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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MT 풍류기행기
계사년 새해가 밝았다. 한세상을 멋지게 살다가 간 풍류객을 쫓아 매월 한번 떠나는 풍류기행이지만 혹한기인 1월과 혹서기인 8월은 장거리 풍류기행을 떠나지 않고 서울 근교 호젓한 장소에서 회원 친목 모임을 갖는다. 친목 모임에서는 풍류기행때 나누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해 함께 했던 풍류기행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회원간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지난 1월 12일 토요일, 자유행복학교 풍류기행 신년 MT 겸 친목 모임이 북한산 사기막골 어느 주막에서 열렸다. 일부는 북한산 둘레길 등산을 한 시간 가량 하고 모임장소로 이동하고 일부는 곧바로 모임장소로 왔다. 나는 11시경 북한산 둘레길 등산팀과 불광역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북한산 입구 좀 지나서 내려 잔설이 수북한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찬공기를 마시며 눈 쌓인 등산로를 조심조심 걸으며 ‘새해에는 자유행복학교가 좀 더 발전되고 회원 모두가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12시 모임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회원들이 많이 와있었다. 우린 서로 반갑게 악수를 하며 주안상이 차려진 방으로 들어갔다.
초암의 사회로 계사년 신년 MT가 시작되었다. 먼저 학교장인 내가 신년 인사를 한 후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본인 소개를 했다. 물론 새로 오신 네분도 멋들어지게 자신을 소개했다. 네분중 세분이 여성 회원이라 분위기가 더욱 좋았음은 물론이다. 각자의 소개 인사가 끝나자, 초암이 자유행복학교 풍류기행에 대한 약력을 소개했다. 지난해 4월 ‘김삿갓 풍류기행’을 시작으로 12월 ‘오성과 한음 풍류기행’ 까지 총 8회 풍류기행을 다녀왔다. 우리가 그동안 다녀온 풍류기행 하나하나를 회상해 보았다.
먼저 작년 4월 최초로 떠난 ‘김삿갓 풍류기행’은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설레이고 가슴 벅찬 여행이었다. 오랜 기간 생각하고 준비한 여행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역사상 최고의 풍류객이라 할 수 있는 김삿갓! 그의 유적지와 행적을 찾아 강원도 영월과 전남 화순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다녀왔다. 영월에는 그의 생가터와 묘소, 그리고 문학관이 있으며 화순에는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종명지(終命地)와 그가 배를 타고 풍류를 즐겼다는 적벽강이 있다. 우린 그의 유적지와 행적을 찾아다니면서 그가 진정 무엇을 얻기 위해 한평생 그토록 방황했을까 하는 화두를 놓칠 수가 없었다.
6월에는 고려 무인정권 시기 최고의 문장가인 백운거사 이규보를 찾아 강화도로 떠났다. 몽고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와 있던 시기에 삶을 마감한 그의 무덤이 강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묘소에 참배한 후 묘소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문학관에서 그의 시와 풍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민족 영웅 서사시인「동명왕편」을 지은 인물이기도 하지만 평생 시와 거문고, 술을 좋아해 삼혹호(三酷好) 선생으로 불려질 만큼 풍류를 즐겼던 인물이기도 하다. 고려 왕릉과 함께 했던 강화 풍류기행은 그동안 소홀히 했던 고려 왕조와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7월에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누이인 허난설헌을 찾아 강릉으로 풍류기행을 떠났다. 강릉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허균은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굴곡있는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자, 자기 꿈의 실현을 바라던 사상가였으며 시대의 이단아였다. 나는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는 홍길동전과 같은 꿈을 꾸었는지 모르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나고 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허난설헌은 본명이 초희(楚姬)이며 허균의 누나이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했다. 그녀는 어린 자식들이 모두 죽고 친정도 몰락하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비록 두 남매의 삶은 비극적으로 마감했지만 역사에 남을 작품을 남긴 두 분의 명복을 빌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8월에는 혹서기로 풍류기행을 떠나지 않고 일영유원지 계곡에서 여름 MT를 가졌다. 시원한 계곡에서 수영도 하고 시도 읊으며 여름 풍류를 즐겼다.
9월에는 충남 아산으로 맹사성 풍류기행을 떠났다. 아산에는 맹씨고택, 맹씨행단, 맹씨기념관 등이 있다. 맹사성은 고려 말 충신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호는 고불(古佛)이고 관직이 낮은 사람이라도 禮로 잘 접대했으며 청백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향인 아산에 내려갈 때나 서울로 올라올 때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좌의정 정도 되면 사인교 가마나 멋진 말을 타고 다닐만 한 대도 그가 애지중지 키우던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니 그의 멋스러운 풍류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그의 묘소 옆에는 그가 평소 타고 다녔던 소의 무덤인 ‘흑기총(黑麒塚)’이 있다. 한갓 짐승에 불과하지만 주인을 잃은 후 단식(?)을 하다 주인을 따라 죽은 소를 생각하면서 흑기총에 무성하게 자란 잡풀을 뽑아주었다.
10월에는 조선 최고의 청백리인 방촌(厖村) 황희와 최고의 학자인 율곡(栗谷) 이이를 찾아 경기도 파주로 향했다. 황희는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의정 및 우의정으로 재직하였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등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경기도 파주 임진강가에는 그가 말년에 갈매기와 노닐었던 반구정과 사당이 있다. 이이는 조선 최고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29세에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 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내에 그의 묘소와 기념관 등이 있다. 10월 가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화창한 날에 풍광 좋은 반구정과 자운서원을 둘러보며 조선이 낳은 최고의 명신과 학자도 틈틈이 풍류를 즐기며 자신을 수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1월에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土亭) 이지함을 찾아 충남 보령과 아산을 다녀왔다. 보령에는 토정의 묘소가 있으며, 위패와 영정을 모신 화암서원이 있다. 그리고 아산에는 그가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의 흔적들이 남아있는데 특히 아산의 걸인들을 한데모아 직업교육을 시켰던 걸인청터를 보면서 그가 역학에 밝고 다소 기이한 행동을 했던 인물로만 알았었는데 이번 풍류기행을 통해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이 청천저수지 축조시 수몰되어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산 영인면사무소에 있던 동상, 영모비 등을 둘러보니 그 옛날 토정 선생이 이루고자했던 정치가 눈에 보이는 듯 가슴에 와 닿았다.
12월에는 ‘오성과 한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을 찾아 경기도 포천과 양평 일대를 둘러 보았다. 포천에는 이항복의 영정과 위패가 있는 화산서원과 묘소가 있으며 이덕형을 모신 용연서원이 있는 곳이다. 또한 양평에는 이덕형이 말년에 영의정에서 물러나 풍류를 즐겼던 별서(별장)터가 있으며 별서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의 영정각과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덕형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42세)에 영의정이 된 인물이다. 오성과 한음은 어릴 때에는 서로 장난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고, 벼슬에 오른 후엔 당파를 떠나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동고동락을 함께 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500년사에서 가장 큰 전란을 당해서는 나라와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국난을 극복했다. 그러나 결국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고독한 말년으로 삶을 마감한 두 분의 궤적을 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 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난해 우리가 떠났던 풍류기행에 대한 회상이 끝난 후 올해 예정되어 있는 풍류기행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금년에는 1박 2일로 떠나는 풍류기행이 다섯 번이나 있다. 좀 더 준비를 잘해서 즐겁고 행복한 풍류기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 2월 : 정약용(남양주)
○ 3월(1박) : 정약용(강진), 임제(나주)
○ 4월 : 온달과 평강공주(단양)
○ 5월(1박) : 이황(안동)
○ 6월 : 최치원(홍성, 함양)
○ 7월(1박) : 윤선도(해남 보길도)
○ 8월 : 여름 MT
○ 9월(1박) : 정철(담양, 광주, 진천)
○ 10월 : 김정희(예산, 과천)
○ 11월(1박) : 조식(산청, 합천)
○ 12월 : 김시습(부여, 철원)
풍류기행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우리는 지난해 풍류기행에 열심히 참석한 분들에 대한 시상식을 가졌다. 먼저 풍류기행 총 8회중 5회 이상 참석하신 회원에 대해 ‘참가상’을 수여했다. 참가상 수상자가 호명되고 학교장이 직접 상품을 전달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계속해서 풍류행복상, 풍류주당상, 풍류음악상, 풍류음식상, 풍류탐구상, 풍류국궁상, 삼행시상, 시낭송상, 가창상이 수여되고 오늘 처음 참석한 회원에게는 ‘반가운상’이 수여되었다. 또한 카페 게시상, 댓글상, 사진상 등 온갖 상들이 줄을 잇는다. 상을 받지 못한 회원은 한명도 없다. 상품은 은봉 선생이 준비한 등산용 양말이다. 비록 양말 한짝이지만 받은 회원들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하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일부 회원은 미리 준비한 음식과 기념품들을 내 놓는다. 풍류행복상 등 네가지 상을 수상해 최다상을 수상한 지설이 밤새 만든 찹쌀떡을 만들어왔다. 예쁘게 포장까지 한 떡은 회원들의 입속에서 살살 녹는다. 백천 선생은 경북 봉화에서 손수 빚은 ‘선주’를 무려 삼십병이나 가져왔다. 회원 모두에게 한병씩 나눠주고 남은 술병은 개봉해서 맛을 음미하는데 모두 한잔씩 들이키더니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이어 풍류탐구상을 받은 야공이 고급 우산과 다용도컵 20개를 배낭에서 꺼낸다. 사회자가 그냥 똑 같이 나눠주기를 거부하고 돌아가며 장기자랑을 시킨다. 노래와 시낭송이 이어지고 박수 소리에 따라 선물의 종류가 달라진다. 웃음꽃이 피고 술잔이 몇 잔씩 돌아가니 흥이 절로 난다.
음식풍류가 진행되는 동안 백천 선생은 회원 한분 한분을 불러 금년 토정비결을 봐주고 있다. 금년 운세가 좋다는 말을 들은 한 회원은 입이 귀에 걸린다. 해송 선생은 주막 마당가에 깡통을 두어개 놓고 10M 정도 거리에서 새총으로 깡통을 맞추는 이른바 ‘새총풍류’를 회원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새총에 장전된 탄알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깡통을 뚫는다. 오늘 신년 MT는 신년 하례 겸 친목을 다지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동안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원간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다. 12시에 만나 오후 6시까지 긴 시간을 함께 하며 자유행복학교 회원들은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꼈으리라! 우리는 다음 달 다산 정약용 풍류기행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악수를 나누었다. 자유행복학교 풍류기행은 계사년에도 어김없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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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해 우리가 갔던 풍류기행과 1월 MT 풍류기행을 되새겨 보는 글입니다~~
혼자 사는 법 연습 중인 줄 알았더니 틈틈이 글을 쓰고 계셨군요, 교장 선상님,,,
집행부의 노고가 있기에 우리는 영원히 행복합니다.
지난 해 풍류기행의 흔적들을 되짚게 하는 글이네
2013년에도 신나는 풍류기행이 되었음 합니다.
정성스런 기행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초암선생은 정말 글 솜씨가 타고 태여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