혀있는 곳으로, 아까 전주에서 사온 막걸리 한 병을 덜렁덜렁 들고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유 범상과 통화한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사실 장 기로는 유 범상과 통화를 했던 어젯밤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늦잠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오늘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시시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침에 서울을 출발해, 지금 이 시각에 '둔터니 마을'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러니, 기로 자신도, 그게 박 만석과 맺었던 약속이었던지, 아니면... 장 기로 자신 혼자만의 감상이었던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