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그 카드가 그녀의 존재를 일깨워 주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 카드를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어느 책에서 발견했다. 그 책은 어린아이의 유치한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 오랜 만에 하는 일이 었다. 책장 위에 처박힌 몇몇 책들은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채 버려둔 것이기에 나는 정리하는 도중에 그 책들을 보면서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책 페이지 가장자리들은 떨어져나가 있었고 그래서 누런 먼지와 희뿌연 비늘 모양이 뒤섞인 종이 부스러기들이 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나는 육체들을 뒤덮고 있던 겉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꿈속에서 그리고 후에는 우리가 함께 갔던 발레 첫 회 공연이라는 실망스런 현실 속에서 희미하게 엿본 것이었다. 그 책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것이고- 아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읽었던 책이었다.―우리 형들이나 누나들의 무릎 위에 쪼그리고 앉아 여러 번 “왜 그래?” 라고 물을 정도의 속성을 지닌 대표적인 잔인한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부모들에게 불효 막심한 자식들, 신사들에게 강간당한 후 수치심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가지만 자진해서 집을 나가는 젊은 처녀들 이미 기일이 지난 빚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빚진 가족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그래서 고통 받는 소녀를 아내로 요구하는 늙은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왜 그런 거야?”라고 물어보아야만 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얼룩진 페이지 사이로 아밀라미아의 보기에도 형편없는 맞춤법으로 쓴 하얀 카드 한 장이 훨훨 날며 떨어졌다는 사실뿐이다. 그 카드에는 쓴 하얀 카드 한 장이 훨훨 날며 떨어졌다는 사실 뿐이다. 그 카드에는 ‘아밀라미아는 내 친구를 잃지 않고 있어. 내가 그려 준대로 이리로 날 차자와’라고 쓰여져 있었다.
카드 뒷면에는 x지점에서 출발하는 조그만 오솔길이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그 장소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지겹기 짝이 없는 정규 학교 교육에 반항하던 내가 사춘기 였을 때 수업 시간도 잊은 채 몇 시간씩 책을 읽던 공원의 벤치였다. 그 책들은 내가 쓴 것이 아니었지만 나의 상황과 매우 흡사했다. 모든 해적들과 러시아 황제 짜르의 모든 편지들 그리고 나보다 약간 나이는 어리지만 미국의 거대한 강을 따라가는 거룻배 위에서 온종일 노를 젓는 소년들이 단지 내 상상 속에서도 흘러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 나는 벤치가 기적을 일으키는 안장인 것처럼 그곳에서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발걸음이 처음에는 공원 자갈길을 살며시 걷더니 이내 달려와 내 등에서 멈추었다. 바로 아밀라미아였다. 나는 그날 그녀가 온지도 모르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침묵을 지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심술궂게 민들레 꽃잎으로 내 귀를 간질일 때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꽃잎을 든 채 내게 두터운 입으로 살며시 휘파람을 불며 윙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아주 심각하게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미소 지으며 자기이름을 말했다. 그 웃음은 순진무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헤픈 웃음도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그녀의 표정이 나이에 걸맞게 순진하면서도 제대로 교육받은 아이들이 알아야만 하고 흉내 내야만 하는 어른들의 미소-특히 자기를 소개 한다거나 작별 인사를 하는 엄숙한 순간에-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밀라미아의 그런 과묵함은 오히려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반면에 그녀가 자연스런 행동을 보이는 순간에는 배워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틀 동안 가졌던 아밀라미아의 고정된 이미지를 떠올리고 싶다. 그 이미지는 바로 그녀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 혹은 그녀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쳐다보며 무언가를 물어보는 듯 하면서도 사실은 별 관심 없이 움직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나는 앨범에 있는 것처럼 영원히 멈춰있는 그녀의 이미지를 떠올려야만 한다. 저 멀리 산등성이가 기우는 곳에 있는 그녀, 그리고 클로버가 드리운 호수에서 내가 앉아 있던 벤치에 앉아 있던 벤치에 앉아 푸른 벌판을 바라보는 그녀를 떠올린다. 어둠과 햇빛이 한 몸이 되는 산등성이에서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그녀와 산 아래쪽으로 뛰어내려오다가 멈추자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면서 허벅지 근처에 가터벨트를 한 벨트를 드러낸 채 숨을 헉헉거리며 즐거워 웃으면서 입과 눈을 살며시 다문 그녀의 모습을 회상한다. 더불어 유칼리나무 아래에 앉아서 내가 자기에게 다가오게끔 거짓으로 눈물을 흘리는 척 했던 것도 떠오른다. 그리고 손에 한 움큼 꽃을 쥔 채 고개를 숙여 냄새 맡던 그녀의 모습도 기억한다. 그것은 버드생이나물 꽃잎이었는데 나중에 나는 그 꽃이 그 공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라는 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가끔씩 푸른 체크무늬 앞치마에 있던 주머니에 그 하얀 꽃을 가득 담아온 것으로 볼 때 아밀라미아가 살던 집의 정원에서 기르는 것 같았다. 또한 초록색 벤치에 양손을 놓고 책을 읽던 나를 회색 눈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아밀라미아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리고 책에서 나온 이미지를 내 눈망울 속에서 예측이나 하듯이 그녀가 단 한번도 내게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떠오른다. 또한 내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내 머리 위로 빙빙 돌릴 때 미소 짓던 그녀의 모습도 회상한다. 그 때 그녀는 공중에서 천천히 돌면서 마치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발견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등을 돌리고는 팔을 높이 들면서 손가락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던 아밀라미아의 모습 내가 앉은 벤치에서 수천가지 자세를 취하던 아밀라미아의 이미지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가 없다. 그녀는 내 머리를 잡고 다리를 벌려 약간 부풀어 오른 팬티를 보여주기도 했고 자갈길에 앉아 다리를 꼬고 손으로 턱을 괴기도 했으며 잔디밭에 누워 햇빛에 빛나는 그녀의 배꼽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의자 밑에 숨어서 나뭇가지를 엮었고 나뭇가지로 동물 모습을 진흙바닥에 그렸으며 벤치의 등을 핥았고 아무 말하지 않은 채 고목나무 기둥의 갈라진 껍질을 갉아냈으며 눈을 감고 콧노래를 불렀고 새나 개 고양이 닭 혹은 말의 소리를 흉내 내곤 했다. 이런 것이 내게 남아 있는 전부였지만 실제 현실 속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그녀가 나와 함께 있는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개의치 않고 공원에 그녀가 홀로 있는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개의치 않고 공원에 그녀가 홀로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 내가 그녀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책을 읽는 도중에 토실토실한 그녀와 햇빛의 반사에 따라 밀짚 빛깔이 되기도 하고 혹은 짙은 갈색이 되기도 하는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때때로 쳐다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 순간 아밀라미아가 내 인생의 또 다른 버팀 점이 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녀는 우유부단했던 내 유년시절과 독서를 통해 내 것이 되기 시작한 축복받은 대지의 열린 세상 사이에서 긴장관계를 조성하던 버팀 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내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을 꿈꾸었다. 그러니까 왕비로 위장해서 비밀리에 목걸이를 사는 암컷들- 이 단어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말이다- 이나 침대에서 군주들을 기다리는 신화적인 여인들- 신체의 반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며 또 다른 반은 흰 가슴과 축축한 아랫배를 지닌 도마뱀-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유년시절의 동반자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그녀의 진지함과 매력을 아무런 느낌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향수와 기억에 흥분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관심이 일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나약함에 이끌리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함께 소나무 가지를 흔들어 떨어진 솔방울을 주웠고, 아밀라미아는 내 가슴 위에 있었고 나는 그 소녀의 머리칼을 내 입에 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귀로 그녀의 가쁜 호흡소리를 들었고 내 목을 달콤하게 껴안고 있는 그녀의 팔을 느꼈다. 나는 화가 나 그녀의 팔을 치웠고 그러자 그녀는 바닥에 넘어졌다. 아밀라미아는 피가 난 무릎과 팔꿈치를 어루만지며 울었고 나는 내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나서 아밀라미아는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내가 앉아 있던 벤치로 와서는 아무 말 없이 종이 하나를 건네주고 콧노래를 부르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카드를 찢어버릴것인가 아니면 내가 읽고 있던 농자의 오후라는 책 속에 보관할 것인가를 망설였다. 내가 책 읽는 것조차 아밀라미아의 옆에서는 유치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그 소녀는 공원으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에 방학이 끝나고 나는 중학교 1학년이 해야만 할일로 돌아갔다. 그 이후 나는 그 소녀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2
이제 나는 전혀 환상적이지 않았고 익숙지도 않았던 이미지를 떨쳐 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기에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정원으로 되돌아온다. 소나무와 유칼리나무가 어우러진 가로수 길 앞에 서서 인근의 울창한 공원에서 알았던 그 조그만 소녀를 기억한다. 기억은 내 상상력의 파도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게 그녀를 그렸다. 왜냐하면 이곳은 슈트로고프와 허클베리 핀 윈터 부인인 밀라디와 브라반테의 게노페파(허클베리 핀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등장하며 밀라디는 알렉산더 뒤마의 삼총사에 등장하는 인물이고 브라반테의 제노베파는 프리드리히 헤벨의 게노페파의 여주인공임; 역주)가 태어나고 말하고 죽은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축축한 쇠창살로 둘러싸인 조그맣고 마구 자란 고목 몇 그루만이 있는 조그만 정원에서 그들은 태어나고 죽었던 것이다. 이정원에는 나무 모양의 시멘트 벤치가 하나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보자 나는 잘 달궈진 쇠로 만든 멋진 내 벤치를 떠올린다.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과거를 회상케하는 정돈된 내 열병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언덕 빼기는 ....... 어떻게 바로 그 언덕이 아밀라미아가 매일 산책하면서 오르내리던 언덕과 우리가 함께 뒹굴던 가파른 언덕 기슭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거무스름한 풀 더미가 전혀 눈에 띄지 않게 조금 쌓여 있었을 뿐인데 내 기억은 그것을 보자 과거를 돌이키기 시작한다.
내가 그려준 대로 이리로 날 차자와. 그러려면 정원을 가로질러서 숲을 뒤로 한 채 솟아있던 풀 더미를 지나 조그만 개암나무 밭-틀림없이 그 소녀가 흰 꽃잎을 주웠던 곳이 여기 였다.―을 지나야 한다. 삐걱거리는 쇠창살의 공원 문을 열린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날것이고 거리 한복판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자 사춘기 시절에 오후가 마치 기적처럼 도시의 모든 맥박을 멈추게 했으며 클랙슨 소리, 종소리, 목소리, 울음소리, 자동차 엔진소리, 라디오소리, 욕소리 등의 도시의 현기증을 무력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또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능케 한 진짜 마술은 무엇일까? 조용한 정원일까 아니면 시끄럽게 달아오른 도시일까? 나는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멈추라는 붉은 신호등을 쳐다보지 않은 채 길을 건너 반대쪽 보도로 간다. 그리고는 아밀라미아의 종이쪽지를 다시 살펴본다. 마침내 조잡하기 그지없는 그 지도는 내가 살고 있는 순간의 진정한 마력이 되고 단지 그것을 생각만 해도 나는 마구 흥분하기 시작한다. 열네 살 때 잃어버린 사춘기 시절의 오후를 보낸 후 내 인생은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만 했고 스물아홉이 된 지금 나는 정당하게 학위를 받았으며 한 사무실의 주인이며 얼마 되지는 않지만 안정된 수입이 있고 부양할 가족이 없는 총각이며 비서들과 잠자리를 하는데 약간은 신물이 나 있고 돌발적으로 가는 시골이나 해변가에도 별로 흥분하지 않으며 책을 읽으면서 느끼거나 공원이나 아밀라미아에게서 느꼈던 이전의 매력같은것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나는 형편없이 우중충한 이 변두리 거리를 거닌다. 단층집들은 모두 긴 창살과 색 바랜 대문을 하고서 단조롭게 줄지어 있다. 가끔씩 거리의 행상들이 외치는 소리가 주택 단지의 단조로움을 깰 뿐이다. 이곳저곳에서 칼장수의 칼 가는 소리와 구두장이의 망치소리가 들린다. 옆에 있는 울타리 쳐진 정원에서는 동네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손풍금 소리가 어린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뒤섞여 내 귀에 들려온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그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어쨌든 스쳐지나가는 감정이지만 곡예사들의 방탕함을 좋아하던 아밀라미아가 발코니에서 자신의 양 허벅지에 걸친 꽃무늬 팬티를 뻔뻔스럽게 보여주면서 앞치마 주머니에 흰 꽃을 가득 담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 어린아이들을 쳐다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생애 처음으로 스물두 살 먹은 그 아가씨를 상상한다. 그리고 만일 아직도 그녀가 적어준 주소에 살고 있다면 나를 기억하며 웃을 것인지 아니면 정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잊지는 않았는지 상상하고 싶어진다.
그 집은 단지 내의 다른 집들과 똑같다. 대문과 창살 달린 두개의 창문과 문기둥들이 있다. 그리고 빨랫줄에 걸린 옷들, 물탱크, 식모방, 헛간과 같은 옥상의 잡동사니들을 숨기기 위해 가짜 18세기 풍난 간으로 장식된 단층집이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모든 환상을 떨쳐버려야 한다. 아밀라미아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살지 않을 수도 있다. 15년 동안 똑같은 집에서 계속 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 소녀는 너무 조숙하게 독립적이었으며 고독했지만, 옷도 잘 입고 제대로 교육받은 소녀 같았다. 그런데 이 지역은 그런 우아함과는 이미 거리가 있다. 틀림없이 아밀라미아의 부모들은 이사를 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그 소녀의 주소를 알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린다.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도 집에 없는 것 같다. 그건 또 다른 우연이었다. 그럼 나는 또다시 내 어릴 적 소녀를 찾을 필요성을 느낀 것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춘기 시절의 책을 다시 들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런 책 속에서 우연히 아밀라미아의 카드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일상생활로 돌아갈 것이고 스쳐지나가던 그녀에 대해 생각했던 중요한 순간을 틀림없이 잊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그리고는 현관문으로 귀를 가까이 가져가다가 깜짝 놀란다. 현관문 안쪽에서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힘들어하는 소리가 케케묵은 시가의 역겨운 냄새와 더불어 현관의 갈라진 널빤지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내 목소리를 듣자 어떤 사람이 불안한 듯이 굼뜬 걸음걸이로 몸을 피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 나는 소리를 치면서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여보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내 말 안 들려요!”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초인종을 누르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다. 그러자 나는 아주 조그마한 틈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현관에서 물러난다. 마치 그렇게 거리를 두면 더 잘 보이고 심지어는 그 안으로 파고들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그 저주받은 현관문을 쳐다보면서 내 뒤쪽에 있던 길을 건넌다. 바로 그때 과격하게 눌러대는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가 나고 나는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나는 클랙슨을 눌러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지만 거리로 사라지는 자동차만을 볼수 있을 따름이다. 그때 나는 전봇대를 붙잡는다. 그리고 차가운 피가 뜨겁고 땀에 젖은 피부를 지날 때 생기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끼고 전봇대에 몸을 의지한다. 나는 아밀라미아의 집이었음에 틀림없는 그 집을 쳐다본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난간 뒤쪽으로는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옷들이 속옷인지 파자마인지 블라우스인지 잘 모른다. 단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빨래 줄에 집게로 잡힌 채 팽팽히 걸려있던 푸른색 체크무늬의 조그만 앞치마뿐이다. 앞치마는 옥상의 흰 벽에 박힌 못과 쇠기둥 사이에 걸린 빨랫줄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3
등기소에서는 그 집이 발디비아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그는 집을 임대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임대한 사람이 누구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누가 발디비아? 그는 자기 직업을 상업이라고 적고 있었다. 어디 살지요? 당신은 누구죠? 라고 등기소 여직원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거만하게 물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꿈도 나의 피곤함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발디비아가 누구일까? 등기소에서 나와서 햇빛을 보자 기분이 상한다. 나는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안개가 자욱하고 채로 까분 듯한 태양 빛이 야기하는 역겨움을 어둡고 축축한 공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건 단지 아밀라미아가 그 집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왜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일 따름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내가 떨쳐 버려야 할 것은 밤새 나를 한숨도 자지 못하게 만든 황당한 생각이다. 나는 옥상에 걸려 있는 앞치마를 보았다. 그것은 주머니에 꽃을 간직하던 바로 그 앞치마였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 집에 내가 열네 살인가 열다섯 살 때 알았던 일곱 살짜리 소녀가 살고 있다고 믿었지만............아마도 그녀는 딸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래, 스물두 살의 아밀라미아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일 것이다. 아마도 그녀와 똑같이 옷을 입고, 그녀와 닮고, 그녀와 똑같이 장난치면서 아무도 모르게 공원에 가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그 집의 현관에 이른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 안쪽에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나길 기다린다. 하지만 내 예측은 빗나간다. 내게 문을 열어 준 여인은 쉰 살이 채 안된 듯하다. 그러나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굽낮은 신발과 검은 옷과 숄을 두르고 있다. 그리고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모든 환상이나 청춘 기절의 모든 열정을 포기한 듯이 보인다. 그녀는 거의 무감각하고 잔인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뭘 원하죠?”
“발디비아씨가 보냈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한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사무실에 가서 서류 가방을 들고 왔어야만 했다. 그때서야 나는 서류 가방 없이는 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디비아씨라고요?”
여인은 아무런 관심도 없고 전혀 놀라지도 않은 듯이 되려 내게 묻는다.
“예, 집주인 말입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다. 그녀는 나를 쳐다본다.
“아 그래요. 집주인 말이군요.”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형편없는 코미디에서 손님들이 한 발 앞서 들어가는 이유는 그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 여자는 문에서 비켜나 내게 한손으로 제스처를 지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현관 안쪽에는 색 바랜 나무와 유리로 된 문이 하나 있다. 나는 현관 입구에 깔린 노란 타일 위로 걸어 그 문까지 간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나를 뒤쫓아 오고 있는 여인을 쳐다보며 다시 묻는다.
“이리로 갑니까?”
여인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흰 손으로 작은 로사이오를 갖고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다. 나는 어렸을 때 이후 그렇게 오래된 로사이오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말하려고 하지만 그녀가 갑작스럽고 단호하게 문을 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는 길고 좁은 거실로 들어간다. 여자는 서둘러 현관문 옆에 있는 창문을 열지만 우아한 도자기 화분에서 자라고 있던 네 개의 다년생 식물과 무늬 있는 창으로 인해 거실 안은 여전히 어둡다. 거실에는 단지 등나무로 된 등높은 오래된 소파 하나와 흔들의자만이 있다. 그러나 내 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희귀한 가구 이거나 식물은 아니다. 여자는 먼저 내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 다음에 흔들의자에 앉는다.
내 옆에 있던 등나무 테이블에는 잡지책이 한 권 펼쳐져 있다.
“발디비아씨가 직접 못 오셔서 죄송하다고 그러십니다.”
여인은 눈 깜짝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흔들거리고 있다. 나는 만화가 그려진 그 잡지를 곁눈질로 쳐다본다.
“인사를 전해 달라고.......”
나는 여인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말을 멈춘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흔들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잡지에는 빨간 색연필로 낙서가 되어있다.
“...........며칠동안 잠시 귀찮게 해드릴지도 모른다고 전해달라고 해서…….”
내 눈은 재빨리 그 다음 말을 찾는다.
“.........등기부 때문에 가옥 감정 평가를 다시 해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가옥 가격을 평가한 지가 벌써 .......당신 가족은 계속 여기에서 살았습니까?”
끝이 뭉툭한 립스틱이 의자 밑에 떨어져있다. 여자는 미소를 짓고 있다. 작은 로사이오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미소를 짓고 있다. 작은 로사이오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이런 말을 비웃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전혀 일그러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적어도 15년은 되었지요, 그렇죠?”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창백하고 야윈 입술에는 립스틱을 바른 흔적은 하나도 없는데..........
“당신과 당신 남편 그리고.......?”
그녀는 얼굴 표정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하는 나를 거의 도전적으로 뚫어지게 바라본다.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다. 그녀는 계속해서 작은 로사이오를 어루만지고 있고 나는 허리를 앞으로 약간 굽힌 채,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오늘 오후에 필요한 서류를 갖고 다시 오겠습........”
그녀는 좋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립스틱을 줍고 만화 잡지를 들고서 자기 숄 사이로 숨긴다.
4
무대는 바뀌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나는 노트에 상상한 숫자를 적으면서 을씨년스런 바닥의 나무판자의 질과 가옥의 규모를 측정하는데 관심을 보이는 척하고 있다. 그 동안 여자는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조그만 로사이오 알을 어루만지고 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거실의 목록을 끝내자 한숨을 내쉬며 집안의 다른 쪽으로 가자고 부탁한다. 여자는 길고 검은 팔로 흔들의자 팔걸이를 잡고 일어나면서 좁고 뼈만 앙상한 어깨에 숄을 두른다.
그녀는 우중충한 유리문을 연다. 우리는 거의 가구가 없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니켈과 스펀지 고무로 된 네 개의 의자와 함께 있던 둥근 튜브 다리의 식탁은 그럴듯해 보이던 거실 가구들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손잡이가 굳게 닫힌 창살 쳐진 창문은 아무것도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식당을 어느 순간에 환하게 비출 것임에 틀림없다. 그곳에는 콘솔도 없고 선반받이도 없다. 식탁 위에는 단지 검은 포도 한 송이와 두개의 복숭아를 담은 과일 그릇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파리만이 있을 뿐이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 뒤에 서 있다. 나는 가옥 평가를 할 때의 정상적인 순서를 깨기로 마음먹는다. 이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은 내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아무 단서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묻는다.
“옥상에 올라가도 될까요? 그 방법이 전체 표면적을 한눈에 볼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평소의 눈빛과는 대조적인 빛을 발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아마도 식당의 어둠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는 마침내 입을 연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집면적은............발디비아씨가............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집주인의 이름 앞뒤로 머뭇거린 그녀의 말은 마침내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교란 시키고 있다는 최초의 증상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녀는 비꼬듯이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
“글쎄요”라고 나는 미소를 지어 노력한다. “제가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점검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진행하는 것보다는........” 내 거짓 웃음은 이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 당신은 내가 시킨 대로만 하면 되요.”라고 여자는 말하면서 무릎위에 팔을 엇갈리게 놓은 채 검은 배 위에 은제 십자가를 놓는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짓기 전에 어둠 속에서 그런 내 제스처는 쓸데없는 것이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죽으로 장정된 노트에 소리를 내면서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눈을 떼지 않은 채 숫자와 감정가격을 적는다. 이런 숫자의 허구성-이것은 약간 붉어진 내 볼과 딱딱한 언어의 사용이 말해주고 있다.―은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것이다. 엉터리 기호와 평방미터, 수학 공식 등을 블록 페이지에 가득 채우면서, 내가 왜 도대체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가를 나 자신에게 묻는다. 즉, 아밀라미아에 관해 물어보고 나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은 후 이곳에서 왜 나가지 못하는가를 내심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런 길을 택한다면 대답을 얻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실을 지니고 있다. 나와 함께 있는 야위고 조용한 여인은 만일 내가 거리에서 만난다며 발길을 멈추고 쳐다볼 만한 특징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시원찮은 가구들과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집에서 그녀의 얼굴은 도시에서 지나치는 모르는 얼굴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얼굴로 변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역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밀라미아에 대한 기억이 또다시 내 상상력의 욕구를 일깨웠기 때문에 나는 게임의 법칙이 따를 것이고 겉으로 드러난 허상을 끝까지 파헤칠 것이며 로사이오를 들고 있는 여인이 내 길 앞에 펼쳐놓은 뜻하지 않은 베일을 통해 해답- 아마도 그것은 간단하고 명확하며 즉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것이다. -을 얻기 전까지는 편히 쉬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 완고한 여주인에게 낯선 존재에 관해 물어보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단지 내 상상 속의 미로 속에서 아밀라미아를 생각하며 더욱 즐길 것이다. 파리들은 윙윙거리며 과일 그릇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그러나 복숭아의 상한 끝부분, 즉 한 입을 물어뜯은 부분에는 앉지 않는다. 나는 적을 것이 있다는 핑계로 그곳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카펫 같은 복숭아 껍질과 과일의 누런 알맹이에는 이빨 자국이나 있다. 나는 여자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적는 척 한다. 나는 어깨를 웅크리고 그 과일을 좀더 자세히 쳐다본다. 그리고 식탁에 손을 댄 채, 마치 손대지 않고 물어뜯으려는 행동을 반복하려는 것처럼 앞으로 입술을 가까이 한다. 그때 나는 눈을 내려 아래로 쳐다본다. 그리고는 내 발 주위에 또 다른 흔적이 있는 것을 본다. 그곳에는 자전거 모양을 한 두 개의 눈물방울과 색 바랜 나무 바닥에 두 개의 껌 조각이 길쭉하게 달라붙어 있다. 그 껌 조각은 식탁까지 온 다음 바닥을 따라 여자가 있는 곳까지 점점 희미하게 펼쳐지며 사라진다.
나는 내 노트를 덮는다.
“계속합시다. 부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나는 그녀가 의자등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서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녀 앞에는 두툼한 어깨의 남자가 검은 시가 연기를 내뱉으며 앉아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다. 그의 눈은 늙은 거북이의 목과 비슷하게 주름져 있고 퉁퉁 부어 있으며 두껍고 늘어진 눈까풀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내 행동을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다. 형편없이 면도하여 수천 개의 을씨년스런 수염으로 가득 찬 그의 뺨은 튀어나온 광대뼈에 매달린 듯이 흐느적거리고 있고 푸른 힘줄이 보이는 두 손은 양 겨드랑이 속에 숨겨져 있다. 그는 푸른색의 거친 셔츠를 입고 있고 그의 헝클어진 곱슬머리는 작은 소라로 범벅이 된 배의 밑창과 흡사하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의 존재가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힘들게 내쉬는 씩씩거리는 숨소리 (마치 이런 호흡만이 그의 불같은 성미와 격양된 감정과 그의 쇠약한 육체라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뿐이었다. 그런 숨소리는 이미 현관문 틈 사이로 내가 들었던 것이다.
그는 겸연쩍게 “안녕하시오…….”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미스터리, 아밀라미아, 가격 감정, 아밀라미아의 발자취 등의 모든 것을 잊기로 한다. 천식에 걸린 늑대 같은 남자의 모습을 보자 나는 얼른 그곳에서 도망치기로 한다. 나는 “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지만 이번에는 작별 인사를 하는 식으로 한다. 그러자 그 남자의 거북이 가면은 부서지면서 잔인한 미소로 변한다. 그의 육체는 모두 버들처럼 하늘하늘한 껌과 썩어서 다시 색칠한 고무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그는 팔을 뻗어 내 발걸음을 멈춘다.
“발디비아는 4년 전에 죽었소.”라고 숨 막힐 듯 희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그 소리는 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자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것은 희미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이다.
나는 맹수의 발톱에 사로잡힌 힘없는 짐승처럼 신음하면서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말한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양초와 생고무로 만든 것 같은 두 얼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히든카드로 나 자신에게 말하는 척 한다. 나는 중얼거린다.
“아밀라미아…….”
바로 그것이다. 이제 아무도 더 이상 거짓으로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주먹은 순간적으로 힘을 가하더니 이 내 힘이 빠지고 마침내 힘없이 떨면서 내 팔에서 떨어져 나간다. 처음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인 여자는 마구 짓밟힌 새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흑흑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서운 유령 같은 그녀의 얼굴은 그대로이다. 내 상상속의 흡혈귀는 고독하고 버림받았으며 상처 입은 두 늙은이로 갑자기 변한다. 그들은 벌벌 떨면서 두 손을 잡고서야 비로소 간신히 기운을 차린다. 그런 모습을 보자 나는 몹시 창피해진다. 아밀라미아에 대한 환상은 나를 벌거벗은 식당까지 데려와 내가 그들과 공유할 수 없는 삶으로 추방당한 두 늙은이의 은밀하게 감춘 비밀까지 짓밟은 것이다. 나는 그때처럼 내 자신이 혐오스러운 적이 없었다. 나는 그처럼 거칠고 나쁜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제스처도 소용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두 사람의 손을 잡을까? 그리고 부인의 머리를 어루만질까? 아니면 내가 그들일에 참견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할까? 나는 겉옷 주머니에 내 공책을 집어넣는다. 나는 탐정소설 같은 이런 실마리를 모두 망각의 늪으로 던져 버린다. 즉 만화 잡지 립스틱 이빨 자국이 난 과일 자전거 자국 푸른색 체크무늬의 앞치마 등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집에서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노인은 두꺼운 눈까풀 뒤에 있던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는 씩씩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밀라미아를 아나요?”
그들이 매일 자연스럽게 떠올렸을 그녀의 과거는 내 환상을 산산히 부숴버린다. 바로 그 질문에 해답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알았다. 그게 몇 해 전 인가? 아밀라미아 없는 세상을 몇 년 동안이나 살았을까? 그녀는 우선 내 망각에 의해 살해되었고 겨우 어제 비로소 무기력하고 쓸쓸한 기억에 의해 부활 되었던 것이다. 항상 홀로 있던 정원 속에서 기쁨을 만끽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과묵한 그녀의 회색 눈이 언제 나를 떠났을까? 울상 짓거나 과묵함 속에서 가냘 퍼지던 그녀의 입술을 본 것이 언제던가? 이제야 나는 아밀라미아가 허망하다고 직관했던 그런 인생을 발견했고 그런 일생에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 우리는 공원에서 함께 장난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죠.”
“아밀라미아가 몇 살쯤 되었을 땐가요?” 라고 아직 죽어가는 목소리로 노인이 말한다.
“아마 일곱 살쯤 되었을 겁니다. 맞아요. 일곱 살 이상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여자가 애원하는 듯이 팔을 올리며 일어나 말한다.
“어떻게 생겼었지요? 어떻게 생겼었는지 말해보세요........”
나는 눈을 감는다.
“아밀라미아는 역시 내 기억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단지 그녀가 공원에서 만지고 가져오고 발견했던 것들로만 그녀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제야 그녀가 언덕배기를 내려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 언덕배기가 아니라 목초가 약간 솟아 있던 지역에 불과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건 풀이 무성한 언덕이었고 아밀라미아는 자기가 오가던 오솔길을 따라 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언덕에서 내려오기 전에 높은 곳에서 내게 인사를 했지요.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예, 그건 내 눈의 음악이었고 내 코가 맡는 그림이었지요. 그리고 내 귀가 듣는 맛이었고 내 촉감이 느끼는 냄새였으며........내가 꿈꾸고 있는 것인지............... 내 말을 듣고 있습니까? 그녀는 내려오면서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흰 옷과 푸른색 체크무늬의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는데.......당신들이 옥상에 걸어 놓은 바로 그 앞치마를...........”
그들이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아밀라미아가 어땠지요?”
“회색 눈을 지니고 있었고 머리색은 태양이 반사되는 정도와 나무 그림자들에 따라 변했고..........”
두 사람은 부드럽게 나를 인도하고 있다. 나는 남자의 콜록콜록하는 소리와 여인의 몸에 부딪히는 로사이오의 십자가 소리를 듣고 있다.
“말해보시오. 제발…….”
“그녀는 달려오면서 바람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요. 내가 앉아있던 벤치까지 왔는데 뺨은 기쁨의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다. 두 번째 계단, 다섯 번째 계단,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두 번째 계단을 오른다. 네 개의 손이 내 몸을 인도하고 있다.
“어땠지요, 아밀라미아가 어땠지요?”
“그녀는 유칼리나무 아래에 앉아 나뭇가지로 머리를 땋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내가 독서를 그만두고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게끔 눈물을 감추며............”
계단은 삐걱거리고 있다. 냄새는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그것은 나머지 감각을 모두 흩어버리고 내 환상속의 권자에 앉은 황색 몽골 인처럼 의자에 앉는다. 그것은 구리처럼 무겁다. 그리고 느슨하게 드리워진 바삭거리는 실크처럼 매우 암시적이다. 그것은 터키 군주의 왕좌처럼 장식되어 있으며 깊은 폐광처럼 어둠침침하고 죽은 별처럼 빛난다. 두 사람의 손이 나를 놓아준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눈물이라기보다는 떨고 있는 두 노인들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우선 나는 내 각막에서 흘러나온 너울거리는 액체와 그 다음으로 향수와 수증기와 거의 되살아난 듯한 꽃잎으로 내 속눈썹이 질식할 것만 같은 방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피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그런 꽃들의 모습뿐이다. 그것은 들 고추의 달콤함과 두형나무의 구역질나는 냄새, 그리고 감송으로 에워싸인 무덤이자 치차나무의 사원이다. 타오르는 무거운 대형초의 달아오른 손톱에 비치는 창문 하나 없는 조그만 방, 초와 축축한 꽃내음의 흔적은 우리 신경체의 중심으로 향한다. 바로 인생의 태양인 그곳에서 되살아나서 흩어진 꽃들과 대형 초 뒤로 손때 묻은 장난감이 쌓인 모습과 색색의 반지와 바람 빠져 주름진 풍선, 투명한 낡은 자루가 보인다. 산산이 부서진 갈기의 목마, 악마의 스케이트, 머리칼 없이 눈 빠진 인형, 톱밥이 빠져 안이 텅 빈 곰, 구멍 뚫린 생고무 오리, 온통 좀 쓸은 개, 다 썩은 서커스용 밧줄, 말라비틀어진 사탕으로 가득 찬 유리 항아리, 낡은 신발, 세발자전거-바퀴가 세 개 달렸을까? 아니다. 바퀴는 두개만 있다. 하지만 두발 자전거는 아니다. 앞바퀴가 빠져 뒷바퀴만 평행하게 달려있다.―가죽과 실로 만든 신발도 그곳에 있었다. 내 손이 닿을 만한 맞은편에는 종이꽃으로 장식된 푸른 상자위에 조그만 관이 놓여 있는데 이번에는 삶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카네이션, 클로버, 해바라기, 양귀비, 튤립과 같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저번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들은 은빛의 관 안에서 검은 실크 침대보를 덮고 흰 융단과 같은 솜과 함께 있는 그녀의 얼굴이 풍기는 잠자는 죽음의 밀실의 모든 요소들이다.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모습을 한 모습을 한 그녀의 얼굴은 레이스 달린 헤어네트를 쓰고 있으며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눈썹은 가장 얇은 아이펜슬로 그렸으며 눈은 감고 있고 두껍고 진짜 속눈썹 같은 눈썹은 공원에서 함께 보낸 나날들처럼 건강미 넘치는 뺨 위로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밀라미아의 입술은 내가 가까이 다가와 장난칠 수 있도록 화를 내는 척 하면서도 인상 쓰던 붉고 진중한 입술이었으며 손은 가슴위에 다소곳이 포개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 것과 똑같은 작은 로사이오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을 조르듯이 걸려 있다. 그녀는 어리고 깨끗하며 유순한 육체를 감싸는 희고 조그만 수의를 입고 있다.
늙은이들은 꼼짝하지 않은 채 흐느끼고 있다.
나는 팔을 뻗어 내 여자 친구의 도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스치듯이 만진다. 나는 죽음으로 가득 찬 이황실의 화려함을 이끌고 있는 공주 인형처럼 그려진 그 얼굴에서 한기를 느낀다. 도자기, 회반죽 그리고 솜.
아밀라미아는 네 친구를 잃지 않고 있어. 내가 그려준대로 이리로 날 차자와.
나는 가짜 시체에서 손가락을 땐다. 그러자 내 지문이 인형 피부위에 남는다.
그리고 대형초의 연기와 닫혀진 방속의 두형나무 냄새로 가득 찬 내 뱃속에서는 구역질이 날것만 같다. 나는 아밀라미아의 묘에 등을 돌린다. 중년 부인의 손이 내 팔을 만진다. 멍한 눈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떨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오지 말아요. 당신이 아밀라미아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아요.”
나는 아밀라미아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노인을 구역질날 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 방을 나와 거실로 향하는 계단을 거치고 정원을 지나 거리로 나온다.
5
1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틀림없는 것은 9개월이나 10개월 정도가 흘렀다는 사실이다. 그 우상에 대한 기억은 나를 더 이상 놀라게 하지 않았다. 나는 꽃향기와 차가운 인형의 이미지를 잊었다. 진정한 아밀라미아는 이미 내 기억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만족하지는 않을지라도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느꼈다.
공원과 살아 있는 소녀, 사춘기 시절의 내 독서는 병적인 것과도 같았던 환영을 극복했다. 삶의 이미지가 죽은 소녀의 이미지보다 더욱 강했던 것이다. 나는 죽음의 캐리커처를 이겨낸 나의 진정한 아밀라미아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인다. 그리고 언젠가 용기를 내어 내가 거짓 감정가격을 적었던 종이 노트를 다시 훑어볼 것이다. 그 노트에선 아밀라미아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글씨와 공원에서 자기 집으로 가는 약도를 그린카드가 다시 떨어진다. 나는 그 카드를 주으며 미소 짓는다. 나는 카드 한쪽 모퉁이를 살며시 물어뜯으며 불쌍한 노인 두 사람이 어쨌거나 이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재킷을 걸치고 휘파람을 불며 넥타이를 맨다. 그들을 방문해서 소녀의 글씨가 담긴 이 종이를 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단층집으로 달려간다. 비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고 그 빗방울은 금세 마술을 부리는 양 땅에서 축축한 축복의 냄새가 솟구치게 한다. 그 냄새는 썩어가는 땅 냄새를 제거하고 땅바닥 속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존재가 자라나게끔 서두른다.
나는 초인종을 누른다. 빗방울은 더욱 거세지고 나는 계속해서 초인종을 누른다. “곧 나가요!” 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영원한 로사리오 든 어머니의 얼굴이 나를 맞기를 기대한다. 나는 외투 깃을 올린다. 또한 비를 맞자 내 옷과 내 몸도 다른 냄새를 풍긴다. 문이 열린다.
“ 왜 그러죠? 아, 당신이군요. 어쩐 일로 왔나요?”
휠체어를 타고 있던 가짜 소녀가 내 구레나룻 위로 한손을 멈춘다. 그리고는 형언할 수 없는 인상을 지으며 내게 웃는다. 볼록 나온 가슴부분은 옷을 육체의 커튼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교태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흰 천은 이내 푸른색 체크무늬의 앞치마로 변한다. 그 조그만 여인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고 재빠르게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그리고는 꽁초에 오렌지색으로 칠한 입술의 흔적을 남긴다. 담배연기는 그녀의 아름다운 회색 눈을 찌푸리게 한다. 그녀는 외롭고 궁금해 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파마를 한 푸석푸석한 구릿빛 머리를 매만진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시선은 그 무언가를 갈망하기도 한다.
이제 그녀의 눈은 겁을 먹고 있다.
“카를로스, 안되요. 어서 가세요. 그리고 더 이상 오지 말아요.”
그 소리와 동시에 나는 집안에서 새어나오는 노인의 커다란 기침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린다.
“어디 있지? 초인종이 울려도 나가 보지 말라고 해잖아! 아직도 그걸 모르나? 어서 돌아와!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고! 다시 한번 채찍을 맞고 싶어?”
빗물은 내 이마로 그리고 나서 뺨으로 그런 후에는 입으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녀의 놀란 조그만 손은 싸구려 잡지를 축축한 묘위로 떨어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