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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 평화방송 다시보기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 백주간 제 3 회
구약과 신약 1부
이번 주는 옛 계약(구약)과 새 계약(신약)의 특징에 대해 살펴 봅니다.
1. 시나이 산과 성 카타리나 수녀원
구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 시나이 산에 대해 살펴봅니다. 그리고 이 시나이
산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성카타리나 수도원'과 이 수도원에서 발견된 그 유명한
'코엑스 시나이티쿠스'와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도 알아 봅니다.
2. 세 번의 응답과 계약 체결
고대 근동에서는 말로라도 세 번을 이야기하면 법적인 효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으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구약을 체결하기 전에도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세 번을 물어 봅니다.
3. 율법으로서의 모세오경
모세오경은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해당합니다.
땅을 약속하신 하느님은 계약의 조건으로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 하십니다.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그 율법을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할수 있습니다.
1)계약의 책:인간과 인간사이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탈출기 20,22-23,33)
2)사제 법전:인간과 하느님의 법을 다룬다.
(탈출기 후반,레위기,민수기 10장까지)
3)신명기 법전:신명기 12-26장
그리고 이 전체 법전을 아우르는 제목이 바로 십계명인데,
모세오경에는 2가지의 십계명이 있습니다.(탈출기 20장, 신명기 5장)
4. 기타
- 그렇다면 새로운 계약인 "신약"은 누가,무엇을 내용으로 맺은 계약인가?
- 교회는 건물인가?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성서 백주간 제3회 구약과 신약 1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시나이(Sinai)라는 장소에 관해서 계속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워낙 성서에서는 많이 접하지만 실제로 성지 순례를 가거나 그러지
않은 경우에는 조금은 잘 접할 수 없는것 같아서 먼저 시나이에 관련된 사진
자료를 몇 가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장을 봤지만 하늘, 산 뿐 뭐가 보이는 게 없지요?
아마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그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거 외에는 볼게 없으니까,
하느님에게 집중할 수 있는거지요.
제가 본당 신부를 하면서도 요즘 젊은 이들이, 꼭 그럴 것 같지 않은 친구들이
이상하게 성당에 잘 안 나와요. 굉장히 열심했던 그런 친구들이.
한편으로는 이해가가요 세상이 너무나 재미있는게 많은 거예요.
하느님 생각을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은 조금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은수자들이 항상 어디로 가냐하면, 광야로 갑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반대로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 중에 한 명이었던 '까를로 까레또'
(1910-1988)라는 분은 '도시의 광야'라는 책을 썼습니다.
('도시의 광야'저자, 샤를 드 푸코 작은 형제회)
그 내용은 뭐냐하면 우리가 도시 안에 살면서도 마치 광야 처럼 살 수 있다.
꼭 도시를 떠나서 어디를 가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 안에 살면서도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다.
이 도시라는 곳도 어떻게 보면 광야다라는 그런거지요. 뭐 광야는 아닌지
모르지만 밀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길을 걸어 가다가 누구랑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하십니까? 피하죠?
지하철에서 앉아 있는데 "저 사람 참 옷을 특이하게 입었네!"라고 보고 있다가
그 사람이 나랑 눈이 딱 마주치면? 피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 여름에 썬글라스를 좀 짙은 거를 끼고 이렇게 보세요.
그럼 의외로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보는지 모르니까 피하지 않아요. 의외로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있어요. 하지만 눈이 마주치면 피합니다.
그래서 "길을 걸어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마치 밀림속을 홀로 걷는
어떤 맹수의 모습과도 같다." 라는 것이 오늘날 '안스로 폴로지' 곧 '일과'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아주 중요한 관찰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살수록 오히려 홀로 있는것이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건 뭡니까?
우리집에 밥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그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 말이지요.
그게 싫은 겁니다. 오히려 도시에 와서 익명성을 즐기는 겁니다.
내가 친하고 싶은 소수의 사람들과 친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나랑 무관하게
살아가는 그런 어떤 익명성이 보장 되는 것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 아니라
하나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도시 한 가운데에서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고, 또 그 안에서 뭔가
그 흐름을 반대로 살아가자라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노력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힘든 노력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튼 그런 도시 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광야라는 책은
제가 학생 때 본 책이니까 벌써 몇십 년이 된 책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아니면 여러분들에게 추천해도 좋은 책인 것 갑니다.
시나이산은 지도상으로 보자면은 다음과 같은 위치 입니다.
이집트에서 출발합니다.
이집트 탈출 경로와 시나이산은 학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마지막 느보산 피스카 봉우리에서 모세에게 하느님이 가나안 땅을 보여 주면서
"너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내가 너에게 약속한 땅이 저 땅이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굉장히 섭섭 했을 것 같애요. 차라리 보여 주지를 말던지.
보여주고 하지만 너는 못간다. 이건 굉장히 어떻게 보면 섭섭한 얘기 같기도
합니다. 제가 성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불경스러운 생각을 많이 해요.
아무튼 시나이 산의 정확한 위치는 아지까지는 잘 모른다라는 겁니다.
따라서 시나이산이라는 특정한 산이 있고, 그곳에 가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만나서 거기서 계약을 맺었다라는 것보다는 요즘엔 신학적인 의미를 더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곳이라면 어디든 시나이 산이다."
우리가 꼭 예수님의 어떤 마지막 수난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한 곳이라면 어디든
예루살렘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위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학문적으로 성서 지리학적으로 정확히 시나이 산의 위치를 사실은
모릅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곳이라고 생각해서 이곳에 가면은
카타리나 수도원이라는 그런 수도원이 이곳에서 있습니다.
'엘라하 제벨 무샤'라는 아랍 말 입니다.
'제벨' 그러면 아랍말로 '산'이라는 뜻이고 '무샤'는 그러면 누굴까요?
모세입니다.
모세 산 근처에 있는 엘라하 평원은 시나이 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평원입니다. 이 평원에서 아마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이 캠프를 치고,
모세가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 평원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곳으로 기억을
합니다. 여기서 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은 '와디 엘 데이르'라은 곳인데요.
여기에서 '와디'라는 아랍말은 계곡이라는 뜻입니다.
'엘 데이르'에서 '데이르'라는 말은 수도원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수도원 계곡입니다.
제벨 무샤 근처에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인데 교회 문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위치입니다. 잠시 후에 자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와디 엘 데이를 거쳐서 수도원으로 가는거죠. 성녀 카타리나에게 봉헌된
수도원이지요. 카타리나 수도원은 본래는 많은 수도사들이 살았던 수도원입니다.
중세 때에는 한 300명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요즘은 몇명이 살까요? 최근 15명까지 줄어 들었는데 이 수도원은 그리스
정교회를 따르는 수도원입니다.
그리스 정교회 수사들이고 모두 그리스쪽에서 온 사람들이
아마 거의 99%이고 그리스 정교회는 아직도 그리스 말로 전례를 하거든요.
그런 어떤 그리스 정교회에 속한 수도원 입니다. 하지만 이 안에 도서관이
하나가 있는데 그 도서관의 규모가 세계 2위 입니다. 세계 1위는 어디일까요?
당연히 로마 바티칸 도서관입니다.
카타리나 수도원 도서관에는 많은 고대의 수사본들이 여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왜냐하면 여기에서 수사들이 모여서 뭐 했을까요?
고대 수사본(필사본) 중 두루마리가 아니라 책으로 제본된 것을
코덱스(Codex)라고 부릅니다.
고대 수사본들을 저희들이 제본된 경우는 코덱스(Codex)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와 같은 코덱스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일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 가장
중요한 문헌이 있고, 오늘날 신약 성경을 재구성 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헌
중에 하나인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라는 문헌도 19세기 중엽에 여기서 발견을
하게 됩니다.
※ 코덱스 시나이 티쿠스( Codex Sinaiticus )
350년경 전후에 제작돼, 19c 중엽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됨.
당시의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필사되어 있어 신약성경을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활.
그런데 그것을 발견 했던 사람이, 그 학자가 그것을 발견하고 나서
수사님들에게 그것을 좀 빌리겠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가져가서는 돌려주지를 않습니다.
그 코덱스 시나이티쿠스가 지금 여기(카타리나 수도원 도서관)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나중에 영국에 가시면은 대영 박물관 입장료 없습니다. 무료입니다.
들어가셔서 바로 왼쪽으로 꺽으시면은 긴 방이 나오는데 거기 마지막에
가보면은 코덱스 시나이티쿠스가 있고 거기서 두 세발자욱만 더 가면은
훈민정음이 그 방에 있습니다.
아마 위치가 바뀌지 않았을 꺼예요. 바뀌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 그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를 이 수도원에서 빌려
간 사람은 자기가 그 수사들이 겨울에 추우니까 겨울에 불쏘시개로 무엇를
쓰려고 그래서 보니까 그게 중요한 문헌 같애서 돈주고 사왔다라는 게
그 학자의 주장이고, 반대로 카타리나 수도원 측에서는 빌려 줬다라는 게
이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카타리나 수도원에 가면은 그 식당 벽에 액자가 하나 걸려
있는데 그 액자에 뭐가 담겨 있는가 하면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를 내가 빌려
가고 곧 돌려 주겠다"라는 그 학자의 약속이 문서로 보관이 돼 있어요.
그걸 가지고 여러 해 여러 가지 소송을 한 것 같은데, 하여튼 결국은
지금은 대영 박물관에 가서 보관이 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코덱스가 갖는 가치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 그 코덱스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신약성경의 내용은
조금 달라졌을 겁니다. 그 코덱스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의 굉장히
많은 내용들이 안정적으로 어떤 뭔가 기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카타리나 수도원은 해발 1,570미터 정도에 위치 합니다.
그리고 '제벨 무사'(시나이 산)의 최고 고도는 2,286미터니까 수도원에서
정상까지 올라 가는데 빠른 걸음이라면 약30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 맨 처음에 경당을 지은 사람은 헬레나라는 로마의 귀족입니다.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250 - 330 )가 건립함.
헬레나 성녀는 굉장히 많은 중요한 성당을 지었는데, 예를 들어 베들레헴에
예수탄생 성당이라든지 그런 여러 성당을 지었고,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하는 과정까지 이 헬레나 성녀의 그 업적은 상당히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330년 경에 그러니까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에 거의 근접해서 그와 같은
첫 번째 성당을 세우게 되고, 본래 그 성당을 세우게 된 근본적인 것은
이 성당이 세워진 근처에 가시덤불이 하나 있었대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게 바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탈출기 3장의
그 가시덤불이다라는 주장을 해서 지금도 그 수도원 안에 그게 보존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타고 있는게 아니죠! 하느님이 더 이상 거기에 현존
하시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게 거다"라는 그와 같은 성서 고고학적
그런 증언에 바탕을 두고 헬레나 성녀는 거기에 조그만 경당을 지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유스티니아 황제가 이 경당 주위에다가 아예 성벽을
둘러 칩니다. 어러가지 이유와 도적들의 침공이 있으니까.
그곳에 성벽을 둘러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카타리나 성당이 정말 유명하게 된 것은 십지군 전쟁 이후입니다.
십자군 전쟁 때 많은 십자군들이 이곳에 대한 많은 기록들을 남기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는 세계의 3대 순례지가 됩니다.
로마, 예루살렘, 시나이라는 3대 순례지.
요즘도 왜 성지 순례 가시는 분들이 한번씩은 시나이산에 가보시게 되는 그런
하나의 교회 전통입니다. 물론 요즘 우리가 가는 거는 성지 순례는 아니지요.
순례라는 것이 Pilgrimage의 기본적인 뜻은 걸어 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지 순례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뜻은 내가 잘못 한 것에 대한
보속이라는 의미입니다.
순례를 간다는 것은 내가 정말 뭔가 보속과 희생, 고통이런 거를 좀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순례의 본래의 의미다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때부터 중세 때 까지 성지순례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례의 기간 도중에 목숨을 잃기도하는, 그런 내가 정말
하느님께 보속하는 굉장히 중요한 보속의 행위중에 하나였습니다.
아무튼 그런 십자군 전쟁 이후에 이곳이 유명해 졌습니다.
성카타리나 수도원은 1260년 교황 이노센트 4세 때 공식적으로 인정됐고,
바시리우스 성인의 수도회 규칙을 따른다.
이 수도원의 규칙이 뭐냐? 우선 생활 만 한번 알아 보지요.
02시 30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04시부터 07시 30분까지 아침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저녁기도는 15시부터 17시까지 합니다.
그리고 저녁기도가 끝난 다음에 식사를 하는데 하루에 한끼만 먹습니다.
그 수도회 안에서는 그리스말로 전례가 진행이 되고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약 삼.사백명의 수도사들이, 지금은 15명 정도의 수도사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수도사들은 주로 공부하는 수도사들입니다. 주로 텍스트들을 옮겨 적고
그러면서 텍스트를 연구하는, 그럼 누군가가 먹여 살려야 겠지요?
누가 먹여 살릴까요?
이게 정말 아이러니인데,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무슬림 종교의 베두인들이
이들을먹여 살립니다. 근데 그게 아주 오래된 그와 같은 전통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여기다가 수도원을 만들면서 그 수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베두인족들의 마을을 주변에 모여 살게 하는데 이 사람들이 전통에
의해서 의해수사들을 공양해야 하는 걸로 생각을 하고
오늘날까지도 그걸 한다고 해요.
그런데 정작 그리스도교 교인들은 아니예요. 이슬람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거는 우리에게 맞겨진 일이니깐 지금까지 한다는 어떻게 보면 조금
아이러니 같기도 해요.
베두인족들에 의해서 수사님들이 기본적으로 생활이 유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카타리나 수도회에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종소리입니다.
이 종은 러시아의 황제가 1871년 기증을 한 것인데 종교적인,
전례적인 행위가있을 때만 그와 같은 것들이 행해집니다.
그리고 이 안에는 모세의 샘(이트로의 우물)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왜 모세가 도망 가가지고 우물가에서 이트로의 딸들이랑 만나서
그 중에 하나랑 결혼을 하지요? 그 우물도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가시덤불도 여기 있고, 그 우물도 여기 있고
뭐가 이리 잔뜩 몰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보니까 다 한 동네였다라는
그와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다음으로는 이곳에서 아주 특징적인 것이 도서관인데, 그 도서관에는
수사본들이 약 3천개 가량이 남아 있습니다.
대단히 많은 숫자로 보시면 됩니다.
오늘 날에도 오랜 고문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게 꿈이긴 한데 이 수사님들이 잘 개방을 안해주고 허락을 안해
줍니다. 왜냐? 옛날에 도난 사건이 한번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카타리나 수도원 삼나무 정원입니다.
이 정원은 본래는 무덤자리입니다.
수사님들이 죽으면 무덤에다 묻고 하는데 요즘은 이제 그 무덤 자리에서 뼈를
다 파가지고 그 근처에 있는 다른 성당의 지하 무덤 쪽으로 다 옮겨 놨고,
지금은 정원의 용도로만 사용을 합니다.
자! 이곳에서 있었던 시나이 계약에 관해서 우리 조금 더 생각을 해 봅시다.
시나이 산을 구약성경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뭐라고 부릅니까?
'호렙'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본래의 이름은 시나이였던것 같은데 왜
시나이라고 안부르고 호랩이라고 부를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나중에 접하게 되는 가나안 민족들과 다른 고대 근동의
신화 안에서 '쉰'이라는 '달의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이랑 이게 비슷하니까
그 이름을 더이상 안쓰고 호렙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써가지고 그곳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아무튼 그런 호렙 또는 시나이산은 탈출기 33장 6절부터 등장하게 되고
그리고 지금은 제벨 무샤라는 아라비아말로 불리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탈출기 19장 2절에 등장한는 그 대목부터 시작을 합니다.(19,1-2)
그래서 진을 치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와 함께 백성의 다른 원로들과 함께 모세를 부르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19,7-8)
따라서 모세는 누구에게 전한거지요? 백성의 원로들에게.
그런데 대답하는 거는 원로가 아니라 백성의 대답합니다.
그 대답이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그리고 24장 3절을 한 번 봅시다. 그리고 24장 7절을 봅시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이것이 모두 몇번 나오지요? 세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계약체결 전에, 제단에 피를 뿌리는 계약체결 전에.
그 다음에는 계약 체결 아주 직전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계약을 체결한
후에, 곧 그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 다시 한번 애기 합니다.
어떤 뜻일까요? 왜 세 번일까요?
이게 우리 언어 습관에서는 없는데 고대 근동의 언어 습관에서는 구두로
한 진술 일지라도 세번을 이야기하면 법적인 책임을 져야 됩니다.
요즘도 일부 아랍 세계에서는 남편이 부인에게 구두로 이혼을 통보할 수 있어요.
세 번을 얘기해야 됩니다. "나는 너랑 이혼한다"를.
성서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몇번
물으십니까? 세번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도 알고 있는 겁니다. 세 번을 얘기하고 나서 그 때부터
베드로에게 법적인 책임이 생긴 거예요. 자기 증언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배반은 아니지만
부인을 하지요.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리고 나서 새벽 닭이 우는 것을 보고
슬피 울었다. 회개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 라고 생각 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그 안에서 여러분들 이게 하나의 "튀폴로지"(유형학)인데요.
유형학이란 심리학에서, 개인이나 민족의 심신의 구조를 유형으로 분류하여
고찰하는 연구.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를 초대 교회의 반석이 되는 베드로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여기서 뭐라고 그러지요?
"당신이 말한 걸 내가 잘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그것 지킵니까?
안 지키지요.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이 회개 합니까? 뭐 회개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지만 구약 성경이 애매하게 끝이납니다. 회개하지 않으니까 하느님의
용서해 줄래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그럽니까? 그러고나서 슬피울고 회개하고 마지막
회개의 모습을 실제로 자신의 삶으로써 증언 합니까? 증언 합니다.
로마에 와서 순교하는 모습으로.
물론 성경상의 내용은 아닙니다만 교회의 전통 안에서 베드로가 십자가에
꺼꾸로 못 박혀서 순교하는 그와 같은 장면들을 봅니다.
자신이 말한 그 법적인 것을 자신이 거스르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역시 그들의
회개를 바라고 기다리시는 모습이 구약의 시나이 계약에서 증언 하고 있고,
신약에서는 그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고백을 통해서 평행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결론은 조금 다르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해석하고는 있습니다.
그와 같이 모세가 계약의 체결에 대한 준비를 하고
(탈출 19,3-8 : 계약 체결을 약속하시다) 그리고 정작 계약을 맺는 것은
(탈출 24,1-11 :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다) 입니다.
중간에는 뭐가 있을까요? 우리 성경에는 친절하게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여러분들 탈출 20장 22절을 보면 계약의 책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 20장 22절부터 23장 33절까지가 계약의 책입니다.
그리고 그 계약의 책 앞에는 십계명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계약체결 전부터
계약을 쳬결하는데 계약의 내용은 뭡니까?
"나는 너희에게 땅을 주겠고, 너는 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 율법의 내용이 20장 22절부터 23장 끝까지라는 겁니다. 그게 너희가
내게 지켜야 할 꺼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미리 가르쳐 주는 겁니다.
이런 건데 너희 지킬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 뭔지 감추고 안 가르쳐
준게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한대드라.그래 놓고 감추고 안가르쳐 준
것이아니라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이래도 지키겠느냐? 백성은 뭐라고 얘기 합니까?
세번이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얘기 하는 겁니다.
따라서 시나이 계약을 얘기 했을 때 제일 중요한 계약의 내용은
탈출기20,22-23,33: 계약의 책 까지 입니다.
그 앞에 있는 20,1-20,17: 돌판에 새겨지는 열 개의 계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알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계약을 맺자마자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계약을 막 이렇게 하면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아가 가지고 또
이렇게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느님께서 "야! 너
빨리 내려가 봐라 뭐 이렇게 애기를 하십니다. 내려와 보니까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막 화를 내니까 아론이 와서 하는변명이 더 웃깁니다.
"아, 이 사람들이 당신도 저기 가 있고 불안하니까 금을 걷어서 나한테
갖고 왔는데, 그걸 불에다 넣어니까 송아지가 한마리 튀어 나왔다."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문헌학적으로 우리가 좀 생각해 보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은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황소'입니다.
이게 좀 정확한 표현이 제가 안 떠오르는데요, 이렇게 얘기하죠.
아주 정력적인 뿔이 있고 힘이 좋은 황소의 모습입니다.
요즘까지도 왜 악마, 사탄 그러면 뿔이 있잖아요.
그게 여기에 근거를 두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왜 우리가 비속어를 쓸 때 어떻게 씁니까?
"야,이 개야!"하지 않잖아요. "개 뭐뭐야!"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뭔가 나쁘게 말하면서 붙는 어미가 있지요. 여기서 그게 붙은 겁니다.
히브리말 어감에서 그러니까 금송아지가 아니라 제가 직역하자면은
황금으로 만든 "소새끼"입니다. 황소 새끼인데 그게 새끼라는게 작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속어로하는 겁니다.
모양만 보면은 뿔이 달린 힘센 정력적인 그런 황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실지로 이것은 이스라엘이
역사가 역으로 투영되어 있는 그림 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가나안 땅의 종교에 관해서알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서는
바알신을 섬길 때 지금 말씀드린 그런 황금으로 만든 황소의 모습을 바알신
의 하나의 신상으로써 섬겼던 기록들이 있고, 그와 같은 황금신상의 모습이
이스라엘 안에서 신학화 되어서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또 발견이 됩니다.
여러분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베델이니 단이니 하는 북 이스라엘의 성소
들이 있지요? 그 성소들이 아마 황금으로 만든 황소상이 이게 "야훼"
모습이다라는 그런 틀 안에 그와 같은 북 이스라엘의 성소마다 그런 것들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 이야기가 역으로 투영됐는데, 사실은 누굴 비판하고
있는 겁니까? 북이스라엘 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갈라지고 난
이후에 북이스라엘의 종교적인 관행을 이 대목에서 비판하는 겁니다.
그 때도 그렇게 해서 잘 못했었는데 얘네가 또 그런 짓을 한다라는 것을
약간 좀 이스라엘의 역사가 과거로 투영되어 있는것으로 우리가 이 대목은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다시 산으로 올라 가지요.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같은 율법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십계명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 요번에는 조금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특히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 법과 또 하나는 전례법이
있는데 하나는 공동체가 살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전례를 어떻게 해야 되고,
이 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이와 같은 전례적인 법들이 있는데 두 번째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서 받은 것은 앞에 계약의 책에 있는 것과
십계명이 아니라 이제부터 계속 전례적인 내용만 나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등장하는 법을 우리가 흔히 종교적인
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탈출기 끝 부분부터 레위기 전체와 민수기 10장
10절까지의 내용을 가지고 흔히 사제법전 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 안에
성결법전이니 다른 작은 법전들이 있습니다만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드리
겠습니다. 작은 법전들도 종교적인 것을 주 테마로 하는 겁니다. 공동체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계약의 책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문제인 대인관계
입니다. 모세가 두 번째로 시나이산에 올라가서 그 때부터 서술되는 법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법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세 번째 법전은 신명기 법전인데 오늘은 자세히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의 세 법전 즉 모세오경을 우리가 율법이라고
불렀을 때 그 율법적인 구체적인 체계를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세 법전입니다.
※율법으로서의 모세오경
1. 계약의 책 : 탈출기 20,-23,33
2. 사제법전 : 탈출기 후반, 레위기, 민수기10장까지
3. 신명기 법전 : 신명기 12장-26장
이 세 법전이 때로는 겹치고 때로는 조금 어긋나면서, 그러면서 그 법전을
아우르는 하나의 제목처럼 쓰여져 있는 것이 탈출기 20장의 십계명 그리고
신명기 5장에 등장하는 십계명입니다.
탈출기 20,1-7에 등장하는 십계명과 신명기 5,1-22에 등장하는 십계명은
아주 유사하지만 크고 작은 차이들을 보여 줍니다.
자! 이게 구약의 계약입니다.
모세를 중재자로,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하느님은 땅을 주고, 백성은 율법을 지킨다.)
나중에 보게 될 신약에서도 이와 같은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신약은 누구와 누구가 맺은 계약입니까?
신약도 역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나요? 하느님과 예수님이 맺었나요?
여러분들 길에 나가 스님 만나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뭐라고 그럴까요?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게 아닙니다.
하느님과 교회가 맺은 겁니다. 신약은 하느님과 교회가 맺은 계약입니다.
그 교회를 구약과 같은 틀에서 이해하기에 우린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새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새 이스라엘이 있으니까 그러면 헌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구약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입니다.
새 이스라엘은 우리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라틴말로 '에끌레시아'
(Ecclesia)라고 합니다. 이 말 안에는 '칼레오'라는 그리스말 동사가 숨어
있는데 그거에 수동의 의미가 있습니다. '갈레오'라는 말은 '부른다'라는
소리이니다. 따라서 수동이니까 부름을 받았다는 소리입니다. 거기다가
'엑스'라는 게 붙어 있으니까 '엑'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서 완전히 골라서
뽑아 냈다는 소리입니다.
"골라 가지고 뽑아 냈다" 이게 교회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교회란 뭡니까?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뽑힌 사람들의 만남, 그게 교회 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들이 이루고 있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회중들,
사람들의 만남, 그게 교회입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잘못 됐다고
생각하는것은 "당신 성당 다여? 교회 다녀?"라는 물음입니다.
이건 잘못된 표현입니다. 우리는 천주교회고, 개신교회가 있는 겁니다.
건물로 얘기하자면 천주교회는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 성당이고 개신교회는
예배당 입니다. 당신 성당 다녀?, 아니면 예배당 다녀? 이지요
천주교회 다녀? 아니면 개신교회 다녀?
또 천주교와 우리가 쓰는 기독교라는말도 문제가 좀 있습니다.
천주교가 천주, 우리가 하느님만 믿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큰 틀에서 우리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우리들 신앙의 중심에있습니다.
우리가 천주님만 믿고 예수님은 막대합니까? 반대로 개신교에서는 예수님만
믿고 성부는 막대합니까? 아닙니다. 개신교에서도 역시 정통 그런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에 관한 삼위일체를 얘기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믿음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믿음에서는 우리와
개신교는 동일합니다.
따라서 천주교, 기독교,개신교 이런 말이 좀 그렇습니다.
제가 글을 쓸 때는 할 수 없어서 그냥 가톨릭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라는
서양말을 요즘은 그냥 씁니다. 왜냐하면 개신이라는 말도 사실은 저기 잘
적합한거 같지 않고, 구교, 신교 뭐 이러자니 우리는 구약, 신약 같이 극복
해야 될 교회 같잖아요 우리 교회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용어상의
조금은 우리가 극복해야 될것 같습니다.
공부하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행복하세요!
아멘.
다음은 구약과 신약2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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