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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서 평화의 바람을 보다
김성근 / 평화교육연구회 회원, 충북 제천 봉양중 교사
나하공항에 내려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공항 근처의 해변가였다. 2월인데도 아이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줌 들어올린 모래가 아주 부드럽게 아래로 쏟아졌다. 우리나라 해변의 모래와는 다르게 산호와 조개껍질이 부서져 생긴 모래여서 검게 반짝이는
흑운모나 석영 등의 가루가 손에 묻어나지 않았다. 일본의 섬이 대부분 화산인데 비해 오키나와는 산호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곳곳에
석회암 동굴이 천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섬 곳곳에는 수십 개의 천연동굴이 있다. 2차 대전 말기 천혜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던 이 동굴들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참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산호초로 가득했던 해변이 산호모래로 변한 것은 1945년. 그해 4월 1일 오키나와에 미군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약 90일간
진행된 전투를 통해 20만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해안선의 모양이
변했으며, 모든 건물은 초토화되었다. 항복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라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철저히 받은 일본군과 주민들은 죽음을 택했다. 섬 곳곳에 퍼져 있는 천연 석회암 동굴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은 미군이 가까이 오자 대부분 집단 자결을 시도했다. 오키나와에서 전쟁이 종료되던 6월 23일, 섬 최남단으로 쫓긴 주민과 병사들이 꽃잎처럼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오키나와 주민의 30% 이상인 1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비극의 흔적을
간직한 곳. 어디서건 눈길만 돌리면 눈에 들어오는 미군 기지들. 최신예기종 비행기들이 쉴 새 없이 떠오르는 곳. 전쟁반대, 미군기지 철수를 외치는 시위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 그 갈등의 흔적과 상반되게
사탕수수와 열대 야자나무가 늘어선 남국의 모습으로 오키나와는 우리를 반겼다.
오키나와, 그 이름 속에 담긴 역사--
오키나와는 비행기로 도쿄에서 두 시간 반, 서울에서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곳이다. 일본 본토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이름도 오키나와( :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밧줄 모양의 섬이란 뜻)로 붙여졌다.
안내를 맡은 마타유시 쿄코(又吉京子) 씨는 오키나와의 이름에 얽힌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원래 이곳은 15세기부터 류큐 왕국으로 불려졌던 곳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곳을 현으로 복속시키면서 이름을 오키나와로 바꾸었다. 오키나와는 고대 일본 문서에 등장하는 말로 본토 중심의 관점에서 낮추어 부른 이름이다. 이후 2차 대전 후 미군이 이곳을 점령했다. 그들은 이 땅의 이름을 다시 류큐라고
불렀다. 이후 1972년 여기가 일본에 복귀되는 것이 결정되자 일본은
다시 이름을 오키나와 현으로 바꾸었다. 이곳의 평화운동가들은 이곳의 이름에 얽힌 복잡한 역사성 때문에 류큐와 오키나와 두 가지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을 그냥 산호섬이라는 뜻의 ‘우루마’라고 칭하기를 좋아한다.”
류큐 왕조는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문화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세기 당시 북(호쿠잔), 중(츄잔), 남(난잔)으로 나뉘어져 있던 삼국을 츄잔이 통일한 후 약 100년 동안 일체의 무기를 없앴다. 다시 전쟁을 한다거나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에도의 사츠마 번이 풍성하게 생산되는 사탕수수를 탐내 이곳을 침략했을 때,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사츠마 번 역시 이곳을 식민지로 만든 이후 칼과 무기를 수거하고 금하는 정책을
썼다. 그 결과 18세기까지 무기가 없는 섬의 전통은 이어졌다. 대신
사츠마 번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이곳 민중들은 맨손으로 하는 무술인
가라데를 창안, 발전시켰다.
군국주의 교육의 비극 현장, 치비치리 피난동굴--
천연의 석회암 동굴 치비치리 피난동굴은 오키나와 중부의 조그만
촌, 요미탄 해변에 있는 사탕수수밭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반 세기가 넘도록 이곳에서 벌어진 비극적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곳의 비극이 알려진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시모지마 테츠로오(下嶋哲郞)라는 미술가였다. 이 화가는
전쟁 당시 치비치리 동굴에서 벌어졌던 참사를 기록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채취했다. 한 번 이야기가 나오자 긴 침묵을 깨고 봇물처럼 터져 나온 비극의 진상들은 전쟁이 지닌 끔찍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1983년의 일이었다.
1945년 미군은 이곳 요미탄 해변으로 상륙을 시도했다. 동굴에는 140명의 주민과 병사들이 피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항복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교육받았다. 동굴 앞으로 미군이 다가오자 이들은 서로 죽여 주기로 결의했고, 83명의 주민이 자결했다. 그중 47명이 12세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몇몇은 독약으로 죽었으나 양이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 식칼이나 막대기로 죽여 주었다.
안내를 맡은 니시오 이치로(西尾市郞) 목사는 “이들은 자결한 것이
아니라 학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군국주의 교육이 이들을 살해한
것이다”고 단호히 말했다. “국가가 사람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희생을 강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지금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일본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일본 교과서는 천황제나 야스쿠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로 하고 있다. 이곳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오는 곳인데 천황제라는 시스템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한다.”
동굴 앞에 세워진 희생자들의 명단에 ‘4살 義一’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8살, 11살, 13살 등 어린아이들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졌다. 좁고 습기 찬 동굴로 들어가 우리는 긴 침묵의 묵념을 올렸다.
조그만 아이들의 생명을 극단적으로 앗아가 버린 곳. 평화와 생명의
가치가 배제된 교육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반성이 가슴에 저려 왔다.
우리는 치비치리 피난동굴의 참상을 키노완 시의 후텐마 미군기지 곁에 자리 잡은 사키마 미술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설 미술관인 이곳에는 원폭피해자인 한 미술가가 주민의 구술을 토대로 그린 대형
그림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 한켠에는 조중섭이란 한국인이 첩자로 몰려 처형되는 모습이 크게 클로즈업되어 다가왔다. 전쟁
당시 일본은 정보전에서 미국에 크게 뒤져 있었다. 모든 군사적 움직임이 미군에 포착되었고, 이를 인정하지 못했던 군인들은 주민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키나와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조선인 등의 타민족들이 표적이 되어 희생양으로 사라져 갔다. 관장인 사키마 마사오(佐喜眞道夫) 씨가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일본의 상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쿠라, 군국제의 상징이다. 또
하나는 국화인데 천황제의 상징이다. 사쿠라는 떨어질 때 특히 아름다운데 일본 전역의 초등학교 교정에 이를 심었다. 그림에서 화가는
어른들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군국주의에 넋을 빼앗긴 것을 표현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눈동자를 그린 것은 미래의 희망이 아이들에게 있음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라는 사키치 관장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미술관을 나섰다. 미술관 앞마당에는 인근 고우보고등학교
학생들이 오키나와 전쟁에서 희생된 23만 명의 사람들을 추모하는 뜻으로 각각의 일련번호를 붙인 23만 개의 돌멩이가 깔려 있었다.
오키나와 시 한적한 주택가에는 아주 고즈넉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98년 설립되었다는 이곳은 구스누치 평화문화관. 3층으로 된
이 건물은 미군기지 반환운동으로 땅을 돌려받은 지주의 딸인 마에시로 유키(眞學城 有希) 씨가 설립한 문화공간이다. 3층으로 된 이 건물은 중년부인들의 회합장소, 연극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은 아이들의 조용한 독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향이 나는 오키나와 특유의 나무를 뜻하는 구스누치 평화문화관 입구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아이들의 성장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아, 한 명 한
명의 내면을 길러 내는, 공감에의 답을 찾아 나간다.”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누가야--
민박집 누가야는 요미탄 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아담한 일본식 집이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구불구불하고 좁게 난 도로를 따라가니 대문 곁에 민박집임을 알리는 팻말이 나왔다. 마당을 들어서면 가로로 길게 늘어선 본가의 거실이 눈에 들어오고, 한켠에는 민박집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나온다. 민박집의 방 이름은 특이하게 ‘4.1’, ‘5.15’, ‘6.23’과 같은 날짜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 날짜들은
오키나와가 지닌 중요한 흔적들, 즉 미군의 점령, 일본으로의 반환 결정, 오키나와 전쟁 종료와 같은 기념일들이다.
누가야(何我)란 한자어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누가야는 오키나와 사투리로 “웬일이야?”, “무슨 일인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집의 이름이 생기게 된 근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체육대회가 열리던 오키나와의 경기장에서 한 일본인이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에 태운 사건이 벌어졌다. 치바나 쇼오이찌(知花昌一)라는 슈퍼마켓 주인이 장본인이었다. 그는 곧바로 구금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우익들은 그의 슈퍼마켓에 불을 질렀다.
일본에서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대한 비판은 금기 사항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전쟁 당시 주민의 1/3이 사망했던 끔찍한 역사적
경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본토와는 또 다른 저항감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1982년 교과서 검정 문제가 불거졌을 때, 오키나와 민중들은 역사교과서에서 전쟁 중 집단 살해의 원인이 되었던 황국신민화 교육의 진상을 서술할 것을 거칠게 요구했다 이어 1986년에는 각
학교에 의무적으로 강요했던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반대하는 현민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듬해 어느 여학교 졸업식장에서는
여학생 두 명이 식장에 게시된 일장기를 끌어내려 웅덩이에 처박는
사건이 일어났다.
치바나 씨 사건 이후 요미탄 마을은 일본 전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의 집 앞에는 우익들이 험악하게 규탄 시위를 벌였고, 마을 사람들은 매일같이 마당에 모여 구금된 치바나 씨를 염려했다. 길을 가다가도 마당에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야(무슨 일이래)?”
하며 대화에 끼는 일이 반복되었다. 치바나 씨는 재판 이후 이곳을 알리는 장소로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었고, 이름도 자연스레 누가야라고
붙여졌다. 치바나 씨가 도쿄에서 열리는 평화 세미나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운 누가야에서는 주인 대신 산센에서 나오는 구슬픈 음율이
우리를 맞았다. 산센은 류큐 왕조 때부터 내려온, 뱀가죽으로 만든 통에 줄이 3개 달린 이곳의 전통 악기. 팔순이 넘은 치바나 씨의 부친이
읊는 콧소리 섞인 산센 음율엔 다툼을 모르던 류큐 왕국의 평화로움과 애환이 함께 묻어났다.
그리고 미군기지--
요미탄 시의 90%를 차지하는 카데나 미공군기지의 서쪽 활주로 담장
옆에 만들어져 있는 ‘안보의 언덕’은 오키나와 섬을 관통하는 58번
국도 변에 있는 동산이다. 높이 5m, 넓이 200평 규모의 조그만 동산
위에 서면, 각종 전투기와 수송기의 이착륙 모습은 물론, 격납고에 들어가 있는 전투기, 각종 미공군기를 정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최신예 전투기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때문에 안내하던 니시오 목사의 설명은 자주 중단되어야 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 미군은 일본 본토에서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기지를 그대로 접수했으나 오키나와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오키나와의 주민들을 집단 수용소에 집어넣은 후 이들의 사유재산인 토지와
가옥을 모두 강제징발하여 기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니시오 목사는 미군기지와 관련된 시민운동의 내용을 다섯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이후 벌어진 반전 지주
운동. 당시 지주들은 미군기지 내 자기 땅에서 소를 키우고, 마늘을 갈고, 회관을 짓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토지 임대료를 6배 정도 인상했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어 1982년부터 시작된 한평 지주 운동에는 약
3천 명 정도가 참여했다. 둘째, 인간띠잇기 운동. 세 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2만7천 명 정도의 주민이 참여하여 기지를 완전히 둘러쌌다. 셋째, 폭음 피해 소송운동이다. 기지 주변의 학교에서 비행기 소음으로
방해받는 시간을 계산하였더니 초·중등을 합쳐 의무교육기간인 9년
동안 총 한 학기분의 손실이 계산되었다. 5,560명의 사람들이 원고가
되어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며, 다른 곳에서는 2차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 넷째, 미군기지 내에서 폐유 등을 불법으로 버려서 발생한
환경문제에 대한 항의이다. 다섯째, 1995년 후텐마 기지 주변에서 일어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에 대한 시위이다. 8만5천 명의 현민이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그 결과 미군은 후텐마 기지를 반환하고 나고시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니시오 목사는 오키나와 반전운동의 가장 어려운 점은 일본인들이 미군기지 문제를 오키나와만의 특수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한미 행정협정(SOFA)보다는 양호한 편이지만 일미 지위협정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일본 내 미군기지의 75% 이상이 집중된 오키나와만의 특수성으로 여기는 인식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다고 했다.
안보의 언덕 위에는 최신예기종 비행기의 사진을 팔고 실제 미군기지
내의 비행기를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을 대여하는 장사꾼이 있었다.
21년째 이곳에서 장사를 해 왔다는 와타나베씨는 주로 여행객을 대상으로 비행기 사진이나 미군부대의 상징들, 이를테면 탄피에 구멍을
뚫어 만든 목걸이라든지 군화, 군용망원경 등을 팔고 있었다. 신형 비행기에 대한 호기심과 군사 문화에 대한 묘한 동경들. 이것은 학교에서 학생들과 맞닥뜨리며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지난해 미군기지를 주제로 체험활동을 한 중학교 교사 스즈키 히로코(鈴木博子) 씨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반전교육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말해 준다. 미군기지를 주제로 매주 금요일 두 시간씩 재량활동 시간을 운영하기로 하자 9명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특히 남학생들은 전투기를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 참여 동기였다.
학생들은 활동 과정에서 반전 지주 운동을 하는 사람과 미군기지 내에서 직접 소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왜 미군과 싸우게 되었는지 들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미군기지와 군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게 되었다. 스즈키 교사는 체험활동이 아주 큰
성과를 거두었다며, 이제 아이들이 평화의식의 첫 출발선에 선 것 같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전쟁의 또 다른 희생자, 히메유리(姬百合) 간호대--
가냘프게 생긴 한 여학생이 조국애에 불타는 일본군 병사들을 간호하는 모습. 의약품이며 모든 것이 부족한 동굴 속에서 상처 난 병사를 혼신의 힘을 다해 치료하는 장면. 히메유리 간호대는 그 상징성 때문에
여러 번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키나와 수비군은 미군 침공에 대비하여 오키나와 여자 중등학생들에 대한 간호교육을 강화했다. 그리고 미군이 상륙하자 곧바로 학도간호대를 편성하여 전장에 배치했다. 1945년 3월 23일, 오키나와여자사범학교와 현립제일고등여학교 학생 222명과 18명의 교사들이 하에바루(南風原) 육군병원에 배치되었다.
학생들은 일본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불굴의 확신을 가지고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간호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부상병의 간호, 동굴
밖으로 사체를 옮기는 일, 의료기구·약품·식량 및 물을 운반하는
작업 등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5월 말경, 일본군은 남쪽으로 퇴각했다. 하에바루 야전병원과 다른 지역에 있던 간호학도대들도 이와 함께 남쪽으로 퇴각했다. 괴멸 상태에 있던 일본군은 섬의 최남단 전장인 키얀 반도 전선 한가운데에서
학도간호대에 해산을 명령했다. 미군의 포위망 한가운데에서 해산 명령이 내려진 219명의 학생과 교사들이 자살하거나 화염방사기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남부의 이토만( 滿) 시내에 자리 잡은 히메유리 평화기념 자료관은
지난 1989년 설립되었으며, 히메유리 동창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건립 기념문에서 “…진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고,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할 권리를 빼앗아 갔으며, 생명권마저 거부하도록
만들었고, 마침내 죽음밖에 없는 전장으로 짐승처럼 내몰았던 교육제도가 범한 죄를 고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마치 졸업사진처럼 죽은
이들의 사진이 끝없이 진열되어 있는 히메유리 자료관을 돌아보며,
당시 인솔교사로 참전, 함께 죽어갔던 교사들의 초상화 위에 시선이
멈추었다. 성실했던 그들. 밤 11시까지 전쟁 같은 자율학습을 지도하는 우리네 교사들과 너무나 닮은 모습으로 겹쳐 와 짙은 상념에 젖게
했다.
오키나와 최남단의 지역 마부니(馬文仁) 언덕에는 23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함께 평화기념 자료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료관 벽에 적힌 문구 하나를 적어 본다.
“…이 끔찍한 경험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전쟁에 대해
지지하거나 눈꼽만큼의 찬양도 보내지 못하리라.”
20세기 참혹한 전쟁의 희생물에서 벗어나 21세기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려는 오키나와의 모습. 맑은 날, 마부니 언덕 저편 수평선에서부터
평화로운 바람이 불어 왔다.
# 이번 방문은 2002년 2월 23일부터 27일까지 아우내재단과 평화교육연구회가 주관하는 평화기행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으며, 교사 11명, 교수 2명, 학생 2명, 총 15명이 참가했다.
# 그림 설명
그림 1)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바라본 평화의 초. 검은 돌에
총 23만 명의 오키나와 전쟁 희생자의 명단을 새겼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평화의 바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림 2) 마부니 언덕. 1945년 6월 23일, 오키나와 최남단인 이곳까지
쫓겨 온 주민과 병사들은 사꾸라처럼 이 아름다운 언덕 아래로 목숨을 던졌다.
그림 3) 안보의 언덕에서 바라본 가데나 미군기지. 거의 2분 간격으로
떠오르는 비행기 소음 때문에 인근의 학교에서는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다. 최신예 전투기를 구경하려면 이곳으로 오면 된다고 한다.
그림 4) 하에바루(南風原) 문화센터에서 민속 체험학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 이곳은 히메유리 학도간호대가 편성되어 처음 배치된 곳이다.
그림 5) 코끼리 울 같다고 해서 조노리라고 이름 붙여진 미군 통신시설. 요미탄에 위치한 이 시설물에 대한 반대투쟁을 지속적으로 진행한 결과, 이전을 약속받은 상태다.
그림 6) 히메유리 간호대의 활동을 형상화한 것.
그림 7) 나고시 인근 헤노코( 野古) 해변. 미군은 이곳에 최신예 해상
항공기지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주민들은 돌고래 등 천혜의 수중
생물의 서식지인 이곳 산호초 바다를 지키기 위해 힘겹게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2월 시민투표에서 승리했으나, 보수적인 시장이 이를
뒤집고 사임하는 바람에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림 8) 치비치리 동굴 입구. 안으로 들어가면 습기 찬 천연동굴이 꽤
넓게 펼쳐진다. 이러한 비극적 장소에는 어김없이 학생들이 접은 종이학 다발이 걸려 있다.
그림 9) 히메유리 자료관 내부 정경. 219명의 학생과 교사들의 사진이
장엄하게 벽을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는 이들의 문집과 글, 증언을 담은 자료들이 열람할 수 있도
록 전시되어있다.
그림 1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슈리성. 류큐 왕조의 궁으로 사용되었던 이곳은 1945년 완전히 부서지고 최근 새로이 만들어졌다. 실존인물 홍길동이 류큐국으로 가서 왕국을 세웠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림 11) 교육문화자료센터의 고교생 평화교류 집행위원들. 일교조에서 건립한 곳으로 비디오 자료 1천 개, 도서 1만 권이 있어 학생들이
이용한다. 이들 고교생이 중심이 되어 서울 도쿄 오키나와 공동 평화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림 12) 구스누치 평화문화회관. 미군기지 반환운동으로 생긴 보상금으로 개인이 건립했다. 지역의 평화센터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림 13) 남국의 정취 오키나와. 이곳은 사탕수수 농사가 발달하여 설탕을 얻으려는 에도의 표적이 되었다.
그림 14) 민박집 누가야. 일장기 소각사건의 주인공인 치바나 씨가 운영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뜻의 한자어이면서 오키나와 사투리로 “웬일이야?”라는 뜻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