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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즈의 역사(초기에서 1980년대까지)
- 정 리 서 봉 석 -
인터넷상에 소개되는 한국의 재즈는 대부분 1980년대 이후 신관웅이 이끌어온 국내파 재즈계와 90년대 이후 미국유학파 재즈계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에 여기서는 그 이전의 국내 재즈맨 이야기와 그 당시 음악계 상황을 같이 다루려고 한다.
재즈가 우리나라에 들어온것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우리보다 서양문물을 앞서 받아들인 일본을 통해서 도입된 것만은 확실하고 1928년에 재즈풍 음반을 출시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있었다. 1927년에 경성 중앙방송국이(현재의 KBS) 개국하면서 미국의 음악이 소개되고 재즈도 소개되었을것 같고, 그러나 한국인에 의한 직접적인 연주는 미국에서 순수음악과 재즈도 공부한 홍난파(洪蘭波)가 조직한 경성방송관현악단이 1940년 재즈를 연주했다는 공식 기록이있다.
이보다앞서 1933년에는 白明坤(1926년색소폰처음연주)이 경성방송국에 "코리아재즈밴드"로 출연했다는 기록도 있고 1938년에는 빅밴드 반주로 申카나리아가 "나는열일곱살이예요"를 취입했고1939년에는 "목포의 눈물"작곡가로 잘 알려져있는孫牧人의 CMC스윙재즈밴드(OK레코드사전속)가 베니굿맨의 히트곡"Sing Sing Sing"을 취입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의 음악이 금지되었다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면서 다시 재즈를 접하게 되었고 金海松(가수 이난영의 남편)의 KPK 스윙재즈밴드는 민요를 재즈식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등 해방 직후 미군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한다.
해방직후 미군클럽에서 주로 재즈스타일의 음악 연주로 유명했던 악단은 盧明奭(아코디온)金榮淳(트럼펫-베니김) 宋旻榮(트롬본)嚴吐美(클라리넷과 테너색스)등이 리드하는 악단들이었다. 또 이때에 서울대치과대학 학생이던 崔致禎(길옥윤吉屋潤-클라리넷과 기타)은 중국에서 온 盧明奭과 경기중학교 학생이던 朴椿石(피아노)과 핫팝 밴드를 만들어 국내 클럽과 미군클럽(이때에는 미군정시대여서 1개군단이 3년간 주둔)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이시절의 재즈란 의미는 당연히 지금의 그것이 아니고 미국의 뉴올리언즈 재즈와 빅밴드풍의 음악및 유럽의 샹송,칸쏘네등을 합쳐서 재즈라고 일컬어지던 시기였다.
1950년 6.25사변이 터지고(당시 미군 32만5천명)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많은 미군이(미군 22만3천명)한국에 주둔하게 되고 또 그들은 미군부대를 위문해 줄 한국의 연예단체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전쟁중에도 연예단체가 개별적으로 미군클럽측과 직접 약속해서 공연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였고 그들은 공연의 대가로 달러를 받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일상에 필요한 군수품으로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은 미8군이 방위를 담당하였는데 미8군에서는 개별적으로 클럽과 연예단체가 공연을 성사시키다 보니 연예단체의 수준이 천차만별인지라 미군들의 사기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1958년부터 그들은 미8군 사령부 안에 공연단체와 계약 업무를 맡는 Booking office를 두고 전국에 산재해있는 미군 클럽이 필요로 하는 연예단체를 한 곳에서 선정,공급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공연단체를 관장하는 연예대행기관들이 미군의 용역업체로서 설립하게되었다.(한국흥행주식회사=화양,극동등과 유니버셜,공영,대영등)
이들 연예대행기관은 Booking Office의 요구에 맞춰, 각 공연단체는 3개월내지 6개월 간격으로 미8군 클럽에 들어가 미군측 심사위원단에게 심사를 받아야하므로 각 단체들은 항상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만 되었다.
심사평가는 대체로 5등급으로 나누고 D 이하는 낙제였다.
AA,A,B,C,D 로 Class를 조정하고 1회공연의 가격을 등급에 따라 지불하도록 했다.
공연단체는 쇼 밴드(Floor show, Package Show)와 댄스 밴드(지정된 클럽에서만 연주하는 House Band와 수시계약에 의해 공연하는 Open Band)로 구분하였고 이 단체들은 계약된 클럽에서 공연을 끝내면 반드시 送狀(Invoice)에 클럽지배인의 사인과 평가를 받게 되어있었다.
공연평가는 3등급으로 나누는데
Excellent(우수) Average(보통) Poor(빈약)중 하나로 평가했다.
이 송장은 클럽에서는 Booking office로 보내어지고 공연단체에서는 소속회사로 보내어져 심사때의 인원과 공연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도 하게 되므로 결국 2중으로 심사를 받는 셈이 됐다.
이런 엄격한 체제의 덕분(?)인지 특히 쇼밴드의 연주자들중에는 후에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물급 연주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등급이 높으면 음악적으로 인정을 받아 좋지만 가격이 비싸서 일이 적게 계약되는 경우도 있었다.우리가 1960년을 전후로
일반 극장에서 자주 볼수 있었던 수준 높은 미8군쇼는 미군측과 계약이 많이 안된 쇼를 회사측에서는 임금지불이 급하니까
일반 극장에 공연을 붙이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8군에서 공연하는 악단들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재즈가 아닌 스탠다드 팝송과 초기의 록음악이었지만 이 시절만 해도
미국의 팝뮤직은 거의 재즈라는 이름으로 부르고는 했다.
이 시기는 대체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 월남전 참전까지로 봐야 할것이다.
1950~60년대의 재즈풍의 유명한 연주자로는
트럼펫: 김영순(베니김),최상룡,장경환,강대관,강정우,김인배,여대영,배상하...
트롬본: 송민영,홍덕표,김종택,이 윤,김형진,서희철...
클라리넷: 엄토미,
앨토 색소폰: 강철구,이동기,
테너 색소폰: 김안영(파피),이봉조,故이정식,김석성,최태국,최인재,...
피아노: 박춘석,김강섭,엄기돈,최창권...
드 럼: 조상국,최세진,양 철,박 철,허영욱.
기 타: 유 일,김희갑,이인표,이인성,신중현....
더블베스: 황병갑,김성천,노원구...
아코디언: 노명석,김호길..
바이올린: 김광수,백해제,신상철,김형진,김동석,김정상...
편 곡 : 최창권,맹원식,김용선,복기호,김형찬,정서봉,황중원,강철구,박선길,김기웅...
편곡자중에는 최창권은 뮤지컬 작편곡등 국내 팝스오케스트라 편곡의 효시를 이루었고
맹원식은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오직 글렌 밀러 타입의 빅밴드스타일로 외로운 길을 걷고 있다 하겠다.
김용선,복기호,황중원,김기웅등은 방송사에서 김형찬,정서봉,강철구,박선길은 미8군쇼에서 활동을 했다.
이 시기가 미국에서는 비밥과 모던재즈를 지나 프리재즈로 가는때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팝재즈맨들이
국내 대중음악쪽으로 고개를 돌려 방송악단에 종사하게 되며 국내 가요계에 미국풍 음악의 보급에 열정을 쏟게 되었다.
여러 악기중에 테너 색소폰이 재즈분야에 가장 많은 연주자를 배출하게 된다.그 유명한 吉屋潤은 한국전쟁 직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재즈를 배웠고 Crue Cuts(그당시유행했던 소위 스포츠가리라고하던 남성헤어스타일로
단원 머리가 통일되었다고 해서만든 이름) 라는 이름의 캄보밴드를 조직해서 악단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일본에서도
명성을 얻고 5.16혁명 직후에 잠시 귀국해서 화양 (원효로 선린상고 입구에 위치한 연예대행사)휴게실에서 연주인을
대상으로 재즈에 대해 워크숍을 가진 일도 있었다.그러나 그도 국내에 와서는 팝으로 방향을 바꿨고 본격적인 리얼재즈는
아니었으나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앞서가는 음악을 선보여 찬사를 받았었다.
국내파로 가장 유명하게 성장한 李鳳祚는 재즈의 기본요소인 블루노트를 우리 가요반주에 적절하게 사용하여 (맨발의
청춘)가요에 멋을 더 하기도 했다. 이봉조도 마찬가지로 팝재즈였지 리얼재즈는 아니었다.
이들은 대중음악에 빨리 눈을 돌렸기때문이기도 하다.
위의 두사람은 가요작곡가로서 또 똑 같이 테너 색소폰의 달인으로서 영원한 맞수이며 경쟁적으로 가요계와 연주계를
발전시킨 거목이라 하겠고 재즈의 매력을 대중가요에 알리는 역할도 많이했다고 할수 있겠다.
길옥윤은 색소폰의 음색이 귀족적또는 이지적이라고 표현할수 있겠고 이봉조의 음색은 서민적이고 섹시하다고 할수
있겠다.이들의 색소폰의 매력은 많은 후배 연주자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가요주법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고집스럽고 고독하게 재즈에 정진하는 이가 있었다.테너 색소폰의 故이정식이다. 앞에서도 기술
했지만 앞에서 거명한 훌륭한 연주자들은 모던 재즈 이전의 스탠다드 팝을 연주하는 재즈맨이었고 리얼재즈를 추구하는
음악인은 故이정식뿐이었다.
(후에 같은 테너색소폰의 동명이인인 신예 이정식이 출현하므로 이름앞에 故를 붙여 구별)
<이 시기부터는 국내에서 리얼재즈를 추구하는 재즈맨들간에는 재즈라면 리얼재즈만을 일컫게 되었고 일반적인
팝재즈는 재즈라고 지칭하지 않게 된다>
故 李正植은 1970년 38세에 간암으로 별세한 관계로 그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KBS교향악단 초기 시절 비올라 주자이고 서울음대 교수였던 李在鈺님의 아들이고 KBS관현악단장을 역임한 작곡가 金康燮과는 육본군악대의 동기생이자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이기도 하다.
한국의 재즈사에 故이정식을 빼놓는다면 얘기를 진행시킬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겠다.
육군군악대 시절에 재즈를 접하게되고 미군클럽을 통해 또는 일본의 재즈에 관한 악보와 음반을 구해서 독학으로 연습을 하고
재즈를 연구하고... 한국 재즈맨의 즉흥연주기법은 일단 故 李正植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되겠다.
1960년대말부터 국내에는 팝뮤직과 포크송이 주류를 이룰때라 이때부터 80년대말까지는 재즈맨들의 수난기였다고 하는것이 맞을것이다. 미8군쇼에서도 재즈를 위주로 하는 팀은 故이정식의 Spring Vierity쇼가 고작이고 일반 공연업소에서는 아스토리아 호텔과 스타더스트 호텔의 나이트 클럽정도가 재즈를 할수있는 공간이었다.
지금 현존하는 재즈맨들 중에 故이정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재즈맨이 트럼펫의 강대관,베이스의 이판근(재즈이론의 대가),테너 색소폰의 김수열 등이고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 중반까지 재즈맨들은 무교동의 스타더스트 호텔의 각 층마다 있는 나이트 클럽에서 돈을 버는것과는 무관하게 연주를 하게된다.
재즈를 할수 있는 공간이 있는것만 해도 큰 다행이라는 생각으로...밤늦게 무교동 골목 술집을 들어서면 스타더스트의 재즈맨들이 소주 한잔 기울이며 재즈맨의 서글픔과 재즈맨으로서의 자존심이 뒤섞인 소리없는 외침이 여기 저기서 들리는 듯 하기도 했다.그들의 그 가슴 아픈 추억이 없었다면 지금의 재즈 붐이 있을수 있었을까?
故이정식이 별세한 후에는 테너색소폰의 鄭成朝(前KBS관현악단장)가 한국재즈의 맥을 잇느라고 고생길에 들어선다.
서울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미8군쇼에서 재즈를 연주한 그의 천재성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재즈계는 그 발전속도가 한참 더뎠으리라 생각된다. 이때에도 한국 유일의 재즈이론가인 李判根은 재즈즉흥연주기법과 재즈편곡법을 후배들에게 가르침으로서 젊은 재즈맨들을 육성하고 있었고 테너색소폰의 金秀烈도 오로지 재즈만을 고집하며 외롭게 재즈맨의 도도한 길을 걸었다.
이 시절은 한국의 재즈맨들에게는 언제 끝날줄 모르는 긴 터널의 여행이었다.
60년대 후반에 클래식 피아노의 탄탄한 테크닉을 자랑하며 한때 재즈에 미쳐 살았던 젊은 신예 피아니스트 孫秀吉은 이 기간에 팝으로 방향을 바꿨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이들과 재즈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뉴재즈를 연주하는 앨토색소폰의 강태환,트럼펫의 최선배,드럼의 김대환등은 국내보다 일본을 비롯한 독일등지에 더 많이 알려진 자랑스런 재즈맨이다.
1970년대 후반에 정성조는 재즈의 본고장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유학길을 떠나고 국내에는 재즈를 이끌고 갈 사람이 없는듯 싶었으나
정성조와 함께 길옥윤악단에서 재즈로 호흡을 오랫동안 맞춰 오던 피아노의 신관웅이 KBS관현악단에 있을때인 1980년대 초부터 자신의 재즈밴드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재즈 활성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절 신관웅의 헌신적인 노력이 한국 재즈의 부흥 발전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하겠다.
이즈음 혜성처럼 나타난 20대 초반의 천재성을 가진 테너색소폰의 李貞植이 나타난다. 앞에서 소개한 故이정식과 이름이 같아서 많은 음악인들이 다시 한번 오래전 기억을 더듬게 되기도 했다.
이정식은 20세때 그당시 KBS 관현악단장 金康燮의 악단에 입단하게되는데 그 자리는 얼마전 재즈계의 거성 김수열의 포지션이었고 재즈트럼펫의 강대관도 이 악단에 있었으며 김강섭의 입장에서 보면 친한 친구 故이정식과 이름이 같고 또 뛰어난 재능이 엿보이니까 많은 보살핌을 주게 된다. 그 당시 최고의 대가인 吉屋潤과 李鳳祚에게도 소개를 하는등 많은 기성음악인들과 교류를 갖도록 선처를 했고트럼펫의 姜大寬도 재즈를 연습하는 방법을 전수하고 李判根에게 소개해 이론을 공부하도록 주선하는 등 金康燮악단에 입단하므로서
그의 재즈맨으로서의 행보가 훨씬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하겠다.
1980년대에는 서울예술전문대학에 실용음악과가 생기면서 吉屋潤이 강의를 맡고 그뒤를 이어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鄭成朝가 주임교수를 맡는등 재즈맨들이,계속 생겨나는 여러 대학의 실용음악과의 강의를 담당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재즈맨들의 위상이 많이 향상 된것을 느낄수가 있다. 故이정식과 이판근,강대관, 김수열,정성조,신관웅등이 재즈를 국내에 정착시키려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면서고생한데 비해 이정식은 선배 재즈맨들이 피우려고 애쓴 재즈의 꽃봉우리를 대중들 앞에 활짝 피우게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에는 해외 유학파들의 귀국과 더불어 또 다른 양상의 재즈밴드가 생겨나면서 재즈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듯 하다. 국내에서 이어온 재즈맨의 계보와 해외 유학파 재즈맨의 계보가 공존하면서 그들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는 한국적 재즈의 창조이고 이것을 세계 재즈계에 알리는 일일것이다.
이제는 재즈공연도 많고 재즈클럽도 많이 생겨나고..... 그러나 아직까지는 재즈공연만으로는 만족한 생활을 할수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모든것이 흡족하게 되리라 믿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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