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아픔 겪으면서 일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지난 3월 첫 방송을 시작한 MBC 월화사극 <홍국영>. 김상경, 정웅인, 이태란 등의 젊은 연기자들을 내세운 이 드라마에서 오랜만에 눈에 띄는 반가운 얼굴이 있다. 바로 유혜리다. 연기생활 14년 만에 사극 출연은 처음이라는 그가 그동안 두문불출하며 지낸 사연과 사극에 출연하는 설렘, 요즘 생활 등에 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데뷔작이 한 연기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데뷔작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느냐에 따라 두고두고 그에게 따라붙는 ‘꼬리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홍국영>에 출연중인 중견 탤런트 유혜리(37)는 섹시스타의 이미지가 강하다. 87년 완성도 높은 성애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파리애마>로 데뷔한 탓이다.
“정말 이상하죠? 그 뒤로 여러 작품을 했는데도 지금까지 <파리애마>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예요. 내일 모레면 마흔인데 ‘섹시스타’ 운운하는 것도 부끄럽고요. 몸매도 예전 같지 않아서 잘 가려야 돼요(웃음). 그때에 비하면 체중이 많이 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느낌이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좋아요.”
그가 한때 섹시스타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사실을 감안하면 의외의 ‘아줌마’ 같은 발언이다. 선입견이 무섭다고 했던가. 그의 사극 출연을 놓고도 뜻밖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적인 미모를 지닌 그와 고전적인 분위기의 사극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도 사극 출연은 연기 생활 14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화사하고 오만방자한 화완옹주 역 맡아
지난 3월말 첫 방송을 시작한 MBC 드라마 <홍국영>은 몰락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훗날 조선 팔도를 호령하는 세도가가 되었던 풍운아 홍국영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다. 극중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홍국영의 평생 라이벌이 되는 정후겸(정웅인)의 양모 화완옹주.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한때 모든 권력은 그의 치마폭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권세를 누린 인물이다.
“나름의 방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에요. 그녀에 의해 한 나라의 정치가 좌지우지됐으니까요. 기록을 보면 오빠인 사도세자의 죽음조차도 방관했다고 해요. 정권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극중에서 홍국영의 앞날에 장애가 되는 인물이 두 명 있어요. 바로 정후겸과 화완옹주죠. 대본을 보면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화사하고 오만방자하며 시기와 질투가 강한 여자. 그래서 제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그는 <홍국영>에 출연하기 전까지 스스로도 사극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과거 몇 차례 사극 출연 제의가 왔을 때도 거절했던 그였다. <홍국영>의 연출을 맡은 이재갑 PD와 만날 때도 당시 이PD가 준비중인 드라마가 사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고 한다.
그가 사극이라는 말을 듣고 망설이자 이PD는 강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면서 한동안 TV에서 볼 수 없었던 연기자가 필요한데 그가 적격이라며 밀어붙였다. 다행히 그의 변신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서늘하면서도 섹시한 외모가 화완옹주 역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 싶어요. 사실 저도 <홍국영>에 캐스팅되기 전까지는 <여인천하>를 봤거든요. 아줌마들은 남자 이야기보다 여자 이야기를 더 좋아하잖아요(웃음). 속상한 점이 있다면 드라마의 시청률이 좀 낮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늦게 시작해서 <여인천하>에 밀리는 모양이에요. 열심히 만들고 있으니까 <홍국영>도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SBS 아침드라마 <착한 남자>에 잠시 출연한 것을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재개하는 것은 3년 만이다. 98년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을 중단했던 것. 3, 4년 동안 여러 드라마에 겹치기 출연을 하면서 피로가 누적된 탓이다.
“물론 온전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어요. 여자로서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아픔을 겪으면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이제 곧 마흔인데 이뤄놓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많이 조급했어요. 난 왜 보통 여자들처럼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지 못할까, 뭐 하려고 이러고 있나 등등 생각이 많았죠.”
여기서 그가 말한 아픔은 바로 이혼이다. 94년 연극배우 출신의 동료 연기자 이근희와 결혼했던 그는 얼마 후 이혼 사실을 고백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언론의 취재 공세로 심하게 마음 고생을 했던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이혼의 상처에서 회복된 상태. 그가 다시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데에는 신앙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그가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찾기 시작한 것은 일년 전. 어릴 때는 ‘신앙을 가지라’는 어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스스로 절실한 이유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신앙을 가지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동안은 보통 여자들처럼 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결국 모든 게 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파리애마>가 개봉되고 나서 제게 들어온 시나리오가 정확히 18개였어요. 물론 전부 <파리애마> 같은 성애영화였죠. 잠깐 동안은 이 영화들을 다 찍어버리고 은퇴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돈은 많이 벌 것 같더라고요(웃음). 그렇지만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었어요. 전 정말 연기가 하고 싶었던 거지 돈이 욕심났던 게 아니니까요.”
정말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하고 싶어
그를 단순한 섹시스타가 아닌 성격파 배우로 각인시킨 작품은 90년에 개봉된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박중훈, 최명길 등과 공연했던 이 영화에서 박중훈의 그악스러운 아내로 출연했던 그는 그해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나기 위해 방송과 연극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그는 연극을 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고 한다. 기본적인 생계비조차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만으로 힘든 생활을 견뎌나가는 동료 연극인들을 보면서 깨달은 점이 많았던 것. 80년대 <애마부인> 시리즈로 인기를 누렸던 배우들 가운데 자신만이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도 당시의 현명한 선택 덕분이라고 믿는다.
“나이가 들면서 배역에 대한 욕심도 없어졌어요. 나이 어린 후배가 주인공을 맡았을 때 주변에서 탄탄하게 받쳐주는 것도 선배로서 기분좋은 일이죠. 그런데 이상한 건 요즘 들어 악역에 가까운 역만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래도 예전에는 교수 같은 우아한 역도 했던 것 같은데(웃음). 사실 어떤 역이든 상관없어요. 어떤 역할이든 꼭 필요한 연기자가 되고 싶거든요.”
그는 4월말부터 방영된 KBS 아침드라마 <매화연가>에도 출연한다. 1940년대 평양기생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태서관이라는 술집을 경영하는 마담 용녀. 여기서도 역시 악역이다.
오랜만에 두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연기 활동을 재개한 유혜리. 그는 새로이 가정을 꾸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겠다”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반대로 일에 관해서는 욕심을 부릴 작정이라고 다부지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