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상명세서
본명 : 김정일(金正日)
현직 : 당총비서, 군최고사령관, 국방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출생 : 1942년 2월 구소련 브야츠크 (북한의 주장 : 백두산 밀영)
최종학력 :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
신장 : 165cm
체중 : 85kg
시력 : 심한근시, 도수 높은 안경 착용
취미 : 사격, 승마, 영화감상, 자동차 운전
기호품 : 헤네시 꼬냑, 백포도주, 줄담배(최근 금연한 것으로 알려짐)
성격 : 내성적.성미 급하고 약간 즉흥적, 효성심 지극, 결단력 많음. 통 큰 성격
업무스타일 : 밤 11시-새벽5시 업무 집중처리, 의외성과 대담성
인사스타일 : 친인척 배제, 보수적. 합리적 인사
통치스타일 : 광폭. 인덕정치 주장, 현실타파형, 스케일 강조
경제관 :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개인자질 : 예술적 자질과 빠른 두뇌회전, 다재다능
현주소 : 평양시 중구 남산동 중앙당사
자료 : 연합뉴스 '김정일 100문 100답'
■ 성장과정
6~7세때 동생·어머니 잃어 성격 큰 영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출생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첫째는 1942년 2월16일 러시아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에서 60㎞ 떨어진, 88특별여단 본부가 있었던 브야츠크(북야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는 주장이다.
둘째, 재일 논픽션작가 김찬정씨에 따르면 브야츠크에서 남쪽으로 500㎞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와 볼로시로프 중간지점의 하마탄(남야영) 부근의 소련 병원에서 출생했다. 1942년 6월19일 김일성의 브야츠크 전출로 가족이 그 곳으로 옮기게 됐다는 것이다.
셋째, 북한은 백두산 밀영지의 귀틀집(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김일성의 1941~45년 소련 체류와 김정일의 소련 이름 유라를 감안하면 이는 신빙성이 약하다.
김정일은 만 세살인 1945년 10월 북한에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버지와 함께 들어왔다면 9월 중순이 될 수도 있다.
김정일의 어린 시절은 여유가 있었으나 기복이 심했다. 1948년 8월 화진포의 김일성 별장에서 당시 북한 주둔소련군의 레베데프 정치사령관 아들 및 여동생 김경희 등과 찍은 사진 그리고 1948년 11월 어머니와 함께 소련군 고위장성 부인들과 찍은 기념사진 등을 보면 한동안 유복했던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어린 나이에 인생 비극을 체험해야 했다. 1948년 초여름 그의 동생 슈라가 익사했고 이듬해인 1949년 9월22일 어머니를 잃는 불운을 겪는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어린 김정일 남매에 대한 김일성의 애정은 각별했을 것이며 이같은 가정환경이 김정일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한다.
김정일은 1949년 9월 평양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고 다음해 6·25전쟁 발발로 만주로 피란 가 길림학원에서 공부했다. 1952년 11월에는 만주로 소개되어 온 만경대 혁명가 유자녀 학원(만경대 혁명학원 전신) 3학년에 편입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평양에 돌아와 평양교외에 있는 삼석인민학교로 전학했고 얼마 후 개교한 평양 제4인민학교 5학년으로 전학했다. 그후 평양의 제1초급중학교를 거쳐, 1960년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는 남산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김정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고교시절부터 표출됐다는 게 정설이다. 김정일은 1959년 1월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에 참석하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동행했다.
남산고등중학교 졸업반이었던 19살의 김정일은 영리하고 호기심이 많아 소련 대학의 학과 내용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고 황장엽(黃長燁)씨가 밝힌 바 있다. 어린 나이에 정권에 대한 욕망이 컸고 아버지를 잘 모시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으며 수행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직접 보고 받거나 지시를 내리는 일을 즐겼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1964년 3월 김일성 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 직후인 6월에 중앙당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중앙당 사업에 참여했고 1967·1971년 당 조직지도부 과장과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1973년 당 문학예술부 부장을 거쳐 1973년 9월 당의 조직 및 선전선동담당 비서라는 막강한 지위를 차지했다. 1974년 2월 당 정치위원회 위원(정치국원)까지 겸함으로써 김정일은 후계자로서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그는 ‘지도자 동지’ 또는 ‘당중앙’으로 호칭되었으며 33세되던 1975년 2월 15일에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10~14일 개최된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 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공식적인 제2인자 자리를 굳혔다.
1982년 3월에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체계화 하기도 했다. 1983년 6월에는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 덩샤오핑(鄧小平)등과 접견하고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 등지를 시찰했다. 1984~86년에는 방북한 胡총서기 및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 등과 회견하는 등 후계자 수업을 했다.
자료 : 정인영(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 한국일보 2000.5.29
■ 통치스타일
김정일은 2,200만 북한 주민들의 최고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스타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북한 내부에서 그가 행한 통치 활동은 거의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다. 해외 방문도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는 북한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김정일을 로동신문이나 중앙방송 등 관영 언론매체를 통해서만 접한다. 물론 김정일의 육성은 들을 수 없다.
이를 통해 김정일은 신비화된 지도자의 이미지로 주민들에게 각인된다. 그는 항상 현지지도와 시찰을 통해, 군대의 열병식이나 대규모 당·정 회의의 개막식 등을 통해서만 인민들에게 모습을 보이며 그에 관한 전설적 얘기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끊임없이 교양된다.
정치경력을 당의 조직지도와 선전·선동 분야에서부터 쌓기 시작했으며 특히 조직사업을 지난 30여 년간 담당했다는 점은 그가 북한을 지배하는 실질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당 비서국 조직지도부는 그야 말로“당 속의 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하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당 조직 분야를 담당했던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북한에서 대규모 숙청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른바 ‘유일지도체계 10대 원칙’이 제정되고 북한 사회의 분위기가 냉각된 이후이기 때문에 감히 김정일에게 도전할 간부들이 나타날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김정일의 간부들에 대한 정책이 보수적임을 드러내는 증거로도 받아들여진다.
김정일은 당과 국가, 군대 등 모든 권력기구들을 세분, 각 조직들이 자신만을 쳐다보며 충성경쟁을 하게 만드는 통치술을 발휘해왔다. 마치 구획화한 칸막이로 빙 둘러져 있는 방의 한 가운데에 자신만이 서 있는 모습이다. 이는 전형적인 분할통치 방식이다. 각 기구들은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해 결재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집행에 들어간다. 책임도 오직 김정일에 대해서만 진다.
김정일은 당업무를 통해 통치행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국가나 군대보다는 당에 대해 애정을 많이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국가사무를 책임진 이후에는 당 이외의 조직들도 직접 관리하게 된다.
예컨대 80년대 중반 그는 외교 업무에 대한 더욱 많은 권한을 당 국제부보다 외교부(지금의 외무성)에 부여하고 그 일을 직접 챙겼다. 1991년에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국방업무를 관리하는 최고책임자가 됨으로써 김일성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사실상 실질적인 최고통치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모든 분야의 권력기구를 장악해 왔기 때문에 그에게는 당·정·군의 역할 분담만 있을 뿐 이들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하등의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경제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자리에서는 내각의 역할을 강조하고 안보나 기강을 강조할 때에는 군대를 내세우고 정치나 사상을 내세울 때에는 당을 강조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들간의, 또는 이들 내부의 토론과 합의는 존재할 수 없다.
김정일 통치 아래서 가장 약화된 조직이 바로 당중앙위원회나 정치국 등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체제에서 정책결정을 책임지는 최고 조직들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인 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북한은 매우 독특한 정치체제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의 사정이다. 김정일이 자신의 나라를 어떤 방식으로 통치하든 그의 존재를 벗어나서 북한을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김정일만 설득하면 북한의 국가정책 노선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의외로 쉽게 확보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자료 : 류길재(경남대 북한 대학원 교수)
/ 한국일보 2000.5.31
■ 권력승계 과정
북한은 김정일이 64.6 당중앙위원회에서 지도원으로 정치수업을 시작한후 67.5 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반대파인 갑산파 제거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등 유일사상 체계를 확립하고 김일성 우상화를 강화하므로써 김일성의 정치기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70년대 들어 본격적인 권력승계가 시작되어 73.9 당 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당비서로 선출되고 이듬해인 74.2 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 정치위원(現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김일성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노동신문에서는 74.3 부터 김정일을「黨중앙」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으며 74. 4 김정일은 "모든사업은 지도자를 경유하여 首領이 결론한다"는 「유일적 지도원칙」을 정립하였습니다.
80년 6차 당대회에서 당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김일성의 공식후계자로 권력 전면에 등장하였고, 이때부터 호칭도 「당중앙」에서「친애하는 지도자동지」로 변화하였습니다.
또한 김일성 우상화와 체제우월성 과시를 위한 각종 대규모 공사를 시행하고「80년대 속도창조운동」제기 등 국정전반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은 자신 명의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여 사상이론가로서의 권위를 높였으며, 특히「주체사상에 대하여」(82.3)등 사상관련논문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91.12 인민군 최고사령관·93.4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어 軍權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97.10에는 당 전원회의 선출절차(당규약 24조)를 무시하고「黨중앙위·黨 중앙군사위 공동명의」의 추대형식으로 당 총비서직을 승계하였습니다.
한편 98.9.5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는 헌법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김정일을 권한이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했습니다. 김정일이 주석직에 취임하지 않은 것은 외부인사 면담과 대중연설을 싫어하고 막후통치를 선호함과 동시에 북한의 경제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료 : 국정원
■ 경제정책 -실용주의 노선
지난 가을 주석직을 공식 승계한 김정일은 김일성 시대와는 달리 여러 측면에서 실용주의 정책노선을 펼치고 있다. 특히 경제부문에 있어서 김정일은 과거와는 달리 대외교역을 비롯한 대외경제협력에 상당한 정책적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독일에 위치한 북한정보 전문기관인 한국경제정보원에 따르면 북한이 대외경제협력에 정책적 비중을 강화하고 있는 징표를 다음의 3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 대외경제협력 특히 국제적 감각이 뛰어난 인사가 경제관련 부처는 물론이고 그 밖의 정부요직에도 중용되고 있으며 대규모 국영기업의 경우에도 해외경험이 부족할 경우 진급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이는 과거 해외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주체사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무시되었던 예와는 정반대로 이 인사들을 김정일은 중용하고 있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둘째, 북한이 대외경제협력과 관련된 부서의 주요인물들에 대한 경력사항, 대규모 국영기업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해외에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과거에는 보안에 지장을 준다고 하여 극히 제한된 부분만 발표하던 통계를 비교적 상세하게 해외에 공개하고 있다. 이는 북한의 이러한 노력이 북한에 대한 해외의 불신을 해소하는 방편이 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셋째, 현재 공무원이나 기업임원들의 교육시 교육분야로서 대외경제협력 관련사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과거 주체사상, 김일성 투쟁기 등을 위주로 한 사상교육을 위주로 하였던 것과는 판이한 현상이다.
한편 북한이 경제협력 대상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대상국으로는 일본, 중국, 한국 순이며 최근에는 유럽연합(EU)와의 교역확대에도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한다.
자료 : 시사통일신문
■ 김정일화
김정일을 상징하는 우상화(花)로서 1988년 2월 김정일의 46회생일 때부터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불멸의 꽃」으로도 불린다.
북한은 이 꽃이 일본의 원예학자인 가모 모도데루가 남미가 원사지인 베고니아 뿌리로 20년간의 연구끝에 만들어 김정일에게 바친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베고니아과의 다년생식물인 김정일화는 크기가 보통 10~20cm이며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잎사귀에서 첫꽃이 핀 다음 차례로 피어 올라가면서 10~15개의 꽃이 4달이상이나 지속적으로 핀다.
꽃은 진한 붉은 색이며 한포기에 수꽃과 암꽃이 따로 핀다.
줄기는 모여나며 곧추 자라는데 키는 30~40cm정도이고 길고 둥근 잎은 어긋맞게 자라며 푸른색을 띤다.
번식력이 강하고 기르기 쉬운 장점을 지니고 있다.
김정일화는 오늘날 북한 전역에 보급되어 있는데 주로 평양의 중앙식물원 등 각지의 식물원내에 설치된 「김정일화실」에서 재배해 보급하고 있다.
1989년 12월에 준공된 평남 평성백화원의 김정일화실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 온실은 총규모 7백30㎡로 4면과 지붕이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한편 김정일화는 김정일우상화라는 특성에 맞춰 김정일을 찬양한 내용의 시·대중가요의 소재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대중가요로는 박미성작곡·우정희 작사 「김정일화」라는 노래가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자료 : 국정원
■ 김정일의 이름 작명 과정과 북한의 주장
김정일의 어린시절 이름은 러시아식 이름인 「유라」였다. 김정일이 당초 러시아식으로 불리운 것은, 그가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舊소련군 병영에서 태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유라」라는 이름을 한동안 사용하다가 남산 고급중학교 졸업(60.8)무렵에 「正一」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이 다닌 남산 고급중학교 교원을 지낸 증언자에 따르면, "졸업을 앞둔 김정일이 「내 이름을 정일로 고쳤으니 앞으로 김정일로 불러달라」고 급우들에게 선포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이 제6차 당대회(80.10)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면서 「正一」의 한자표기를 「正日」로 변경하였다. 이는 물론 母 김정숙의 「正」과 父 김일성의 「日」을 합성해서 만든 것으로, 자신이 김일성의 유일한 嫡子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한편 북한은 김정일의 이름과 관련,「조선문학」(99.3호)을 통해 "항일 혁명투사들이「태양의 아들이며 태양의 代를 이어라」는 뜻에서 正日로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김정일이 태어난 그때 백두밀영에서는 수령님의 자제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수령님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수령님은 「나는 본래 부친이 지어준 이름(김성주)이 있었으나, 김혁·차광수 동무들이 내 이름을 김일성으로 고쳐주었고,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불리니 내가 부친의 아들만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고 하였다. 혁명투사들은 수령님의 말씀을 혁명의 요청으로 받아안고 자제분의 이름을 지어드렸는데, 「태양의 아들이며 태양의 代를 곧바로 이어시라」는 뜻에서 「바를 正, 날 日」로 지었다"라고 소개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자료 : 국정원
■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 본 북한 전문가들의 견해
내가 본 김정일 위원장 - 서대숙 교수 인터뷰
서대숙 교수 프로필
서대숙(徐大肅·69) 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는 30년 남짓 북한을 연구한 세계적인 북한문제 전문가이다. 올 들어 북한연구 전문기관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과 북한대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그는 70년대 이후 여러차례 방북,핵심권력층과 정책토론을 벌이는 등 북한연구에 독보적 영역을 구축해 왔다.지난 4월 발간한 ‘현대북한의 지도자-김일성과 김정일’이란 저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권력승계 과정과 ‘김정일 체제’의 특징, 향후 과제 등을 잘 분석해 요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주요 독서파일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성격과 인품은.
한국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개인적 성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한두차례 만났다고 인품이나 성격을 제대로 알 수는 없다.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할 때 ‘괴팍하다’는 말도 있지만 ‘효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양쪽이 다 맞을 것이다.
지난 82년 제가 덩샤오핑(鄧小平)과 후야오방(胡耀邦) 등의 초대로 중국에 갔을 때 통역자들이 그의 성격에 대해 ‘덩샤오핑이나 후야오방에 비해 굉장히 괴팍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 대한 효심은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한 이기적 차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
김정일 위원장의 성장배경과 지도자로서의 교육은.
아버지에 비해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8살때 만주로 피난 가서 조선 혁명가 유자녀들이나 다른 빨치산의 아이들과 함께 혁명학원을 다녔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평양에 돌아온 그는 초등학교와 초급중학교에 이어 60년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는 등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았다. 또 64년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당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지도자 준비 과정을 철저하게 거쳤다.
그동안 국내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내성적 성격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우쭐한 자세로 별 달린 군복을 입은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외국 손님이 북한을 방문할 때 화려하게 환대하거나 접대하는 일도 드물다. 이를 두고 내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처지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다른 점을 꼽는다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은 지도자로서 완전히 구별 된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 빨치산이었다. 어릴때부터 목숨을 걸고 항일 운동을 했다. 중국사람들과도 같이 학교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다. 또 국내파, 연안파 등 정적(政敵)을 자기 손으로 한사람, 한사람 숙청하고 나라를 세웠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반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당에 들어갔다.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군에 입대하지도 않았고, 정규군의 훈련을 받은 일도 없다. 아버지가 만든 국가를 인계 받았을 뿐, 누구를 숙청한 경험도 없다. 대신 연극 연출이나 영화 제작 등 예술계통에 관심이 높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공인받기까지 정치적 카리스마를 스스로 획득했는가.
그렇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74년부터다.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까지 20년 동안 후계자 학습을 받은 것이다.
김일성 주석에게 지도를 받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 예를 들면 70년대 후계준비 사업인 3대혁명소조운동은 초창기 실패를 거쳤다. 그러나 후계준비 작업이 끝날 무렵인 79년12월에는 ‘김일성 훈장’ 제1호를 받는 등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또 당내 2인자로 등장한 80년 이후 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될 때까지 11년 남짓 지도자로서 자질을 닦았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자기의 확고한 카리스마를 정립할 수 있었다.
정치지도자로서 아버지보다 더 배짱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국가 주석직을 차지하지 않고도 북한을 다스리고 있다. 중국 공산당 당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국가 주석을 맡지 않고도 대륙의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하다.
지난 9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이유는.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본다. 어느 나라든 자기 나라의 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으로 나서고 미국·일본과 관계개선도 제대로 안되니 생존방법으로서는 핵무기와 핵무기를 운반하기 위한 미사일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하는지.
실례를 들면 70,80년대부터 줄곧 현장시찰을 많이 해왔다. 군 시찰이 특히잦다. 선군(先軍)정치를 해야 강성대국으로 번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군수공장을 자주 둘러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있고, 지도력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김정일 위원장의 예술적 식견은 어떤가.
높은 편이다.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에서 일하면서 여러가지 영화제작을 지도했다. 특히 69년에 발표된 ‘피바다’,70년의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72년의 ‘꽃파는 처녀’ 등은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아버지의 빨치산 운동때 얘기를 토대로 극본을 만들었는데, 김일성 주석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양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작품과 비교·연구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평양의 개선문이나 주체탑도 그가 만들었다.
서방세계의 문물에 대한 이해나 수용 정도는.
평양에서 당 간부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한국은 물론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김정일 위원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양에서는 1주일에 한차례씩 당 간부를 대상으로 ‘평양순보’가 발행되는데 국제뉴스가 빠짐없이 실려 있다. 북한을 ‘봉쇄된 나라’,‘아무 것도 모르는 나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북한주민의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식은.
‘좋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절반 정도씩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천재(天災)가 오면 임금이 천운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나서자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닥쳤다. 때문에 주민들이 잘못 인식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금년부터 이탈리아와 국교를 맺고 중국,소련,필리핀, 캐나다 등과 관계 개선에 나서는 등 김정일 위원장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는 6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전망하면.
낙관적으로 본다. 회담이 좋게 발전할 것이다.
두 정상의 만남 자체도 남북 화해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지만, 악수만 하고 헤어지진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 이후 자기들에게 가장 가까이 생각되는 대통령이다. 북한으로서도 민족화합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인 것이다.
한국이 북한에 혜택을 주는 것이 있다면 북한도 한국 대표단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예를 들면 휴전선 일대 지뢰를 제거한다든지,동·서해안의 해상경계선을 합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든다든지,긴장완화를 위한 대표부를 세운다든지, 여러가지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은 ‘북한이 돈이 없어 일방적으로 손을 내밀려 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북한은 차라리 굶더라도 자존심은 지키려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경제관은.
과거 김일성 주석은 ‘200일 전투’,‘생산고지 점령’ 등의 구호로 국가계획경제를 추진했다.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완전히 다르다. 아버지 세대처럼 성장과정에서 큰 고생을 하지 않았다.또 노동력 동원 등 국가계획경제 개념과 달리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컴퓨터를 활용하는 등 새로운 경제개발 방식에 눈을 돌리고 있다. 앞으로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자료 : 대한매일
■ 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 -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 기고문
◆ 문명자씨 프로필
문명자(文明子)씨는 올해 71세의 재미 원로언론인으로 미국 ‘US아시안 뉴스서비스’의 주필이며,아직도 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이다.61년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시작으로 국내 여러 언론사의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문씨는 73년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 납치사건’을 보도한 직후 미국에 망명했다. 90년 이후 10여차례 방북 취재했고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회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면담한 바 있다. 그녀는 서방기자중‘최고의 북한소식통’으로 불릴 정도로 북한 지도층과 북한 사회에 이해가 깊다.
나는 지난 92년 4월 김일성(金日成) 주석을 인터뷰했다. 참으로 어렵게 마련된 자리였다.인터뷰 성사까지는 꼬박 2년이 걸렸는데 그것은 오찬을 겸한 인터뷰였다. 장소인 금수산기념궁전 접견실에는 식탁 가운데에 김정일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김 주석은 그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꽃을 개발한 일본 사람의 요청에 따라 ‘김정일화’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는데 사실 저 꽃이 너무 고와서 조직비서 성격하고는 맞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 조직비서는 통이 크고 사나이 답거든.”
김 주석은 아들을 꼭 ‘조직비서’라고 불렀다. 나는 내심 갸우뚱했다. 서방에 알려진 ‘내성적인 영화광’이라는 평과는 다른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부모다. 계속 연구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비로소 김정일 총비서와 만나게 된 것은 94년 7월 14일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 시기였다. 비록 국장의 마당이었지만 나는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그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멀리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가짐은 정중했고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주장과는 달리 말을 더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얼굴은 여위고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지만 손은 따뜻했고 손아귀에 힘이 있었다. 전혀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조문 후 잠시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지난 4월 쓰신 수령님 인터뷰 기사를 잘 읽었습니다. 제가 글자를 크게 확대해서 수령님께도 가져다 드렸습니다.”
“혹시 잘못된 곳은 없었습니까.”
“아주 정확히 쓰셨습니다.잘 읽었습니다.”
나는 김정일 총비서와의 면담을 포함해 김일성 주석의 언급, 측근들의 증언, 주변 취재,북한 인민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그의 진면목에 다가서 보고자 했다. 단지 김정일 총비서와의 94년 7월 이후의 면담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자세히 밝힐 수 없어 양해를 구한다.
나는 김정일 총비서의 생일 명절인 2.16 기간에 북을 방문한 일이 있다.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본인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전에도 자신의 생일 행사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 시기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는데 뒤에 알게 되었다.그는 매년 그 무렵이면 백두산을 찾는 듯 했다.특히 99년 2월에는 백두산 천지를 등반한 후 2월 16일 갑무(갑산-무산) 경비도로를 달리다 차에서 내려 10리를 걸었다고 한다. 갑무경비도로는 길 양편으로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한대림이 끝없이 이어진 풍치 좋은 길이다. 그러나 이 무렵의 백두산 지역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린다. 혹한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으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며 특히 백두산의 겨울을 좋아한다고 한다.
서방의 관측통들은 지금까지 그가 “내성적이며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가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급서 후 나는 당시 북미 회담의 북측 대표이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국가원수가 서거하셨는데 회담 진행에 차질이 없겠습니까.”
“물론 회담은 수령님의 결재로 진행되어 왔지만 장군님께서 직접 지도해 오신 사업이기 때문에 예정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은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김정일 총비서가 막후에서 북미회담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 사후에도 김 총비서는 외교 의전 일선에 나서는 시기를 계속 미루어 왔다. 서방의 관측통들은 그 이유 중 하나를 그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으로 평가해 왔다. 반면 그의 측근 인사인 김용순 비서는 그를 “박력 있고 한 번 한다면 하는” 성격의 소유자라 평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 나는 종종 두 인물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물론 차이가 있다. 소년 김정일은 대단히 영리했던 것 같다. 김정일 총비서는 아버지를 꼭 ‘수령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김정일 총비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라 외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였다.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고무된 김일성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7월 한여름 더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들르게 될 묘향산 특각을 직접 돌아보기 위해 평안북도로 떠났다. 묘향산 인근 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고 묘향산 특각에 도착한 김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 부처가 묵게 될 방의 냉장고 문까지 열어보았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노인의 건강을 염려한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평양으로 돌아올 것을 계속 권유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성공의 일념에 가득차 있던 김 주석은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 설득하던 김 비서가 마침내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아버지! 제발 돌아오십시오.”
김정일 총비서가 스타일상 김 주석과 다른 점이라면 표현 방식의 차이를 들수 있을 것이다. 김 주석과 달리 김 총비서는 노기를 표현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 사후 대부분의 평자들은 김정일 정권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점쳤다. 짧으면 3개월, 길어야 3년 안에 붕괴한다는 것이다. 그 유력한 논거 중 하나가 북의 새 지도자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후계자가 되었을 뿐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페리 보고서조차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을 공언하는 것을 보면 이같은 문제는 해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95∼97년 사이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총비서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한 것이다. 그의 정책 결정의 특징 중 하나는 ‘의외성’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의 장지가 금수산기념궁전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 금수산기념궁전은 북의 사회 통합의 구심이 되고 있다.
98년 8월 북이 발사한 ‘물체’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며칠 후 북이 그것을‘인공위성’이라 발표했을 때 세계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제의 인공위성은 한반도의 정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미국에게 북은 ‘붕괴시켜야’ 하거나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 대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체제를 인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화했다. 물론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 막대한 외화를 들여 인공위성을 개발했어야 하는가라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북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우리에게 그 같은 능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우리를 이라크나 유고처럼 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북의 인민들은 김 총비서의 정책적 의외성을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나가는’ 강점으로 인식하지만 서방에서는 ‘예측불가’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내가 아는 김 총비서는 다양한 방면에 대해 화제가 풍부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이 같은 측면이 성격적 대담성과 맞물려 정책의 ‘의외성’을 빚어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 총비서는 64년 6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 당사업을 시작했다. 총비서에 이르기까지 37년간의 당 사업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업무스타일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한밤중의 전화’다. 나는 북의 여러 고위인사들로부터 이같은 얘기를 들었다. 김 총비서는 “서류를 결재하던 중 의문이 생겨 늦은 시간이지만 부득이 전화했다”며 낮에 올린 결재서류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곤 한다고 한다.
그가 반드시 묻는 말 중의 하나가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는 것이다. 그러니 부하들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도 김 총비서 업무스타일의 한 특징이라 한다.“새로 작곡된 음악을 틀어놓고 평가하면서 눈으로는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한편 전화로는 누군가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식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다. 그가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한 측근 인사는 “화려한 옷차림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계셨다”고 했다.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화꽃이라는 점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목화꽃은 화려하지 않으나 유용하다.
서방과의 교류가 많지 않은 북의 지도자 김 총비서가 세계적인 추세를 제때에 파악해 나가는 수단은 무엇일까. 김 총비서가 서방의 방송, 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서방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나는 특히 그가 영어를 이해하는 것으로 느꼈다. 그가 구사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국식 영어가 아니라 현대 미국어였다.
김일성종합대학에는 ‘김정일 사적관’이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라 한다. 이 곳에서는 김정일 총비서의 대학시절을 잘 볼 수 있다. 사적관에서 필자는 그가 재학중 쓴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을 특히 관심 깊게 보았다. 핵심내용은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동시대 조선반도에 발해라는 다른 주권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라는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만 있었을 뿐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지향이 없어서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민족통일은 3국중 통일 지향이 가장 강했던 고구려를 이어 받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관에는 김정일 학생과 동료들이 군사 강의, 사격훈련, 점호, 야간습격 전투훈련, 군사야영훈련 등을 받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적관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다 보면 재미난 공통점이 발견된다. 학급 동료들과 함께 찍은 여러장의 사진에서 김정일 학생은 사진의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모습은 항상 맨 뒷줄 한켠에서 발견된다.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던 4월 10일 나는 평양에 있었다. 4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제9차 조일회담 취재차 방북했다가 역사적인 뉴스에 접하게 됐던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 총비서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분단 이후 여러차례 최고위급 회담 성사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94년에는 수령님의 서거로 최고위급 회담이 무산되었는데 이제 드디어 성사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장군님께서는 지금 회담 준비로 대단히 바쁘다. 그 분의 건강을 지켜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그는 특히 “지난날 조문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며 이번에는 아무런 전제 없이 서로가 일단 부딪혀 보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오는 6월 12일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될 남북의 두 정상.그 한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나는 30년간의 취재 파일을 바탕으로 지난해 책을 한 권 출간한 바 있다. 나의 눈에는 두 정상의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게 비친다. 오는 정상회담에서 이 두 정상의 서로 다른 캐릭터가 어떻게 어우러져 분단 50년의 역사를 청산해 나갈지 기대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