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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 인간내면의 초월적 불변적 본체를 성(性)이라 하고 현상을 정(情)이라 함 |
주돈이 | 인간의 성(性)이 만물의 불변성인 태극과 일치한다고 주장 |
장재 | 만물은 기(氣)가 뭉쳐 나타나고 흩어지면 태허(太虛)인데 태허가 성(性)과 같다 |
정이 | 성(性)·태극·태허를 이(理)로 수렴, 정(情)·만물을 기(氣)로 수렴 |
주희 | 이(理)가 기(氣)를 앞서므로 기(氣)를 버리고 이(理)를 회복해야 |
불성론과 유사했던 이고의 이기론이 주희에 이르면 불교와 전혀 달라진다. 불성(佛性)이 선과 악을 벗어난(不思善 不思惡의) 존재인데 비해 주희의 성리(性理)는 현상과 변화를 벗어난 절대선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理)=선(善), 기(氣)=악(惡)의 주희성리학은 곧 이귀기천(理貴氣賤)론으로, 퇴계의 “이(理)는 존귀하여 기(氣)와 섞이지 않고”(이 때문에 이기이원론이라 한다.), “이(理)는 지극히 존귀하여 절대적인 것으로, 만사·만물·을 명령하는 자리요, 아무것에게도 명령받지 않는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말은 곧 왕후장상과 사대부는 일반 하층민과 근원이 다르고 존귀하며, 절대적으로 명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배계급의 입맛에 아주 딱 맞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리론은 주관적 개념인 이(理)를 실재적 사물을 의미하는 기(氣)와 비교하는 중대한 논리적오류를 저질렀음에도, 유가(儒家)철학이 도가에 이어 불가(佛家)와의 경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시대 모든 교육기관은 유가경전을 가르쳤으며, 사림은 향약과 유향소를 통해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모든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사림(지배계급)이 이렇게 성리철학을 열심히 가르친 것 또한 집단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교화를 통해 진리의 표준을 높이 드러내고 사회를 바로잡겠다.”(<퇴계록>해설)는 말이 그것이다.
16세기 이율곡이 황해도 감사로 부임한 후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 ‘해주향약’을 실시하였다. 향약은 성리학적 지배이념이 일반인의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도록 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초자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부모나 형에게 욕한 자, 친상을 당하고 한 달이 못 되어 술을 마신 자, 상복을 입고 술에 취한 자, 하인을 시켜 제사 지내게 한 자, 부모 앞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자, 말을 타고 가면서 부모를 보고도 내리지 않은 자, 바깥에서 상전을 욕한 자, 상전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자...는 악적에 올린다. 악적에 오르면 잔치를 베풀어 사람을 청해 사죄해야 하고, 그의 종을 매로 때리며, 뉘우치지 않으면 마을에서 내 쫓는다.
8) 어른에게 공손하고 아내에겐 가혹한 남자
2형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다음과 같은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이면 밖에서는 칭찬 받지만 부인에게 원성을 사는 이런 유형의 사람을 하나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홧병에 걸린 한 부인의 남편은 훤칠하니 잘 생긴데다 힘도 세고 동네일을 도맡아 해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부인에게만은 친절하지 않았다. 부인이 알뜰살뜰 아껴서 조금 돈을 모아놓으면 남편이 마음대로 써버리고, 상의도 없이 벌려 논 일을 부인이 뒤치다꺼리해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끔찍이 여겨 사소한 일도 잘 들어주면서, 부인한테는 쌀쌀맞기 이를 데 없다. 방이 추워 부인이 보일러를 켜놓으면 야속하게도 볼 때마다 꺼버린다. 한 번은 밥 먹는 중에 말 대꾸 했다고 젓가락으로 코를 쑤셔서 엄청나게 많은 피를 흘렸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의식은 유교와 관련이 깊다. 유교는 삼강오상(三綱五常)을 기본 도덕률로 삼는데, 이에 의하면 장유유서(長幼有序)·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 어른은 아이에 대해, 남편은 아내에 대해, 존귀한 입장이 된다. 즉 남편은 부인을 명령하지만 명령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 부인의 말을 듣는 걸 수치로 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 목소리는 담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게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고, “여자는 사흘돌이로 때리지 않으면 여우가 되어 산으로 간다.” “북어야 여자는 패야 부드럽다.”하여 오로지 복종시켜야 할 존재로 여겼다. 반대로 동네 어른과 부모한테는 천(賤)한 입장이 되어 깍듯이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건 물론, 자신의 일을 못해도 어른들의 일은 해야 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못한 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유교관념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런 남자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전통이 만들어낸 전형적 2형인간인 것이다. 성리학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옛날 일이 아니라 한국인의 뇌리 속에 현재도 굳건히 존재하는, 초자아의 일부인 것이다.
8) 이원론의 득세
성리학 이기론은 크게 이기이원론·이기일원론·기일원론으로 나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퇴계-이기이원론, 율곡-이기일원론, 화담-기일원론이다.
이기론에서 이와 기의 관계는 “이와 기가 서로 섞이지 않으며,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서로 섞이지 않는 점을 중시하면 이기이원론이 되고, 서로 분리되지 않는 다는 점을 중시하면 이기일원론이 된다. 이상적(理想的) 선(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원론을 지지하고, 현실적 실천문제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일원론적 입장에 섰다.
주희 : “이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 즉 이는 기에 의존해야만 구체적 모습이 드러날 수 있으며, 기는 이에 근거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여 기를 낳고, 기 바깥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고 한다.
이황 : “이는 음양오행 만물 만사의 근본이면서 거기에 구속되지 않고, 이는 기의 주재자로서 기를 명령할 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기를 섞어 하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이 :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
서경덕 : “이는 기의 주재자이지만 기 밖에 이가 없다.”
주희와 이황 같은 사람들이 성리학 연구에 매진한 것은 그것이 우리 생활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원론을 믿느냐, 일원론을 믿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예송(禮訟)은 이원론과 일원론의 싸움이기도 하다.
1659년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자의대비의 복제를 두고 서인의 1년 주장과 남인의 3년 주장이 맞붙어 이른바 1차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남인 윤휴가 효종이 둘째 아들이긴 하지만 왕위를 계승하여 장자로 세워졌고, 또 왕이 되면 그 어머니도 신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3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한 반면에 서인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고, 아들은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1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맞섰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은 모두 <의례(儀禮)>라는 당시 규율을 근거로 한 것인데, 왕자(王者)의 예와 사서(士庶 ; 선비와 서민)의 예를 달리 보느냐 아니냐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 사서(士庶)는 <주자가례>를 따르고 있었고, 왕가(王家)는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송시열 등은 주자학의 핵심에 해당하는 종법(宗法)을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는 주자정통주의였고, 윤휴 등은 국왕만은 예외라 가변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자비판론자에 해당한다. 이는 곧 국왕의 전제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인과 그것을 인정하려는 남인과의 권력구조에 대한 견해 차이 - 관점의 차이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무려 7년간이나 정국을 시끄럽게 한 끝에 1666년 현종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기로 하여 서인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이 예송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왕가와 사서(士庶)의 예법이 다르다’고 주장한 남인이 퇴계학파이고, 이에 반대한 서인은 율곡학파라는 것이며, 마침내 남인이 승리했다는 점이다. 예송시기 남인을 왕권파(王權派), 서인을 신권파(臣權派)라고도 하는데, 왕권파란 왕과 신하가 상하 수직관계로서 분명히 다르다는 입장이고, 신권파는 왕과 신하의 관계를 어느 정도 수평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1차예송에서 서인이 승리한 것은 남인 윤선도가 차자인 효종의 적통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남인의 말을 들어주면 자신의 적통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2차예송에서 반대로 남인이 승리한 것은 어느 정도 적통문제에서 벗어난 숙종이 왕권을 약화시킬 수 있는 신권파 주장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즉 논란의 결말은 결정권을 쥔 지배자 현종-숙종의 이익이다.
이후 당파싸움은 인현왕후폐위-장희빈사건-폐비복위운동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서인-남인-소론-노론이 번갈아 집권하게 되지만, 이념문제에 있어서는 퇴계의 이원론이 한국유교의 정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이원론이 논리적으로 우세했거나 과학적 근거를 가진 때문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 정통이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도덕률이 당시 상황에 필요한 사회적 약속이라는 것이다.
조선에서 퇴계 이원론이 정통이 된 것과 동로마제국에서 삼위일체론이 정통이 된 것은 똑 같은 이유가 있다.
325년 니케아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삼위일체를 교리로 확정하였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유일성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는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했고 불변하지도 않았으므로 시작과 끝이 있는 피조물이다.”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예수가 곧 하나님이며 성령이고 하나님에게서 나신 존재다.”보다 더 논리적이다. 그런데도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이 교리로 채택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성자만이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비난하였는데, 이 말이 곧 삼위일체가 정통교리가 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신성(神性)예수’가 ‘인격예수’ 보다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켜 준다. 교황의 호칭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표현이 있다. 인간보다 신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 신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삼위일체가 정통이 된 이유다. 콘스탄티누스는 본래 신심이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기독교신앙이 로마제국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걸 간파했을 뿐이다.
9) 이원론에서 생겨난 상하관념
퇴계의 이귀기천론은 군신(君臣), 부부(夫婦), 부자(父子) 등 강상윤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퇴계전서·권13>) 군(君)·부(夫)·부(父)는 이(理)에 비교되고, 신(臣)·부(婦)·자(子)는 기(氣)에 비교된다. 따라서 군(君)은 존귀하여 신(臣)과 섞일 수 없고, 신(臣)을 명령하되 명령받지 않는 존재가 된다.
사실 이 이(理)라는 것은 사실 궤변에 불과하다. 관념적·주관적 개념인 이(理)를 실질적 사물인 군(君)·부(父)에 비교한 게 턱없는 속임수인 것이다. 이는 명가의 궤변인 “닭의 발은 세 개다. 실지로 존재하는 발 두 개에, 개념으로서 ‘발’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와 닮지 않았는가. 퇴계는 관념적 ‘발’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다른 실제적 두 발과 함께 논한 것이다.
어쨌든 이귀기천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이(理) | 군(君) 부(父) 노(老) 남(男) 적(嫡) 사(師) 처(妻) 관(官) 문(文) 반(班) 선배(先輩) |
기(氣) | 신(臣) 자(子) 유(幼) 녀(女) 서(庶) 제(弟) 첩(妾) 민(民) 무(武) 상(常) 후배(後輩) |
남=이(理), 여=기(氣)에 대입되어 남귀여천(男貴女賤 = 남존여비)이니, 남자는 여자를 명(命)할 수 있지만 여자로부터 명(命)받지 않으며 여자와 엄격히 구별된다. 동일한 논리로 부자(父子), 장유(長幼), 적서(嫡庶), 관민(官民) 등을 설명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하늘같은 서방님”, “하늘같은 선배”, “부모·스승·선배는 동격”이란 말을 들었을 것이다. <두사부일체>라는 영화제목은 이기귀천이라는 퇴계 성리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셈이다. 남자가 하늘이라는 건 곧 남=이(理) 여=기(氣)이고, 남귀여천(男貴女賤 = 남존여비)이니, “어른에게 잘하지만 아내에게 가혹한” 남자의 행동은 바로 이 이기귀천의 사고방식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부자(父子), 장유(長幼), 적서(嫡庶), 관민(官民) 등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이기(理氣)=귀천(貴賤)=천지(天地)=상하(上下)=남녀(男女)=장유(長幼)이라는 과거 신분제사회의 지배계급이 선전한 이념이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초자아를 형성하고 있다. 유교가풍이 없는 집안이라 해도 학교나 군대에서 ‘선후배’, ‘선후임’ 같은 서열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만일 초면에 나이어린 상대가 말이 짧고,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기분이 나빠진다면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이기이원론의 영향 하에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성리철학은 피지배계급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이귀기천론에 의하면 신(臣)·상(常)·여(女)·유(幼) 등 하에 속한 사람은 기(氣)처럼 천(賤)한 존재이니, 군(君)·반(班)·남(男)·장(長)에게 지도받아야 할 존재이고 조종되어야할 존재이지 감히 제 목소리를 낼 존재가 아니다. 왜 그러냐고? 옛날 주자께서 그렇게 말했다니까! 이게 ‘옳고 그름을 밝혀 세상을 바로잡겠다’던 퇴계의 방식이다. 이런 의식을 가지면 상자는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지만, 하자는 아무리 부당하고 억울해도 항의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만나면 먼저 나이를 물어서 상하를 규정한다. 상하가 확인되고 호칭과 말투가 정해지면 친밀감을 느끼는 ‘이너서클’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이를 거부하면 영원히 “위아래를 모르는 남”으로 취급된다. 우리사회에서 ‘남’과 ‘우리’를 구분하는 방법은 상하관계를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로 구분된다.
한국사람의 생활 전반에 ‘나이’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족 간에야 두 말할 것도 없고 직장·학교·군대부터 일반 사회단체·친목모임까지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모임은 한 곳도 없다.
10) 2형 윤리와 집단이기주의
이상에서 과거 지배계급이 부여한 도덕률 등으로 구성된 초자아가 시대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라서 오늘날 선악판단의 기준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한다면, 이 시대에 초자아 대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초자아는 선악을 구분해서 옳지 않은 일을 할 때 죄의식을, 옳은 일을 할 때 자부심을 느끼게 하며,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게 한다.
칸트는 양심을 믿었지만 양심대로 생각한다 해도 선악구분이 그리 쉬운 건 아니다. ‘살인은 죄악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인기술을 훈련받는 군대에 가야하는 것이다. 평시 군대에서 ‘실제로 살인은 안 하니까’ 그럭저럭 넘길 수 있지만 전쟁이 나서 실제 살인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 ‘여호와의 증인’처럼 입대를 거부하고 영창으로 가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나라가 망해도 좋은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양심이 국가시대 지배계급의 선전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초자아의 많은 부분이 국가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국가의 기준에서 내국인을 살해하는 건 범죄이지만, 적군을 살해하는 건 훈장을 주는 좋은 일이다.
<에너미 앳더 게이트>란 영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바실리 자이체프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무려 242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살해하였다. 독일의 오토 크레치머 중령은 연합국 함선 44척을 격침시키면서 적지 않은 인명도 살해하였다. 이 둘은 2차대전의 영웅으로 일컬어지지만 어디까지나 자이체프는 소련의 관점에서 영웅이고, 크레치머는 독일의 관점에서 영웅이다. 관점을 바꾸면 자이체프는 독일의 원수(怨讐)고, 크레치머는 영국의 전범(戰犯)이다. 동일한 사람이 한 쪽에서 영웅이고 한 쪽에선 범죄자인 것이다. 이런 것이 국가기준의 선악판단이다.
그런데 국가 외에도 여러 기준이 함께 초자아에 들어있어서 혼란스럽다. 인류전체의 기준에 의하면 아무튼 살인은 범죄다. 적군을 죽이는 게 선인가 악인가는 결국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보통 선악판단의 기준이 되는 관점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개인<가족<부족·지역·직능단체<국가·민족<동맹국<인류<동물<생물<지구전체
부모에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좋은 일(善)이라고 한다. 그런데 국가의 중책을 맡은 사람에게 부모의 일과 국가의 일이 동시에 발생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일까? 실지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가족과 국가이익의 충돌로 생기는 혼란이다.
1907년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추대된 이인영은 경성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부친의 죽음을 맞았다. 그가 부모상을 위해 떠나버리자, 창의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이인영은 대오를 떠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라에 불충함이 부모에 불효함이 되며, 부모에게 불효함이 나라에 불충함이 된다. 그 도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고로 나는 차라리 나라 풍속에 따라 3년 상을 입어 효도를 다 한 후에 재기하겠노라.”
이문옥이나 스노든 등의 내부고발자는 옳은 사람일까 아닐까? 이 역시 관점의 문제다. 감사원 동료와 공무원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이문옥은 나쁜 사람이지만, 국가(그 밖의 국민들) 관점에선 옳은 사람이다. 스노든은 미국의 관점에서 배반자이지만,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비리를 고발한 용기 있는 사람이다.
이문옥은 1990년 5월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취득에 관한 감사원의 과세실태 감사가 해당 기업의 로비에 의해 중단된 사태를 언론에 공개함으로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30여년간 몸담아온 공직에서 파면되고 공무상비밀누설죄로 구속되는 등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1996년 6년 6개월간의 투쟁을 통해 무죄판결과 복직이라는 승리를 거둠으로서 양심선언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이문옥씨의 파면과 복직은 다층구조사회에서 생기는 윤리적 혼란의 한 예다. 공무상비밀누설죄는 공무원이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할 때, 침해될 위험이 있는 국가기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대기업 부동산 과세실태에 관한 공무원의 부정을 공개한다고 국가기능이 침해된다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 죄목은 명목상이고 실제는 감사원 공무원집단의 이해가 문제인 것이다.
부모를 택한 이인영, 국가를 택한 이문옥, 군대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렇게 관점이 충돌할 때 보통은 상위집단의 관점을 옳은 일로 본다. 개인보다 가족을 위하는 것이, 가족보다 국가를 위하는 것이 옳다고 국가의 지도자들이 장려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여 동물을 죽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독교보다 모든 생명을 죽여선 안 된다고 하는 불교가 한 수 위다.
1993년 한약분쟁 당시 약국이 문을 닫자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약국휴업사태가 집단이기주의의 표본이라고 지적하고 ‘가능한 방법과 조치를 총동원해서 강력히 대처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위집단이 상위집단의 이익을 침해할 때 동원되는 수사가 ‘집단이기주의’다.
더 상위관점에서 보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집단이기주의이다. 집단이기주의는 상위집단에 해롭기 때문에 비난받는다. 2차세계대전을 격발시킨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모두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일종으로서, 전세계에 엄청난 손해를 입힘으로서 그 집단이기주의적 문제점을 인류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2차대전 이후 적어도 유럽에서는 민족주의가 위험한 용어로 인식된다. 국가보다 더 상위집단인 인류전체의 관점을 갖는 것이 옳은 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국가보다 인류전체, 인류보다 생물전체처럼 더 상위관점을 갖는 것이 옳은 걸까? 이 말이 옳다면 생물보다 더 상위관점인 지구(가이아주의), 나아가 태양계<은하<우주의 관점을 가져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3형인간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지만, 결국은 개체·종족보존이 선악의 근본이기 때문에, 우리 개인들과 인류가 모두 번영할 수 있는가로 선악이 결정될 것이다. 즉 개인과 집단이 함께 이익을 얻는 일, 하위집단과 상위집단이 함께 번영하는 일, 인류와 지구가 함께 살아남는 일이 옳은 일이 된다.
문제는 어느 한 기준에 고정되어 있는 ‘집단이기주의’적 관점이다.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집단이기주의이고, 유대교는 유대민족의 집단이기주의이고 기독교는 신자(信者)들의 집단이기주의며, 성리학은 양반계급의 집단이기주의다. 이러한 집단이기주의는 상위집단을 해치고 하위집단을 희생시키므로 옳은 일이 아니다. 2형인간의 양심은 선악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위험하다는 뜻이다.
11) 관점과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선악.
관점이 다르면 선악이 다른 것처럼 시점이 달라도 선악이 달라진다. 일련의 과정 중에서 어느 시점(時點)의 이익을 중시하는 가가 다른 것이다. 모르핀은 당장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 지극히 유익하지만, 장기적으로 사용하면 탐닉과 의존을 일으킨다. 이를 향정신성약품으로 규정하여 일반인의 사용을 금지하는 건 장기적 유해성(장기적 시점)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이익을 옳은 일로 본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건 미래시점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자는 말이다. “우선 먹기에 곶감이 달다”는 뒷일을 생각지 않고 당장 좋은 일만 한다는 뜻이니, 당장의 이익을 취하는 일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언 발에 오줌 누기”는 당장은 따듯해도 나중에 더 얼어붙으니 어리석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새옹지마>의 고사는 단기적 시점에서 일희일비하는 마을 사람과 장기적 시점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새옹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 물론 새옹을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칭송하는 내용이다.
새옹지마 : 변방의 늙은이(塞翁)가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 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했지만 새옹은 “이 일이 무슨 복이 될는지 알 수 없소.”라며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몇 달 뒤 도망갔던 말이 암말을 데리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새옹은 “이 일이 무슨 화가 될지 알 수 없소.” 아들이 말을 타다 다리를 다치자 마을 사람들이 위로했다. “이 일이 무슨 복이 될는지 알 수 없소.” 전쟁이 일어났지만 다리를 다친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행운에는 불행이 따라오고, 불행에는 행운이 따라온다.” ‘길게 보면’ 행불행이란 물결치듯 오르내리는 것이어서 물의 양은 언제나 같은 것과 같다. 새옹과 마을 사람이 다른 것은 시점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항상 미래시점을 갖는 게 옳다고 말할 순 없다. 모르핀은 여전히 중요한 약물이다.
12) 2형인간의 편 가르기
이처럼 관점과 시점이 달라지면 선악도 달라진다. 그런데 “공자왈.... 맹자왈....옛 성현말씀을 금과옥조로 삼고, ‘성경말씀’을 그냥 무조건 진리로 받아들이는 2형인간은 고정된 관점과 시점만 고집하는 것이다.
고정된 관점을 갖게 되면 흑백논리에 지배당한다. ‘국가’ 관점에 고정되면 자국과 동맹국이 선의 편, 상대인 적국을 악의 편으로 간주하여 분리 배척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 2차대전때 나치즘의 독일 사람들이 이 경우다. 고정관념이 있어 편 가르기 하느냐 아니냐로 곧 2형인간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좌우를 구분하고, 민주와 반민주를 가르는 사람들이 모두 2형인간이다.
종교·이념·법률·풍습 등 초자아를 형성하는 사회관념 대부분이 편 가르기의 원인이 된다. 기독교는 기독교인과 이교도를 편 가르고,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를 편 가르고, 성리철학은 이와 기를 편 가르며 이러한 편 가르기를 선악으로 정당화한다. 기독교인·프롤레타리아·이(理)는 선(善)이고, 이교도·부르조아·기(氣)는 악이라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단지 관점과 시점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편 가르기는 2형인간이 자신의 편 사람과 반대 편 사람을 극명하게 구분하도록 만든다. 자신의 편이 곧 선과 정의의 편이고 상대편은 악과 불의의 무리라고 믿는다. 자신의 편을 위하고 상대편을 공격하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이런 경향에 주목한 사람이 라인홀드 니버다.
“모든 인간의 집단은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극복능력, 그리고 다른 집단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보다 훨씬 심한 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난다.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은 개별적으로 나타날 때 보다 하나의 공통된 충동으로 결합되어 나타날 때 더욱 누적되어 집단이기주의로 표출된다.” “종교나 합리주의 등 모든 도덕가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집단적 이기주의에 대한 이해이다.”(<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인홀드 니버)
“상식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은 괴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01예비경찰대대도 그들 나름대로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 가족을 죽일 때 아이에게 엄마가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아이를 먼저 죽였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도덕규칙이 적용될 수 있는 선, 다시 말해 우리와 같은 집단구성원에게 기대할 수 있거나 바람직하다고여기는 행동방식의 기준을 보여주는 듯하다. 역설적이고 놀랍게도 이규칙들은 그 집단 내에서는 대개 더욱 강화되지만 적대관계에 있는 집단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도덕의 경계에 관심이 많았던 프로이트는 ‘사랑으로 서로 결합하거나 더 많은 사람을 표용하려면 공격할 만한 외부인이 있어야만 한다.’라고 했다.”(<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로랑 베그)
도덕적 인간이 만드는 비도덕적이고 나쁜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은 2차 대전에서 독일인이 자행한 대량학살을 목도하고 생긴 성찰이다. 당시 독일인은 어느 대륙보다 앞서 ‘문명화’된 유럽의 일원으로서, 어느 유럽사람 못지않은 합리성과 교양을 지녔었지만 세상 어느 미개한 야만인보다 오히려 더 흉포하고 잔혹한 만행을 무수히 저질렀다. 왜 그랬을까? 니버나 베그의 성찰에 의하면 도덕성의 본질이 집단이기주의이기 때문이다.
집단이기주의는 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집단을 공격하게 한다. 이렇게 집단과 집단의 투쟁은 집단과 개인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1형인간 끼리의 투쟁과 똑 같다. 1형인간을 멸시하는 2형인간들이 집단을 이루면 1형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2형인간의 도덕률이란 곧 ‘집단을 이루어 싸워라’는 말과 같아진다.
도덕률이 결국 내 편과 상대편에 대한 태도를 달라지게 한다는 점을 알고 나면 우리는 많은 사회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십자군이 여자와 아이들 까지 잔혹하게 살해해서 “신전에서 사람들의 무릎과 말굴레까지 피에 파묻혔다.” 1937년 남경에 진주한 일본군은 30만명의 중국인을 죽였다. 초급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는 누가 먼저 중국인 100명의 목을 자르는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 이를 두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난징을 향한 상쾌한 목 베기경쟁”이란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이것이 친절하고 예의바르기로 소문난 일본인이 저지른 일이다.
자기중심적이라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1형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윤리와 이념·종교 등으로 형성된 초자아에 의해 편 가르기 하는 것이 2형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다. ‘나만’ 생각하면 1형인간이고, ‘우리 편 네 편’하면 2형인간이란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 좌우대립과 진영논리가 판치는 것은 곧 2형인간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건 ‘우리 모두’라는 3형적 관점이다.
정동영의 80:20, 문재인의 99:1 논법은 그들이 2형인간이라는 증거다. 20%든 1%든 분리·배척하려는 사고를 지닌 2형인간은 결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다.
13) 자기희생과 공격의 양면성
고정된 관점의 집단 안팎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개인의 성격 내에서 금욕적·자기억제적인 동시에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이중성으로도 나타난다. 야누스처럼 두 얼굴이 있어, 집안을 향한 얼굴에는 성자의 미소가 있고, 집 밖을 향한 얼굴에는 지옥야차 같은 무서움이 있다.
남한의 좌파가 우파에 대해 엄격한 기준의 도덕적 비판을 서슴지 않으면서 북한의 독재정권과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도 2형관점에서 생겨나는 양면성 중의 하나다. 북한의 독재·세습·인권유린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좌파는 북한 정권이 자신의 편이고, 남한의 우파가 적인 셈이다.
2형인간 중에는 콜베신부·테레사수녀 같은, 끝없는 자기희생적인 성인(聖人)의 삶을 산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무사고적이고 습관적인 초자아에 의해 욕구를 억누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초자아가 욕구를 압도하긴 하지만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어서 양보하고 희생하면서 다른 일면으로 불의와 부정을 탓하고 원망하며 공격하는 마음을 가진다.
“인부지불온(人不知不溫)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는 ‘보통사람은 필경 남들이 알아주길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할 때다. 여러 실험에 의하면 어린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君子)는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인데, 이렇게 성장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상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희생하고 양보한다(초자아를 따른다).
욕구포기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욕구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꿩 대신 닭”처럼 뭔가 다른 걸로 대체해 주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천국에서 부활한다고 생각하고, 후생에서 환생한다고 생각해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전생에 빚진 것을 이생에 갚는 다고 생각해야 고난을 참아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살고 싶은 욕구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킬이 하이드를 끝내 없애지 못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욕구를 상징한다.
2형인간이 초자아를 따른다고 해도 자아가 중간에서 제 역할을 다 못하면 욕구가 억눌린 상태로 계속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양면성과 이중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화는 흔히 초자아와 욕구 사이의 갈등을 천사와 악마로 표현한다.
2형인간의 이런 이중성은 자주 문학의 소재로도 이용된다. <주홍 글씨>와 <가시나무 새>가 금욕을 맹세한 종교인의 사랑을 다룬 것도 욕구가 맹서나 신앙으로도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들이 공감을 얻는 건 현실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에는 용맹정진하던 스님이 음욕이 일 때 마다 손가락을 자르다가 결국 8개를 자르고 나서 욕구와 싸우기를 포기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석가부처가 6년간의 설산고행 끝에 얻은 깨달음은 ‘욕구를 없애는 게 아니라 놓아두는 것’이었다. 놓아둔다(放下)라는 방법으로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났는데 이는 욕구를 없앤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4) 실력 없이 말만 많은 2형지도자
조국에 충성하고 적국에 무자비한 전형적 2형인간은 국가시대 지배자가 만들어낸 ‘국가형’ 인간이다.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진 스파르타 군인들은 국가형성 초기에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극단적 2형인간이다. 한 때 스파르타가 그리스를 제패했던 것처럼 2형인간이 많은 사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완전히 2형인간만으로 국가를 형성하면 어떻게 될까? 아 역시 스파르타의 예를 들어서 말할 수 있다. 기원전 480년경 그리스 맹주로 부상한 스파르타는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상실한 병력을 회복하지 못하여 쇠퇴하고 말았다. 2형집단은 대내적인 결속은 강하지만 배타적인 탓에 보통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그리고 전투원을 상실하면 망하는 것이다.
2형인간의 장점도 많다. 이웃에게 정직하고 친절하며,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사회를 위해 희생적이다. 양심적이며 청렴하고 올곧은 기개가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덕적인 사람을 지도자로 뽑으면 좋을 것인가.
2013년 4월 갤럽이 조사한 <인사청문회도덕성검증>에 관한 설문조사는 도덕성이 중요하다는 대답이 53% 능력이 중요하다는 대답이 36%로 우리국민이 능력보다 도덕성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연령별로는 저연령일수록 20대 69:25, 30대 60:31, 40대 53:34, 50대 48:41의 비율로 도덕성이 능력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만 60대이상만이 37:46이어서 능력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과연 도덕적이고 청렴한 사람이 좋은 지도자였는지 역사적인 예를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2형지도자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조광조이다.
조광조가 주장한 도학(道學)정치는 주자(朱子)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있는 명명덕(明明德)·지어지선(至於至善)·신민(新民)의 삼강령과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 등의 성리학적 이상을 실천궁행하는 것이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혜롭게” 되는 걸 말하는데, 사물의 이치란 곧 만물의 본질, 위에서 말한 성리(性理)다. 왕이 이 이치를 실천하는 게 왕도정치다.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지치(至治)주의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유생과 성종의 지지를 얻어 조광조의 뜻을 따르는 많은 소장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켰고, 이들과 함께 이상정치 실현을 위한 호기를 맞게 되었다.
왕도정치를 추진했던 조광조의 개혁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조광조는 훈구대신을 적으로 삼아 위훈삭제를 시행하다가 반감을 샀고, 중종 역시 지나친 급진개혁을 주장하는 조광조에 피로감을 느끼고 되었다. 이에 중종이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이면서 조광조와 동료 유생들은 기묘사화로 희생되고 말았다.
2형적 도덕적 이상주의는 훌륭하기 짝이 없다.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말하는 세상이 나쁘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을 내세워 만든 세상이 중세유럽의 암흑시대고,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세상이 구소련·중국공산당시대·북한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이상주의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로 결말이 났다. 2형지도자는 입으로 유토피아를 말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들의 나라만도 못했다.
조광조 개혁의 실패를 간단히 말하면 ‘비현실적’이고 과도한 ‘이상주의’이다. 격물치지를 내세우긴 했지만 성리철학은 본래 주관적이고 관념적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때부터 실패는 정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광조는 강력한 기득권세력인 훈구파를 공격하면서 개혁에 필요한 권력인 중종을 제대로 감싸 안지 않았다. 개혁을 추진할 실력(능력)도 없으면서 입만 놀리는 것이 실패한 개혁가들의 문제점이다.
2형인간은 이렇게 이념에 치우쳐 현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결국 일을 망치고 만다. 조광조의 실패를 아우구스투스의 개혁과 비교하면 3형지도자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쳤을 때 그와 아그리파의 휘하에 50만의 병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개혁대상인 원로원을 무시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 편에 섰던 원로원 의원들을 용서하고 공직복귀를 허용한 것은 물론, 카이사르가 시행해서 인기를 얻었던 원로원 토의 공개를 폐지하여 원로원의원들의 환심을 샀다(그들은 원로원을 존중한다고 생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직과 임페라토르(군통수권), 프린켑스(제일인자=원수)라는 실속은 내놓지 않으면서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여 원로원을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보통 “사람들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을 존중하고(그렇게 여겼고) 삼두정치권 등의 특권을 포기한 옥타비아누스가 진정한 공화정주의자라고 여겼다. 그들은 기꺼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란 명칭을 부여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원로원이 싫어할만한 개혁법안을 추진할 때면 의원들이 좋아할만한 법안을 동시에 제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를 3형인간이라고 하는 건 이렇게 그가 편을 가르고 배척하지 않았으면서 개혁을 성공시켰고, 그 결과 로마가 황금기를 맞이하여 결국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개혁은 항상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기득권을 포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실패한 개혁가들은 저항세력을 인정하는 대신 강압적으로 대응했고, 이상에 치우쳐 현실감각이 부족했으며, 장기적 안목 없이 단기결과에 집착한 공통점이 있다. 이 모두 2형인간의 특징이다.
왕망·왕안석·장거정·캉유웨이 등 중국의 실패한 개혁가들을 시진핑 개혁과 비교한 쉬샤오니엔 중국 유럽국제비즈니스쿨 교수는 “개혁은 인센티브 시스템을 개선해서 사회의 총생산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개혁향유층을 만들고 피해보는 계층을 없앨 수 있을 때 성공한다.” 즉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3형정신이 개혁을 성공시킨다는 것이다.
15) 유교윤리는 되살려야할 아름다운 정신문화인가?
충주에 사는 원로작가 한 분이 최근 ‘선비정신계승회’란 것을 만들면서 “지금 우리사회는 선비정신을 근간으로 한 아름다운 정신문화를 잃고 무분별한 서양문화와 배금주의로 정신의 부패가 가속화 돼 진실과 신의가 상실된 사회에 사록 있다”고 하며 “선비정신은 진실한 삶과 고상한 인격의 기반이 될 뿐 아니라 거짓과 부정에 저항하는 비판과 투쟁의 정신”이라 하였다. 이분의 말은 고귀한 이(理) = 인의예지 = 선비정신, 천박한 기(氣) = 칠정(七情) = 서양문화라고 풀어 생각할 수 있다.
흉악범죄와 파렴치범·패륜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전통윤리를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전통 유교윤리는 농업경제를 바탕으로 한 신분제계급사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이익에 맞게 만들어낸 윤리이지, 오늘날 산업경제·민주공화정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시대가 변하면 윤리도 변하는 게 당연하다.
‘인의도덕이 땅에 떨어진 말세’ ‘심판의 날이 멀지 않은 타락한 세상’을 개탄하는 사람은 필경 이상적 도덕주의에 지배되는 2형인간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 모두 1형인간이고, 교육과 수양을 통해 2형→3형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라서, 세상엔 언제나 부도덕하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혹은 함무라비 법전, 혹은 로제타석이나 피라미드 낙서가 출전이라고 하는 옛이야기에는 ‘요즘 젊은이는 버릇이 없어 세상이 어찌 될 줄 모른다’는 나이 든 사람의 한탄이 들어 있다 한다.
따지고 보면 단군이래 요즘 사람들처럼 교양 있고(많이 배우고),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있었는가? 그런데도 2형인간은 늘 의인(義人)이 없다고 생각한다.
유교대신 기독교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기독교 역시 고대와 중세의 농업경제·봉건계급사회의 지배자들이 가공해낸 윤리라서 이 시대와 맞을 리가 없다. 성경은 유교가 이기(理氣)를 구분하는 것처럼 알곡과 가라지, 이마에 인(印)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구원과 멸망, 천사와 사탄 등을 구분하고 있다.
갈릴레오나 후스 등 이단을 처벌해 온 기독교 역사는 그것이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한 2형윤리라는 증거다.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좌우통합이 절실한 우리사회에 기독교가 도움이 될 수 없다. 비슷한 이유로 이슬람도 대안이 될 수 없다. 과거의 도덕률은 되살릴 수도 없고 되살려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윤리는 어때야 할까? 이 시대는 옛날보다 훨씬 빠르게 환경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정해진 도덕률을 따르다간 자칫 각주구검(刻舟求劍), 버스 지난 후 손 흔들기가 된다. 최대한 자아성장을 격려하여 가능한 한 많은 국민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모든 순간에 항상 최선의 답을 찾아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3형인간이다.
이미 오래 전에 지혜로운 인간이 윤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불교와 <노자>다. <무문관>에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殺佛殺祖)”하고, <노자>에 “성인(聖人)이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무심히 본다.”한 것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부처와 조사의 말(지침 혹은 규율)에 구애되어 달(깨달음 즉 최선의 삶) 을 보지 못하고 가르치는 손가락(윤리)만 보면 안 된다고 한 것이고, 백성을 무심히 본다는 건 국가 민족 등 집단적 관점에 서 있는 도덕(집단이기주의)에서 성인은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불교와 도가철학은 앞에서 말한 대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류사상이 되지 못했지만, 오늘날 민주·평등 사회에서는 다시 회복해야 할, 기독교와 유교를 대신할 수 있는 3형정신이다.
16) 미성숙한 2형인간
도덕률과 양심에 충실해서 원리원칙을 칼 같이 지키고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쬐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일까? 아니다. 덜 성숙한 인간이다.
욕구는 유전자에서 비롯된 선천적인 성격요소이고, 초자아는 어른들의 교육에 의해 형성되며, 자아는 풍부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끊임없는 수양에 의해 죽을 때까지 성장해나가는 성격요소이다. 즉 인간은 태어나서 얼마까지는 모두 1형이고,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2형이 되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3형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1형인간이란 교육을 받지 못했던가, 교육을 받았어도 초자아가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 즉 성격적으로 전혀 성장하지 못해 정신년령이 7-10세 이전의 사람이다. 2형인간은 잘 배우긴 했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진 사람, 배운 대로만 행동하고 가르쳐줘야만 받아들이는 격이니 성격적으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10세-18세 정도의 사람이다.
3형인간은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고정관념에 좌우되지 않아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니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연령이 많은 사람이다. 비유하면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교과서대로만 치료하는 신출내기 의사가 2형인간인 것이다. 풍부한 경험을 쌓아서 보다 더 정확히 진단하고 자유자재로 치법을 선택하는 사람이 즉 3형인간이다.
불교적 깨달음은 곧 3형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경지가 보화선사에 의하면 “밝음에서 오면 밝음으로 치고, 어둠에서 오면 어둠으로 치고, 사방팔방에서 오면 회오리바람 일으켜 치고, 허공에서 오면 도리깨로 치고”이다. 깨닫고 나면 어떤 문제든 다 해결할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무술을 배울 때 “형(型)으로 들어가서 형(型)에서 나와야 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사부가 가르치는 대로 잘 배워야 하지만 실전을 잘하려면 그 수법에 구애 받지 말고 원활하게 응용해야 비로소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게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대방은 정해진 수법에 맞추어 공격하는 게 아니다. 정해진 패턴이 있으면 곧 상대방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이 때문에 2형 인간과 3형 인간이 대결하면 언제나 2형 인간이 질 수밖에 없다. 항우의 의기(義氣)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의기 때문에 홍문에서 유방을 놓아주고, 진군 포로 20만을 산채로 파묻어 죽이고, 한신 같은 유능한 부하를 끌어안지 못하다가 결국 유방에게 지고 말았다. 유방이 약법삼장으로 관내 백성을 회유하고 수많은 재사를 수하로 부려서 항우를 이겼던 것은 주위사람들을 다 인정했던 3형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징기스칸과 자무카의 대결 역시 ‘다함께’와 ‘편 가르기’라는 3형과 2형의 대결이다.
일견 2형인 사람이 3형보다 더 멋있어 보인다. 옳고 그름이 대쪽 같이 분명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고상한 이상을 위해 죽음도 무릅쓰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유방보다 항우를 더 좋아하는 중국인이 많다.
17) 도덕과 2형인간의 가치
도덕이 집단이기주의이긴 하지만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면이 있다. 또 성현의 가르침은 길을 가리켜 주는 이정표와 같아서 대개의 경우 도덕적인 행동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스스로 판단하기 힘들 때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2형인간은 편 가르기 때문에 국가통합을 어렵게 하고, 국가 간 갈등의 주요 원인제공자가 되기도 하지만, 전쟁 같은 국가위기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지난 세기 일제에 항거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인물 중에 사림·민족주의 인사가 적지 않다.
유럽인들은 2차대전 이후 국가·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깨닫고 유럽통합운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 동아시아는 국가·민족주의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군국시대 향수를 갖고 있는 일본의 우파가 중국과 한국을 자극하면서 조어도와 독도, 신사참배, 교과서, 위안부 문제 등이 원만하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이라도 국가 간 항쟁이 현실화되면 우리는 2형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애국심에 불타서 전선으로 달려갈 사람들이 2형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군 입대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같은 2형인간은 제외다.
평상시에도 상명하복의 군인, 원리원칙에 충실해야 하는 판사·검사 등에는 2형인간이 필요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높은 도덕성과 청렴함은 2형인간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목숨을 내놓고 불의에 항거했던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덕이 크다.
18) 2형인간의 특징
초자아에서 기인하는 자기억제·희생·순종·습관적·고정관념·이념·종교적·원리적·독선·편협·부정적·이중성(二重性)·비현실적·이상적·도덕적·양심적·자기우월감 등이 2형인간의 특징이다.
① 자기억제·금욕·도덕적 : 도덕률은 이기적 행동을 억제하고 집단을 위해 욕구충동을 억제하는 자기억제·금욕적 행동들이다. 이른바 선비정신은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쬐고” “빠져 죽어도 개헤엄은 안치는” 것인데 살려는 욕구보다 집단의 규율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② 희생적 : 지배계급이 집단을 위한 자기희생을 미화하여 왔다. 공자에 의하면 예(禮)란 “남을 위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③ 순종적 : 유교 성리학은 군(君)·부(父)·부(夫) 등 상자(上者)에 대해 신(臣)·자(子)·부(婦) 등 하자(下者)가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가르쳐 왔다.
두 시골 양반이 내기를 했다. 먼저 한 사람이 아들을 불러 소를 사다리로 지붕에 올려 보내라 했다. 소가 사다리를 타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 아들이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다른 양반이 아들을 불러 똑 같은 시켰는데 그 아들은 사다리에 소 발을 올리면서 어떻게든 올리려고 하였다. 옛사람들에 의하면 이런 것이 효(孝)다. 뻔히 안 되는 일이라도 어른이 하라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받으며 자란 사람은 커서도 순종적이 된다. 우리나라 부녀자에게 많다는 화병은 유교적 가풍에서 자라 할 말 못하고 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화관련 정신증후다.
④ 습관적 : 어렸을 때 경험은 평생 영향을 미친다. “3살 버릇 여든 간다.” 어렸을 때의 경험이 커서도 계속 영향을 미치면 2형인간이다. 가난하게 자란 사람이 저축만 한다던가, 귀하게 자란 사람이라 낭비가 심하다든가 하는 것.
⑤ 고정관념 : 도덕률·양심·종교·이념·풍습 어느 것이든 현실에 적당하지 않은데도 고칠 줄 모르면 고정관념에 해당한다.
⑥ 이상적 비현실적 :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초자아(사회성)와 욕구(동물성)를 동시에 지닌 존재이며, 욕구는 초자아와 자아의 뿌리인데, 2형인간은 욕구가 거세된 인간을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다.
노무현 정부의 여성부관리들이 추진한 성매매 금지는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홀아비나 노총각 등 홀로 사는 성인들의 성욕을 고려하지 않는 비인간적 정책이기도 하다. 모어의 유토피아나 스위프트의 푸임무, 허균의 율도국, 도연명의 무릉도원은 모두 도덕적 이상향이며 비현실적이다. 천지창조·심판·구원·말세론(개벽론)도 비현실적이다.
⑦ 이념적 : 이데올로기는 사람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관념적 의식의 형태를 말한다. 이념은 사물을 관찰한 결과로 개념을 형성한 것이지만, 종종 목적성(욕구) 때문에 현실의 일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확대해석하여 관념적이 되기 쉽다.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관찰한 결과이지만, 부르조아와의 상대적 관계만 지나치게 부각해서 비현실적 관념적 사상에 이른 예다.
⑧ 종교적 : 종교가 집단의 결속과 유지에 이용된 이래 종교계율이 초자아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 이동식 <현대인과 노이로제>에 의하면 한국인 심리의 가장 깊은 곳에 샤먼적 의식이 있고, 그 위로 불교-유교-기독교적 윤리가 층층이 쌓여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가 선한 신(아후라 알라 엘로힘 여호와)과 악한 신(앙그라 데바 샤이탄 사탄)을 다루고 있어 이것들이 선악관념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⑨ 원리적 : 원리주의는 고정관념의 일종이다.
⑩ 독선·강직·타협불가능 : 어떤 도덕률을 절대선으로 받아들이면 다른 사상과 윤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⑪ 편협함·편견 : 편견prejudice은 예단(豫斷)이란 의미도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고정적 가치에 의해 상황을 미리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2형인간은 판단이 신속해서 냄비처럼 반응이 격렬해 진다.
⑫ 부정적 : 현실은 늘 이상(理想)에 못 미치게 마련이다. 이상적 인간은 이 때문에 항상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다. 거짓말은 비양심적이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산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義人)이 10명도 안되었다.”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졌다.” “죄악에 넘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품안으로 회개하고 들어와야 한다.”는 말들이 모두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말이다. 회개해야하고 심판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역시 부정적인 현실인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20만년에 걸친 인류역사 중에 지금보다 더 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가 없었고,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잘 먹고 잘 살던 시절이 없었다.
⑬ 이중성·양면성 : 2형인간은 도덕률을 숭상하고 실천하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행동이 자아기능을 통해 욕구를 설득한 후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 행동 이면에 억제된 욕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이중성과 양면성으로 나타난다.
적에게 잔혹하고 친구에게 헌신하는 것, 남에게 엄격하면서 자신에게 관대한 것, 어른에게 잘하지만 아내에게 가혹한 것, 제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 눈의 티는 보는 것,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를 탓하는 것도 2형인간에서 잘 나타난다.
⑭ 우월감·오만 : 도덕이란 본래 상층계급(지배계급)의 규율이라서, 양심적으로 산다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낮춰보는 경향이 생긴다. ‘양반이 욕은 할 수 없고’ ‘개똥불상놈’이란 말에는 이런 의식이 들어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수상한 자금공여에 대해서도 “보수들의 뇌물수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라든가 “보수의 부패는 눈감아 주고 진보의 조그만 흠집은 나발을 크게 불어대는 조중동”의 탓으로 돌리는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⑮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 성공의 덫 : 고정관념이 강한 2형의 한 특징이다.
⑯ 즉각적·선악호오분명 : 1형 성격이 욕구에 지배되기 때문에 충동적·즉각적이라면, 2형은 고정관념 때문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성격이 급하고 쉽게 분노했다가 금방 좋아하는 것도 한 특징이다.
⑰ 주관적 관념적 : 2형은 한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 주관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회나 다른 세대와 충돌할 수 있다. 나이든 사람과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 충돌은 문학의 좋은 소재다.
19) 2형 인간들
① 강한 2형인간
초자아가 욕구나 자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사람을 강한 2형인간으로 분류한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옳은 일이면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내며, 신념에 투철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 중에 존경받는 종교인이 많고, 성인(聖人)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다. 약한 2형인간에 비해 훨씬 더 금욕적이고 자기희생적이며, 보답이나 알아주길 바라지 않아서, 이중적이지 않다. 독실한 종교인은 대부분 2형인간이며 그 중에서도 더 철저한 사람이 강한 2형인간이다.
*예수 : 계율을 부정한 일, ‘선한 사마리아인이 네 이웃(유대민족적 관점을 극복)’이라 한 말, “원수를 사랑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현실인식)라고 한 것은 3형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함과 재림·심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 하나님에 의지하고, “이 중에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볼 것이니라.”(주관적 판단)하며, “내가 너희를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싸우게 하러 왔다.”(원리적)하고, 마침내 자신을 희생했던 점에서 2형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성리철학 역시 수많은 강한 2형인간을 배출했다. 선비하면 죽어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꼿꼿한 기개가 먼저 생각날 정도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공자가 <춘추>를 쓰게 된 정신인 의리(義理)를 중시하여 의리학으로도 불리었다. 성리학이 의리만이 아니라 주관적·계급적 사상이라는 점에서 실상 대부분 성리학자가 2형인간에 속하고 그 중에서도 철저한 사람이 강한 2형인간이다.
정몽주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고결한 지조의 향기와 동시에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이 느껴진다. 지조가 백성의 복이 되었다면 향기로왔을 것이고, 화가 되었다면 고집불통이다. 지조가 아니라 지혜가 문제다. 유교적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고려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되레 자신이 죽었다.
최익현 : 1868년 대원군의 당백전 발행 시에 경복궁 중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뒤 1876년 일본과의 통상조약 반대, 1894년 갑오농민군 반대, 개화파 처단요구, 1895년 단발령 반대, 1898년 독립협회 처단요구, 1904년 친일 매국도배의 처단 요구, 1905년 을사오적 처단요구 등 그의 활동은 변화에 대한 반대로 점철되어 있다. 개화에 저항하고 구래(舊來)의 봉건체제 회복을 주장하였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특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일(2형)보다 대동단결이(3형) 더 중요하다. 이념과 종교, 붕당과 이해를 초월하여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만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
고려말 두문동 사람들과 사육신·생육신·이퇴계·송시열 등과 이항로 등 위정척사파 유학자들이 대거 강한 2형인간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강한 2형인간 중에서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善)한 2형인간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집단을(도덕=집단이기주의) 위해서 다른 집단을 희생시키는(공격하는) 악(惡)한 2형인간도 있다. 이 선악(善惡)은 누구를 희생시키느냐는 차이에 있을 뿐, 종교나 이념적 고정관념에 의해 선악을 구분한다(편 가르기)는 점에서 동일하다.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선(善), 자신의 집단을 위해 상대를 공격하는 걸 악(惡)이라 분류했지만,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많다. 정몽주와 사육신은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칭송받지만 자신들의 가치관(도덕=집단이기주의)을 위해 이성계와 세조를 공격하려다 죽은 것이라서, 선악의 구분은 어렵기만 하다. 항우 같은 인물도 선악의 구분이 불분명한 사람이다.
항우 : 진(秦) 말기 반란군의 지도자로서 뛰어난 체력에 높은 학식을 가진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다. 은원(恩怨)이 분명하고 시를 즐기기도 하여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거록에서 20만 진군(秦軍)을 생매장해 죽이는 등 진(秦)에 대한 적개심을 남김없이 드러내었고, 홍문연에선 범증의 주책(籌策)을 뿌리치고 유방을 살려주었다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등 현실인식이 부족했고, 독불장군식이라 한신 등 많은 인재를 놓쳤다. 마지막에는 오강(烏江)에서 도망갈 배를 버리고 자살과 같은 돌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은 물론 얼마든지 많은 사람의 생명이라도 거리낌 없이 희생하는 2형인간의 특징이다.
2형인간이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집단 내에서 보면 영웅이지만 밖에서 보면 악마와 같다. 안중근에 대한 아래와 같은 상반된 시각이 그 예다.
2014년 2월 14일 경기도 교육청이 발렌타인데이 대신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을 기념하자는 광고를 냈다는 소식이 야후재팬에 보도되자 일본 네티즌은 ‘전 세계가 사랑을 말하는 날에 테러리스트를 찬양한단 말인가.’ ‘상대국이 어떤 기분일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고 비아냥 거렸다.
안중근이 살해한 이토 히로부미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의 원수이면서 일본의 유명 정치가이다. 2형인간이란 곧 국가·민족 혹은 종교·이념 등 고정된 관점을 갖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평가는 늘 상반되기 마련이다. 히틀러와 빈 라덴 역시 추종자에게는 영웅, 상대편에게는 범죄자다.
히틀러 : 아리안 민족주의, 유대인학살, 세계대전으로 알려진 이 사람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 : 수많은 테러를 지휘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상했던 그는 무슬림의 관점에서 미국과 서방국가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였다.
② 약한 2형인간
초자아가 압도적이지는 않으나 욕구와 자아보다 더 강해서 이상적인 생각과 양심적인 행동을 가진 사람이지만 때때로 욕구에 흔들리고 희생할 가치가 있는지 회의에 빠지곤 한다. 혹은 남이 알아주지 않거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등 이중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거의 모든 종교인이 여기 해당한다.
테레사 수녀 : 18세에 수녀가 되어 36세에 사랑의선교회를 설립한 후 죽을 때까지 죽어가는 사람들, 고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성인으로 추대되려는 움직임이 있기는 하나, 그녀가 썼다는 편지에 “나의 신앙이 어디 있는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공허와 어둠뿐....혹시라도 하나님이 계신다면,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시길.” 등 회의하는 구절이 있어 신앙이 완전히 압도적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철학에 경도된 사람과 함께 민족주의·국가주의·사회주의 등 이념에 경도된 사람 역시 2형인간으로 분류한다. 이들은 민족·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같은 직능 집단의 관점에서 집단에 충성하는 반면 적을 배척하고 제거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김일성 ; 1950년 남한의 수많은 ‘반동지주계급’을 처형했던 그의 군대는 ‘편 가르기’의 전형적 2형행태다.
루이 15세 때 산슨 원수가 펀트노아에서 로드 헤이 장군과 대치했을 때 영국 신사 로드 헤이 장군이 먼저 모자를 벗고 점잖게 “애프터 유”라고 하자, 프랑스군의 단테 로쉬 백작도 “아프레 부, 므슈 앙글레(영국분들이 먼저 시작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가 선제공격을 당해 많은 병사를 잃고 패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