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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호권(宣敎保護權, Patronata) 2014년 6월
1.선교 보호권 유래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발견과 때를 같이하여 교황청은 이들의 항해에 선교사들을 함께 파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탐험시대를 주도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왕들은 탐험을 통해 가톨릭의 전파에도 힘쓰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다. 그들에게 교황청은 ‘선교보호권’을 주어 신대륙에서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식민지에서의 선교활동의 의무를 부여하였다.이렇게 선교의 한 방편으로써 유럽을 넘어 신대륙과 다른 곳에도 가톨릭을 전파하게 되었다. 국가가 교회의 선교를 지원한다는 뜻에서 ‘국가의 교회선교 후원’이라고도 하는 선교보호권은, 교황청이 왕에게 위임하는 일종의 교회법적인 특전이었다.
2. 선교보호권의 실행 과정1455년 니콜라오 5세 교황은 아프리카 선교를 지원하고자 회칙 「로마 교황(Romanus Pontifex)」을 통해서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우선적인 탐험권과 평화적인 점유권을 승인하여 일종의 보호권을 부여하였다.이후 갈리스토 3세 교황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복음화를 시작하면서 책임자인 왕이나 왕족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는 동시에, 선교사들의 신변안전과 생계유지를 보장할 의무와 교회 감독권을 부여하였다.
3. 토르데시우스 조약
1492년 스페인에서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고 돌아오자, 스페인 왕실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에게 포르투갈과 같은 보호권을 요청하였다.그러자 신대륙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빚게 되었고, 1494년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년 7월 7일)’을 통해 두 나라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유럽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브라질을 제외한 서쪽은 스페인에게 특권을 재조정하였다.
카부 베르드 제도의 서쪽 370마일(레구아)에 그어진 자오선을 통하여
서반구는 스페인, 동반구는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되어 포루투갈은 동양으로 가는 아프리카 남쪽의 우회 항로를 보장받음으로써 남대서양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스페인의 보호권 아래에서 푸에르토리코, 쿠바, 파나마, 멕시코, 볼리비아,
칠레, 페루,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에서 교회들이 창설되었고,
포르투갈 보호권 아래에서는 브라질, 콩고, 앙골라, 모잠비크, 인도, 말레이군도,
일본, 중국, 인도차이나에서 신생 교회가 탄생하였다3. 선교보호권의 문제점금, 후추, 영혼으로 대별되는 산업혁명 이전의 중상주의적(상업) 자본주의와 결합된 이러한 교회의 선교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국가의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는 동기를 제공하였으며,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또한 선교보호권을 통해 의무보다 권리를 내세워 점령지역을 유럽 문화에 동화시키거나,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선교지 교회에 대한 교황의 요구는 국가의 이해에 따라 묵살되기 일쑤였다.또한 준비되지 못했던 선교사들의 모습은 때때로 강압적이었고, 선교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토착민들을 ‘Tabula rasa(백지 상태)’로 인지하며 그들의 문화와 관습들을 미개하다고 판단하여 파괴하곤 하였다.
아즈텍제국(지금의 멕시코)과 잉카제국(지금의 페루)을 멸망시킨 스페인 정복자들은 가톨릭 전파라는 사명감에서 폭력으로 원주민에게 개종을 강요하였다.
* 테페약 동산에 발현하신 성모님(1531.12.12. 후안 디에고)메시지 : "나에게 정성을 들이면 어려울 때에 나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동정어린 마음을 보여주겠다."
특 징 : 빛을 반사하는 특성 때문에 실제 그림보다 크게 보인다. 두 손을 합장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엷은 황갈색 피부에 금빛 꽃무늬가 새겨진 분홍 드레스를 입었다. 발치에서 천사가 성모를 받들고 있다
* 57세의 인디언 요한 디에고
요한 디에고(Juan Diego)는 멕시코시티의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57세의 가난하고 낮은 계층의 인디언 농부로서 이 이름은 그의 세례명이며 원래의 이름은 쿠아우틀라테우악(Cuautlatehuac, 독수리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인디언들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스페인인들이 멕시코에 건너간 후 3년이 지나서였는데 이 최초의 세례자들 중에 요한 디에고와 그의 아내 마리아 루치아도 있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은 후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례했다. 하지만 쿠아우티틀란에는 성당이 없었고 그곳에서 약 14마일(40리) 정도 떨어진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미사에 참례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까지 가려면 테페약(Tepeyac)이라는 산을 넘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내 마리아 루치아가 열병으로 죽고 나서 요한 디에고는 그의 숙부 요한 베르나르디노가 사는 톨페틀락(Tolpetlac)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는 성당까지 약 9마일 정도의 거리였으며 숙부의 집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숙부 역시도 세례를 받은 독실한 신자였으며 요한 디에고를 무척 아꼈다. 요한 디에고는 1548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 멕시코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있으며 2000년에 성인 반열에 올랐다.
과달루페(Guadalupe)의 뜻과달루페라는 이름은 루르드나 파티마처럼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지점의 이름이 아니다. 성모님의 발현지는 테페약(Tepeyac) 산이었다. 이 이름은 성모님께서 직접 붙여주신 것이다. 그럼 과달루페의 성모로 불려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성모님은 인디언 언어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성모님의 말을 분석해 본 결과 "데 과달루페"(de Guadalupe)라고 들렸던 것은 아즈텍어로
테 콰틀라소페우(Te Coatlaxopeuh)를 테 과틀라소페우(Te Quatlaxopeuh)로 잘못 들었던 탓이었다. 두 단어의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테(Te)는 '돌'을 의미하고 콰(Coa)는 '뱀'을 뜻한다. 틀라(tla)는 영어의 the와 같다. 소페우(xopeuh)는 '쳐부수다', '박멸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성모님이 요한 디에고를 통해서 주신 메시지의 마지막 문장인
"그 성화는 과달루페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 마리아'로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
에서 그가 잘못 들었던 '콰틀라소페우'는 '돌뱀을 쳐부수다' 또는 박명하다'는 뜻이다.이로써 볼 때 성모님의 메시지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당신이 언급하신 돌뱀은 아즈텍인들이 섬기는 날개돋힌 신 퀴트잘코틀(Quetzalcoutl)임이 분명하다. 퀴트잘코틀은 아즈텍 인디언들이 해마다 이만 명 이상의 여자와 아이들을 피의 제물로 바치던 신이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그러한 돌뱀의 우상을 물리치시고 그곳을 당신의 지배하에 두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한편 이같은 의미의 인디언어가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스페인의 유명한 성모 순례지인 '과달루페' 라는 명칭으로 옮겨졌다.
과달루페 발현의 의의
역사상으로 볼 때 과달루페의 발현만큼 한 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없었을 것이다. 성모님의 발현 후 7년간에 걸쳐 당시 멕시코 인구의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약 8백만 명에 달하는 멕시코 인디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멕시코는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성모님은 그들을 돌뱀(사탄)의 지배에서 구하셨다. 성모님은 그곳을 사탄의 지배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당신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하셨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님을 원죄없으신 분으로 인정한 것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이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이미 8세기 경부터 12월 9일에 성모님의 원죄없으신 잉태 축일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성모님이 요한 디에고에게 처음 발현하신 날은 12월 9일이었다. 한편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성모의 원죄없으신잉태 교의가 제정되기 백년 전 1754년 5월 25일 과달루페의 성모를 멕시코의 수호성인으로 인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때 이미 과달루페의 성모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 마리아 인정하면서, 그는 시편 147장을 인용하여 "이같은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고 언급하였다.
1737년 4월 27일에는 과달루페의 성모가 멕시코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는데 그러자 당신에 유행하던 전염병이 자취를 감추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12월 12일이 과달루페의 성모 축일로 선포되었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신의 첫 번째 사목 방문지로, 그리고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1979년 1월 25일부터 30일까지 과달루페를 순례했다
4. 선교사들
신대륙에 가장 먼저 선교활동에 들어간 선교사들은 작은 형제회, 아우구스티누스회, 가르멜회, 자비의 성모회,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었다. 1540년 예수회가 선교사업에 참여하였다. 17세기에 사제들의 공동체인 라자로회, 술피스회 등도 해외 선교에 참여하였다. 한편 1663년에 창설된 파리 외방 선교회는 오로지 포교성성의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봉사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회는 재속 사제들로 이루어진 선교 단체로서 선교지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오로지 신앙 전파에 초점을 맞추고, 방인 사제 양성을 중시하여 현지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현지민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5.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17세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해상을 장악하여 식민지를 빼앗게 되자, 선교지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시에 수도원끼리의 갈등도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1622년 1월 6일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은 헌장 《In Scrutabili자세히 살핀다》를 통하여 교황청의 상설기구로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복음화성)을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교황청은 선교보호권이 야기한 폐해를 극복하고, 선교 문제로 국가와 결탁한 수도회 간의 갈등을 해소하며, 또한 교황을 중심으로 전(全)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고자 하였다.현지인 교구 사제들을 양성하여 선교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선교보호권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보호권에서 독립된 명의주교나 교황 대리 감목을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직접 관할하는 감목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선교의 일관성을 추구하였다. 대목구장은 교황의 뜻을 선교지역에서 직접 수행할 전권을 갖고 있었다.
6. 동방 전교
인도와 일본 선교 역사의 첫 장을 연 것은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에 의해서였다. 교황사절이자 포르투갈 왕 요한 3세로부터 위임을 받아 해외선교에 나선 그는 1542년 인도 고아, 말라카에서 성공적으로 포교 사업을 펼쳤고(1545~1547) 1549년에 새로 발견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이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인도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1460~1514)가 1498년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유럽과 처음 접하게 됐고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의 향료 무역을 독점했다. 그 후 포르투갈은 인도를 군사적으로 정복하고 상업지를 건설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점령된 이후에는 스페인 역시 인도에 진출했다. 정복자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가적 차원에서 선교활동을 적극 후원했다.1) 인도 인도에서 원래 선교활동의 선구자는 1518년에 가장 먼저 고아에 수도원을 설립한 작은 형제회였다. 하지만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성과를 얻기 시작한 것은 하비에르의 도착 이후였다. 그는 고아에 도착한 뒤 남부 지방의 언어인 타밀어로 교리 문답서를 만들고 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봉사와 헌신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선교 활동을 왕성하게 펼쳐나갔다.한편 도미니코회는 1548년 인도에 도착했다. 도미니코회는 코친과 고아에 수도원을 세우고 1600년에는 고아 인근에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을 설립했다. 1572년에는 아우구스티노회가 진출해 고아에 대규모 수도원을 세웠고 동부 벵골 지방의 무슬림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했으며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는 1606년 고아에 산타 모니카 수녀원을 설립했다.인도에서 교계제도의 발전은 매우 더디게 이뤄졌다. 초대 주교인 후안이 고아에 도착한 것이 1538년으로 고아는 1558년에 코친과 말라카를 포함하는 대교구가 됐다. 교회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자선소를 전국 25개 지역에 설립하고 교리교사를 양성하는 등 선교 활동을 확대했다. 1572년경 인도에는 약 28만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인도에서 이처럼 선교가 성과를 거둔 것은 인도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적응하는 적응주의적인 선교 정책에서 요인을 찾을 수 있다.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인 로베르토 데 노빌리(1577~1656)는 마두라에 파견돼 산스크리트어와 타밀어를 배워서 힌두인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설교하고 인도의 고행자들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솔선수범하면서 유럽인들을 멀리하고 힌두인처럼 살아가려 했다. 새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인도 종교의 관습을 직접적으로 이교적이 아닌 한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전례와 신자 공동체 생활에서도 인도 종교의 관습을 차용하는 등 모든 종교 문제에 대해 관용적으로 대했다.하지만 이러한 선교 방식은 곧 교황청의 제재를 받았다. 17세기말 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고 1744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단죄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인도에서 기반을 잃었다. 2) 일본 예수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고아에서 입교한 한 일본인(안지로)의 안내를 받아 큐슈의 남부 가고시마에 입국했다.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는 물론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포르투갈의 발음을 따라 「기리시탄」이라고 불렀다. 이 기리시탄의 교회사는 이후 1858년 개항장에서 거류 외국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 활동이 인정될 때까지 300년간에 걸친 일본 교회사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하비에르는 2년 반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히라도, 교토, 야마구찌, 후나이 등 주로 큐우슈우와 혼슈우 서부 지역의 선교 활동에 힘썼다. 초창기 불교적인 문화와 전통에 젖은 일본인들은 하비에르 일행을 인도에서 온 천축승으로 알았고 하비에르 역시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해 일본인들에게 교리를 설명했다. 특히 그는 서양의 새로운 자연 과학을 일본에 전달해 그들의 호감을 얻었고 큰 영향을 주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전달된 유럽의 새로운 문물은 전란에 시달리던 일본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700여명의 일본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중국으로 떠난 하비에르(1552년 12월 3일 선종)의 뒤를 이어 토레스 신부가 적응주의 노선과 포르투갈 상선의 일본 출입을 선교활동과 연계 지으며 선교 활동에 나섰다. 그는 18년 동안 약 3만여명에게 세례를 주고 전국에 4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또 병원, 육아원, 양로원 등을 운영하면서 서민 대중들에게 접근했다.그 뒤를 이어 카브랄 신부는 1570년 성직자 회의를 개최해 일본 선교 방침을 확정짓는 한편 오다 노부나가와 각지의 기리시탄 다이묘의 후원으로 교세를 크게 늘려나갔다. 이후 1580년경 일본에는 신자 수가 약 10만명 정도까지 늘어났다.1579년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 발리냐노(1538~1606)의 입국은 일본 선교의 또 다른 전기를 가져왔다. 1580년 나가사키를 예수회의 근거지로 삼고 일본의 사정을 고려한 선교 지침서를 저술해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또 인도 관구에 속했던 일본교회를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포교 체제를 정비했다. 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그의 초기는 천주교에 호의적이었으나 1587년6월19일자로 선교사이 일본체재를 불허하고 선교활동을 금지하는 파테렌 추방령(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 1587 기리시탄 금교령
① 일본은 신국(神國)으로 邪法은 용서할 수 없다.
② 사원, 신사의 파괴는 전대미문의 일, 각 영주는 천하의 법도를 준수해야 한다.
③ 선교사는 佛法의 파괴자이므로 일본에서 추방
④ 商船은 도항해서 매매를 해도 무방.
* 박해
. 성당(남만사) 파괴, 수도원, 병원, 소신학교 몰수, 교회땅 몰수.
예수회 회원 일부 필리핀 피신, 일부 기리시탄 영주 영내 잠복
. 1597 박해 - 나가사끼 순교자 26명-1862 시성
기리시탕 체포 1597년 1월 3일 교토에서 나가사끼 800km 죽음의 행진
- 엄동설한, 맨발, 귀 잘림, 손 포박, 눈 비, 조롱, 침 뱉음
- 26명 2월 5일 나시사카 언덕 십자가형 - 데우스, 마니피캇 찬가 부르며 순교.
3) 중국
포르투칼은 1557년 마카오에 정착했다. 1565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거처를 마련했고 시찰사 발리냐노는 1578년 중국대륙에 루기에리와 마테오 리치를 파견했다. 마테오 리치는 1601년 북경에 도착해서 1610년 선종할 때까지 북경에 머물면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마테오 리치의 초기 선교 방식은 승복차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자와 중국 무노하를 심도있게 연구하면서, 공자의 제자들인 유학자들이 승려들보다 중국인들에게 더 존경을 고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보유론적인 입장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였고 승복을 벗고 유학자의 복장과 생활 방식을 택하였다. 또한 서양의 과학과 천문학 그리고 수학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마테오리치의 선교 방식
(1) 문화 적응주의 선교(보유론적 선교)
. 승려 복장→ 유교 선비 복장
. 중국 고전에 능통, 사서 라틴어 번역 서양 소개 .
. 중국 풍속, 문화, 사상, 종교 존중: 배공제조(拜孔祭祖) 미풍양속 인정.
-중국이 수준 높은 종교 민족임을 인정, 그리스도교적인 하느님을 숭배하지는 않았지만 上帝가 바로 천주임을 가르침- 補儒論的 선교
. 황실 및 학자와의 교류 - 서광계, 이지조, 구태소 - 교리서 저술에 도움
. 보유론적 선교 방식은 성공 거두어 당시 2000명의 개종: 그리스도의 사도 활약
(2) 과학선교
. 서양의 과학, 과학기기, 수학, 천문학, 지리 소개 : 해시계, 프리즘, 천리경,
자명종, 풍금, 만국여도(萬國輿圖, 중국 우주관에 충격)
(3) 서적을 통한 복음 전파: 20여권 저술
. <기하원본 幾何原本>, <천주실의 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 <서국기법 西國記法>, <기인십편畸人十篇>-조선에 일찍 전래
아담 샬(湯若望 1591-1666)
.1622 중국 입국. 명 신종, 청 세조(순치제) 신임, 흠천감정( 欽天監正) 벼슬.
《숭정역서 崇禎曆書》, 《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편찬. 모함 투옥, 석방
. 북경 남당(1650), 동당(1655) 건립. 모함 투옥, 석방 - 중국 천주교회 발전에 기여
. 저서《主制群徵》외 다수.
. 소현세자 친교: 천문 역학서, 서학서, 여지구, 천주상 선물
예수회를 잇따른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 도미니코회(1632),
프란치스코회(1633년), 파리외방전교회(1684)의 중국 대륙 진출
중국의례(儀禮)논쟁
17세기 중반 예수회의 롱고바르디 신부에 의해 유럽 교회에 알려진 의례에 대한 문제는 도니니코, 프란치스코 회원들과 얀세니즘적 선교 방식의 파리외방전교회의 진출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 시기는 포르투칼의 쇠퇴와 선교 보호권을 유지할 힘이 약화되었다. 반면 필리핀 군도를 점령한 스페인, 필리핀에 진출한 도미니코회는 대만을 기점으로 하며 복건성 복안에 드렁와 선교하였다. 프란치스코회도 대만을 거쳐 복안에 들어와 선교하였다. 중국에 스페인의 세력이 확대되어 갔다. 중국 의례 논쟁은 복건성에서 먼저 폭팔하였다. 예수회 알레니 신부 활동지.
교황 끌레멘스11세의 칙서(Ex illa die, 1704. 11.20): 중국의 의례 금지령의 주 내용
첫째: 중국에서는 ‘천주’만이 그리스도의 신(Deus)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천(天)’이나 ‘상제(上帝)’ 등의 용어는 금한다.
둘째: 공자에게 드리는 모든 존경 의식을 금한다.
셋째: 조상을 공경하기 위한 의식과 제사 등은 집에서 거행되든가, 무덤 앞에서
거행되든지 모든 미신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금한다.
넷째: 선조의 신주를 모시는 것을 금하되, ‘신위(神位)’ 또는 ‘신주(神主)’ 라는
글자 없이 단순히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것을 허락한다.
다섯째: 중국의 모든 선교사들은 이 칙서 준수를 선서해야 하며, 이에 따르지 않는 선교사는 파문벌과 함께 중국에서 사목 활동을 할 수 없다.
* 베네딕도 14세(1742년 7월11일)는 이를 재천명하면서 엄히 지킬 것을 명함
* 교황 끌레멘스 14세가 1773년 7월 21이 예수회 해산 명령→프란치스코회 인계.
1784년 예수회 재산 은 라자리스트회 인수(프랑스왕)
* 교황 비오 12세의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1939년12월 8일)
공자 공경 의식의 전면 허용과 조상 제사에 대한 관용적 조처를 취하였다.
중국의 불평등 조약과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
1842년 유럽 열강들은 소위 ‘불평등 조약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인 의도를 중국에 강요. 이 같은 조약에는 거의 대부분 조욕와 관련된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유럽인을 겨냥한 증오심이 생겨났다.
중국인들의 외국인 증오심은 주기적으로 폭력사태를 유발하였다.
* 남경조약(1842.8.29):홍콩 할양(영국), 광주, 하문, 복주, 상해, 영파 5개 항구개항. 영국에 보상금 6백만 달러 지불.
*황포조약(184.10.244) :22조-다섯 항구 중에서 한 항구로 들어오는 모든 프랑스
사람은 체류 기간이 얼마든지 상품을 보ㅗ간할 집과 상점을 임대할 수 있고, 토지 를 매입하여 집과 상점을 지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람은 교회와 병원, 요양원과 학교 그리고 묘지를 세울 수 있다.
* 텐진조약(1868): 3조- 프랑스 외교 사저로가 영사가 중국 당국자와 주고받는 공문 서는 프랑스어로 작성하도록 한다. 그러나 효율적인 공무 수행을 이해 가급적
정확한 중국어 번역본도 함께 이용하도록 한다..... 만일 두 공문 사이에 차이가 생 길 경우 프랑스어로 작성된 문서가 효력을 발휘하도록 한다.
13조- 그리스도교의 근본 목적은 사람을 덕행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에 모든 그리 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신분과 재산, 신앙활동에 대한 완전한 안전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평화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선교사 들에게는 효과적인 보호조치가 주어져야 한다.
5) 인도차이나
일본에서 박해가 일자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베트남 남부(코친차이나)와 캄보디아와태국(시암)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1615년부터 이들 지역에서 사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트남어를 라틴계열 알파벳으로 치환하는 작업을 하였다. 예수ㅗ히 선교사 알렉산드르 드 로드는 베트남 방인 사제단 설립을 주창하였고 그결과 대목구장제가 도입되었다. 이 대목구장들은 베트남 방인 사제를 서품하였고 극동 지역을 위해 시암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베트남에서 선교한 최초의 프랑스인)
1859년 프랑스, 스페인 원정대가 사이고 점령 - 베트남 남부 코친 차이나 프랑스령
1885년 베트남 전역 프랑스의 보호령, 캄보디아,
라오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
한국 천주교회 약사
*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에 난징 대목구(1659년)를 설정할 때 그 관할 구역에 고려란 지명을 포함
- 중국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조선 선교를 위한 노력을 포교성성이 관심보임의 표시.
* 1650년과 1657년 프란치스코회 카발레로 신부가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 그 후 1690년 북경교구의 설정과 함께 첫 번째 교구장이 이태리 출신 프란치스코회원 펠라카에사 주교 임명 그는 조선이 난징보다 북경에 더 가깝다는 이유로 교황청에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베이징 주교에게 있음을 요청 1702년 교황청이 허락 그러나 1721년 주교의 서거로 잊혀짐.
1. 복음 전파설
1) 일본을 통한 전래설 : 임진왜란, 정유재란
2) 중국을 통한 전래설 : 사신행차 길에 한문서학서와 천주교의 접촉(직접선교는 성 사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저술한 서적들은 유입)
* 허균 : 홍길동전 저자 - 게12장(주요기도문) -혼자 신봉(1615)
* 정두원 : 천문학 종교서적(1561-1633)
* 이이명 : 남천주당 신부님들과 만남(천문학, 서학서,1720)
* 홍대용 : 남천주당 과학기술, 천주교 토의(1765)
3) 조선 유학자의 학문적 접촉
(1) 배경 : 왜란, 호란을 거치면서 사회의 혼란과 주자 성리학의 한계를 인식함과
동시에 새로운 학문과 사회 변화의 요구
- 공.맹의 원시 유학, 실사구시 학문 추구
이수광: 《천주실의 발문》
(2) 성호이익과 제자들 : 근기학파, 남인계 소장 학자들, 한역 서학서 연구 활발
“성호사설”- 서학서 읽고 식견과 느낌을 저술,
(3) 반응 - 부정적 입장 : 신후담, 안정복,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천지창조설 부인
영혼 불멸설 부인-불가의 윤회사상, 천당 지옥설 부인
천주강생, 십자가 죽음 -신 모독
현세부정 비판
정적 입장 : 홍유한 : 신앙으로 실천(1770), 주일, 기도, 금욕, 자선 활동,
소백산 칩거(기도와 묵상에 전념)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 권철신, 정약종, 이벽, 이가환
광암 이벽 : 수표교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 연구(천주공경가, 성교요지)
2. 천주교 창립
1) 창립과 확장
이승훈의 세례 : 1784년 북경 천주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로 세례.
이벽(세례자 요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베에르) 세례 - 수표교 이벽의 집
수표교에서 명례방(김범우 토마의 집)으로 집회 장소 옮김
신자 수 증가 : 1784-1785년 1년 사이에 신자 수 1천여 명으로 증가,
교세 범위도 두루 천리에 이르렀다고 함.
2) 적발 사건(1785) : 명례방 집회 적발(김범우 토마의 집)
이벽, 권일신 등 양반 자제들 훈계 석방
김범우 배교 강요 심문- 단양으로 유배: 장독으로 숨짐
천주교 사교로 규정 배척 : 천주교 서적 소각
문중박해 시작과 시련 : 이벽(1785, 병사), 이승훈(벽이론)
3) 가성직 제도 성립(1785) : 성직자단 구성, 미사성제와 성사 거행
이승훈 대표, 권일신, 이존창 루도비코 : 충청도 일대 복음 선포
유항검 아오스딩 : 전라도 일대 복음 선포
* 권일신과 조동섬(유스띠노) 8일 피정
: 용문사, 성령의 학교
* 주교요지, 성경전서 : 정약종
* 성경직해광익(1790) : 최창현-성서 묵상, 성세추요.
* 밀사 북경 파견 문의(윤유일)
: 평신도의 성사준행 금지 조처, 조상 제사 금지
4) 성직자 영입 운동 : 2차 윤유일 북경 파견
5) 천주교와 유교 사회와의 첫 충돌 : 신해박해(1791)
(1)원인 : 윤지충 모친상에 천주교식 장례 : 폐제사분신주(廢祭祠焚神主)
* 주자가례 위배시 - 장 100대에 삼천리 유배형
* 윤지충 : 1784년 김범우 집에서 천주교 서적 읽고
정약전에게 교리 배우고 세례
* 권상연(야고보) : 조상의 신주 소각, 윤지충 모친상의 상제례 동의
(2) 경과 : 친척들의 비난과 고발
홍낙안 : 좌의정 채제공에게 윤지충 엄벌 요구의 청원서 제출
유생들의 상소, 처형 요구
* 죄목 : 오륜 파괴와 왜곡, 금령에 불복종
(3) 결과 : 윤지충(33세), 권상연(41세)의 순교(1791. 12. 8)
진산 군수 신사현 유배(자신의 고향)
진산군 진산현으로 강등(5년 간)
이승훈 삭탈관직, 권일신 체포 및 유배형(장독으로 숨짐)
(4) 의의 : 천주교와 유교 사회와의 첫 충돌, 순교자들의 뛰어난 신앙심과 순명의 덕, 용덕
순교자들의 유품 및 유해 공경
3.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년 순조원년)
1) 원인 : 정치적 원인 :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갈등의 표출
정순왕후 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과 외척세력의 정치적 보복.
사회적인 면 : 혼인제도의 혼란, 동정자들의 출현, 신분제의 혼란(형제적 친교의 삶)
남녀 차별적 삶의 형식 탈피
사상적 측면 : 유교사상과의 정면충돌 :충,효 사상의 혼란
2) 과정 : 최필공 토마스(1800. 11. 17), 최필제 야고보(1800. 11. 19) 체포.
“사학 엄금 교서”발표: 정순왕후, 오가작통법을 천주교인 체포 수단으로
사용
주문모신부와 남녀교우들의 순교, “황사영 백서”
“토사반교문” 반포 : 공식적 천주교 박해 중단
3) 결과 : 주문모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및 유배
- 1백여명 순교 4백여명 유배형
한국교회의 성직자 없는 교회 다시 시작
신자들의 종교적, 정신적, 경제적 시련의 시기 시작
교우촌의 형성과 교회 지도층의 세대교체
4. 신유박해 이후의 교회
1) 성직자 없는 교회와 천주교의 전국적 확산
2) 성직자 영입 운동 재개 : 이여진이 1811년 10월 동지사의 일행에 끼어 북경 방문
1813(이여진의 2차 밀사 ),
1816 (정하상- 이후 10년여 동안 9회에 걸쳐 북경 방문)
1813년 조선교우들 편지를 북경주교
수자 사라이바는 교황청에 제출.
1825년 성직자 영입 청원서에 의해 교황청에서 북경 주 교에게 선교사 임명하여 조선에 파견 조처하라고 명.
유진길, 조신철(북경 주교와 교황님께 보내는 편지)
4)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을 교황 대리 감목구로 설정
5)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소주교 - 2년 반 동안 입국을 위해 여행하다 병사 외방 전교회 소속 성직자 입국 : 앵베르 범주교, 모방 베드로,
샤스땅 야고보 신부 입국
5. 교우촌의 형성과 박해
1) 교우촌의 생성
(1) 전라도 저구리 교우촌 : 신해박해 당시(1791)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야고보가
저구리로 피신 정착
이후 신유박해 때까지 이 존창, 김 유산, 김 강이,
김 다테오 등이 이주.
(2) 신태보 베드로 : 신유박해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교우들이 중심이 되어
교우촌 형성
일반적으로 최초의 교우촌 형태로 알려짐
(3) 경상도 청송고을 노래산 교우촌 :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형제이며 동정)
(4) 경상도 안동고을 우련밭 교우촌 : 김 대건 신부의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
(5) 경상도 진밭들 교우촌
(6) 충청도 배론, 진천 배티 골짜기의 교우촌
(7) 경기도 수리산의 교우촌 : 최경환 프란치스코 일가
2) 교우촌의 생성과 소멸 : 박해로 인하여 교우촌 전체가 소멸되고 생성 반복.
(1) 을해박해(1815) : 경상도 강원도를 중심의 교우촌 중심으로 일어났던 박해
경상도의 노래산, 우련밭, 진밭들의 교우촌 교우들 모두 체포.
교우촌 소멸, 교우들 또다시 뿔뿔이 흩어짐
(2) 정해박해(1827): 전라도 곡성의 교우촌에 대한 박해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박해
(3) 신태보 베드로 : 정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긴 수감 생활 끝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
* 교우촌 형성 : 신유박해 후 신자 본분위해 교구들 수소문 - 용인에 순교자 유족 들 만남.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교우들과 가족들 이동 -강원도 산곡 정착 교우촌 형성
신앙적, 경제적 모든 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함
* 성직자 영입 운동의 왕복 여비 마련 위해 고생 - 교우들 간에 많이 알려짐
(신해박해 시 밀고자 명단에 오름)
* 교회 서적의 필사에 공헌
* 은거생활 : 경상도 상주 고을 잣골 정착(체포)
* 신태보 옥중 수기(1838) -샤스땅 신부의 요청,
* 1839년 5월29일 전주에서 참수 순교.
(4) 이경언 바오로 : 정해박해 당시 밀고로 인하여 체포 전주에서 옥사
(1827년 6월 27일)
이경도 가롤로,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 -
신유박해 때 9세 참수형 면.
* 교회의 지도자 : 한양에 살면서 신앙생활에 열심
- 성서읽기, 교우집 방문, 냉담자 회두, 전교
* 성서 필사, 상본 모사로 보급 및 생계유지
* 성직자 영입을 위한 자금 마련과 노력
* 옥중 서간 : 1965년 옥중수기 필사본이 한 순교자의 집안에서 발견
“ 루갈다초남이일긔남”“정해년 니바로 일긔”
6. 조선교구 설정(1831. 9. 9 교황 그레고리오교16세 친서)
1)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9월 9일자 친서로 조선을 교구로 설정하고 그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
2) 친서 내용
(1) 교황은 교황청에서 멀리 떨어진 조선의 양떼가 영원한 목자가 강림하실 때까지 사도적 보살핌으로 천상양식을 먹을 수 있도록 인도되어야 한다.
(2) 조선에 교황이 파견한 선교사들이 들어가 포교와 성사집행을 희망하고 조선에 교 구를 설정하며 북경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교구장을 세우는 것이 타당하다.
(3) 교구 설정과 교구 설정의 선언과 교구장의 권한 제시
(4) 친서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유효하며 효과적인 것이 되고, 그 전적 인 효력을 받아 향유할 것을 결정하며 모든 사람이 지킬 것을 결정함(친서와 다 르게 행할 때 무효선언)
(5) 친서의 효력은 이왕에 있은 교황의 규정과 법칙으로 정한 바와 반대되는 것의 제 약을 받지 않고, 그 밖에 특별하고 명백하게 언급되고 제한되어 다른 규정과 벌 칙으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3)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교구장 브릐기에르 주교에 서한 - 교구장 임명
4) 초대 교구장 태국을 출발 조선을 향하여 여행
(1832. 9. 12 - 1835. 10. 20 선종. 3년간의 긴 여정)
5) 여항덕 빠치피코 신부 입국과 귀환(1834. 1. 16 -1836. 12. 2 중국으로 귀환)
6)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35. 10. 20 벨리구에서 선종)
: 모방 신부 장례미사
*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경축행사의 일환으로 주교님 유해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
7) 모방 신부 입국 : 1835년 11월 22일 정하상 바오로 최 프란치스코와 함께 서만자 출발, 1836. 1 . 12일 한양 도착 선교활동 시작
8) 샤스땅 신부 입국 : 1833년 5월 페낭 출발 1837년 1월 15일 조선에 입국.
9)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 입국 : 1837년 12월 3일 한양 도착 성무 집행
7. 기해박해(己亥迫害,1839): 103위 성인 중 가장 많음
(기해 70위, 병오 9위, 병인 24위,)
1) 원인 : * 외척 세력 간의 갈등 표출- 안동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김조순 : 조만영)
* 농민 반란으로 인한 민심의 흉흉
*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사실 발각 - 김 여상의 고발과 교우 유린
2) 과정 : * 우의정 이지연이 천주교 격멸 청원 - 4월 순원왕후 김씨,토사교문 반포
* 1월 16일 서울에서 교우들 체포로 시작,
서울과 지방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 체포 순교
* 앵베르 범 주교,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
- 자수, 새남터에서 순교(군문효수형)
*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의 순교 -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3) 결과 : * 성직자 없는 교회 다시 시작, 기해일기(현석문), 상재상서(정하상)
8. 병오박해(丙午迫害)(1846)
*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 : 사제서품(1845.8.17 상해 금가항 성당),
첫미사 : 횡당성당(8. 24)
조선 입국 : 1845. 10. 12 강경 황산포 상륙
1) 원인 :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매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입국을 위한 해상로 개척을 위해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가롤로 등이 서해안을 거쳐
백령도에 도착 중국 어선에 편지 등을 전하고 오다가 순위도에서 발각
체포되면서 시작(1846. 6. 5)
2) 과정 : 김대건 신부 해주 감영에서 심문 후 한양 포도청으로 이송
김대건 신부 배교 회유 거절
3) 결과 : 김 대건 신부 및 현석문 가롤로 등 순교(1846. 9. 16, 20)
9.최양업 신부의 입국과 교회 재건
1) 최 양업 신부의 귀국(1849)과 교회 재건
* 최양업 토마 신부 : 사제 서품
(1849. 4. 15. 사백주일, 상해):예수회 회원이자 강남 대목구장
(1) 교계제도의 재정비 -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다블릐 부주교 임명(1857. 3. 25)
교구회의 소집 (1857. 3. 26)
-업무분담 : 신자사목 : 베르뇌, 최양업 신부, 페롱 신부
-출판사업 : 다블릐 주교
- 한한불사전, 십이단, 교리문답, 기해일기
- 선교사 행동지침 마련 - 신학생 담당 : 뿌르띠에, 쁘띠니꼴라 신부
사목교서 발표- “장주교윤시제우서”(1857. 8. 2)
(2) 성모신심의 강화 : 1841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성 요셉을 조선 주보로 모심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심회(1846. 11. 2. 수리치골)
* 성모 성심 공경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회원은 매일 성모상 앞에서 일정기도와 성모송 바침
* 조선을 성모님께 봉헌(1857)
- 1858. 2.11부터 루르드 성모 발현(7.6까지 18회)
* 성직자들의 사목담당 구역을 성모 축일과 연결시켜 확정함
(3)특수사업 : 성직자 양성에 주력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 설립 교육
출판사업 - 목판 인쇄를 통한 교리서, 기도서 개정, 번역 저술 보급
한한불 사전, 조선사 연표, 순교사료 모집과 보관, 불어 번역 작업
사회사업 - 영아회(고아구제)와 시약소(의료활동) 전개 및 외교인 어린이 세례
전교회 - 전교기금 모금 전달
(4) 한국 교회 지도서 발간 :“장주교윤시제우서”(1857.8.2 반포)
- 칠성사, 성영회에 대한 규식
(5) 교세 : 교우 수 - 약 1만 3천명, 고해자 9천여 명
* 교리 교육 강화 : 사본문답(삼본문답)을 모두 외어야만 세례 받을 수 있었음
(6) 기해박해 및 병오박해 순교자 82위 가경자 선포 : 1857년 9월 23일 (비오9세)
정 아가다(박 루시아와 중복), 김 발바라, 한 안나 증언 부족으로 탈락.
(7) 최양업 신부의 별세(1861. 6. 15) : 배론에 장례
10.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1866)
1) 배경
대원군: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따른 통상 요구,주변국들과의 국제문제 해결을 위한 천주교 서양인 선교사의 도움을 천주교 신자들이 건의 수용 움직임.
급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명령
2) 과정
* 1866년 대원군의 주교 체포령과 건의 교우들(승지 남종삼, 홍봉주 등)
체포 구금 문초, 순교.
* 오가작통법 강화 천주교 신자 고발과 독려와 은익자에 대한 엄벌 훈령 반포
* 베르뇌 주교를 위시한 성직자들 새남터에서 순교(군문효수)
* 프랑스 함대의 무력시위 - 프랑스 함대 로즈 제독이 이끄는 3척의 배 양화진까지 진입하여 위협,
* 강화도 사건(1866년 8월, 9월 프랑스 로즈 제독, 리델 신부 등 탑승)
: 조선의 문화재 탈취.
*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 도굴 사건(1868.5월)
- 페롱 신부 가담(양화진 순교자 무려 8천여 명)
* 先斬後戒형: 천주교의 6촌까지의 친척을 중앙 조정에 문의 없이 즉결 처리 하라는
대원군의 포고령
* 전국 각 지에서 순교자 일 만 여 명 순교
* 1870년 6월 5일 리델 주교 제6대 조선 교구장으로 로마에서 주교성성
* 1877년 9월 초 리델 주교 두세, 로베르 신부와 함께 재입국
* 1878년 6월 리델 주교 만주로 추방,
* 1884년 리델 주교 서거, 블랑 백 주교 제7대 주교 성성
11. 신앙의 자유
1) 한불조약(1886년 6월 4일)
* 조선과 프랑스의 외교 통상 조약에 자국의 선교사들이 성당과 교회 운영, 건물 건 립용 대지 매입 및 소유권에 대한 합법화 명시
*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안전 보장
2) 한국교회의 법규 간행(1887. 9. 21) : 블랑 백 주교 통일된 교회 법규 발행.
칠성사, 선교사, 신자, 회장, 공소와 신심회
3)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입국,
나가사키에 있던 성서 활판소를 정동으로 옮김.
4) 1890년 2월 2일 블랑 백 주교, 조선을 성모님께 봉헌
5) 1890년 2월21일 백 주교 선종, 9월 21일 뮈뗄 주교 제8대 교구장 성성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6) 1892년 명동 대성당 착공, 1898년 5월 29일 명동성당 축성식
(1893. 9. 25 약현 성당 축성)
7) 1894년(갑오개혁) : 종교의 자유. 《황사영 백서》 원본 발견
8)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비오11세): 79위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
9) 1946년 9월 16일 한국순교자 현양회 발족
10) 1968년 10월 6일 로마(바오로6세): 24위 병인 순교자 시복. 새남터 성지 매입
11)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 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