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중학(中學)과 고보(高普)
일제강점기 중등교육과정에 중학(中學)과 고보(高普) 둘이 있었다.
이중 중학은 대개 일본인들이 다녔고, 졸업하면 일본 본토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공립 경성중(일본인 전용)은 해방과 함께 사라졌다(그 자리인 경희궁 자리에 조선인학교인 서울고가 세워졌다).
고보는 조선인들이 다녔는데, 1922년 2차 조선교육령 이후 5년으로 동일한 학제가 되었다.
고보는 관립과 사립이 있었다. 관립고보(관립중등교육기관)로서
서울에는 경성1고보 (지금의 경기고), 경성2고보 (지금의 경복고)
평양에는 평양중학(일본인, 평양1중), 평양고보(평양2중) (북한 정권 수립후 모두 사라짐)
대구에는 대구중학(일본인, 현 대구중), 대구고보(현 경북고)
조선에서 관립고보인 경성고보, 평양고보, 대구고보는 설립순서대로 백선을 하나씩 더해서 교표(교모)를 만들었다
첫번째 설립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1900년 설립, 한성고등학교 후신) 제1고보(현 경기고), 백선 1개
두번째 설립 평양고보(1909년 설립), 백선 2개
세번째 설립 대구고보(1916년 설립), 백선 3개
* 경성내 제2교보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1921년 설립, 현 경복고)도
백선 2개인데 평양고보 교표인 백선2개와는 백선의 두께로 차별화함)
* 광주공립고보(1920년 설립, 1954년 광주제일고등학교로개편)
일본인이 주로 다녔던 학교들
경성중학교는 '서울중고'로 새로출발; 용산중학교는 '용산중고'로 새로출발
경성제1고보는 경기중고; 경성제2고보느 경복중고로 개명
경성 제1공립고등여학교는 '서울여고'로 남으려했으나 폐교
그 자리를 조선인 학교였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가 들어섬
경성 제2공립고등여학교는 수도여고,
경성 제3공립고등여학교는 창덕여고로 개명
당시 서울에는 공립고등보통학교가 두 군데 있었다
제1고보(현 경기고)와 제2고보(현 경복고)이었다.
사립고보중에서
중앙고보에는 호남, 황해도, 평남지역의 학생이,
휘문에는 서울, 경기, 영남, 충청지역,
양정에는 서울, 경기, 충청지역,
보성에는 함경도, 영남북의 영세학생들이 주축을 이루는 형세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는 현재 조계사가 자리하고 있는 종로구에 있었으며 다른 사립고보에 비해 시설이나 재정이 가난한 수준이었으나 교사들과 학생들의 교육열은 어느 학교에서도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목조 2층 본관 교사와 운동장이 있었으나 정구코트 2개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내가 편입학하고 3개월가량 지나 불교계의 지원으로 혜화동 언덕에 신교사를 짓고 이사를 했지만 다른 학교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老 의학자가 회고하는 근대 한국의학 뒤안길 전종휘(3) - 나의 이야기, 메디칼업저버, 2003.07.21).
기독교계 고보에는 감리계열인 배재고, 장로계열인 경신고가 있었다.
<참고> 개교 100년 경기고 신화 -신동아– 동아일보 2006.9.19
1909년 평양에는 ‘관립평양고등학교’(그후 평양고보→평양2중이 됐다가 6·25전쟁 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가 개교했다. 그런데 평양고는 같은 관립인데도 4년제가 아니라 3년제 학교로 출범하였다. 1916년 대구에서는 ‘관립대구고등학교’(경북고의 전신)가 개교하였다. 여기서 잠시 ‘경기고’와 ‘평양고’ 대구의 ‘경북고’ 그리고 경기고가 제1고보로 불릴 때 제2고보로 출범한 서울의 ‘경복고’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자. 일본에서는 관립 고등학교를 만들 때부터 설립 순서대로 1고·2고·3고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우리는 관립 고등학교를 한성-평양-대구 등의 지명으로 구분하다가, 나중에 1고보(경기고)와 2고보(경복고)를 붙이는 바람에 혼선이 생겼다.
이 4개교 중에서 ‘제1고’가 경기고라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경기고는 교모에 ‘제1’을 뜻하는 백선(白線) 하나를 둘렀다. 두 번째로 생겨난 평양고는 가는 백선 두 개를 둘러 ‘2고’임을 내세웠고, 세 번째인 대구의 경북고는 가는 백선 3개로 ‘3고’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생긴 순서로는 뒤지지만 ‘2고보’란 호칭을 받았던 서울의 경복고는 아래에는 굵은 백선, 위에는 가는 백선을 친 교모를 써, 이름만은 명실상부하게 ‘제2고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