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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항상 사람을 설레고 들뜨게 만든다. 새로운 시각으로 공간과 장소를 바로 보게 만드는 ‘마미다’의 답사는 더욱 그러하다.
목포는 25년 전 꽃 같은 청춘의 시절에 1년을 보낸 곳이다. 또한 출생지인 영암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수시로 다니는 곳이라 타지에 비해선 조금 안다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뿔싸! 그것이 나의 얼마나 큰 착각이며 오만이었는지를 이번 답사를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역시 사람의 눈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또 한 번 여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먼저 목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목포는 전라남도 남서단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여 동쪽과 남쪽은 영산호 (榮山湖)에 면해 영암군을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은 많은 도서들로 이루어진 신안군, 북쪽은 무안군과 접하고 있다. 인구 24만4801명이다.
「목포」라는 이름은〈고려사〉라는 역사책에서 처음 나오는데, 땅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木浦)라고 불렀다고 하고, 목화가 많이 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서해로부터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자료를 찾다보니 관광과 축제에 대한 부분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근대사의 자취는 찾기가 어렵다. 루트도 없는 것 같고, 정리도 안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답사를 끝내고 소감을 얘기하던 시간에 이순옥회원이 군산은 근대문화의 정리가 잘 되어있다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답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거기엔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라도 기회를 만들어 꼭 가보도록 해야겠다.
이번 답사의 길라잡이는 손경민 전회장님이 수고해주셨다.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의 속살을 더듬을 답사코스는 목포역에서 출발하여 젊음의 거리를 지나 1949년 문을 연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코롬방제과 -> 구)동원본사 목포별관 -> 구>화신백화점 -> 구)호남은행 -> 역사문화예술공원 -> 갑자옥모자점 -> 영란회집 -> 목포만호진터 -> 목포근대역사관 -> 적산가옥카페 -> 삼성소학교강당 -> 성옥기념관 -> 이훈동정원 -> 구)일본영사관 -> 노적봉예술공원 ->북항에 위치한 ‘친절한 유선장’에서 즐거운 점심식사^^
송정리 역에서 7시 14분 기차를 탔다. 비록 함께 가진 못했지만 이른 시각 역까지 유자차를 손수 준비해 준 안대희회원께 이 자리를 비러 감사를 드린다. 회원님의 따뜻한 마음이 유자의 향의 되어 하루를 포근하게 했다.
김양옥고문님의 사랑 가득한 쑥개떡을 먹으며 김정회장님과 안미정총무님의 열정으로 17명이 광주를 뒤로하고 3명이 기다리고 있는 목포로 출발!~
목포 역에 도착하여 손경민 전회장님의 간단한 목포의 유래와 오늘의 일정을 들었다. 놀라운 사실하나 목포의 80%가 매립지란다. 유달산을 뒤로하고 목포역에서 바라보는 곳들이 일제시대 이전엔 모두 바다였다니, 본래의 목포는 정말 앙증맞게 적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구나!
예전 목포는 전국에서 수질이 나쁘고 물 값이 가장 비싼 곳이었다. 어렸을 때 뉴스에서 목포가 수질이 나쁜 것은 땅을 파면 바닷물이 유입돼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었다. 대부분 그때는 지하수를 쓰질 않았는가. 그래서 어린마음에 지하수를 파면되지 왜 물을 사 먹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몇 십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 이유룰 알았다니...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목포가 부처님 손바닥(?)만한 곳이라 꼭두새벽에 출발하였으니 오전에 충분히 휭하니 답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목포근대역사관의 김문심관장님과 성옥기념관의 조순현학예실장님의 열띤 해설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어 몇 곳은 외형만 보고 왔다는 슬픈 현실을 어찌해야 할지.
대전에 ‘성심당’ 군산에 ‘이성당’이 있다면 목포엔 6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롬방제과’가 있다. 크림치즈바게트와 새우바게트를 추천한다. 얼마 전 인터넷에도 소개된 곳이니 만족할 것이다.
‘구)동원본사 목포별관’은 지붕 수리가 한창이었다. ‘구호남은행’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구)화신백화점’ 자리는 지금은 ‘김영자갤러리’라는 간판만 붙어있고 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백화점을 유지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에 광주에도 없던 백화점이 목포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목포의 발전과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수탈과 고난의 세월을 살다 가신님들의 영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하늘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비를 맞으며 ‘역사문화예술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사.문화.예술이라는 거창한 말들을 한데 뭉뚱그려 놓은 것치고는 공원의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이 초라한 공원에 굳이 이 거창한 명칭을 써야만 했는지 국내의 역사.문화.예술 인식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갑자옥모자점’은 갑자년인 1924년 문을 열었다. 첫 주인은 이씨의 외종숙(外從叔·어머니의 사촌오빠)이었다. 이 가게를 이씨 어머니 문금희(1999년 작고)씨가 해방 직후 물려받아 1980년대 중반까지 운영했고, 이씨가 다시 물려받았다. 이씨 집안은 원래 제주도가 고향이다. 전남 무안군 목포진이었던 항구를 일제가 정책적으로 개발하면서 목포에 사람과 돈이 몰리자 호남 전 지역은 물론 제주와 경상도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목포에 '제주'나 '서귀포'를 딴 옥호(屋號)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이씨 집안이 목포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다. 목포 갑자옥이 잘 돼 제주, 군산·순천·대전에 똑같이 갑자옥이란 이름으로 분점을 냈었다. 국산 양털모자 4만원 할 때, 쥐 털 중절모는 30만원도 넘었다 한다.
현재 갑자옥 건물은 1965년 화재로 소실된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을 부수고 지은 3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한창때 2층은 전체를 모자 창고로 썼고 3층 옥상에서는 학생모와 밀짚모자를 만들었다. 지금 2층에는 '내 고향 노래연습장'이 입주해 있고 3층은 가정집이다. 90년 전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가업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지나가는 길손의 마음은 간절하다.
목포에서 민어회로 가장 유명하다는 ‘영란횟집’을 지나 ‘목포만호진터’로 발길을 돌렸다. 도심 뒷길을 헤집고 구불구불한 오르막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진정 목포의 속살을 더듬을 수 있었다. 비좁은 골목길, 비까지 내려 을씨년스러운 그 길로 과연 제대로 된 가구하나 옮길 수 있겠는지. 그 골목길을 공유하며 사는 이들의 삶을 굳이 들어다보지 않아도 그 삶의 궁색함이 보이는듯하여 마음이 아려왔다.
목포 역사의 출발지인 ‘만호진터’ 즉 ‘목포진’은 1987년 1월 15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명칭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인데, 1500년(연산군 6)에 초축하여 1502년에 완성되었고, 1895년(고종 21) 폐진되었다. 목포진은 폐진 직후인 개항 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 있었고, 무안감리서·일본영사관·해관으로 임시 사용되었다. 그 후 진지 주변은 영국영사관기지로 편입되었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다시 민가로 전용되었다. 현재 목포진지의 성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진성은 대략 현 만호동 일대로 추측되며, 만호동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가 당시의 성돌로 쌓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만호동 1의 56번지 권오현 앞 공터에 ‘목포진 유적비(木浦鎭遺蹟碑)’란 석비가 남아 있다.
자연석인 커다란 바위를 담벼락의 일부로 때론 집의 일부로 사용된 것을 보며 지금은 친환경적인 건축법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 시대에 저 건물을 지은 이도 그리 생각하고 건물을 지었을지는 의문이다.
목포시는 2014년 4월까지 94억원을 들여 7천257㎡의 만호진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었다. 지금이 1월 말인데 첫 삽도 뜨지 않은 것 같으니 복원사업은 묘연한 것이 아닌지 4월이 되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근대역사박물관’은 일제시대 조선 농민의 수탈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목포지점 건물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한국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특수 국책 회사이다. 설립목적은 주로 토지 매수가 적었고, 사들인 토지는 다시 한국인에게 높은 소작료를 받고 임대를 하였다. 1920년대 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소유는 모두 90,700여 정보에 달해 우리나라 농민 수탈의 선봉장이 됐다. 또한 토지경영 뿐만 아니라 부동산 담보대출을 통해 조선 농민을 수탈하는 금융기관으로서도 악명이 높았다.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목포지점은 1920년 6월 문을 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한국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목포지점의 경우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제1위의 지점으로 일제식민지 지배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후기 르네상스 양식에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건물로서 일본을 상징하는 모양이 여러 곳에 새겨져 있는데 정면 입구에 태양문양, 좌측 상단부 벚꽃 문양과 건물내부 1층 벽면에 장식된 태양문양 등이 있다.
건물 내부에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금고가 남아있으며 많은 변형이 됐으나 외부는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제의 잔재, 군부시절의 헌병대 건물’ 등의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외면되어 왔었으나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아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지난 1999년 11월 20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수난의 역사와 1920년대 말 잊혀져가는 목포의 옛 모습을 생생하게 되돌아 볼 수 있는 역사인식의 산 교육장이다.
이곳 역사관은 국내최초로 공개하는 잔악한 일제 침략사 사진을 비롯하여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치열한 구국 운동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사진자료들이 전시 되고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근대 서양건축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 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2곳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한곳으로 부산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비해 규모면에서 앞선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봉기관, 조선농민 수탈기관으로서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고, 특히 동척 목포지점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이었다.
남한지역의 지점들은 현재까지 확인 결과로는 동척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목포 외에도 부산밖에 없고, 부산 건물의 규모는 목포보다 작다. 부산의 동척 지점 건물은 그동안 미문화원에서 사용하다가 반환되어 부산시에서 이를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 운영 중으로 동척 목포지점이 지니는 의미도 매우 크다. 따라서 동척 목포지점 건물은 일제 강점기하 대표적 수탈기관으로 역사성과 시대성이 있고, 지금까지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없다는 점, 그리고 남아있는 부산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보다 규모가 크다는 점, 또한 1920년경의 공공시설물로서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이 근대 건축물에 상징적으로 표출된 유구로서 교육공간으로 활용가치가 높다. 그래서 지난 2006. 7월 목포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근대시기 목포 및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개장하여 운영 중에 있다.
1층에 전시된 사진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과 분포, 목포의 역사, 목포의 전경, 1920년대를 거닐다, 역사의 뒤안길로… 그 옛날 그 시절… 금융도시 木浦, 木浦 근대교육의 시작, 목화의 고장 木浦, 일제의 흔적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조선왕조의 최후의 모습, 빼앗긴 조국, 침략자 일본, 일제의 아시아 침략, 항일구국운동과 수난, 광복의 그날! 등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작년에 갔던 외달도해수욕장, 기모노에 양산을 쓴 수십 년 전 일본여인들을 마주하곤 한 순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일본인 윤학자여사가 공생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공생원’이란 ‘같이 살아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1920년대에 거지대장 윤치호전도사와 그의 일본인 아내 윤학자여사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생긴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들을 보면서 사명감을 느끼고, 7명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다. 1951년 1월 식량구호 요청을 위해 광주에 갔지만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공생원의 운명이 끝나야할 순간이었지만 윤학자여사와 그의 자손들이 윤치호선생의 뜻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공생복지재단이고, 이 재단은 서울과 목포, 일본에서 활동 중이다.
목포 고아들의 어머니로 30년간 3000명의 아이들을 키워냈던 일본인 윤학자여사의 희생정신은 그녀가 폐암으로 숨진 1968년 목포 최초 시민장으로 영결식을 치렀고 3만 여명의 조객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에 아들에게 ‘우메보시’(일본 매실짱아찌)가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한국인은 지구촌 어디를 가든 김치가 그립듯이 여사가 한국에서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30년의 세월을 바쳤는데도, 그분의 뿌리는 일본인 것이다. 그의 자손들이 일본에 있는 한국인을 돌보는데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김치를 드린다고 한다.
윤학자여사나 그의 자손들처럼 이런 일본인도 있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들도 있고 과연 일본의 참모습은 어느 쪽일까? 어쩌면 어느 한쪽이 아닌 둘 다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항상 공존하므로. 아마 악마 쪽 성향을 가진 일본인이 조금 더 많은 걸까.
목화가 많아 목포라 했다는 설도 있다는 목포. 면화기계에 10대의 어린 소녀들의 팔이 껴도 빼주지 않고 그냥 기계를 돌렸다는 이야기며, 출항을 하여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는 가장들 때문에 과부와 생년이 같은 아이들이 많다는 비극적 마을 사진이야기, 동약척식주식회사가 사용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금고, 1914년 3월 수원 고갈로 거류민단에서는 영산강에서 소달구지로 물을 길어와 각 가정으로 배급하는 사진...
<八紘一宇(팔굉일우)>비석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비석은 2011년 11월 12일 목포여자중학교 운동장 국기게양대 앞에서 운동장 토취 공사 중 발견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1940년 시정방침연설에서 “황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드는 ) 국가의 정신에 근거 한다” 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가 위하여 내세운 구호였다. 일제강점기 조선 7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1940년 10월 27일에 비석에 새겨 목포여중 국기게양대 앞에 세웠다가 해방 후 땅에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문심관장님의 친절하고 자세한 사진 설명을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해지고 울고 싶고 화도 나고 ... 그들과 우린 DNA 자체가 다른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살인을 어찌 그리도 즐길 수 있는지. 김문심관장님이 고이 간직한 일제만행의 끔찍한 사진들을 대하며 다시 한 번 일본의 본모습에 치를 떨었다. 고3 때 ‘731부대’를 읽고 잠을 이루질 못했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그들은 아직도 야망을 아니 욕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독도를 일본령으로 내년부터는 교과서에 표기한다지 않는가. 파렴치범에 날강도들. 과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목포 유달산 아래 아늑히 자리 잡은 ‘성옥기념관’은 조선내화(주) 창업자이며 전남일보 발행인 성옥 이훈동(聲玉 李勳東)선생의 88세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하여 2003년 선생의 자녀들이 건립한 문화공간이다.
전남 문화재 자료 제165호인 이훈동 정원 옆에 대지 1678.8㎡, 건물 739㎡, 높이 9m의 석조 건물은 미려함이 돋보인다.
기념관에는 성옥선생님이 미술품 사랑으로 수집한 근, 현대 작품과 자녀분들의 소장품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와 종류가 매우 다양한 고미술작품과 도자기 등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내부에 전시된 소장품을 잠깐 소개하자면 추사 행서 팔곡병, 추사 예서 이곡병(추사 김정희), 석파 묵란도 십곡병(석파 이하응), 산수화 편액(공재 윤두서), 운보 채색화조 십곡병(운보 김기창), 남농 금강산보덕굴 편액(남농 허건) 등의 시.서.화들과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도자기들, 그 값을 측정하기 어려운 물건들이 유리벽 속에서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굳이 작품을 돈으로 환산해 보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심리를 애써 억누르며 작품을 예술적, 보물적 가치로만 보고자 노력하였다.
‘내가 기업가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소리꾼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에 소질을 보였고, 역동적인 나의 성품도 소리와 궁합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소리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소리에 우리의 삶의 애환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것이다. 판소리를 들으면 편편마다 뼈저린 아픔이 있는가 하면 더덩실 춤이 절로 나오는 성공의 순간이 있다. 기업 활동의 마찬가지다. 고난과 시련의 세월이 이어진 후에야 수확의 계절을 맞는다’ 성옥 이훈동선생의 말이다. 마지막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이 말씀을 기업 활동뿐만이 아닌 우리 삶 전체에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 싶어 옮겨 적는다.
자료에 따르면 성옥문화재단에서 2013년도에 전국 73명에게 지급한 장학금 총지급액이 43억이 넘는다. 가히 재단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할 것이다.
‘이훈동정원’은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의 종류도 113여종에 이른다. 1930년대에 만든 일본식 정원이다. 안타깝게도 답사 날 그 자녀들이 이훈동정원에서 가족 모임을 한다하여 직접 발을 들이지는 못하였고, 다음을 기약하며 눈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국가사적 제289호로 지정된 목포 최고의 근대건축물인 (구)목포일본영사관이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오는 3월 개관을 준비하느라 내부수리 중이여서 관람은 하지 못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과거 일제 침탈과 억압, 이에 맞서 항거하는 민족정신에 관련된 자료를 전시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 할 계획이다.
이밖에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거듭난 목포의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고, 개항에 따른 목포의 문화와 민초들의 삶의 사연을 스토리로 풀어 소개하고 있다. 시는 19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6개 상설전시관과 방공호 등 체험 시설물을 조성했다.
1층 제1전시실은 ‘목포, 목포진으로 출발하다(역사의 출발)’는 주제로 목포진 고지도, 목포진 복원 모형물 등을 전시하여 개항이후 100년간의 목포 모습을 연출했다.
2층 제1전시실은 일본영사관 집무실 사진, 정명여학교 만세운동 자료 등 30여점을 전시해 일체 침탈의 모습과 항일운동의 최일선인 목포 모습을 담고 있다.
목포시는 3월부터 상시 개관에 들어감에 따라 목포의 날, 삼일절 등 국경일 등 기념일에 맞춰 다양한 특별전을 개최하고, 역사 바로 알기, 시민 교육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할 방침이다.
한편, (구)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었던 (현)목포근대역사관은 이번에 (구)목포일본영사관이 목포근대역사관(본관)으로 조성함에 따라, (현)목포근대역사관은 목포근대역사관(별관)으로 명칭을 변경 운영된다.
원래 계획은 북항에 위치한 ‘친절한 유선장’까지 풍광을 즐기며 걸어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지체되어 택시로 나눠 타고 고고씽!~
‘친절한 유선장’은 유재성회원이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는 아담한 선어집이다. 어머니의 깔끔하고 맛깔스런 음식솜씨가 일품으로 생선구이와 구수한 국물의 갱국(생선을 말려 집간장으로 간을 함)은 가히 환상의 맛이었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매주 화요일 저녁8시부터 10시까지 ‘친절한 유선장 작은 음악회’를 15회 째 해오고 있다. 가게 한 켠에 아담한 무대도 마련되어 있다. 주인장의 김광석 보다 더 멋진 보이스의 노래와 기타, 하모니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친절한 유선장의 작은음악회’가 목포의 명소가 되길 기원해 본다.
적산가옥카페와 그 시대의 외국인학교(일본인만 입학이 가능하였다고 하니 우리 입장에선 외국인학교가 맞다) 삼성소학교강당, 노적동 예술공원 등은 이번에 시간이 부족하여 눈인사만 하고 왔으므로, 구)동원본사 목포별관의 지붕공사와 일본영사관의 내부수리가 마무리되는 꽃피는 춘삼월 이후에 다시 한 번 여유롭게 목포를 방문해 봐야겠다.
사실적 진실보다는 승자의 편에서 대부분의 역사는 기록되고 전승된다. 우리가 지금껏 교과서에서 역사적 사실이라 배워왔던 인물이나 사건들이 얼마만큼 왜곡되고 홰손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지금 현재도 진행형 상태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루하루 살기 버겁다고 내 삶에 그리 큰 터치를 안 하니 그냥 대충 넘기고 살아간다. 그것도 하나의 삶의 방법이리라. 그러나 가끔 진실을 대면해 보고 싶진 않는지 묻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진실일까.
광주의 5.18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광주 구)도청을 허물고 새로운 유적을 세운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총탄자국, 핏자국이 서린 건물을 보존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존의 역사성이 살아있는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조형물을 세운다는 발상을 어찌 할 수 있는 것인지.
고대의 고인돌이나 신석기시대 유적지를 발굴. 전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근.현대의 문화유산들의 유지. 보존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저번에 답사한 광주 양림동과 더불어 이번 목포 근대사 건축물들을 둘러보며 더욱 하게 되었다. 되 내이고 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든 오욕의 역사든 드러낼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 이번 답사에 함께하신 김정회장님을 비롯하여 20명의 회원님들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
첫댓글 와~~~~~~ 놀라워요~~^^
후기의표본을보여주셨어요~~
이렇게잘하니 기록총무감투를 주려고했겠죠??~~^^
새록새록떠오르면서
종아리와허벅지가아파요~~^^
잘읽었습니다~~~~♥♥
회원님들의답사후기-하나~~^^♥♥
신입 안미숙님; 목포가한이있다는것을몰랐다.
너무많은것을알게되었다. 다음에도참석하겠다.
이창남님; 나주금안가고 두번째답사
목포를 늘 지나치듯갔다. 설명을듣기는처음이었다.
일본이자주거론되는요즘, 목포답사는 더 의미있는일이었다. 현장을직접본다는것이
참 좋았다~~
이영숙님; 담양무월마을 이후 두번째참석.
무월마을이 풍광위주의 답사였다면 목포는 공부를한답사였다. 덕분에 깊게 배웠다~~
정은영님; 목포의 구석구석 역사를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윤봉란님; 목포코스를 열번쯤 왔었는데 잘 안내받지못했다. 목포의 역사에 깊은 내용이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기억해야겠다~~
후기를 너무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