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저스틴의 생애
1) 출생= 2세기 초 헬라인 부모에게서 출생
2) 헬라 철학을 공부하다
스토아철학= 금욕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돈 요구
피타고라스 학파= 음악, 천문학, 기하학 공부 요구
플라톤 철학에 몰두
3) 철학은 신에 대해 말 해 주지 못함을 알고 철학에 대해 회의를 품다
4) 에베소 바닷가에서 명상에 잠기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한 노인을 만나다
5) 에베소를 거쳐 160년 경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순교
2. 저스틴의 작품
1) 제 1변증서:
황제에게 제출 된 책.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무신론자요 부도덕하다는 오해를 풀기 위해 쓴 책.
2) 제 2변증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죄가 없는 사람들을 즉결 처분하는 것에 대한 짧고도 열정적인 항의의 책(순교 10년 후 핍박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전쟁 출정. 주요 급수원을 끊어버린 적군 앞에 항복할 위급한 상황 발생.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제 12 우뢰 군단= 함께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 기적 발생. 기독교인에 대한 관용정책으로 바뀜).
3) 트리포와의 대화: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라는 인간을 숭배하고 유대교 율법을 파괴한다고 공격한 트리포라는 유대인과의 토론에 대한 글
3. 저스틴의 영성
1) 말씀과 더불어 이성을 중시하는 신앙(제 1변증서)
2)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찾아내기 위하여 내 모든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애슬 것이다(제 2 변증서)
3) 참된 철학은 기독교적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헬라의 철학 유산을 중시하다.
4) 참 그리스도인
“아무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위해 죽을 만큼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들과 교육 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분을 위하여 부귀와 두려움과 죽음을 초개 같이 여겼다.”
그리스도같은 분이 어디 있는가!
5) 기독교 초기 주일 예배 풍경= 성경 낭독, 설교, 공중 기도, 거룩한 입맞춤, 성만찬 준수, 자선 등으로 구성
6) 순교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그리스도인이다”(함께 순교당한 자의 고백).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에게 그 사상이 계속되다!
※ 터툴리안(주후 150년경-215?220?)
1. 생애
2세기 중엽 카르타고에서 로마군의 이교도 백부장 아들로 태어남
2. 기독교를 접한 시기
정확치 않음. 193년, 법학을 배우고 변호인으로 활약. 신앙으로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접하다.
3. 라틴신학(북아프리카학파)의 아버지로 불리운 터툴리안은 철학에도 비판적이었던 대단히 신앙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What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라는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터툴리안이 헬라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철학에 대항하여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했다.
4. 203년 대교회를 떠나 몬타누스파에 가입
5. 터툴리안(주후 150년경-215?220?)의 저서들은 둘로 나뉜다. 초기의 정통 서술과 후기 몬타니즘적 경향의 저술들이다.
6. 몬타니즘과 터툴리안
몬타니즘은 2세기 후반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프리기아(Phrygia)에서 열광주의와 계시문학적 종말론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황홀경을 체험한 신비주의 밀교 사제 출신의 몬타누스로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3세기 초 터툴리안이 사는 북아프리카에도 상륙하였으며 터툴리안은 이 운동에 즉시 가담하였다.
7. 터툴리안은 왜 몬타누스파에 가담하였을까?
내재(內在)의 철학에 반감을 가진 터툴리안의 열정적 초월 신앙은 그가 황홀경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로 이적과 예언 은사를 강조하고 오늘날의 오순절적 운동과 유사점이 많은 몬타누스파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아프리카로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접근한 반면, 터툴리안은 법률이나 정치 등의 실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실천적으로 접근했다.
이런 성품이 잘못 발휘되면 도덕률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양극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점에 수렴되기도 한다. 즉 율법주의가 초월주의자들과 만나면 극단은 서로 통하기도 한다.
따라서 당시 몬타니즘주의자들의 금욕(결혼 포기, 재혼 금지, 동정성 강조 등)과 금식 그리고 순교에 대한 열망, 깊은 참회 등의 엄격함에 매력을 느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입니다.
8. 열광적 근본주의자 터툴리안
독신 생활을 찬양한 몬타니즘의 경향을 따라 터툴리안도 독신을 지킨다. 터툴리안은 일종의 열광적 근본주의자였던 셈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분열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초월주의자들과 통하는 면도 있다.
엄격함에 매력을 느끼는 근본주의자였기에 터툴리안에게 있어 처벌은 용서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9. 터툴리안과 오늘날의 기독교
오늘날 우리 기독교도 화평과 희락과 자비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터툴리안은 "간음과 우상숭배 죄를 지은 사람들의 회개를 수용하고 사면령"을 내린 카르타고 감독의 결정에 대단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툴리안이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에 호감을 느낀 한 가지 실마리(?)
터툴리안은 도덕적 강경론자, 엄격주의자, 도덕적 근본주의자로서 정통 교회의 처신에 분노하여 열광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몬타니즘으로 돌아섰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터툴리안에 대해 그는 신학적으로 거의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다. 혹시 이것이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의 매력에 빠진 한 가지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까?
11. 신학에 대한 터툴리안의 공헌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satisfactio) 등은 그가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였다.
그렇다고 그가 지속적인 바른 신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터툴리안은 <로고스>(말씀)이 본래 하나님의 비인격적인 이성이었으나 창조 시에 인격이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 관여한다는 일종의 종속적 견해다.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서도 터툴리안은 "혼합이 아니라 결합(conjunction)"이라는 낯선 용어를 쓴다. 정통신학은 "혼합", "결합"이라는 두 용어를 경계한다.
12. 기독론
삼위일체론만큼 기독론도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니니 인간이 이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후 키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기독론 논쟁은 레오 황제의 주선으로 칼케돈 신조의 골자를 이루는 <통합신조>에서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양성은 연합을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를 고백한다(생략)”가 되었다.
이것이 칼케돈 신조에서 “혼합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구분되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는 두 본성을 지닌 분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두 본성의 구분은 결합의 이유로 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독특한 특성은 보존되고,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존재 안으로 동시에 발휘된다”로 정리되었다.
이것이 유티케스 정죄와 훗날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성례론 논쟁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닌 인간이 부족한 바벨탑 이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터툴리안 같은 초대 기독 신학자가 몬타니즘으로 돌아선 것은 신학 정립의 여명기에 발생한 인류가 가진 안타까운 한계였다.
13. 오늘날도 여전히 바른 신학을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터툴리안의 경우는 초대 교부시대에 당연히 일어난 아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바른 신앙과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 완벽한 교리를 성경에 직설적으로 기록하거나 초대교회 완벽한 인물을 보내 일치 교리를 만들게 하지 않아 미로 찾듯 난제를 풀어가야 하게 된 것인지 인류는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물론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보아야 겠지만.
조덕영 교수(조직신학, Th. D.)
출처 https://koreacreationtheology.tistory.com/762 [성경-창조-신학-세계관-과학 (창조신학연구소)]
제2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상당수에 달하는 기독교 저술가들은 박해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풀기 위해서 기독교의 신앙을 옹호해야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의 저술은 황제를 수신인으로 하고 있지만 당시의 지식층들이 널리 읽어 주기를 바랐다. 이러한 저술들이 특히 중요성을 갖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해당 지역에서 통용되던 사상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장은 이교도를 공격하는 한편, 기독교를 대적하는 고소들을 반박하는 데 있었다. 대중들의 기독교인에 대한 고발은 기독교인들의 습관과 신앙에 얽힌 헛소문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은 근친상간을 한다, 어린애들을 잡아먹는다, 성직자들의 성기를 숭배한다, 십자가에 달린 당나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등등의 비슷한 것들이다. 이러한 헛소문의 대부분은 기독교 의식에 대한 오해가 쌓여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된 고소를 직면해서 제2세기 변증 신학자들은 붓을 들었다.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은 허구적으로 꾸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교묘한 모략을 쉽게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반론을 제기해야 했다. 이들의 글들은 이런 배경하에서 저술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저작들은 후기 기독교 신학 발전에 중요한 몫을 하게 되었다.
이 변증 신학자 중에서 순교자 저스틴은 저술의 양과 그 범위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심오함과 창의성에서 제2세기 희랍의 변증 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세겜(Shechem) 출신으로 마음에 철학을 품고 지적 방황을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저스틴은 기독교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두 가지 면에 직면하는데 첫째는 기독교 신앙과 고전적 문화와의 관계, 둘째는 기독교 신앙과 구약성경과의 관계이다.
저스틴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로고스를 혹은 말씀 이론을 동원한다. 이는 희랍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던 사상을 십분 활용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로고스의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이 로고스는 우주의 이성적 원리일 뿐만 아니라 제4복음서 서문 부분에 나오는 선재적 그리스도로 결론을 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스틴은 "로고스의 부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플라톤이 그의 이성으로는 결코 완전하게 채우지 못했던 로고스의 부분을 로고스 자신이 완전하게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부분적 진리만을 보유할 뿐이며, 진리와 자신이 둘러싸여 있는 수많은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 자체이며, 모든 진리의 표준인 말씀만은 이러한 구별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철학자들은 이 말씀을 오로지 부분적으로 알았는데 기독교인들은 전체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은 철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옳고, 저런 주장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성육신한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 요약해 보면 저스틴은 중기 플라톤주의자로서 또한 동시에 기독교인으로서 스토아 철학의 요소에다가 근본적으로 플라톤적인 철학을 가미했는데도 항상 완전한 진리는 오로지 성육신한 말씀에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저스틴의 둘째 문제로 기독교 신앙과 구약성경과의 관계에서 모든 구약의 사건은 신약의 사건을 향한다. 신약성경에서 실현된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신약에서 실현된 것이다. 헬라화된 철학, 혼돈된 사상, 유대교적 신학의 강한 세력속에서 기독교 교리가 뿌리를 내리는 시기에 기독교의 고유한 특성을 찾아내어 성육신과 죽은 자의 부활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저스틴의 신학적 노력은 존중받아야 할 일이며 후대의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는데 그의 노력은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_두란노
[출처] 희랍의 변증 신학자 저스틴|작성자 주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