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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洛國璿源譜 및 正德草本舊譜贋眞辨解全
(가락국선원보 및 정덕초본구보안진변해전; 정덕초본 구보의 진위를 밝혀 풀이함)
原典 : 1925년 을축보; 김운배주관
原典 : 1930년 경오보; 김용석주관
解釋 : 2005. 11. 11. 金順大
◎駕洛國璿源譜(가락국선원보)
一世
太祖皇太王(태조황태왕)
王姓金氏諱首露一云靑裔東漢光武皇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三日誕降于龜旨峰卽位于是月望日建國于弁韓地駕洛九干之推戴也
왕의 성은 김씨로서 휘는 수로이며 또는 청예[1]라고도 한다. 동한의 광무황제 때의 건무 18년 임인(42)년 3월3일 하늘로부터 구지봉으로 내려와 즉위하여, 이 달 보름(3월15일)에 변한의 땅에 나라를 세우니 가락 9간 들의 추대에 의한 것이었다.
[1]동국여지승람 고령현(高靈縣)편의 건치연혁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 자세한 것은 김해부의 산천 편을 보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백 20년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중[釋] 이정(利貞)의 전기를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夷毗訶)에 응감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라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駕洛國) 옛 기록의 ‘여섯 알[六卵]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써 믿을 수 없다. 또 중 순응(順應)의 전기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대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이며,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할 것이 못된다. 신라 진흥왕이 멸망시켜 대가야군으로 하였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고려 초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소속하고, 명종이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때에 현감으로 고쳤다.
이 설화는 수로신화보다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서, 고령지방의 토착집단이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가야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하는 것을 반영한 설화로 보인다.
國號大駕洛都金官城漢桓帝延熹五年壬寅馬韓五十四國皆來朝賀尊王爲普州皇太王后爲普州皇太后
국호를 대가락이라하고 도읍을 금광성으로 하였다. 한나라의 환제(11대) 연희5년 임인(162)년에 마한의 54개국이 전부 찾아와, 왕이 보주황태왕으로 된 것과 왕후가 보주황태후로 된 것을 축하하였다.
是歲傳位于太子居登王漢獻帝建安四年新羅奈解王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薨在王位一百二十一年 在太王位三十八年春秋一百五十八
이 해(162)에 태자 거등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한나라 헌제 건안 4년이며 신라 내해왕(10대 내해이사금) 4년 기묘(199)년 3월 23일 돌아가시니 왕위로는 121년, 태왕으로는 38년을 재위하였으며 나이는 158세였다.
○葬于納陵今金海府西郭外三百步許龜旨峯南子坐
○납릉에 장사지냈는데 지금의 김해부 서쪽 외곽 300보 쯤에 있는 구지봉의 남쪽 자좌이다.
○高麗文宗壬寅特命知金州使金良鎰修陵具載陵銘撰今無
○고려 문종(1046~1083) 임인(1062)년에 지금주사 김양일에게 특별히 명하여 능을 고치고 능의 비명을 찬술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李朝 仁祖丁亥后孫道伯許積 竪碑撰外裔進士全榮書 太王戊寅命建殿齋室置寢郞降號 崇善殿竪神道碑後孫吏曹判書許傳撰外裔吏曹參判趙濟華書后孫將仕郞崇善參奉金顯{氵+柱}篆 隆熙二年戊申竪碑曾曾孫前享官金雲培撰碑陰外孫奎章閣學士閔泳璘書後孫前郡守金鍾應篆隆熙三年己酉南巡時 命官致祭
조선의 인조 정해(1647)년 후손인 도백(관찰사) 허적이 비를 세우고 찬하였으며 외손의 후예인 진사 전형이 글을 썼다. 태왕(고종?)이 무인(1878)년에 전(숭선전)과 재실을 건축하게 명하고 침랑을 두었으며 숭선전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또한 신도비를 세우고 후손인 이조판서 허전이 비문을 찬하고 외손의 후예인 이조참판 조제화가 글을 쓰고 후손인 장사랑/숭선전 참봉 김현주가 제목을 썼다. 융희2년 무신(1908)년에 비를 세우고 증증손인 이전의 향관(享官)김운배가 비음을 찬하고 외손인 규장각 학사 민영린이 글을 쓰고 전군수 김종응이 제목을 썼다. 융희3년 기유(1909)년에 <왕이> 남쪽을 순행할 때 관리에게 명하여 치제를 드렸다.
妃普州皇太后姓許氏諱皇玉阿隃陀國公主漢光武皇帝九年癸巳七月七日誕降年十六駕洛開國七年戊申七月七日乘大船載石塔至駕洛王親迎爲后延熹壬寅封普州皇太后后弟曰寶玉仙人一名長遊和尙嘗來遊金官如桃山聖母而國人歎其歸也
비는 보주 황태후로서 성은 허씨이고 휘는 황옥이며 아유타국의 공주이다. 한나라 광무황제 9년 계사(33)년 7월7일에 탄생하시어, 나이 16세 되던 가락국이 개국한 지 7년째인 무신(48)년 7월7일 큰 배를 타고, 석탑을 싣고 가락에 당도하였다. <수로>왕이 친히 영접하여 왕후로 삼고 연희 임인(162)년 보주황태후로 봉하였다. 태후의 동생은 보옥선인으로 일명 장유화상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도산성모[1]처럼 금관(김해)에 놀러 온 적이 있으며, 그가 돌아 갈 때 나라사람들이 탄식하였다.
[1]桃山聖母; 출처는 모르겠으나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서술성모(西述聖母)를 말하며 서술성모가 선도산(仙桃山)에 산다고 하여 일명 도산성모라고도 한다.
后誕十男二女長太子二子從后國姓賜許氏七子厭世與后弟寶玉仙人入頭流山上七佛庵化仙云庵在河東漢憲帝建安四年己卯三月朔日薨在后位一百十五年在太后位三十八年春秋一百六十七
태후는 10남2녀를 낳았다. 장남은 태자가 되고 두 아들은 왕후나라의 성을 따라 허씨를 내렸으며, 7명의 아들은 세상을 싫어하여 왕후의 동생인 보옥선인과 함께 두류산(頭流山)위에 들어가 칠불암(七佛庵)이 되었다고 하는데, 암자는 하동에 있다. 동한의 헌제 건안 4년 기묘(199)년 3월 1일[1] 돌아가시니 왕후로서의 재위는 115년이고 태후로서의 재위는 38년이며 나이는 167세였다.
[1]삼국유사에는 ‘영제 중평 6년 기사(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로 되어 있고 이것이 맞다.
葬龜旨峯東子坐南去王陵二里許有陵表戊寅降殿號合享于 崇善殿隆熙戊申竪碑于熊川夫人塘外裔輔國閔泳韶銘判書張錫龍撰
구지봉의 동쪽 자좌에 장사지내어 남쪽으로 왕릉과 2리(800m 정도)쯤 떨어져 있으며 묘표가 있고 무인(1878)년 전호(殿號)가 내려져 숭선전에서 <수로왕과>같이 제사를 지낸다. 융희 무신(1908)년에 웅천부인당에 비를 세우고 외손의 후예인 보국 민영소가 비명을 쓰고 판서 장석룡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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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子居登王(거등왕)
太王長子漢桓帝延熹五年新羅阿達羅王八年壬寅承 命代理越三十八年<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卽位蜀帝延熙十六年>新羅脫解王七年癸卯九月十七日薨代理三十八年眞在位五十五年凡九十二年
태왕의 장남으로서 한나라의 환제 연희 5년, 신라 아달라왕(8대왕) 8년 임인(162)년에 왕의 대리직을 이어받아 38년이 지나, <헌제 건안 4년 기묘(199)년 3월 23일에 즉위, 촉한의 연희 16년(253년)인> 신라 탈해왕(57~80) 7년 계묘년 9월17일에 돌아가시니 왕위의 대리 38년과 실제 왕위 55년을 더하여 92년간 재위하였다[1].
[1]162년부터 92년간이면 253년으로서 신라 4대 탈해왕이 아니고 12대 첨해이사금 때로서, 계묘년이 아니고 계유년이다. 참고로 탈해왕의 재임시기에 계묘년은 없다. 참고로 삼국유사에는 253년(계유) 9월17일로 되어 있음.
○古譜同庚辰卽位以世孫冊封太子己卯王子仙見塵世喪葬與神女乘雲離去王嘆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幀後人名招仙臺一曰招賢又曰招七點山人神始作伽倻琴至今樂府傳之
옛날의 보첩에 동 경진(200)년에 즉위하여 세손(마품의 아들인 거질미?)을 태자로 책봉하였다고 되어있다. 기묘(199)년에 왕자인 선(仙)이 어지러운 세상과 애처로운 장례식을 보고, 신녀(神女)와 함께 구름을 타고 이별하여 가버려, 왕이 한탄하며 도읍의 강에 있는 석도암(石島巖)에 올라가 <아들인> 선(仙)을 불러다가 초상(影幀)을 새겼는데 후세사람들이 이름 붙이기를 초선대라 하고 초현[1]또는 칠점산이라 부른다. 인간과 신이 비로소 가야금을 만드니 지금 악부에 전해온다.
[1]招賢; 어진 사람을 부르던 곳이란 의미
漢書弁韓國有瑟其形如筑辛亥滅甘文國己巳新羅王子昔于老使于洛還朝爲伐梁叛滅之一云壽二百三歲陵無傳諡道王
한서에 변한국에는 슬(瑟;거문고)이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거문고)과 같다고 되어 있다. 신해(231)년에 감문국을 멸망시키고[1], 기사(249)년에 신라왕자 석우로[2]가 낙(洛?)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조정에서는 양(梁?)을 쳐서 반란군을 멸하였다. 혹은 나이가 203세라고도 하며 묘소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호는 도왕이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조분이사금 편에 나옴.
二年秋七月以伊湌于老爲大將軍討破甘文國以其地爲郡.
2년(231) 가을 7월에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2]석우로는 10대 나해이사금의 아들임(신라본기 나해이사금편). 249년은 12대 첨해이사금 때임
后申氏諱慕貞父泉府卿申輔一云以后遺命火葬東史申輔妻太后出來時媵臣
왕후는 신씨로서 휘는 모정이고 천부경 신보의 따님이며 한편에서 말하기를 왕후는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 역사서에는 신보의 부인은 태후가 올 때 태후의 몸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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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女永安公主(영안공주)
諱玉環下嫁于太師晉陽公裴烈文出金海裴氏譜 子裴肅月城君文剛公
휘는 옥환이고 태사인 진양공 배열문에게 시집갔다고 김해배씨 보첩에 나온다. 아들은 배숙으로 월성군이며 문강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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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女新羅昔太子妃(신라석태자비)
出東京誌
동경지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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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子馬品王(마품왕)
蜀漢延熙癸酉九月十七日卽位<晉惠帝元康元年>新羅儒理王八年辛亥正月二十九日薨在位三十九年一云母后本神女琉冕庚辰歲孕王九年戊子誕王五十二年春三月三日與父王離塵同爲上昇有史蹟晋元康庚戌薨在位三十八年陵無傳諡成王
后趙氏諱好仇父宗正監匡孫 匡孫妻名慕良亦太后媵臣壬子薨 ○陵同原無傳
촉한의 연희 계유(253)년에 즉위하였다. <진나라 혜제의 원경 원년인> 신라 유리왕(14대 유례이사금) 8년 진나라 원강 원년 신해(291)년 1월29일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9년간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모후는 본래 신녀였고 이름은 류면(琉冕)인데, 경진(200)년에 왕을 임신하여 9년 후 무자(208)년에 왕을 낳고 52년(251년) 봄 3월3일 부왕(선)과 같이 속세와 이별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또 다른 사적에는 진나라 원강 경술(290)년에 돌아가셔서 재위가 38년이었다고 한다. 능은 전해지지 않고 시호는 성왕이다.
왕후는 조씨로서 휘는 호구이며 종정감 광손의 따님이다. 광손의 부인의 이름은 모량으로 역시 <허>태후의 몸종이었으며 임자(292)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이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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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子居叱彌王(거질미왕)
元康辛亥正月二十九日卽位丁巳伊西古國叛遣將滅之壬申日本國請婚不納歸于新羅東晉穆帝永和二年新羅脫海王三十七年丙午七月八日薨 在位五十六年陵無傳諡德王
后諱阿志阿干我躬孫永和丁未薨 ○陵同原無傳
원강 신해(291)년 1월 29일에 즉위하여 정사(297)년에 이서고국의 반란에 장수를 보내어 멸망시켰다[1]. 임신(312)년에 일본국이 청혼하였으나[2] 받아들이지 않자 신라로 돌아갔다. 동진의 목제 영화 2년, 신라 탈해왕[3] 37년 병오(346)년 7월8일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56년간이었다. 능은 전하지 않고 시호는 덕왕이다.
왕후의 휘는 아지이며 아간을 지낸 아궁의 손녀이다. 영화 정미(347)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에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편
伊西古國來攻金城我大擧兵防禦不能攘忽有異兵來其數不可勝紀人皆珥竹葉與我軍同擊賊破之後不知其所歸人或見竹葉數萬積於竹長陵由是國人謂先王以陰兵助戰也.
이서고국 (伊西古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 임금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하였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편
三年春三月倭國王遣使爲子求婚以阿湌急利女送之.
3년(312) 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다.
[3]346년은 탈해왕이 아니고 흘해이사금 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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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子伊尸品王(이시품왕)
永和丙午七月八日卽位安帝義熙三年新羅眞聖王六年丁未四月十日薨在位六十二年 陵無傳諡明王
后諱眞信父司農卿克忠義熙丁未薨 ○二陵在金海陵洞異國兵火每因金氏陵號而不知葬法疑有古品物寶藏入寇輒掘陵故蓋致失陵
영화 병오(346)년 7월8일에 즉위하여 안제(동진의 14대황제) 의희 3년, 신라 진성왕[1] 6년 정미(407)년 4월10일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62년간이었다. 능은 전하지 않고 시호는 명왕이다.
왕후의 휘는 진신으로 사농경 극충의 따님이다. 의희 정미(407)년에 돌아가셨다. ○두 능은 김해의 능동에 있었으나, 다른 나라(일본?)와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김씨의 능호가 붙어 있어서, 장례의 법을 모르고 고물건이나 보물이 있는 것으로 여겨[2] 도둑(왜구?)들이 자주 능을 도굴하고 다시 덮어 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407년은 신라 18대 실성이사금 때임
[2]옛 장례의 법에는 물건이나 보물을 넣지 않았던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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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子坐知王(좌지왕)
義熙丁未四月十日卽位戊申日本始置營于對馬島洛羅二邦自是爲憂王寵一宮姬忠臣朴元道諫且筮得解卦曰解而拇朋至斯孚王乃解之擯女于荷山島國大治宋武帝永和二年新羅訥祗王五年辛酉五月十二日薨 在位十五年陵無傳諡神王
后諱福壽父大阿干道寧 陵同原
의희 정미(407)년 4월10일에 즉위하였다. 무신(408)년에 일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자 가락과 신라의 두 나라가 이것으로 인하여 우려하였다[1]. 왕이 총애하는 궁희가 한명 있었는데 충신 박원도가 간하면서 또 점을 쳐서 괘를 풀어 말하기를 ‘점을 풀어보니 엄지손가락 한 쌍이 쪼개졌다가 다시 붙었다,’고 하니 왕이 이에 깨닫고 여자를 물리쳐 하산도로 보내고 나라를 크게 다스렸다[2]. 송나라 무제 영화(永初 임)2년, 신라 눌지왕 5년 신유(421)년 여름 5월12일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15년간이었다. 능은 전하지 않고 시호는 신왕이다.
왕후의 휘는 복수이며 대아간을 지낸 도녕의 따님이다. 능은 같은 언덕에 있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편
七年春二月王聞倭人於對馬島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我欲先其未發揀精兵擊破兵儲舒弗邯未斯品曰臣聞兵凶器戰危事況涉巨浸以伐人萬一失利則悔不可追不若依嶮設關來則禦之使不得侵猾便則出而禽之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策之上也王從之.
7년(408) 봄 2월에 왕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신(臣)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사람을 정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험한 곳에 의지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그들이 오면 막아서 쳐들어와 어지럽힐 수 없게 하다가 유리할 때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왕이 그 말에 따랐다.
[2]삼국유사 기이 좌지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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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子吹希王(취희왕)
永和辛酉五月十二日卽位癸酉與百濟通和甲申日本犯境王拒之堅守萇{長}山居漆國等設備後鷄林數被邊患宋文帝元嘉二十八年訥祗王<三十五年>辛卯二月三日薨在位三十一年陵無傳諡惠王
后諱仁德父角干進思陵同原
영화(永初 임)신유(421)년 5월 12일에 즉위하여 계유(433)년에 백제와 화친을 맺었고[1], 갑신(444)년에 일본이 변경을 침입하자[2] 왕이 이를 막아 지키고 장산에 거칠국 등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다. 후에 계림(신라)이 여러 번 변경을 침입하여 근심하였다. 송나라 문제 원가 28년, 늘지왕 35년 신묘(451)년 2월3일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1년간이었다. 능은 전하지 않고 시호는 혜왕이다.
왕후의 휘는 인덕이며 각간을 지낸 진사의 따님이다. 능은 같은 언덕에 있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편을 베낌
十七年夏五月未斯欣卒贈舒弗邯秋七月百濟遣使請和從之.
17년(433) 여름 5월에 미사흔(未斯欣)이 죽어, 서불한을 추증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편
二十八年夏四月倭兵圍金城十日糧盡乃歸.
28년(444) 여름 4월에 왜의 군사들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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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
子銍知王(질지왕)
元嘉辛卯二月三日卽位南齋書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詔曰伽倻王荷知海外奉贄授輔國將軍本國王丁卯獲白雉遣新羅國初太子封一子于進禮城設王宮太子壇設瞻星臺王就幔殿合婚處建寺曰王后<寺>祀 皇太后于金城齋武帝永明十年新羅炤智王十四年壬申十月四日薨在位四十二年諡莊王
后金氏諱邦媛父沙干壬申薨 ○陵同原無傳
원가 신묘(451)년 2월3일에 즉위하였다. 남제서에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왔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왕 하지가 바다건너 밖에서 정성으로 폐백을 받드니 보국장군 본국왕을 내린다.”고하였다.’고 되어있다[1]. 정묘(487)년에 흰 꿩을 사로잡아 신라로 보냈다. 나라의 초에 태자를 아들로 봉하여(?) 진례성으로 보내어 왕궁과 태자단을 건립하고, 첨성대를 설치하였으며, 왕이 천막으로 만든 집(幔殿)에 들어가 결혼한 장소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하였다[2]. 황태후는 금성재에 모셨다. 무제 영명10년, 신라 소지왕 14년 임신(492)년 10월4일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42년이었으며 시호는 장왕이다.
왕후는 김씨로서 휘는 방원이며 사간을 지낸 사람의 따님이며 임신(492)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같은 언덕이나 전하지 않는다.
[1]南齊書卷五十八, 列傳第三十九 蠻 東南夷편에 나옴
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가라국’은 ‘삼한’의 종자이다. ‘건원’ 원년(479)에 나라의 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말하길 널리 헤아림은 높은 곳에서 시작하니 먼 이가 감화 되었다. ‘가라왕 하지’가 동쪽의 먼 바다 밖에서 정성으로 폐백을 받드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을 내린다. 로 되어있고 위 본문에는 공물을 바쳤다는 글이 생략되어 있음.
[2]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내용과 유사함.
銍知王一云金銍王元嘉二十八年卽位明年爲世祖許王玉王后奉資冥福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曰王后寺納田十結充之.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여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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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子鉗知王(겸지왕)
永明壬申十月四日卽位新羅智證王始定國號丙戌滅小伽倻梁武帝普通二年新羅法興王八年辛丑四月七日薨在位三十年諡肅王
后諱淑父角干出忠 ○陵在居漆國內山以上八代陵無傳
영명 임신(492)년 10월4일에 즉위하였다. 신라의 지증왕이 비로소 국호를 정하고[1] 병술(506)년 소가야를 멸망시켰다. 양나라 무제 보통 2년, 신라 법흥왕 8년 신축(521)년 4월7일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0년간이었다. 시호는 숙왕이다.
왕후의 휘는 숙으로 각간을 지낸 출충의 따님이다. ○능은 거칠국내에 있는 산에 있다고 하나 이상 8대의 능은 전하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503년)편의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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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
子 讓王(양왕) <子 世宗, 武力王, 武得>
諱仇衡齊武帝永明七年新羅炤智王十一年己巳生梁武帝普通二年四月七日卽位甲戌百濟數伐新羅王子武力將兵在外大破濟兵殺濟王明穠在位十二年壬子傳位于世子世子傳位于弟武力王陪讓王入于知品川水晶宮
휘는 구형이고 제나라 무제 영명 7년, 신라 소지왕 11년 기사(489)년에 태어나, 양나라 무제 보통2년(521년) 4월7일에 즉위하였다. 갑술(554)년에 백제가 여러 번 신라를 공격하자 왕자 무력장군과 군사가 밖에 있다가 백제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백제왕 명농(성왕)을 죽였다[1]. 재위는 12년이고 임자(532)년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세자는 동생인 무력왕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양왕을 따라 지품천의 수정궁으로 들어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편
十五年秋七月修築明活城百濟王明穠與加良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逆戰失利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及交戰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
15년(554)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史稱傳位于弟仇亥史之傳誤而世宗弟武力王之上諡也>
<○역사서에서는 말하기를 왕위를 동생인 구해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나 역사서가 전하는 것은 틀렸다. 세자 구해가 무력에게 물러준 것을 말한다. 세종은 동생인 무력왕이 선왕을 위해 올린 시호이다.>
○陵在駕洛知品川王山東庚坐今山淸郡西二十里壘石爲邱四面皆七級
○능은 가락의 지품천의 왕산의 동쪽 경좌에 있는데, 지금의 산청군 서쪽 20리에 있으며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네 면은 7층의 계단으로 되어있다.
○一曰在位四十二年梁敬帝太平二年丁丑薨春秋六十九在王位十二年及傳位後三十一年在上王位至壬午革國合歷歲也 山曰王山臺曰王臺寺曰王山寺卽讓王父子世宗二王之遺蹟也
○또는 말하기를 재위는 42년간이었고 양나라 경제 태평2년 정축(557)년에 돌아가시어 나이는 69세였다. 이는 왕위로서 12년과 왕위를 물려준 후 31년간 상왕으로 지내다가 임오(562)년에 이르러 나라가 바뀌었으니 이를 합한 기간이다. 산은 왕산이라 하고, 대는 왕대라 하고, 절은 왕산사라 하니 즉 양왕과 부자(父子)인 세종의 두 왕의 유적이다.
王山下有宗廟舊趾{址}是知太王之水晶舊宮也其上有興武王射臺東距金官三百里陵所失傳久矣朝鮮正祖戊午歲旱鄕儒閔景元等齋謁禱雨雨遂至寺僧益神之發秘函示其書及物書卽古名禪坦瑛所記物則王與后影幀及王所御弓劍錦袍也記曰寺本是讓王之水晶宮遜{遯}於玆而葬焉
왕산아래에 종묘의 구 터가 있는데 이는 태왕(수로왕)의 옛 수정궁이다. 그 위에는 흥무왕의 사대(활을 쏘던 곳)가 있고 금관(김해)에서 동쪽으로 300리쯤에 있는 능소는 오래전부터 전해지지 않았으나 조선의 정조 무오(1798)년의 가뭄에 고을의 유학자 민경원 등이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자 비가 마침내 내리게 되었다. 그 절의 중이 비밀로 간직한 상자를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그 글과 물건들은 옛날 유명했던 탄영스님이 써 놓은 것이었다. 즉 왕과 왕후의 영정과 왕이 갖고 계시던 활과 칼과 비단으로 만든 옷이었다. 그 기록에 써 있기로는 이 절은 원래 양왕의 수정궁이었고 여기에 몸을 피해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於是顯晦有復陵自巡營轉報京司越六年 純祖癸亥京鄕雲仍創建陵齋講堂廟舍影閣門樓定有司禁樵以二八月初丁奉香焉 神道碑銘吏曺判書趙鎭寬撰
后慶州金氏諱桂花父{分/叱}水伊丁卯薨 ○陵王山下玉田上未詳誕三男一嗣世宗<王>二嗣武力王三男武得
○일부는 세상에 알려지고 일부는 알려지지 않아 능을 복구하고, 감영(巡營)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6년 후 순조 계해(1803)년 서울과 지방에서 후손들이 능의 제실과 강당과 종묘와 영각과 문루를 짓고 유사들을 두었으며, 나무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고 2월과 8월초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신도비명은 이조판서 조진관이 찬하였다. 왕후는 경주김씨로서 휘는 계화이고 뿐수이의 따님이다. 정묘(547?)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왕산아래에 있는 옥전(玉田)위에 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3남을 두었으며 첫째는 세종<왕>이고 둘째는 무력이고 셋째는 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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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지왕의 子 脫知(탈지)
官{分/叱}今
관직은 뿐금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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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
양왕의 子 世宗(세종) <子率友>
諱仇亥一云奴宗並未詳凡稱仇衡王傳位于弟仇亥弟卽子字訛誤今正之仇衡王十二年壬子受禪位及衡王移御于太王水晶舊宮也傳位于弟武力以宗廟樂器及妃嬪陪讓王入于水晶宮以終諡世宗弟武力王之上尊也后與陵俱無傳
휘는 구해이고 또는 노종이라고도 하나 둘 다 자세히는 잘 모르겠다. 무릇 말하기를 구형왕이 왕위를 동생인 구해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나, 제(弟;동생)라는 글자는 자(子;아들)이라는 글자를 잘못 기록한 것이니 지금 바로잡는다. 구형왕 12년 임자(532)년에 왕위를 <세종이 양왕에게서> 선위받았고 또 구형왕은 태왕(수로왕)의 옛 궁궐인 수정궁으로 옮기었다. 세종은 동생인 무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종묘악기와 비빈을 거느리고 양왕을 따라 수정궁으로 들어가 종말을 고하였다. 시호인 세종은 동생인 무력왕이 선왕을 높여 부른 것이다. 왕후와 능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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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의 子 武力王(무력왕) <子舒玄>
梁武帝天監十七年法興王五年戊戌生梁中大通壬子讓王傳位于太子世宗後世宗將傳 于王王受禪至新羅眞興王二十三年陣文帝天嘉三年壬午傳國于新羅眞興王侍以賓禮以其國爲食邑以金官爲金官郡
양나라 무제 천감 17년, 법흥왕 5년 무술(518)년에 태어나셨고, 양나라 중대통 임자(532)년에 양왕이 태자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러주었고, 세종이 왕(무력왕)에게 <왕위를> 물러주었다. 왕(무력왕)은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신라 진흥왕 23년, 진나라의 문제 천가 3년 임오(562)년에 이르러 나라를 신라에게 넘기자, 진흥왕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를 갖추어 대접하면서 그 나라를 <무력왕에게> 식읍으로 주고 금관을 금관군이라 하였다.
東國遺史曰周保定壬午遜于新羅官至大總管大都督太大角干自駕洛紀元元年壬寅歷年五百二十一年<陳宣帝大建十一年>眞平王元年己亥十月十六日薨春秋六十二 ○陵鷲山下癸坐<鷲山>今梁山通度寺後麓兩位合窆云未詳
后密陽朴氏父巴刀○陵同原誕一男
<璿源譜終>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역사(삼국유사)에서 말하기를 주나라 보정 임오(562)년에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고 관직은 대총관/대도독/태대각간에 이르렀고 가락기원 원년인 임인(42)년으로부터 521년이 지났다라고 되어있다. <진나라 선제 대건 11년> 진평왕 원년 기해(579)년 10월16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62세였다. ○능은 취산아래 계좌에 있고 <취신은> 지금의 양산 통도사 뒤쪽 산기슭이며 왕과 왕비를 합사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왕비는 밀양 박씨로서 파도의 따님이다. ○능은 같은 언덕에 있으며 아들하나를 두었다.
<선원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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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의 子 武得(무득)
官角干以節義號義卿封金寧君伐首若西州漢山享于觀晶洞伯仲祠故三忠公云
后{配}金氏父護軍伊湌改物
관직은 각간이고 절의를 지켜 호는 의경이며 금녕군에 봉해졌다. 서주의 한산을 정벌하였고 관정동에 제사를 모시니 백형(세종=구해), 중형(무력)과 같이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삼충공이라고 한다.
부인은 김씨로서 호군을 지낸 이찬 개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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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校正>大同世譜上系(김해김씨<교정>대동세보상계)
十二世
세종의 子 率友(솔우)
一云率支
配鷄林金氏○墓與生卒無傳
솔지라고도 한다. 부인은 계림(경주) 김씨이다. ○묘와 생졸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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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왕의 子 舒玄(서현)<子 庾信, 欽純, 女新羅文明王后,寶姬>
梁敬帝太平九年眞興王二十五年甲申生新羅角干梁州都督按撫諸軍事 謹按一譜都督伐任羅伽倻萬弩國封萬弩郡太守陞角干蘇判己丑伐高句麗娘臂城公之子庾信斬將奮擊遂拔?之梁州今陜川娘臂城今淸州忌九月十九日
配慶州金氏萬明公主新羅宗室肅訖宗忌十月十一日 ○鷲山下癸坐合窆云未詳生二男三女
양나라 경제 태평 9년, 진흥왕 25년 갑신(564)년에 태어났으며[1] 신라각간/양주도독/안무제군사를 지냈다. 삼가 어떤 보첩을 살펴보면 도독으로서 임라가야를 정벌하니 만로국에서 만로군의 태수로 봉했다가 각간/소판으로 승진했다고 되어 있다. 기축(629)년에 고구려 낭비성을 정벌하고[2] 공의 아들인 유신이 적의 장수를 베고 공격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양주는 지금의 합천이며 낭비성은 지금의 청주이다. 기일은 9월 19일이다.
부인은 경주김씨로서 만명공주이고 신라종실인 숙흘종이며 기일은 10월11일이다. ○취산 아래의 계좌에 합분하였다고 말하나 확실히 알 수 없다. 2남3녀를 낳았다.
[1]양나라의 태평 9년은 없고 태평 2년에 진나라에 망하였다. 억지로 말한다면 태평1년은 556년이므로 태평9년은 564년이 된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편
五十一年秋八月王遣大將軍龍春舒玄副將軍庾信侵高句麗娘臂城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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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
서현의 子 庾信(유신) <子 三光,元述,元貞,長珥,元望, 施得>
都督公爲萬弩郡太守甲申歲庚辰日夜夢焱惑塡二星下降夫人亦夢見童子衣金甲乘雲入室尋有娠二十月生隋文帝開皇十五年眞平王十七年乙卯也 背有七星文郡有胎靈山卽藏胎處號吉詳山
도독공(휘서현)이 만로군[1] 태수로 있을 때인 갑신(564,또는 624)년 경진일 밤에 꿈을 꾸니 아주 밝아서 정신을 흐리게 하는 두 별이 내려왔다. 모친도 역시 꿈에서 어린아이가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임신한지 20개월만에 아이를 낳으니 수나라 문제 개황 15년, 진평왕 17년 을묘(595)년이었다. 등에는 7개의 별 그림이 있었다. 군(만로군)에 태령산이 있으니 즉 태를 묻은 곳으로서 길상산이라 부른다.
[1]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
都督公曰吾以庚辰日有吉夢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庚與庾字相似 辰與信 聲相近 蓋以命之遂命 庾信
도독공(휘서현)이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에 길한 꿈을 꾸어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를 이름으로 해야 하나, 예기에 따르면 날짜를 이름으로 할 수 없으니, 경(庚)은 유(庾)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이 같으니 대개 이렇게 하라고 명하니 결국 이름이 유신(庾信)이 되었다.
佐新羅太宗滅百濟唐高宗總章元年戊辰滅高句麗之役文武王親征公留都諸將受命伐高句麗滅之留唐兵鎭撫官至太大舒發翰大角干仍加十七等之上唐高宗二年唐封太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
신라 태종을 도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 고종 총장원년 무진(668)년 고구려를 정벌하는 싸움에 문무왕이 친히 나서니 공(휘유신)이 여러 장수들과 서울에 남아 있다가 명령을 받고, 고구려를 치러갔다가 고립된 당나라 병사들을 구하였다. 관직은 태대서발한/대각간에 이르고 17등급이 승급되었고, 당나라 고종 2년에 당나라가 <휘유신을> 태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봉하고 식읍 2천호를 주었다.
咸亨四年文武王十三年癸酉七月一日薨春秋七十九葬慶州府松花山金山原亥坐賜軍樂鼓吹以葬命國子博士薛因宣撰碑文立紀功今無焉
함녕 4년 문무왕 13년 계유(673)년 7월1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79세였다. 경주부 송화산 금산언덕의 해좌에 장사지내니 군악대의 북과 취주대를 보내어 장례를 치르고, 국자감 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그 공덕을 기리게 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唐文宗太和九年興德王十年乙卯二月追封純忠壯烈興武大王神道碑文大提學黃景源撰今無焉慶州府尹南至薰誌
당나라 문종 태화9년, 흥덕왕 10년 을묘(835)년 2월 순충장렬흥무대왕에 추봉하였다. 신도비문은 대제학 황경원이 찬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경주부윤인 남지훈이 묘지를 썼다.
正廟壬子四月因太王納陵致祭命降香祝致享 隆熙己酉當南巡命官降祝與 崇善殿一體致祭慶州有遺墟地財買井西岳書院軍威孝令祠江陵花浮祠鎭川吉祥祠
정조 임자(1792)년 4월에 태왕(수로왕)의 납릉에 치제하고 향과 제사에 쓰일 물건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융희 기유(1909)년 당시 남쪽을 순행할 때 관원에게 명하여 축(축문?)을 내리라고 명하고 숭선전에서 함께 치제하였다. 경주에 유적지인 재매정과 서악서원이 있고, 군위에 효령사, 강릉에 화부사, 진천에 길상사가 있다.
夫餘白馬江窺巖上釣龍處立碑紀蹟扶安邊山影閣豊基竹嶺上有別祠金溝金山寺遺蹟碑 羅州夢灘江有遺蹟光州竹坊村壯烈祠大邱祥德祠茂長南山祠山淸忠壯祠以上四處今無焉生六男
부여 백마강의 바위위에 용을 낚았다는 곳에 비를 세워 유적을 기념하고 있으며, 부안 변산에는 영각(影閣)이 있고, 풍기의 중령위에는 별도의 사당이 있으며, 금구의 금산사 유적비와 나주의 몽탄강에 유적이 있고, 광주 죽방촌의 장렬사, 대구 상덕사, 무장 남산사, 산청 충장사의 이상 4곳은 지금 없다. 6명의 아들을 낳았다.
配慶州金氏新羅太宗王第二女洛國公主平壤郡夫人追封興武王后 ○墓無傳生五子神文王歲賜南城租千石嘉夫人內助之陰功也
부인은 경주김씨로서 신라태종의 둘째 따님이며, 낙국공주 평양군 부인으로서 흥무왕후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전하지 않고 5명의 아들을 낳았다.
○신문왕 시대에 남성에 1천석의 곡식을 내리니 이는 부인이 내조한 남모르는 공덕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서현의 子 欽純(흠순) <子 盤屈>
新羅大將軍唐太宗貞觀八年戊辰與唐將李勣伐高句麗滅之又伐倭克之又伐渤海克之
신라 대장군으로서 당태종 정관 8년 무진(668)년에 당나라 장수 이적과 같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1] 또 왜를 정벌하여 이겼으며 또 발해를 정벌하였다.
[1]당 고종 건봉 3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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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女 月娥(월아)
又云文姬
또는 문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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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女 姮娥
又云寶姬
또는 보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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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女 新羅文明王后(문명왕후)
子法敏次文武王次仁問次仁泰並將軍次老旦次智鏡次愷元並角干
諱仙娥又仙姬 太宗王妃
아들은 법민이고 다음은 문무왕이고[1] 다음은 인문이고 다음은 인태이니 모두 장군이다. 다음은 로단이고 다음은 지경이고 다음은 개원이니 모두 각간이다.
[1]법민이 문무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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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世
유신의 子 三光(삼광) <子 允中, 允文>
官伊湌唐高宗乾封元年丙寅皇帝勅召三光爲左武衛中郎將仍令宿衛三年總章元年戊辰合唐兵滅高句麗
관직은 이찬으로 당나라 고종 건봉원년 병인(666)년에 황제(당의 고종)가 칙령으로 삼광을 불러 좌무위 중랑장으로 삼고, 숙위하도록 명령하였다. 건봉 3년이자 총장 원년 무진(668)년 당나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按東史文武王六年丙寅四月遣奈麻漢林三光如唐宿衛漢林天存之子三光金庾信之子王旣平百濟欲請兵滅高句麗故遣之帝以三光爲衛翊府中郞將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문무왕 6년 병인(666)년 4월 나마(벼슬명)로서 한림과 삼광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숙위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림은 천존의 아들이고 삼광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왕(문무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병사들을 빌려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황제(당의 고종)에게 삼광을 파견하니 삼광은 무위익부 중랑장이 되었다.
及還帝贈詩曰燦燦文星熙海東天飄揚才德子能全一振高名滿帝都三千躍馬向華邊
또 돌아올 때 황제가 시를 써 주었는데 그 내용은 ‘빛나고 빛나는 글이 별과 같이 바다의 동쪽(신라)에 태풍과 같이 떠오르는구나. 재능과 덕망은 능히 모든 나라안을 진동시켜, 고귀한 이름이 황제의 서울에 널리 알려졌구나. 3천마리의 뛰어노는 말이 영화로운 변경을 향해갔다.’고 하였다.
羅史文武王八年戊辰六月唐遼東行軍劉仁軌奉勅與宿衛沙湌金三光到党項津王使金仁問備禮迎之仁問卽武烈王子開國公之甥也
配位與墓無傳
신라의 역사에는 문무왕 8년 무진(668)년 6월, 당의 요동행군 유인궤가 칙령을 받들고 숙위하던 사찬 김삼광과 같이 당항진에 도착하니 왕(문무왕)이 김인문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환영하라 하였다고 한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왕자로서 개국공(휘유신)의 조카이다.
부인과 묘소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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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元述(원술)
官蘇判文武王時有功於國封菁陽君食邑于花開鄕始籍晋州
관직은 소판이었다. 문무왕 때 공을 세워 나라에서 청양군에 봉하고, 화개를 식읍으로 주니 진양에 살기 시작하였다.
文武王納高句麗叛衆又據百濟古地唐高宗大怒命將來討王遣將軍義福等禦于帶方之野敗績公欲戰死爲淡陵所止及還父公曰元述不惟辱王命亦負家訓可斬也
문무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자,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며 장차 가서 <신라를> 토벌하겠다고 하고 장군 의복 등을 대방의 들로 보내었다. 계속 <신라가> 패배하자 공이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담릉이 말려서 돌아왔다. 부친인 공(휘유신)이 말하기를 원술은 생각없이 왕명을 욕되게 하고 또한 가훈을 어겼으니 죽여야 한다고 했다.
王赦之公慚愧不敢見父公遁於田野父卒見母夫人夫人曰汝父以汝不以爲子吾焉 得以汝爲子終不見公歎曰爲淡陵所誤至於此極乃入太白山後唐兵來攻買蘇川城公欲雪前恥力戰有功賞以不用於父母憤恨不仕以終其身載輿地勝覽
왕이 사면하여주자 공(휘원술)이 매우 부끄러워하며 감히 부친(휘유신)을 보지 못하였다. 공이 시골에 숨어 지내다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모친을 뵙고자 하였으나 모친이 말하길 너희 아버지는 너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 나도 너를 자식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고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담릉이 잘못한 것이 이렇게 까지 되었다 하고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후에 당나라가 매소천성을 공격해오니 공이 이전의 부끄러움을 씻으려고 힘을 다해 싸워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여지승람에 실려있다[1]
[1]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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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元貞(원정)<子 王巽>
官海干
配與墓無傳
관직은 해간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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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長珥(장이)
官大阿湌
配位與墓無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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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元望(원망)
官大阿湌
配位與墓無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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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子 施得(시득)
<謹按>天官夫人子
삼가 살펴보면 천관부인에게서 난 아들이다.
○朝鮮歷代史略文武王十五年唐高宗儀鳳元年丙子冬十一月沙湌施得與唐將薛仁貴戰於所夫里克之先是王納 高句麗版衆 又據百濟古地使人守之唐帝大怒時王弟仁問在唐帝立以位王使歸國仍拜鶴林大都督開府儀同三司以劉仁軌爲鶴林道大總管發兵伐之
○조선 역대사략에 문무왕 15년, 당 고종 의봉원년 병자(676)년 11월에 사찬 시득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 소부리에서 싸워 이겼다고 되어 있다. 이보다 먼저 왕(문무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자 당의 황제가 크게 화를 내었다. 이 때 왕의 동생이 인문이 당나라에 있어, 황제가 그를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또 학림대도독 개부의동 삼사에 봉하였다. 유인궤(劉仁軌)를 학림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仁軌先進克七重城今積城華屬連川王遣使謝罪唐赦之仁問行至中道聞之還入唐唐改封臨海郡公先時王益多取濟地遂抵麗南境爲州郡唐兵與契丹靺鞨數來侵奪我兵皆克之至
유인궤가 먼저 공격해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에게 이겼다.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화에 속한 연천이다. 왕(문무왕)은 사신을 보내 사죄하니 당나라가 용서하였다. 인문은 오던 중간에 이 소식을 듣고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당은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이보다 먼저 왕(문무왕)은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여러 번 침략해 왔으나 우리 군사가 모두 이겼다.
是施得又以船兵與仁貴戰始不利更進與戰二十餘皆捷斬首四千餘級自是唐兵遂不至
이 때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으나 처음에는 불리하였고, 다시 나아가 싸워 20여회의 싸움에서 적들을 모두 사로잡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 때부터 당나라 병사는 마침내 다시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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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순의 子 盤屈(반굴)
新羅太宗庚申七月唐將蘇定方伐百濟時從角干黃山之戰四戰不利力戰死之贈大阿湌
신라 태종 경신(660)년 7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각간(휘유신)을 따라 황산의 전투에서 4번을 싸웠으나 불리하여 공(반굴)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대아찬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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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
삼광의 子 允中(윤중) <子 長淸>
官大阿湌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東史唐開元二十一年新羅聖德王三十二年癸酉九月唐以渤海靺鞨入寇帝詔曰新羅舊將金庾信孫允中之賢可謂將入送仍賜允中金帛於是王命允中及其弟允文等將兵會唐軍伐渤海因天大雪而還
○우리 역사서에 당나라 개원 21년, 신라 성덕왕 32년 계유(733)년 9월에 당나라에 발해와 말갈의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황제(당의 현종)가 조서를 내려 말하되 ‘신라의 옛 장수인 김유신의 손자인 윤중이 현명하여 가히 장수라 할만하니 들어오게 하라.’하고 또 윤중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다. 이에 왕(성덕왕)은 윤중과 그의 동생 윤문 등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여 당나라 군사와 같이 발해를 정벌하라고 하였으나 하늘에서 눈이 많이 내려 돌아왔다.
大曆十四年惠恭王己未王以庾信嫡孫擢爲大阿湌寵遇之勸獎忠孝賜絶影島山馬一匹
대력 14년 혜공왕 기미(779)년에 왕(혜공왕)이 <윤중을> 유신의 적손으로 발탁하여 대아찬에 임명하고 특별히 총애하고 충효를 권장하며 절영도의 산에서 가져온 말 한 마리를 주었다.
配李氏父阿湌興德 ○墓失傳生一男以上見甲寅譜
부인은 이씨로서 아찬 흥덕의 따님이다. ○묘소는 잃어버렸고 1남을 낳았다. 이상은 갑인보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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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광의 子 允文(윤문)
官上將軍
配位與墓無傳
관직은 상장군이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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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의 子 王巽(선)
官判吏部事
有子巖官侍郞司天大博士舊譜載錄而又侍郞公長淸弟載錄而又以允中孫懸錄也晋州金氏譜牒以元述曾孫載錄也 兩金之互錯未知何據故姑記于此以俟博考焉
관직은 판리부사를 지냈다.
아들인 암은 관직이 시랑과 사천대박사를 지냈다고 구보에 기록되어 있다. 또 시랑공 장청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 윤중의 손자로 되어있다. 진주김씨 보첩에는 원술의 증손으로 되어있다. 양 김씨의 착오는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기록을 폭 넓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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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世
윤중의 子 長淸(장청)
官執事侍郞新羅孝成王時有勳封伽倻君舊譜開國公曾孫執事侍郞長淸作公行錄十卷無傳
配密陽朴氏父中郞將<槍出東京誌>舊譜配位墓所與生卒無傳
관직은 집사시랑을 지냈다. 신라 효성왕 때 공훈이 있어서 가야군에 봉해졌다. 구보에는 개국공(휘유신)의 증손으로 되어있다. 집사시랑 장청이 작성한 공(휘유신)의 행록 10권은 전하지 않는다.
부인은 밀양박씨로서 그의 부친은 중랑장을 지냈다. <동경지에 나옴> 구보에는 부인과 묘소와 생졸은 전하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金海金氏大同世譜山系終(김해김씨 대동세보 산계 끝)
<別章>
正德草本舊譜贋眞辨解全(정덕초본 구보 안진변해 전)
一世
雄元(웅원)
字俊汝新羅憲德王時官伊湌唐憲宗元和十四年憲德王十年己亥七月唐鄆州節度使李師道叛憲宗將兵討之徵兵於羅王王以公命大將軍師甲兵三萬助之勝捷後還鄕號金州逸民
配上黨郡夫人韓氏父江西守峻 ○墓三陟平原洞後山
자(字)는 준여이다. 신라 헌덕왕(809~826)때 관직이 이찬이었다. 당나라 헌종 원화 14년, 헌덕왕 10년 기해(819)년 7월에 당나라의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이 이를 토벌하고자 신라에 병사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헌덕왕)은 공에게 대장군사로 명하고 갑병 3만명을 주어 당나라를 도와서 이긴 후 귀향하였다. 호는 금주일민이다.
부인은 상당군 부인 한씨로서 서강의 수령인 한준의 따님이다. ○묘소는 삼척 평원동의 뒷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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雄允(웅윤)
宣德朝人
선덕왕 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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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웅원의 子 擎柱(경주) <子 成海, 成岱>
文聖王朝使于唐奏對稱之號擎天齋
配金氏父淸海鎭大使祐徵 ○墓長山原
문성왕(839~856)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아뢰고 서로 마주 교지를 전하였다(?). 호는 경천재이다. 부인은 김씨로서 청해진사[1] 김우징(뒤에 신무왕, 839~839)의 따님이다[2]. ○묘는 장산언덕에 있다.
[1]흥덕왕이 죽자 흥덕왕의 사촌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悌隆: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는데, 제륭측이 이겨 희강왕이 되고 균정측이 패하였다. 따라서 균정을 지지하던 김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도망하여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였다. 이때의 우징의 벼슬은 아찬(阿湌)이었다.
[2]그렇다면 문성왕은 휘경주의 처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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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경주의 子 成海(성해) <子 挺喆>
號海陵先生官都觀郞歷事三朝唐天符間與孤雲崔致遠較才入唐奉勅還朝所撰漁樵子詩集文詞入唐行于世
配張氏父靑海大使保皐○墓江西云
호는 해릉선생이고 관직은 도관랑[1]에 이르렀으며 3조를 거쳤다. 당나라의 천부(乾符,874~879 의 誤記)에 최고운(최치원,857~?)과 같이 재능을 견주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칙서를 가지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찬술한 어초자[2] 시집에서 당나라에 들어갔던 사실을 찾을 수 있으며 세상에 전한다.
부인은 장씨이고 청해대사[3] 장보고(?~846)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고 한다.
[1]도관랑(都觀郎) 이라는 벼슬은 없고, 도관(都官)이라는 것은 있는데 이는 신라 시대에는 육부(六部)를 각각 다스리던 관아(監典)에 소속된 관직이고, 고려 시대에는 노비의 문서와 호적 및 그 소송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을 말하며, 이 관청에서 일하는 직업 중에 낭중(郎中)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중에 정랑(正郞), 직랑(直郞) 등으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다.
[2]漁樵子;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며 사는 사람.
[3]삼국사기에 기재된 정식명칭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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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子 成岱(성대)
憲康朝人
헌강왕(875~886) 때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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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성해의 子 挺喆(정철) <子 琇胤, 玉胤>
定康王時値裔萱之叛公以大摠管禦之而卒王親臨禮葬于豊山
정강왕(886~887) 때에 견훤(867~935)의 반란을 진압할 때 공이 대총관으로서 방어하다가 죽었다. 왕이 친히 장례를 치르고 풍산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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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정철의 子 琇胤(수윤) <子 天授, 天與>
號逸休齋官侍郞時朝野大亂明亮知機退去田里有詩曰今日江湖客當時勇退人壺中一片土閒臥守吾天
配完山郡夫人李氏父守慈○墓陽城
호는 일휴재이고 관직은 시랑이었다. 이때 조야(나라)에 큰 난이 일어날 것을 분명히 그 낌새를 알아채고 모두들 도망가자 공도 역시 물러나 시골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해오는 시가 있으니 ‘오늘 강호의 손님이 당시 과감히 물러나 투호병 속의 한 조각 흙 틈에 누워 우리의 하늘을 지킨다.’고 하였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 이씨로서 완산의 수령인 이자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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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子 玉胤(옥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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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수윤의 子 天授(천수) <子 商佐>
號西峯先生官至大角干定康朝以禮召之不次用之唐德宗先啓奉使以卒返襯禮葬于陽城
配完山郡夫人李氏父隱士巨仁 ○墓箕山原
호는 서봉선생이고 관직은 대각간이 이르렀다. 정강왕(886~887)[1] 때 왕이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당나라 덕종(779~804) 선계[2]에 사신으로 갔다가 죽어서 관이 돌아왔다. 예로서 양성에 장사지내었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 이씨로서 숨어사는 선비인 이거인의 따님이다. 묘는 기산언덕에 있다.
[1]휘천수의 조부인 휘정철도 정강왕때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연대오류가 있음.
[2]先啓라는 연호는 없고 광계(885~888)는 희종의 연호임, 정강왕 때 왕이 예를 갖추어 부르고, 돌아가신 연대는 그 보다 이전이니 연대오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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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윤의 子 天與(천여) <子 商補>
仕至太保
配李氏父侍中芳器
벼슬은 태보[1]에 이르렀다. 부인은 이씨이고 시중을 지낸 이방기의 따님이다.
[1]太保; 1068년(문종 22년)에 제정된 동궁(東宮)의 종1품 벼슬, 곧 태자태보(太子太保)임. 태보를 지냈다면 형인 휘천수와 약 300년의 차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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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천수의 子 商佐(상좌)<子 浩>
佐高麗太祖與卜智謙裴玄慶等定鼎松岳爲元勳三重大匡
配沔川郡夫人卜氏父麗太祖元勳三重大匡武烈公智謙 ○墓國土洞
고려 태조를 도와 복지겸, 배현경 등과 같이 송악에 나라를 세우고[1] 원훈이 되었다. 삼중대광을 지냈다.
부인은 면천군 부인 복씨로서 고려태조 원훈 삼중대광 무열공 복지겸의 따님이다. ○묘는 국사동에 있다.
[1]918년 6월임. 따라서 부친인 휘천수와 약 100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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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의 子 商補(상보)<子 潤>
官小保
配金氏父司從益善
벼슬은 소보[1]이다. 부인은 김씨이고 사종을 지낸 김익선의 따님이다.
[1]小保; 1031년에 제정된 고려 때의 태자부(太子府)의 종2품 벼슬. 곧 태자소부(太子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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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
상좌의 子 浩(호)<子 華齋>
號靑巖翰林知製誥寶文閣大提學享年一百一
配平山郡夫人申氏父麗太祖元勳三重大匡壯節公崇謙曾祖大將軍武元
호는 청암이다. 한림[1]/지제고[2]/보문각대제학[3]을 지냈다. 나이 101세에 돌아가셨다. 부인은 평산군 부인 신씨로서 고려 태조 원훈 삼중대광 장절공 신숭겸(?~927)의 따님이며 증조는 대장군 신무원이다.
[1]翰林院; 고려시대에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은 관청.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없었음.
본래 원봉성(元鳳省)이라 하던 것이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뀌었다가 현종(1010~1031년) 때 다시 한림원으로 바뀜. 1275년(충렬왕 1년)에 문한서(文翰署)라 하였고 뒤에 다시 사림원(詞林院)이라 하였으며 1308년(충렬왕 34년)에 사관(史館)과 합쳐져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고 불림.
재상(宰相)이 겸하는 판원사(判院事)와 학사승지(學士承旨-정3품), 학사(學士-정4품), 시독학사(侍讀學士-정4품), 시강학사(侍講學士-정4품) 등의 벼슬아치가 있음.
[2]知制誥;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인 조서 또는 교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 한림원(翰林院), 보문각(寶文閣)의 벼슬아치들이 겸임함. <동의어> 지제교 (知製敎)
[3]寶文閣; 1116년(예종 11년)에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름 있는 문신들을 불러들여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게 하다가 이후 궁궐 밖 건물로 옮겨가면서 이름을 보문각이 라고 고침. 이 때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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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보의 子 潤(윤)<子 泰齋>
有德行不就仕宦
配洪氏父大海
덕행이 있었으며 벼슬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홍대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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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호의 子 華齊(화제)<子 振酉>
號月簑翁登第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
호는 월장옹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도첨의/좌정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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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 子 泰齊(태제) <子 德裕>
官監務
配具氏父師孟
관직은 감무[1]를 지냈다. 부인은 구사맹의 따님이다.
[1]監務; 고려의 예종(1105~1122) 때 제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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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
화제의 子 振酉(진유)<子 承意, 繼意, 追意>
號退休齋登第太學士光宗九年戊午五月始設科以僧惠居爲掌試公極諫王不聽退居金馬渚
配貞烈夫人信川康氏父西北巡檢使兼吏部尙書兆
호는 퇴휴재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태학사를 지냈다. 광종 9년 무오년 5월에 과거제를 설치하여 중 혜거[1]를 시험담당관으로 임명하자 공이 극력 간언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와 금마저에 살았다. 부인은 정렬부인 신주강씨이고 서북의 순검사겸 이부상서를 지낸 강조[2]의 따님이다.
[1]혜거(惠居); ?∼974(광종 25). 고려 초기의 고승. 성은 박씨(朴氏). 초명은 지회(智回). 자세한 생애는 미상이며, 16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의 도가 높아지자 왕이 여러 번 청하여 법문을 듣기를 원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947년(정종 2) 왕사가 되었고, 968년에 국사가 되었다.
[2]강조(康兆, ?∼1010(현종 1); 고려의 무신. 황해도지방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목종 때 중추사 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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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제의 子 德裕(덕유)<子 敬意>
官摠郞
配金氏父洛賢
관직은 총랑을 지냈다. 부인은 김락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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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
진유의 子 承意(승의)<子 天精>
光宗朝神虎衛上將軍爲御史奉使金陵
配開城郡夫人王氏父匡廉
광종 때에 신호위상장군을 지냈다. 어사가 되어 사신을 모시고 금릉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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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의 子 繼意(계의)<子 淵精>
配閔氏父判典校倫
부인은 민씨이고 판전교를 지낸 민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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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의 子 追意(추의)<子 澤精>
官中書令
配閔氏父侍郞濱
관직은 중서령[1]을 지냈고 부인은 시랑을 지낸 민빈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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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의 子 敬義(경의)<子 益城>
官密直使
配咸豊郡夫人李氏父泓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고, 부인은 함풍군부인 이씨로서 이홍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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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世
승의의 子 天精(천정)<子 恒齡>
登第三重大匡兵部尙書諡文忠公使于契丹請和而還
配貞烈夫人金氏父大良君詢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병부상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충공이다. 사신으로 거란에 가서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부인은 정렬부인 김씨로서 대량군 김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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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의 子 淵精(연정)
配安氏父禹
부인은 안우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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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의 子 澤精(택정)<子 德齡>
官侍中
配南陽郡夫人洪氏父典校脩
시중을 지냈고 부인은 남양군 부인 홍씨로서 전교를 지낸 홍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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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의 子 益城(익성)<子 華岳>
官監務
配水原崔氏
관직은 감무를 지냈고 부인은 수원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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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世
천정의 子 恒齡(항령)<子 洙聖>
號泰平齋神虎衛上將軍
配晉陽郡夫人姜氏父平章事燦
호는 태평재이며 신호위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진양군 부인 강씨이고 평장사를 지낸 강찬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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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정의 子 德齡(덕령)<子 潙聖>
配李氏父判典校濟
부인은 이씨로서 판전교를 지낸 이제[1]의 따님이다.
[1]이제(李濟); ?∼1398(태조 7). 고려말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성주호장 장경(長庚)의 고손(高孫)이자 조년(兆年)의 증손이며, 권신 인임(仁任)의 아우인 인립(仁立)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1352년(공민왕 1) 좌대언(左代言)이 되고, 이해 밀직제학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1등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하였으며, 1392년(공양왕 4)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살해에 가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를 거쳐, 1393년(태조 2)우군절제에 올랐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일파로 몰려 이방원(李芳遠)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세종 때에 신원되어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후사가 없어서 조카 윤(潤)으로 뒤를 이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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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의 子 華岳(화악)<子 光澤>
官典廐署承
配姜氏父咸
관직은 전구서승을 지냈고, 부인은 강함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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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世
항령의 子 洙聖(수성)<子 商欽, 商賢, 商寅>
三重大匡戶部尙書與姜邯贊率師拒女眞
配南陽郡夫人洪氏父龍虎軍校尉潁
삼중대광/호부상서를 지냈다. 강감찬(948∼1031)과 같이 장수들을 이끌고 여진의 침입을 막았다. 부인은 남양군부인 홍씨로서 용호군교위를 지낸 홍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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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령의 子 潙聖(위성)<子 商眞>
奉先庫判官
配墓無傳
선고판관을 지냈으며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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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의 子 光澤(광택)<子 東燁>
配李氏父元植
부인은 이원식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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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世
수성의 子 商欽(상흠)<子 成雨>
顯宗朝爲大司成上疏封崔致遠爲文昌候配先聖廟後爲金州伯大提學
配貞烈夫人丹陽禹氏父左思補儞{偁}
현종 때에 대사성이 되어 최치원을 문창후에 봉하고 최치원의 부인을 선성묘에 모시라는 상소를 올리고 이후에 금주백 대제학이 되었다. 부인은 정렬부인 단양 우씨로서 좌사보를 지낸 우이(또는 칭)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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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의 子 商賢(상현)<子 成洙>
右軍兵馬
配金氏
우군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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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의 子 商寅(상인)<子 成泗>
按察使
配淸州郡夫人韓氏父諫議大夫奎
안찰사를 지냈고 부인은 청주군 부인 한씨로서 간의대부를 지낸 한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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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潙聖>子 商眞(상진)<子 佑鐸>
配崔氏父漢功
부인은 최한공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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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澤>子 東燁(동엽)<子 兌一>
官代言
配朴氏父漢
관직은 대언을 지냈고 부인은 박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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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世
<商欽>子 成雨(성우)<子 日曙>
號甘霖先生輸忠贊化功臣右文館大提學宋仁宗明道之間欲斥契丹與柳韶受命■(創)築北界關城自西海濱東傳于海千餘里運石遠地完築有褒賞封爵名載麗史及東國地誌歷史以侍郞公諱長淸十六世孫載錄焉
配文化郡夫人柳氏父大將軍淸臣
호는 감림선생이다. 수충찬화공신/우문관대제학[1]을 지냈다. 송나라 인종(1022~1063)의 명도연간(1032~1033)에 거란을 막고자 류소[2]와 같이 북계관성을 축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해의 바닷가로부터 동쪽의 바다까지 천 여리의 거리를 돌을 운반하여 축성을 완성하였다. 이 공로로 포상을 받고 봉작되었다. 이름이 고려사와 동국지지의 역사에 실려 있는데 시랑공 휘장청의 16세손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부인은 문화군부인 류씨로서 대장군 류청신[3]의 따님이다.
[1]右文館大提學; 1308년(충렬왕 34년)에 설치된 우문관(右文館)의 정2품 벼슬.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2]유소(柳韶, ?∼1038); 고려의 명신(名臣). 정주유씨(貞州柳氏)의 시조라고도 전한다.
1011년(현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1016년에 어사잡단(御史雜端), 1019년 사헌중승(司憲中丞), 1022년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고, 이어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1029년 왕명으로 흥화진(興化鎭) 서북쪽 40리에 있던 석성(石城)을 수리하여 위원진(威遠鎭)을 두고, 흥화진 북쪽에 있던 석보(石堡)를 수축하여 정융진(定戎鎭)을 두어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때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난을 일으켜 흥료국(興遼國)을 세우고 고려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현종이 응하지 않았다. 이때 서북면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로 상중(喪中)에 있었으나 한(漢)의 승상 책방진(翟方進)의 고사를 들어 흥료의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1030년 중추사(中樞使), 1031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었고, 그해 덕종이 즉위하자 중군병마사를 거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033년(덕종 2) 왕명으로 북경관성(北境關城:千里長城)을 쌓았는데, 그것은 서해안의 압록강 하구에서 동으로 위원등 13성을 거쳐 화주(和州)에 이르는 1, 000여리에 걸치는 것이었다.
1034년 장성축조의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에 봉하여졌으며, 은청광록대부 상주국 대위 문하시랑평장사(銀靑光祿大夫上柱國大尉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덕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의(襄懿)이다.
[3]유청신(柳淸臣); ?∼1329(충숙왕 16). 고려 충렬왕 때의 역관(譯官)·재상. 본관은 고흥(高興). 본래 이름은 비(庇).
공민왕 때 좌정승을 지낸 탁(濯)의 할아버지이다.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에서 출생하였으며, 선대는 대대로 그곳의 부곡리(部曲吏)였다. 몽고어를 잘 하여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서 내왕하였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에 임명되었다. 고려시대에 부곡리가 5품을 넘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허통(許通)되어 장군에 올랐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1294년(충렬왕 20)에 우승지가 되었고, 1296년에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해에 세자(뒤의 忠宣王)의 요청에 의하여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되었으며, 조인규(趙仁規)·인후(印侯)와 함께 원나라에 파견되어 충렬왕의 전위표(傳位表)를 전달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광정원부사(光政院副使)로서 참지기무(參知機務)를 겸하였고, 곧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충렬왕이 복위하고 인후 등에 의하여 한희유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나자 여기에 연루되어 원나라에 압송되었으며, 1299년에 차신(車信)·최유엄(崔有?)·오인영(吳仁永)·유복화(劉福和)·홍선(洪詵) 등 충선왕 지지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복직되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으며, 당시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충선왕의 환국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307년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옹립의 공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도첨의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로 중용되었다.
이때 원나라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곧 도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강등되었지만 1313년에 다시 정승에 올라 1321년(충숙왕 8)까지 재임하였다.
1320년에 원나라에서 충선왕이 고려인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참소를 받아 토번(吐蕃)으로 유배되고, 다음해에 충숙왕 역시 참소를 받아 원나라로 소환되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그곳에서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심왕 고(瀋王暠)에게 붙어 심왕옹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오잠(吳潛)과 함께 고려에 원나라의 내지(內地)에 설치된 행성(行省)을 두자는,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을 벌였으며, 충숙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무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이 모두 실패하고 1325년에 충숙왕이 환국하자, 처벌될 것이 두려워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말년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 때문에 《고려사》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되었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비고]류소와 류청신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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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賢>子 成洙(성수)<子 萬濟>
平壤君贈左贊
配海州郡夫人崔氏父侍中文憲公沖
평양군에 봉해졌고 좌찬성[1]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해주군 부인 최씨로서 시중을 지낸 문헌공 최충[2]의 따님이다.
[1]左贊; 1277년 제정된 좌찬덕(左贊德), 우찬덕(右贊德), 좌찬성(左贊成)은 조선시대 관직명 임
[2]최충(崔沖, 984(성종 3)∼1068(문종22); 고려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온(溫)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여 《칠대실록 七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뒤 우보궐(右輔闕)·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漢)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으며, 정종초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변경에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 문종이 즉위하여 문하시중이 되자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였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의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가 내려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문하시중 상주국 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이 내리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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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寅>子 成泗(성사)<子 陽曙>
配李氏父茂
부인은 이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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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眞>子 佑鐸(우탁)<子 碩挺>
官司醞署令
配李氏父師東
관직은 사온서령을 지냈다. 부인은 이사동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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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燁>子 兌一(태일)<子 南赫>
官三司副事
配鄭氏父漢弼
관직은 삼사부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한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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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世
<成雨>子 日曙(일서)<子 匡國>
高麗文宗朝臨海侯
配完山郡夫人崔氏父禮賓卿碩
고려 문종(1046~1083) 때 임해후를 지냈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 최씨로서 예빈경을 지낸 최석[1]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에 있다.
[1]최석(崔碩) ;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1277년(충렬왕 3) 탐라(耽羅)에 크게 기근이 들었을 때 위무차 순시하였다. 이후 벼슬이 누진하여 승평부사(昇平府使)가 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1281년에 비서랑(祕書郎)이 되었다. 승평부의 풍속에 읍의 수령이 갈릴 때마다 반드시 말을 주었는데, 부사(府使)는 8필, 부사(副使)는 7필, 법조(法曹)는 6필씩 마음대로 골라가게 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관례에 따라 말을 고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말을 고르지 않았을 뿐더러 고을 사람들이 억지로 딸려 보낸 말을 서울에 도착해서는 다시 돌려보내니, 그 뒤로는 그러한 폐단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 때 7필의 말을 보냈는데 오던 도중 새끼를 낳아 8필이 되었다. 모두 돌려보내어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워 팔마비(八馬碑)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현재 순천시 죽도봉공원에 그를 기리는 팔마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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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洙>子 萬濟(만제)<子 慶雄>
配崔氏父都觀郞卓
부인은 도관랑을 지낸 최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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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泗>子 陽曙(양서)<子 邦寶>
配洪氏父生員繼河
부인은 생원 홍계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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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佑鐸> 子 碩挺(석정)<子 啓夏>
官都制庫判官
配朴氏父世煥
관직은 도제고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박세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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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一> 子 南赫(남혁)<子 重鉉>
官侍中
配碧珍郡夫人李氏父兆年
관직은 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벽진군 부인으로서 이조년[1]의 따님이다.
[1]이조년(李兆年, 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농17西郡公)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이어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전(瑞興侯琠)으로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되었는데, 이때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뒤 귀양에서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왕위 찬탈을 음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으며, 이런 엄격한 성품 때문에 꺼림을 받았다.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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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世
<日曙>子 匡國(광국)<子 宗栢>
宣宗朝翰林集賢殿大提學
配密陽郡夫人朴氏父平章事龜壽
선종 때 한림[1]/집현전대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밀양군부인 박씨로서 평장사를 지낸 박귀수의 따님이다.
[1]翰林院;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은 관청. 본래 원봉성(元鳳省)이라 하던 것이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뀌었다가 현종(1010~1031년) 때 다시 한림원으로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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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濟>子 慶雄(경웅)<子 道意>
官監務
配奇氏父堂后官泳
관직은 감무를 지냈고 부인은 당후관을 지낸 기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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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曙> 子 邦寶(방보)<子 兌顯>
配金氏父振鐸
부인은 김진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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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挺> 子 啓夏(계하)<子 昌海>
官嘉靖大夫
配貞夫人尹氏父國憲
관직은 가정대부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윤씨로서 윤국헌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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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赫> 子 重鉉(중현)<子 德相>
進士
配吳氏父慶起
진사를 지냈다. 부인은 오경기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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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世
<匡國> 子 宗栢(종백)<子 繡>
號蘭橈翁登第第三人重大匡左政丞
配樂浪郡夫人尹氏父右政丞宣佐
호는 란병옹이다. 과거시험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중대광/좌정승을 지냈다. 부인은 낙랑군부인 윤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윤선좌[1]의 따님이다.
[1]윤선좌(尹宣佐); 1265(원종 6)∼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수(淳?). 문하시중 관(瓘)의 7대손이다.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288년(충렬왕 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김해장서기(金海掌書記) 가 되었다가 비서랑(?書郎)·직문한서(直文翰署)에 보임되었다. 충선왕초에 좌정언에 임명되고, 이어 우사보(右思補)·내서사인(內書舍人)·선부의랑(選部議郎)에 전직되었다.
그 뒤 전라도지방을 안찰할 때 강직함이 알려져 도율령(都律令)으로 승직, 충숙왕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듣고 즉위하여 성균좨주에 제수하고 부인(符印)을 관장하게 하였다. 곧 이어 사헌집의가 되어 윤신걸(尹莘傑), 백원항(白元恒)과 더불어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진강하였다.
그 뒤 일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집의에 임명되었다.
1322년(충숙왕 9)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이 왕을 폐하고 심왕 고(瀋王暠)를 대신 세우려는 책동을 부리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대간·문한(文翰)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그 계획을 좌절시켰다. 왕이 원에 머문 지 5년이 되어 재정이 부족하였는데 심왕 고의 일당이 사정을 알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운반을 저지하자, 감찰관 조관(趙琯)을 움직여 운송하도록 하였다. 왕이 귀국하자 판전교(判典校)가 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윤(漢陽尹)을 겸하였으며, 1331년(충혜왕 1) 이윤(伊尹)의 고사를 들어 앞당겨 치사하였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다시 계림윤(鷄林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에 제배(除拜)되었다가 치사하였다.
1343년 자녀들에게 가업을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화목할 것을 훈계한 뒤 죽었다.
경학에 밝고, 노장(老莊)·형명(刑名)의 학도 연구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대 표전(表箋)을 많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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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雄> 子 道意(도의)<子 夢龜>
大將軍
대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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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邦寶> 子 兌顯(태현)<子 一興>
官都觀郞
配宋氏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으며 부인은 송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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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夏> 子 昌海(창해)<子 成麗>
配韓氏父有迪
부인은 한유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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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鉉> 子 德相(덕상)<子 振溟>
官奉事
配李氏
관직은 봉사를 지냈고 부인은 이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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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世
<宗栢> 子 (繡(수)<子 以琢>
號設門齋高麗仁宗朝檢校神虎衛上將軍公討平逆臣李資謙等又西京守趙匡叛討平之
配長山國夫人東萊鄭氏父代言知常
호는 설문재이다. 고려 인종(1122~1146) 때 검교[1]신호위 상장군을 지냈고 역신 이자겸[2]을 토벌하였고, 또 서경(평양)의 수령으로 있던 조광[3]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부인은 장산국[4]부인인 동래정씨로서 정지상의 따님이다.
[1]檢校; 고려 말~조선 초기, 어떤 관청에 정원외에 임시로 벼슬아치의 수를 늘렸을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의 관직 이름 앞에 붙이는 말. 이 때는 없었음.
[2]이자겸의 난 ; 고려사 열전-인종 공효대왕(仁宗 恭孝大王) 갑진2년 편 참고
(1126년 2월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과 공모하여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그는 당대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인 지원(之元)의 장인 )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섰다. 약속된 날 밤 그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했다. 이를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리를 이끌고 가서 궁성을 포위한 뒤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에 놀란 왕은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했으나,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의논을 겁내었으며 더구나 재종형제간인 이수(李壽)가 반대하여 저지되었다.)
[3]조광의 난; 1135년 1월
[4]萇山國; 동래에 있었던 옛 나라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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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意> 子 夢龜(몽귀) <子 旻精>
配姜氏父啓夏
부인은 강계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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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顯> 子 一興(일흥) <子 世煥>
配李氏父厚榮
부인은 이후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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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海> 子 成麗(성려) <子 謜振>
進士
配金氏父完
진사였으며 부인은 김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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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相> 子 振溟(진명)<子 萬雄>
配李氏父賢
부인은 이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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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世
<繡> 子 以琢(이탁) <子 瑞天>
號淸源毅宗朝侍御史奸黨鄭仲夫等作亂大殺朝士公奏請濟尸奸黨惡之竄遂以卒
配貞夫人申氏父評理使{山+吳}
호는 청원이고 의종(1146~1170)때에 시어사로서 간당 정중부(1106~1179)가 난[1]을 일으켜 조정의 선비들을 많이 죽이자 공이 시신을 수습하기를 청하였으나 간당들이 무고한 죄를 씌워 죽였다. 부인은 정부인 신씨로서 평리사 신오?의 따님이다.
[1]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편
1170년 8월 정축일에 왕이 보현원에 행차하려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을 불러서 술을 따르게 하고, 술이 취하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장하도다. 이 곳에다 가히 군병을 연습시킬 만하도다.”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博戱)를 하라고 하였다. --- 중략 ---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난이 일어남을 알고서 중로에서 거짓 취한 체하고 말에서 떨어져 도망하고, 한뇌는 친한 환관에 의탁하여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 왕의 침상(寢床)아래로 숨었다. --- 중략 --- 이에 승선 이세통(李世通), 내시(內侍) 이당주(李唐柱), 어사잡단 김기신(金起莘), 지후(祉侯) 유익겸(柳益謙), 사천감(司天監) 김자기(金子期), 태사령(太司令) 허자단(許子端) 등, 무릇 호종하던 무신과 대소 신료(臣僚).환관들 모두가 죽음을 당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기를 산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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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龜> 子 旻精(민정) <子 嶠齡>
左軍兵馬使
配金氏
좌군 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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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漢精(한정)---수단하한1761년보
字明遠 配金氏
자는 명원이고 부인은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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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興> 子 世煥(세환) <子 泳>
密直司
配貞夫人李氏父仁植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이인식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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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麗> 子 謜(원) <子 重文>
官都觀郞
配淑人李氏父成三<②執義>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다. 부인은 <집의를 지낸> 이성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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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振溟> 子 萬雄(만웅) <子 德河>
執義
配鄭氏父德弘
집의를 지냈으며 부인은 정덕홍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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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二世
<以琢> 子 瑞天(서천) <子 陽喆>
志切雪讎無意仕宦率家奴等討殺鄭仲夫以復其讎後登第禮賓卿追封金紫光祿大夫司空左僕射
配碧珍郡夫人順興安氏父按察使瑛
뜻을 꺾어버리고 원수를 갚고자 벼슬에도 뜻을 두지 않고 집안의 노비들을 이끌고 정중부를 살해하여 그 원수를 갚았다. 그 후에 과거에 합격하여 예빈경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사공 좌복야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벽진군부인 순흥안씨로서 안찰사를 지낸 안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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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旻精> 子 嶠齡(교령) <子 天起>
按察使
配淸州郡夫人韓氏父琦
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청주군 부인 한씨로서 한기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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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煥> 子 泳(영) <子 益成>
右軍兵馬使
配淑夫人金氏父伯秋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으로 김백추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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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謜> 子 重文(중문) <子 守仁>
上將軍
配貞夫人姜氏父咸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강함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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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수단하한1761년보
<謜> 子 중무(重武)
配李氏父啓涵 墓在上同 繼配吳氏
부인은 이계함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吳山). 둘째 부인은 오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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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雄> 子 得河(득하) <子 致仁>
右軍兵馬使
配淑夫人趙氏父弘珍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으로 조홍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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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수단하한1761년보
<萬雄> 子 成河(성하)
字敬甫 配朴氏父秀夏 墓在原州
자는 경보이고 부인은 박수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원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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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世
<瑞天> 子 陽喆(양철) <子 是秋>
登第翰林寶文閣大提學平章事
配西平郡夫人密陽朴氏父禮門袛侯再華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보문관대제학/평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서평군부인 밀양박씨로서 예문저후를 지낸 박재화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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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嶠齡> 子 天紀(천기) <子 命海>
中書注書
配徐氏
중서주서를 지냈다. 부인은 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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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泳> 子 益成(익성) <子 尙慶>
按察使
配貞夫人李氏父湛
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이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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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文> 子 守仁(수인) <子 友珏>
監察
配恭人丁氏父應夏
감찰을 지냈다. 부인은 공인으로 정응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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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河> 子 致仁(치인) <子 聲玉>
上將軍
配金氏父洪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김홍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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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夏> 子 致賢(치현)수단하한1761년보
字信哉 配鄭氏父仲擧 墓在上同
자는 신재이고 부인은 정중거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原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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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世
<陽喆> 子 是秋(시추) <子 鎭國, 定國>
登第修文殿太學士判典理司事世子師致仕
配義城郡夫人金氏父三司副使㺶
과거에 합격하여 수문전태학사/판전리사사/세자사(세자의 스승)에 벼슬이 이르렀다. 부인은 의성군부인 김씨로서 삼사부사를 지낸 김두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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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紀> 자 命海(명해) <子 重有, 德有>
官司徒
配李氏父琇
사도를 지냈다. 부인은 이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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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成> 子 尙慶(상경) <子 命虯>
武科主簿
配恭人李氏父義行
무과에 합격하여 주부를 지냈다. 부인은 공인으로 이의행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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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수단하한1761년보
<益成> 子 重慶(중경)
字達道 配金氏父相觀 墓在吳山
자는 달도이다. 부인은 김상관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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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仁> 子 友珏(우각) <子 命秋>
官太保
配金氏父應秋
태보를 지냈다. 부인은 김응추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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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仁> 子 聲玉(성옥) <子 重鎰, 大鎰>
中郞將
配光山金氏父潤
중랑장을 자냈다. 부인은 광산김씨인 김윤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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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賢> 子 鳴玉(명옥)수단하한1761년보
字好徵 配崔氏父世重
자는 호징이고 부인은 최세중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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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世
<是秋> 子 鎭國(진국) <子 奎詳>
號鷲嶺登第三重大匡禮部尙書
配淸州郡夫人鄭氏父密直提學休
호는 취령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예부상서를 지냈다. 부인은 청주군부인 정씨로서 밀직제학을 지낸 정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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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秋> 子 定國(정국) <子 奎瑞>
號孤軒官密直提學忠宣朝己未元統一國事不平王與叔昌院妃會于金文衍之家引見諸縉紳曰卿等察時事否公對曰宋朝己亡元兵大肆憂國已長矣以此憤發而卒
호는 고헌이다. 관직은 밀직제학[1]을 지냈다. 충선왕(1308~1312)의 기미(1319)년에 원이 통일하여 나랏일이 불안해 지자 왕이 숙창원비와 김문연[2]의 집에서 회동을 하여 공을 만나보고 여러 신하?(縉紳)들에게 말하기를 ‘경 등이 살펴볼 때 어떠한가?’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송나라 조정은 이미 망하고 원나라 병사가 아주 방자하여 나라가 근심하고 있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하였다. 이로서 분통을 터트리며 죽었다.
[1]密直; 1275년(충렬왕 1년)에 추밀원사를 고쳐 부른 이름.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불렸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또다시 밀직사사로 고쳐짐. 따라서 1362년 이전에는 밀직이라는 벼슬이 없었음.
[2]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의 척신. 본관은 언양.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이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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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海> 子 重有(중유) <子 達曙>
配高氏父漢齊
부인은 고한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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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海> 子 德有(덕유) <子 彦誠>
官監務
配高氏父華濟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고화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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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慶> 子 命虯(명규) <子 景伯>
官監務
配金氏父重伯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김중백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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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珏> 子 命秋(명추) <子 時元>
配與墓無傳
부인과 묘소의 위치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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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玉> 子 重鎰(중일) <子 尙秋>
侍中
配密陽郡夫人朴氏父仲燁
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밀양군 부인으로 박중엽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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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玉> 子 大鎰(대일) <子 慶三>
配李氏父孝三
부인은 이효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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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國> 子 奎祥(규상) <子 道浹>
號竹塢登第翰林大提學
配貞烈夫人安東金氏父右政丞文衍
호는 죽오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대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정렬부인 안동김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김문연[1]의 따님이다.
[1]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의 척신. 본관은 언양.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이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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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國> 子 奎瑞(규서) <子 道洽>
仕閣老時宋亡恥胡元年號棄官還鄕
配唐城郡夫人洪氏昌
벼슬은 각로[1]이었다. 이 때 송나라가 망하여 부끄럽게도 오랑캐인 원나라의 연호를 따르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당성군 부인 홍씨이다.
[1]閣老; 일종의 정승급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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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有> 子 達曙(달서) <子 汝虎>
官知制(製)誥
配貞夫人平壤趙氏父潘
관직은 지제고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평양조씨로서 조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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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有> 子 彦誠(언성) <子 鉉祚>
配李氏父植
부인은 이식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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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虯> 子 景白(경백) <子 文淵>
配丁氏
부인은 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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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秋> 子 時元(시원) <子 三擧, 重擧>
官監務
配平山申氏父欽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평산신씨로서 신흠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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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鎰> 子 尙秋(상추) <子 在行>
配完山李氏父禮敬
부인은 완산이씨로서 이례경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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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鎰> 子 慶三(경삼) <子 相恂>
配李氏
부인은 이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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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大鎰> 子 榮三(영삼)
字華敬 配朴氏 墓在未詳
자는 화경이고 부인은 박씨이다.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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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七世
<奎祥> 子 道浹(도협) <子 湯雨>
號白巖登第禮賓卿年老致仕贈尙書省左僕射
配唐城郡夫人洪氏父平章事球
호는 백암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예빈경을 지내고 나이가 들어 상서성 좌복야를 증직받았다. 부인은 당성군 부인 홍씨로서 평장사를 지낸 홍구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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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瑞> 子 道洽(도흡) <子 聖雨>
官監務
配朴氏父重茂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박중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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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
<奎瑞> 子 道潤(도윤)
配吳氏父契周 墓在上同
부인은 오계주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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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曙> 子 汝虎(여호) <子 致三>
官監務
配晉州鄭氏父顯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진주정씨로서 정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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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彦誠> 子 鉉祚(현조) <子 元禮>
右軍兵馬使
配貞夫人申氏父相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신상관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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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白> 子 文淵(문연) <子 處賢>
上將軍
配貞夫人李氏父僉使智相
상장군을 지냈고 부인은 정부인으로 첨사를 지낸 이지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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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元> 子 三擧(삼거) <子 世彰>
配樂安金氏父監務粹徵
부인은 낙안김씨로서 감무를 지낸 김수징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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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元> 子 重擧(중거) <子 世明,世煌>
密直使
配鄭氏父日瑞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일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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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秋> 子 在行(재행) <子 鼎夏,鼎禹>
配南陽洪氏
부인은 남양홍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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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三> 子 相恂(상순) <子 成八>
配洪氏父尙翰
부인은 홍상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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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八世
<道浹> 子 湯雨(탕우) <子 萬瑞>
登第三重大匡右政丞
配彦陽郡夫人金氏父直提學屹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우정승을 지냈다. 부인은 언양군 부인 김씨로 직제학을 지낸 김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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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洽> 子 聖雨(성우) <子 萬詳>
官密直使
配貞夫人姜氏父景三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강경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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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虎> 子 致三(치삼) <子 鎭兌>
官司議
配光山金氏父潤
관직은 사의를 지냈다. 부인은 광산김씨로서 김윤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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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祚> 子 元禮(원례) <子 世綱>
配柳氏父璋
부인은 류씨로서 류장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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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淵> 子 處賢(처현) <子 守澤>
右軍兵馬
配貞夫人崔氏父仁齊
우군병마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최인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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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擧> 子 世彰(세창) <子 兌豪>
官都觀郞
配淑夫人申氏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 신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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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擧> 子 世明(세명) <子 兌起>
官奉禮
配宜人慶州李氏父天與
관직은 봉례를 지냈다. 부인은 의인 경주이씨로서 이천여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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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擧> 子 世煌(세황) <子 兌精,兌憲>
按察使
配貞夫人安東金氏父淵宅
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안동김씨로서 김연택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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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行> 子 鼎夏(정하)
配李氏父震益
부인은 이진익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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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行> 子 鼎禹(정우) <子 淸輿>
仍朝野亂入智異而卒
계속해서 조야가 시끄러워 지리산에 들어가 살다가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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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恂> 子 成八(성팔) <子 處海>
進士
配宜人李氏父崗
진사를 지냈다. 부인은 의인으로 이강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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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九世
<湯雨> 子 萬瑞(만서) <子 師孟>
同知密直使
配貞夫人文化柳氏父中郞將濯
동지밀직사[1]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문화류씨로서 중랑장을 지낸 류탁[1]의 따님이다.
[1]密直司使; 1275년(충렬왕 1년)에 추밀원사를 고쳐 부른 이름.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불렸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또다시 밀직사사로 고쳐짐. 따라서 유탁의 이전에는 밀직사라는 벼슬이 없었음.
[2]유탁(柳濯); 1311(충선왕 3)∼1371(공민왕 20). 고려의 무신.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춘경(春卿).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 청신(淸臣)의 손자이며, 판밀직사(判密直事) 유기(攸基)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귀국,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 된 뒤 고흥군(高興君)에 봉하여졌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원나라에 의해서 합포만호(合浦萬戶)가 되었다.
1345년(충목왕 1) 밀직부사가 되었고, 1348년 평리(評理)로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9년(충정왕 1)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었고, 이듬해 전라도·양광도 도순문사(全羅道楊廣道都巡問使)를 겸하여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추성양절익조공신(推誠亮節翊祚功臣)이 되고, 1351년 찬성사가 되었다. 공민왕초에는 전라도만호로 왜구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장생포 長生浦〉 등의 곡(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찬성사 판삼사사(贊成事判三司事)를 역임하고, 1353년(공민왕 2)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좌정승에 올라 고흥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장사성(張士誠)의 토벌을 위하여 원나라에서 징병을 하자 염제신(廉悌臣)과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356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나 곧 유배되었다. 다시 기용되어 1360년 경기병마도통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고 고흥후(高興侯)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남행(南幸)하게 되자 도솔원(兜率院: 坡州)까지 호종하고 경상도도순문사 겸 병마사가 되었다.
1362년 좌정승에 올라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西北面紅賊防禦諸軍都統使)가 되었고, 이듬해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진압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이해에 다시 좌정승·우정승을 거쳐 1365년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을 역임하였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죽은 뒤 추충병의동덕보리익조공신(推忠秉義同德輔理翊祚功臣)에 올랐다.
1369년 안극인(安克仁)·정사도(鄭思道)와 함께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마암(馬巖)에 크게 신축하는 데 대하여 극력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시중에서 파면되었다.
왕과 신돈(辛旽)이 죽이려 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간쟁으로 석방되었다.
1371년 신돈이 복주(伏誅)되자 그의 일당으로 노국대장공주의 장사(葬事)에 박례(薄禮)를 주장한 것이 헌사(憲司)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청교역(靑郊驛)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조선개국 후 보국고흥백(輔國高興伯)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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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雨> 子 萬祥(만상) <子 麗精>
忠穆朝以門下侍郞
配密陽郡夫人朴氏父知製敎煥
충목왕(1344~1348)때 문하시랑을 지냈다. 부인은 밀양군 부인 박씨로서 지제교를 지낸 박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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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雨> 子 萬裕(만유) <子 師孟>
字國瑞 配申氏 墓在上同
자는 국서이고 부인은 신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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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三> 子 鎭兌(진태) <子 秀垕>
官密直使
配貞夫人河氏父繼彩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하계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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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三> 子 錫兌(석태)
字元甫 配奇氏父監務玉 墓在楊州
자는 원보이고 부인은 기씨로서 감무를 지낸 기옥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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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禮> 子 世綱(세강) <子 首行>
官密直提學
配貞夫人李氏父道徵
관직은 밀직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이도징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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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賢> 子 守澤(수택) <子 世徵>
進士
配宜人申氏父珹
진사를 지냈고 부인은 의인으로 신성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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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賢> 子 鎭澤(진택)
配吳氏
부인은 오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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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彰> 子 兌豪(태호) <子 德禧>
密直使
配貞夫人平壤趙氏父監務璜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평양조씨이고 감무를 지낸 조황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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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明> 子 兌起(태기)<子 麟禧>
官同中樞
配貞夫人姜氏父司直濂
관직은 동중추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진주강씨로서 사직을 지낸 강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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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煌> 子 兌精(태정) <子 鳳輝>
右軍兵馬使
配貞夫人慶州李氏父西都制庫判官春殖
우군 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경주이씨로서 서도제고판관을 지낸 이춘식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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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煌> 子 兌憲(태헌)
配全義李氏父東燁
부인은 전의이씨로서 이동엽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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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禹> 子 淸輿(청여) <子 虯瑞>
執事侍郞
配安氏
집사시랑을 지냈다. 부인은 안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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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八> 子 處海(처해) <子 永昌>
配安氏父廉
부인은 안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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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八> 子 處河(처하)
字浪叔 配申氏父欽 墓在考墓下
자는 랑숙이고 부인은 신흠의 따님이다. 묘소는 부친묘의 아래에 있다.
[비고]申欽; 선조 때에 동명이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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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世
<萬瑞> 子 師孟(사맹) <子 相宙>
登第修文殿大提學忠烈朝元招東國諸賢應擧故對策以還
配貞夫人廉氏父右政丞齊賢
과거에 합격하여 수문전대제학을 지냈다. 충렬왕(1274~1308)때 원나라에서 동국제현을 초대하여 과거에 응시하라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정부인 염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염제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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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詳> 子 麗精(여정) <子 益遜. 龜年>
麗朝知製誥
配未詳 ○墓在楊州
고려시대에 지제고를 지냈다. 부인은 알 수 없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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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兌> 子 秀垕(수후) <子 元玉>
同正
配端人呂氏父齊若
동정을 지냈다. 부인은 단인여씨 여제약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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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綱> 子 首行(수행) <子 在道>
同知密直使
配貞夫人金氏父一齊
동지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김일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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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綱> 子 元行(원행) <子 孝錫>
禮文袛候
配淑夫人金氏父浣
예문저후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으로 김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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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澤> 子 世徵(세징) <子 夏成>
右軍兵馬使
配貞夫人朴氏父枝華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박지화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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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豪> 子 德禧(덕희) <子 遇秋>
奉常大夫三司副事
配唐城郡夫人洪氏父瑛
봉상대부로서 삼사부사를 지냈다. 부인은 당성군 부인 홍씨로서 홍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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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起> 子 麟輝(인휘) <子 性弘>
按撫使
配貞夫人金氏父直
안무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김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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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精> 子 鳳輝(봉휘) <子 性大>
諫議大夫
配南陽郡夫人洪氏父司空瑞益
간의대부를 지냈다. 부인은 남양군부인 홍씨로서 사공을 지낸 홍서익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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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汝> 子 虯瑞(규서) <子 挺寶>
配尹氏父舜源
부인은 윤순원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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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汝> 子 麟瑞(인서)
면주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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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海> 子 영창(永昌) <子 熙成>
配韓氏父希鍵
부인은 한희건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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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一世
<師孟> 子 相宙(상주) <子 邦直>
號竹峯先生仕閣老宋恭帝德祐元年乙亥忠烈王命公使一國禁白衣稱旨戊寅又命公令國內剃頭服元衣冠公極諫
配通義郡夫人羅氏父平章事文玉
호는 죽봉선생이다. 벼슬은 각로에 이르렀다. 송나라 공제(1274~1275)의 덕우원년 을해(1275)년에 충렬왕(1274~1308)이 공에게 나라안에 흰옷을 입는 것을 금하게 하라고 교지를 내렸고, 무인(1278)년에 또 공에게 나라안에 머리를 깎게 하고(변발[1]) 복장을 원나라와 같은 의관으로 하라고 명하자, 공이 극력 간언하였다. 부인은 통의군부인 라씨로서 평장사[2]를 지낸 라문옥의 따님이다.
[1]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당시 원을 다녀올 때 변발호복(辯髮胡服)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는 영(令)을 내려 모두 몽고의 의복과 개체변발(開剃辯髮)을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원하는 일부 지식층만이 호응하였을 뿐 일반 국민 모두가 따르지는 않았다.
[2]平章事; 성종(982~907년) 때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두었던 것을 1275년(충렬왕 1년)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고쳤고 1298년(충렬왕 24년)에 폐지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년)에 다시 내오면서 찬성사(贊成事)라 하였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평장사(平章事)로 바뀜. 따라서 1275년부터 1308년 사이에는 평장사란 벼슬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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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精> 子 益遜(익손) <子 菫>
官閣老
관직은 각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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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精> 子 龜年(귀년) <子 修德>
官密直使
配貞夫人朴氏父重燁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박중엽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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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垕> 子 元玉(원옥) <子 夏器>
字仁元官摠郞 配李氏 墓在龍山
자는 인원이고 관직은 총랑을 지냈으며 부인은 이씨이다. 묘소는 용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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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行> 子 在道(재도) <子 元錫>
字大而上將軍 配郭氏父世迪 墓在卒本
자는 대이이고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곽세적의 따님이다. 묘소는 졸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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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行> 子 孝錫(효석) <子 奇孫>
堂後官 配尹氏父邦 墓在綿川
당후관을 지냈다. 부인은 윤방의 따님이다. 묘소는 면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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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徵> 子 夏成(하성) <子 允秋>
都觀郎
配淑夫人濟州梁氏父監務起河
도관랑을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 제주양씨이고 감무를 지낸 양기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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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禧> 子 遇秋(우추) <子 東寶>
官獻納
配淑人李氏父世迪
관직은 헌납을 지냈다. 부인은 숙인이씨로서 이세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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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輝> 子 性弘(성홍) <子 道彬>
官同正
配淑人李氏父哉仁
관직은 동정[1]을 지냈다. 부인은 숙인이씨로서 이재인의 따님이다.
[1]동정이라는 것은 관직명 뒤에 붙어서 임시직을 나타내므로 동정이라는 관직은 있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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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輝> 子 性大(성대) <子 信彬>
都制庫判官
配淑人月城李氏父齊
도제고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숙인 월성이씨로서 이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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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虯瑞> 子 挺寶(정보) <子 文孝>
執義
配令人安東金氏父主簿之鏡
집의를 지냈다. 부인은 영인 안동김씨로서 주부를 지낸 김지경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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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昌> 子 熙成(희성) <子 洙亮>
配靑松沈氏父景夏
부인은 청송심씨로서 심경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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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世
<相宙> 子 邦直(방직) <子 益銛>
三重大匡吏部尙書忠肅王朝追封金紫光祿大夫特進上柱國中書省
配玉山郡夫人張氏父右政丞源
삼중대광/이부상서를 지냈다. 충숙왕(1313~1330, 1332~1339)때에 금자광록대부[1]에 추봉되고 상주국 우문중서성에 특진되었다. 부인은 옥산군 부인 장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장원의 따님이다.
[1]金紫光祿大夫; 문종(1047~1083년)때 제정되어 1275년(충렬왕 1년)에 폐지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설치되고 종1품의 윗자리로 올랐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폐지됨. 따라서 1275년부터 1356년 사이에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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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宙> 子 龍直(용직) <子 管>
官舍人
관직은 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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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遜> 子 菫(근)
官侍中
子孫居靈山謂之知制誥公派
관직은 시중을 지냈고 자손은 영산에 살고 있으며 지제고공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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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年> 子 修德(수덕) <子 自玉>
右軍兵馬使
配貞夫人郭氏父世迪
우군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정부인 곽씨로서 곽세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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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玉> 子 夏器(하기) <子 再伯>
等第知制誥
配貞夫人洪氏父大夏
과거에 합격하여 지제고를 지냈고 부인은 정부인 홍씨로서 홍대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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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道> 子 元錫(원석)
配申氏父英
부인은 신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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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錫> 子 奇孫(기손) <子 汝龍, 汝鳳, 汝麟, 汝龜, 汝虎>
諸陵署令
配淑人洪氏父德珠
제릉서령을 지냈다. 부인은 숙인으로 홍덕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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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成> 子 允秋(윤추) <子 德淵>
都官郞
配淑人濟州梁氏父監務起河
도관랑을 지냈다. 부인은 숙인 제주양씨로서 감무를 지낸 양기하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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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秋> 子 東寶(동보) <子 執一>
侍中
配海州郡夫人吳氏父元翔
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해주군부인 오씨로서 오원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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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弘> 子 道彬(도빈) <子 以潝>
進士
配宜人李氏
진사를 지냈고 부인은 의인 이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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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大> 子 信彬(신빈) <子 以濂, 以學>
禮儀判書
配貞夫人光山金氏父漢球
예의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광산김씨로서 김한구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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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挺寶> 子 文孝(문효) <子 得重>
右軍兵馬使
配貞夫人晉州姜氏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진주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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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成> 子 洙亮(수량) <子 敬文>
配李氏父得華
부인은 이득화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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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三世
<邦直> 子 익섬(益銛) <子 柱國>
上將軍
配貞夫人平山申氏父典理判書諿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평산신씨로서 전리판서를 지낸 신집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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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直> 子 管(관) 三賢派
版圖判書
판도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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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德> 子 自玉(자옥) <子 有燦, 有煥, 有煜, 有潤>
追副事
配韓氏父師相
부사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한사상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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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器> 子 再佰(재백) <子 龜瑞, 龍瑞, 麒瑞, 麟瑞>
都制庫判官
配令人姜氏
도제고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영인 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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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錫> 子 禹鼎(우정) <子 得洄>
監務
配恭人張氏父世傑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공인장씨로서 장세걸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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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龍(여룡) <子 㺶>
按察使
配貞夫人吳氏父綱
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오강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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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鳳(여봉) <子 琇>
都評議事
配淑人宋氏父文玉
도평의사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 송씨로서 송문옥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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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麟(여린)
開城判官
配白氏父元素
개성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백원소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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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龜(여귀) <子 王貞>
司醞署令同正
配淑人白氏父以素
사온서령[1]동정[2]을 지냈다. 부인은 숙인 백씨로서 백이소의 따님이다.
[1]司醞署; 궁궐 안에서 쓰는 술을 만들고 보관하는 일을 맡은 관청.
[2]同正; 실제 근무하는 벼슬이 아닌 정원외에 주는 명예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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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孫> 子 汝虎(여호)
配慶州鄭氏父彦弼
부인은 경주정씨로서 정언필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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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秋> 子 得淵(득연) <子 義明>
進士
配宜人楊氏父大根
진사를 지냈다. 부인은 의인 양씨로서 양대근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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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寶> 子 執一(집일) <子 義哲>
按廉使
配貞夫人權氏父重玉
안렴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권중옥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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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彬> 子 以潝(이흡) <子 國瑞>
典理判書
配貞夫人順興安氏
전리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순흥안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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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彬> 子 以濂(이렴) <子 華玉>
東部參軍
配端人金氏父慶 系配安氏
동부참군을 지냈다. 부인은 단인 김씨로 김경의 따님이다. 둘째부인은 안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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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彬> 子 以學(이학) <子 敬玉, 敬臣, 敬輔>
典理判書
配貞夫人王氏
전리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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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孝> 子 得重(득중) <子 漢成>
配高氏父濟漢
부인은 고제한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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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亮> 子 敬文(경문) <子 宇賢, 宙賢>
配申氏父憲章
부인은 신헌장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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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四世
<益銛> 子 주국(柱國) <有三人晢卿牧卿益卿>
登第大提學知制誥贈尙書省左僕射
配海州郡夫人吳氏父左政丞達周
과거에 합격하여 대제학/지제고를 지냈고 상서성 좌복야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해주군부인 오씨로서 좌정승을 지낸 오달주의 따님이다.
有三人晢卿牧卿益卿 ○海州崔氏譜有一女崔攝進士父有培太師文憲公冲八代孫子崔道全進士
아들 3명이 있었는데 절경/목경/익경이다. ○해주최씨 보첩에는 주국의 따님이 진사인 최섭에게 시집갔다하고 최섭의 부친은 휘가 최유배이고, 태사를 지낸 문헌공 최충[1]의 8대손이며, 아들인 최도전은 진사였다고 한다.
[1]최충(崔冲); 984(성종 3)∼1068(문종22). 고려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온(溫)의 아들이다.
=====
<自玉> 子 有燦(유찬) <子 世傑>
配李氏父淑
부인은 이숙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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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玉> 子 有煥(유환) <子 之瑞>
配李氏父以天
부인은 이이천의 따님이다.
=====
<自玉> 子 有煜(유욱) <子 平>
配李氏父密直使以彬
부인은 밀직사를 지낸 이이빈의 따님이다.
=====
<自玉> 子 有潤(유윤) <子 尙恭>
麗朝都事
고려시대에 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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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伯> 子 龜瑞(귀서) <子 不比>
密直提學
配貞夫人李氏父泰振
밀직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이태진의 따님이다.
=====
<再伯> 子 龍瑞(용서) <子 明澤>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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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伯> 子 麒瑞(기서)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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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伯> 子 麟瑞(인서))
配李氏父益三
부인은 이익삼의 따님이다.
=====
<禹鼎> 子 得洄(득회) <子 一麗>
右軍兵馬使
配貞夫人吳氏父大衡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오대형의 따님이다.
=====
<汝龍> 子 㺶(두) <子 以學>
按撫使
配淑夫人李氏父震慶
안무사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으로 이진경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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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鳳> 子 琇(수) <子 以碩>
堂後官 配令人權氏父瑊
당후관을 지냈다. 부인은 영인권씨로서 권감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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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龜> 子 王貞(정) <子 以鐸, 以璋>
면주없음
=====
<得淵> 子 義明(의명) <子 彦孝, 芸>
進士
配宜人金氏父夏潤
진사를 지냈고 부인은 의인김씨로 김하윤의 따님이다.
=====
<執一> 子 義哲(의철) <子 萬球, 萬珹. 萬玉>
면주없음
=====
<以洽> 子 國瑞(국서) <子 文翊>
配安東權氏父相夏
부인은 안동권씨로서 권상하의 따님이다.
=====
<以濂> 子 華玉(화옥) <子 海柱>
內資寺主簿
내자시 주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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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濂> 子 衡玉(형옥) <子 灝>
巨參奉
配恭人洪氏父繼溟
참봉을 지냈다. 부인은 공인홍씨로서 홍계명의 따님이다.
=====
<以濂> 子 泰玉(태옥) <子 得海, 得河>
參奉
配恭人韓氏父尙文
참봉을 지냈다. 부인은 공인 한씨로서 한상문의 따님이다.
=====
<以學> 子 敬玉(경옥) <子 灝>
官密直提學
관직은 밀직제학을 지냈다.
=====
<以學> 子 敬臣(경신) <子 元鉉>
면주없음
=====
<以學> 子 敬輔(경보) <子 元邦>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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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四世
<得重> 子 漢成(한성) <子 擇謙>
配洪氏父瑞卿
부인은 홍서경의 따님이다.
=====
<敬文> 子 宇賢(우현) <子 德休>
參奉
配恭人金氏父永澤
참봉을 지냈다. 부인은 공인 김씨로 김영택의 따님이다.
=====
<敬文> 子 宙賢(주현) <子 仁源>
配洪氏父秀逸
부인은 홍수일의 따님이다.
=====
三十五世
<柱國> 有子三人晢卿牧卿益卿
○海州崔氏譜有一女崔攝進士父有培太師文憲公冲八代孫子崔道全進士
아들 3명이 있었는데 절경/목경/익경이다. ○해주최씨 보첩에는 <휘주국의> 한분의 따님이 진사인 최섭에게 시집갔다하고 최섭의 부친은 휘가 최유배이고, 태사를 지낸 문헌공 최충[1]의 8대손이며, 아들인 최도전은 진사였다고 한다.
[1]최충(崔冲); 984(성종 3)∼1068(문종22). 고려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온(溫)의 아들이다.
=====
<有燦> 子 世傑(세걸) <子 履徵>
都事
도사를 지냈다.
=====
<有燦> 子 之瑞(지서)
承仕郞子孫居慶州
승사랑을 지냈고 자손들이 경주에 산다.
=====
<有煜> 子 平(평) 襄毅公(양의공)
書雲副正子孫居龍岡
서운부정을 지냈고 자손들이 용강에 산다.
=====
<有潤> 子 尙恭(상공) <子 添劍>
官都事
관직은 도사를 지냈다.
=====
三十五世
<龜瑞> 子 不比(불비) <子 秀光>
版圖判書
판도판서를 지냈다.
=====
<龍瑞> 子 명택(明澤)
면주없음
=====
<得洄> 子 一麗(일려) <子 佑鳴>
小保
소보를 지냈다.
=====
<㺶> 子 以學(이학) <子 遜, 首遜, 尙遜>
侍聘齋生
시빙재생을 지냈다.
=====
<琇> 子 以碩(이석) <子 德弘>
直提學
직제학을 지냈다.
=====
<王貞> 子 以鐸(이탁) <子 德寬>
면주없음
<王貞> 子 以璋(이장)
면주없음
=====
三十五世
<義明> 子 彦孝(언효) <子 宗厚>
門下侍郞
문하시랑을 지냈다.
=====
<義明> 子 芸(운)
開城留守子孫居淸河蘇洞
개성유수를 지냈고 자손들이 청하의 소동에 산다.
=====
<義哲> 子 萬球(만구) <子 元碩>
侍中
시중을 지냈다.
=====
<義哲> 子 萬珹(만성) <子 貞錫>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
<義哲> 子 萬玉(만옥) <子 遜>
典理判書
전리판서를 지냈다.
=====
<國瑞> 子 文翊(문익) <子 麗徵>
兵馬使
병마사를 지냈다.
=====
<華玉> 子 海柱(해주) <子 麗澤>
면주없음
=====
<衡玉> 子 灝(호)
同敦寧
동돈령을 지냈다.
=====
<泰玉> 子 得海(득해) <子 漪柱, 澤柱>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
<泰玉> 子 得河(득하)
면주없음
=====
<敬臣> 子 元鉉(원현)
면주없음
=====
<敬輔> 子 元邦(원방)
면주없음
=====
<漢成> 子 擇謙(택겸)
면주없음
=====
<宇賢> 子 德休(덕휴)
면주없음
=====
<宙賢> 子 仁源(인원) <子 元老, 喆老>
면주없음
=====
三十六世
<世傑> 子 履徵(이징) <子 機祚>
監務
감무를 지냈다.
=====
<尙恭> 子 添劍(첨검)
版圖判書淮陽公派
판도판서 회양공파이다.
=====
<不比> 子 秀光(수광)
子孫居金山新村
자손들이 금산의 신촌에 산다.
=====
<一麗> 子 佑鳴(우명) <子 昌淵>
少保
소보를 지냈다.
=====
<以學> 子 孫(손) <子 靚>
壽安宮錄事
수안궁의 록사를 지냈다.
=====
<以學> 子 首孫(수손) <子 觀>
면주없음
=====
<以學> 子 尙孫(상손) <子 覩>
면주없음
=====
<以碩> 子 德弘(덕홍) <子 文玉>
면주없음
=====
<以鐸> 子 德寬(덕관) <子 奇玉>
參議
참의를 지냈다.
=====
<彦孝> 子 宗厚(종후) <子 希旻>
監務
감무를 지냈다.
=====
<萬球> 子 元碩(원석) <子 永顯>
都事
도사를 지냈다.
=====
<萬珹> 子 貞碩(정석) <子 元泰>
면주없음
=====
<萬玉> 子 遜(손)
工曹典書子孫居醴泉眉湖及龜山
공조전서를 지냈고 자손들이 예천의 미호와 귀산에 산다.
=====
<文翊> 子 麗徵(려징) <子 大振>
上將軍
상장군을 지냈다.
=====
<海柱> 子 려택(麗澤) <子 厚明>
直提學
직제학을 지냈다.
=====
<得海> 子 漪柱(의주) <子 益謹>
密直使
밀직사를 지냈다.
=====
<得海> 子 澤柱(택주) <子 益愼>
典客令
전객령을 지냈다.
=====
<仁源> 子 元老(원노) <子 漢濟>
戶曹佐郞
호조좌랑을 지냈다.
=====
<仁源> 子 喆老(철노) <子 重器>
면주없음
=====
三十七世
<履徵> 子 機祚(기조) <子 鼎赫>
密直提學
밀직제학을 지냈다.
=====
<佑鳴> 子 昌淵(창연) <子 南>
監務
감무를 지냈다.
=====
<孫> 子 靚(정) <子 有昌>
獻納
헌납을 지냈다.
=====
<首孫> 子 觀(관) <子 舜精>
면주없음
=====
<尙孫> 子 覩(도) <子 禹精>
僉中樞
첨중추를 지냈다.
=====
<德弘> 子 文玉(문옥)
면주없음
=====
<德寬> 子 奇玉(기옥) <子 國重, 國安. 國興>
樞密院事
추밀원사를 지냈다.
=====
<宗厚> 子 希旻(희민) <子 萬鎰>
密直使
밀직사를 지냈다.
=====
<元碩> 子 永顯(영현) <子 聖薰>
侍中
시중을 지냈다.
=====
<貞錫> 子 元泰(원태) <子 載坤>
면주없음
=====
<麗徵> 子 大振(대진)
典廐署承
전구서승[1]을 지냈다.
[1]典廐署; 집짐승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1308년(충렬왕 34년)에 전의시(典儀寺)에 소속시킴, 영(令-종7품), 승(丞-종8품) 등의 벼슬아치가 있음.
=====
<麗澤> 子 厚明(후명)
獻納
헌납을 지냈다.
=====
<漪柱> 子 益謹(익근) <子 碩孫>
注書
주서를 지냈다.
=====
<澤柱> 子 益愼(익신) <子 天輿>
兵馬使
병마사를 지냈다.
=====
<澤柱> 子 益誠(익성) <子 運輿>
典理判書
전리판서를 지냈다.
=====
<元老> 子 漢濟(한제)
면주없음
=====
<喆老> 子 重器(중기)
면주없음
=====
三十八世
<機祚> 子 鼎赫(정혁) <子 泰齡>
進士
진사를 지냈다.
=====
<昌淵> 子 南(남) <子 振燁>
禮儀判書
예의판서를 지냈다.
=====
<靚> 子 有昌(유창) <子 守兌>
면주없음
=====
<觀> 子 舜精(순정) <子 宗貴>
면주없음
=====
<覩> 子 禹精(우정) <子 宗仁>
면주없음
=====
<奇玉> 子 國重(국중) <子 用萬>
參奉
참봉을 지냈다.
=====
<奇玉> 子 國安(국안) <子 用汝>
면주없음
=====
<奇玉> 子 國興(국흥) <子 用光>
면주없음
=====
<希旻> 子 萬鑑(만감) <子 應玉>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
<永顯> 子 聖薰(성훈) <子 鎬>
監務
감무를 지냈다.
=====
<元泰> 子 載坤(재곤) <子 道恒>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
<益謹> 子 碩孫(석손) <子 世章>
東北巡撫使
동북순무사를 지냈다.
=====
<益愼> 子 天輿(천여) <子 起酉>
면주없음
=====
<益誠> 子 運輿(운여) <子 萬壽>
大司成
대사성을 지냈다.
=====
三十九世
<鼎赫> 子 泰齡(태령) <子 維公, 巨公. 碩公>
면주없음
=====
<南> 子 振燁(진엽) <子 德休>
監察
감찰을 지냈다.
=====
<有昌> 子 守兌(수태) <子 夏碩>
면주없음
=====
<舜精> 子 宗貴(종귀) <子 爾■>
면주없음
=====
<禹精> 子 宗仁(종인) <子 爾王弘>
면주없음
=====
<國重> 子 用萬(용만) <子 乙棟>
贈掌穎院判決事
장영원 판결사에 증직되었다.
=====
<國安> 子 用汝(용여) <子 慶>
僉中樞
첨중추를 지냈다.
=====
<國興> 子 用光(용광) <子 虔>
持平
지평을 지냈다.
=====
<萬鑑> 子 應玉(응옥) <子 榮國>
石城縣監
석성현감을 지냈다.
=====
<聖薰> 子 鎬(호) <子 克胤, 勝胤, 碩胤>
直提學
직제학을 지냈다.
=====
<載坤> 子 道恒(도항) <子 弘祚>
直提學
직제학을 지냈다.
=====
<載坤> 子 道徵(도징) <子 義祚, 德祚, 賢祚>
監務
감무를 지냈다.
=====
<碩孫> 子 世章(세장) <子 琢, 診, 璉, 現, 瑾, 球, 琥>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
<天輿> 子 起酉(기유) <子 龍瑞, 麟瑞>
면주없음
=====
<運輿> 子 萬壽(만수) <子 義祚, 德祚, 賢祚>
門下侍中平章事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다.
=====
四十世
<泰齡> 子 維公(유공)
官至判書
관직은 판서에 이르렀다.
=====
<泰齡> 子 巨公(거공)
副護軍子孫居慶州斗山
부호군을 지냈고 자손들이 경주의 두산에 산다.
=====
<泰齡> 子 碩公(석공)
면주없음
=====
<振燁> 子 德休(덕휴) <41세 子 鎭宇;成均生員> <42세 子 正浩; 文注書> <43세 子 英南;參議>
<41세인 진우는 성균생원이었고, 42세인 정호는 문주서를 지냈고, 43세인 영남은 참의를 지냈다.>
=====
<守兌> 子 夏碩(하석)
면주없음
=====
<宗貴> 子 爾■(이형)
면주없음
=====
<宗仁> 子 爾王弘(이홍)
면주없음
=====
<用萬> 子 乙棟(을동)
贈戶曹參議 子孫居慶州上薪
호조참의를 증직받았고 자손들이 경주의 상신에 살고 있다.
=====
<用汝> 子 慶(경)
達鍊使 子孫居慶州蔚山
달련사를 지냈고 자손들이 경주와 울산에 산다.
=====
<用光> 子 虔(건)
進士 子孫居慶州末方
진사를 지냈고 자손들이 경주의 말방에 산다.
=====
<應玉> 子 榮國(영국)
면주없음
=====
<鎬> 子 克胤(극윤), <41세 子 餘必;樞密院事> <42세 子 大震(대진).生員號雲隱>
判三司副使
판삼사부사를 지냈다. <41세인 여필은 추밀원사를 지냈고, 42세인 대진은 생원이며 호는 운은이다.>
=====
<鎬> 子 勝胤(승윤)
禮儀判書
예의판서를 지냈다.
=====
<鎬> 子 碩胤(석윤)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
<道恒> 子 弘祚(홍조)
典理判書
전리판서를 지냈다.
=====
<道徵> 子 義祚(의조)
參奉
참봉을 지냈다.
=====
<道徵> 子 德祚(덕조)
右軍兵馬使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
<道徵> 子 賢祚(현조)
上將軍
상장군을 지냈다.
=====
<世章> 子 琢(탁);侍中公子孫居羅州蔚山京畿(시중공으로서 자손들이 나주/울산/경기에 산다)
子 診(진)
子 璉(연);龍巖公(용암공)
子 現(현);崇祿公(숭록공)
子 瑾(근); 府使公(부사공)
子 球(구); 忠靖公(충정공)
子 琥(호); 休隱公(휴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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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酉> 子 龍瑞(용서)
子 麟瑞(인서)
면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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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壽> 子 인(璘)
都事子孫居咸悅
도사를 지냈고 자손들이 함열에 산다.
正德草本舊譜贋眞辨解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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