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면 하묘리 둔전 마을 [臥(누울와) 牛(소우) 亭(정자 정)
둔전 마을은 운남면소재지에서 망운면 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운남면 하묘2리 둔전마을이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 김상경(호-수진제. 승장원 우부승지에 추서됨)이
부친의 묘지를 이곳에 잡으면서 형성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시 남원에서 살고 있던 김상경은
아버지와 함께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켜 낙안전투에 참여하였다.
낙안에서 왜병과 치열하게 싸우던 중 부친이 전사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부친의 시신을 안고 나왔다.
부친의 시신을 안고 장사지낼 곳을 찾아 헤매던 김상경은 하묘리의 지형을 보고 흡족히 여겨
이곳에서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끝내 정착까지 하게 되었다.
김상경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하였던지 상석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
두 개의 구덩이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무안지망집의 기록에는 김상경이 1573년 8월 15일에 태어났으며
천품이 뛰어나고 외모가 탁월할 뿐 아니라 하서 김인후의 자랑스러운 제자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또한 자라서는 경서와 군서를 섭렵하여 지략에 막힘이 없었고
식견이 풍부하여 말에 있어서 논리가 분명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덤은 하묘리 松下山에 있다.
마을 이름은 원래 조선중엽까지 ‘錦山’으로 불러왔으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우정(臥牛亭)’이라 고쳐 부르다
‘구스통(들샘)’, ‘장오래(쇠고예)’로 바뀌어졌으며 현재는
소가 먹는 풀밭이란 의미의 ‘芚田’이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마을 주변에 소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구스통이라는 소가 물을 먹는 샘인 갈샘(들샘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소의 고삐를 끌고 가는 형국인 장오래가 있고 동편에 나있는 소의 뿔이라는 동각동 등이 있다.
또 다른 유래는 와우정을 왜우정이라고도 하는데 ,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비를 만난 곳이라 해서 왜우정(倭雨亭)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변하여 와우정(臥牛亭) 으로 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망등(마을 단위의 봉수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주변 마을의 안위를 살피는 높은 대, 이곳을 지키는 망지기도 있었음)
또는 조산등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지금은 300여 평의 넓이에 잔디가 심어져 있으며
주변에 5개의 고인돌이 널려 있었다.
이곳은 흙을 올려 쌓아 멀리까지 살필 수 있게 만든 인위적인 동산으로
현재는 망등의 흙을 많이 퍼 가버려 옛날의 높다란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흔적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의 흙을 파낼 때 옛날의 그릇이나 자기 파편 등이 많이 나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운남 망운에 걸쳐서 최초의 교육기관인 둔전사립학교와
선진문화의 첨병 역할을 했던 교회인 하묘교회(1929년 설립)가 설립될 정도로
교육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마을이었다.
현재 학교터는 밭이 되었지만 그때 학생들의 수업시간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은 지금도 마을회관에 남아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처음에는 일본어만 배웠으나
나중에 야학 형식으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에는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좌익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마을 입구에 광산김씨 열부비가 있다.
열부비의 주인공은 김해 김씨인 김재광의 부인으로 젊었을 적에
남편이 병을 얻자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남편이 낫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도 보람 없이 남편은
세 살짜리 아들과 칠순의 노모를 남겨둔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연이어 큰 집의 조카도 고아가 되자 부인은 이들을 모두 거두어 기르게 되었다.
부인은 자신의 아들은 농사를 짓게 하고 조카인 종손은 글을 읽게 하여 큰 선비로 길렀다.
후일 부인이 세상을 뜨자 종손과 주변 사람들이 뜻을 모아
비각을 세워 그 정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예전의 이 마을 이름이 錦山洞이었는데 4-50년 전에 잠채업자가 마을 이름만 보고
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 앞의 논을 파헤쳐 금을 채굴해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제 때 일본이 망운에 공항을 건설하려고 할 때 유독
이 지역의 사람들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혹독한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뭐라고 꼬집어 이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바른 소리를 많이 해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 마을 앞에 단(檀)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이번 탐방에서는 특이한 자기(瓷器) 한 점을 발견했다.
하묘리 일대에 도요지 흔적들이 많아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타당성을 이야기 하던 도중에 함께 한 주민 중 한 사람(김지용. 71세)
이 밭을 갈다가 발견한 도자기를 정원에 버려두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볼 수 있냐고 하자 바로 나가서 가져오는데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자기였다.
처음에는 토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윗부분에 유약을 바른 흔적 등이 보여 초기 청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민의 이야기로는 마을 옆 방하교(防河橋)에서 발견했는데
지금도 그 주변을 파보면 한 수레가 가득 찰 만큼 수많은 파편들을 모을 수 있다고 한다.
주민이 가지고 있는 자기는 옆 마을인 두곡 마을에
있었다는 가마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운남 망운에 걸쳐서 최초의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던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