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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이해를 위한 배경연구
김경진 / 기독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본글을 시작함에 있어서 하나의 전제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제3복음서의 저자 누가가 쓴 누가복음이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 예수님의 삶과 교훈은 복음서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공관복음뿐 아니라 요한복음에도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주제를 다루려면 당연히 한 권의 복음서만을 다뤄서는 안 되고, 네 복음서 모두를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복음서의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의 견지에서 접근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관심은 역사적 예수님이 아니라 그 역사적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교회공동체에게 전달하는 복음서 저자 누가의 신학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여기에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의 신학과 (역사적) 예수님의 신학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가 이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차이점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인데, 그렇다면 그 차이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흔히 차이점이라고 하면 상위(相違)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것은 차이점이라기보다는 ‘확대된 관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은 복음서의 기본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역사), 각 복음서 저자들은 그 배경이 되는 교회공동체의 상황과 그 안에서 논의가 되는 문제들과 또 그 청중을 고려하여, 자료들을 추가 혹은 생략함으로써. 또는 이야기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결코 동일하지 않은 복음서를 저술하였기 때문이다(해석).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적 사실에 해당하는 뼈대가 되는 예수님의 신학에, 그 역사적 사실의 해석에 해당하는 각 복음서 저자의 신학이 추가되어 복음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의 관심이 되는 것은 확대된 관심인 제3 복음서의 저자 누가의 신학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학과 복음서 저자의 신학이 과연 다른가 하는 점이다. 성령이 성경의 제1저자(著者)이고, 복음서 저자들을 포함하여 성경 기자들은 모두 제2저자임을 기억할 때, 예수의 영(靈)인 성령이 각 저자 들에게 영감(靈感)을 주어 기록한 글이라면, 구태여 예수님의 신학과 복음서 저자의 신학을 구분 지을 필요는 분명 없는 것이다. 이를 테면, 누가의 신학은 누가로 하여금 그렇게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도록 만든 성령 하나님의 신학과 다를 수 없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누가의 신학은 곧 하나님의 신학, 또는 예수님의 신학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이해할 것만은 아닌 것은, 마태, 마가, 누가의 신학의 독특성과 차별적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분을 또한 ‘긍정적으로’ 인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하여 안타깝게도, 오늘날 복음서 연구에 있어 양극화(兩極化) 현상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한쪽에서는 복음서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다양성을 무시하여, 어느 복음서를 연구하든지 모두 다 예수님의 신학으로만 귀속시키려는 과도한 단순화 (treductionism) 현상이 발견된다. 이것은 복음서를 통일성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려는 시도로서, 다분히 디아테사론(Diatessarwn)적 오류를 범할 우려를 낳게 된다. 하나님은 통일과 조화의 목적만을 위하여 하나로 단순화시켜 이해하도록 네 권의 복음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교회사적으로 성령과 교회가 디아테사론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런 시도에 대한 성령과 교회의 판단이라고 우리는 이해한다. 따라서 복음서를 예수님의 객관적 역사적 전기(傳記)로 보아서 이런 방식으로 복음서를 한데 섞거나 혼합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분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까지는 좋은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다양성을 구성하는 복음서 사이의 차이점을 모순(矛盾)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다양성이 모순으로 간주되면, 복음서는 결국 실수와 오류가 있는 인간들의 책으로 전락되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시도의 약점을 간파한 후, 통일성을 전제로 한 다양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 복음서 연구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방향성에 의거하여 본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누가복음의 역사적 배경
우리의 관심이 1세기 초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이 아니라 그것을 근거로 하여 확대되어 기록된 누가복음에 있다고 한다면, 누가복음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복음서 개론에서 논의되는 주제인데, 사실 학자들간에 의견이 통일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필자가 기술하는 것은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의 일반적 경향을 반영한 것임을 밝혀 둔다.
누가복음의 역사적 배경은 결국 기록연대와 무관하지 않다. 이 문제에 있어서, 복음서 기록연대 추정에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는 주후(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이 누가복음에서는, 예언적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마가복음과는 달리(막13:14),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어(눅21:20), 대체로 주후 70년 이후로 본다. 이와 함께 마가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임박한 종말론 경향이 완화되어 나타나고(눅19:11, 21:8/막13:6), 핍박적 요소가 희석되어 나타남으로 인해(눅9:23), 대체로 80년대 무렵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은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를 70년 이전, 좀더 구체적으로 주후 65~69년 사이로 간주하고, 이 마가복음을 누가가 참조했다고 가정할 때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경과 같은 고 대 문서의 기록연대를 정확하게 언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와는 다르게 주장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추정은 단지 하나의 가능성 있는 주장으로 남아 있다.
누가복음의 문화적 배경
누가복음의 문화적 배경을 말하자면, 자연히 누가복음의 배경이 되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일부 학자들 은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구체적인 공동체를 상정(想定)하는 것 자체를 부인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복음서는 국지적인 어느 한 지역에 위치한 교회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시•공간적 한계를 벗어나서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복음서에 대한 기존의 견해와 사뭇 다른 것이어서 여기서 약간의 논의가 필요할 줄로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복음서 기록의 배경과 동기에 대하여 먼저 잠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첫째로, 성경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복음서 저자들이 처음 복음서를 기록할 때부터 그 책을 (구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성경으로 인식하고 책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은 1세기 말에 가서야 비로소 정경(正經)으로 인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인정한다 해서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는 정경이 아니었다가 후대에 비로소 정경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처음 기록될 때부터 성경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의 제1저자이신 성령이 기록할 당시부터 이미 영감(靈感)으로 인간 저자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적어도 그 저자 자신은 그런 의도나 목적을 갖고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로, 그러면 왜 누가나 마태가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복음서를 기록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복음서가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책이라면, 구태여 같은 이야기를 중복하여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또한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동일 사진이나 교훈의 중복 혹은 복음서 사이에서 발견되는 내용과 구조상의 차이점은 혼란을 불러올 것이므로, 유익(有益)하기보다는 오히려 유해(有害)하였을 가능성이 더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난점을 알면서도 그들이 새로이 또 다른 복음서를 써야 했던 것은 결국 그 배경이 되는 공동체의 상황과 문제 및 청중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이야기만 갖고는 누가의 공동체에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답을 줄 수가 없었기에, 누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 채, 마가복음의 자료 중 일부는 생략하고, 또 자신만의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여, 마가복음과는 매우 다른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서신도 그러하지만, 복음서 역시 그 배경이 되는 공동체의 상황이 그 기록 목적에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아울러 이 시점에서 우리가 누가의 교회, 혹은 공동체라고 부르는 그 교회의 공간적 장소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수리아의 안디옥이 지목되고 있음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도행전은 안디옥교회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최초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진 곳이 안디옥이고(행11:26), 또한 최초로 예루살렘 모(母) 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낸 것도 안디옥이며(행11:27~30), 또한 최초로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한 것도 안디옥이다(행1:3-4).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의 세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이 안디옥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묘사하고 있는 누가의 사도행전과는 달리, 정작 바울서신 자체에는 안디옥에 대한 언급이 겨우 한 번 등장한다(갈2:11). 이 점을 들어 일부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소속되었던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까닭에 비록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가 곧 누가복음의 배경 및 수신처였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며, 만일 이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누가의 공동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혀 부재(不在)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마태의 공동체나 마가의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의에 따를 때 누가복음의 문화적 배경, 즉 누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이제까지 전통적인 견해는 누가 공동체가 이방인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친(親) 이방적 성향을 띠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누가복음의 보편주의적 특징이다. 보편주의(universalism)란 유대인들만의 구원을 강조하는 특수주의(particularism)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것으로 이방인들을 배려하고 또한 그들의 구원을 인정 및 수용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이 보편주의가 부각되어 나타나는 복음서가 바로 누가복음이다. 예를 들면, 그 기원이 하나님까지 올라가는 족보(눅3:23~38), 사마리아인들을 포함하여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이방인=눅2:32; 4:25~27; 14:23; 사마리아인=눅9:52~56; 눅10:30~37; 17:11~19), 만민(萬民)이란 용어의 잦은 사용(눅2:29~31; 3:4~6; 24:47)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것들이다.
둘째로, 대표적 수신자로서의 데오빌로를 들 수 있다. 우선은 ‘데오빌로’란 이름 자체가 헬라식 이름이고, 그에게 붙여진 ‘각하’라는 칭호를 고려할 때 분명 로마제국 내의 고급관리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자연히 그는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책의 제작과 출판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준 후견인(patron)에게 책을 헌정하는 당시의 그리스-로마 사회의 문학적 관습에 따라 누가-행전이 데오빌로에게 헌정되기는 하였지만(눅1:1~4; 행1:1). 결코 그 한 사람만을 위하여 두 권의 긴 책이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데오빌로는 대표적 수신인으로서 등장하는 것이고, 누가는 데오빌로와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그 책들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셋째로, 그밖에 이와 관련된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①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식 호칭인 랍비가 나타나지 않는다. ②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란 유대 용어가 생략되었다(막11:10; 마21:15). ③십자가 처형 장소를 가리킬 때 마태(27:33), 마가(15:22), 요한(19:17)복음이 골고다라는 히브리 지명을 쓰는 반면, 누가는 ‘해골’이라는 헬라 지명을 사용한다(23:33). ④유대 지역 및 관습을 설명하는데, 무교절 축제를 유월절이라 하는 것으로(22:1), 아리마대를 유대인의 동네(23:51)라고, 엠마오를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십 오리 되는(24:13) 곳으로 설명한다. ⑤마태복음과는 달리(마23:1~36)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이 약화되어 나타난다(11:37~52). 이는 누가복음이 1세기 유대교의 문제에 대하여 별관심이 없었음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반대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들은 누가복음을 보면, 이방인들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무런 설명 없이 등장하고, 또한 유대적 용어들, 즉 하나님의 나라, 인자(人子) 등의 용어가 역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누가의 공동체 내에는 분명히 유대인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대적 용어의 사용은 아마도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시행된 개종자, 혹은 초신자 교육의 내용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이러한 유대적인 내용들에 대한 설명 없이도 누가는 자연스럽게 이들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누가의 공동체는, 역시 이방인 중심의 마가의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이 유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차이점이라면 마가복음의 배경은 시골적이라고 한다면, 누가복음의 배경은 다분히 도시적이라는 점이다. 누가는 마가보다 도시를 가리키는 폴리스를 네 배나 더 많이 사용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대체로 도시 중심의 사역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울러 이와 함께 부자들에 대한 언급이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은 누가-행전이 도시적 환경 및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일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의 사회적 배경
누가복음의 사회적 배경은 같은 공관복음인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차이를 야기하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핍박, 임박한 종말론, 빈부 및 재물 문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
첫째로, 우선 두드러진 것은 핍박적 요소의 약화이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핍박적 요소가 매우 현저하게 나타나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이 요소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마가복음은 약간의 서 론이 있는 수난기사(passion natrative)라고 말할 정도로 수난과 핍박이 주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마가복음에는 세 개의 수난 예언을 포함하여 핍박 관련 구절들이 많이 발견된다(8:31, 34~38; 9:31; 10:30, 33-34, 45: 13:9-13). 이 중 특별히 관심을 그는 것은 10장 30절인데, 그것은 마태, 누가복음에는 없는 ‘핍박을 겸하여’란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핍박 관련 구절들과 함께 이 말씀은 마가복음이 무서운 박해의 상황 하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가리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경우 마가복음 10장 33절의 병행 구절인 19장 29절만 마가복음과 다를 뿐 대체로 마가복음의 핍박 관련 구절이 등장하고 있음을 근거로, 회당으로부터의 박해에 직면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핍박적 요소가 많이 완화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앞서 언급한 마가복음 10장 30절의 병행 구절인 18장 30절에 ‘핍박을 겸하여’가 없고, 또한 9장 23절에 ‘날마다’를 추가하여 핍박을 의미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희석하고 있다(Cf. 막8:34; 마16:24). 이와 함께 누가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구제하라’는 명령은, 만일 누가의 공동체가 재물의 완전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핍박에 직면해 있었다고 한다면, 대단히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상이한 사회적 배경의 동기가 되는 것은 임박한 종말론에 대한 묘사이다. 누가복음 3장 12~13절,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라는 이 구절은 3장 7~9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종말론적인 불같은 설교를 듣고 나아온 세 부류의 사람들(무리, 세리, 군병) 중 세리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요한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만일 종말이 임박했다면, 당대에 불의하다고 알려진 세리들에게 세례 요한은 ‘이제 종말이 임박하였으니, 당장 그 불의한 직업을 집어치우라’고 말하였을 법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곧 아직 종말이 임박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또한 누가복음 19장 11절(‘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에서 누가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유사한 열 므나의 비유를 소개함에 있어서 서론을 달고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마25:14).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는 자들의 견해를 수정할 목적, 즉 종말이 그들의 기대처럼 임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신자들 가운데 임하였음을(눅17:20~21)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마가복음과는 달리(막13:6) ‘때(종말)가 가까웠다’고 선포하는 자들을 경계하라는 주의를 주는 것은(눅21:8) 임박한 종말과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빈부 및 재물 문제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다. 사실이 특징은 누가복음을 다른 복음서들과 차별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누가복음의 사회적 성격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 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설교에서 이미 나타나 있고(눅3:10~14), 또한 주님의 취임설교(눅4:18~19)에서도 발견된다.
사실 주님의 첫 설교에 해당하는 취임설교는 주님의 사역과 교훈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은데, 누가복음의 취임 설교는 마가, 마태복음과는 확실한 경계를 긋고 있다. 마가,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그를 위한 준비로서 회개의 강조이다(막1:15; 마4:17).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위한 메시아 사역을 선포하고 있 다(눅4:18~19). 그리고 이러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복음서의 내용 가운데 계속하여 반복하여 등장하면서(눅6:20; 7:22; 14:13, 21; 16:20, 22),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의 명령과 함께(눅11:41; 12:33; 18:22), 누가복음의 사회 복음(social gospel)적 특징을 여실하게 드러내 준다. 누가복음을 흔히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the Gospel for the Poor)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복음적 특징은 핍박이 없고 종말이 연기된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일상적 삶의 윤리에 대한 강조와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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