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정류장에서 앞선 사람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넓고 평평한 곳이 등이다. 그래서인지 피하고 싶을 때, 단절의 금을 그을 때 우린 등을 보인다. 두려움에 숨고 싶을 때도 다른 사람의 등 뒤로 숨게 되고 신뢰와 사랑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등을 내준다. 등도 표정이 있고 감정도 표현한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볼 수 없는 내 등에 무관심하며 소홀했다는 걸.
가슴은 앞을 보고 내가 걸어갈 길을 바라보며 꿈을 꾸지만, 등은 내가 무심히 지나쳐 온 것과 걸어온 길들을 바라본다. 기쁨에 들뜬 사람의 등, 좌절한 사람의 등, 힘든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있는 등, 등은 보는 이에게 소리 없는 이야기를 한다.
전철을 기다리며 나는 또 사람들의 등을 바라본다. 육십 중반의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의 등이 내 시야에 꽉 차게 들어온다. 가벼운 산행 복에 자신들의 몸보다 더 큰 배낭을 짊어졌는데, 여자는 간이의자에 앉아 있고 남자는 그 옆에 서 있다. 저 나이에 저 큰 배낭을 메고 산행을 나선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등짐 같은 두꺼운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틀림없이 부부로 보이는데 산행을 위한 것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 크기로 봐 인근 산을 가볍게 다녀올 양이 아닌데 복장은 허술하고 여자가 신은 것은 등산화가 아닌 일반 굽 낮은 구두였다. 남자 또한 일반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남자는 안쓰러운 눈으로 자주 여자를 내려다봤다. 저들은 어느 산으로 가는 걸까.
전철 안에서 내려놓기도 버거운 그들의 짐, 주고받는 짧은 대화를 듣는 순간 그 부부는 조선족 교포라는 것을 알았다. 차 안에는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젊은 등들이 들떠있는 기색이다. 나는 출입문 밖을 바라보며 내가 볼 수 없는 내 등은 어떤 표정과 감정이 묻어날까.
어린 나이 때부터 동생들에게 나는 작은 등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따개비처럼 작은 등에 매달려 있는 동생 때문에 구경만 해야 했다. 어쩌다 동생을 옆에 내려놓고 친구들과 공기놀이라도 하다가 엄마한테 들키면 귀에 딱지처럼 앉은 꾸지람이 따랐고, 매운 손바닥으로 등짝을 맞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뛰어놀고 싶은 마음에 고무줄놀이며 핀 따먹기, 공기놀이하는 친구들 사이를 기웃거리다 어느 틈엔가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초여름이 되면 성처럼 높게 쌓아 올린 선혜네 집 담장엔 넝쿨장미가 앞다투어 꽃송이를 내밀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친구 선혜의 집은 마당 가운데 정원도 있고 연못도 있었다. 선혜에게도 남동생이 있었지만, 동생을 업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늘 예쁘고 깨끗한 옷을 입은 그 애를 볼 때마다 동생을 업지 않은 그 애의 등이 부러웠다. 나는 선혜의 어깨에는 날개가 접혀 있을 거라는 상상도 했었다. 동생을 업지 않아도 되는 날은 나도 그 애처럼 날개를 달은듯했다.
한번은 친구들과 너무 놀고 싶은 마음에 동생을 엎고 고무줄넘기를 하는데 등에 붙은 따개비 녀석은 좋다고 까르르거리며 웃고 나는 노래에 맞춰 폴짝폴짝 고무줄을 뛰어넘다 엄마한테 들키고 말았다. 겁도 없이 계집애가 귀한 아들 씨주머니 터지게 엎고 뛰었다고 사정없이 머리통을 쥐어박히고 매운 손바닥으로 등짝을 맞았다. 엄마한테는 귀한 아들이지만 내겐 맷돌처럼 무겁고 따개비처럼 지겨운 동생이었다. 그 귀한 아들을 업고 뛴 죄로 그렇게 맞고도 아버지와 엄마의 눈치를 봐야 했다. 동생들 덕에 내 등은 여름이면 가렵고 따가운 땀띠기를 덤으로 업고 살았다.
결혼해 엄마가 되어선 두 아이에게 등을 내주었다. 아들은 한 달 삼십일 중 이십 일은 병원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아이를 재우려 남들 잠든 깊은 밤, 엎고 씌우고 해서 골목을 서성이며 엎은 채 쪽잠을 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딸이 태어나자 내 등을 딸에게 내주면서 아이들의 육아기를 보냈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들어설 무렵 아이들과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향해 등을 내놔야 했고 꿈을 향해 내달리는 아들과 딸에게 나의 등은 발판이 되어야 했다.
꾸밈없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솔직하다.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지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갈등의 세월을 품으며 늙어가는 수많은 등, 지금 내 뒤에 서 있는 이들에게 나의 등은 무슨 이야기로 다가갈까. 누군가에게 보여질 내 등이 부끄러워 슬며시 창밖을 향해 돌아선다.
김서현 miwha0819@hanmail.net
2014년 월간 <한국수필> 등단. 2023년 시조생활 신인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지송문학회, 군포문인협회 회원. <리더스에세이> 편집위원. 저서 『비어있는 의자』 한국수필 올해의 작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