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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마가복음의 관점과 구조
벤 위더링턴 / 애즈베리신학교 신약학 교수
복음서들에 대한 최근의 문학 비평은 ‘관점(point of view)’ 파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관점의 파악은 복음서 저자의 저술 목적을 해독하는 열쇠라고 볼 수 있다. 문학 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보통 저자는 독자를 이야기 속 인물의 입장에 세움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등장 인물의 관점에서부터 문제를 바라보도록 만들고자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저자는 때로 이야기 속의 여러 다른 요소들에 대한 그 중심 인물의 내밀한 사고를 보여주기도 한다. 중심 인물의 모습이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면, 독자는 거기에 매혹되어 보통 그 인물의 사물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중심 인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라고 말씀하신 대목에서 독자가 제자들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런 발언은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질 경우, 독자와 제자들의 사이를 멀리 떼어놓으며 동시에 독자를 예수님의 관점(이것은 저자의 관점이기도 하다)에 더 한층 굳게 묶어 놓는다. 마가복음에서 독자가 따라야 할 본보기로 제시되는 인물은 예수님뿐이다. 반면 제자들의 모습은 제자도에 수반되는 위험 요소들에 관해 어느 정도 경고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거기에는 이런 메시지가 숨어있다. “봐라, 최초의 제자들이 압박을 받으며 핍박에 직면할 때 주님의 기대를 어떻게 저버리고 있는지. 너희는 그렇게 행동하지 말아라.”
| 마가는 마치 밧모 섬의 요한과 같이 세상을 선과 악의 전장으로 인식하여 묵시적 관점에서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 |
마가복음의 묵시적 관점
그러나 관점에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그것은 ‘저자가 자료를 어떻게 선정, 배열하는가’라는 문제다. 마가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을 묵시적(apocalypice)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마가가 본문을 기록한 구조와 구성을 보면 그런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가복음이 묵시록이라는 뜻은 아니다. 마가복음 13장도, 종종 묵시록으로 불리지만, 실상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물론 마가복음 13장은 다분히 묵시록적 이미지를 지닌 종말론 강론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마가복음의 관점이 묵시록적이란 말인가? 밧모 섬의 요한이 세상을 보던 방식과 흡사하게 마가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가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인간과 귀신 사이의 전장(戰場)이다. 세상이 사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응당 해방돼야 한다. 강한 자는 더 강한 자에 의해 타도돼야 한다. 이 어둡고 위험한 세상 속에서, 제자들조차도 무언가를 바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의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 하지도 않는 우리의 무지의 담을 깨뜨려 버리는 계시가 필요하다. 인간에게 깨달음을 줄 뿐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비유와 수수께끼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당연지사다. 오래 전 다드(C. H. Dod)가 말했듯이, 인간의 마음을 들쑤쳐 적극적인 사고를 수행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한 은유적 이야기들이 쉽게 설명되어야 하며, 그래서 그 속에 담긴 비밀들이 베일을 벗고 잃어버린 영혼들 앞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베일을 벗는다 하더라도, 어둠 속에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던 나머지 두 눈이 빛에 적응하기 어려워진 자들은 그 비밀을 오해하거 나 거부한다.
따라서 마가는 예수님을, 판유리 창을 향해 진리를 돌처럼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가르치지만 말을 완곡하게 하거나 복음을 부드럽게 제시할 시간이 없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거칠고 논쟁적인 어조를 사용하실 때도 있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로 침투해 들어가야 할 때가 도래했다.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이야!’라고 외치는 사람처럼 복음은 사람을 깨울 수 있도록 격렬하게 선포돼야 했다. 예수님은 또한 귀신 추방자이시기도 했다. 우리는 그가 사탄의 앞잡이들과 싸워 이기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논쟁에서 대적자들을 쳐부수는 모습도 엿보인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적자들에게 부당한 공판을 받고 그들의 처형에 굴복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마가의 세계는, 역설로 가득 차 있으며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가 되고, 꼴찌가 일등이 된다는 이야기,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그 세계에서는 현명한 어른들이 아니 라 작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알려주는 모델이 된다. 이런 마가복음의 세계는 깜짝 놀랄 일과 역전이 가득한 세계다.
아마도 마가복음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들은 계시의 순간일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변화산상에서, 공판 시에, 십자가에서, 무덤에서 등이다. 이 모든 현장에서 빛이 뚫고 들어온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어둠을 꿰뚫고 자신을 알리고자 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 메시지가 마가복음만큼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별로 없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구원을 받는다. 마가는 독자들에게 인간의 자력자조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서두의 몇 개 이야기를 제외하고 제자들은 독자를 위한 긍정적인 모델로 등장하지 못한다. 어둡고 위험한 이 세상에, 사람들이 불만과 실망으로 인해 참된 길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빛이 있다 하더라도 암운이 그보다 한층 더 짙고 더욱 강력해 보일 때, 그리고 빛이 가물에 콩 나듯 겨우 한번씩 그 암운을 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일 때, 그 빛을 따르기는 어렵다.
묵시적 직무는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는 것
조얼 마커스(Joel Marcus)가 역설했듯이, 마가복음 10장 42절 같은 본문에 반영되어 있는 묵시 신앙에는 모종의 인식론이 깃들어 있다. 이 구절의 예수님 말씀의 서두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렇다. “열방을 다스린다고 생각되는 자들”(한글 개역,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 흔히 통치자로 생각되는 자들은 묵시록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실질적 통치자들이 아니다. 그들 배후에는 실질적인 통치자, 하나님과 사탄이 각각 무수히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서 있다. 묵시록적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일들이 현재 이와 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의 무대 뒤에서 무언가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혹은 적어도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 양편 모두에서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비밀들을 밝혀내고 휘장을 걷어내며 인간의 모든 삶을 통제하는 근원적 힘을 드러내는 일은 묵시록적 선견자가 감당해야 할 직무이다.
이런 묵시록적 사고방식에 병행하는 한 가지 인식론은, 그런 일들에 대한 참된 지식이 계시를 통해 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식은 타고난 총명함이나 근면한 학문연구에 의해 획득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누구이고 그가 왜 죽어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도 포함된 다. ‘아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임하게 하시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혜롭게(nounechos) 말하는 그 서기관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은 것이다(Joel Marcus)’. 따라서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비밀에 관한 마가의 관심은 하나님,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 생명에 관한 본질적 진리들이 오직 계시로 말미암지 않고는 획득될 수 없다는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이런 면은 다니엘서나 쿰란의 묵시록적 자료에서 발견되는 것과 흡사하다.
마가복음과 묵시문헌 간에는 그밖에도 또 하나의 유사성이 있다. 이 지식은 오로지 내부인들에게만 완벽하게 계시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비밀들은 오로지 제자들에게만 계시된다. 이것은 바룩2서 48장 2~3절과 조화를 이룬다. ‘너는 많은 이들에게 너희 비밀을 밝히지 말라.’ 그러나 내부 그룹에게도 완벽한 지식은 종말 때에야 비로소 온다(고전13:12 참조). 이것은 제자들의 몰이해에 관한 마가복음의 주제에 뭔가 빛을 던져주고 있다. 제자들의 이해가 이처럼 더뎠던 한 가지 이유는 가장 본질적인 지식,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관한 지식이 사실상 부활 사건 이후에야 찾아왔다는 사실에 있다. 부활 사건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전하게 시작된다. 게다가 초자연적 선이나 악의 영향력은 대단히 강력해서 인간의 사고까지 통제할 수도 있다. 일례로 마커스는 마가복음 8장 33절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더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령하셨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생각이 어둠의 왕의 영향력 하에서 나온 것임을 암 시하고 있다. 나아가 마커스에 의하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믿을 채비를 갖춘 사람이 일부에 불과함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일 수도 있으나,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과 비수용적인 토양에 떨어지는 씨앗을 말하고 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의하면 그의 견해가 옳을 수도 있다. 더욱 분명한 것은 귀신들과 군중들의 현저한 대조성이다. 군중과 달리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적 비밀이 감추어져 있지 않았다. 반면 군중은 비유들과 씨름해야 했으며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음 후 무덤에서 부활하시자 또 하나의 반전이 발생한다. 그닐카(J. Ginilka)가 말했듯이 공생애 시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밀 엄수를 명하시고 공개적 선포를 금하셨지만 부활 후에는 비밀에 대한 공개적 선포를 명하셨다. 말하자면, 부활 전에는 공개적 선포가 주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으나 부활 후에는 비밀 엄수가 불순종이 된 셈이다. 사실, 부활 후에 하나님의 통치가 보다 완벽하게 임하고 비밀주의와 악의 어두운 구름이 지배하던 때가 지나 ‘완벽하게 드러나는 시대(마커스)’가 도래했다는 게 마가의 견해였을 수도 있다. 마가도 아마 또 한 사람의 신약성경 기자처럼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시다(요일4:4)’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가운데 청중의 미래를 다루고 있는 유일한 부분인 마가복음 13장 같은 본문을 때, 마가가 그럼에도 여전히 박해와 고난, 거짓 메시아들이 지평선에 어렴풋이 등장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가복음에는 묵시적 관점의 또 한 가지 측면이 나타나 있다. 마가는 종국에 가서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사실을 명료히 보여주고자 애쓰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막13장). 그리고 사실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 무서운 과오와 죄악을 저지른 후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일으킴으로써(막16:6~7) 그의 옳음을 증명하셨을 때도 그러한 공의는 이미 드러났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 힘입어 밧모 섬의 요한은 요한계시록 20~21장에서 승리를 묘사하며 작품을 종료시킨다. 그리고 공의 실현이라는 이 요소는 마가가 그의 복음서를 16장 8절에서 끝냈다고 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묵시 신앙가는 어느 날 공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 공의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그 승리를 미리 기술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8절만으로는 불같은 시련 아래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별 위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그 뒷부분의 내용도 필요했다). 그 말씀만으로는, 그들이 투기장에서 검과 맹수를 만났을 때 그들의 마음이 강철같이 강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가의 이야기 서술은 이런 묵시록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마가복음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점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다른 세 복음서와 다르다고 본다. 예컨대, 이 면과 관련해 기타 복음서가 마가복음과 어떻게 다른가를 한 가지씩만 지적하라 한다면, 요한복음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없다는 점이고,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을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사적인 계시보다 공적인 계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며, 누가복음은 의도적으로 미래의 종말론을 덜 강조하고 구원역사의 점진적 드러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또한 이 묵시적 관점은 마가복음의 예수님 묘사를 여러 가지 면에서 역사적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기 인식에 가장 가깝게 만드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 마가복음 본문의 구조를 미시적으로 분석하면 삽입법과 이중 기법 등을 통한 이야기들의 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 |
마가복음의 미시적 구조
마가복음의 구조에 관해서는 미시적(微視的) 분석과 거시적(巨視的) 분석이 둘 다 가능하다. 미시구조 분석의 한 가지 좋은 예가 마가복음 2장 1절~3장 6절의 논쟁 기사에서 엿보이는 전후 대칭 구조(chiasm)일 것이다. 듀이는 이 부분의 패턴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J. Dewey. “The Licerary Structure of the Controversy Stories in Mark 2,1~3.6,” in The Interpretation of Mark, ed. W. R. Telford, pp.141~51).
𝙰 2:1~12 중풍병자의 치유
B 2:13~17 레위를 부르심/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C 2:18~22 금식 및 새 것과 옛 것에 관한 말씀
B' 2:23~27 안식일에 이삭을 자름
A' 3:1~6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
보다시피 이 단락은 치유 기사가 서두와 말미에서 전체의 틀을 형성하고 있으며, 먹는 것과 관련해 두 개의 논쟁 단위를 내포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 근거를 중앙부에 두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규칙적으로 발견되는 또 한 종류의 구성 장치는 이른바 샌드위치 기법 혹은 삽입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두 이야기를 한데 엮을 때, 첫 번째 이야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두 번째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첫 번째 이야기가 전체의 틀 역할을 하도록 하는 기법이다. 이런 사례가 최소한 7개는 발견된다는 게 학자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1) 바알세불 논쟁이 예수님과 그의 가족 의 대면 사이에 끼어 있음(3:20~21, 22~30, 31~35);
(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 안에 혈루증 앓는 여인의 치유 기사가 삽입되어 있음(5:21~24, 25~34, 35~43);
(3) 열두 제자의 파송과 귀환 사이에 헤롯의 잔치 기사가 나옴(6:7~13, 14~29:30~44);
(4) 무화과 나무 사건이 예수님의 성전 내 행위를 전후로 두르고 있음(11:12~14, 15~19, 20~25);
(5) 예수님 살해 음모 기사 안에 예수님이 죽음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이 나옴(14:1~2, 3~9, 10~11);
(6) 예수님에 대한 공판 사이에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나옴(14:53-65, 66~72, 15:1-15);
7) 예수님에 대한 공판과 처형 사이에, 조롱의 대관식이 나옴(15:6~15, 16~20, 21~32).
이런 기법을 사용한 목적은 아마, 각 경우 마다 독자로 하여금 두 이야기를 상호간에 비추어 읽고 하나로 다른 하나를 해석해 보도록 권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점은 무화과 나무와 성전사건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마가의 헬라어에 세련미가 없다는 사실이, 그가 자료 배열에서 모종의 문학적 솜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마가가 사용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이중 기법이다. 예컨대 기적적인 음식 제공 내러티브(5천명과 4천명을 먹이신 사건)와 갈릴리 바다 위에서 있었던 제자들의 오해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이 이 야기들은 상호 번갈아 등장한다(6:3-44 오천명을 먹이심; 6:45~52 바다 위 이야기; 8:1~9 사천명을 먹이심; 8:10, 14~21 바다 위 이야기).
또한 주요한 두 덩어리의 가르침 자료도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에 있었던 가르침이며(막 4), 다른 하나는 생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가르침이다(막13). 이런 이중 기법은, 이전 기회에 배우지 못했던 제자들의 우둔함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그들의 과실을 돋보이게 하는 그런 역할을 수행한다.
|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응답, 그의 사명 선언과 성취는 마가복음 전체의 기독론적인 거시 구조를 결정한다. |
마가복음의 거시적 구조
지금까지 우리는 마가복음의 미시구조만을 언급했다. 이에 관해 아직도 할 말이 많지만 이제는 거시구조로 관심을 돌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은 수사 의문이나 실제의 물 음 등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대답 없이 그냥 지나간다(참조. 1:27, 2:7 4:41, 14:4, 16:3). 파울러(Fowler)는 마가복음에서 약 114개의 질문을 찾아내고 그 중 77개가 무응답 혹은 수사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하나의 전기에서 이런 장치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제기하고 대답하고자 하는 하나의 거대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따라서 이런 질문들에 입각해, 마가복음의 구조는 몇 부로 다소 깔끔하게 나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제1부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의 제기가 부각되고 있다.
| 예수님에 대한 마가복음의 질문들 | ||
| 1:27 | 이것이 무엇인가? 권세 있는 새 가르침인가? | 군중 |
| 2:7 |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서기관들 |
| 2:16 | 어찌하여 그는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 서기관들 |
| 2:24 | 저희가 어찌하여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는가? | 바리새인들 |
| 4:41 |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 제자들 |
| 6:2 |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었는가? | 고향 사람들 |
| 7:5 | 당신의 제자들은 왜 유전대로 살지 않는가? | 바리새인들 |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개괄적으로 구성할 때,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일단 응답되면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가가 밝혀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에서 인용한 모든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질문으로서 그가 누구인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장치이다.
이 모든 질문에 이어 결국, 8장 27~30절에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최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온다. 8장 27-30절의 질문과 대답은 거기까지 이어지는 내러티브의 클라이맥스이며 이야기의 주된 전환점이다. 이 확인 작업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실제적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들 수 있다. 이 설명은 세 장에 걸쳐 세 번 되풀이된다. 8장 31절, 9장 31 절, 10장 32-34절이 그것이다. 이 사명 선언의 골자는 인자가 고난과 거부를 당하고 제 3일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 질문들 | 누기이며 왜인가? | 1장-8:27 |
| 질문(누구인가)에 대한 응답 |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 8:27-30 |
| 사명이 무엇인가? | 고난의 사명 | 8:31, 9:31, 10:32 |
| 사명의 성취 | 수난 내러티브 | 11-16장 |
마가복음에서 제기되는 허다한 질문들을 공정하게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난에 대한 강조 및 수난 내러티브에 주어지는 지면도 바르게 평가한 이 단순한 개요에는, 살을 붙일 만한 몇 가지 함축적 의미들이 있다. 첫째 이 개요는, 마가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마가의 교회내에 존재한 교회론적 갈등이나 그리스도인 제자도에 관한 사항(이것도 실은 마가복음에서 중요한 부차적 주제이지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이라는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마가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신학적이라는, 보다 정확히 말해, 기독론적이라는 의미이다. 마가는 먼저 기독론적 질문에 바르게 대답한 연후에야 예수님이 왜 죽어야 했는가를, 혹은 그의 죽음이 긍정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를 참되게 이해 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학자들이 메시아의 비밀을 이 복음서의 주요 모티프(motif)로 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다음으로, 마가복음의 구조에 관한 또 하나의 거시적 분석을 여기에 제시하고자 한다. 마이어(C. Myers)는 세 기둥의 이야기들이 마가의 기록을 단단히 고착시키고 있으며 세 기둥은 각각 묵시록적인 각도에서 묘사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세 이야기는 마가복음의 서두, 중간, 말미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세, 변모,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마이어는 이 자료의 평행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세례 | 변모 | 십자가에 못박힘 |
| 하늘이 갈라지고 비둘기가 내려옴 | 의복이 희게 변하고 구름이 내려옴 | 성전 휘장이 갈라지고 어둠이 내려덮임 |
| 하늘에서 들여오는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 구름에서 들려오는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 예수님의 큰 음성 “이 사람은 하나니미의 아들” |
|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 | 예수님이 엘리야와 함께 보임 |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
이 세 번의 순간은 독자들의 이목을 예수님의 정체에 집중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따라서 이 사건들은 저자의 전기적 묘사를 강화해주고 있다. 마가복음의 모든 이야기가 이러한 색조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계시가 빈번히 나타나는 게 아니라 간헐적으로 어둠을 뚫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마가가 분명히 하기 원했다는 뜻이다. 이 세 순간은 확실히, 1:1의 주제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공된 마가의 기사에서, 고도의 계시적인 순간들이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인정을 받았던 그 왕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임을 이 세 순간들은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이 복음서는, 특별히 황제직이 계속 바뀌고 있었던 시대에, 정치적 위험성이 잠재한 주제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끝으로 여기서 필자는 위로부터 내려온 묵시적인 계시의 순간들 외에도 내러티브 속에서 등장하는 폭로의 순간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후자의 예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이야기, 유대인의 예수님 공판 절정 부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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