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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평화의 길 1코스 제3부
부새산고개-6.25참전용사기념공원-
강화대교-진해루-갑곶순교성지-
갑곶돈대-강화교-평화의길전망대-
문수산성입구-희우루-2코스입구
20241113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출발해 연미정을 지나 김포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 강화도의 북동쪽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휴전선에 해당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북한을 조망할 수 있다.
- 조선 시대 한성 방어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의 역사 유적지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2)관광포인트
- 북한의 생활상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 잘 보존된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연미정
-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6.25참전용사기념공원
- 조선 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였던 문수산성
3)여행정보(주의사항)
-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6.25 참전용사기념공원까지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므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 강화군에서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강화 DMZ 평화쉼터-연미정-평화전망대를 왕복하는 ‘DMZ 평화의 길 강화이야기‘ 여행상품을 운영 중에 있으며 사전예약을 통해 이용 가능하다.
- 주요 경로 : 강화평화전망대 3.6Km 고려천도공원 5.9Km 연미정(월곶돈대) 4.5Km 진해루 1.9Km 문수산성남문
- 시점 :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5
대중교통) 강화터미널에서 26번 버스 이용, 강화평화전망대 하차
- 종점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 8
대중교통) 김포골드라인 걸포북변역에서 3000번 버스 이용, 성동검문소 하차
2.염하강과 희우루에 평화의 빛이 물결치다
제3부 : 부새산 고갯길을 넘어 평화의길 1코스를 이어간다. 부새산 고개를 넘으면 용정리 산업단지와 강화군 국궁장 '강화정'이 안쪽에 자리하고, 염하강 해안에는 생활 폐수와 분뇨를 처리하고 생활폐기물을 소각처리하는 강화군 위생처리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을 지나 만수산이라고도 불리는 당산 고갯길을 오르면 염하강 해안 언덕에 2016년 6월 6일 준공된 강화군 6.25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있다. 기념공원은 염하강 철책선 통로를 이용하여 조성되어, 철조망에는 6.25전쟁 관련 여러 사진 전시물들이 게시되어 있다. 철조망과 해안북로 사이의 공간에는 여러 설치물이 있는데 한반도 조형물 앞에 세워져 있는 '강화특공대 의적불망비'가 눈길을 끈다. 강화특공대가 무엇일까? 6.25 전쟁 중에 강화 지역을 지킨 특공대? 이에 대한 궁금증은, 구 강화대교 서단 출입구에서 풀어졌다. 그곳에는 강화 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한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겨레의 비극이 염하강에 물결친다. 강화특공대의 굳센 업적(毅績)의 평가는 관점에 따라 또 사건에 따라 상반되는 것 같다. 이념과 사상이 신앙이 되는 것을 조선 성리학의 전개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섭다. 그 이념에 의해 이념과 무관한 양민을 학살하는 것은 휴머니즘에 위배된다. 6.25전쟁 유엔참전국 16개국 각국의 참전상황, 병력규모와 피해상황을 소개한 안내판, 한반도 모형물, 강화군 6.25참전용사기념비를 거쳐 허겁지겁 강화군 6.25참전용사기념공원을 거쳐 당산 고개로 올라갔다.
만수산이라고도 불리는 당산은 강화읍 용정리와 갑곶리를 경계하며 이 아래를 제승곶(濟勝串)이라 이르는 것 같다. 화남(華南) 고재형(1846~1916)은 제승곶에 대하여 "갑곶의 상류를 예전에는 제청곶(濟淸串)이라고 불렀다. 인조 정축년(1637)에 강이 얼어붙어 배가 다닐 수 없었는데, 갑자기 얼음이 깨져 청나라 군대가 건너왔다. 그러자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가 쓴 칠언절구 '제승곶(濟勝串)'에, 무정한 하늘을 원망하는 그의 마음이 애절하다. 만약 조선 조정이 강화에 먼저 들어왔더라면 삼전도의 굴욕은 없었을 것인데 하늘은 무정하게도 청나라가 먼저 제승곶에 건너와 강화도를 장악하여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어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三拜九叩)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제승곶 가운데는 물소리만 요란한데, 조선 조정은 동으로 가 한양성에 돌아갔네. 옛적에는 어찌하여 그리도 무정했나, 조선은 건너지 못했고 청나라는 건넜네."
당산 고개를 내려오면 오른쪽에 해운사와 염주돈대를 알리는 안내판과 평화누리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데, 집중력이 떨어져 눈만 마주치고, 염주돈대 입구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그곳에서 조금 더 아래쪽에 강화 만남의 광장이 있으며, 강화 관문인 강화대교 문루가 보인다. 강화대교 아래는 옛 갑곶나루선착장이며, 강화대교 아래를 통과하면 강화외성 진해루가 복원되어 있다.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1232년 강화에 천도하여, 결국 몽골에 굴복하여 고려 원종이 1270년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 강화 천도 시기에 몽골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해 강화외성, 강화중성, 강화내성을 쌓았는데, 강화외성은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에 해안 방어를 위하여 1233년부터 축조하였는데 개경 환도 후 몽골의 압력에 의하여 고려 정부가 이를 파괴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월곶진, 제물진, 갑곶진으로 이어지며, 진해루는 강화외성의 갑곶진(甲串鎭) 문루이다.
화남 선생은 갑곶진에서 칠언절구 '갑곶동(甲串洞)'을 이렇게 읊었다. "진해루는 갑곶진에 임하여 있는데, 봄바람에 물결 일어 성벽을 치고 가네. 분노한 듯 격노한 듯 천추의 한이 되어, 정축년의 오랑캐 흔적 아직도 남아 있네. 鎭海樓臨甲串津(진해루림갑곶진) 春風起浪拍城闉(춘풍기랑박성인) 如噴如激千秋恨(여분여격천추한) 猶帶丁年代北塵(유대정년북대진)" 인조 정축년(1637)에 청나라가 침략하였을 때에 수많은 충신과 열사들이 싸우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그 원혼들이 아직도 갑곶나루에 떠있고, 천추의 한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이 1906년 갑곶나루에서 읊은 정축년의 굴욕은, 화남 선생보다 200년 앞선 조선 후기의 유학자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선생에게는 더 뼈아픈 고통이다. 그의 오언율시를 읽어 본다. "강화의 유수부는 천연의 요새지라, 바람과 연기가 진해문에 가득하네. 돛대를 높이 세워 누 밖으로 나가고 조수가 밀려와서 성 밑에 이르네. 정축년의 한맺힘이 터전에 싸여 있고 갑곶의 원혼들이 봄날에 상심하네. 구슬픈 노래에 격한 파도 약해지니 저 늙은 교룡이 뒤집는 듯하다네. 天險江都府(천험강도부) 風煙鎭海門(풍연진해문) 檣高出樓外(장고출루외) 潮滿到城根(조만도성근) 地積丁年恨(지적정년한) 春傷甲水魂(춘상갑수혼) 悲歌和擊汰(비가화격태) 似有老蛟飜(사유로교번)“
진해루 안쪽에는 통제영학당옛터비(江華統制醫學堂址碑)와 강화 통제영학당지(江華統制醫學堂址) 설명안내판이 있다. 통제영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에 해당되는데, 청나라 원조로 유지되다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통제영학당은 폐교했다고 한다. "1892년 우리 나라 최초로 진해마을에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훈련교관으로 영국인 골월 해군예비역 대위와 어학교사 허치슨 등 2명을 채용하였으며, 1893년 10월 7일 수병 300명을 모집하여 체계적인 훈련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대패하자 청국의 원조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는 운영을 지속할 수 없어 폐교하게 되었으며 터만 남아 있다."(인천광역시사)
강화교로 이어지는 평화의길을 따라 갑곶 순교성지로 올라간다. 기독교 신앙 설치물들을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평화의길은 나무계단으로 올라가 강화교로 이어지는데, 십자가길을 따라 순교성지로 올라간 뒤 강화교로 이어가도 괜찮을 듯하다. 길손은 무종교인, 비신앙인으로서 대충 지나며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에 만족한다. 박순집의 묘,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 순교자 삼위비를 살피고 강화교로 내려가면 그 옆에 갑곶돈대가 있다. 갑곶돈대는 정문으로 출입할 수 있고, 이곳에서는 출입할 수 없어 층층대에 올라 이섭정을 내려 보았다. 오래 전 갑곶돈대에 와 보았지만 이제 새로이 조성된 갑곶돈대를 살펴야 하는데 평화의길 탐방 중에는 제한시간 때문에 어렵다. 층층대에서 내려와 강화교 앞으로 나아갔다.
강화교 서단 북쪽에 '갑곳 선착장 집단양민 학살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강화군 6.25참전용사 기념공원에는 강화특공대의 굳센 업적(毅績)을 기리는 江華特攻隊 毅績不忘碑(강화특공대 의적불망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는 강화 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한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평화는 진실의 규명, 그리고 화해와 용서에서 출발하는데, 이를 거부한다면 평화의 길은 요원하다. 강화교를 통해 염하강을 건넌다. 겨레의 치욕과 분단의 비극과 상처를 치유하는 상징이 유도섬에 있을 것 같다. 한강과 조강, 염하강이 만나는 유도섬은 동과 서와 남이 만나는 꼭지점이다. 물길이 만나듯 사람이 만나야 하는데, 이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이 있다. 이 만남을 위해 디딤돌이 되는 마음은 진실, 화해와 용서이다. 이를 거부하고 남북 분단과 남남 갈등을 부추기며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면 평화는 보이지 않는다.
강화교를 건너다 뒤돌아보면 갑곶돈대의 복원한 이섭정(利涉亭)이 보인다. 이섭정은 고려 때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졌다가,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강화 부사 이성(李晟)이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으나 다시 무너졌으며, 1976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화남 선생이 1906년 갑곶나루 진해루에 왔을 때 이섭정(利涉亭)은 무너져 없었다. 화남 선생은 칠언절구 '이섭정(利涉亭)'을 이렇게 읊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조강으로 합해지고, 따로 흐른 남쪽 갈래에 거룻배를 띄웠네. 이섭정 앞쪽에 떠오르는 저 달은 이첨 선생 댁 한 쌍 매화나무를 비추어 주고 있네. 漢水臨津合祖江(합수임진합조강) 別流南圻泛篷窓(별류남기범봉창) 祗今利涉亭前月(지금리섭정전월) 猶照李堂梅樹雙(유조리당매수쌍)" 이첨(1345~1405)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으로, 조선의 건국에 끝까지 저항한 정몽주와 같은 노선을 걸었다고 한다.
강화교 동단에 평화의길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은 옛 군사시설물이었는데 평화의길 조형물로 예쁘게 꾸며졌으며, 그 옆 경비초소도 평화의길 전망대로 탈바꿈하였다. 이런 변화가 평화로 가는 길이다. 전망대로 올라가 염하강과 강화 지역을 조망하였다. 지난 시절 감히 이곳에 오를 수 있었던가? 감격에 겨워 걸어온 길, 탐방지를 비롯하여 강화 지역 전체를 살핀다. 염하강 상류, 한남정맥의 꼬리가 맥을 다하는 유도 섬이 북쪽에 가늠된다. 갑곶나루 남쪽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더러미포구에서 새우잡이 배들이 한가로이 떠 있다. 초겨울 오후의 햇볕은 따사하고 햇빛은 염하강 물결에 반짝인다. 평화의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평화의 풍경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평화의길 1코스 염하강 철책길 구간이 아픔과 그리움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평화의길 1코스는 문수산성 남문 희우루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문수산성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른 곳이다. 강화성을 함락한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공격하여 조선군이 어렵게 지켜냈다고 한다. 허물어진 성곽과 남문이 2002년에 복원되었다. 문수산성 남문의 문루명 '희우루(喜雨樓)'의 의미가 문수산성 아래에 자리한 김포시 포내마을과 성동마을의 평화로운 정경을 그려낸다. 기쁜 비 곧 단비가 내리는 누각, 희우루(喜雨樓)에서 봄밤을 느끼고 싶다.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는 봄날의 반가운 비를 오언율시로 이렇게 노래했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봄을 맞아 내리네.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들길에는 구름이 깔려 어두운데 강 위의 배에는 불빛만 외로이 밝게 빛나네. 새벽에 붉게 반짝이는 곳을 보니 금관성에 온통 꽃들이 물들어 있네.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江船火獨明(강선화독명)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 두보(杜甫, 712~770)의 '춘야희우(春夜喜雨, 어느 봄밤의 단비)' 전문
희우루 성곽으로 올라가 다시 한 번 염하강과 강화도를 조망하는 감격을 누린다. 상반되는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럼에도 평화의 길을 열어가는 선구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분들을 응원하며 그 길을 따라간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일지라도 희망을 품고 그 길을 열어가야 한다. 그 작은 실천의 모습을 탐방길에서 만났다. DMZ 평화의 길 1코스는 아픔과 희망이 교차하는 길이었지만, 이 작은 몸짓들에 감동하는 희망의 탐방길이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6.5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7분
옥개방죽 뒤 강화해협 염하강 건너 김포반도 서북쪽에 한남정맥 맨 꼬리가 한강 하구 유도 섬으로 떨어진다.
부새산을 절개하여 개통한 해안북로 부새산 고개를 올라간다. 왼쪽 산봉에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다고 한다. 고갯길 오른쪽에 고인돌 테니스장이 있다.
부새산 고갯길 서쪽 언덕에 고인돌클럽 테니스장이 있다.
부새산 고개를 넘어 용정리 산업단지 앞 강화정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앞의 산은 만수산(萬壽山)이라고도 불리는 당산인 듯.
용정리 산단 입구에 강화군 국궁장 '강화정' 표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공구·공작기계 기업 대산기계공업 본사가 있다.
강화정 주차장 뒤 승연기업 오른쪽 길로 따라가면 강화정으로 이어진다.
강화정 주차장 오른쪽에 생활가전제조업 (주)에너지코리아, 그 맞은편 염하강 언덕에 강화군 위생처리장이 있다.
강화군 위생처리장에는 분뇨를 처리하는 설비동·전기동·관리동 건물, 가축분뇨를 처리하는 수처리시설·퇴비화시설 건물, 생활폐기물을 소각처리하는 시설이 있다고 한다. 건너편 김포반도에 문수산이 솟아 있다.
해안북로 염하강 서쪽 언덕에 강화군 6.25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부새산 고개를 넘어 왼쪽 산업단지와 오른쪽 강화군 위생처리장을 거쳐 6.25참전용사 기념공원 앞으로 올라왔다.
강화군 6.25참전용사 기념공원 출입구로 들어가 기념공원을 살피고 반대편 출입구로 나간다.
2016년 6월 6일 준공된 6.25참전용사 기념공원 철조망에 6.25전쟁 관련 여러 사진 전시물들이 게시되어 있다.
1951년 봄, 중공군의 춘계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공산군측은 더 이상 전선(戰線) 조정이 불가능함을 판단하고,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해 왔다. 이에 따라 1951년 7월 10일 개성(開城)에서 첫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이때부터 한국전쟁은 일면 전쟁(面戰爭), 일면 협상(面協)의 새 양상을 띠게 되었고 전선은 현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된 채 전투(戰鬪)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으로 변했다.
강화군 6.25참전용사기념공원에 '강화특공대 의적 불망비'가 서 있고, 뒤에 한반도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구 강화대교 서단 출입구에는 강화 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한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강화특공대의 굳센 업적(毅績)의 평가는 관점에 따라 또 사건에 따라 상반되는 것 같다.
6.25전쟁 유엔참전국 16개국 각국의 참전상황, 병력규모와 피해상황을 소개한 안내판이 양쪽에 8개씩 설치되어 있다.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했다. 영국은 영연방 6개국 군으로 연연방 제1사단을 창설했는데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영국 해군은 미 해군과 함께 동서 해상 작전에 동참했다. 참전부대 : 육·해군, 참전군 : 56,000명, 전사 : 1,078명, 부상 : 2,674명, 실종 : 179명, 포로 : 997명
6.25전쟁 유엔참전국 안내판 뒤쪽은 염하강이며 북쪽 해안에 강화군 위생처리장 건물들이 서 있다.
세계대전 종료 이후 자국 내 공산당과 내전을 치르기도 한 그리스는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그로 인한 양국의 밀접한 우호 관계로 한국 전쟁에 지상군 1개 대대와 수송기 1개 편대를 파병했다. 참전부대 : 육·공군, 참전군 : 4,992명, 전사 : 192명, 부상 : 543명, 실종 : 0명, 포로 : 3명
이 기념비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과 민족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쳐 피로써 조국을 지킨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함께 참전했던 강화도 출신 전우들의 뜻을 모아 이 기념비를 건립하고, 이곳을 6.25 참전용사기념공원으로 지정하여 그 정신과 뜻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이어갈 것입니다.
강화군 6.25참전용사기념비 뒷면에 참전기념비 건립 취지 비문 '흔적'이 새겨져 있다.
마니산 정기 받은/ 조상의 맥박이/ 병인·신미 양요에서/ 구국의 간성으로 승화했고/ 그 숭고한 강화 조상들의/ 얼을 이어받은 후예들이/ 1950.6.25 동족상잔의/ 불길 속으로 꽃다운 젊음을 던져/ 조국을 지켰노라./ 1953.7.27 휴전후/ 고향에 뿌리내린 전우들/ 어느덧 반세기가 훌쩍/ 흘러갔으니 우리 참전세대도/ 어차피 역사의 궤도 위에/ 묻혀 갈 것이 아닌가?/ 더 늦을세라/ 우리들 조국수호의/ 거룩한 애국 혼을/ 길이길이 후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기고자/ 옛 전우들의 뜻을 모아/ 여기 이 참전기념비를 세우다. - 2004. 3. 2 김지근 글씀
6.25참전용사기념공원은 염하강 철책 안 통로를 이용해 조성하였으며, 앞에 한반도 조형물이 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 공산 이념의 대결이라는 냉전 체제 속에서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할 목적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남침을 자행함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두 달도 채 안 되어 낙동강 선까지 남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과 함께 총력전으로 공산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북한의 불법 남침을 응징하기 위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국은 침략군을 격퇴하고 조국과 자유를 수호할 수 있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간의 한국 전쟁은 종전 아닌 휴전의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강화군 6.25참전용사기념공원은 염하강 철책선 통로를 이용하여 조성되었다. 2016년 6월 6일 준공되었다.
부새산 고개를 넘어 용정 산업단지와 강화정 주차장, 강화군 위생처리장, 6.25참전용사기념공원이 해안북로 옆에 자리한다.
염하강 철책 옆 해안북로 보도를 따라 당산 고개를 넘는다. 오른쪽 당산 남쪽에 염주돈대(念珠墩臺)가 있다.
강화읍 용정리에서 갑곶리로 넘어간다. 염하강 철책선은 계속 이어지며 강화대교가 염하강 공중을 가른다.
강화대교 서단에 강화도 관문이 문루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에 강화 만남의 광장이 있다.
이곳이 지난날 갑곶나루였던 것 같다. 앞에 갑곶나루석축로비, 뒤에 진해루, 그 뒤에 강화교가 보인다.
오른쪽에 갑곶나루선착장 석축로비(石築路碑), 왼쪽에 강화 갑곶나루선착장 석축로(石築路) 설명안내판이 있다.
이곳은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사이를 배편으로 연결하던 나루터이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되었다가 조선 세종 원년(1419년) 박신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14년간 공사를 하여 석축로를 완성하였고, 이후 약 500년간 사용되었다. 이후 교통수단의 변화로 1920년경 나루터가 폐쇄되었으며, 1970년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완전히 폐쇄되었다. 정묘호란(1627년) 때 인조가 이곳을 건너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병인양요(1866년)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설명안내판
강화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갑곶 순교성지 표석을 지나 강화외성 진해루로 이어간다.
강화외성 진해루가 염하강 갑곶나루 해안에 복원되어 있다.
강화외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도록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쌓은 성이다. 조선 시대에도 강화도는 국왕의 피난처이자 국방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강화외성을 개축하고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숙종 때는 병자호란(1636)으로 허물어진 성을 돌로 고쳐 쌓았고, 영조 때는 일부 구간을 벽돌로 다시 쌓았다. 문루는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을 의미하는데 강화외성에는 조해루, 복파루, 진해루, 참경루, 공조루, 안해루 등 6개의 문루가 있다. 이 중 진해루는 갑곶나루를 통해 강화도와 내륙을 잇는 주된 관문이었다. 주춧돌만 남은 진해루터를 발굴하고 조사하여 2020년에 성곽의 일부와 함께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염하강 해변에서 조망한다. 새로이 건설된 강화대교가 왼쪽에, 인도교로만 통행되는 강화교가 오른쪽에 있다.
강화대교(江華大橋)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길이 780m, 너비 19.5m로 1993년 8월에 착공하여 1997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극동건설(주)에서 설계하였고 코오롱건설(주)에서 시공하였다. 본 교량의 개통으로 1969년도에 준공되어 사용하던 노후된 기존의 옛 강화대교는 폐쇄되었다. - 두산백과
진해루 뒤에서 인도교로만 사용되는 강화교(江華橋)와 염하강 남쪽에 유유히 떠있는 새우잡이 배들을 살핀다.
구 강화대교는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甲串里)와 경기 김포시 월곶면(月串面) 포내리(浦內里)를 잇는 다리이다. 길이 694m, 너비 10m(차도 2차선 7m, 보도 3m). 1965년 7월 착공하여 1969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 전남 완도교에 이어 3번째이다. 1997년 신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어 이용할 수 없다. - 두산백과
오른쪽에 통제영학당옛터비(江華統制醫學堂址碑), 왼쪽에 강화 통제영학당지(江華統制醫學堂址) 설명안내판이 있고, 뒤쪽에 우물이 있는데 현재는 사용할 수 없다.
통제영학당 옛터 : <개화>와 <쇄국>의 혼란스런 시대 상황을 겪으며 오로지 조국의 바다를 지킬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이 이 텅에 뿌리내렸다. 바야흐로 빛나는 대한민국해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여기 표지석을 세운다. 2009년 4월 13일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강화 통제영학당지(江華統制醫學堂址) :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년(1893)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 사관학교이다. 고종은 서양 함선인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이 잦아지자 해양 방어의 일환으로 군함을 건조하고 구입하려 했다. 그러나 인재와 기술의 부족, 재정 궁핍, 청나라와 일본의 방해 등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영국 장교들이 교관으로 부임하여 교육하였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민 등의 영향으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후 1896년 5월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자 폐교되었으며 학교 건물은 소실되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옛 우물터에서 갑곶나루를 조망한다. 염하강 건너편 김포반도에 문수산이 솟아 있고, 강화대교가 염하강 공중을 가른다. 염하강 갑곶나루에 강회외성 진해루가 갑곶 관문처럼 서 있고, 앞에는 강화 통제영학당지(江華統制醫學堂址)가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을 표현한 기독교의 조형물 '십자고상(十字苦像, crucifix)'이 강화 통제영학당지(江華統制醫學堂址) 위쪽에 세워져 있다. 갑곶나루에서 갑곶 순교성지로 가는 통행로를 조성하는 공사를 천주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다.
평화의 길은 강화교로 이어지는데, 천주교회에서 갑곶 순교성지로 이어지는 통행로와 야외마당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공사 중인 천주교 야외마당에 예수성심상이 서 있다. 평화의 길은 위쪽 나무계단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간다.
예수성심상 옆에서 조성 중인 야외마당 공사장을 뒤돌아보았다. 오른쪽 공중에 강화교가 있다.
야외마당의 예수성심상을 거쳐 나무계단을 올라오면 전망대이다. 이곳에서 강화교로 내려가지 않고 순교성지로 올라가 본다.
전망대를 올라오면 순교성지 입구에 박순집의 묘와 '십자고상(十字苦像, crucifix)'이 있다. 박순집은 순교자는 아니지만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인물이라고 하여, 2001년 9월에 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 : 박순집(朴順集)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朴)바오로와 김(金)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부친 박 바오로는 이들인 박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이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張) 외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장하였다. 그 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안전한 곳에 안장하는 등, 순교자들의 시신들을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순교 역사의 증거자가 된다. 그로 인해 밝혀진 순교자의 행적은 150명이 넘어, 그 순교자들의 유해를 우리가 직접 보고 조배를 드릴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하셨다. 그후 인천교구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 설명안내판
박순집의 묘에서 올라오면 순교자 삼위비가 있는 광장이 나온다. 건너편 정면에 갑곶쉼터, 그 왼쪽에 기념성당 사무실이 있다. 이곳은 강화외성 제물진(濟物鎭)이 있었던 터인데, 천주교인천교구에서 터를 매입한 후 1999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했다고 한다.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 순교자 삼위비 앞에 기도문이 적혀 있다. 비종교인은 그냥 살펴볼 뿐이다.
늘 품어 안아주시는 주님, 갈 길을 찾으러 온 저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주소서./ 목적지가 아니라, 길이라 하신 말씀을 따라 제 시선을 결과에서 과정으로 돌리게 해주소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3위가 걸어갔던 순교의 여정이 주님께 맡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길이었듯이 제가 붙잡고자 했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두고 가게 해주소서. 맡기고 나서 생기는 미련마저도 이곳에 남겨두고 가게 해주소서./ 주님께 맡겨둔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그것이 끝이 아니라 소중한 과정임을 믿게 해주시고, 속단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소서. 또한, 그것이 주님께서 저희에게 마련해주시는 최선의 길임을 받아들이게 해주소서./ 느낌표를 원했던 저희를 꾸짖어주시고, 물음표의 십자가를 지고, 안고 가게 해주소서. 아니, 또 생기게 될 물음표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지혜를 갖게 해주소서./ 고요한 곳에 오면 더더욱 커지는 제 안의 소란함을 죽여주시고, 이곳 순교자들처럼 침묵하게 해 주소서./ 마침내 이 순례를 통하여, 저희의 영역에 주님을 모시려 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당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순교자들의 모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세 번) - 인천교구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인준
1871년 신미양요(申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갑곶진에서 처형 당한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 순교자를 모신 순교자 삼위비가 있으며 그 앞에 기도문 안내판이 붙어 있다.
주님, 제가 방금 켠 이 초가 빛이 되어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제 앞을 밝게 비춰주기를 바라옵니다./ 이 초가 불이 되어 주께서 제 안의 이기주의, 오만함, 그리고 불순함을 태워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초가 불꽃이 되어 주께서 제 영혼을 뜨겁게 해주시고,/ 저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저는 주님의 교회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지만, 이 초를 놓아두면서 저 자신도 조금 놓아둡니다./ 그러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제가 좀 더 오래 기도할 수 있겠지요. 아멘. - 피레네 산맥 어느 작은 교회의 담벼락에 적혀 있는 기도
갑곶 순교성지 삼위비를 살피고 박순집 묘 옆을 내려간다. 오른쪽 길은 강화교 내려가는 길, 그 왼쪽에 전망대가 있다.
구 강화대교(강화교) 서단 출입구로 이어가는데, 잠시 오른쪽으로 가 갑곶돈대를 살핀다.
이곳에서는 갑곶돈대로 출입할 수 없어 층층대에서 갑곶돈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앞의 건물 뒤에 이섭정이 보인다.
강화도는 5진(鎭), 7보(堡), 8포대(砲臺), 54돈대(墩臺)를 설치해 톱니바퀴처럼 섬 전체를 감싸며 방어했다. ‘진’이란 지방군의 지휘부가 주둔한 진영이고,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크고 작은 방어시설물을 말한다. 그 돈대를 지휘하는 곳이 ‘진’과 ‘보’였다. 명칭에 따라 주둔하는 군사의 숫자가 다른데 ‘진’은 지금으로 치면 대대급의 병력이, ‘보’는 중대병력이 머물렀던 곳이고 ‘돈대’는 소대급 병력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보면 된다. 사적 갑곶돈대는 숙종 5년(1679년)에 완성된 54돈대 중 하나로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쳐들어온 곳이다. 강화도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던 갑곶돈대 안에는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는 강화비석군과 400년 된 갑곶리 탱자나무 그리고 강화도를 포위하고 있던 몽골과의 협상을 했던 이섭정(利涉亭)이 있다. ‘이로울 이(利), 물 건널 섭(涉)’자를 써서 이섭정이라 지었는데 이름 그대로 여기에서 협상이 잘 이루어졌다. 고려왕과 신하들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 돌보지 않아 무너진 갑곶돈대(甲串墩臺)를 태조 7년(1398년)에 다시 세웠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1976년 강화역사 유적지 복원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인천 보물섬에서 놀자
왼쪽에 평화의 길 종합안내도, 그 오른쪽에 갑곳 선착장 집단양민 학살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6.25참전용사 기념공원에는 강화특공대의 굳센 업적(毅績)을 기리는 江華特攻隊 毅績不忘碑(강화특공대 의적불망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는 강화 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한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어떻게 처방해야 할까?
이곳 구 대교 밑(옛 선착장 자리)는 1951년 1.4후퇴 당시 강화 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부역자의 가족, 칠십세가 넘은 할머니, 집에서 살림만 하던 부녀자, 1살 먹은 아기 등, 아무 죄도 없는 억울한 인명을 아무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참하게 살상한 장소이다. 男 45명, 부녀자 약 15명이고, 시일은 1951년 1월 6일에서 8일까지라고 한다. 그후에 각 해안에서 희생자 수는 약 3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강화 양민 학살 희생자 유족회
강화교(구 강화대교) 서단 남측의 교명주에 '강화교'라고 적혀 있다. 구 강화대교가 아니라 강화교이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의 강화해협(염하강) 남쪽을 조망한다. 새우잡이 배들이 떠있고 오른쪽 아래 동락천이 바다로 흘러든다.
동락천(東洛川)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서 발원하여 강화읍 갑곶리에서 강화해협으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강화읍 관청리 강화문화원 부근에서 하구 인근까지 3.35 km는 지방하천으로 관리되고 있다. 고려산에서 국화저수지까지는 고비천으로 불리고, 국화저수지에서 강화읍내를 관통하는 구간까지는 국화천(菊花川)으로 불린다. 고비천은 1.772 km 구간이, 국화천은 2.0 km 구간이 강화군의 소하천으로 관리되고 있다. 강화산성 내성의 강화석수문이 이 하천에 대한 수문이다. - 위키백과
강화교에서 왼쪽 갑곶돈대의 이섭정을 돌아본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이다. 최초로 건축된 것은 1398년(태조 7년) 강화 부사 이성(李晟)이 세웠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골과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강화도 관문의 팔각정이다. 이섭정은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진지 오래되어 1398년(태조 7년) 강화 부사 이성이 현 자리에 복원하였으나 다시 무너졌고 1976년 국난극복의 역사 전적지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곳에 오르면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염하강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 대한민국구석구석
강화교는 강화대교가 완공된 1997년부터 통행이 금지된 채 방치되다가 2014년 안전 진단을 거쳐 사람&자전거 전용 통행로로 재개통되었다. 다리 양쪽에 김포에서 강화로 공급하는 도시가스관과 한강물 농업용수관이 설치되어 있다. 염하강 건너 왼쪽의 문수산성이 그 왼쪽 뒤 문수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강화교를 건너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강화교 동단을 넘는다. 동단 북쪽의 예전 경비초소는 전망대로 바뀌었다.
강화교 동단의 남쪽 구조물은 평화의 길 조형물로 탈바꿈하였다.
강화교 동단에서 강화교를 뒤돌아본다. 지난 시절 김포와 강화를 연결하는 자동차 통행 다리였으나 이제는 강화대교에 그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인도와 자전거도로로 이용된다.
예전의 경비초소는 평화의길 전망대로 탈바꿈하여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DMZ 평화의 길"은 남북평화 촉진과 접경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DMZ 인근 뛰어난 생태, 문화, 역사자원을 기반으로 인천시 강화군에서 강원 고성군까지 총 526km 구간에 이르는 세계적인 명품 도보여행길이다. 강화 평화전망대를 시작으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의 총 36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코스구성은 상시주노선, 예약주노선, 테마노선으로 구분되어 운영되고 있다.
평화의 길 2코스(8km/3시간 30분 소요) 현위치 문수산성 남문. 홍예문, 조강리 게스트하우스, 조강저수지, 애기봉 입구 : 초반이 가파른 산길로 구성되어 다소 어렵지만 조선 숙종 때부터 자리를 지켜온 문수산성의 성벽을 따라가며 조강과 김포, 강화까지의 풍경을 한눈에 담아 갈 수 있는 길이다. 문수산성 홍예문을 통과하여 내려와 고막리와 조강리의 고즈넉한 마을 길을 걷다가 작은 언덕 숲길을 지나면 북한을 강 건너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애기봉의 초입에 발길이 닿는다. 조강리에는 잠시 쉬거나 하룻밤 머무를 수 있는 평화의 길 거점센터도 있어 힘들었던 산길에서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
평화의길 BI(브랜드정체성) "평화와 생태의 길, DMZ 평화의 길" : 나란히 연결된 DMZ로고와 그 안을 관통하고 있는 길과 비둘기 조형이 어우러진 워드마크는 평화전망대에서 통일전망대에 이르기까지 평화와 통일을 잇는 길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DMZ 평화의길'의 지향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린계열 컬러를 투톤으로 조합한 DMZ워드마크는 생태환경의 보고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DMZ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의 길 로고는 브라운 컬러를 활용하여 걷고,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힐링을 주는 길의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평화의길 전망대로 올라와 염하강 북쪽을 조망한다. 강화대교 건너편 중앙의 망산(만수산)에 염주돈대가 있으며, 왼쪽 건너편에 갑곶나루와 강화외성 진해루가 보인다.
왼쪽 강화교 건너 왼쪽에 동락천과 갑곶돈대, 오른쪽 강화대교, 그 아래의 갑곶나루와 강화외성 진해루가 보이며, 왼쪽맨 뒤에 고려산이 보인다.
염하강에 새우잡이 배들이 유유한 곳은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더러미포구인 듯. 왼쪽 위에 김포시 포내천이 염하강에 유입한다.
포내천(浦內川)은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옹정리에서 발원하여 월곶면 포내리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하천연장은 8.05km, 유로연장 10.25km, 유역면적 22.41㎢이다. 하천변으로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다. - 두산백과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지역을 살핀다.
월곶면(月串面)은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면(面) 단위 행정구역으로, 군하리(郡下里), 고막리(古幕里), 갈산리(葛山里), 고양리(高陽里), 포내리(浦內里), 성동리(城東里), 보구곶리(甫口串里), 용강리(龍康里), 조강리(祖江里), 개곡리(開谷里) 등 10개의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사무소는 군하리에 소재한다. 한강하구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한강 너머로 북한의 개풍군, 동쪽으로는 하성면·통진읍, 남쪽으로는 대곶면, 서쪽으로는 강화해협(염하강)과 접하며 강화대교를 통해 강화도와 연결된다. 성동리에는 김포에서 가장 높은 산인 문수산(376m)이 있으며 문수산 주변으로 김포 문수산성을 비롯하여 문수산산림욕장이 위치한다. 문수산성은 1694년(조선 숙종 20)에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중요한 산성으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조강리의 한강변에 있는 애기봉(154m)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154 고지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의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조강전망대에서는 북한 지역을 최단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고막리에는 통일을 테마로 조성된 김포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포내리에는 해변에 위치한 김포씨사이드골프장이 있다. 월곶면은 농경을 위주로 하는 농촌마을이며, 고양리에는 김포상마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어 공업지역이 분포한다. - 두산백과
중앙 산기슭에 문수산성 남문이 보이며 성곽이 능선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전망대를 올려본다. 왼쪽의 군시설물은 화장실 등으로 변경되었고, 초소는 전망대로 탈바꿈하였다.
평화의길은 왼쪽 문수산성 남문 방향으로 이어간다.
김포시 소상공인 협동조합 나루팜 건물이 오른쪽에 있다.
석재업체&석재조각상 제작업체인 돌멘코리아 앞을 거쳐 강화대교 아래를 통과한다.
강화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꺾어 문수산성 남문으로 이어간다.
평화의길은 문수산성 남문 출입구에서 문수산로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문수산로는 포내리 김포대로 성동마을 입구 교차로에서 성동리 성동마을, 산성마을, 문수산 산림욕장으로 이어진다.
문수산성 남문 출입구에 경기둘레길 2코스 안내도와 이정목, 평화누리길 이정목과 문수산성 설명안내판, 평화의길 이정목 등이 세워져 있다.
문수산성 남문 출입구에 설치된 경기둘레길 2코스 안내도와 문수산성 설명안내판을 살핀 뒤 남문으로 올라간다.
1694년(숙종 20년)에 축성된 문수산성은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다. 명칭은 신라 혜공왕(재위 765~ 780) 때 산 정상에 창건된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에서 유래됐으며 1964년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軍)과 일대 격전을 벌이면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었다. 해안 쪽 성벽은 없어지고 마을이 들어섰으며,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았으나 남문과 북문이 복원되었고, 총 6km에 이르는 산성 중 4km가 남아 있다. 또한 문수산 산림욕장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 홍예문을 거쳐 정상에 오르면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 때 창건된 문수사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풍담대사부도 및 비를 만날 수 있다.
문수산성 남문 희우루가 복원되어 있다. 기쁜 비 곧 단비가 내리는 누각, 희우루(喜雨樓)가 웅장하다.
김포 문수산성 설명안내판을 대충 살핀 뒤 남문 안으로 들어가 문루로 올라간다.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文殊山)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 산줄기를 따라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감싸 안고 해안지대로 이어지는 산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쌓았으며 처음에는 둘레 2,400m, 성가퀴 2,173곳, 성문 3곳이 있었다. 이후 순조 12년(1812)에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성벽은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단단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낮은 담인 성가퀴를 둘렀다. 성문은 공해루(控海樓), 희우루(喜雨樓) 등 문루 셋과 작은 출입문인 동문(東門), 아문(亞門)이 셋 있었는데 공해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어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하게 격전을 치른 곳으로, 이 싸움에서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었다. 총 길이가 6,123m인 성곽의 남은 구간은 4,640m이고 없어진 구간은 1,483m이다.
부새산과 당산, 염주돈대, 강화군위생처리장, 강화대교와 만남의광장, 갑곶나루와 진해루를 조망한다.
강화의 관문 강화대교와 강화교가 염하강 위를 가르고, 갑곶나루와 갑곶돈대가 염하강 서쪽 해안에 보인다. 뒤쪽에 왼쪽의 혈구산과 중앙의 고려산이 가늠된다.
염하강 건너 중앙에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더러미포구, 맨 오른쪽에 혈구산이 가늠된다.
문수산성 남문 희우루(喜雨樓)에 올라서 강화해협 염하강과 강화도 지역을 조망하고 내려왔다.
평화의길 1코스는 문수산성 남문에 오르지 않고 문수산로를 따라 앞에 보이는 성동마을 입구 삼거리로 나온다. 남문을 오르고 내려와 문수산 수목장 앞에서 평화의길과 재회한다.
평화의길 1코스 종점이며 2코스 시작 지점이 김포대로 성동검문소 버스정류소 뒤쪽에 있다.
평화의길 2코스, 평화누리길 2코스, 경기둘레길 2코스 시작지점에 문주와 안내판, 종합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1.문수산성남문 1.8km 홍예문 3.0km 조강리다목적회관 0.7km 조강저수지 2,5km 애기봉입구
2.평화누리길2코스 (8km, 3시간 10분 소요) : 북한과 가장 인접한 코스로 문수산성 성곽길을 오르면 북한지역을 관찰할 수 있다. 조강 철책을 따라 평화통일을 생각하며 걷는 길이다.
평화의길 시작지점 이정목에 QR코드 표지판이 붙어 있으며, 그 옆에 평화누리길 2코스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DMZ 평화의길 2코스는 평화누리길 2코스와 경기둘레길 2코스와 동행한다.
문수산 : 한남정맥의 최북서쪽에 위치한 문수산은 해발고도는 376m로 아기자기한 등산의 맛을 주며 사계절 경치가 아름다워 김포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정상에 오르면 산 아래에 염하강과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맑은 날 강 건너엔 손에 닿을 듯 북한 개성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어 산행과 더불어 다른 신에서 볼 수 없는 산수의 어울림과 분단 역사의 현장에서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문수산에는 조선 19대 숙종 20년(1694)에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고 강화도 방어를 위해 쌓은 문수산성이 있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옛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며 신에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초입에는 산림욕장이 조성되어 있어 피톤치드와 음이온 등을 마시며 가벼운 휴식과 산책하기에도 제격이다.
평화의 길 1코스 탐방을 마친 뒤 성동 군경합동검문소 위쪽의 문수상가로 올라간다.
문수농원 표석 오른쪽에 문수농원 농원주 유지명씨가 1981년 주택 준공 기념으로 쓴 '문수농원' 시비가 서 있다.
서해로 굽이 지는/ 한강수 내려 보며/ 기름진 김포들을/ 수천년 지켜온/ 문수산 기슭에/ 아늑히 자리한/ 우리들의 낙원/ 문수농원/ 산마루에는 그 옛날/ 활과 창이 나르던/ 호극의 자취 문수산성/ 그 밑에 청룡 백호가/ 지켜주는 우리들의 안식처/ 문수농원/ 앞 들에는 신록과 단풍이/ 철마다 아름답고/ 멀리 들판에는 가을마다/ 황금 물결이 이루어진다네/ 들판 넘어 바다에는/ 고기잡이배 둥실 떠 있고/ 바다 건너엔 그림 속의 마을과 산/ 산 위에 구름이 둥실 떠갈 때/ 자연의 낭만을 즐기며 일하고/ 서산에 태양이/ 황홀한 황혼 속에 사라질 때/ 창조의 은혜 깊이 감사하며 안식하리라
문수상가 GS25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길동무들과 환담한 뒤 도보여행 안내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강화대교 직전의 김포대로 성동마을 입구 삼거리 남쪽에 도보여행 안내버스가 기다린다. 오른쪽에 2코스 시작점이 보인다.
김포대로 성동마을 입구 삼거리 북쪽에 평화누리길 2코스 문주와 DMZ 평화의 길 2코스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