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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작은 형제회 소속 데오빌로 수사님의 블로그에서 가져 왔습니다.
시온 수녀회-엑체호모 아치와 리토스트로토스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채찍성당’ 바로 옆에는 ‘시온 수녀회 엑체호모 수녀원’(Notre Dame de Sion - Ecce Homo Convent)이 자리하고 있다. 이 수녀원은 프랑스의 스트라스브르그(Strasburg) 지방의 ‘마리아 알폰스 라티스본(Fr. Marie Alphonse Ratisbonne) 신부에 의해 설립된 수도원이다. 그는 1842년 동정 마리아의 발현 기적을 체험한 후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였고, 특별히 유대인들의 개종을 목적으로 남녀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구 예루살렘 시가지 항공사진. 왼쪽 위쪽 사각형 모양이 예루살렘 대성전이고, 대성전 중앙에 노란것이 이슬람에서 만든 예언자 마호멧이 승천했다고 하는 바위돔 사원.
아래 로마숫자는 십자가의 길 각 처 위치이며, 시온 수녀회는 II 위치. X...XIV 위치가 예수님 무덤성당
십자가의 길을 하고 있는 신자들...
엑체호모 아치
1855년 예루살렘에 온 라티스본 신부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는 ‘엑체호모 아치’를 보고 크게 매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엑체호모’ 아치가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끌려 나왔고’(요한 19,1-5참조), 이 때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님을 보이며 “자, 이 사람이오”(라틴어로 Ecce Homo) 라고 말하였던 곳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요한 19, 5)
사진왼쪽 위쪽에 있는 14번이 엑체호모 아치, 아치 왼쪽에 있는 16번이 엑체호모 대성당, 도면에서 좌우를 가로질러 있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이 양쪽에 있는 10번이 리토스트로토스, 아래쪽 10번 아래쪽에 있는 3번이 스트루씨온 저수조
길 위에 3중문 형식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앙에 있는 아치가 십자가의 길에서 볼 수 있는 아치임.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아치는 엑체호모 대성당 중앙제대 뒤쪽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왼쪽 신자들이 십자가의 길 2처 기도를 바치고 있고, 길 중간에 보이는것이 엑체호모 아치
엑체호모 아치와 오른쪽은 엑체호모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리토스트로토스 입구
엑체호모 아치
엑체호모 아치...왼쪽은 엑체호모 대성당으로 연결되어 있다.
옥상에서 바라본 '엑체호모 아치'. 아래쪽 중간에 열려진 창문이 있는것
엑체호모 수도원 대성당 입구
엑체호모 수도원 간판
엑체호모 수도원 지하실에 있는 '리토스트로토스' 안내판
그는 1857년 아치와 폐허가 된 북쪽의 땅을 시온 수녀회의 부지로 구입하였고, 1868년 수도원과 성당을 완공하였다. 시온 수도회에서는 1931-33년과 1934-37년 두 차례에 걸쳐 고고학 발굴을 하였는데, ‘아치’(요한 19,5)와 석판으로 깔린 포장도로인 ‘리토스트로토스’(요한 19,13)를 발굴 하였고, 이곳이 바로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빌라도 총독의 법정자리(마태 27,2)라고 확신 하였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하였지만 성난 군중들의 성화에 못 이기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재판석에서 예수님을 넘겨 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요한 19, 13)
수녀원 입구...안내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지하 저수조로 내려가는 계단
앞쪽 두개의 통로는 '리토스트로스토스'로 들어가는 입구
리토스트로토스...예수님을 재판했던 재판석이 있었던 '석판으로 깔린 포장도로'인 리토스트로토스
리토스트로토스의 왼쪽 길...
리토스트로토스의 중간길...
리토스트로토스의 오른쪽 길...길 안쪽엔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자이크화...
리토스트로토스 경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리토스트로토스 북동쪽 발굴위치
전시관 - 발굴된 유물들...
1970년대에 들어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곳의 유물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 재위)가 건설한 예루살렘 북동쪽 광장의 한 부분으로 판명되었다. 1884년 요르단의 ‘마다바’에서 발견된 6세기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성지(聖地) 지도인 ‘마다바 모자이크’에는 예루살렘의 북쪽 성문인 다마스커스 성문 안쪽에서 남북으로 관통하는 로마식 대로인 ‘카르도’가 있고 또한 다마스커스 성문 안쪽 광장에서 스테파노 성문(사자성문)을 거쳐 ‘새 성당’과 ‘통곡의 벽’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이어져 있다. 이 길이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의 길이었을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마다바 모자이크에서 중간 왼쪽이 4번이 '다마스커스 성문', 중간 위쪽에 있는 1번이 '스테파노 성문(사자성문). 2번이 성 안나 성당이며, 3번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으로 현재는 파괴되어 없고, 중간 아래쪽에 있는 7번이 예수님 무덤 성당, 그리고 11번이 시온성문...그러므로 4번과 11번을 잇는 대로가 로마식 도로인 카르도이고, 14번에 네아 성당(새성당), 15번이 통곡의 벽, 16번이 대성전, 17번이 황금문, 18번이 안토니아 요새이다. 4번과 14번 네아 성당을 잇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고, 엑체호모 아치는 이 십자가의 길 위에 있었다.(다마스커스 게이트쪽으로)
요셉푸스에 의하면 제1차 유대항쟁을 진압한 로마군들은 대성전과 함께 안토니아 요새를 허물었다. 그리고 제2차 유대항쟁을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예루살렘은 로마식 성문과 광장, 카르도와 신전 등이 건설되며 ‘엘리아 카피톨라’로 명명되었다. 다마스커스 성문 안쪽에는 로마식 광장을 건설하게 되는데, 안토니아 요새 근처에 있던 작은 저수조인 ‘스트루씨온’(Struthion, 그리스어로 ‘참새’를 뜻하는데 저수조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참새의 저수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함)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구조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이 저수조 위에 아치를 만들어 그 위에 지붕을 덮고 석판을 깔았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광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세 개의 아치형으로 세웠는데, 이 아치 중 가장 큰 것을 ‘엑체호모 아치’라고 부른다.
사진 오른쪽 위쪽에 있는 사각형 모양의 4개 타워가 있는것이 안토니아 요새이고, 4개 타워 중 오른쪽 아래쪽으로 연결된 저수조가 바로 스트루씨온 저수조. 엑체호모 시온 수녀회는 스트루씨온 저수조 위에 지어져 있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출발점 위에 위치한 이 아치는 중세 십자군 시대부터 로마 병사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시고 본시오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할 수 있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이 아치는 그 옆 액체 호모 대성당으로 연결되며 대성당 안에서는 북쪽의 작은 아치의 단면도 볼 수 있다.
엑체호모 대성당 내부
엑체호모 대성당 제대 위 십자가 모자이크
엑체호모 대성당 중앙 제대 뒤쪽 감실이 놓여 있는 곳은 엑체호모 북쪽 소형 아치를 그대로 사용함
엑체호모 수도원 소경당
소경당에서 바라본 엑체호모 대성당의 색유리
스트루씨온(Struthion) 저수조
하스모니아 왕가 시대(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수로를 통해 대성전 저수조로 물을 끌여 들였는데, 헤로데가 안토니아 요새 주변에 호를 건설하면서 이 수로의 일부와 저수조가 손상 되었다. 그 후 이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가 이 저수조 위에 로마식 광장을 만들면서 저수조 위에 둥근 천장을 만들었고, 다시 저수조로 사용하였다. 현재 엑체호모 수녀회의 대부분은 이 스트루씨온 저수조 위에 지어져 있다.
저수조로 내려가는 계단
저수조 내부...내부 구조물은 입구쪽에서 난간을 만들어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도록 설치한것임.
물이 고였던 흔적...이끼
저수조 양쪽 중간 벽쯤에 있는 밖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수로구멍
밖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게 한 수로구멍
밖에서 빗물을 모아 저수조 안으로 들어오게 한 수로를 확대한 모습
왕 놀이
엑체호모 수도원의 지하에는 로마식 포장도로가 있는데, 포장에 사용된 약 1㎡ 크기의 4각형 돌 위에는 로마 병사들이 놀이한 게임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이 중 하나가 주사위 게임을 하는 ‘왕 놀이’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들은 이 게임처럼 예수님을 어릿광대 왕으로 조롱하고 처형하였다.(마르 15,16-20; 마태 27,27-31; 요한 19,2-3)
돌 바닥 위에 새겨진 로마 병사들의 놀이 흔적
리토스트로토스 돌바닥에 새겨져 있는 로마병사들의 게임놀이 판
엑체호모 수도원 옥상 전경 - 왼쪽 쿠폴라는 엑체호모 대성당, 오른쪽은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곳 위에 세워진 아랍 초등학교가 있는 모스크 탑, 쿠폴라와 모스크 탑 뒤쪽으로 보이는 산등성은 올리브 동산
엑체호모 수도원 옥상 전경 - 왼쪽 노란 쿠폴라는 대성전 안에 지어진 바위돔 사원
엑체호모 수도원 옥상 전경 - 크레인 바로 오른쪽에 있는것은 유대인지역에 지어지고 있는 회당, 그 오른쪽에 있는 두개의 타워는 시온산에 있는 성모님 성지인 도르미시오와 베네딕도회 수도원 종탑
엑체호모 수도원 옥상 전경 - 하늘과 맞닿은곳을 3등분 하여 왼쪽 1/3지점에 있는것이 무덤성당쪽에 있는 루터교회 종탑, 2/3지점에 있는 작은 종탑은 뉴게이트쪽에 있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종탑. 그리고 두 종탑의 중간에 있는 조금 올라와 보이는 곳이 예수님 무덤성당
엑체호모 수도원 옥상 전경 - 예수님 무덤성당쪽에 있는 루터교회 종탑, 루터교회 바로 뒤쪽에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곳은 '다윗 성'
엑체호모 수도원 옥상 전경 - 중간에 둥근 두개의 쿠폴라는 예수님 무덤성당. 작은 쿠폴라는 카톨리콘이고, 오른쪽 쿠폴라는 예수님 무덤 위.
엑체호모 수도원 옥상 전경 - 중간에 있는 종탑은 뉴게이트쪽에 있는 작은형제회 수도원 종탑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 53, 3)
안토니아 요새(안토니아 성)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마태 27,27-28)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마르 15,15-18)
헤로데(기원전 37-4년 재위)는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한때 하스몬가의 요새가 있던 ‘바리스(성)’ 자리에 후원자 마르코스 안토니우스에게 경의를 표하여 기원전 31년에 가장 전략적인 자리인 예루살렘 대성전(현 회교 대사원) 북서쪽 즉 성전 벽의 모퉁이에 요새를 세우고 ‘안토니우스’에게 헌정하였기 때문에 ‘안토니아 요새’라고 부른다. 약 50미터 높이의 암석 위에 세운 이 요새는 자연적인 방어 능력이 없는 성전 북쪽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하였고, 헤로데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성전 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도록 했다.
아래 사진은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제2성전시대 예루살렘 대성전 모형...아래 사각형 건물이 대성전이며 오른쪽 뒤쪽에 4개의 탑이 있는곳이 안토니아 요새.
중앙 4개의 탑이 안토니아 요새
안토니아 요새가 있고...사진 아래쪽 중간지점에 있는것은 베짜타 연못
사도 바오로가 성전 뜰에서 연설하다가 군중들에게 붙잡혀 죽게 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를 체포했던 로마군은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로마군 수비대장은 사도 바오로가 폭동을 일으켰다가 사천여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이집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사도 21,27-40 참조) 천인대장이 바오로를 진지 안으로 끌고 가 채찍질을 하여 심문하려고 하자 바오로가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여 위기에서 모면한 곳이기도 하다. 천인대장은 바오로를 풀어주고 유다인들이 왜 그를 죽이려는지 알아보려고 최고의회를 소집 하였고(사도 22,22-30 참조), 급기야 바오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자 천인대장은 바오로를 카이사리아에 있는 펠릭스 총독에게 호송시켰다.(사도 23,12-35참조)
안토니아 요새는 내부 폭이 약 120×45미터였고 스파르타식 군대 막사는 없었다. 군사용 부속건물 외에 호화스런 주거지와 목욕탕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그 장엄함이 마치 왕궁처럼 보였다’(유다 전쟁사 5.5.8)라고 보고한다. 이 성은 유다전쟁(66년)때 전소, 파괴 되었고, 70년 티투스 황제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다.
이 안토니아 요새 자리에는 현재 ‘엘 오마리에’ 아랍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바로 맞은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원과 ‘’엑체호모 시온 수녀원 그리고 바로 그리스 정교회의 ‘예수님 감옥’ 수도원이 있다.
아치가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왼쪽이 작은형제회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오른쪽 아치가 연결된 부분이 '엘 오마리에' 아랍 초등학교로 들어가는 문...
엘 오마리에 초등학교로 오르는 계단에서 찍은 사진. 가까운쪽에 보이는 쿠폴라는 '예수님 사형선고 성당'이고 안쪽 끝부분에 보이는 검정 쿠폴라는 '엑체호모' 수녀원의 대성당 쿠폴라.
엘 오마리에 아랍 초등학교...철책문 너머로 보이는 운동장이 공식적인 십자가의 길을 할때 1처가 시작되는 곳.
엘 오마리에 아랍 초등학교
사진에서 보이는 탑은 작은형제회 수도원에서 바라본 '엘 오마리에' 초등학교와 붙어 있는 이슬람 사원
겟세마니 동산에서 성 스테파노 게이트(사자 게이트)를 통과해서 조금 걷다보면 오른쪽에 작은형제회 수도원이 나온다. 이곳은 현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감옥’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곳인데 수도원 안에는 ‘채찍성당’과 ‘사형선고 성당’이 있고 1927년에 설립된 ‘프란치스칸 성서대학’과 박물관이 있다.(현재 ‘그리스도의 감옥’이라고 부르는 곳은 조금 더 지나 시온 수녀원 건물과 맞닿아 있는 곳에 그리스 정교회에서 기념 성당을 가지고 있다.)
작은형제회 수도원 입구...
입구를 들어서며...
앞쪽...사람이 '사형선고 성당'의 쿠폴라
수도원 회랑...왼쪽이 박물관
오른쪽 건물이 수도원
프란치스칸 성서대학으로 들어가는 입구
프란치스칸 성서 대학 입구
박물관...단체 예약 필요
작은형제회 정문 맞은편에 있는 이스라엘 초소...이스라엘 정부는 통곡의 벽에서부터 서쪽벽을 따라 이곳까지 고고학 발굴을 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이쪽이 출구...항상 사복 경찰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곳...
채찍성당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마태 27,26)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르 15,15)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요한 19,1)
‘채찍 성당’은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셨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곳 위에 지어졌다. 중요한 유적들이 남아 있는 이 중세풍의 성당은 한때 마구간(1618년)이었고 직물점이기도 했다가 그 후에는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38년 이집트 출신 작은형제회원인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가 ‘바비에른’의 공작인 ‘막시밀리안’(Maximilian, Duke of Bavaria)이 기증한 돈으로 이 땅을 구입하였고, 1839년 예배의 장소로 복원 하였다. 그 후 1927-29년에 12세기 풍으로 완전히 새롭게 재단장 하였다. 채찍 성당에서 두드러진 것은 제대를 중심으로 3개의 창문이 있는데 ‘채찍질을 당하는 예수님’(마태 27,26), ‘손을 씻는 빌라도’(마태 27,24) 그리고 바라빠의 승리’(마태 27,21)가 색유리로 묘사되어 있다.
작은형제회 수도원을 들어가서 오른쪽 작은 건물이 '채찍성당'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성당 출입문...채찍
성당 내부
채찍성당 제대
채찍성당 감실
채찍성당 후면
채찍성당 제단 왼쪽의 유리화 : ‘‘손을 씻는 빌라도’(마태 27,24)
채찍성당 제단 중앙의 유리화 : 돌기둥에 묶여 채찍질을 당하는 예수님’(마태 27,26), 이 돌기둥의 일부는 현재 무덤성당 발현경당 오른쪽에 모셔져 있음
채찍성당 제단 오른쪽의 유리화 : 바라빠의 승리’(마태 27,21)
채찍성당 제단 중앙의 쿠뽈라
채찍성당 : 독서대
채찍성당에서 기억하고 있는 성인들 : 성모님
예수님을 모신 요한사도
사도 바오로; 사도 바오로도 한때 안또니아 요새에서 갇혔고, 이후 가이사리아에 있는 총독에게 호송됨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에서 제2의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성인.
‘채찍 성당’을 나와 회랑을 조금 걷다보면 왼쪽에 있는 것이 ‘사형선고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리토스트로토스’가 시작되는 곳으로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곳이다.
사방 10m의 정사각형의 구조인 성당은 1903-4년에 작은형제회 고고학자인 벤데린 기에르릭(Br. Vendelin Gierlich of Mandel)이 발굴 작업을 하였는데 성당 동쪽 끝에 내민 반원 부분에 비잔틴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이곳에서 이슬람 사원의 미랍(무슬림들이 기도할 때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데, 방향을 알려주는 움푹 파인 형태의 구조물)이 발견되어 한때 이곳에 작은 이슬람 사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당 천정은 다섯개의 쿠뽈라로 성지관구의 십가가모양으로 만들었다.
성당 중앙 쿠뽈라
쿠뽈라를 장식한 색유리...천사들이 수난의 악기를 들고 있는 모습
중앙의 대형 쿠뽈라와 그 곁으로 네개의 작은 쿠뽈라...
'사형선고 성당'의 중앙 제대
사형선고 성당 문을 들어서서...
제대 중앙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며 손을 씻는 장면이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마태 27,24)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마태 27,26)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루가 23,25)
예수님께서 걸어 내려오고 있는 계단은 '거룩한 계단'(Santa Scala)라고 합니다. 이 계단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에 의해서 로마로 옮겨갔고, 현재는 라떼라노 대성전 옆에 위치한 '싼타 스칼라'(Santa Scala)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싼타 스칼라 성당을 순례할땐 아래 계단부터 28개가 되는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는것이 순례 전통입니다.
그리고 제대 왼쪽은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결박당한 채 끌려가는 모습이며, 제대 오른쪽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이시다. 성당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정면은 십자가의 길 4처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의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제단 정면 양쪽에 있는 예수님 상 아래에는 비잔틴 시대의 성당 유물을 볼수있습니다.
‘사형선고 성당’ 입구에서 마주하는 벽면 아래쪽에는 로마 병사들의 ‘게임’이 그려진 '리토스트로토스' 바닥돌이 놓여 있다. 이곳은 ‘엑체호모’ 시온 수녀회의 지하에 있는 ‘리토스트로토스’로 연결된 도로의 시작점으로 사형선고 성당과는 담벼락으로 막혀 있을 뿐이다.
왼쪽 사진 의자 발 아래에 그어져 있는게 로마 병사들의 게임입니다. 그리고 큰 돌들은 '리토스트로토스'로 연결되는 도로의 시작지점입니다.
성당 뒤쪽으로 해서 '엑체호모' 시온수녀회로 바닥이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때리며 그분 얼굴을 가리고 "알아 맞추어 봐라, 너를 후려친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 밖에도 모독하면서 갖은 욕설을 그분에게 퍼부었다. (루가 22,63-65)
[이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그들은 그분의 겉옷을 나누고자 주사위를 던졌다. (루가 23,34)
또한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서 그분의 머리에 얹어 놓고 그분의 오른손에는 갈대를 들렸다. 그리고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조롱하며 "유대인들의 왕, 만세!" 하고 소리 질렀다. 또 그분에게 침을 뱉은 다음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쳤다. 그렇게 그분을 조롱하고 나서 망토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러고는 십자가형에 처하기 위해서 그분을 끌고 갔다. (마태 27,29-31)
'사형선고 성당' 밖에 있는 고고학 발굴 유물들
제2성전시대의 예루살렘
이곳에서부터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곳
성 안나 성당과 벳자타 연못
1. 성 안나 성당
성 안나 성당은 올리브 동산쪽으로 나 있는 스테파노 성문(사자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교회가 예수님 강생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서 구세사 안에서 이루어진 성모님의 업적에 대해서도 소중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성 요아킴(Joachim)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기원 후 170-18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으로 간주하지만, 마리아의 부모와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하여 야고보의 원복음서를 비롯한 몇몇 외경과 전승을 바탕으로 5세기 말부터 안나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벳자타 연못가를 거룩한 곳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안나와 요아킴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예루살렘 성전과 가까운 “양의 우물” 인접한 곳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마리아 탄생성당”(오늘날의 성 안나 성당)을 건립하고, 성당 축성일인 9월 8일에 성모 탄생 축일을 지내왔다.
그 후 이 성당은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130년경 십자군의 볼드윈 1세 부인 아르메니안 여왕 아르다(Arda)는 수도원에 거금을 기부하고 두 개의 교회를 짓도록 하였다.
성 안나 성당은 성모님이 태어난 동굴 위에 지어 성모를 나아 준 안나에게 봉헌한 교회로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이다. 특히 고딕식 둥근 지붕이 아름다우며, 음치가 노래를 해도 천상의 소리로 들릴 정도로 완벽한 내부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기도 하다. 또한 십자군들은 벳자타 연못위에 예수님의 기적을 기억하는 작은 경당과 기념성전 근처에 거대한 수도원을 지었다.
예루살렘 라틴왕국이 멸망한 후 십자군이 지은 대부분의 기념 성전들은 파괴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성 안나 성당만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덕분에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이 파괴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였고, 대신 무슬림 신학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성 안나 성당은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성전 건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성전이기도 하다. 기념성전 출입문 위쪽을 보면 아랍어로 쓰여진 현판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무슬림들이 소유했었다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0-1856.2 :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 이 전쟁은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나, 러시아가 투르크 제국 내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 되어 일어남. 또한 팔레스타인의 성지에 대한 러시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권한을 놓고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분쟁 또한 주요 요인으로 작용함) 후 안나 성당은 오스만 터키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게 양도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빠드레 비안키 수도회(Padre Bianchi-아프리카 선교 사목을 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빠드레 비안키’는 ‘백인 신부 수도회’를 의미한다. 흑인인 아프리카인들이 선교사 신부들을 백인 신부님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듯...)에 위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전의 중앙 제대는 예수님의 유년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오와 루가 복음 사가가 전하는 상징이 조각되어 있다. 성당 우측 중간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경당이 나오는데, 성모님의 부모인 성녀 안나와 요아킴 성인이 살았던 동굴에 지은 기념 경당이다. 동굴 옆 중앙 제대는 아기 마리아에게 봉헌 하였다.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까닭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느님께 순명하심으로써 구세주 그리스도의 강생에 온전히 협력하셨기 때문이다.
아래 예루살렘 성전 도면에서 "성전" 위쪽 왼쪽에 있는 "아치"는 예수님께서 사형 언도를 받았고, 십자가의 길을 시작 했던 안토니아 총독 관저 자리. 바로 오른쪽 조금 위쪽에 벳자타 연못이 있었음. 바로 그곳이 성 안나 성당과 벳자타 연못이 있는 자리..
아래 도면에서는 7번이 지성소의 자리...8번이 안토니아 성곽(총독관저), 9번이 벳자타 연못이고...10번 자리가 골고타 자리(지금의 예수님 무덤성당 자리)
사진 왼쪽 아래가 대성전 북쪽 끝자리이고.. 아래 성곽 출입문이 '성 스테파노 성문' 또는 '사자성문'이고 스테파노 성문을 들어서 오른쪽 붉은 기와로 되어 있는것이 벳자타 연못임. 아래 사진은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 모형"
아래 모형도는 "갈리깐뚜"(베드로 회개 성당) 안에 있는 것으로 사진 아래쪽 사각형이 대성전의 자리이며, 오른쪽에 스테파노 성문이 보이며 스테파노 성문 옆 오른쪽에 있는것이 성 안나 성당임.
벳자타 연못의 도면
성 안나 성당(벳자타 연못) 출입문쪽에서 바라본 스테파노 성문(사자성문)
왼쪽 건물 출입문이 성안나 성당(벳자타 연못)으로 들어가는 수도원 입구이고, 길 끝쪽에 있는것이
스테파노 성문임.
성곽 투어 중 스테파노 성문 바로 위에서 바라본 도로...사진 중간 3사람이 있는 곳 오른쪽이 성 안나 성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쪽...도로를 따라 쭉 가면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는 곳이 나옴...'안토니아 성'이 있었던 자리...
성안나 성당(벳자타 연못) 출입문.
"동정 마리아의 탄생지"와 "벳자타 연못"을 알리는 현판
성 안나 성당 - 빠드레 비안키 수도원 - 그리스 가톨릭 신학교...그리스 가톨릭 신학교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있었다고...
성안나 대성당...벳자타 연못 현판
출입문을 들어서서...
출입문을 들어선 후 출입구쪽을 바라보고...
빠드레 비안키 수도원 건물
스테파노 성문으로 가는 도로에서 수도원을 바라보고...
출입문 안쪽...
정원...동상은 빠드레 비안키 수도원 창립자인 "라비제리에" 추기경
수도원 정원쪽...
정원...대추야자 나무 뒤쪽에 성안나 성당이 있음...
성안나 성당으로 들어가는 왼쪽편에...서쪽 연못의 남동쪽 코너의 위치 표시...
남쪽 연못의 코너로 내려가는 계단...
성안나 성당의 정면...오른쪽 종탑 위에는 프랑스 국기가...
왼쪽 건물이 성안나 성당이고, 도로 끝쪽이 성안나 성당으로 들어오는 출입문쪽...
구 예루살렘 성곽 투어를 하면서 바라본 성 안나 성당...오른쪽 십자가 형태로 되어 있고, 둥근 돔이 있는 곳...중앙엔 황금돔사원이 보임...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이며, 솔로몬이 대성전을 짓고 계약의 궤를 모셨던 지성소가 있었던 자리에 이슬람이 모하메드의 승천을 기념하여 지은 오마르 사원
성곽 투어를 하면서 바라본 성안나 성당의 지붕...
성 안나 성당의 출입문...
출입문 위쪽...아랍어로 쓰여진 현판...십자군의 라틴제국이 망한 후 살라딘은 성 안나 성당의 아름다움을 때문에 파괴하지 않고 무슬림 신학교로 사용했었음을 보여주는...
성당 내부...
성당을 들어서 왼쪽에 있는 성 안나와 어린 마리아의 동상...
성당의 독특한 내부 구조로 인하여 음치가 노래를 해도 천상의 소리로 들린다고...누구나 자유롭게 성가를 불러 볼 수 있는 곳임...
중앙 제대...예수의 유년기를 다루고 있는 마태오와 루가 복음의 일화가 조각되어 있음...
제대쪽에서 바라본 성당 출입문...
성당 왼쪽...감실제대...
성당 오른쪽 제대...
성당 천장...
제대 위 돔....
성 안나 성당 오른쪽엔 마리아가 태어난 동굴로 내려가는 계단이...
성모 마리아의탄생지...
성모 마리아의 탄생 동굴...
성모 마리아의 탄생 벽화...
동굴 중앙엔 아기 마리아에게 봉헌된 제대...
성모 마리아의 탄생 이콘...
2. 벳자타 연못 [벳자타(새성경), 베짜타(공동번역), 베데스다(개신교)]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그 뒤에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요한 5,1-9)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을 가진 벳자타 연못은 제2성전의 북동쪽 밖 가까운 곳인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양문(Sheep Gate, 느헤 3,1; 요한 5,2) 곁 키드론 계곡의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는 사자성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스테파노 성문 근처에 있는 성 안나 성당 경내에 그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이 연못은 기원전 8세기에 ‘윗 저수지’라고 불리는 연못(이사 7,3; 2열왕 18,17)이었다. (이사 7,3 :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2열왕 18,17 : 아시리아 임금은... 그들이 올라와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그들은 올라와 그곳에 이르러, ‘마전장이 밭’으로 가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곁에 주둔하였다.) 기원전 200년경 대사제 시몬의 시기에 두 번째의 연못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여 진다. (집회 50,1-3 :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은 대사제로서 생전에 주님의 집을 수리하고 자기 생애에 성전을 견고하게 만들었다...그는 자기 생애에 저수 동굴을 팠는데 그 웅덩이 둘레는 바다 같았다.)
벳자타 연못은 키드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공급하였고, 종교적이고 의학적인 치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특별히 연못의 동쪽은 기원전 150년에서 기원 후 70년 사이에 치유와 종교적인 목적으로 욕실과 동굴들이 만들어져 대중적인 치료센터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요한복음 사가에 의하면 다섯 개의 회랑이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하셨다. 연못은 직사각형의 형태로 깊이가 20m 정도 되었고, 120 x 60m의 크기였다.
유대의 2차 항쟁을 진압한(134년경) 로마 아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엘리아 키피톨리나”로 개명하고 벳자타 연못 위에는 ‘치료의 신’인 에스쿨라피오(Esculapio) 신전을 만들었던 것으로 고고학 발굴결과 밝혀졌다.
로마 이교 신전이 세워졌던 자리에 5세기에는 성모님께 봉헌된 비잔틴 대성당이 지어졌다. 위경인 야고보 복음에서는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성전 근처에 살았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의 중앙 본채는 연못의 중앙 회랑 위에 위치시켰고, 가대는 이교신전이 있던 방향에 두었다. 북쪽의 넓게 자리한 곳에 위치했던 경당의 발굴 작업에서 바닥에 화려하게 장식한 십자가 모자이크가 발견 되었는데 이것은 비잔틴 대성전이 427년 이전에 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거룩한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밟혀질 수 있는 바닥 장식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기념성전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십자군은 요한복음의 치유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잔틴 성전의 폐허 위에 작은 기념 성전을 지었다. 이 기념 성전은 비잔틴 성전의 유적들 위에 그 골격이 남아 있다. 고고학 발굴 작업은 1871년에 실시되었고, 두드러진 발굴 작업은 마리아 성년인 1954년과 1957년에 이루어졌다. 발굴 작업을 통해서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성전의 골격을 볼 수 있는데 깊은 연못 위에 건물을 지탱하기 위한 웅장한 버팀목 돌기둥들이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기념성전 끝에는 벳자타 연못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을 내려가면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물 저장소가 나온다. 벽에 회칠을 하여 물이 세어나가지 않게 한 후 물을 저장했던 곳이다.
성 안나 성당과 벳자타 연못은 크림 전쟁 후 1856년부터 프랑스 정부의 소유로 비안키 수도회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요한복음 5장의 말씀....
벳자타 연못 중앙에는 비잔틴 교회 건설하기 위해 만들었던 방벽을 볼 수 잇음...아래엔 고인 물이 조금...
비잔틴 교회의 방벽과 연못...그리고 그 위쪽엔 십자군 시대에 지은 기념 경당의 모습이...
비잔틴 교회의 흔적들...이곳엔 여러 동굴들과 욕조들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 치유를 목적으로 지었던 동굴들과 욕조들임...
건물의 골격이 남아 있는것은 십자군 시대에 지은 예수님의 병자 치유를 기념한 기념 경당임...
십자군이 지은 치유 기념 경당...
연못의 자리에 고여 있는 물...
십자군 시대에 지은 기념 경전의 안쪽...
그림자 안쪽에 사람이 있는데...철구조물이 있는 부분...이곳 계단으로 내려가면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물저장소를 볼 수 있음...벳자타 연못 위에 지어진...
물이 고여 있기 때문에 이끼가...
어둡기 때문에 바로 물을 볼 수는 없지만 인내를 가지고 잠시 기다려보면 고인 물을 볼 수 있음...
금방이라도 물이 출렁거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것만 같은 진한 감동을... 8월 중순까지는 물이 고여 있었는데 그 후 10월에 다시 갔었을땐 말라 있었음....
계단을 내려가 고여 있는 물을 볼 수 있다면...천사들이 내려와 금방이라도 물을 휘젖고 갈것만 같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것입니다.
아래 5번 숫자가 있는 곳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한 곳이라고...
동굴들과 욕조들이 있는 곳...
“건강해지고 싶으냐?” (요한 5, 6)
좋은 순례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