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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의 신학적 주제들
더글라스 무 /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신약학 교수
야고보서의 신학
어떤 이들은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전적으로 ‘신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야고보서에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에 대한 언급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사역, 성령의 사역, 교회의 신학적 의미,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약성경의 성취 등의 신학적인 주제는 야고보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기록되었으며,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신약의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전에 목회했던 성도들에게 그들의 신앙 생활 가운데서 드러난 어떤 문제들에 대해 책망하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야고보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러한 교리들에 대해서는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 야고보서의 신학에 대한 보다 심각한 도전은 아마도 야고보가 자기의 가르침에 대해서 기독론적인 근거를 대지 못한다는 지적일 것이다. 사실 야고보는 예수님에 대해 단 두 번밖에 언급하지 않는다(1:1; 2:1). 따라서 ‘신학’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기초한 신념 체계로 정의한다면,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는 지나치게 편협한 것이다. 만일 ‘신학’의 정의를 보다 확대하여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가르침까지도 신학으로 본다면, 야고보서는 철저하게 ‘신학적’인 서신이 될 것이다. 사실 야고보서의 거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들과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호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야고보서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영향을 많이 보이는 책은 없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신학을 주장한다고 해서 야고보가 바울보다 덜 신학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명의 목회자로서 야고보는 바울처럼 신학적인 독창성이 두드러진다거나 폭넓은 신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가 바울보다 덜 ‘신학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서신이 가진 간결성과 그 목적으로 인해 ‘야고보서의 신학’을 개괄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야고보가 몇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기여한 공헌들은 특별히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
‘신학(theology)’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에 대한 교리(doctrine of God)’로 정의한다면, 야고보서에서는 그러한 신학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권면의 근거를 하나님의 속성에서 자주 찾기 때문이다. 프랑케묄레(H. Frankemolle)는 야고보서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야고보는 자신의 모든 핵심 개념들을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시킨다고 지적했다. 야고보서 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이 특별히 중요하다. 즉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질투와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이다.
야고보는 물론 유일신론자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바른 교리의 한 예로 인용하고 있다(2:19). 그리고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입법자와 심판자는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4:12). 그러나 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단일성(oneness)에 대한 야고보의 강조이다. 번역상의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1장 5절은 아마도 하나님을 ‘단일 의지(Single)’, 곧 우리의 필요를 공 급해 주시려는 한 가지 의지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의 불변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며, 사람으로 죄를 짓게끔 시험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1:17). 이 때 야고보의 초점은 제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처럼 자기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마7:7 ~11)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야고보는 더 나아가 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에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2:11).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단일성은 야고보에게 있어 특별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그러한 속성은 인간 존재의 속성, 곧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가며 ‘두 마음을 품는(1:8; 4:4, 8)’ 경향성과 직접적인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에서는 기독론이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야고보가 유일신론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어떻게 연결시켰을 것인지에 대한 어떤 증거도 찾기 힘들다. 야고보는 ‘주’라는 칭호를 주로 하나님을 언급할 때 사용하지만(3:9; 4:10, 15: 5:4, 10, 11, 15), 동시에 예수님에게도 그 칭호를 사용한다(2:1; 5:7, 8). 그리고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리켜 ‘심판자도 하나이요(4:11)’라고 주장하는 한편, 5장 7, 9절에서 는 예수님이 종말론적 심판자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야고보의 이와 같은 도식에서 삼위일체론의 초기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야고보는 자신이 물려받은 유일신론적 신앙고백에 어떤 수정을 가하지 않고도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는 칭호들과 역할들을 예수님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속성의 두 번째 요소, 곧 하나님의 질투하심 역시 매우 전통적인 것이다. 이 특성은 야고보서 4장 5절에 단 한 번 언급된다. 이 구절의 의미를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많은 토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하심에 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세상과 벗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야고보가 이 한 구절에서만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속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개념은 야고보서의 논의에 핵심적인 것이다.
같은 문맥속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질투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두렵고, 어떤 면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요구일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그처럼 엄격한 요구를 하시지만, 동시에 ‘더욱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4:6)’고 힘주어 말한다.
2. 종말론
야고보서의 주된 특성들 중 하나는 유대교와 헬라의 도덕적인 가르침들을 광범위하게 빌어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권면이 그런 가르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도덕적인 권면을 종말론적인 상황 가운데 둔다는 사실이다. 물론 야고보서의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미래적 종말론이다.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바른 태도와 행동을 가지도록 자극하기 위해 다가오는 종말에 대해 자주 경고한다(1:10~11; 2:12~13: 3:1: 5:1~6, 9. 12). 그리고 그는 그들이 기꺼이 주를 위해 살면 장차 누리게 되는 상급이 있음을 상기시킨다(1:12; 2:5: 4:10: 5:20). 대부분의 초대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심판의 날과 상급이 임박했다고 주장한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시니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5:8~9)’ 야고보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느꼈던 ‘임박성(nearness)’은 다음의 두 가지 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메시야가 오셨고 새 시대가 동텄으므로, 하나님의 타임테이블로 볼 때 역사의 종말이야말로 그 다음에 성취될 사건이라는 확신과 (2)역사의 정점(culmination)은 언제든지 도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야고보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오실(would come) 것이라고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이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could come)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 그들이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미래적 종말론이 야고보서의 지배적인 관점이기는 하지만, 야고보는 기독교적 실존이 가진 현재적 종말론적 특성 역시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다(2:5)’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 나라가 미래에 유업으로 얻을 나라인지 아니면 택함 받은 자들이 현재에도 소유하고 있는 나라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2장 8절에 언급되어 있는 ‘왕국의 법(the royal law: cf. 한글 개역성경: ‘최고의 법’)’이나 ‘그 나라의 법(the law of the kingdom)’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후자의 개연성이 훨씬 높다. 야고보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게 하는 중생(1:18)’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는 5장 3절은 야고보가 신자들이 이미 종말론적 완성의 시기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야고보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미 성취를 누리고 있다’는 신약성경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우리가 야고보의 윤리적 가르침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 hot yer)’의 긴장관계 하에서이다
3. 율법
율법 자체는 야고보서의 주된 주제가 아니다. 율법에 대한 언급은 다른 이슈들에 대해 권면하는 문맥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야고보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1:25)’에 대해 언급한다.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을 차별 대우하는 것(partiality)을 책망하면서 그것을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royal law)’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규정한 다(2:8). 같은 문맥 속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통일성을 거듭 강조하고(2:10~11), 성도들이 ‘자유의 율법대로(2:12)’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율법 자체에 대한 비방과 비판을 드러낸다는 이유에서 형제에 대한 비방을 정죄한다(4:11). 이런 구절들이 야고보의 율법 이해를 충분히 밝혀 주지는 않지만, 이 구절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야고보의 율법 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야고보는 의식법(the ritual law)의 준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둘째, 유대인들은 율법을 ‘왕국의(royal)’ 법으로 불렀다. 그러나 야고보가 율법에 대해 이와 같이 서술하는 문맥을 잘 살펴보면,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기독교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2장 8절의 ‘왕국의(βασιλικός)’라는 형용사는 2장 5절의 ‘그 나라(βασιλεία)’에 대한 언급과 연관지어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2장 8절에서 인용되는 사랑에 대한 계명은 왕되신 예수님께서 그 법을 선언하셨 기 때문에, 혹은 그 법이야말로 예수님이 세우신 그 나라의 주된 법이기 때문에 ‘왕국의’ 법이라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율법에 대해 언급할 때, 이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토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까지 포함하는 언급일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서 1장 25절의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에서 보다 분명한 암시를 얻는다.
이방인들, 특히 스토아 철학자들과 유대인들은 법에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앞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1:22~23) 바로 그 문맥에서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이 ‘말씀’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심겨진’ 것으로(1:21), 그리스도인들이 중생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수단으로서의 ‘진리의 말씀(1:18)’을 말한다.
여기서 야고보는 우리가 신학적인 의미에서 ‘율법(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 명명하는 것과 ‘복음(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이 어떻게 밀접하게 상호연관이 되는지를 분명히 밝힌 다. 이 양자는 얼마나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가? 어떤 학자들은(Mayor, Cutbord) 야고보가 율법과 복음을 통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야고보에게 있어 ‘율법’은 더 이상 구약의 법, 토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곧 그 나라의 ‘법’이다. 이 법에는 구원으로의 초청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요구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레위기 19장을 자주 암시한다는 사실과 유대 기독교의 초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가 구약의 율법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야고보가 율법을 성도의 ‘마음속에 심겨진’ 것으로 말할 때 이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의 ‘새언약’에 대해 암시하는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야고보는 ‘율법’이라는 말로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의 독자들이 율법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복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축복들을 받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보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구약의 율법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전제 하에 야고보가 구약의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지속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을 가능성이다. 그 나라의 법으로서의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한 야고보의 호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의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암시는 야고보서 전반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율법을 분명하게 구분 짓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의 가르침과 율법은 서로 엉겨붙어 있는 것이었다. 자유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행동 표준을 진술하는 한 방식이다(Wessel). 이 행동 표준은 여전히 율법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구원의 새 시대에도 토라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뜻으로 계속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의 율법이다. 왜냐하면 그 율법은 ‘멍에가 쉽고 짐이 가벼운’ 주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4. 지혜
야고보서는 종종 지혜 문학으로 분류된다. 이런 분류는 야고보서가 잠언과 같은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다소 일반적인 도덕적 어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지혜’라는 말을 단 두 번밖에 언급하지 않는다. 1장 5절에서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로 하여금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험을(1:2~4을 보라) 이해하게 하고, 그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처럼,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통찰력을 말한다.
이러한 지혜를 가지면 영적인 성숙에 이르게 된다(1:4). 야고보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15절)’와 ‘위로부터 난 지혜(17절)’를 분명하게 대조시키는 3장 13~18절에서도 지혜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이 구절에서도 지혜는, 구약성경에서처럼, 행동과 결부되어 있다. 그릇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다투기를 일삼고, ‘무질서와 모든 악한 일들’에 얽매이게 된다(16절).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겸손하고, 선한 행위를 하는 데 힘쓴다(13절). 이러한 종류의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17절).
그러나 지혜가 야고보서의 실제적인 주제가 되는 문맥은 단 한군데도 없다. 야고보서에서 지혜가 하는 역할은 다만 병행구절들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5. 가난과 부
“가난과 경건에 관한 구약과 후기 유대교 전승의 제요소들 가운데 야고보서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요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Musner).”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에 대해 우리가 먼저 이해 할 때.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서와 특별히 연관성이 있는 세 가지 요소들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가난하고, 압제받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시며(시68:5),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 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신10:18).’ 그래서 야고보도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2:5)’고 주장한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가난하고 압제받는 자들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신명기 10장은 계속해서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19절)’라고 말씀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이러한 명령을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스라엘을 책망했다(암2:6~7을 보라). 야고보도 마찬가지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제시한다(1:27).
구약 전승의 세 번째 요소는 특별히 시편에서 두드러지는 것으로, ‘가난한 자’를 의인과 연계시킨다는 것이다(시10; 37:8~17: 72:2. 4, 사29:19). 가난한 사람은 부자들과 권세자들에 의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고난에서 구해 주시고, 악한 압제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본문들에서 구약 기자들은 ‘가난’이라는 경제적인 범주와 ‘의’라는 영적인 범주를 통합시키는 것 같다. 한편 비슷한 방식으로 ‘부자’는 종종 악인과 연결된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 다수가 가난하고 압제 당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신학적 상황을 반영한다. 야고보서 역시 이와 유사한 상황가운데서 기록된 것 같다. 예수님의 팔복 중 한 구절(눅6:20)을 암시하는 가운데,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 지를 주목한다(2:5). 예수님의 부자에 대한 심판(눅6:24) 역시 야고보서 5장 1~6절에서 야고보가 강한 어조로 부자들을 정죄할 때 그대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 전승에 근거를 둔, 부자들에 대한 이와 같은 강한 어조로 인해 야고보서는 성경에서 해방신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야고보가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와 의인을 동일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와 악인을 동일시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반면, 부자와 권력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빈부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구약 전승 역시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빈부 사이에 그다지 분명한 도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가 종종 하나님의 관심과 구원의 대상으로 묘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단순하게 의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자’라는 말도 악인의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1:10). 1장 10~11절은 야고보의 상황을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이 구절의 ‘부유한 사람’이 누구나에 대해, 특별히 그가 ‘형제(Cf. 1:9)’인지 아닌지에 대해 주석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나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형제라고 한다면, 이는 야고보가 부와 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며, 가난한 자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야고보가 5장 1~6절에서 부자에 대한 정죄를 정당화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따라서 야고보서를 해방신학을 지지하는 논거로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제적인 수준과 영적인 수준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야고보서에 대한 ‘해방신학’의 오해를 바로잡는다고 야고보가 부자의 부와 권력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이 생필품이 없어 고통하고 있을 때,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5:2~3).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심각하게 들어야 하는 말씀이다. 압제를 당하는 이들은 가난과 부에 대한 야고보서의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좀더 편안한 삶을 구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야고보의 메시지를 희석시키려는 경향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6. 그리스도인의 삶
야고보서가 신약 성경의 신학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이 있다면, 아마도 윤리 영역에서 일 것이다.
먼저, 야고보의 윤리는 그의 종말론의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야고보의 권면은, 종종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 가르침의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적어도 암시적으로는 ‘중생은 받았지만(1:18)’ 아직 ‘구원은 받 지 못한(1:21: cf. 2:15: 5:20)’ 독자들의 상태에 언제나 그 초점이 놓인다.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이 죄의 영향을 전적으로 피하지는 못할 것임을 인정한다(3:2).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 족함이 없게 되기를(1:4)’ 추구하라고 권면한다. 야고보가 ‘두 마음을 품는 것(dipsychos)’으로 표현하는 인간의 ‘영적 분열증(dividedness)’은 독자들이 처한 문제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1:6). 이러한 ‘분열증’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입으로 축복과 저주를 말할 때(3:9~10), 그리고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면서도 그에 걸맞게 살지 않을 때(2:14~26), 그들의 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양분성에 대해서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성숙으로 진보하도록 요청한다.
야고보서를 말할 때 가장 자주 언급하는 내용은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1: 22). ‘행위를 통해 역사하는 믿음(2:14 ~26)’에 대한 야고보의 강조 역시 똑같은 관심을 드러낸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초지일관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은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2:8). 그러므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세상에서 소외받고 불쌍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에서(1:27).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온유하고 비이기적인 태도에서(3:13~18)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은 경건은 차별 대우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2:1~13). 다른 사람에 대해 비방하지도 않는다(4:11~12).
기도는 야고보가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또 다른 요소이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각양 좋은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며(1:17). 자기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1:5) 상기시킴으로 우리가 기도하도록 격려한다. 그리고 야고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기도 응답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 필수적인 것은 바로 믿음이다(1:6~8; 5:14). 우리가 이 기적인 동기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4:3).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5:17~18) 그는 엄청난 기도 응답을 경험할 수 있었다.
7. 믿음과 행위와 칭의
야고보서가 신약신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하고도 논쟁이 많은 공헌이 있다면, 그것은 칭의와 관련된 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가르침일 것이다(2:14~26). 사실 많은 신학자들은 야고보가 바울이 가르치는 ‘이신칭의’라는 중요한 교리와 모순을 보이는 것 같기 때문에 야고보서에 대해 주목한다. 그러나 이것은 야고보서를 적절하게 다루는 태도가 아니다. 야고보는 나름대로의 논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논지를 성급하게 신학적인 틀에 맞추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야고보는 기독교가 황폐화되고, 말만 무성한 ‘정통주의’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냐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은 항상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믿음이란 언제나 불가피하게 의로운 삶을 통해 그 증거를 드러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거듭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 것이며(2:20)’,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6)’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이유이다.
야고보에 의하면, 단지 입술의 말뿐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러한 믿음은 다만 성경적인 믿음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믿음은 죄인을 의롭게 하지도 못할뿐더러(2:24), 죄인을 심판에서 구하지도 못한다(2:14). 야고보는 믿음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헌신으로 본다(2:1). 이 믿음은 시험을 통해 연단되고 정제되며(1:2, 4),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게 한다 (1:5~8: 5:14~18). 야고보가 믿음에 대해 ‘기독교에 부차적인’, 혹은 ‘바울의 이해에 부차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실 믿음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야고보와 바울은 완벽하게 서로 일치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의 유명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확실히 받게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야고보서 2장의 가르침은 구원에 대한 신인협력적인 이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 같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통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장 큰 선물들 중에 하나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중생케 하셨다(1:18)’.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토대이다(2:1).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2:22~23). 그러나 야고보는 최종적인 구원,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 야고보서 2장의 ‘칭의’- 사람의 행위가 고려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새언약’의 언어로 재해석된 언약적 율법주의의 기본적인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게(get in)’ 되지만, 그 관계에 ‘머무는(stay in)’ 것은 ‘그 나라의 법(2:8)’에 순종함을 통해서인 것이다.
많은 해석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와 같 은 결론을 내리는데 동의한다.
우리는 ‘행위’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그리스도인들의 행위 자체가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의 열매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비추어 읽을 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야고보서에서 신인협력론적 구원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행위로 돌리는 바울의 견해에 비추어 봄으로써 야고보가 말하는 그 어떤 내용과도 모순되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야고보가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지는 않지만, 구원을 하나님만의 행위로 보는 견해는 2장의 참 믿음에 대한 강조에 잘 들어맞는다. 명심해야 할 것은 야고보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야고보는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위(work)’가 따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믿음의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을 하나님의 행위로 돌리는 것은 야고보의 이런 통찰과 결코 거리가 먼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1장 18절에서 중생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Laato). 그렇다면 신학적인 측면에서 바울과 야고보는 상호모순을 일으키기보다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이다. 그러나 참 믿음은 불가피하게 하나님이 마지막 때 각자를 심판하실 때 고려하실 행위를 낳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가 이 구절들에서 말하는 것은 그가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을 맞섰 던 바울과는 달리 야고보는 입술로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순종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바울이 행위가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야고보는 행위가 심판 때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율법주의를 공격한다면, 야고보는 정적주의(quictism; 17세기 말의 일종의 종교운동)을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의 메시지 모두를 들을 필요가 있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 행위를 강조했던 중세 카톨릭 신학에 맞서서 바울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복음의 도덕적 명령에 대해 무관심한 교회에 맞서 야고보의 관점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도, 참 믿음은 행위로 분간되고 행위가 따르는 믿음이야말로 구원얻는 참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계속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인정한다(3:2를 보라). 따라서 그는 우리가 100퍼센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몇 퍼센트 정도의 순종이면 되는가? 구원 얻는 참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행위가 있어야 하는가? 물론 야고보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야고보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입술로는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데 무관심한 사람이 과연 구원 얻는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지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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