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산은 / 김성수 (석암제)
자평 김성수 선생은 보령 출신이나 제천으로 이거하여 후학 시조인을 다수 양성하였다. 60년대 석암 정경태 선생과 교유하며 시조를 전수받아 깊은 경지에 이르고 90대 노경에 CD 음반을 낸 것으로 알려진다. 시조인들에게 무상으로 CD를 배포하기도 했는데 필자도 요행 구득하게 되었다. 본 '청산은' 음원도 거기에 수록된 것인데 석암제 시조창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청산은 / 박선웅 (예명 박인규/ 석암제)
박선웅 선생은 현재 충청도 내포제 시조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명되어 있으나 원래는 석암제 시조 명창으로 카셑트 테이프를 시리즈로 발행했었다. 매우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으로 시조창을 하는 편이어서 시조인들이 배움에 모델로 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석암선생은 석암제의 창시자이고 심오한 시조창을 하지만 너무 흔든음이 많고 남도의 판소리적인 허스키한 음색이 깔려 일반인이 모델로 삼기는 다소 거리감을 느끼게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비해 박선웅 명창은 청이 일상인의 보편적 음색이면서 단아한 미성이라 이질감도 적고 흔든음도 석암선생에 비해 압축 정돈된 감이 있어 시조창 공부에 기준 되기 적합했던 것같다. 다만 위 '청산은' 시조는 속청을 쓰지 않고 창했는데 과거 석암제에서는 남창의 경우 속청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하나 점차 남녀창 간에 속청을 쓰는 경향이 되었고 위 1번의 김성수 선생의 창도 속청이 들어갔다.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청산은 / 박창헌 (반영제)
박창헌 선생은 전라도 김제 출신으로 정경태 선생의 고향인 부안과 지척이다. 따라서 석암제 내지 전라도 완제 시조풍과 가까울 법한데 대구 일원에서 오래 거주하면서 영남 시조인들과 많이 어울린 탓인지 영제풍이 많이 들어갔다.
흔히 석암제를 반영제라고도 하나 현재 흐름으로 보면 경제 쪽에 오히려 가깝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경제의 특징인 속청을 석암제에서 대거 반영하는 경향도 그 한 예다. 그러나 박창헌 선생은 영제적 패턴을 다수 살리고 있는데 다만 전체적인 시김새로 보면 그의 고향이자 국악의 본고장 호남, 전북의 부안,김재,고창 일원의 특성이 깔려지는 것같다. 대개 반영제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4. 청산은 / 박선애 (영제)
박선애 선생은 영제시조 무형문화재 2대 보유자로서 초대 보유자인 이기릉 선생으로부터 사사받았다. 이기릉 선생이 남긴 음원 중에서는 청산은이 없어 박선애 선생의 해당 창으로 앞 곡들과 비교 감상키로 하였다. 본래 이기릉 선생은 청이 약간 거칠면서 힘차게 내리뻗는 경향인데 박선애 선생은 여성적인 고운 미성이다. 그러나 음을 오르 내릴 때는 뚝뚝 끊어서 부르는데 영제의 특성인 듯하다. 필자도 박선애 선생에게 영제를 사사했는데 교수 시에 그점을 많이 강조하여 인상적이었다. 석암제의 오르내릴 때의 유연함과 탄력적으로 흔드는 시김새가 여기서는 거의 생략되는 것이다. 담박한 영제적 특징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5. 태산이 / 이기릉 (영제)
일관 이기릉선생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제시조 초대 무형문화재 보유자이다. 본래 시조창 전문가는 아니고 경북고 전신 대구고보 졸업생으로 교육자였다. 교사를 거쳐 일제시대 시학이라는 요즘으로 말하면 장학관 같은 자리에 있었다 한다. 그후 만주로 이주하였다가 귀국해 서울에서 국악계 거인으로 활동하던 송하 김영도 선생과 교유하면서 그분의 시조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후 대구로 내왕하면서 시조보급움동에 진력했는데 이들 김영도 이기릉 류의 시조를 영조시조라 불러 지역적 특징을 강조하였다.
이기릉 선생의 시조에서는 특별히 예술적 측면 보다 일반인의 보편적 창법의 한 전형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까다로운 가곡에서 시조로의 전환이 귀족주의에서 국민 보편화의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시조 중에도 지방의 향제는 그런 측면을 더욱 농밀히 내포한 것이었다. 선생은 스스로를 음치라고 낮추어 겸손했지만 실제 별나지 않는일상적 대범성에서 향제 시조의 본성과 시조 국민화의 요체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청은 투박하면서 힘차게 직선적으로 내려뽑는 경향이다.
6. 녹양이 / 고영태 (영제)
고영태는 경북 군위 출신(또는 경남 거창)이라 하며 근현대 영제시조 초기 3대명창으로 의령의 손덕겸, 경주의 이명서와 함께 거론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언들의 근거가 명백하지 않고 손덕겸, 이명서는 음원이 전하지 않아 고영태의 1936년에 나온(이양교, 시조창보78쪽) 본 녹양이 음원은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영제시조 무형문화재의 기원이 김영도, 이기릉 양인에게 있고 이기릉은 해방 이후 김영도에게 전수받았으므로 김영도가 가장 핵심적 위치에 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영도 또한 음원은 남기지 않았으므로 일제강점기인 1936년의 본 음원은 현존 영제시조의 가장 뿌리되는 자료라고 볼 수 있다.
고영태는 1935년경 조선권번에서 시조사범으로 근무했다 한다. (위 인용책)
장구박을 박자만이 아닌 반주적 성격을 가미하여 구사하는 듯한데 이양교 선생은 고영태 시조가 영제에 바탕하되 서울 생활 속에서 다소 경제적 영향도 받은 것으로 판단하였다.(위 인용 책)
7. 한산섬 / 김월하 (경제)
김월하 님은 여창가곡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시조로는 경제 쪽 전문가이다. 많은 관련 음반을 내었고 방송 출연도 다수 했으므로 시조계에 가장 대중에 널리 알려진 분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예상 외로 세간에 유포 애청된 음원 중 평시조는 '청산리 벽계수' 외에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본 한산도 음원은 이런 점에서 귀중하고 특히 석암 정경태 님의 관련 음원도 존재하므로 경제와 석암제의 비교 차원에서도 요긴함을 더하는 것 같다.
8. 한산섬 / 정경태 (석암제) / 이상 평시조
석암 정경태 님은 석암제 창시자로 많은 음원을 전하지만 평시조는 또한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본 한산도 창은 이점 매우 귀하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월하 님의 경제 창법과의 비교 차원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더한다.
9. 삭풍은 / 오종수 (석암제) / 지름시조
오종수 선생은 완제 무형문화재 보유자이나 석암 선생의 애제자로 알려진 석암제의 핵심 명창이기도 하다.
삭풍은 시조는 석암제에서 주로 남창지름으로 부르는데 경창대회 등에서 그리 많이 불리지는 않는 듯하다.
애상적 시조가 많은 전래 현실에서 호국적 호연지기를 담은 김종서 대감의 시조라 소중함을 더한다.
여기서는 오종수 선생의 청에 실어 감상할 기회를 갖는다.
10. 기러기떼떼 / 이미숙 (석암제) / 온지름시조
태금 이미숙 선생은 서울 광진구의 시조사범을 역임하며 시조창계에 큰 공헌을 한 분이지만 시조시인이기도 했고 한국화에도 조예가 깊었던 다재다능한 분이다. 과거 광진구 인터넷 카페 '시조창 나루터'에 들어가노라면 첫화면에 이 시조창곡이 아름다운 동영상과 함께 뜨기도 했다. 고음의 절절한 정서를 표현한 곡으로 태금 선생의 청에 실려 더욱 깊은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11. 석인이승 / 오종수 (석암제) / 우조지름시조
석인이승 즉 황학루 시조창은 여러 가객들의 음원이 횡행하지만 오종수 선생의 창은 특히 절묘하고 개성적이다. 석암제에 충실하면서도 석암 선생에 비해 맑고 힘찬 청으로 호탕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12. 월정명 / 박선웅 (석암제) / 우시조
우시조의 대표곡으로 나비야와 함께 애창되는데 박선웅(박인규) 선생의 소리로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고음에 굴절과 흔든음이 많은 곡이라 창자에 따라 창법 차이가 좀 나는데 본 음원이 아마 가장 표준적 창법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상품 구매시 goumasil@daum.net 으로 알림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