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창설 당시의 신자들은 ‘창조주 천주'의 존재를 중심으로 하여 신관(神觀)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중보자(中保者)에 대한 이해를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새로운 신관은 새로운 인간 이해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들은 인간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평등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인간관의 터득은 새로운 인간 관계에 대한 규정으로 이어졌다.
교회 창설 초기부터 신자들은 인간관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태어난 존귀한 존재라는 가르침에 감격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마음법'[良心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사람된 위(位)', 곧 인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함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면 그들은 서로가 한 형제로 뭉쳐 나아갔다.
신자들이 이룩한 신앙 공동체 안에는 양반도 중인도 없었다.
양인이나 노비, 백정들도 양반과 함께 서로를 ‘신앙의 벗'[敎友]으로 부르며 평등하게 지냈다.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가 상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임을 알았고,
서로가 인간으로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790년대에 영세 입교한 백정 출신 황일광(黃日光, 1756~1802년)은 입교 후 교우들한테 받은 평등한 대우에 감격하여,
자신은 지상 천국에 살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군명' 등과 같은 신자들은 천주교에서 ‘인간 평등'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하여
영세 직후 자신이 거느리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사노비가 해방된 때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이다.
이보다 1백 년을 앞서 천주교 신앙은 노비를 해방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당시의 천주교 신앙은 ‘종교적 복음'임과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복음'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회적 복음에 대한 인식 때문에 1790년대 이후의 교회에서는 신분이 낮은 민중들이 신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교우촌을 형성하여 모듬살이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1791년의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신자들이 모여 살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801년의 박해 때에 황사영이 피신했던 배론의 경우에도 내포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모여들면서 형성된 곳이다.
이것이 교우촌의 초기 형태로 배론 이외에 전라도 차돌백이, 경상도 신나무골 등은 대표적 교우촌이다.
교우촌은 회장의 지도 아래 생산과 소비를 공동으로 영위하기도 하였다.
박해 시대 교우촌에서 재산을 공유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개항 직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은 시기에 조선에 들어왔던 한 프랑스 선교사는
이 교우촌을 사도 시대의 신앙 공동체에 비유하였다.
“신입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1889. 4. 22. 보두네 신부의 편지).
신자들은 박해 때에도 어려운 이웃과 부모 잃은 어린이를 힘써 돌보았다.
또한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힘써 대세(代洗)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1852년 이래 성영회(聖찾會)를 조직하여 고아들을 위탁 양육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선의 중요함을 터득한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자였다.
초기의 신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적 특성도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