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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知識의 탐구, 신비神秘의 타파 >
이 글은
권영두, 팔십노옹이 들려주는 참선수행 체험기,『생활 속의 참선수행 이야기 (운주사) 』
「전원 조영준 도반」에 실린 글이다.
지식知識의 탐구, 신비神秘의 타파
사람들은 누구나 초능력 등 신비한 것에 끌린다. 필자도 마찬가지로 고등하교 시절 초월명상 등 명상법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고, 실버 마인드 컨트롤 강습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불교 반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조계사 불교학생회모임에도 나갔었는데, 지금도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학생이 그런 허망한 것에 관심을 가져서 되겠느냐!”는 준엄한 질책과 함께 구구절절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명해 주시던 한 스님의 법문을 기억하고 있다.1 육환장을 집고 서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법문을 하던 스님의 단호한 모습과 구도자의 카리스마에 경외감을 느꼈다. 속세를 떠나 깊은 산중에 홀로 수행하는 삶, 모든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그리고 무엇이든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도인의 풍모를 향한 동경이 있었다.
학창 시절
대학은 필자에게 그저 젊음을 만끽하던 해방구였던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문학과 영화, 음악 등에 빠져 들었다. 문학 동아리 모임에 나가 작가를 만나고, 일요일에는 모든 영화관과 극장을 순례하였으며, 작가가 되겠다고 밤새워 시, 소설을 썼다. 또 대학 방송국에 들어가서는 전공공부는 제쳐두고 방송원고와 씨름하였으며, 방송극을 기획하고 공연하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게 된 동기도 상당부분 학문을 추구한다는데 있었다기보다는 좋아하던 영화나 음악의 본고장에 가 본다는 데 의미가 있었고, 그런 문화를 일구어 낸 사회는 어떨까라는 호기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영화로 제작되었던 안정효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2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는 최루탄 연기 속을 뛰어다니며 데모를 하고, 학교는 휴교를 반복하였으며, 몇 달씩 학교에 가지 못했다.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가 삐라를 뿌리고 옥상에서 몸을 던지던 혼란한 시기였다.3 필자는 탄압받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궁금증과 어쭙잖은 지성인으로써의 사명감으로, 졸업을 늦추면서까지 전공과는 무관한 사회학, 심리학, 국문학, 영화학 등 과목들을 섭력하였다. 그래서 화학을 전공하고 물리를 부전공하였지만, 사회학과를 지원하게 되었고, 아이오와 대학 사회학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생으로 부딪힌 미국은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에 있어서는 필자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는 상상 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졌다. 필자가 자라온 사회와는 그 근본부터가 달랐고, 학문이란 필자가 꿈꾸던 지식인으로서의 환상이 아니고 그냥 현실이었다. 거기에는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회학을 공부 하러 온 선배들이 몇 있었지만, 경제적인 곤란과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 때 가졌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은, 통계와 씨름하는 수리사회학이 대세인 미국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다시 화학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공계인 화학과는 그 곳 학생에게 더 인기 학과였고, 장학금도 많아 경제적인 문제도 쉽게 해결 할 수 있었다.
유학 생활
필자는 당시 새롭게 각광 받던 레이저에 대한 연구로 아이오와 대학에서 물리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시절 열악했던 컴퓨터만 보다 마주친 진보된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 미주리 대학에서 「컴퓨터 모델링을 통한 카오스적 분자운동」연구로 이론물리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라는 데도 있었고 이론분야는 유럽이 강세여서 유럽으로 박사후 과정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박사과정 중에 있던 아내 때문에, 그 분야에 석학이 있던 미시간 웨인 주립대를 선택, 그곳에서 생물학 관련 분자모델링 연구를 하게 되었다.
아내의 졸업을 기다리며 5년을 보내고, 필자는 한 제약회사 연구소 초청으로 신약 개발팀에 합류하게 되어 94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한국의 실정은 열악했다. 내 연구 자료를 보내려고 이메일 주소를 물었더니,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컴퓨터 분야는 전무한 상태였고, 연구를 위한 인프라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상상했던 미국의 제약회사하고는 너무나 달랐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국내 신약 1호를 꿈꾸며 개발 중이던 항생 물질에 대한 컴퓨터 모델링과 신물질에 대한 해외 제약회사 투자유치 관련 업무, 그리고 연구소 컴퓨터 및 인터넷 환경 조성에 관한 일들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유학중일 때 한국에서는『단丹』4 이란 소설이 한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필자는 그 책을 읽고 학창시절 가졌던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여, 단학이나 선도仙道수련 관련 책들을 공수空輸해서 독자적으로 수련을 하였다. 지도자 없이 시작한 그 수련이 길게 가지는 못했지만, 선도 수련이 주는 효과는 충분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최인호의『길 없는 길』이란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구도의 길을 가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연구원으로 있던 디트로이트에는 무문사라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에 나가 예불도 보고 참선수행도 하였다. 당시 그곳을 방문한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스님이 붓글씨를 써주시겠다고 하시며, “어떤 글을 원하느냐?”는 물음에 서슴없이 “이 생에 견성 성불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스님은 반색을 하며 나에게 ‘차생성불此生成佛’이란 휘호를 써주셨다. 지금도 걸어두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때는 거기 도반들과 윤청광 극본의 「고승열전」이나 조계사 수선회修禪會에서 나온 숭산(崇山, 1927~2004), 혜암(惠菴, 1884~1985), 근일勤日 스님5 등 스님들의 법문 녹음테이프를 길잡이 삼아 참선 수행을 하였다.
답사 여행
미국에서 연구에만 파묻혀 살던 필자에게, 한국은 마냥 넓고 신기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킨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부터 시작된 필자의 답사여행은 15권에 달하는『답사여행의 길잡이』6 를 모두 다 섭렵하였고, 이와 관련된 민속, 지리 등 책자를 들고 우리 땅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문화유산을 찾아 전국을 누빈 결과 그때 까지는 생소하였던 「폐사지 답사기」를 의학 잡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또, 항상 마음에 그리던 『길 없는 길』에 등장하는 사찰들을 비롯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과 암자들을 둘러보았으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성리학과는 달리 천대 받던 민중의 학문 명리학도 체계적으로 배웠고,7 그동안 신비하게만 느껴지던 풍수지리를 강습회와 답사모임을 쫓아다니며 발로 뛰며 독파하였다.8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 끈이 중국역사에 닿게 되는데, 이는 또 중국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통해 세계로 연결된다. 고구려 답사를 위해 중국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후로, 우리 문화유산만이 우수하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여러 나라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을 다시 가게 되었고, 몽골로, 인도로, 일본으로 동남아로 문명의 조각들을 모으고 재구성하며 각 나라 문화와 문명교류에 대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선도회와의 만남9
미국에서 선도仙道 수련과 참선수행을 했던 필자에게, 한국은 길거리에서 조차 도를 만나는, 이른바 도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체계적인 호흡 수련을 위해 국선도를 시작하여 지금도 매일 수련을 하고 있고, 연구소에 온 조선족으로부터 법륜공法輪功10을 배워 연수원에서 신입사원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선무도禪武道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골굴사骨窟寺에 가서 수련하는 등 수행 단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참선수행을 체계적으로 하기위해서 조계사 수선회에도 가 보았다. 그러던 차, 필자에게는 대학 동문이기도 한 박영재 교수님의 『두문을 동시에 투과하다』라는 책을 아내를 통해 전해 받았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주욱 읽어 보고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무릎을 쳤다.
그때까지 모든 수련은 수행과는 거리가 있는 사고파는 상품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스님들은 너무 권위적이고 고답적인 데다, 엄격해 보이는 예절과 불교의식에만 치중하는 것 같아 내켜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선도회는 절차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간화선 수행에만 열중할 수 있는 간화선 재가자 수행 단체였다. 일상에 틈을 내 수행하고 일정한 시간 방문하여 그 동안 참구한 화두경계를 점검 받는 재가자에게는 안성맞춤의 수행단체였다. 지방에 있던 나는 화요일 새벽 두 시간 정도 차를 달려 서강대로 가 입실을 시작하였고, 주말 부부였던 나는 방해 받지 않고 하루 서너 시간씩 참선 수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달여로 끝나게 되는데, 박영재 교수님이 교환 교수로 독일에 가시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법사님께 점검 받을 수도 있었으나 인연이 그것뿐이었는지, 무려 5년 동안 입실을 하지 못하였고, 국선도를 수련하면서 입실점검 없이 화두를 들곤 하였다. 항상 마음속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의 경계를 참구하던 어느 날, 이메일을 통해 점검 받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바로 박영재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이메일을 통한 점검’을 문의하였다. 그런데 박영재 교수님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입실지도를 하고 계셨고, 필자도 2003년부터 이메일을 통한 전자입실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을 더 참구하고서야 선도회 두 번째 화두인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을 타파 할 수 있었다. 그 화두를 풀고는 “겨우 이거였나!” 하며 허탈해 하였지만, 간화선 수행이 어떤 것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무심히 그 화두를 ‘염’하는 것을 보면 필자에게는 항상 같이하는 그림자 같은 화두다.
선도회 인가
도道라고 하면 뜻 모를 권위와 엄격한 의식 그리고 법이니 진리니 하는 형이상학적 중압감이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그런 도에 대한 신비감, 법에 대한 권위 의식을 타파하고 선의 일상화를 실현하신 분이 박영재 법사님이시다. 조선시대를 겪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진 임제종 간화선법을, 일제 강점기 일본 화산대의華山大義 선사로부터 이어 받으시고, 한국으로 와 선의 씨를 뿌리신 분이 종달 이희익 노사님이시다. 그리고 그 법을 현대식으로 체계화하고 널리 펴신 분이 법경 법사님이시다.
화려함이나 과시를 멀리하고, 묵묵히 맡으신 일만을 무심히 하시는 그를 통해, 필자는 구도자에 대한, 도인에 대한 필자의 선입견을 많이 수정하였다. 이 시대를 사는 미래의 수행자의 모습이랄까? 이는 선도회 무문관 과정을 마친 이에게 주는 법사 인가장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무문관을 끝내시고 꾸준히 정진해 오셨기에 선도회 법사로써 후학들의 입실 지도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필자는 법사님의 따뜻한 지도를 받으며 전자입실을 시작한지 5년, 2007년 선도회 간화선수행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나의 법사호 전원電元은 전자입실(電)로 무문관 과정을 통과한 첫 번째(元)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최진규가 쓴 『우리 비경 답사기』에는 경북 상주 용유담 근처 너럭바위에 쓰여 있는 동천洞天이라는 글씨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개운당 스님이라는 분이 주먹으로 썼다는 이 글씨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도 수련을 통해 주먹으로 글씨를 써봐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지금은 없다. 이 세상 누구도 쓸 수 없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어릴 때부터 가졌던 신비에 대한 동경 또한 더불어 폐기하였다. 신비는 단지 모른다는 것이고 알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한 책과 글
1) 이야기는 대강 이랬다. 일제 강점기, 한 순사가 스님을 찾아온다. 그 순사는 칼을 뽑아 스님의 목에 갖다 대고는 “스님이 도가 깊다고 하던데,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짚신을 삼고 있던 스님은 못 들은 척, 하던 일만 계속하였다. 스님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순사는 칼을 높이 드는데, 이 순간 스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순사는 저 놈 잡으라고 스님 뒤를 쫒아갔는데, 산으로 도망가던 스님이 벼랑 끝에 다다라 순사에게 잡히고 말았다. 순사는 칼을 들이대며 “네 이놈! 오늘이 네 마지막인 줄 알아라!”하며 칼로 내리치려고 하자, 그때 스님 왈, “이곳이 지옥이니라.” 이 말에 깜짝 놀란 순사는 칼을 내려놓으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사죄하고 절을 하니, 그때 스님 이 하는 말, “이곳이 바로 천국이니라.” 두 마리 토끼를 단번에 잡았다. (산방한담 山房閑談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참조)
2) 1994년 제작된 정지영 감독 작품. 고전영화 <황야의 7인>, <초원의 빛>, <미드나잇 카우보이> 등에 열광했던 교복세대 영화광들이 영화를 통해 겪는 에피소드와 이들이 자라 감독이 되고 시나리오작가가 된다는 이야기. 독고영재, 최민수, 김정현, 홍경인, 신혜수 출연. (제작노트에서 인용)
3) 서강대 무역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 열사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며칠 후인 5월30일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투신하였다. 필자와는 한 동아리에서 잠시 같이 활동하였다. ‘5분 스피치’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김의기 열사 순서가 되자, 연단에 나가더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라고 하고 5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그냥 내려 왔다.
4) 김정빈 지음, 丹學仙人 봉우 권태훈 옹과 선도仙道수련에 대한 책.
5) 근일 스님의 법호는 현봉玄峰. 1960년 은해사에서 사미계를, 1967년 해인사에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극락선원, 해인사 해인총림, 묘관음사 길상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고, 영천 묘각사에서 10년간 보림했다. 고운사, 부석사 주지, 9~12대 종회의원, 재심 호계위원, 능인중고등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고운사, 부석사, 삼보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6)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1~15』 돌베개.
7) 조용헌 교수는 그의 책에서 명리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풀이하였다.
태극도에서 파생한 두 아들이 성리학과 명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성리학은 인간 성품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고 명리학은 사람의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나 같은 부모 밑의 두 아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성리학은 체제를 유지하는 학문이 되었고, 명리학은 체제에 저항하는 반체제의 술법이 되었다. 성리학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양지의 역사가 되었고 명리학은 달빛의 조명을 받아 음지의 잡술이 되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한의학은 영주권을 딴 셈이고, 풍수는 이제 겨우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사주 명리학은 불법체류자이다. 물론, 실제로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려 신뢰도에 문제가 많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함량미달이 양산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간과 하늘, 우주와의 관계를 해석한 동아시아 문명 5천 년의 성찰인 사주명리학이 이토록 변방에 머물면서 '잡술'로나 판단되는 현실은 애석하기 그지없다. 사주명리학의 당당한 복권! 그것은 우리 문화를 바로 찾는 길이며, 한자문화권에 속한 동아시아 문명의 끊어지지 않는 맥을 잇는 작업인 셈이다. (조용헌, 우리 문화 바로 찾기 1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8) 고려 초 태조 왕건 능과 고려 후기 공민왕 능의 묘지 풍수가 서로 다른데,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자생 풍수가 중국 풍수의 유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 고려 때 과거에 쓰였던 풍수 교과서가 사라지고, 우리와 지형이 다른 중국의 형기론(산악지대에서 발달)과 이기론(평야지대에서 발달) 계통의 풍수 책들이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된다. 이후 중국 풍수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오면 조상을 좋은 자리에 묻어 기복을 바라는 묘지풍수만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풍수는 시대를 따라 변하는데, 간단히 말해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드러나는 재미있는 민속학이며 인문학일 뿐이다.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요즘 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답사를 다녀보면 좋은 느낌을 받는 잘 가꾸어진 묘들을 보는데, 왕릉처럼 묘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 같다. 즉 땅의 지기를 받아서 부와 명예, 권력을 얻었다기보다는 부와 권력이 있었기에 좋다고 하는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것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묘지 자체가 자극이 되어 후손을 독려, 그 지위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직접적인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
현대는 서양까지 가세하여 다양한 풍수가 소개되고 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데는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 않는 가 보다. 최창조 교수가 공주 유구, 소위 명당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 갔을 때 일화다. 거기 사시는 노인 분에게 “명당에 사시니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노인은 “돈이 명당이지요! 돈 있으면 도시에 나가 편히 살지 여기 시골에 살겠습니까?”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에 자극 받아 풍수 선풍을 일으킨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풍수계의 이단아가 된다. 최창조 교수는 그 때 이후 새로운 풍수사상을 재정리하여 <도시풍수>라고 이름 하였다.
9) 선도회는 2009년 8월 14일 사단법인이 되면서,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여 깊은 통찰 체험을 바탕으로 나눔 실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본 원고에서는 편의상 선도회라고 칭한다.
10) 법륜공法輪功(法轮功) 또는 법륜대법法輪大法 (法轮大法)이라고 부르며 불가기공의 한 종류이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겸비하고, 선사 문화를 기초로 하여 인간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수련을 하는 심신수련법이다. 우주의 최고 특성인 진眞, 선善, 인忍을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파룬궁은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데, 창시자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출신의 이홍지(李洪志, 리훙즈)이다.
- 참고가 되는 연관 글 -
<몸과 마음은 하나다>
이 글은
청암, 가을호 청암사 승가대학 - 청암사율원 발행, 에 실린 글 입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다.
전원電元 조영준趙永俊, 이학박사, 선도회 법사 (다음 카페 영하산방)
인간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세상에 태어나 나와 남을 구분하는 나이가 되면 적자생존의 유전자 코드의 발현과 더불어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아트만 프로젝트 The Atman Project’를 시작한다. 어쩌면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자 원천적으로 삶이 고苦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지구와 싱그러운 자연을 갖게 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고, 진화의 끝에 있는 인류가 지구에 출현하게 된 동력이기도 하다. 이 경쟁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 속성상 계속 우리의 삶을 관통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고 있다. 다행이라면 신과 가장 가깝다는 인간으로 진화한 다음부터는 그것을 자각하고, 왜 경쟁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필자 또한 “스스로 그러한” 그 법칙에 따라 학교 공부에도 충실하면서도, 실버 마인드 컨트롤이나 초월명상 등 명상법을 배우고, 불교 관련 종교단체를 전전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노력하였던 것 같다.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문학, 예술 등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고, 또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에 대한 추구, 즉 신비적인 것에 대해 호기심 또한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지적 예술적 호기심으로 떠났던 유학 생활에서도 신비한 것에 대한 호기심은 계속되었고, 그때 만난 것이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과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김정빈의 소설 『단丹』이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수련이나 수행이 쉬울 수는 없었다. 어렵게 단전호흡이나 선도仙道수련에 관한 책들을 구해 혼자 시도해 보았고, 불교수행에 관한 책들을 보고 절에 나가 참선이라는 것을 해보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절은 그저 주말에 모여 예불하고 점심 먹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정도였고, 참선 지도를 받고 싶었지만 그저 화두만을 받았을 뿐 그렇다할 어떤 도움도 받지는 못했다.
그런 목마름으로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시작한 것이 국선도 단전호흡이었다. 호흡 수련을 체계적으로 하게 되면서 호흡 수련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호함을 걷어내었고, 그 외 법륜공이나 선무도 등을 두루 둘러본 후, 모든 수련의 기본은 호흡이고 그 호흡을 잘하기 위한 준비체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수련이 신비하게 포장되고 상업화한데 반해 국선도는 당시에는 드물게 테이프를 이용한 개인 수련도 가능해 바쁜 와중에도 끊이지 않고 호흡 수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술도 끊고 음식 조절을 해 가면서 호흡 수련에 매진한 결과, 책으로만 보아왔던 수련효과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한 몸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화두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하였고 알듯 모를 듯한 (느낌만은 서늘한) 선문답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참선을 배우려고 조계사 수선회에 가보았고, 2년 넘게 전국의 절집을 돌아다니며 스님들을 만나보았으나 그렇다할 화두에 대한 견해도 어떤 뚜렷한 도움도 받을 수는 없었고, 누구를 찾아가라는 소개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것이 선도회였다.
선도회는 간화선 수행에 대한 체계적인 커리큘럼curriculum을 가지고 지도할 뿐 아니라 화두 경계 또한 뚜렷하여, 그때까지 궁금하던 선사들의 선문답을 꿰뚫을 수 있었다. 허전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구하려는 마음 또한 쉬게 되었으며, 서두에 말한 경쟁심도 멈추게 되었다. (선도회는 『무문관』과 『벽암록』에 수록된 화두들을 하나하나 입실점검을 통해 투과해 나간다. 독대하여 화두참구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면 그 견해에 대해 점검해 주어, 수많은 시도 끝에 이심전심으로 전해 내려오는 경계에 다다라 선사들의 심법을 체득하게 된다.)
선도회는 일주일에 한번 씩 모여 함께 참선하고 입실점검도 받는다. 선방이나 선원과는 달리 나머지는 전적으로 개인 수행에 맡겨지는데, 재가자가 매일매일 일정시간 꾸준히 수행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행히 필자는 국선도 도인導引체조와 호흡 수련을 하면서 홀로 오랜 시간 정신 집중을 하면서 화두 참구를 할 수 있었고, 선도회 간화선 수행을 무리 없이 순일하게 할 수 있었다. 몸 수련과 마음 수행의 양 날개를 조화롭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편의상 몸 수련과 마음 수행으로 구분하였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합창일 뿐 마음이라는 것이 특별히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심장이식수술을 하면 원래 그 심장을 가졌던 사람의 정서나 성향 또한 이식된다고 한다. 시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던 사람이 시인의 심장을 이식받은 후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이란 우리 몸 특정한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어디에도 두루 존재한다는 말일 것이다. (물론 연구는 심장에 국한되어 있었다.)
우리들의 생각이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많은 세포들의 소리를 종합 뇌가 분석하고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혜를 바탕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몸 전체가 곧 마음이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마음 수련은 결국 몸 수련이고 몸 수련 또한 마음 수련에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 『청암』과월호에 실려 있는 「중국에 소림사 한국엔 청암사」가 필자에게는 그리 낯설지가 않다. 참선 수행도 태극권 수련과 같이 하면 그 효과가 배가 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과 마음이 서로를 이끌면서 나아가야 수행에 힘을 받을 수 있다. A Sound Mind In A Sound Body,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마련이다.
<선도회 간화선 읽기>
다음은
宗達 이희익 老師 입적 20주기 기념 책자
『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네』에 실렸던 「 선도회 간화선 읽기」글입니다.
III. 일본 불교사 개관 & IV. 일본 선종사 개관
2024년 새롭게 쓰는 간화선 읽기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법사님. 저도 한때 진리란 무엇인가? 궁금한게 생각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과 노장사상, 철학과 현각스님 법문을 공부 했었는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의 세계가 있다는것을 인식 했으며 禪을 통해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입니다. 禪을 배우고져 하는 후학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그러셨군요... 잘 읽었읍니다. ().
법사님의 거사호(전원, 電元)가 전자입실로 무문관을 통과한 첫 번째 사람이라는 뜻이었군요. 야~ 멋져요. 전원(電元) 법사님! 화이팅입니다.
저도 미시간에 있었습니다. 앤아버에서 무기화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디트로이트 무문사에도 몇번 갔었습니다. 지금은 불화를 하셨던 도만스님이 주지로 계시지요.
아 그렇습니까? 우리 아이들은 아직까지 미시간에 있다가 큰 애가 작년에 서울대 대학원으로 옮기고
작은 아이는 아직 있습니다. 무문사가 처음 생길 때부터 가서 잔디 깔고 부처님 모시고 했었지요.
처음 절을 이룩하신 분이 석도만 스님인데, 그 분이 계속 주지를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만
다른 분이 아니라면 (동명이인) 불화를 하는 지는 몰랐네요. 서울에 오셨을 때도 한 번 뵈었습니다.
전원 합장
주지 스님 같은 분이시지요. 저랑 같이 미시간대학에서 불경공부하던 최광선 도반과 보스톤 출신 Young이 무문사 지을 때 많이 힘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이라 이름들은 생각이 안납니다만 93년 94년 다녔었던 것 같습니다.
전원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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