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대 법철학 교수 장은주의 저서 『인권의 철학』(새물결, 2010)에 대한 서평입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요청으로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계간지 '시민과 세계'에 실리게 된다고 합니다.
가능한 많은 내용을 담는 서평을 해 보자는 것이, 아주 압축적인 글, 난해한 글을 낳았는지도 모릅니다.... 잘 음미되기를 빌 따름입니다.
씩씩하고 명석한 '장군' 철학자 장은주 선생의 건승을 다시 기원하면서, 모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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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철학 -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진보의 철학>
장은주의 새로운 저서『인권의 철학』이 나왔다.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권리의 문법』,『인권의 문법』에 이어 인권에 대한 ‘철학의 문법’을 갖게 되었다.『인권의 철학』은 법철학이라는 분과 그리고 인권학 내부의 논의를 넘어 철학의 본령에서 인권의 ‘실천적 보편성’ 혹은 ‘보편적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장은주는『생존을 넘어 존엄으로』에서 이미 그 철학의 틀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이『인권의 철학』은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논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 밀도있고 소중하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집중력있게 전개한 작품이 얼마나 될까? 세계적인 논의들 그리고 국내의 이견과 오해를 헤쳐나가며 자신의 고유하면서 정합적인 사고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결코 자기도취가 아니라 공동체의 진보와 미래를 위한 숙고된 열정을 담아낸 글이 얼마나 될까? 반갑다.
책의 부제가「자유주의를 넘어 동서양 이분법을 넘어」라고 되어 있듯이, 책의 전편에 걸쳐 전통적 자유주의의 형이상학적 담론을 넘는, 또 ‘동아시아 가치론’과 같은 문화상대주의를 지양(aufheben)하는 인권의 보편 기능에 대한 치열한 논증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이론에 그치지 않고, 사회권을 포함한 ‘민주공화국’의 인권적 재해석, 자문화중심주의가 아니라 열린 공동체에 대한 희구로서의 ‘문화적 자기주장’, 단지 종족적 애국주의가 아니라 보편화가능한 ‘헌법애국주의’, 북한에 대한 인권적 개입의 당위성과 한계 등 우리 사회의 향배를 가늠하는 주요 쟁점들에 대한 유보없는 대면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서론에서 책 전체의 해제를 붙여 독자들의 독해를 수월케 해주고 있으며, 이후 총 3부와 보론으로 책을 엮었다. 제1부 ‘전통의 도덕적 메타모르포시스’에서는 전통의 발전적 계승이 어떻게 보편주의에 입각하여 진행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지에 관한 기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제1장 ‘전통의 도덕적 메타모르포시스’에서 저자는 ‘보편성에 대한 실현개념’(92쪽)을 내놓으며, 전통에서 출발하면서도 ‘문화민족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비젼을 제시한다. 여기서 인권의 보편주의는 전통을 대체하는 이질적 덮어쓰기가 아니고, 무릇 모든 전통이 지속가능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규범적 요청이 된다. 이러한 논지는 제2장 ‘문화적 차이와 인권’과 제3장 ‘인권의 보편주의는 추상적 보편주의인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즉 인권의 보편성은 ‘문화적 자기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합당한 한계이자 조건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37쪽).
제2부 ‘동서양이분법을 넘어, 자유주의를 넘어’는 그러한 인권의 보편성을 유교공동체주의와의 논쟁, 다문화주의에 관한 올바른 이해, ‘자유’ 개념의 재해석의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제4장 ‘인권과 민주적 연대성’에서는 “인권은 다만, 그 공동체적 연대성이 가서는 안되는 길, 공동체가 도대체 그 구성원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자기실현의 조건이 될 수 있기 위한 전제가 무엇인지를 소극적으로 한계지울 뿐이다.”(205쪽)라고 하여 인권의 보편성이 공동체의 전통과 어떻게 내적으로(‘내재적 초월성’) 연결되는지 설명되고 있다. 제5장 ‘다문화주의와 인권의 보편주의’에서는 다문화주의가 단순한 문화상대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관용, 즉 “모든 차별과 배제와 억압을 끝내고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모든 차원에서 소수자와 소외된 자와 약자와 주변인을 평등한 상호관계의 당사자로 만들자는 끊임없는 개방성에 대한 요구로서의 보편성”(244쪽)에 기초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제6장 ‘동서양이분법을 넘어 자유주의를 넘어’에서는 그 논의를 서구 자유주의 인권개념의 자기반성으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렇게 하여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존엄한 자유’라는 차원에서 ‘사회권’이 인권의 보편적 지평으로 들어오게 된다.
제3부 ‘보편주의적 인권정치의 지형’은 위와 같은 인권의 보편적 효력에 기하여 우리 헌정질서,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진보의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 제7장 ‘사회권과 민주공화국의 이념’에서는 “인권과 인민주권의 불가피한 내재적 연관성으로부터 이해되는 민주공화국”에서는 사회권이 “인권의 대지 위에 서있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인간존엄에 걸맞는 자유(‘위엄을 갖춘 자유’)야말로 ‘도덕적 제헌행위’의 핵심 조건이라고 말한다.(303쪽). 그리고 제8장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에서는 그렇게 이해된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통해 ‘국가에 대한 긍지’ 즉 ‘헌법 애국주의’를 진보 진영의 정치적 과제로 삼을 것을 주문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더 이상 뉴 라이트들에게 맡겨 둘 수는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358쪽). 끝으로 제9장 ‘인권의 보편성과 인도적 개입의 정당성’에서는 북한이 ‘우리식 인권’을 얘기하고 있음은 북한도 국제적 차원에서 ‘인정투쟁’의 장, 즉 인권의 보편적 논의의 틀에 들어와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396쪽), 그에 합당한, 즉 북한의 ‘역사적 상처’를 감안하는 인권적 개입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인권의 보편화 기능(‘보편적 실현개념’), 즉 전통의 메타모르포시스와 자유주의의 사회적 지양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만큼 논쟁적이고 또 어렵다. 실제로 저자도 언급했듯이, 어떤 비판자는 ‘수행적 모순’의 개념을 오해하여 저자의 논지를 정반대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반면에 저자의 논지에 전제되어 있는 ‘인권의 정언명령’은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존엄’이다. 저자가 전통적 자유주의, 그리고 유교공동체주의에 맞서 인권의 보편적 실현을 그렇게 열렬히 외친 까닭은 다름 아닌 ‘상처입기 쉬운 인간들’, ‘몫이 없는 인간들’, ‘중요하지 않은 인간들’의 ‘인간 존엄’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리라. 인권이란 결국 "상처입을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사회적-도덕적 장치"(44쪽)인 것이다.
어쩌면 <보론 01 ‘우리의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의 저자의 고민은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보론 02 상처입은 삶의 빗나간 인정투쟁 - 속물시대의 도래와 한국 근대성의 굴절된 규범적 지평>은 그와 같은 ‘우리의 철학’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애처로운 우리 사회, 각 개인의 진실이 함부로 취급받지 않기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 또 거기에서 진보의 길을 찾는 모든 이들은 저자와 동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