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강치가 사흘째 혹독하게 휘둘러댔다. 기습적인 추위였다. 겨울 들어 한량없이 좋았던 날씨였던지라서 살갗에 와 닿는 느낌은 더욱 사나웠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추위에 다들 몸을 움츠리며 곤혹스러워 했다. 그러면서도 계절이 계절인많큼 동장군을 탓할 일은 못된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도리질치며 아닐성싶은 일은 다른데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상대의 일기예보는 전혀 딴판이였기 때문이였다. 올 겨울 날씨는 이상난동으로 인하여 이례적으로 푸근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한수 더 떠서 이런 고온 다습한 겨울 기온현상은 남태평양에서 밀고 올라오는 아열대성 엘로우 현상과 맞물려서 나타나기 때문에 내년 벼농사에도 심각한 병충해가 우려된다는 말까지 곁들었다.
하기사 일기예보라고 내놓았던 기상대의 발표는 사실 어긋날 때가 더 빈번했다. 그것은 크고 작고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일백팔십도 틀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때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이 되었을 때는 이만저만이 속상한게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아이들 소풍 가는 날이 그랬고, 운동회날, 마을 당산제,,등등 어쩌면 그렇게 애꿎게도 골라가면서까지 날씨를 못맞추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빗나간 일기예보에 당한 사람들은 방송에서 내던져진 헛방진 말들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고 이에 대해서 방송국은 응분의 사과를 해야 한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사과는 커녕 여직껏 한 번도 예의적 차원에서라도 가타부타 미안타는 말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 괴심하고 서운한 일이였다.
예를들어 신문같은 데를 들어다보면 가끔 눈에 띄는 정정보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얘기는 애시당초 약에 쓰려고 해도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이제는 아무리 불학무식한 농삿꾼이라고 해도 기상대의 발표를 일백푸로 곧이곧대로 믿을 위인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방송을 기왕 안들은 말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때는 서운한 마음은 그게 라니라서 여러 국민들을 상대로 내보내는 공공의 방송인많큼 좀더 신중을 기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정천리 마을 사람들은 이를 두고 기상대의 예보가 신경통 앓는 늙은이 어깨죽지 만치도 못맞춘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 날이 추워지닝께 아조 입을 꽉 다물었능가비어, 지놈들도 이제는 할 말은 없것지.. 오살라 스피카 한잘라 짚불에다 오짐 누능거 맹크루 직직 끓어쌋고..>
< 아 그깐 놈의 것 들믄 뭣혀, 어디 출입할 일이라도 있땅가, 이 추위에 자내는? 추믄 뜨듯한 알목에 이불 덮어쓰고 가만 누워있으면 되제, 정이나 궁금허믄 아랫마을 단골애미헌티 가서 물어보든가>
< 또 쓰잘디없는 소리를 허요. 나는 무슨 말도 못하고 사요. 그리고 단골애미가 무슨 날씨까장도 봐준답디어.. 오늘같이 추운 날은 설령 봐준다혀도 찿아가다가 얼어죽껏소.>
논산양반 이무구씨가 사랑방 기둥에 매달인 스피커를 바라보며 넋두리를 담아내자 원평노인 김학배 옹의 된소리에 그만 시큰둥한 대답을 흘러놓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씨는 툇마루를 내려와 곧장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에다 기다란 수숫대를 깊숙히 밀쳐 넣고 한동안 바라보며 불 끝이 되살아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방문을 열다말고는 순간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워메, 이것이 머시대야.. 얼라 손가락이 그냥 붙어버리네여!>
방 문고리를 잡다가 찌리릭 하고 전류가 흐르는 듯 문고리가 손가락을 나꿔채는 바람에 이무구씨는 오줌발 내리고 난 뒤끝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서 가마솥에 양동이의 물을 붓다가 그만 젖었던 손이 얼어있던 방문의 쇠고리에 붙들린 것이다.
< 얼라라, 이렇게 짝 달라붙을까.. 징상허네, 삼복에 꼭 개엿 만지능것 같네 참말로. >
추위가 예기치 않을 때는 추위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일이 꼭 그렇다. 가을 이후 줄곧 해방이라도 맞은 듯 푸근했던 날씨였던지라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들어닥친 추위에 다들 겨우살이에 미쳐 손 못댄 일들이 군데군데에서 터져나왔다. 명색이 동짓달인데 아무리 푸근해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나남없이 한 터울 온전한 겨우살이 대비를 해놓았어야 될 일인데도 낮아즘하게 방관한 부분은 있었던 듯 그중에 몇 사람은 그만 오뉴월에 소나기 만난 종이장사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야단법석을 떠는 이들도 있었다.
마을 이장 유차만도 예외는 아니였다. 그도 설왕설래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들하고 똑 같이 하는 일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이장 보는 일이지만 남들 보기에 노는듯 보여도 몸은 한결 서두르기 마련이다. 그런데다가 그의 오지랖은 넓어 참견하고 역성하는 일은 도대체 마다하지 못해 제 풀에 겨운 일 또한 한 매듭 짓고 마는 성미라서 당장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오늘은 그의 집에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아침부터 서둘러서 대나무 집 조태평씨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조태평씨에게는 사랑채가 하나 있다. 그곳은 오랬동안 비워 있어서 거의 쓰지않는 물건들로 가득 쌓여서 서생원들에게 안식처나 재공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럴 바에는 금년 겨울만이라도 서당으로 써보자고 몇 차례 채근하여 허락까지 받아놓고 차일피일 미루어 오다가 날이 추어지니 갑작스럽게 생각이 밀처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만사를 제쳐놓고 조태평씨에게 사랑의 물건들을 비워 줄 것을 부탁하려든 참이었다.
< 참 이장님도 차라리 나를 잡어 잡수시요. 하필 꼭 이 추운 날에 이런다요. 그 많던 존 날 다 놔두고서..>
조태평씨은 유차만의 성화에 마땅찮은 대꾸를 했지만 명색이 이장이라는 체면을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더군다나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기왕지사라면 빨리 치워주는 것이 나을성도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유차만을 돌려보냈다.
유차만은 평소에 작달막한 꿈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그가 마을 이장이 되고부터 였다. 무엇인가 마을을 위해서 꼭 도움이 되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남들이 전혀 생각치 못한 뜻밖의 일 같은, 그것은 넓게는 좁쌀만한 애국심이어도 좋고 좁게는 사심일찌라도 좋을테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을에 서당을 들이이고 싶은 마음이였다. 그러나 혼자 생각이며 꼭 그럴리야 있을까만 누가 나서서 정천리에 성인군자 나왔다는 식으로 빈정거리기라도 한다면 그 정도 쯤은 상관없다는 마음은 이미 다진 터이다. 여기에는 너무도 빤한 한가지 부끄러운 이유가 엄연하게 존재하기에 가만이 있어도 훤히 보이는 일인데도 나 몰라라 할 사안이 아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을의 고질적인 노름이었다. 그것을 몰아내는 첫번째 이유로 무언가 대체할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긴요했다. 마을을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머지않아 영영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치유불능의 파산상태가 될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눈이었다. 대개 변화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쌓이고 쌓여 어느 사이 실체를 덮게 된다. 그렇다면 인력으로는 노력만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우선은 서당을 들이여 마을의 장유유서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 뿐이었다. 알아야 면장한다는 말처럼 불학무식을 없애는 일이 기본이라면 그것은 곧 마을의 예의범절을 바로 세우는 일일진데 대체 오늘의 빈약한 공동체의 뿌리를 다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서당을 만드는 일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자라나는 아이들의 장래를 보아서라도 반드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유차만은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제풀에 겨운 것이 이런것인가도 싶었다. 아이들을 문리터지게 하는 일은 정천리를 바로세우는 일이기에, 구학을 심는 일이 실현만 된다면 그 뿌듯함을 어디에다 비유할 것인가. 그것은 중책감으로 열성을 다하고 있는 마을 이장의 역활보다도 마을의 장래를 보아서는 열배 백배 더 중요한 일아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원래 정천리에 서당이 없지는 않았었다. 불과 오륙년 전까지만 해도 면 소재지에 사는 오류선생이 해마다 겨울 한철에 마을에 들어와 서당을 차려 글을 가르쳤다. 그 때는 남여노소가 다 글읽는 소리에 심취하여 어린 아이가 뛰노는 집처럼 마을은 화기애애했다. 그 일은 지금은 저승에 가있는 탱자나무집 봉수 할아버지가 주선했다. 누구 하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없는 가운데서도 봉수 할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지극정성 물심으로 마을을 위해 힘을 다 했다. 그러나 노인이 돌아가신 뒤 바로 그해 겨울부터 서당은 흐지부지 문을 닫게 되었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오류선생을 다른 마을에서 모셔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마을 앞 삼거리에 봉수 할아버지가 살아 생전 서당 선생한테 의뢰해서 먹글씨로 써서 음각으로 손수 파 세워 놓은 "노름은 패가 망신의 근원"이란 나무 푯말도 노인이 죽은 뒤에 어느 누군가가 뽑아다가 돌다리 밑 개울에 쳐박아 버렸고 서당까지 작파한 마당에 마을로 보아서는 싹수가 글러먹은 짓들만 생겼다. 그러고보면 한 사람의 힘이 어떤 것이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손수 나서는 이가 없었으니 농한기의 한심한 일들은 비로소 여기서 출발한 샘이였다.
< 거보랑께 내가 안그려, 얼씨구나 헌당께로 직접 눈으로는 못 봤지만 누구 소행이것어. 뻔할 뻔자이지. 그런 일을 허는 놈들은 낱낱이 밤이슬 맞고 댕기는 놈들 뿐잉거여, 햇빛에 나타나기는 죽기보다 싫은것이 자연의 이치이닝께.. 서당 땜시 겨울이면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숨죽여 하는 노름 조차도 체면 잃을까봐 그랬던 놈들이여. 그놈들이, 아 한번은 서당 입구에다가 무담시 닭똥을 뿌려놔각고 어쩠는줄 아능가, 애를 먹었어 누가 일부러 그러지안고서는 그럴수가 있겄어. 골탕먹일라고 아예 작정을 하고 나선 것이지. 거기가 무슨 호박 구덩이여 누가 똥짐 지고 가다가 엎어졌게, 그런 호로자식들이 어딧어 빌어 처묵을 새끼들 같으니라고 오죽해야 그 성인군자같은 서당 선생이 그길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역성을 냈을까>
아직도 안잊히는지 혀끝을 차는 원평노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봉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일어난 일들을 원평노인은 소상히 기억하며 유차만에게 당부하는 것이였다.
<우리가 무슨 살아있는 사람인가 논둑에 서서 참새 쫓는 허수아비만도 못한 인생이지. 할일을 하고 살아야 그것이 인간인 것인디 나이만 먹었지 이 쬐깐한 마을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고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겨울이면 노름으로 패가 망신하는 젊은이들만 늘고 참 갑갑한 노릇이네. 이장으로서 할 일도 많겠지만서도 이렇게 자네라도 나서서 물심인디 무슨 할말이겠는가만, 노름이라는 것이 꼭 아편을 닮아서 어지간해서는 못 끊고 도지는 것이네이, 쇠비린잎 뽑아낸 자리 쇠비린잎 나듯이 집안 내력도 무시할 수도 없는것이고 막말로 계집질은 끊어도 노름은 못끊는다고 안하등가, 그 뭣이쟤 팔 끊어 놓으니께 종당은 발꼬락으로 화투팰 돌리드락 허등만>
유차만은 원평노인의 말을 듣는 내내 가슴 속이 쓰리고 아파왔다. 유차만에게도 말 못할 감춰진 사연이 있었다. 물론 그의 집안 이야기다. 그의 작은 아버지가 일찍이 노름판에서 패가망신하여 집안 꼴을 남우새 시키고 스스로 파탄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었다.
정천리 마을은 농한기만 되면 도박이 열병처럼 번지곤 했다. 온통 노름 열기에 휩쌓여 겨울 한 철 지나고 나면 살림이 쭉정이 뿐인 사람들만 늘어갔다. 대남없이 걷으로만 쉬쉬 할 뿐 노름판에서 망한 사람은 소문이 두려워 전전긍긍할 뿐, 어디가서 내색도 못하고 간혹 나도는 말에 의하면 누구는 어디서 하루 저녁에 일년 세경을 죄다 털어먹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이런 판에 어느 누가 하늘천 따지 하며 미주알 고주알 시답지않은 일에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있을까 싶지만, 유차만의 발상은 이런 이유에서라도 마을에 서당이라도 만들어 일거에 불식은 못시킬지언정 지금까지처럼 더이상 마을이 피폐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원평노인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 어쩧든 신중 혀야 되. 자네씨가 하는 일은 막말로 추진허다가 안되는 한이 있어도 안하는 것만은 낫것지만, 잘 아시다시피 우리 마을이 어디 대가 보통 쌘가. 설마 그럴리야 있것능가만 노름으로 혈안이 된 놈들이 막말로 자네한테 해꼬지라도 허믄 어쩔랑가, 그것이 꼭 그러네. 노름이라는 것이 여름 논바닥의 피 같아, 막난이처럼 뽑아내고 뒤 돌아 서면 다시 저만치에서 너울거리며 일어서닝께..그래 남에 머슴 사는 놈이 하루 저녁에 일년치 세경을 죄다 털어넣는 일이 생기쟤. 참 기가 찰 일이네만. 우리 마을이 나 어릴적부터 호가 났었네만 어찌 이리 되었는지. 그러나 우리 어릴쩍에 투전이 심했어도 이러지는 않았어. 요즘처럼 그렇게 막가지는 안했어. 노름을 무슨 미풍양속처럼 버리지 못하고 키워서 살림들을 회쳐먹고 있으니 어떻게보면 북망을 코앞에 둔 우리가 마을에 대역죄를 짓고 사능것이지. 암 그렇지>
원평노인의 자조 섞인 말에 유차만은 더욱 혼돈스러웠다. 그러나 입성구로서는 이미 파다한 소문의 진상이기 때문에 단김에 빼는 쇠뿔처럼 바짝 서둘지 않으면 뭔가 낭패스런 일이 생길것만 같은 예감도 들었다.
이장 유차만이 조태평의 집을 다녀간 뒤 곧장 조반을 비운 조태평은 다시 사랑채로 건너왔다. 사랑방은 먼지의 야적장이었다. 이끼처럼 햇수로 묵은 두둑한 흙먼지가 켜켜히 층을 이루고 가용으로 쓰기 위해 쌓아 놓았던 방석이나 소쿠리 따위들은 서생원이 내깔긴 오줌에 누렇게 탈색되어 있었고 수수빗자루 같은 것들은 죄다 갈가 먹어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있었다. 조태평은 추위에 떨며 낮이 가까워지도록 치워내면서 궁시렁 거렸다.
<추워 죽껏는디 내가 이 무슨 사서 고생이람.>
<그렁께 내가 뭐라 했소. 당신은, 내 말은 뒷집 강아지가 짓능거만치도 못허게 생각허닝께 그 고생 아니요.>
아내가 언제 왔는지 방걸래를 들고 나타나 처외삼촌 벌초하듯 휘휘 방바닦을 문지르며 볼맨소리로 내 질렀다.
<저런, 여봐, 하기 싫으면 그만 좀 두소. 이 추위에 물걸레로 방이 딲이것능가 얼어나 붙지.. 하는 짓이라곤, 내비 두고 어서 가셔 자내 볼일이나 봐, 고것은 나를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고 파방놓으러 온 것이닝께. 몇 수년 묵은 먼지를그렇게 거미줄 터어내듯 해각고 된당가 이 사람아.>
조태평의 핀잔에 아내는 그만 벌래 씹은 표정으로 내쏘아보다가 부엌문을 밀치며 씩 하고 나가버렸다.
<그래도 어찌되껀 내집에다가 서당을 차리기로 허락한 마당에 애초에 얘기가 없었던 일이라면 몰라도 물냥난 방구석이라지만 쥔 입장으로서 깔끔허게 치워주능게 좋챦여, 여편네가 아침부터 석 죽이며 종알종알 훼방구나 치고..>
조태평은 부억문을 탁닫고 나가버린 아내의 두통수에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방이 말끔이 치워지자 그도 부억으로 나왔다. 차고 눅눅한 기운은 더하다. 우선 방바닥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될 일이었다. 그의 기억으로 잠시 한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을에서 있었던 어느해 여름이 갑자기 생각났다. 또랑머리 시앙골댁 아들 박점식이가 자기 사랑채 앞 서까래 위에다가 둥지를 틀어놓은 제비집을 깨부수고 제비알을 꺼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장난질을 치다가 그만 초학이 들고 말았던 일이다. 점식이네는 홀엄씨 몸에 그 바쁜 모내기철에 농사일을 작파하다시피 하면서 동내방내 뛰어다니며 점식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울고 다녔다. 그날 다저녁 때 줄포리 중앙약방까지 가서 약을 지어 끓여먹어도 아무런 효험이 없자 결국은 아랫마을 단골애미를 불러서 푸닥거리를 했던 것이다. 단골애미는 과연 해결사였다. 두엄에 버려진 수수비 몽짜루를 들고 연기에 그을려 점식이를 괴를 벗겨놓고 엉덩이를 곤장치듯 후려치던 일이였다.
<아이고, 이러다가 우리 애 쥑이것네. 어마마, 우리 보살님이 왜 이러신다야.. 조앙님, 성주님.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요 제발 제발.>
<인자는 괜찮을 것이요. 요것이 이점은 이래도 똥자루는 무거운 놈이고만이라, 다 저그 증조 할매 덕뿐에 살았승께 암 염려 마시고 낼이면 시원하게 나을팅게로..>
과연 그랬다. 점식이는 다음날 오후 쯤 씻은듯이 초학으로 앓던 병이 고쳐지고 말았다. 단골애미의 그 영험함은 실로 감탄스러웠다. 그때 단골애미가 한 말이 조태평의 귀를 언뜻 스쳤다.
< 집이라는 것이 아무리 내집이어도 비어있다가 남에게 내줄 때는 쥔이 먼저 그방에서 하룻밤을 자야 탈이 없능 것잉께, 그중을 알아애 허능것이여라>
어떤 이유에서 나온 말인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다. 단골애미는 천기누설이라도 하는듯 자기 말의 진실성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괴어린 말투였다. 그러고 보니 조태평에게는 오늘이 기회인듯도 싶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좋은게 좋다는 이치는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의 사랑채가 유차만이 들어와 살것은 아니지만 그의 의사에 힘입어 내주는 것인만큼 누구인들 그때 단골애미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이상은 그냥 넘기기에는 개운치 않을 것이다.
초겨울의 해는 짧았다. 그는 안채로 들어가서 저녁상을 일찍히 물리치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사랑채로 건너 가려다가 아내에게 그의 생각을 설명하자 소금애피댁은 씨도 안먹히는 소리라며 벌컥 화를 내고 대들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락 허요, 재식이 아부지. 아이고 이 엄동에 무슨 귀신 씬나락 까먹는 소리다요.. 살다살다 원 별소리 다 듣것소 나는>
< 진짜랑께 이사람이, 내가 무슨 꾸며낸 말인중 아나벼>
조태평은 아내를 곁눈으로 흘기며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이 추운 날에 그렇게 할일이 없으면 당장 우리 사는 구들에다 불 지펴 고래구녕이나 티워주시시요>
사실 아내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였다. 사랑채라고 있는것이 비워있을 때는 비워있는데로 그렇지 않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로 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처럼 느끼던 터였다. 미신도 좋지만 몇년씩 비워둔 방을 하필 이 추운 날에 꼭 그럴필요까지 있겠냐는 것이 아내의 솔직한 생각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태평은 좋은 것이 좋으것 아니겠냐며 반박하며 나섰고 또 이런 기회가 아니고서는 어떤 기회가 있을까 싶어 아내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사랑채로 건너왔다. 다저녁에 지핀 지푸라기 두어단으로는 방의 온기는 어림도 없었다. 한기는 조태평을 당장 밖으로 내쫓을것 같은 기세로 방안 가득 채워져 굳은 자세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부억으로 나가 짚단을 풀어 군불을 더 지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얇은 요 위에 누워있는다는 것이 그만 잠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조태평은 평소 초저녁 잠에 길들어진 탓에 그의 몸기운은 도리어 요 밑을 녹이고 방을 데웠다. 아내는 그의 성미를 익히 아는 터라서 만류를 포기했는지 아예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한숨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미미했던 방안의 온기는 이미 싸늘해져 있었다. 아니 그는 추위에 잠을 깬것이다. 더 이상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자코 가부좌로 앉아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지신의 억지가 무리인것 같았다. 아내의 말이 옳은것 같았다. 버럭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이미 식어버린 방바닥에서는 한기가 품어 올라와 더이상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가 자고 있는 안채로 건너갈까 망서리다가 곧장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은 새그물을 내려친 풍경같았다. 이른 새벽인듯 했다. 하늘은 달은 사라지고 초롱한 별빛조차 희미해진 어둑어둑한 빛으로 들어차 있었다. 순간 그는 마침 잘돼었다 싶었다. 집 모퉁이에 새워둔 지게를 지고 황새목 낫을 챙겼다. 그리고 조용히 대문을 나섰다. 신새벽이라서 세상은 온통 고요에 파묻혀 있었다. 그는 집 모퉁이를 돌아 뒷동산으로 난 산길로 향했다. 조태평은 소나무 숲에 가서 생솔을 잡아 부엌 아궁이에 지필 계산이였다. 엄동설한에는 아궁이에 생솔만한 것도 없다. 긴 가지를 고래통 안에 깊숙히 밀어넣고 토닥토닥 타들어가면서 먹빛 연기가 불길을 받아 고래길을 휘젖고 다닐 때 구들은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터벅터벅 어둠 속을 걸어간 곳은 산판의 송씨네 문중산 소나무 숲이였다. 금년에는 봄부터 치산치수한답시고 소나무 단속이 워낙 심해서 부지깽이 하나 만들지 못했는데 땔감으로 바닦에 떨어진 솔잎조차 긁어가기가 어려운 판국에 감히 생솔을 잡으러 나왔으니 태평은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강심장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는 황새목 낫을 거머쥐고 급히 소나무가지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고요한 산 속은 우지직우지직 나뭇가지 꺽이는 소리로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주섬주섬 두어단 남짓 잡아 묶어서 솔단을 지게 위에 얹고 그는 황급히 숲을 걸어나와 단숨에 집모퉁이까지 내리 달렸다. 일사분란하게 해치운 일이라서 추운 날씨인데도 등떨미에서는 땀이 후즐근하게 흘러내렸다. 그때엿다. 누군가가 앞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일었다. 조태평이 멈칫하는 순간에 바람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역시 사람이었다. 아뿔사, 순간 머리끝이 바늘처럼날카롭게 뻗혀올랐고 솔가지를 업은 그의 등짐이 휘청거렸다.
< 뉘시여. 식전부텀..얼라, 소금애피양반 아녀라,>
아, 조태평은 그만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귀신은 다른 것이 아니였다. 어둠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서는 이는 산판의 편진수였다. 조태평은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이 쫙 풀렸다. 하필, 이 시간에 편진수가, 그는 발걸음을 멈춘 채 잠시 우두망찰이 되었다. 천하의 노름쟁이 편진수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조태평이 잠시 머뭇거리자 편진수는 이미 사전에 알고나 있기라도 한듯이 낮은 말투로 나왔다.
< 어따! 참 일르기도 허요. 새벽잠도 없으시네여, 날씨한잘라 징상허게 춥고먼 이 시간에 머슬 그러코롬
무겁게 지고오요. 어마, 아니 생솔가지 아녀라우... >
편진수는 어둠속에서도 한눈에 조태평이 지고있는 지개위의 물건이 생솔가지임을 알아챈 것이다. 편은 사시사철 노름이 직업이라면 직업이었다. 특히 겨울철은 그에게는 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농한기에 다들 우유도일 하는 판에 그의 자취만은 종적 없는 종적을 재고 다닌다. 그 바쁜 그가 하필 이 신새벽에 조태평과 이렇게 조우를 하다니, 하필 만나지 말아야 할 곳에서 서로가 마딱뜨린 것이다.
< 아니 그게 아니구, 지난 여름 장마에 우리 구들에 물이 들어와서 그런지 고랫구녕이 맥혀서 당초 짚불로는 죽은자식 거시기 만지는 것만도 못혀서, 그래서 한번 쌘불로 처질러나 볼라고.. 근디 마침 여그서 자넬 만났네 잉.>
조태평은 어둠속에서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였다.
< 그렁게로 안됐재라. 앙그요.>
조태평의 쑥스런 변명에 편진수는 퉁명스런 말투를 내던지고 금새 어둠 멀리 사라져 갔다. 잠시동안의 일이였다. 이윽고 조태평은 편진수와 대면했던 자리를 뜨면서 편이 사라진 곳을 향해 캭 하고 마른 침을 뱉었다.
< 애이, 천하에 호로새끼 같으니라구.>
조태평은 재수 옴이 붙어도 이렇게 더럽게 붙을까 싶었다. 지개를 진 채로 다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분명히 꿈은 아니였다. 그렇다고 헛개비에 씌운것도 아니였다. 지금 그의 앞을 다녀간 이는 분명 편진수였다. 조태평은 매우 걱정스럽고 심란했다. 송씨네 문중산에서, 그것도 하필 편진수네가 산지기로 맡아서 관리하는 산에서 생솔가지를 쳐오는 터여서 엎친데 덮친격으로 임자를 만나도 제대로 만난것이다. 입안은 금새 소태 씹은 듯 쓰고 껄끄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면에서는 산림녹화 십계년 계획인가 뭔가 하며 내 땅 내 산조차 관리하려들며 소나무 한 그루 손 못대게 감시하는 마당에 그야말로 자신의 행위는 벌목이나 다름없는 범법 행위나 다름없지 않는가. 세무서에서는 보름이 멀다않고 밀주를 찾아 집안 곳곳을 뒤지는 판에 산림계 또한 소나무 가지를 낱낱이 조사하고 다니는 판에 그 사각지대를 몸소 만들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속말로 간땡이가 붓지않고서 이럴까 싶기도했다. 갑자기 조태평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편진수가 알아버린 이상, 이 상황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편의 올가미에 걸린 이상 섣부르게 발버둥쳐서는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낮동안에 마을 주변 야산으로 어슬렁거리며 하늘의 솔개비가 약병아리 찾듯 면의 산림계 직원들이 파수하고 다니다가 간혹 순경들까지 합세하여 감시 감독하는 마당에 편진수를 만나지 않았드라도 위험천만한 일일진데 날이 밝아 아닌말로 만에 하나 편진수가 이 일을 지서에 고발이라도 하는 날이면 콩밥신세가 되는 일은 기정 사실이였다. 사람이 살다보면 서툰 짓을 하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은 편진수와 가까이 지내지 못한 것이 정말로 후회스러웠다. 그렀다고 조태영으로선 당장 쫓아가서 구어쌂을 재간도 없었다.
생솔을 태우는 아궁이는 굴뚝의 연기만 보아도 알수 있는 법이다. 코끝으로 냄새만 맡아도 금새 확인할 수 있는것이 생솔이 타는 독특한 향이다. 그 연기가 진하게 모락이며 뭉개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흡사 하늘을 가릴 기세다. 조태평은 기왕지사 빨리 불을 지펴 흔적없이 태워버릴 작정이였다. 지푸라기를 한 움큼 말아쥐고 불을 붙여 아궁이 속에 밀쳐넣고 그 위에 생솔가지를 단처럼 차곡차곡 올려 놀으니 엮시 겨울 소나무 가지는 예상대로 이내 후두득거리며 불길을 피워올렸다. 부억 안은 마치도 조용한 봄날 콩볶는 가마솥처럼 타닥거렸다. 생솔이 타는 소리에 새벽 잠에서 깬 소금애피댁은 허겁지겁 부엌으로 달려왔다. 소금피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사색이 되었다.
< 시방 먼 일이다요. 이거이 솔가지 아녀라, 당신 실성했능갑소. 어짤라고 이렇쌌소. 야,! 어쩔끄나 이 일을..솔낭구 냄새가 진동허고만 이것이 다 어디로 가것소. 어쩌 안하던 짓을 이렇게 허요..>
< 어쩔끄나 어쩔끄나 이 일을.. 무담시로 그놈의 서당인가 지랄인가 내줘놓고 이게 먼꼴이다요. 이장도 그러제 이 추운날 하필, 당신은 무슨 덕을 볼라고 이렇게 무서운 짓을 저질러뿌렸소.>
소금애피댁은 치마의 앞섶으로 찔끔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 아 조용허소 이사람아.. 어쩔것인가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을.>
< 시방 내가 조용허게 생겼소. 날이면 날마다 면서기하고 순사들이 돌아댕기는 것을 당시은 못보요. 산토깽이 맹크루 눈이 빨게가지고 길가는 애문사람한티다가도 나무곁에서 갈쿠질혀도 안된다고 안합디까. >
낙심천만한 소금애피댁은 마음이 뒤숭숭하여 환장할 지경이였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생솔가지는 아궁이의 먹이가 되어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연기가 품어낸 솔냄새는 집주위를 맴돌았다. 어둠이 벗어지면서 날은 새어오고 아침은 너무도 조용히 찾아들었다. 새벽녘의 일들이 생각속의 격무처럼 남아있을 뿐, 아침은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조태평은 드는둥 마는둥 아침상을 말없이 내고 아내 소금애피댁도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상이 나가자 그는 다시 사랑채로 돌아왔다. 애상대로 방바닥은 절절 끓고 있었다. 방안은 온돌의 열기에 그동안 갖혔던 습기가 배어나오던 탓인지 퀴퀴한 냄새로 가득찼다. 그는 바닦에 깔아놓은 얇은 요를 걷어내고 그 위에다가 등을 붙였다. 몸은 금새 나른해지고 이마의 끝자락에 나붙은 눈거풀이 천근만근으로 늘어지며 내려 앉아 밤새 떨었던 몸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그때였다. 두 사내가 방문을 열고 후다닥 들이닥쳤다. 처음에는 바람에 의해서 문이 열리고 닫기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조태평의 눈 앞에 나타나 버티고 선 사내들은 읍내 지서에서 나온 순경들이였다. 그들은 팔둑에 산림녹화 애호기간이란 노란 완장을 차고 마치도 대공 간첩을 잠으러 다니던 폼으로 완전 무장한 채로 그 무거운 구두발로 방안을 휘저으며 조태평을 노려보다가 다짜고짜 달려들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양팔을 쌔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태평의 두 손에 수갑을 채우려드는 것이였다.
< 너 이새끼 조태평 맞지. 맛냔말이야 이새끼야? 임마 다 알고왔승게 허튼 수작마. 이 새끼가 겁도 없이!>
그들은 저승에서 염라대왕이보낸 사자처럼 처신하며 위엄을 떨었다.
< 이렇게 방구석에 숨어서 땅두더지 맹크루 하늘 가리고 엎드려 있으면 누가 모를줄 알았어. 우리가 조석으로 눈 뜨고 지키는데도 니가 야밤에 소나무를 베어가, >
순식간이였다. 조태평은 올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면서도 일이 이렇게 신속하게 닥칠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본능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어라. 이새끼좀 봐라, 몸을 빼네. 그래 세상 이치 알만한 놈이 남의 선산의 나무를 쑥밭으로 만들어놓고 아러고도 무사할줄 알았어.>
그들은 모든 일을 다 알고 왔노라는 듯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조태평은 편진수가 고자질한 것임을 깨달았다.
< 나뿐 놈의 새끼같으니, 내가 아무리 벌 받을 짓을 했어도 한마을에서 이렇게 고자질을 할 수가 있어!>
조태평이 중얼거리는 사이 두 사람은 조태평의 양팔 겨드랑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방문 밖으로 태평의 몸을 끌어냈다. 하등 이렇게까지 대할 일은 아닌것 같은데 오뉴월 삼복에 개 끌어가듯이 막무가네로 신발조차 신을 기회를 주지않고 끌고가는 이유를 알수 없었다. 조태평은 주변을 돌아다보며 아내를 찾았으나 소금애피댁은 아무런 인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아내는사랑채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취ㄱ ㅏ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내가 몹시도 서운했다. 이렇게 남편이 백주에 영장도 없이 순사들에게 붙들려 가는데 모른척하고 숨어버리다니 참으로 인정머리 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대문 앞에서 더이상은 끌러가지 않으려고 태평은 발버둥을 쳤다. 그때 그만 미끄러져 꽈당!하고 땅바닦에 엉덩방아를 찢고 말았다.
< 앗 뜨거!>
순간 조태평은 내꽃힌 엉덩이를 털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달아오른 구들장이에 하마터면 등을 딜뻔했다. 방안은 온돌의 열기로 가득 찼고 그의 몸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있었다. 그때 방문을 비그시 열며 얼굴을 디밀고 들어오는 봉두난발한 자가 있었다. 조태평은 잠에서 깨어서도 움칫했다. 윤덕삼이였다.
조태평은 덕삼의 말이 내심 찔러대는 기분이었지만 잠자코 있지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다 물론 고마울 사람은 유차만이였다. 덕삼은 태평이 돌다리도 두둘겨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은 말을 묻지않았다.
< 어이, 덕삼이? 올해는 사방공사가 날씨 덕분에 일찌감치 끝나뿌렸능가비네. 작년에는 날 좋아서 겨울 한허고 했잖여.>
조태평은 기회다시퍼 말머리를 바꾸었다.
< 나는이라우 이런 소리 허믄 배부른 놈이라고 누구헌티 디지게 욕 먹을 일이지만 밀가루라면 이제 신물이 나요. 우리 애들도 인자는 밀가루로 해논 음식이라면 처다도 안본당께요. 내가 배가 불렀능가 아니면 우리집 애들이 배가 불렀능가 모르지만 잘되었쓰라우 나헌티는...또 그러고 아닌 말로 추울 때는 일이나 된다요, 깡통 들고 댕기면서 높은 놈들 모르게 불이나 피워쌋고 명색이 나라로부터 밀가루 일망정 노임 받고 일하는 놈들이 그 모양이니 사방공사가 아니라 파방공사랑께요. 미국놈들이 먹을것이 얼마나 흔전만전 한지는 몰라도 무상으로 원조받은 것이 아니믄 뭐것쓰라우, 위에서 시키는 놈들도 미친놈들이고 엄동에 마른 땅에다가 극적극적 땅두더지 지나간 자리 맹크루 괭이질 해놓고 아까시아 씨나 뿌려놓는 것이 그것이 무슨 사방공사라요. 앙그요, 이장님, 태평 형님 나 말이 틀렸소 .>
덕삼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산림녹화 일환으로 국책사업으로 지원하고 있는 사방공사가 순전히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논조였다.
< 듣고 보닝께 말 되네, 그려 덕삼이 자네 말도 일리는 있네. 그러나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그 덕분에 밀가루는 원없이 안타먹었능가 이사람아>
< 긍께 내 말이 그말이 아니요. 사실적으로 진작에 종쳐뿌렸어야 할 일인디 우리 주변이 또 해안지대 이고 겨울 일을 만들어 누이 좋고 매부 좋자고 꾸민 일인디 이번 겨울은 완전히 꼬리 내려뿌렸땅게요. 아 작년 이맘 때는 몸만 나가있어도 애나 어른이나 하루에 밀가루 반포가 왔다갔다 안했소.>
< 열내지 말소 이, 떡고물 없는 떡이 어디 있땅가. 그런 세상의 이치를 자네가 떡고물만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도 섣부른 소견이고, 그러고 자네도 그일 실컷 댕겨놓고 남에 말하듯이 허믄 누가 들으믄 눠 침뱉기라고 허네. 일이라는 것이 하다보면 백푸로 맘에 맞을까 싶네만 그런다고 어쩔것인가. 풍치림 조성한답시고 아카시아 심는것이 무슨 산림녹화이것능가..일본놈들이 우리땅 망쳐묵을라고 가져와 퍼뜨린 씨앗인 줄도 모르고 지랄 깝죽거리고, 그놈의 나무는 심어만 놓으면 다른 나무들은 얼씬도 못허쟎아 그것이 바로 목장지패인것이여.. 그렁게 일폐롱하세.>
유차만의 말에 덕삼은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가로 저었다.
< 이장님도 나 말은 시방 사방공사 일 자체를 가지고 하는것이 아니랑께요 그러네. 그 일은 감독도 필요 없어라우. 목소리 큰놈이 다 해묵는 세상이 그곳이랑께요. 해풍 맞아가며 콧물 질질 흘려가며 하루 종일 괭이 들고 댕기는 놈헌티는 밀가루를 줘도 더 줘야 될것 아니요. 씨앗 들고 텃밭에다가 닭모이 헤쳐주듯이 뚝뚝 떨어뜨리고 한눈 팔 사이 냅다 어디가서 있다가 희만 하면 나타나는 놈들 허고 어떻게 같으다요.. 저그들이 언제부터 권련 피웠다고 입에 꼬나물고 서있는 것을 보믄 배알이 꼴려서 원 참, 내 말은 그말이라우.>
윤덕삼은 그러니 더이상 밀가루 타먹는 일은 기분이 나빠 못해먹겠다는 투였다.
< 그렇다고 자네 내념 봄에는 사방공사에 안다닐랑가>
조태평이 넌지시 앞질러본다.
<고것은 그때가서 생각 해볼 일이지라.>
< 근디 말이네. 산판에 편가도 나다니던가>
조태평은 덕삼의 말끝을 쫓아 편진수의 근황을 물었다.
< 편진수요, 아이고 내 친구지만 그 사람이 우덜 하는 일 할사람 같으요 성님도, 사흘 쌂은 호박에 이빨 안들어갈 어림에 반푼도 없는 소리지라., 근데 요새는 통 안보입디다. 엊그제 양지마 광일이 아제가 그러는디 아직도 노름에 미쳐가지고 돌아디닌다등만 어디 지버릇 남줄랍띠어.>
<그리어, 나도 금시초문이네.>
유차만도 조태평에 앞서 편에 대한 소식을 잊고 있었던지 궁금해 했다. 그도 원평노인의 얘기를 소상히 들어서 그가 요주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 얘기를 혀도 알고 안혀도 알고 보나마나 뻔할 뻔자 아니것소. 그자가 우리 마을에 이사오기 전에 그 뭐여 물아래에서는 솔천히 괜찮게 살았습디다. 거그서도 노름으로 재산 죄다 까먹고 쫓겨오다시피 산판으로, 그것도 죽은 본촌양반이 먼 집안간이라고 송씨네 문중에다가 공들어서 산판에다 들어놓고 세앙답 벌어먹게 했능가비등만..>
윤덕삼이가 말을 안해도 편진수의 행적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였다. 편진수는 한마을에 살아도 늘 물 위에 걷도는 기름처럼 마을에서는 이방인이였다. 그와 말을 해본 사람들은 쉽게 그의 퉁그러지는 말투에 그만 상실되어 말길을 잃기 십상이였다.
<그렇게도 산판에 데려올 위인이 없었능가비라우 참말로. 편가도 그러쟤 저그 집안 어른이 앞장 서줬으면 최소한 체면은 생각해야 허능것 아니요. 그것도 본촌양반으로 봐서는 유지라면 유지고 마을 인물로 봐서는 흠 없는 분이였승께 어찌됐껀 송씨 문중에서 허락까지 받아 살게 해줬을 턴디 영 싹수가 글러서 그 사람 일가들도 누가 내 동기간이요 허고 말이나 내놓는다요. 천만이지라우 동내만 추해졌지라우. 돌아가신 양반 탓하기는 무엇하지만 얄궂게 허구헌 날 남에 상가집 앞에서 어슬렁 거리는 거지발싸게 같은 인간을 친척붙이라고 끌어다 놨으면 지가 알아서 개과천선 해야지 밤낮없이 줄장 바람난 숫개 맹크루 노름에 미쳐 나다니면 동내 위신은 얘기 헐것도 없고 친구인 멀쩡한 우리들까지 욕먹는당께요.>
유차만과 조태평은 윤덕삼의 말에 묵묵부답 하며 한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사람 얘기 그만 허세 덕삼이, 내가 그 사람 흉볼라고 자넬 여기 모시고 왔능가. >
잠자코 있던 유차만이 편진수의 흉자락만 펼쳐놓는 덕삼의 말꼬리를 자르려 들고있었다.
< 누굴 막론하고 흉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능가만, 나도 편진수를 좋게는 안보네. 그러나 어찔것인가 그런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 아닌가.>
< 어메, 이장님, 아이구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요 이. 생각의 차원이 원 우리하고는 겁나게 틀려뿌리요. 나는 흉만 보고있는디 이장님은 차후 대책까장 내다보는 선견지명도 있소 이.>
덕삼이 약간은 퉁그러진 어조로 유차만의 말을 막음 하자
< 시그럽네 이사람아,>
차만은 그만 덕삼의 말끝을 잘랐다.
< 알것소, 이 일은 이만 각설 합시다. 그런디 내가 성님 따라온 목적은 사실은 딴데 있어라우, 감도 안잡이요.>
< 거시기 말이요, 오늘 날은 춥지만서도 별일 없으면 우리집 돼야지나 해치웁시다. 지난 봄에 알미장에서 사다놓은 것이 먹기는 육시럴나게 처묵어도 종자가 그런가 크지는 않고 맨날 봐도 죽 떠먹은 자리처럼 그대로랑께요. 펄써부터 해치웠으면 했지만 장사꾼한테 얘기 해봤자 새끼끔도 못받게 생겼고 그냥은 뭣허고 헝께 갑오시끼로나 안헐라요.>
덕삼은 마침 오늘이 그의 돼지를 처분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둔 터였다.
< 참, 자네도 자네가 자네 물건을 갑오시끼라고 내놓고 나서는 것은 우리 마을 인심은 아니네.>
조태평이 덕삼의 의중을 가볍게 떠보려 들었다.
< 하하, 태평이 성님도 그냥 희사해 버리라구라우, 그러믄 나야 인심 얻고 좋지라. 그런디 우리 마누라쟁이가 자뿌라지는 꼴을 어떻게 본다요. 생 난리를 칠것인디.>
< 에끼, 이물없어 허는 소리네. 아마 못나가도 예순근은 나가것쟤.>
< 글씨라우, 큰 개 턱은 안될랍디여.. 긍께 나허고, 두분 성님허고, 샘골 광수 아제, 성내 양반 그렇게 다섯이면 안되것소, >
< 자네 집 앞 최영감님은 어저고.>
< 참 그러네요.>
< 그 양반 되지 멱 따는 소리 듣고 집에 가만이 있을 양반은 아닐터고, 그냥 쫓아와서 돼야지 거시기라도 내놓라고 야단할 판인디. 그리고 동네 사랑은 어쩌고..>
이장은 덕삼이보다 앞서서 일의 선후를 가늠짓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혀 봉께로 일이 그것이 아니네여, 당장 최씨 노인네 식구가 아홉인디 갑오시끼를 하드라도 양으로 보믄 우리보다는 배는 주어야 될것인디.. 그러나저러나 덕삼이 자네는 안사람한테 야그는 끝난것인가. 이 일은 그것이 젤 중요헝께.>
<아이고 형님도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섭한 소릴 허쇼? 우리 집사람은 진작부터 싹수가 글렀다고 없에 버리자고 성화랑께요. 내가 신경도 안씅께로 이제 지쳐버렸쓰라우, 그리서 이참저참 미뤄온 것인디 더 이상 내비 둬봤짜 쌀겨나 축내고 신경 쓰는 일 뿐이지라.. 그러고보믄 애초에 내가 엄청 잘못혔으라우. 마누라 말도 들어야 허것씁디다.. 우리 식구가 눈썰미는 있는디 처음에 골랐던 그놈으로 사가지고 왔어야 허는디 내가 우겨각고 바꿧등만 안 글러버렀소, 그때 말을 들었으믄 탈이 없을 것인디.. 아 글씨 우리 마누라는 어떻게 알았는지 되지는 새끼 때 앞다리하고 주둥이를 보믄 안다고 허드랑께요., 그것이 내가 실수였지라. 그래서 돼야지 각고는 시방 내가 뭔 말을 못허게 생겼당게요.>
윤덕삼은 그의 돼지가 순전히 자기 잘못으로 키우게 된 내력을 몹시도 후회하고 있었다.
< 그렁께 마누라 말도 들을 때는 들어줘야 허능 것이여.. 오늘 같은 날로 봐서는 미안스럽게도 다행이것지만서도 남자가 매번 올타는 생각이 들어도 큰 일 없는 한 마느라한테는 한번씩 져주는 것이 좋은것이여.. 여자는 그럴 때 사는 맛을 팍팍 느끼는 것이랑께.>
이장의 말에 녹녹해진 덕삼의 기분은 금새 시작이 반이되고 있었다. 태평의 집을 나온 세사람은 덕삼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덕삼은 아내에게 연락을 하여 성내양반을 불러들였다.
<이장님도 계시네, 밀도살을 혀도 괜찮을랑가 모르것네. 하나를 알아도 이장님이 더 알것이닝께..>
성내양반 오춘배 씨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였다 그는 금새 달려왔다. 그는 집에서 쓰는 숫돌을 손에 쥔 채로 유차만을 처다보며 씨익 웃고 우물가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숫돌 위에 물을 얹히고 식칼을 문지른다.
< 조용히 해치우면 어찔랍디어. >
윤덕삼은 중얼거리듯 오춘배씨를 향해 혼잣말을 내뱉고 작두물을 퍼올리기 위해 양동이를 우물가에다가 옮겨놓았다.
< 그러믄 조오치만, 잡어먹히는 것이 시끄럽게 허닝께 문제지>
오춘배씨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칼질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듯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혀 춥지도 않은 잘 무장된 옷차림이었다. 강치로 인해 얼붙은 작우물은 덕삼의 아내가 이미 녹혀논 뒤라서 땅속 깊은 곳에서 품어나오는 물은 추위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 아따 일찌감치도 모이셨네.>
이때 또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샛터의 김광수씨였다. 귀달린 북방색 방한모를 눈섭 위까지 깊이 눌러 쓰고 그는 칼을 가는 오춘배를 보고 입이 함지박만 하여 싱글거리는 말투로 다가왔다.
< 얼라, 돼야지가 임자 만났네여.. 칼을 봉께로 소도 잡것는디 어찌되었껀 일은 준비가 제일잉께. 앙그요 성님,>
< 그러는 자네는 먹을 준비는 잘 되었능가. 돼야지를 잡으러 왔으면 막걸리라도 한병 사 들고 와야지 날씨가 추워도 그렇지 주머니에다 손이나 콕 쑤셔넣고 강건너 불구경하듯 그렇게 서 있을 것이여.>
오춘배씨는 김광수를 보자마자 마음에 없는 말로 속을 내질렀다.
<내가 그럴쭐 알았소. 어서 하든 일이나 허시요, 그렇게 모나게 나온다고 내가 눈이나 깜짝 할줄 아시요>
< 참, 내가 뭐라고 혔어, 자네가 제발 저린 격인가보네>
< 고것이 야단 아니고 뭐라요>
김광수씨는 자기의 옷차림이 동내 밖으로 외출나가는 것처럼 말쑥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조금은 겸연쩍었다.
덕삼이이네 부억에서는 조태평과 유차만이 새끼를 비벼 꼬고 덕삼의 아내는 외양간에서 무쇠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 이장이 같이 있승께 우리가 이런 일을 혀도 맘은 놓이네만, 사적으로 밀도살 하는 것은 분명 법에는 저촉되는 것은 틀림 없것쟤.>
오춘배씨는 김광수에게 넌지시 떠보는 말투로 아까 자기가 뱉은 말을 다시 내놓았다.
<나는 그런 법은 잘 몰라라우. 이장이 어련히 알아서 잘 허것지라, 아따 성님도 뭐슬 그렇게 처다보며 그러요..>
김광수의 얼굴을 한동안 빤히 처다보며 오춘배씨는 씨익 웃고 눈길을 다시 내렸다.
덕삼이네 돼지는 오춘배의 손에 의해서 반시간도 안걸러서 비명횡사해 갔다. 물론 조태평과 유차만이 새끼로 다리를 묶는데 도와주었을 뿐, 그는 고수답게 일사천리로 능숙하게 물건을 다루었다. 식칼로 털을 밀고 내장을 씻어내며 돼지의 몸통은 또랑집 최노인 몫까지 육등분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머리와 내장은 가마솥에서 푹푹 쌂아지고 있었다.
< 내가 갔다가 올껄 그랬나.. 그래도 덕삼이 자네가 후딱 댕겨오면 빠를껀디. 하필 나이 자신 양반을 신부름 시킨 꼴이 되었으니..>
최노인이 아직도 오지않자 유차만이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 아니 최영감님이 언제 오셨다고,,>
< 아까막시 대문을 들어오시다가 말고 당신이 술이라도 사와야 하신다며 그 길로 나가시등만 깜깜 무소식이네. 양조장을 갔다가 왔어도 열번은 더 다녀왔을 것인디..영감님이 눈치는 빠르셔가지고, 하기사 눈치 빠르면 절간에가서도 젖국물 얻어먹는다등만.. 하여간 우리 마을 장유유서는 엿사먹은지 오래되었승께..>
자리를 벌떡 차고 일어선 유차만이 대문 앞을 나가자마자 그때야 최노인이 하얀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 아이고, 봉식이 아부지도 젊은 사람들 놔두고서 무슨 양조장까장 댕겨오시능 가비요..>
이장은 달려가서 두 손으로 최영감님의 손에 든 막걸리 통을 덥썩 뺏다시피 받아 쥐었다.
<진짜루 막걸리가 떨어졌능갭띠어..하도 안오셔서 우덜도 술을 맹글어 오시는줄 알았지라..>
<그게 아녀, 막걸리거 곧 온다기에 이제나 자제나 기다렸등만 날이 추운께 배달허는 놈이 꾀를 부린 모양이여.. 나주댁만 나헌티 애믄 소리 들었쟤.. 소주를 사올까 허다가 그만..>
< 잘 하셨소. 소주믄 어떻고 막걸리믄 어떨랍띠어만.. 다행이지라, 서울 사람들은 막걸리보다는 소주를 더 먹는다고 안합디까.. 괴기에는 막거리보다는 소주가 더 제격이지만 그것도 습성이 된 사람들 말이지라.. >
연장자의 행보가 마음에 걸렸던지 다들 최노인이 나타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대문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일시에 파안으로 혈색이 펴졌다. 삶아진 돼지머리와 내장은 소반 위에 올려지고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어올렸다. 도마를 놓고 역시 오춘배씨는 먹기 좋게 쓸어놓고 다들 술잔을 받아 앞에다가 놓고 한점씩 왕소금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 때 최노인이 먼저 한 마디 들고 나왔다.
< 이런 자리는 늙은이는 빠져야 되는디.. 덕삼이 자네 땜시 이런 맛이나 보게 되는것 아닌가..>
< 먼 말씀을 요 어른도. 이놈의 돼지가 잘만 커줬으면 우리 차지나 되었을랍띠여.. 지가 보신허고 들것다고 저렇게 모닥거리며 크다가 잘 되었지라.. >
윤덕삼은 최학봉 노인의 말이 감회 아닌 감회의 느낌으로 대꾸를 했다.
< 이장도 이런 자리를 같이 해줘서 고맙고. 비록 코 앞에 산다고는 하지만 나같은 늙은이를 끼워줘서.. 다들 한잔씩 드시게.>
최노인이 대접을 든 손을 번쩍 들어 건배를 제시하자 바로 이때, 누군가가 정지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편진수였다. 아무도 편진수가 나타날찌는 예측하지 못했다.
< 아이구, 다들 여기 계시네.. 돼지 맥 따는 소리 쫓아서 찾아왔는디 내가 잘못 들어왔남..>
모두들 편진수의 출현에 예기치않은 듯 바라보자 편진수는 조금은 겸연쩍었다. 그는 잠에서 들깬 사람처럼 부시시한 옷차림으로 두손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엄동에 갑오시끼 허시능구먼, 이거 너무 하능거 아닌지 모르겠네. >
편진수는 부억으로 들어오자 마자 삐뚜름한 말투로 분위기를 흐려들고 들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를 보고 영문을 몰라하는 이는 누구보다도 조태평씨였다. 그것도 평소에 상판이라고는 전혀 내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처럼 낄 자리 안낄 자리 안가리고 나타난 것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성 싶었다.
< 근디 누구드라, 낯은 많이 익는디..아, 선판에 산다는 돌아가신 본촌양반 조카아니셔, 자주 안봉께로 얼굴한잘라 잊겄네 그려,>
최학봉 노인이 편진수를 보고 하는 말이였다.
< 예 어르신 안녕하셨능게라우>
< 마침 잘왔네. 십시일반이라고 안혀. 같이 한잔 허세. 근디 요새 통 안보이던지 외지에 나가 있었능가..>
< 얘, 어른도 지가 외진 곳에 사는디 부락에 내려올 일이 있어야지라우>
< 그건 그려, 나는 눈 할라 어두어각고 가까이서 안보믄 잘 모르네.>
< 아무래도 나이드시면 그전만은 못하시겠지라.>
최노인과 편진수의 말이 오고가면서 금새 자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최노인은 편진수에게 술잔을 내밀었으나 편은 한사코 손사래치며 사양했다.
< 저는 요새 술 끈었으라우, 요것도 가끔씩은 끈어주어야 한답디다.>
<정이나 글믄 모르지만서도 이것도 음식잉께 먹을 수 있으믄 한잔 받으소, 아조 끈은 것만은 아니락허믄.>
최노인은 거듭 편진수의 앞섶에 술잔을 내밀었다.
< 또 어른 땜시 작심사일 할랑가비요, 에라 저도 모르것소>
편진수는 권하지 않았으면 서운할 양으로 넙죽 잔을 받아들었다. 덕삼은 빤히 처다보다가 편의 농짓에 내심 속이 뒤틀렸다, 그래 술이 없어서 못먹는 자식이 무엇이 아까워 작심 삼일이냐 미친 놈아, 편진수의 의뭉스런 말짓을 들으니 이 말이 목 구멍 속엣 ㅓ튀어나오려 했다. 그러나 흔연스럽게 거들었다.
< 나는 자네가 집에 없는줄만 알았네, 하도 안보여서.. 그래서 모른척 헌거여>
< 아따 입에다 침이나 좀 바르고 말 허소, 자네가 나에 대해서 그만치 무관심하다는 증거여 이 사람아, 생각이 있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불렀것쟤. 내가 이렇게 제발로 찾아오기 전에>
편진수는 윤덕삼의 말에 용수철 같이 튀어 올라 금새 서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말이여, 이장 양반 있승게 이물없이 허는 말인디 이것은 밀도살이 아니여.>
편진수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의 방향을 바꾸어서 시비조로 윤덕삼을 몰아세웠다. 분위기는 금새 냉냉해지고 말았다. 유차만이 잠자코 있다가 거북해진 속을 끌어 매고 고쳐 앉으며 편진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첫댓글 내 어릴적 고향의 냄새나는 글 잼있게 읽고 또 잠시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듯...뒷뜰의 대숲 바람이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