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장산 백암산 (2013. 11.02. 38 향우회)
가을 단풍 구경을 하러 떠난다. 정읍 내장산이다.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모이는 38 향우회 에서 다. 부부 동반 이다. 양용선 회장과 주양삼 총무가 향우회를 이끌면서 하면서 야외로 나가는 행사를 잘 치른다. 재작년에는 순천만의 습지를 다녀왔다. 주 총무 처가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나보다. 장인 손수 차를 몰고 와 술과 안주를 내려놓고 가시기도 했다.오늘은 내장산으로 해서 백양사로 다녀올 요량이다.
아침 7시에 운동장에서 출발이다. 아침을 준비하였으니 그냥 나오라고 한다. 동네 종권이 부부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한다. 정경이는 지난달 상관면에 있는 편백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져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중이다. 그래서 이번 행상에 참석치 못한다. 우리가 도착하니 출발이다. 정일가 참석치 못하고 전주에서 세공이 부인과 영섭이 부인 병준이 부인 그리고 종석이 부인이 참석치 못했다. 그래서 총 16명 출발이다. 38 향우회 회원은 몇몇이 탈퇴하여 지금은 12명이 되었다. 나는 군산으로 온 후 참석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충량에 살았던 윤종석을 넣기 위해 향우회란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윤종석은 개정초교를 졸업하지 안했다. 그 뒤 윤종석이 직장관계로 탈퇴하고, 차옥식이 가정사로 탈퇴, 채충석도 탈퇴, 김종수탈퇴 하고 이정일과 이은철이 가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김종수는 초기부터 10년 이상을 회장으로 그리고 이세공이 총무로 있으면서 초등학교 동창회 구성까지 수고하였다. 차는 옥산 나들목을 들어서 정읍을 향한다. 대야 넓은 들판은 추수가 끝나고 보리를 심은 논들이 많다. 하얗게 말아놓은 볏짚들이 공 모양을 하고 늘어서 있다. 일명 ‘공룡 알’ 이라고 표현하다.
지난여름 경기지역과 강원지역에 집중호우로 논농사가 망치어 볏짚이 부족하여 예년에 비해 가격이 배로 상승하였다고 한다. 예년에 한필지에 10만원 하던 볏짚이 올해는 20만원이 간다고 한다. 한필지에 대략 7개에서 8개가 나온다고 한다. 소를 사육하는 농가에서는 한 덩이에 7만원씩 사서 사용한다고 한다고 한다. 이렇게 볏짚을 이용하니 논에 넣어 지력을 증강 시켜야 벼농사가 잘 될 것인데, 하는 마음이 앞선다. 관광버스 뒷자리에는 탁자가 놓여있다. 아침으로 찰밥을 해 왔다. 나는 아침을 먹어 배낭에 챙겨 놓는다. 그리고 과자며 캔 음료를 넣은 비늘봉투를 각자 나누어 준다. 종석이가 병을 들고 와 마개를 따라고 건넨다. 코크마개이다. 배낭에서 등산용 칼에 달린 코크마개 따는 용수철 모양의 핀을 펴 병마개를 돌린다. 소리도 경쾌하게 ‘펑’소리를 내며 빠진다.
아침부터 포도주, 소주, 맥주를 골고루 맛본다. 김제 벽골제에 들려 용변을 본다. 지자체 행사 중 성공적인 사례로 전국에 알려진 곳이다. 매년 이곳엣 지평선 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이제는 지평선을 바라 볼 수 없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곳에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어 지평선을 막고 있다.
웹 문서에 나와 있는 벽골제((碧骨堤) 을 알아보자.
전북 김제시 부량면(扶梁面) 용성리(龍成里) 소재의 비석 및 삼국시대의 저수지 둑.
지정번호 : 사적 제111호
소재지 : 전북 김제시 부량면(扶梁面) 용성리(龍成里)
시대 : 330년(백제 비류왕 27년) 완공, 790년(원성왕 6) 증축
종류 : 저수지둑
본문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고려, 조선 시대에 수리하였다.
제방은 포교리(浦橋里)를 기점으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약 3km의 거리에 남아 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3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1975년 발굴 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cm, 깊이 12cm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축조된 대규모의 저수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축조 시기는《삼국사기 三國史記》와《三國遺事》에 각각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서기 330년)과 20년(서기 32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 흘해왕 때 축조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김제지방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백제와 신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의 두 기사는 착오로 인하여 백제의 사실이 신라의 역사에 잘못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벽골제는 김제평야의 수전(水田) 경작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堤)가 축조된 후 여러 차례 수축공사가 행해졌는데,《삼국사기》권 10 원성왕 6년(760년)조에 7개주의 백성들이 동원된 대토목공사를 하였다는 기록과 설화가 있으며, 고려시대《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藍》 벽골제중수비문(碧骨堤重修碑文)에는 고려 헌종(1009?1030)때 벽골제 중수를 한차례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인종 21년(1143년)에도 수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농본주의 정책을 표방하고 농업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조선시대에도 벽골제 수축에 관하여 논의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태종실록 太宗實錄》권 16 태종 15년(1415년) 8월 기사에 전라도 관찰사 박습(朴習)이 벽골제의 저수지로서의 우수성을 논하자 태종이 벽골제의 보수공사를 실행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20여 일 동안 벽골제 수축 공사를 하여 약 300년 만에 벽골제가 복구되었다가 5년 후인 세종 2년(1420년)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고, 이후에는 방치되어 그 넓은 제지(堤址)가 전답으로 바뀌어 갔다한다.
그렇다면 예전의 벽골제의 규모는 어느 정도 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벽골제의 제방의 길이와 저수된 물줄기가 어느 지역까지 연장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벽골제는 길이가 60,843尺 약 3,240.45m에 달하며, 5개의 수문이 있었다 한다. 첫 번째 수문인 수여거(水餘渠)는 그 물줄기가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두 번째인 장생거(長生渠)는 만경현의 서쪽, 세 번째인 중심거(中心渠)는 고부군(古阜郡)의 북쪽과 부녕현(扶寧縣)의 동쪽, 그리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수문인 경장거(經藏渠)와 유통거(流通渠)는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그 물줄기가 뻗어 나갔다고 한다.
이 유적이 갖는 의미는 4세기 삼국사회의 토목, 측량, 석공 등 제반기술의 발달수준은 물론 농업국가로서 일찍부터 벼농사를 위하여 수리시설을 갖추었던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2,500m의 제방과 2개의 수문 장생거와 경장거 만이 남아있어 안타까움을 더 하고 있다. 라고 소개한다.
작성자는 송윤영, 작성일 2008년 이 위 글은 월촌초등학교 홈페이지에서 복사한 내용입니다.
이곳에는 열리는 지평선 축제엘 2년 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낙농 체험 장에서 우유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것도 해 보고 가래떡을 이용하여 모자익을 하는 것도 해보았다. 이 떡은 행사를 마치고 김제시 일원에 있는 복지 시설에 있는 분들을 위하여 사용한다고 했다. 또한 소설가 ‘아리랑’의 저자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이 있다. 그리고 초창기부터 운영된 농경문화 박물관이 사라진 옛 농사일에 쓰인 기구들을 전시 하고 있다. 당초에는 몇 개의 돌기둥만이 처량하게 서 있던 곳에 이러한 시설들이 들어서 이 일대가 번잡해 졌다. 차는 어느새 승용차가 세워진 곳을 지난다. 신태인 근방인가 보다. 이곳에 오면 신태인 그리고 태인을 구태인이라고 한다. 신태인은 일본이 호남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철도를 부설 하면서 새로이 만든 도시이다. 이른바 요즈음 신도시다. 신태인 중심가는 지금도 나즈막한 일본식 목조 건물이 있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이곳 김제군 백산면에 사는 농부를 중심으로 군산을 배경으로 엮어진 일제 수탈기의 모습과 이를 온몸으로 극복하는 민초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차는 신태인을 지나 고속철도를 뒤로 하고 호남고속도를 넘어 태인을 돌아 북면을 지나 새로이 난 1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상동에 이르러 내장산으로 향하는 도로에 내려선다. 가로등의 어깨에는 단풍잎이 새침한 미소다. 내장 저수지 밑 주차장에는 풍선이 하늘높이 매달려 하늘거린다. 단풍 축제 현장이다. 도로 가로수 밑에는 청사초롱이 길을 밣힌다. 차량은 둑 밑을 따라 들어간다. 송죽 삼거리를 지나 관광버스는 계속 안쪽으로 들어간다. 시간은 8시30분이다. 일반차량은 통재하나 관광버스는 예약손님이라는 구실로 옛 정류장까지 들어간다. 시간은 9시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예약하고 11시 까지 도착하고 하며 케이블카를 타려 내장사 안으로 향한다. 나는 회장과 총무에게 말한다. 오후 3시까지 백양사 주차장엘 도착한다고 하면서 등산을 시작한다. 당초에 계획한 것이다. 회원들과 동행하면 계속 먹자판이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20여년 만에 백양사로 넘어가 보고 싶다. 이 등산코스는 7시간에서 8시간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혼자이니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옛 버스터미널에서 9시에 출발이다. 상점에는 노란 감들이 상장에 담겨져 식감을 자극한다. 제 걸음으로 가지만 관광객들의 틈새를 갈려니 여간 힘이 든다. 아침부터 세 가지 술을 먹었으니 뱃속이 이상하다. 파출소 입구에서 화장실을 찾아 나선다. 개울 건너 위쪽으로 가라고 순경아저씨가 알려 준다. 화장실도 만원 장애인 칸을 이용한다. 바쁜 걸음으로 입구엘 도착하니 총무님과 고병준 회원이 기다리고 있다. 매표소에 매표를 하려고 줄을 서지 않고 앞으로 나가니 안내요인이 경로우대 분은 이쪽으로 오시하고 하며 안내한다. 내가 늙어 보였나 보다. 표를 구입하려고 줄을 서려는 총무는 어정쩡하니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경노 대우를 받으며 입장이다. 벌써 65세가 되어 보이는가 보다. 가을걷이 로 많이 초췌해 졌나보다. 입구에는 셔틀버스가 다니고 있다. 일인당 1000원이다. 기다리는 시간에 걸어서 올라간다. 향원정에 이르는 길은 냇가로 나 있어 단풍을 만끽 한다. 도로는 차들만 다니게 만들었다. 향원정에 이르니 이곳부터는 단풍이 아직 들지 않았다. 잔디밭에는 자선모금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단풍터널이라고 이르는 곳에는 파란 잎들이 무성하다. 도로에서는 하얀 옛 복장을 하고 머리는 땅까지 내려뜨린 뒷모습 을 촬영 중이다. 어찌 귀신이 나오는 연출을 하고 있는가 보다. 일주문에 들어서니 벌써 10시가 되었다. 내장사에 이르기 전 부도전은 새로이 담장을 하고 있다. 부도 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벼락을 맞고 병들어 배어내어 없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이 소개하는 내장사의 내력을 보자
[정의]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에 있는 절.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역사적 변천]
636년(무왕 37)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하였으며, 이때의 가람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한다. 1098년(숙종 3)행안(幸安)이 전각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였다. 1468년(세조 14) 정혜루를 건립하였다.
1539년(중종 34)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장사와 영은사는 독립된 2개의 사찰이었다. 1557년(명종 12)희묵(希默)이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
1639년(인조 17)영관(靈觀)이 법당 등을 중수하고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1779년(정조 3)영운(映雲)이 대웅전과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하였다. 1923년학명(鶴鳴)이 절을 벽련암(碧蓮庵)의 위치로 옮겨 짓고 벽련사라 하였으며,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1938년 매곡(梅谷)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51년 1월 12일 불탄 뒤 중건을 보지 못하다가, 1957년 요사인 해운당을 건립하였고, 1958년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1960∼1962년과 1974∼1977년에 중건하였고, 1992년 요사인 향적원(香積院)과 종각을 건립하였으며, 1997년 해운당을 중건하였다.
[내용]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명부전·선원(禪院)·정혜루(定慧樓)·사천왕문(四天王門)·일주문(一柱門)·요사채·종각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인 내장사 동종과 부도 등이 있다.
이 중 내장사 동종은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있던 것을 1890년(고종 27)에 영담(映曇)이 옮겨 온 것으로, 윤광형(尹光衡)과 조한보(趙漢寶)가 시주하여 1768년에 주조하였다는 명문이 있다. 높이 80㎝, 구경 50㎝의 중종이며, 용머리의 정교한 문양과 맑은 음향으로 조선시대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3년에 무기 제작을 위해 강제 징발되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한다.
부속 암자로는 벽련암·원적암(圓寂庵)·불출암(佛出庵)·정재암(淨齋庵)·영은암(靈隱庵)·월조암(月照庵)·삼청암(三淸庵)·금선암(金仙庵)·은선암(隱仙庵)·천진암(天眞庵)·남산암(南山庵)·용굴암(龍窟庵)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원적암과 영은암만이 남아 있다. 절 주위에는 빼어난 경치의 명승지가 많으며, 내장산 안에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 때 희묵이 제자 희천(希天)에게 쌓게 한 것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읍현지(井邑縣誌)』
『전통사찰총서』 9 -전북의 전통사찰 Ⅱ-(사찰문화연구원, 1997)
『한국(韓國)의 명산대찰(名山大刹)』(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사찰지(寺刹誌)』(전라북도, 1982)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권상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내장사는 이름그대로 안에다 숨겨 저장하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 원본(전주본)이 이곳 용굴까지 피난을 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설명을 보자
조선왕조실록의 보관과 재간
조선 태조(太祖)에서 철종(哲宗)에 이르는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편찬·기록한 책.
조선 초기의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은 처음에는 각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 1부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보관했던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보관했다(→ 색인 : 춘추관사고). 그러나 실록을 장기간 보존하기 위해 1445년(세종 27) 다시 2부를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星州)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해 1부씩 보관했다(→ 색인 : 성주사고). 〈세종실록〉 이후는 매 편찬 시 활자로 인쇄하여 위의 4곳 사고에 보관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충주·성주에 보관했던 실록이 불에 타 소실되고,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내장산에 옮겼다가 이후 해주·강화도·묘향산 등지로 옮기면서 보관했다.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 실록 804권을 3부씩 출판하여, 최종 교정본 및 전주사고의 원본 실록을 합쳐 5부를 만들었다. 또한 사고를 강화도 마니산, 경상북도 태백산, 평안북도 묘향산, 강원도 오대산에 설치하여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선조 때 출판된 신인본(新印本)을, 마니산에는 원본인 전주사고의 실록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했다(→ 색인 :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 그 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서울 춘추관의 실록이 소실되었다. 또한 1633년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조선정부는 이를 염려하여 묘향산사고를 적상산(赤裳山)으로 이전했다. 마니산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현종 때 완전히 보수되었다. 그 후 마니산사고는 1678년(숙종 4) 강화도 정족산(鼎足山)에 신설한 사고로 이전되었다(→ 색인 : 적상산사고, 정족산사고). 인조 이후의 실록은 4부를 인쇄하여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에 보관하여 조선왕조 말년까지 계승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정족산본·태백산본은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종친부 건물에 보관되었고, 적상산 본은 창덕궁 장서각(藏書閣)에 보관되었다. 오대산본은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으로 이전되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총독부에 이관되었던 정족산본·태백산본은 1929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관되어 보관되었다. 적상산 본은 6·25전쟁 당시 북한 측에서 가져갔다. 브리태니커 현재 페이지인쇄
이처럼 이곳 내장은 이름그대로 조선왕조의 기록물을 보존한 곳이다. 공무원 생활 초임발령을 정읍시에서 시작했다. 당시에는 군이었다. 11월 첫 주 토요일은 육림의 날 행사를 이곳 내장산에 와서 치른다. 그때는 단풍이 지고 관광객들이 떠난 뒷자리다. 그래서 군 직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이곳에 와서 과별 노래자랑도 하며 토요일 을 보냈는데, 지금은 철이 늦어져 아직도 단풍터널은 물들지 않았다. 내장사 대웅전은 작년엔가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졌다. 대웅전 자리에는 비닐하우스로 임시로 법당을 대신한다. 대웅전 앞 탑을 배경으로 기념을 남기고 금선계곡으로 향한다. 계곡에 남아 있는 휴게소는 몇몇의 등산객이 자리를 하고 막걸리와 전으로 땟거리를 하고 있다. 까치봉 입구에 다다른 시간이 10시 20분 조금 빠른 걸음이다. 아니 잰 걸음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왼쪽을 가면 신선봉으로 오르는 길이고, 곧장 가면 금선 폭포가 나오는데, 출입금지 구역이다. 자연 휴식년제를 하고 있다. 둥그렇게 깎은 나무토막을 계단으로 쌓아 놓았다. 등산로 훼손을 막기 방책이나 등산객은 여간 불편하다. 까치봉 정상에 가까울수록 안개가 짙어져 시야가 어둡다. 안개비 까지 내려 더워진 몸을 식힌다. 까치봉 정상에 오른 시간이 11시 20분 기념을 남기고 출발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곳은 모두가 짙은 안개로 시야 재로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연지봉, 망해봉, 불출봉, 서래봉으로 향하는 곳이고, 왼쪽은 신선봉, 장군봉, 유군치, 추령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집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케이블카는 시간이 없어 못타고 단풍구경만 하고 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향하는 중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다. 소둥근재로 향하는 곳으로 내려선다. 순창새재로 향하는 길목이다. 계속 직진하면 신선봉으로 향하는 내장산 일주코스이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시원해서 좋다. 소둥근재에 이르러 점심을 한다. 아침에 나누어준 찰떡을 먹는지라 시장키가 덜 하다. 도토리 산악회에서 고 주도식 산우님의 넋을 위한 동판을 새겨 놓은 곳에서 점심을 한다. 아침으로 준 찰밥을 김하고 먹는다. 추적거리고 내리는 비를 어찌 할거나 그리 많이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리가 옹색하다. 순창새재에 도착한시간이 12시 40분이다. 새재에 이르는 단풍은 늦은 화장을 하느라 부산하다. 장성새재와 백암산 상왕봉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20여 년 전에는 상왕봉으로 향하지 않고 장성 새재 쪽으로 해서 바로 사자봉 밑으로 난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패쇄 되어 없다. 천왕봉(2.4km)으로 향하는 길은 돌아가니 시간이 지체된다. 능선을 지나 갓 파른길목을 올라서니 상왕봉에는 한패의 산악회 팀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도착시간이 1시 30분이다. 기념을 남긴다. 그러나 집에 와 사진을 점검해 보니 동영상을 찍었는데, 아주 엉망이라 지워 버렸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자봉을 거쳐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과 옹달샘 갈림길을 지나 능선을 타고 주차장에 이르는 길이 있다. 그러나 이왕 온 김에 백학봉을 둘러보고 가야 백암산의 진수를 느낀다.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곧 바로 백학봉(2.3km)으로 향한다. 백학봉에 이르는 능선에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서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아주 매력적이다. 묘지에 이르니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예전에 있던 길이다. 백학봉에 도착한 시간이 2시 20분이다. 주차장까지 가려면 한 시간이 더 필요한 시간이다. 약속시간보다 약 30분정도 늦어질 것 같다. 백학봉에서 바라보는 추령 쪽은 안개로 인하여 조금 앞쪽만 보일 뿐이다. 계단을 내려서는 주총무한테 전화다. 어디쯤 오고 있냐고 한다. 약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것 같다고 하니 자기들은 백양사 주차장에 이제 도착했다고 한다. 추령에서부터 차가 밀려 늦어진 것이다. 그래서 백양사를 들리까 말까 한다고 한다. 계속되는 계단을 내려오는데, 장단지가 당기고 아프다. 백학봉 사이로 난 계단을 내려서는데, 뒤로 돌아 내려온다. 약사암을 오르는 계단에서 이내 말썽이다.
왼쪽 다리에 쥐가 난다. 계단에 걸쳐 앉아 마사지를 계속하여 풀어준다. 시간이 없다. 계속 전화다. 세공이와 총무가 번갈아 전화다. 백양사 대웅전에 도착한 시간이 3시이다. 대웅전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돌아서는데, 송영섭이와 고병준이 나란히 걸어 들어온다. 대웅전 앞마당에서는 산중음악회를 열었나 보다. 의자가 놓여 있고 앰프시설이며 단상을 철거하느라 한참소동이다. 옛적의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다. 경건함은 사라지고 조금 이름 있는 절은 탐방객들로 시장 통이 되었다. 회원을 만나니 조금한 마음이 한결 느슨하여 발길이 가볍다. 쥐가 난 발은 평지를 걸으니 괜찮다. 쌍계루의 누각에는 관광객들이 올라 연못에 떨어진 나뭇잎을 벗 삼아 이야기 한다. 징검다리의 청조함이 아름다운 보위를 사람들이 서성인다. 갈수기로 연못의 물빛깔이 어둡다. 느슨해진 발걸음은 더욱 다리를 아프게 한다. 징검다리 아래쪽에 놓인 다리에서 바라보는 은행나무의 노란외투가 이지적이다. 영섭이와 병준이를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 어디로 왔느냐고 말한다. 도로로 왔다고 하니 자기들은 절에서 곧 바로 내려왔다고 매표소 입구에 이르니 집사람과 세공이 봉래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다. 시간은 3시 30분이다.
주차장의 버스에 오르니 곧 출발이다. 버스에 남아 있는 회원들은 모두가 버스에서 기다린 모양이다. 회장인 양용선 이가 나에게 말한다. 소가 대를 위하여 희생하여야 하냐, 대가 소를 위하야 희생하여야 하냐고. 일갈이다. 미안하다고 백번 사죄를 한다. 주 총무는 말이 없다. 그럴 줄 알았으면 김치도 가져가고 했어야지 맨밥만 가지고 등산을 하냐고 오히려 위로다. 단체로 간 야유회에 나만 홀로 등산을 하였으니 회장으로써 기분이 나빠겠지만 술을 하기 싫은 나로 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랬만에 백암산과 내장산을 어우르는 산행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종석이 생일이라고 하여 장성에서 생일 케익을 준비한다. 참 격의 없는 친구들이다. 다리가 아프다는 양회장은 모든 회원들을 독려 한다. 나와서 춤을 추라고 나도 몇 번을 나가 몸을 흔들어 대고 앉는다. 이번 야유회에 처음 나온 이은철 아주머니는 피곤한가 보다. 연신 자리에 앉아 졸고 있다. 은철이는 젊었을 적에 위암으로 수술하여 술을 한잔도 하지 않는다. 연신 취하여 있는 회원은 이종석과 양용선 회장 그리고 취해도 술을 마신 것 같지 않는 이봉래 회원이다. 산행의 피곤함을 차에 오르기 전에 사온 막걸리로 푼다. 언제나 산행 후 하산주를 막걸리로 하기 때문이다. 몇 잔의 소주도 강제로 곁들이니 몸이 달아오른다. 이번 산행에서 처음으로 백학봉에 이르는 길을 계단으로 설치하여 놓은 것을 알았다. 백학봉에 접근성을 높이려 계단을 설치하였으나 산행의 최대 난적인 계단을 설치 한 것은 어찌 보면 등산을 무시한 공단의 처사이다. 등산로 곳곳에 훼손방지를 빌미로 계단을 설치하는데, 이곳에서 쥐가 잘 난다. 계속 사용하는 근육만 이용하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조금 무리한 산행을 감행 하였지만 단풍기에 내장산과 백암산을 종주 한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개인행동으로 회원들에게 미안했지만. 끝.
|
첫댓글 아름다운 단풍길감하고 갑니다 와룡당님 감사합니다
카페 지기님 같이 친구도 만나 막걸리도 같이 하여 즐거운 놀이가 되었어야 하는데, 시간맞추기에 바쁜 산행이었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
야유회 따라 갖다가 술을 피해 혼자 내장산과 백암산을 종주하셨네요. 빡빡한 시간에 체력도 좋아요~~
외롭고 조금 고생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새가 되었습니다. 찾아주어 감사 합니다.
단풍으로 수 놓은 우리의 산야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거기에 어우러진 와룡당님 멋있습니다.
단풍놀이를 왔으면 즐겨야 하는데, 산행에만 열중하다보니 마음만 급하진 종주 였습니다.
좋은 글과 자연 그리고 사진을 보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친구들을 위한 열정과 성의에 경의를 표합니다. 건강 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친구사랑이 넘치는 회장님 항상 행복한 마음을 전하는 일상에 감사 합니다.
어르신 대접을 받으셨다고요?
활기가 넘치는 청장년에게 너무 과한 대접이군요.즐감하고 갑니다.
벌써 부터 어른대접이라 내가 너무나 당당하게 들어가니까 안내원이 착각한것 같습니다. 아직은 젊음 있는데, 나의 신변 잡기를 애독하여 주시어 감사 합니다.
앞으로 개인 행동 하지마세여^^^^
파업 하는데 개인행동 하면 안되고 말고요. 언제 시간내어 함께 갈 수 있도록 주선 해 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