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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基本現況) 개설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경상도(慶尙道)의 남동부로 뻗어 내리며 낙동(洛東)정맥을 이루고 낙동정맥의 한 줄기가 낙동강을 향하여 남서쪽으로 뻗어 창녕(昌寧)에 이르러 화왕산(火旺山)과 영취산(靈鷲山)을 이룬다. 다시 낙동강(洛東江)에 이르러 그 정기가 뭉쳐 구진산(九陣山)과 도초산(道草山)을 치솟게 하는데, 그 기슭에 가슴 시원하게 툭 트이며 펼쳐진 옥야(沃野)가 바로 우리가 사는 곳 낙강칠리(洛江七里) 율림청풍(栗林淸風)1)의 고장이라 이름난 남지읍(南旨邑)이다. 우리 읍(邑)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북부로 영남(嶺南) 일대의 젖줄인 천 삼백리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오다 서쪽으로 활처럼 굽어 휘돌아 들면서 지리산(智異山)에서 흘러오는 남강(南江)과 어우러져 동으로 흐르니 강폭과 수심은 더욱 넓고 깊어지며, 물살은 완만해져 퇴적토가 쌓이니 그에 따라 풍요하고도 순후한 풍토를 지닌 창녕군(昌寧郡)의 남부이다. 강으로 이어지는 수로(水路)가 예로부터 발달되어 배를 이용한 왕래와 산물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38개 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남지읍은 전통적인 모습의 농촌이다. 오래 전부터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곳, 농업 기술이 발달한 마을들로 이 낙토(樂土)에서 태어나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다 이 땅에 묻힌 모든 사람들은 순박하고 인정이 많은 농민들이었다. 이런 풍토와 인심은 깊고 높거나 가파른 산과 계곡이 없고 강은 유유히 넓게 흘러 기름진 들을 더욱 살찌우니 더더욱 살기 좋은 고장이라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일찍이 일세를 주름잡는 명문거족의 세도가 크게 없었고, 분수를 지키고 근면하며 상부상조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고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 고장에 살았던 선조께서는 부지런하였고, 연구 개발하는 기술 영농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며 종자를 개량하였으며, 새로운 영농기술을 다른 지역보다 한 발 빠르게 배워서 전파하였던 결과로 농사 기술이 향상되고 농산물의 수확량도 많았다. 우리 고장은 개답사업(改畓事業)이 일찍이 진척되어 수리 안전답이 많아지고 따라서 벼 생산량이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많았으며, 밭농사도 선진적이고 밀도 있는 영농 기술의 채택으로 수익성 좋은 작물재배와 2 - 3모작을 병행함에 따라 단위당 수익성이 향상되었으며, 보리 밀 육도 등 곡류와 함께 면화 땅콩 고추 등 유명 산물과 배추 무 수박 참외 등 다양하고도 특수한 채소를 생산하여 우리 읍의 이름을 높였다. 현재는 소득이 높고 농한기가 없는 전천후 영농인 시설채소 재배가 우리 고장 농민들의 독창적인 기술 개발 보급으로 확산되고 공동 출하를 하여서 어느 지역보다 먼저 대량 출하, 높은 가격을 받게되어 고소득 농민이 되었다. 우리 읍에서 생산되는 풋고추와 오이, 수박은 대도시의 시장에서 인기 품목이 되었으며, 가을이면 출하되는 무 배추가 땅콩과 함께 명성이 드높았다. 교통은 예로부터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水路)의 발달로 남지리의 웃개나루{上浦津}를 위시한 학계리의 도흥나루{道興津}, 용산리의 거룬강나루{岐音江津 : 岐江}, 아지리의 창아지나루(昌阿支), 월하리의 박진나루{朴只谷津}와 들붓나루, 시남리의 이이목나루{烏項津} 대곡리의 백산나루, 반포리의 반포나루 등 크고 작은 나루가 있어서 강 상.하류에서 모여드는 각종 물화(物貨)와 여기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장이 섰다. 이 5일장은 2일과 7일에 섰는데 웃개장{上浦場}은 웃개나루와 함께 눈부시게 번창하였다. 남쪽인 창원(昌原), 마산(馬山) 등지에서 웃개나루나 도흥나루를 건너와서 북쪽으로 대구(大邱), 서울로 가는 대로가 이 고장을 관통하며, 이이목나루나 들붓나루를 건너 의령 합천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었고, 동서로는 거룬강나루나 박진나루를 건너 의령, 진주로 갈 수 있는 등, 우리 고장은 경남 중북부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육로(陸路)로 사람들이 우마(牛馬)나 도보로 다니던 시절에는 나루가 번창하였다. 1930년대에 마산-대구간(馬邱線)의 국도가 개통되면서 낙동강을 가로 건너는 남지철교(南旨鐵橋)가 가설되어 육상 운수(運輸)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자 우리 고장은 수로와 육로를 겸비한 교통 요지로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강을 이용하는 교통은 요즘은 쇠퇴하여 많은 화물을 싣고 오고가던 고배(큰 규모의 木船)는 지금은 그 자취를 감추었으나 예전에는 돛단배가 웃개나루터에 가득 정박해 있기도 했고, 인근 동리를 연결시켜 주던 나룻배가 부지런히 다니기도 하였다. 진동과 남지를 오가던 나룻배는 장날이면 하류는 수산, 부곡, 본포, 북면, 멸포 등지에서, 상류는 고령, 합천, 의령, 유어와 우리 고장의 북부 등지의 장꾼을 가득 싣고 강 상 하류에서 장배들이 모여들곤 하였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십여 년 전부터 그것마저 뚝 끊어져 버렸다. 이것은 도로망이 확충, 포장되고 차량이 급격히 늘어 육상 교통이 편리하게 되자 나룻배 이용객이 크게 줄어 낙동강 주변 마을을 왕래하던 장배는 물론 최근에는 수 백년 역사가 깊은 웃개나루의 도선장(渡船場) 나룻배마저 그 명맥이 끊어져 버렸고 그 외의 나루터도 한산해져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바로 강 건너 마을에 가려면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며, 시대 변천에 따라 내왕이 잦던 장길도 자연히 사라지고 찻길에는 오가는 차량들이 많으나 소로(小路)에는 인적도 뜸해지게 되었다. 우리 고장은 전에는 도로 포장이 저조하여 불편이 많았지만 1977년 12월 구마고속도로 개통이후,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국도 지방도 등이 잇따라 포장됨에 따라 불편이 많이 해소되었고 소통이 원활하여졌다. 또 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어 이를 이용한 운송도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남지시가지를 관통하는 국도의 시가지 우회도로 건설과 남지철교의 노후화 등으로 인하여 창녕낙동강대교 옆인 본동 동쪽에 1989년 제3의 교량인 남지대교를 착공하여 1992년 11월에 개통됨과 동시에 특히 마구선 국도가 2차선으로 확장 포장되어 우리 읍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싱싱한 그대로 짧은 시간 내에 인근 도시로 공급하게 되어 더 한층 도시와 농촌간의 중계 역할뿐만 아니라 도시 인구를 흡수하는 소도시 역할을 원활히 하여 주는 고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농산물의 가공업(加工業)도 발달되어 1940년대에는 대규모의 타면공장(打綿工場)과 도정공장(搗精工場)이 있었으며, 지금은 학계리(鶴桂里)에 학계농공지구(鶴桂農工地區)가 1988년에 조성되어 여러 공장이 들어서서 농촌 경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아파트 건축, 도시계획의 추진으로 간선 도로의 확장과 포장 등으로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고속도로는 옛 창녕낙동강교를 철거하고 새로운 2차선 복선 교량이 낙동강에 위에 놓여 1995년에 개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원하게 닦인 4차선 고속도로 완공이 되었다. 이때 인터체인지 시설은 당초 계획에 빠져 있었으나 읍내 기관.단체장 유지들이 중앙 관계 요로에 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터체인지가 생기게 되어 읍민들이 고속도로를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교통의 편의는 더욱 좋아져서 도시로의 출퇴근이 아주 자유로와 졌다. 돌멩이 하나 없는 옥토에서 재배되는 고등채소와 함께 불과 22km의 거리를 두고 있는 마산과 창원의 팽창,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함안군(咸安郡) 칠서면(漆西面)의 공업단지의 조성이 이루어지고 있어 우리 고장은 쾌적한 주거 도시로 크게 발전하리라 기대된다. 또 우리 고장의 50%인 산지(山地)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들이므로 초지 조성(草地造成)과 과수원으로 개간하여 축산과 과수 영농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 고장은 보다 잘 사는 곳으로, 도시 근교 전원도시(田園都市)로 크게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2. 현황 (現況)
* 1896년(고종 33년) : 창녕군 남곡면과 영산군 도사면으로 분리되어 있었음
* 면 적 : 55.24km2(군의 10.4%) 전 8.90m2,, 답 8.90km2, 대지 1.38km2, 임야 26.82km2, 기타 9.71km2 (구 출장소 - 31.3km2)
* 지 형 : 낙동강 인접 - 17개리(강안 길이 22km) 수해 우심지
* 시설원예 집단 재배지 : 700여세대 * 호당 경지면적 : 0.98ha
* 공공기관: 10개소 * 사회단체 : 19개 1. 옛 지명과 지세(地勢) 1) 옛 지명과 구지의 기록 조선 세종때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2)에 우리 고장의 지명이 나온다. 「창녕현」(昌寧縣) 조에 「남곡리」가, 「영산현」(靈山縣) 조에서 「기음강」이 나오는데 모두 우리 고장의 지명중 가장 오래된 기록인 것이다. 또 낙동강은 태백산에서 영남의 가운데를 가르며 흘러 남지에 이르러 남강과 만나면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강 물줄기가 기음강에서 동으로 방향을 바꾸니 곧 낙동강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昌寧縣 - 磁器所一 在縣南南谷里下品 靈山縣 - 기音江 在縣西二十八里有龍堂春秋令守令行祭祝文稱伽倻津溟所之神 창녕현의 남곡리는 곧 우리 고장 옛 면의 이름이었던 남곡면이며, 영산현의 기음강은 지금의 용산리 기강나루(창날)의 옛 지명이다. 또 「경상도」 「대천(大川)」의 첫머리에 낙동강이 나오는데 역시 이 지역의 옛 지명인 기음강과 남지리 웃개를 지칭하는 「우질포」가 나온다. 大川三一洛東江......爲甘勿倉津至靈山又合晉州南江之流爲기音江漆原爲우叱浦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에서 우리 고장과 관련이 있는 기록을 찾아보면, 창녕현 「산천(山川)」 란에는 효자암산이 나온다.4) 孝子菴山 在縣南二十五里 「효자암산 (창녕)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이 효자암산은 고곡리 두곡의 산으로 속칭 소재미라 불리며 마을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남곡면의 대표적인 산으로 알려진 것이다. 영산현 「산천」 란에는 도초산과 기음강, 우질포, 동보포, 계성천 등이 보인다. 또 「사묘(祀廟)」 란에는 기음강용단이 기록되어 있다.5) 道草山 在縣西二十二里 岐音江 在縣西二十八里 昌寧縣甘勿倉津下流與宜寧縣鼎岩津合處 古稱伽倻津 買浦津 在縣西二十三里 一名蔑浦津 卽漆原縣亐叱浦下流 同步浦 在縣西二十里 桂城川 在桂城縣 出昌寧縣火王山 南流入買浦 岐音江龍壇 祀典稱伽倻津溟所 春秋本邑致祭 「도초산 (영산)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동보포(同步浦)는 남지리의 동쪽 일대 낙동강과 계성천 사이에 이루어진 들판으로 지금은 동포들(東浦水利), 동갯들로 불리고 있으며, 昌寧縣邑誌 - 坊里……南谷面距官門四十里 靈山縣邑誌 - 坊里……道沙面距官門三十里 옛 지도에는 위의 지명 외에 오래된 땅이름으로는 박지곡진(朴只谷津;지금의 월하리 박진나루), 도흥진(道興津; 학계리와 마산리 앞 도흥나루) 등 나루터와 남곡면, 도사면 등 면 이름이 보인다. 또 『해동여지도』(海東與地圖)8)에는 도사면(道謝面)과 도초산, 남곡면과 효자암산 등이 보이며, 특이한 것은 대포(大浦)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는 속칭 「한개」의 표기로 지금 계성천 하류 남송교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2) 지형과 지세 『남지면지』(南旨面誌)9)에 지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本面의 地勢는 北便은 山岳이 重疊하야 細少한 鑛脈이 有하고 南 一部는 洛東江을 挾하야 洪水 頻煩하야 沙礫地와 荒地帶가 多하드니 靈南水利 創設하야 河川工事 補强하고 土地改良 産米增殖되고 南旨堤防 竣工되면 沃野 數十里오 物皐民康 天府之地라」 우리 고장을 싸안고 흐르는 낙동강은 창녕군 유어면(遊漁面)에서 남쪽으로 흘러오다 서쪽으로 구비 틀며 우리 읍 시남리(詩南里)와 만난다. 그후 월하리(月下里), 대곡리(大谷里), 반포리(泮浦里), 칠현리(漆峴里), 아지리(阿支里)의 창아지(昌阿支)와 신전리(新田里)의 영아지(靈阿支)를 지나 남강과 합류하면서 그 흐름을 동으로 틀어 용산리(龍山里), 학계리, 남지리(南旨里) 등 크고 작은 마을과 들을 넓은 품에 안았는데, 남강과 만나 그 강폭을 넓혀 동으로 계속 흘러 부산 앞 바다로 간다. 우리 고장 북부는 중앙의 서부와 함께 300m이하의 낮고 작은 산들이 연이은 야산지대이나 남부와 계성천이 흐르는 중앙의 동부는 영남지방에서도 이름난 영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김해평야와 함께 답작지대(畓作地帶)로 최대의 미곡 생산지이다. 또 강변은 사질토의 모래밭이 연이어 오래 전부터 밭농사가 성하고 취락은 홍수를 피해 산을 배경으로 하거나 강변 높은 지대에 배치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강을 따라 발달된 교통요지로 육로보다는 강을 통하여 상 하류를 오가는 길이 발달하여 웃개나루를 위시하여 도흥나루, 창나루, 창아지나루, 박진나루, 들붓나루, 이이목나루 등이 있어 각지와 통하였다. 육로는 1930년대에 남지철교가 준공되면서 마구선 국도도 원할하게 소통되어 마산-대구간을 국도를 이용한 차량 운행이 용이해졌고 그러자 획기적인 육상운송의 발전을 가져 왔던 것이다. 이제 구마고속도로 4차선 개통과 국도 확장 포장 등으로 근교 농업지대로 그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읍민들은 국가의 위기 때 앞장서 나섰던 지역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장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창의(倡義)하여 첫 승리를 거둔 곳이 기강나루(岐江津: 岐音江, 지금의 창나루)였던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또 3.1운동 때도 남지장날 만세를 불렀던 곳이었으니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위치와 면적 1) 위치 남지읍(Namji Up)의 위치를 위도 및 경도 상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북쪽에서 흘러오던 낙동강이 서쪽으로 구비 치고 그 힘이 남으로 휘고 서부 경남을 흘러온 남강과 합해지며 다시 동으로 용트림하여 활처럼 칠백리 강물길이 굽이친 곳, 잇따른 언덕을 따라 영남들 넓은 옥토의 평야를 만들며 서북쪽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다. 南谷 西南初二十 終四十 長嘉 西初二十終三十 道謝 西南上同 『문헌비고(文獻備考)』 「창녕현」과 「영산현」의 관내 방면에 우리 읍의 구명(舊名)인 남곡(南谷)과 도사의 기록이 각각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이정표(里程標) (단위 : km)
2) 면적 면적은 55,233,201m2로 창녕군 전체 면적인 532,656,346m2에 비하면 우리 읍은 10.4%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읍은 창녕군 14개 읍면 중 두 번째로 면적이 넓다.12) 논과 밭 등 경지면적은 17,488,885m2로 읍 면적의 32%를 차지하고 임야는 총면적의 48.7%를 차지하여 임야가 절대적으로 많으나 다른 읍면에 비하면 경지가 많은 편이다. 하천은 10.1%를 점유하고 있으며 토지 종별 이용 상황은 다음과 같다.
토지 지목별 현황 ( 단위 : m2)
자료 : 통계연보(1998)
법정리별 면적은 다음과 같다. 이동별 면적
자료 : 남지읍
『남지면지』의 기록에 의하면 1928년의 경지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13) 경지면적
(자료: 남지면지) 위 표 외에 임야의 면적이 2,212필지 2,598정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14) 총면적의 57,7%이고 전답은 39.9%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읍의 면적이 55.28km2인데 비하여 1928년대의 조사 면적을 비교하여 보면 10.46km2가 적은 44.82km2 밖에 되지 않은데 왜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없다. 혹시 이외의 지목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현재의 전답면적과 비교하여 보면 경지정리 등 개간으로 밭이 줄고 논이 많아져 당시의 영농형태를 알 수가 있다. 3. 산천 1) 산 소백산맥(小白山脈)의 한줄기가 비슬산(琵瑟山)과 화왕산에 이르고 화왕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낙동강에 막혀 더 가지를 못하고 그 지맥의 정기가 뭉쳐진 곳이 바로 우리 고장의 산들이다. 道草山 在治西南谷面二十里自火旺山來 우리 고장의 북쪽에는 높이 173.3m의 진골산{長谷山}으로부터 시작되어 두 갈래가 된다. 서쪽으로 산맥이 뻗어나가 이이목{烏項}의 말등허리{馬嶝} 160m 봉우리를 지나 강을 따라 산들이 있는데 약간 남쪽으로 가서 240.7m의 고운봉(高雲峰)과 우리 고장의 최고봉이라 할 311m의 구진산(九陣山)이 솟아 있다. 또 이 산맥은 강을 따라 가며 215.5m, 209.9m의 범골산{虎谷山}, 142m의 대곡고개를 이루며 신라 때의 나루터로 알려진 박지곡진(박진나루)에 머물렀다. 다른 한줄기는 진골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읍면의 경계를 이루는데 유어면, 장마면, 남지읍 3개 읍면과 경계지점에 큰갓실산(높이 130m)이 있고, 남으로 비봉산(飛鳳山), 누부실{臥牛嶝}, 꽃티내, 큰갓만당 등이 솟아있고, 『동국여지승람』에 올라 있는 옛 남곡면의 진산 격인 효자암산(孝子庵山)을 이루고 있다. 이 산줄기는 계속 장마면 대봉리와의 경계를 이루는데 산은 낮으나 6.25때의 격전지로 유명해졌으며, 1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오다 계성천에 다다라 평야를 이루었으며, 영남들 들 복판에 학바우{鶴岩}를 솟게 하였다. 화왕산의 정기가 효자암산에서 불쑥 솟구치며 높이 206m의 옥녀봉(玉女峰)을 만들고, 남으로 뻗어 옛 도사면의 진산(鎭山)격인 도초산(道草山)을 솟게 하였다. 이 산맥은 도초산까지 이르며 우실봉(牛膝峰)을 중심으로 200m 내외의 중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도초산의 동으로 120m의 말산{馬山}이 솟고 동갯들 평야가 펼쳐지며, 도초산의 서편으로 용암산(龍岩山)과 136m의 신전앞산 등을 이루고 낙동강을 만나 절벽을 십여 리나 이루며 남쪽으로 꺾어 145m의 말무덤산{馬墳山}을 만들며 우리 고장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산과 임야의 면적은 26.822.456m2로 읍 전체 면적의 48.8%를 차지하고 있다. 『남지면지』의 기록에 의하면 1928(戊辰)년도의 임야 면적이 2.212필지 2.598정 830묘보라 했다. 특기할 것은 남지리에는 산이나 임야가 없으며, 임야가 가장 많은 곳은 시남리로 371정이나 된다. 『남지면지』에 기록된 임야의 면적은 다음과 같았다.
임야면적 단위:정(町)
(자료; 남지면지) 현재 우리 읍의 이동별 임야 면적은 다음과 같다. 임야면적 단위: Ha
(자료; 남지읍) 우리 고장 안에 있는 여러 산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크게 나누어 보면 10개의 산이 있다. 곧 장곡산, 고운봉, 구진산, 호곡산, 효자암산, 옥녀봉, 우실등, 성사산, 도초산, 마분산 등이다. (1) 진골산{長谷山} 높이 173.3m로 우리 고장의 최북단에 있는 산이다. 남북으로 걸쳐 우리 읍과 유어면, 장마면 등 3개 읍면과 경계를 이루는데 시남리 진골{長谷}에 있다. 이 산줄기는 북쪽이 낙동강에 닿았고, 남쪽 줄기는 효자암산에 연결된다. 산의 북쪽은 유어면 광산리이고, 동쪽은 장마면 동정리와 신구리이며, 서편은 시남리이며 서남편으로 수개리 등으로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2) (高 雲 峰 ) 높이 240.7m의 산으로 우리 고장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고운봉이란 이름 외에 높은 배기, 노은봉(露隱峰 또는 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산 남쪽 아래에 고곡리가 있다. 시남뫼 - 200m 시남남봉 - 90m 월평동봉 - 210m 들붓고개 - 150m 깃대망강 - 180m 고운봉북봉 - 222m, 200m 반월등 - 100m 고곡뒷봉 - 200m (3) 구진산 ( 九 陣 山 ) 높이 311m로 우리 고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고곡리와 칠현리 사이에 있는데 산의 정상은 평평하여 토성이 쌓아져 있었는데 이 성의 이름은 구진산성이라 불리며 망우당 곽재우장군이 이 성에서 아홉 번의 진(陣)을 치고 왜군과 싸워 아홉 번을 다 승리하였다 하여 구진산성(九陣山城)이라 불리었다 하는 유래가 전해오는 곳이다. 또 산줄기가 동으로 뻗어 높이 80m의 봉우리를 이루는데 이 산은 종산이라하며 이곳에는 고곡산성(鼓谷山城)이 있어 이 두 산성은 가야시대의 고성(古城)으로 알려져 있어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산이다. 산줄기는 남북으로 뻗어 북쪽으로 월평까지 이르러 낙동강에 닿으며, 남으로는 여러 줄기로 나누어져 고곡산성 외에 우측으로 칠현 마을, 다음은 반포국민학교가 있는 큰담실, 다음 줄기는 서편으로 반포 마근으로 더 서편으로 대곡리까지 뻗어 서남쪽으로 가면서 낙동강에 닿아 대곡, 반포들을 이루고 있다. 200m 이상의 고지는 정상 주변으로 고곡 서편과 대곡리, 칠현리와 경계를 만들며 그 남쪽에 여러 마을들이 있다. (4) 범골산{虎谷山} 월하리 동편에 있는 산인데 높이는 209.9m이다. 구진산의 서북쪽 산줄기로 남쪽은 대곡 하담으로 낙동강에 맞닿았으며, 북으로 굽으면서 서쪽 편에 낙동강과 함께 나란히 월상 월하마을 등 동리와 넓은 모래밭을 이루고, 동편에는 대곡이 있다. 북쪽 끝은 낙동강에 닿아 월평마을에 이른다. (5) 효자암산 ( 孝 子 庵 山 ) 높이 120m로 고곡리 두곡 북쪽에 있는 산으로 동쪽은 장마면 동정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과 서쪽은 수개리이다. 남쪽에는 두곡마을이 있으며, 두 줄기가 뻗어 하나는 엄나무진고개(두곡고개)이고 또 하나는 소재미로 영산-박진간 지방도에 닿아 끝나고 있다. (6) 옥녀봉 ( 玉 女 峰 ) 높이 206.8m이며, 남봉은 160m이다. (7) 우실등{牛膝峰} 높이 209m로 신전리와 성사리에 걸쳐 있는데 서봉은 218m이다. (8) 성사산 ( 成 士 山 ) 높이 130m로 성사마을 북쪽에 있으며 성사(아지)고개의 동쪽 산으로 남북으로 뻗어 있다. 남으로는 황새목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계성천을 끼고 북으로 뻗어 대성마을을 지나 두곡마을의 엄나무진고개에 이른다. 그 줄기의 서쪽은 아지리이며 그 동쪽은 장마면 대봉리 어봉마을로 우리 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9) 도초산 ( 道 草 山 ) 높이 172m이다. 道草山 在縣西二十二里 自昌寧火旺山來 도초산 (영산)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창녕 화왕산에서 뻗어 왔다. (10) 마분산 ( 馬 墳 山 ) 높이 170m이다. 용산리 알개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말무덤산이라 하며 낙동강과 맞닿아 있다. 2) 들 우리 고장의 북부와 중부는 대체적으로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부와 중동부는 북서부와 함께 낙동강을 끼고 있어 평평한 들판이다. 이것은 낙동강과 계성천의 흐름에 따라 오랜 침식작용과 퇴적작용으로 이루어진 들판이다. 우리 고장에서 가장 큰 들은 영남(靈南)들이다. 우리 읍을 비롯하여 계성면 장마면 영산면 도천면 등 5개 면에 걸쳐 있는 들로 우리 읍 관내는 성사리와 신전리 구역이다. 이 평야는 계성천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낙동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들은 일제시대 일찍 개간 구획정리가 되어 미곡의 생산지대로 오래 전부터 이름나 있다. 그 다음의 평야는 동갯들{東浦野}이다. 『취산군지』에 보면 「전야구역」(田野區域) 란에 동개평이 나온다. 곧 동갯들을 가리킨다. 東開坪 自岐音江下至松津 龍山日村馬山亭南旨松津區域 위의 기록을 보면 동갯들은 낙동강의 동쪽 들 일대를 총칭하는데 기강나루에서부터 용산리 학계리 마산리 남지리 도천면 송진리까지 이 들의 구역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적으로 남지리 마산리 관내 구역으로 일부는 학계 홍정까지 이른다고 보지만 홍포마을 동편에서 계성천까지의 수리 구역을 동갯들이라 부르고 있다. 3) 재{嶺}와 고개 산에는 사람이 오르내림에 따라 길이 생긴다. 산과 산 사이 골짜기와 산비탈을 끼고 돌며 넘어가는 곳이 바로 고개이다. 재나 고개는 이쪽 골짜기와 저쪽 골짜기, 이 산과 저 산을 연결해 주는 길로 예전에 도보 이용이 보통이었으니 자연히 우리 읍에도 이러한 산길의 고갯길이 발달하고 많이 있었다. 재는 대체적으로 높은 산에 나 있는 고개를 지칭하게 되며 야산이나 마을 인근 낮은 곳의 등성이 길은 그냥 '고개'로 통칭되었다. (1) 덕고개{德峴} 학계리 홍정 남지공동묘지에서 신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오래 전부터 남쪽 마산과 함안에서 창녕 서울로 가는 대로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고개이다. 또 신전 성사사람들이 주로 이 고개를 넘어 남지 웃개장을 보러 왔으며 남지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통학로로 널리 사용된 고갯길이다. 높이가 30m로 지금은 넓게 확장되어 차가 다니고 있다. 이 고갯길 서편 쪽으로 고개가 하나 더 있는 데 보통 웃덕고개라 불린다. 이 고개는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2) 황새목 성사리에 있는 작은 고개로 예전에 남지에서 고곡리로 가자면 이 고갯길을 넘어야 하였다. 매전 마을에서 학암 마을이나 영남수리들로 연결되는 고개인데 지금은 산마루에 새로운 길이 신설 포장되어 차량이 다니면서 옛 명성을 잃었다. 전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어 지나는 길손이 쉬어 갈 수 있었으며 리동협동조합이 있었을 당시 군내에서 으뜸조합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자체 시설로 도정공장, 비료보관창고, 협동이발소 등이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현감 조운한 선정비, 상덕사, 숭례비 등과 정부양곡보관창고와 오성당 그리고 98년에 설치된 한해방지용 양수장 등이 있어 성사리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고개 높이는 20m 이다. (3) 성사고개 성사리에서 북쪽으로 아지리를 잇는 해발 80m 높이의 고개로 우리 읍의 중추적인 도로의 고갯길로 예전부터 험준하고 높은 고개로 이름나 있었다. 전에는 우리 읍이 이 고개를 기준으로 남쪽은 영산현 도사면, 북쪽은 창녕현 남곡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 고개를 기준으로 남곡면 지역을 지금도 「산너메」라 부른다. 예전에 남지장을 보려면 이 고개를 넘어서 장꾼들이 다녔다. (4) 대칭이고개{大層峴} 고곡리 북실 마을에서 서쪽으로 구진산 산등을 넘어 대곡리로 가는 높은 고개이다. 지금은 산불 방지용 임도(林道)를 개설하여 차를 이용하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월하리와 대곡리 등이 침수되어 반포 앞 도로를 사용할 수 없을 때에는 이 고갯길을 다녔다고 한다. 대춘이고개로도 불린다. 고개의 높이는 210m 이다. (5) 들붓고개 고곡리 북실 마을 북쪽의 긴 골짜기인 용수골에서 월하리 월평으로 가는 고개인데 들붓은 월평의 옛 이름이다. 예전부터 남지 쪽에서 의령으로 가자면 흔히 고개를 넘어 들붓나루를 건너 의령군 낙서면으로 가는 가장 많이 이용한 통행로였다. 고개 높이는 160m로 지금은 통행인이 흔치 않으며 산불 진화나 임목 관리를 위하여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6) 두곡고개 흔히 엄나무징이라 하기도 하는데 고곡리 두곡 마을 앞에서 동남쪽으로 장마면 대봉리 가림으로 통하는 고개이다. 지방도 1008호 영산 - 박진 간의 도로가 확포장되어 있어 영산으로 왕래하는 교통량이 아주 많으며 정기 노선의 버스가 다닌다. 그러나 1991년의 확포장 공사 시에 높이 60m의 고갯길을 많이 깎아 낮추었으므로 옛 모습을 상실하였다. (7) 옻고개{漆峴} 칠현리 앞의 고개로 지방도 1008호 영산 - 박진간의 도로상에 있는데 고곡리와 반포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북쪽의 작은 고개에 비해 다름재에 있는 이 고개가 크므로 큰고개라 하기도 한다. 마을의 이름이 되었으며 지금은 확포장되어 차량 통행이 많으며 정기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높이가 30m인 이 고갯마루에 창녕현감 고유 선정비가 있다. (8) 한실{大谷}고개 대곡리 한실 마을에서 서쪽으로 꽃바등과 헌서낭댕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월하리 월상(범골) 마을로 통한다. 대곡고개, 범골고개라고도 한다. 대곡리에서 월상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주 통학로 이기도 하였다. 고개의 높이는 90m 이다. (9) 작은 고개들 다음과 같이 작은 고개들이 많이 있다. 「리동사와 지명유래」에 상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4) 골짜기{谷} 산과 산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의지하고 살았던 생활의 터전으로 산과 들판을 이어주며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골짜기를 근거로 취락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깊숙한 골짜기는 임진왜란 같은 난리가 일어났을 때 피란지로도 이용되는 등 항상 골짜기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오고 있었다. 우리 읍에도 깊고 넓은 골짜기가 많아 마을이 많이 자리 잡고 있으며 농토 또한 많아서 농경생활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1) 큰골{德谷} 학계리 홍정 마을 북쪽에서 신전리까지 도초산 산줄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 안에 덕동(큰골) 마을이 있고 남지공동묘지가 있다. 입구에서 안까지의 거리는 1,500m이며 학계소류지가 있다. (2) 장골{長谷} 골짜기가 길고 크므로 장실, 장곡인데 학계리 홍정 마을 뒤에서 북쪽으로 도초산까지 이른다. 길이는 1,200m로 골짜기 안에 학계 마을이 있으며 마을 앞에 장실늪이 있고 마을 뒤 골짜기 안에도 마을이 있었다하나 지금은 없다. (3) 알개실{阿谷} 용산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서쪽은 마분산이고 동쪽은 용암산으로 안쪽에서는 두 줄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동쪽 골짜기를 금장골이라 불린다. 이곳에서는 예전에 금을 캤다고 한다. 골짜기 입구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인 기음강이며 현재 창날 마을이 있고 거대한 늪이 있었으나 논으로 개간되었으며 골짜기 중간에 알개실 마을이 있다. 길이는 1,500m 이다. (4) 신전(新田)골 신전리가 있는 골짜기로 동서로 뻗어있는데 남쪽은 도초산이며 북쪽은 질마산과 우실봉 등에 둘러 싸여 있다. 골짜기 입구에 신전늪이 있는데 예전에는 큰 늪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개간되어 축소되었다. 신전 마을은 한참 들어가 있으며 마을을 지나서도 골이 깊으며 예전에는 독립 가옥등 작은 마을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 졌다. 골짜기 안에는 소류지가 2개소 있으며 서쪽 산을 넘으면 낙동강에 이른다. 길이는 3,500m 이며, 여기에 붙은 작은 골짜기들은 다음과 같다. 우물골 개장골 도사곡 안골 솥골{鼎谷} 세창골 배미골 가물곡 성지골 서재골 불미골 개뚜골 허리골 (5) 성사(成士)골 성사리가 있는 일대의 골짜기로 동북쪽에는 성사산이 서남쪽에는 우실봉이 있어 길고 큰 골짜기로 형성되었다. 입구는 신전저수지에서 시작되며 북쪽으로 가서 성사고개에 닿는다. 마을은 지금은 개간된 저습지 장성늪을 지나면 처음에 매전 마을이 서편에 있고 맞은 편에 황새목이며, 다시 갓골이 서쪽으로 뻗어 관동마을이 있으며 폐교된 성사국민학교가 있는 민두루미 마을이 서편에 있고 서북쪽으로 골짜기가 굽이쳐 안쪽에 성사 마을이 있다. 제일 안쪽에 성사 소류지가 있으며 골짜기 입구에서부터 성사고개까지 1043호 지방도가 통과되고 있는데 확장 포장되었다. 길이는 3,000m로 다음과 같은 작은 골짜기들이 있다. 갓골 서재골 진막골(陣幕谷) 매말리골 아래골 새터골 전골 (6) 아지(阿支)골 아지리 아지 마을이 있는 일대 골짜기로 북쪽 고곡리 소재미에서 남쪽으로 성사고개에 이르는 길고 큰 골짜기이다. 골짜기 입구에 고곡리 소재미 마을이 있으며 수개 시남에서 내려오는 고곡천이 있고 남쪽으로 가 골짜기 서쪽에 아지 마을이 있고 성사고개까지 지방도 1043호 도로가 확포장되어 정기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서쪽에는 옥녀봉, 동쪽에는 대봉뒷산과 성사산의 줄기가 뻗어 있으며 남쪽에는 우실봉이 높이 솟아 있어 여러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골짜기 안쪽에 아지소류지가 있으며 길이는 800m 이다. 작은 골짜기들은 다음과 같다. 앞실 절골 도둑골 각골 (7) 고곡(鼓谷)골 이 곳은 사실 골짜기라 하기에는 너무 길고 광범위하다. 낙동강 입구 창아지 앞에서 고곡수리를 거쳐 칠현리, 고곡리, 수개리, 시남리에 이르는 일대의 계곡으로 고곡천을 따라 전답이 많고 골짜기의 폭이 넓다. 따라서 고곡천 일대를 편의상 고곡골이라 칭하여 이 근처의 골짜기들은 망라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이 골짜기의 길이는 창아지에서 진골못위까지 8,500m 이며 고곡천이 낙동강에 접하는 부분은 좁으나 개간이 된 저습지(고곡수리들)가 고곡 마을까지 있고, 고곡리 일대는 상당한 평지로 마을과 들이 있으며 서쪽, 동쪽과 북쪽으로 세 갈래 갈라져 있다. 양편에 있는 마을은 골짜기의 동편에 산빡굼, 소재미와 두곡, 접곡 미곡, 청단 마을 등이며, 서쪽에는 머찔, 구평, 북실 등 고곡리 여러 마을과 금곡, 수개, 시남 마을 등이 분포하고 있다. 지방도 1008호 영산 -박진간 도로가 두곡-고곡 구평-칠현으로 연결되어 정기 노선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8) 칠현(漆峴)골 칠현리 일대의 골짜기로 동쪽에 있는 구진산 줄기가 남으로 뻗어내려 낙동강까지 이르러 다름재를 이루는데 이 능선의 서쪽에 형성된 골짜기이다. 서쪽 산은 땅골만댕이로 길이는 1,500m 이다. 골짜기 중간에 칠현 마을이 있고 지방도 1003호선이 옻고개를 넘어 골짜기를 횡단하고 있다. (9) 반포(泮浦)골 반포리 반포마을이 있는 골짜기로 담곡 쪽의 구진산과 대곡리 쪽 동봉 산줄기 사이에 난 골짜기로 중간에 반포 마을이 있다. 골짜기 앞에 지방도가 지나가고 도로 너머 반개들과 낙동강이 있다. 계곡 입구는 반포늪으로 저습지였으나 둑을 막고 논으로 개간되었는데 길이는 2,400m 이다. (10) 한실{大谷}골 대곡리 대곡 마을이 있는 골짜기로 입구에는 대곡늪이 있고 남북으로 길고 넓게 장방형으로 뻗어 있는데 길이는 2,650m 이다. 골짜기 입구 서편에 하단 마을이 있고 중간에 한실 마을이 있다. 한실에서 골짜기가 두 갈래로 나누어져 동쪽은 대칭이고개로 연결되어 구진산에 닿았으며 북쪽 계곡에는 대곡소류지가 있다. 골짜기 입구에 지방도가 횡단하고 있고 한실 마을에서 대칭이고개를 지나 북실로 연결되는 임도가 개설되었다. (11) 작은 골짜기들 ① 마산리- 용소골 가말골 가마골 야시골{狐谷} ② 용산리- 안골(內谷) ③ 신전리- 영산골 창녕골 ④ 성사리- 두리봉골 ⑤ 아지리- 동박골 ⑥ 반포리- 땅골, 담실골{淡谷} 막골{幕谷} 말골{馬谷} 담수골 ⑦ 월하리- 범골 불미골 둑자골 늪부치골 도론골 월평골 5) 강과 시내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함께 계성천 장실천 용산천 고곡천 등 시내들이 있는데 하천의 면적은 읍 전체 면적 10%를 차지하고 있다. 옛날에는 매년 홍수가 연달아 계속돼 그 해 농사의 흉풍(凶豊)이 날씨나 홍수에 좌우됐으나 지금은 댐의 건설로 수량 조절이 가능해 지고 제방 축조가 완성되어 수해가 많이 줄어들었다. (1) 낙동강 ( 洛 東 江 ) 우리 고장은 낙동강의 중.하류에 속하는 유역으로 시남리의 이이목나루에서 본 읍으로 강이 흘러 들어와 북에서 남진하던 흐름을 서쪽으로 틀고 월평마을을 지나 월하마을 부근에서 흐름이 느려져서 넓은 모래사장을 이루며 남쪽으로 굽이쳐 박진나루에 이르고 창아지에서 용산 거룬강나루까지 10리에 이르게 산을 깎아 아름다운 절벽을 이루는 개비리를 지난다. 용산리 창나루(일명 거룬강나리)에서 낙동강 본류는 서부 경남 진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강(南江)과 합류되는데 옛날에는 홍수가 자주 있어 그 영향과 자연의 조화로 이곳에서부터 지류(支流)가 생겼는데 이 샛강은 도초산 남쪽편 산기슭을 따라 학계리와 마산리를 거쳐 계성천을 아우르며 도천면 송진리 앞 본류로 유입되었다. 또 다른 지류는 홍정마을에서 홍포마을 앞을 지나 동갯들 한가운데를 2km 가량 흘러 본동 옆에서 낙동강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류의 연장은 약 7km에 이른다. 그러나 마산리 근처에 강물이 흘렀던 흔적만이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샛강은 토사로 매몰되고 유역은 저습지로 변화되었다가 이제 들판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때 생긴 굴강이 남지리 본동 신남지교 동편에 아직도 남아 있다. (2) 계성천 ( 桂城川 ) 사진설명 ( 계성천 ( 桂城川 ) 대성교 - 성사교 - 상대포교 - 남지교(고속도로) - 남송교까지 우리 고장 통과 길이는 6.2km이다. 수위 관리는 100년간 평균하여 최고 수위를 14.75m로 정하고 하수처리시설 공사를 진행중이다.
(3) 대(大) .소하천 ( 小河川 )
6) 늪과 저수지 ( 貯水池) 우리 고장에는 늪과 못이 많았으나 관개용수(灌漑用水)의 이용도가 높아 늪과 못 주위의 저습지가 대부분 개간되었다. 또 농업 용수를 위한 저수지가 최근 많이 설치되어 군내에서 수리 안전답의 분포가 가장 높다. 『취산군지』에는 동보호(지금의 동포수리)와 학계호(지금의 학계리 늪)가 있다 하였다. 東步湖 在治南二十里 今爲水利 鶴桂湖 在治南二十五里 가장 큰 늪으로는 대곡늪과 신전늪이며 장실늪이나 용산늪은 상당히 넓었으나 논으로 개간되어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 늪 장실(학계)늪 용산늪 신전늪 대곡(하담)늪 ◑ 소류지 . 저수지 홍정 아곡 허리골 성사 뒷골 서잿골 신전제1 신전제2 고개밑 절골 안골 고곡 수개 시남 청단 장곡 대곡 월하 험치골
4. 지질 (地質) 경상계가 80%를 피복(被覆)하고 있는 경상남도 지역의 지층의 한 지역인 우리 고장은 그 지질이 낙동통(洛東統)과 신라통(新羅統)으로 구분되는 경상계에 속한다. 주로 기저(基底)를 퇴적층 안산암질암(安山岩質岩) 및 화성암(火成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중부의 낙동통과 신라통의 양대(兩帶)는 북북동으로 연장하며 동남으로 완만히 경사한다.우리 고장에 대한 구체적이며 전문적인 분석 자료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남부와 동부는 충적토(沖積土)와 화강암계(花崗巖系) 사토(砂土)가 많고 북부는 점판암계(粘板巖系) 점토(粘土)와 자갈이 섞인 흙인 역토가 많아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 짓기에 어려움이 많다.낙동강의 오랜 흐름과 퇴적으로 인하여 강변일대는 사질토양으로 월하 대곡 반포 칠현리 등지와 용산 학계 남지리에 이르는 평야지대는 돌이나 자갈을 구경할 수 없는 사질양토이다. 이 지역은 돌이 귀한 것이 특징이다. 시남 수개 성사 아지 신전 등에는 돌담이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돌이 귀해 탱자 울타리나 바자 울타리가 보통이었다.『창녕군지』에 우리 고장의 지질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17) 5. 기상 ( 氣象 ) 1) 기상 개황 ( 氣象 槪況 ) 비닐하우스 온실재배가 성행하도록 비교적 온화한 겨울철이 있는 우리 고장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관계로 겨울에도 추운 날이 많이 없고 따뜻하여 온실재배 등 시설 영농이 발달되기에 좋은 기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군은 여름에는 31 - 35°C로 덥고. 겨울에는 영하 7 - 9°C 정도로 춥지만 우리 고장의 강변일대는 그보다 평균 온도가 높다. 근년 최고 온도는 87년에 31.9°C 였으며 최저는 87년에 -7.8°C 였다고 한다.대체적으로 1, 4, 5월과 10, 11, 12월에는 맑은 날수가 많아 월 25일 - 28일이며, 매년 230일 정도 맑은 날로 나타나 있다. 강과 늪지가 많아 안개 끼는 날이 매년 100여 일이 된다. 그러나 남부지방이기 때문에 눈이 오는 날은 연 7 - 8일로 극히 드물다. 2) 강우량 ( 降雨量) 대체적으로 겨울은 가물고 6 - 8월에는 비가 잦다. 3) 기상재해 ( 氣象 災害 ) 기상 현상이 때때로 뜻하지 않은 이변을 일으켜 우리 생활을 위협하여 재해를 주기도 한다. 특히 농사를 짓는 우리 읍민들은 예로부터 기상 재해로 말미암아 풍년이 하루아침에 흉년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우리 고장은 범람하는 낙동강의 연변에 위치한 관계로 여러 기상 재해 중에서도 풍수해의 피해가 우심한 지역이었다.풍해(風害)와 수해(水害)는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여 태풍이 통과하거나 장마기의 저기압과 함께 오는 호우(豪雨)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태풍은 일년에 대개 2 - 3개가 한반도에 상륙하여 피해를 주는데 일반적으로 2년에 한 번 정도는 피해를 입는 형편이다. 태풍의 발생 시기는 7 - 9월이 대부분이다. 1959년 9월 18일 새벽 4시경에 불어닥친 사라호 태풍은 초속 25m의 강풍을 동반하고 우리 고장을 통과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때 경남도내에서만 3백여 명의 사상자와 함께 전국에서 10만 여명의 이재민을 냈다. 또 수만 동의 가옥 파괴와 농작물 피해도 엄청나 초유의 대재해로 기록되었다.18) 1960년 9월 19일에는 도내에 이틀간에 900여mm 폭우가 쏟아져 사망 . 실종이 도내 16명이나 났고, 1962년 11월 23일에는 폭풍이 불기도 하였으며, 1963년 6월 21일에도 태풍 실리가 지나가 낙동강이 범람하고 전국에서 200여명이 사망했으며, 1979년 8월 25일에도 태풍 쥬디가 내습하여 전국에서 95명이 사망하는 등 기상 재해로 인하여 피해가 많았다.저기압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호우와 폭풍우는 이른 여름철부터 초가을까지 일어나는데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며 특히 최근에는 비닐 온실에 치명적 피해를 주고 있다.장마와 홍수로 인한 수해는 해마다 2 - 3회 겪는 연례 행사 같은 재해였다. 1일 강우량 80mm 이상이면 홍수 피해가 예상되어 강변의 제방 축조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안동댐, 남강댐, 합천댐으로 인하여 그 피해는 줄어들었으나 계성천 주변의 배수시설의 확충이 더욱 필요해 지고 있다.1965년 7월 24일에 발생한 홍수로 인하여 남지리 시가지 전체가 물에 잠겼던 것이 최근의 가장 큰 홍수 피해였다.한해(旱害)는 대체로 8월에 많으나 2 - 4월 또는 6 - 9월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크게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최근 양수기의 보급으로 한발이 심할 때는 양수기의 의존이 높으며, 지하수 개발, 저수지나 소류지의 축조와 낙동강에서의 직접 취수 등이 더욱 원활하여 피해를 줄이고 있다. 최근의 한발은 1964년 4월 6일부터 8월까지, 1967년 4월부터 8월까지 있었던 것인데 1995년에도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도 하였다.1968년 3월 13일에는 폭설이 내리기도 하였다. 최근 1994년 2월 12일에는 23년만의 폭설로 교통이 두절되어 도내의 초.중.고교에 휴교령이 내리기도 하였다.우리 읍에 최근 발생한 주요 기상재해는 다음과 같았다.
1961. 6. 30 - 7. 1 -- 190mm내외의 호우 1962. 8. 24 - 8. 25 -- 200mm 이상의 강우
1961. 8. 3 - 8. 4 -- 헬렌호, 호우 1962. 8. 2 - 8. 3 -- 노라호, 강풍
자원 (資源) 1. 동물과 식물 1) 동물 사람과 가장 밀접한 가축인 소 말 돼지 개 닭 염소 오리 비둘기 거위 고양이 등 오래 전부터 키워 왔던 동물 외에 우리의 산야에는 많은 야생 동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 분포되어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독립적인 지역을 이루어 분포하지 않으므로 우리 고장에서 발견되거나 서식하는 동물 중에서 타지방과 대동소이하여 별다른 특징이 없다. 낙동강과 계성천 등 하천과 대곡늪과 신전늪 등 조류(鳥類)의 먹이가 풍부하여 겨울철이면 철새들이 많이 날아 왔으나 현재는 많이 줄어들어 조류 분포에도 별다른 특징이 없다. 지금도 철새들이 도래하고 있으나 각종 공해와 불법 포획으로 인하여 그 수가 현저히 감소하였다.최근 병충해 방제를 위한 농약 살포와 산지 개발 등으로 자연 환경이 오염되어 서식 동물의 단순화가 가속되어 감소를 가져오고 있다.서식을 했거나 지금도 서식하는 동물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 포유류(哺乳類) ◑ 조류(鳥類) ◑ 양서류(兩棲類) ◑ 기타 곤충류 크고 작은 산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남방형 동물의 안식처가 되는데, 포유류와 조류도 풍부하였으며 기후가 온난한 관계로 각종 곤충류와 함께 농작물과 산림에 피해를 입히는 해충류도 대부분 서식하고 있다. 2) 식물 우리 고장은 난대성(暖帶性) 식물과 온대성 식물의 분포의 경계를 이루는 북위 35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두 식물들이 함께 분포하고 있다.특이한 식물은 조사된 적이 없으며, 인근 지방의 것과 다를 바 없다.임산자원(林産資源)은 많지를 않다. 북부는 산지가 있으나 높은 산이 없고, 농지로 개간된 야산이 많아 임목이 적어 목재의 생산은 적은 편이다.산림 수종(樹種)은 소나무가 많은데 재래종 육송 외에 리기다 소나무와 해송도 있으며, 대나무 밤나무 같은 경제 수종도 있으나 대부분은 경제성이 뒤떨어지는 오리나무 도토리나무 등이다.해마다 상당량의 식목으로 산이 푸르고 연료 채취가 중지되어 머지 않아 임목의 생산이 증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고장 전역에서 분포하는 식물로서 야산과 들에서 자생하거나 심거나 재배되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침엽수(針葉樹) ◑ 활엽수(闊葉樹) . 과수(果樹) ◑ 화훼류(花卉類) 및 관상수(觀賞樹) ◑ 초생식물(草生植物 : 야산 분포)
3) 어류 수산자원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 과거에는 풍부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공장 폐수와 생활 오수로 낙동강의 오염이 급격히 심화되어 많은 고기가 폐사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수질 오염을 막아야 하고 수산 자원의 보호를 위한 정책적이고도 근본적인 대책이 요망되고 있다. 강에서 많이 잡히는 고기{江漁}는 잉어 붕어를 비롯하여 숭어 장어 웅어 등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특히 피라미 정거리(빙어) 같은 비린내가 나지 않는 어종들도 많았다.최근 양식어업(養殖漁業)이 시도되어 좋은 성과를 얻고 있으며 민물 생선회가 우리 고장의 특미(特味)로 이름나 있다.계성천과 대곡늪 신전늪 등 규모가 큰 저수지가 있어 담수어(淡水魚)의 서식은 다양하여 낚시꾼의 발길도 잦았다. 대표적인 어류로는 미꾸라지 붕어 모래무지 피라미 새우 잉어등이 있는데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세대는 10여 년 전부터 사라져 버려 어획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며 최근 양식 어업을 하는 어가(漁家)가 생겨나고 있다.
2. 부존자원 ( 賦 存 資 源 ) 땅속에 귀한 광물이 많아 광산이 많은 곳도 있으나 우리 고장에는 현재 채광되는 특별한 광물이 없다.형석(螢石 : Flourite)광산인 남지광산이 우리 고장에 있었다 하나 폐광되고 없어 채굴량이나 규모 등은 알려지고 있지 않다.19) 또 금광이 용산리 아곡에 있어 1930년대에 금을 캤다고 하나 채금량이 얼마 되지 않아 채산성이 맞지 않아 폐광되었다고 한다. 광구가 20여m 잔존하였는데 지금은 많이 무너져 굴이 막혔으며 동북 골짜기에 금장골이란 이름만이 남아 있다.현재 우리 고장에는 부존자원으로 들 수 있는 자원은 빈약하여 조사 자료는 없다.비금속 광물로 건축재로 쓰이는 모래와 자갈이 소량 생산되었으나 최근 채취가 중지되었고, 온돌판 석재(구들장)로 쓰인 판상(板狀)점판암 패암(貝岩)도 소량 산출되기도 했었다. 또 마산리 당포수리 일대와 계성천변 상대포 아래에서 도자기 재료인 질 좋은 백토(白土)가 생산되어 수년 간 채취하기도 하였다.
3. 관광자원 ( 觀 光 資 源 ) 1) 유명 산물 (有名 産物 ) 한 지방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나 널리 알려진 유명 산물은 그 지방 산업의 흥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많이 생산되던 산물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명맥이 끊기거나 겨우 그 이름만 유지되기도 한다.우리 고장의 특산물은 주로 밭에서 생산되는 것이 많았다. 해방 전후에는 땅콩을 위시해서 쌀과 보리쌀 참깨 붉은 고추 무 배추 참외 담배 면화 삼베 누에고치 대두(콩) 홍도(복숭아) 등이 꼽혔다.최근까지 남지땅콩의 명예는 살아 있어 우리 고장에서 땅콩의 생산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나 그 가공공장은 늘어나면서 전국의 땅콩이 일단 이곳으로 모이는 집산지로 발달하여 남지에서 껍질을 깐 후 선별(選別)하는 등 1차 조제 포장되어 전국으로 출하되고 있다.쌀은 미질이 좋아서, 참깨는 기름이 많이 나와서, 붉은 고추는 색깔이 곱고 달고도 매워서 여전히 인기가 높아 장날이면 무 배추와 함께 농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도시민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러나 담배 면화 누에고치와 삼베 등은 시대적 기호도 달라지고 재배 환경도 달라져서 그 종적이 사라지고 없으며, 다만 누에고치 생산은 10여 년 전까지 대량 생산되었으나 이것마저 중국산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들어 산을 개간하여 만들었던 뽕밭이 묵혀져 있는 실정이다. 복숭아의 생산도 많았으나 점차 사과나 단감이 재배되면서 그 면적도 줄어들었고, 우리 고장에서 생산되는 사과 맛이 상큼하고 단맛이 많아 인기가 높다.대두는 메주콩도 많이 생산되지만 8월경 수확하는 조생종인 "유월태"는 단경기(端境期)에 출하되어 콩나물용으로 크게 시중에 인기를 끌고 있다.최근 남지의 특산물이라면 단연 비닐 하우스에 재배되어 사시사철 공급되고 있는 오이와 풋고추, 수박일 것이다. 농협 공판장에서 직접 소비자에게 계통 출하되는데 우리 고장의 대표 산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고장에서 양식되는 잉어 향어 등의 생선회도 별미로서 외지인을 불러모으고 있음도 강마을의 운치와 함께 관광자원으로서 그 부가 가치가 높다 하겠다. 2) 자연적 자원 洛江七里 岐江斷崖 上浦歸帆 白沙落鴻 道草慕雲 靈南沃土 東步滿月 栗林淸風 ① 낙강칠리 - 낙동강 칠백리의 아름다운 경관은 남지에 와서 절정에 달한다. 시남리의 오여정에서부터 대곡리 앞의 절벽, 창아지-용산에 이르는 개비리 절벽, 합강정, 용화산 구구봉, 제왕담, 우강의 창암까지 남지에는 낙동강의 정수(精髓)가 모여 있다. ② 기강단애 - 기강은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니 용산리에서 창아지까지 뻗은 절벽은 바로 절경이다. 특히 절벽의 녹음, 가을 단풍은 합강정과 함께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다. ③ 상포귀범 - 상포는 곧 웃개이니 예전에는 우강쪽에서 배가 올라오면 강이 깊어 멀리서 보면 돛단배의 돛 끝만 가물가물 보였다고 한다. 지는 해 석양을 돛폭에 가득 안고 돌아오는 배에는 고기도 실렸고, 하류쪽 상품들도 실려 있었다. ④ 백사낙홍 - 강가 흰모래 사장은 넓고 넓으며 겨울이면 무더기로 내려앉는 기러기 떼의 군무(群舞)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⑤ 도초모운 - 도초는 곧 도사면의 진산격인 도초산이니 남쪽에서 보면 완만하고 부드러우나 북쪽에서 보면 험산준령이다. 저녁 노을이 산봉우리에 걸리면 마산리에서 용산리에 이르는 강마을의 올망졸망 초가집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구름을 이루며 산허리를 감으니 풍요롭고 평화로운 정경이 펼쳐진다. ⑥ 영남옥토 - 영남들은 바로 신전과 성사리 들판이다. 상대포 둘, 또는 황새목 높은 산허리에 올라 바라보면 도천 송진, 영산 월령, 장마 유리 땅이 모두 우리 남지들이요 기름지고 광대한 우리 전답이라 가을이면 황금 물결이 넘실대 풍년가가 드높다. ⑦ 동보만월 - 동보호는 지금은 개간되어 동갯들이 되고 말았지만 낙동강과 어울려 보름달이 둥실 하늘 높이 뜨면 모여 든 시인 묵객들이 호수에 뜨는 달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한다. ⑧ 율림청풍 - 어디 밤나무 숲이 있었나 지금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남, 대신동 일대는 밤나무 밭이라 여름 한철 그 그늘이 좋았고 강 쪽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 냄새는 향기로와 바로 신선들이 마시는 청풍이었더란다. 해방 후 한참까지 밤나무 고목들이 그곳에 많았다.
자연적인 자원으로서 경치가 좋은데 필경 사람이 많이 모여들어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도록 사람들이 정자를 짓거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하기도 한다. 우리 고장에서 관광지로 개발 가능하거나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은 다음과 같다. (1) 오여정 ( 吾與亭 )과 이이목나루 시남리 이이목나루는 6.25전쟁 때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최초로 도강(渡江)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의령군 낙서면과 통하는 이 나루는 우리 고장의
(2) 남지철교와 제왕담 ( 帝王潭 ) 남지철교는 마구국도를 연결하는 340m의 다리로 전국에서 보기 좋기로 유명한 철교이다. 제왕담은 웃개나루를 건너 있는 절벽으로 지금은 마산 광역 상수도 취수장이 들어섰는데 강과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모래뜸질이었다. 한없이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용산리 기강에서부터 남지리 본동 끝 송진들판까지 십 여리에 광대하게 있었다. 여기에 여름이면 모래뜸질이 크게 성행하였다. 모래뜸질은 햇볕에 달아 뜨끈뜨근 해진 모래에 온 몸을 파묻고 한 두 시간씩 지내고 나면 신경통을 비롯하여 각종 만성 질병이 신기하게도 완치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3) 박진나루와 6.25 전승비 월하리 월상의 박진나루는 역사성이 깊은 곳이다. 가야 때부터 나루터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때는 경주와 진주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곽망우당의 의병군이 강목을 지키며 왜병을 친 곳이기도 하여 역사성이 있는 사적지이기도 하다. 또한 6.25때 치열한 전투가 이 나루 일대에서 한달 이상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결국 낙동강을 사수하게 됨에 따라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어 전승비가 월상마을 앞산에 세워져 후세의 역사교육에 한몫을 더하고 있다. 또 교량 가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새로운 경치를 제공할 것이다. (4) 개비리 절경과 말무덤 아지리 창아지 마을에서 시작하여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용산리 기강나루까지 낙동강 동안(東岸)은 험준한 절벽의 연속이다. 절벽 중턱에 난 길은 꼬불꼬불 험하여 겨우 개가 다녀 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십 여리 되는 절벽의 길은 제법 넓게 닦여져 있어 여름 한 철 피서를 위해 강바람을 쏘이며 보낼만한 곳이다. 낚시터도 여러 곳 있었다. 또 양수장 북쪽 강과 맞닿은 절벽에는 여러 가닥의 밧줄이 찍힌 흔적이 남아 있어 소풍을 온 아이들이 신기해하기도 한다. 이 개비리 절벽이 있는 산 이름이 마분산(馬墳山)이다. 산 위에 있는 큰 고분이 말무덤이라 전하기에 붙여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첫 전승지인 용산리 거룬강나루{岐江津}가 지척이어서, 의병군이 이 산의 절벽 개비리에 은신 매복하여 왜병과 격전을 벌려 승리를 거두었는데 공을 세운 말이 죽자 그 용맹을 기리기 위해 말을 묻어주었다는 말무덤이 이 산 정상에 있기 때문이다. 고분은 잡목 숲에 가려져 있으나 낚시와 등산 코스로 권할만한 곳이다. 또한 창나루에는 월주(月柱)놀이가 음력 칠월 보름 백중날에 있어 가근방 사람들이 창나루에 모여들었다 한다. 창나루에서 합강정 쪽으로 바라보면 마침 떠오르는 보름달의 달그림자가 강물이 비치는데 그것이 마치 달 기둥처럼 보여 월주라고 사람들이 부르며 그 절경을 감상하고 보름밤을 즐겼다 한다. (5) 上大浦둘 신전리 성사리 일대에 있는 영남수리제방을 흔히 상대포 마을 근처에 있다하여 상대포둘21)이라 불린다. 영남수리 양.배수장과 함께 펼쳐져 있는 수 십만 평의 옥답 영남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제방의 잔디밭이 한없이 넓고 부드러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특히 이 제방은 봄과 가을 학생들의 소풍지로 인기가 높다. 영산면 송진리에서 장마면 동정리까지 수 십리 길고도 넓게 펼쳐진 제방의 잔디밭은 푹신하고도 완만해서 아이들이 멋대로 뛰고 뒹굴어도 다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누워 하늘을 보며 풀 냄새에 흠뻑 젖으면 도시의 공해로 찌든 오장육부가 맑아 질 것이다.
1. 인구의 증감추세 1) 구지 ( 舊誌 )의 인구 『昌寧縣誌』와 『靈山縣誌』의 기록(1832년간)을 보면 현의 전체 인구와 호수가 있을 뿐 우리 고장의 인구에 관한 기록은 전연 없다. 창녕현은 원호(元戶)가 5,921호이며 인구는 32,791명이라 하였고,22) 영산현은 신묘년(1831년) 때 원호가 3,526호이며 인구는 17,423명이라 하였다.23)『鷲山郡誌』에는 우리 고장의 인구가 나와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호구(戶口) 인구 신증(新增)」란 경오년(1930년)에 남곡면의 호수는 2,048호, 인구는 남자 4,900명 여자 4,731명 계 9,631명24)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 고장의 인구 추세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왜정 시에 발간된 『昌寧郡地誌』(1928년간 : 창녕군)의 기록도 군 전체의 인구만 나와 있어 아쉬움이 많다. 이때의 인구 밀도가 171명이라 했으므로 미루어 보면 약 9,500여명이 되므로 『취산군지』의 기록과 근접하고 있다. 이때 창녕군 전체 인구가 90,714명의 10.47%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15개면 중 가장 인구가 많았다.(당시 창녕읍은 창녕면과 창락면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지방에서 간행된 각종 현지나 지지의 기록이 군 전체에 치우쳐 일개 면의 숫자에 소홀했던 반면 정조 때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다행스럽게도 면별 인구가 상세히 나와 있다.25) ◈ 남곡면(南谷面) ◈ 도사면(道沙面) 위 기록에 의해 2개 면의 호수는 1,061호 인구는 5,452명임을 파악할 수 있는데 1930년대에 9,631명이었으니 정조시대의 인구보다 무려 4,179명이나 증가하였다. 급격한 인구 증가는 해방 후 까지 계속되었는데 1959년 말에는 18,402명으로 1930년대보다 배가 불어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30년만에 8,770명이 증가한 것이다.
2) 1930年代의 인구추세 왜정(倭政) 35년간 식민지 착취시절 인구조사는 세금부과를 위한 기초자료 이기도 하였는데 5년마다 조선 국세조사라는 미명아래 실시되었다. 요즘 5년 내지 10년에 실시하는 인구센서스와 비슷한 조사이기도 하였지만 식민지 수탈을 위한 조사였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된 『조선국세조사보고』26)에 의하면 1930년부터 5년 간격으로 조사된 것으로 상기의 구지 기록이나 『창녕군지지』와는 달리 상세한 면별 인구와 연령별 본적별 배우관계별 직업별 통계 등도 조사되어 현대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조사서에 의하면 1925년 우리 읍은 2,043세대 10,632명(남 5,419명, 여 5,193명)으로 창녕군 총 인구 95,583명의 11.1%였는데, 5년 후 1930년에는 387명이 증가한 11,019명, 1935년에는 1,819명이 증가한 12,838명이었으며,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는 14,078명(남 6,856명 여 7,222명)으로 1925년에 비하면 3,446명이 증가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이 남지로 이주해와서 많이 살게 되었는데 1925년에 창녕군에는 일본인이 681명, 중국인(支那人)27) 등 외국인이 263명이라 조사되고 있다. 1930년에는 군 전체 일본인이 604명인데 그중 창녕면에 186명이 거주하고 남곡면(당시 면이름)에 203명(남 103명 여 100명)이었고 중국인이 7명(남 7명)이어서 군내에서 일본인이 우리 고장에 가장 많이 살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1935년에는 군 전체 일본인이 크게 불어나 741명인데 그 중 창녕면이 228명인데 남곡면은 283명(남158명 여 125명)이었고 중국인이 13명(남 12명 여 1명)이었다. 3) 현대 인구 추세 인구의 급증 추세는 1960년대에 계속되어 1961년에 2만명을 넘어선 20,201명이 되었고 1960년대에 계속 2만명을 넘어서 1964년에는 최고 21,902명이었다. 이렇게 인구가 불어나자 읍 승격의 요건이 갖추어져 1963년에 읍으로 승격된 것이다. 인구 증가 추세는 1964년 21,902명(남 11,025명, 여 10,877명)을 정점으로 내림세로 돌아서 1971년 10월 조사시에는 20,190명(남 10,095명, 여 10095명)으로 2만명 선을 위협하기 시작하여 1980년에는 17,324명(남 8,595명, 여 8,729명)으로 10년 사이에 2,866명이나 감소되었다. 1989년에는 다시 줄어 15,053명이니 또 10년 사이에 2,271명이 줄어들어 최고 인구수 21,902명에 비교하면 6,849명이나 감소되어 해방 전후의 규모로 줄어들었다.비록 읍 전체의 인구는 줄어들었으나 남지리와 인근 마을은 별 변동이 없거나 늘었고, 그 이외의 리동 인구는 감소하여 농촌 인구의 도시 진출현상이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감소추세는 1990년대까지 계속되어 1990년에는 3,850세대에 12,682명이었다. 그러나 인구 감소 추세가 멈칫하여져 1993년 인구는 13,789명으로 90년보다 1,107명이 증가하여 아파트 건립등 남지리 일대의 인구가 점점 불어남을 반영하고 있었으나 1996년에는 남자 6,317명, 여자 6,592명 계 12,909명으로 줄어들었다.1925년 인구 10,632명을 100% 기준으로 하여 그 지수를 보면 30년 후인 1965년의 인구가 21,813명으로 205.2%가 증가했다. 그러나 우리 읍의 최고 인구수인 1964년의 21,902명을 100으로 기준 하여 보면 1980년에는 17,324명으로 79.9%로 급감 하기 시작하여 1993년에는 읍 인구가 13,389명이니 1964년보다 61.1%에 불과해 인구 증가 추세가 뚝 떨어졌다. 연도별 증감 추세를 보면 1959 - 1960년간에 1,803명으로 증가를 계속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때는 6.25동란으로 출산율이 저조했던 때를 만회하려는 듯 출산율이 급증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 중반이후부터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점점 낮아졌음도 알 수 있다. 호적신고 상황을 보면 1995년에는 출생 170명, 사망 142명, 혼인 218건, 이혼 48건, 1996년도 출생 163명, 사망 130명, 혼인은 223건, 이혼은 28건, 1997년에는 출생 140명, 사망 151명, 혼인 156건, 출생이나 사망은 제자리 또는 줄어들었지만 이혼은 48건으로 점차 느는 추세에 있다.1996년도 인구 이동 상황을 보면 주민등록 전입자가 남 526명 여 526명 계 1,052명으로 전출자는 남 639명 여 633명 계 1,272명이었다. 1990년 11월 1일, 전국 인구 및 주택총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때의 인구는 남자 6,166명 여자 6,517명 계 12,683명으로 상당히 인구가 줄어들고 있었다.28) 1997년 말 현재 우리 읍의 인구는 4.260세대, 12,972명으로 남자 6,311명 여자 6,661명인데 이중 고곡지구의 인구는 705세대, 2,030명이었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주민등록 세대 및 인구를 보면 전년도보다 세대수는 33세대가 증가한 4,293세대이며, 인구수는 228명이 감소하여 12,744명(남 6,193명, 여 6,551명)으로 핵가족화 하는 경향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인구 및 세대수의 증감상황과 추세
* 90년도까지 상주인구조사결과, 91년부터 주민등록인구임 2. 인구분포와 인구밀도 1) 리동별 인구 1998년 12월 31일 현재 리동별 인구(주민등록 인구) 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이동별 세대수 및 인구
(자료 : 남지읍 1999) 2) 외국인 인구 외국인의 거주 분포를 보면 1927년 창녕군내에는 일본인이 597명, 기타 외국인(주로 중국인)이 10호에 28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창녕에는 주로 행정 관료들이었던 반면 우리 고장의 외국인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일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퇴거하고 외국인은 1명도 없다고 조사되었다. 3) 인구밀도의 변화 창녕군의 인구밀도가 1993년에 157명, 97년 145명인데 비하여 우리 읍은 1960년에 395명 선을 최고로 1980년에는 312명, 1993년에는 249명, 97년 234명으로 매년 줄어들고 있으나 군 전체 인구밀도에 비하여 상당히 조밀(稠密)한 편이다.1927년 군 전체 인구밀도가 171명이었을 때 우리 읍은 173, 5명이었고, 1960년에는 364명으로 높아졌다. 우리 읍의 최고 인구였던 1964년에는 395명으로 읍이 생긴 이후 최고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369명으로 하강하였으며, 1981년에는 332명, 1990년에는 229명으로 점점 낮아 졌으나 군 인구밀도보다는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참고로 전국의 인구밀도를 볼 것 같으면 1987년에는 419.5명이었고 1994년에는 443.6명이었는데 우리 군이나 우리 고장은 전국 평균 밀도보다 낮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1983년말 서울의 인구밀도는 13,836명, 부산이 7,507명, 목포가 6,472명, 인근 마산시가 5,822명이었으니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얼마나 전출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1997년에는 우리 고장의 인구밀도는 하강곡선이 멈추어져 234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1997년 말 현재 인구는 남자 6,320명 여자 6,664명 계 12,984명이었다. 주민등록에 의한 인구 이동 상황을 보면 1997년 전입이 1,266(남 607명, 여 659명)이며 전출이 1,189명(남 575명 여 614명)으로 이동 인구가 많았다. 호적에 의한 인구 동태를 보면 출생이 140명, 사망이 156명, 혼인이 162명, 이혼이 48명이었다. 세대당 인구는 1927년에는 1세대당 4.7명이었으며, 1971년에는 급속히 늘어나 5.7명을 보이고 있어 1960년대의 6명과 함께 6.25동란 후의 높은 출산율과 대가족제도 유지세대 증가 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4.9명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농촌지역에는 핵가족화의 추세가 느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세대당 인구도 3.3∼3.0명으로 감소되어 젊은이와 출산기의 청.장년층이 이농하고 노인층이 대부분 고향을 지키는 세대가 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3. 인구 구조 성별, 연령별, 직업별, 종교별 등 여러 기준에 의하여 인구 집단을 분류하는 것이 인구 구조로, 이를 통하여 그 지역의 사회적 발전과 경제적인 발전 단계 등 총체적인 지역의 특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 년령별 구조 ( 年齡別 構造 ) 총 인구를 연령별로 구분하여 그 속성을 밝혀 보려는 것을 연령별 구조라 하는데 3개층으로 구분하는데, 14세 이하는 유소년층 인구, 15세 이상 60세 미만은 생산 연령층으로 60세 이상은 노인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 연령별 인구를 참고하여 교육청에서는 학교나 학급의 증설 등 학교 수용계획을 수립하는 등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는데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연령별 인구
(자료 : 조선국세조사보고 1935년) 배우관계별 인구
(자료 : 조선국세조사보고 1935년) 1971년 우리 읍의 연령별 성별 인구는 다음과 같았다. 연령별 성별 인구 (1971. 10. 1현재)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72) 1971년 10월 통계를 보면 14세 이하의 유소년층 인구는 8,207명으로 40.6%를 차지하고, 15세에서 59세에 이르는 생산 연령층 인구는 10,574명으로 52.4%를 차지하고 있으며, 60세 이상 노인층은 1,409명으로 7.0%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의 구조와 비교하면 전국 34%, 59,9%, 6.2%에 비해 유소년층은 6.6%, 노인층은 0.8%가 높아 생산 연령층은 7.5%나 낮게 나타나 우리 고장의 유소년층인 유아와 학생, 노인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곧 생산 연령층인 청년과 장년층이 많이 이농으로 도시 진출을 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연령(5세계급) 및 성별 인구 1990. 11. 1 현재
(자료 : 인구 주택총조사 통계청 1991) 2) 성별구조 우리 읍의 성별 구조를 보면 1927년대에는 96,31명 총인구 중 남자가 5,400명 여자가 4,731명으로 남자가 669명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59년에는 여자가 254명 많아 남녀 구성비가 50.7%로 여자가 우세하였다. 이 여자 우세 경향은 1960년대에 지속되다가 1970년에는 공교롭게도 50 : 50으로 평준화되는 추세였다. 연령별(5세 계급) 성별 성비 1990. 11. 1 현재
(자료 : 인구 주택총조사 통계청 1991) 위의 표를 보면 가장 남자가 많은 연령층은 20세 - 24세 층으로 178.75%로 1,023명중 남자가 636명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289명이나 많았으며 그 외 15세 - 19세 층이 115.81%로 높고 30세 - 34세 층도 107.77%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여자의 성비가 높아 60세 이상일 때는 최고 71% - 최저 22.86%로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산업별 구조 산업별 취업자 성별 인구 1968. 10. 1. 현재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72) 산업별 구조는 취업자를 대상으로 1차, 2차, 3차 산업별로 취업자의 인구수나 비율에 의해 구조상 특성을 밝혀 해당 지역의 산업의 특색이나 경제적 발전 단계 등 지역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다.우리 읍의 총 취업인구가 1968년 당시 10,668명으로 총 인구 21,364명의 49.9%에 해당되는데 이중 1차 산업 종사자가 82.0%이고 2차 산업 종사자는 1.7%, 3차 산업은 16.3%로 나타나 단연 우리 고장은 농경지대 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1990년의 농가 인구를 보면 농가수는 1,804세대, 농가인구는 5,886명(남자 2,868명, 여자 3,018명)으로 조사되어 있어 위 표의 1968년 통계와 대조하여 보면 1차 산업인구가 2, 3차 산업으로 대폭 옮겨져 갔음을 알 수 있다. 1996년의 농가 인구를 보면 농가수는 1,449세대, 농가인구는 4,222명으로 90년에 비해 크게 줄었다. 농가 인구의 연령별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연령별 농가 인구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97) 1968년 조사된 학력별 인구는 다음과 같았다. 학력별 성별 인구 1968. 10. 1. 현재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72) 1) 洛江七里 - 낙동강 칠백리, 栗林淸風 - 옛날 남지에는 낙동강 칠백리 큰 강물이 흐르고 강변에는 밤나무 숲이 많아 항상 맑은 바람이 불었다고 하여 생긴 남지팔경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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