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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 스크랩 선암서원을 찿아 (청도군 매전면 신지리)
余南 추천 0 조회 78 08.01.18 12: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암서원을 찿아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비단같이 아름다운 물가를 가진 금천면을 흘러내리는 동창천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울러진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모신 서원으로

선조원년 1568년 매전의 동산동에 세운것을 선조10년 에 동창천이 맴돌아 나아가는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서원 뒷편에는  임란때 천성만호 박경선이 동창천 맞은편 산인 어성산

전투에서 봉황애 절벽으로 왜장을 안고 떨어져 순국한 추모비와  정조때 서학으로 이름높은

이가환이 참가한 임란창의 의사 전적지 기념비도 있어 이고장이 충절과 호국의 고향인듯 하다.

 

이곳 청도는 운문사로 유명하지만 운문사 가기전 동곡리 옆의 신지리 에서 운강고댁,

매전면 당호리의 삼족대, 운문사와 함께 창건한 오갑사 가운데 모두가 폐사하고 대비갑사 (현재 대비사) 만 남겨져 있는데 이름난 유명사찰보다는 억산 아래 대비사도 답사 하면 좋을듯합니다.

 

그리고 신지리의 소요당 박하담 (1479-1560)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에 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

했던 이곳 운강고댁 은 6.25때 피난왔던 이승만 대통령이 운강고댁에서 숙식을 했다고 합니다.

신지리에는 운강고댁을 비롯하여 상류층의 고가들이 안동 못지 않게 많지요.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허름한 절집은 사람이 살고 있어 온기가 있는데 문을 꼭 닫아놓은

서원과 고가는 마치 귀신이 나올듯 적막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지 않아  온기가 없어서 인듯합니다.

지금이야 언양에서 운문령, 신대구 고속도로, 경산 자인에서 동곡가는길 이 열려 있어 접근하기가

좋은데  그 당시는 얼마나 산속 깊이 숨은 동네 였는지 ..

나의 고향은 아니지만 정말 동창천옆의 동곡에서 한재 미나리와  동곡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답사와 들꽃구경으로 지친몸을 학일온천(김전면) 에서 풀면 더이상 좋은것은 없는것 같네요.

 

 

 선암서원

 선암서원

 

 

 

 

 

 

 

 선암서원에는 자목련만이 ....

 

 

 

 

 

 

 임란때 어성산전투 추모비(박경선), 임란창의의사 전적지비(이가환)

 

 

 

 

 

 동창천의 아름다운 경관  "소요대"

 

 

 

 

 

 운강고댁  ^ 문이 잠겨 아쉽네

 

 

 

 대비사 가는길 ~~~

 

대비사
대비사 대웅전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운문산(雲門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7년(신라 진흥왕 28)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 여기서 신승은 승려의 이름이 아니라 능력이 뛰어난 승려를 뜻하는 말이다. 창건 당시에는 소작갑사(小鵲岬寺)라고 하였다.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557년 한 신승이 운문산에 들어와 현재의 금수동(金水洞) 북대암(北臺庵)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도하였다. 3년이 지난 어느날 산과 계곡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들이 놀라 울었다. 신승은 이 때 이 산에 오령(五靈)이 살고 있음을 알고 7년에 걸쳐 5개의 사찰을 지었다. 산 중앙에는 대작갑사(大鵲岬寺), 동쪽에는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는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는 소작갑사, 북쪽에는 소보갑사(所寶岬寺)를 각각 지었던 것이다. 이 중 대작갑사는 지금의 운문사(雲門寺)이다.

600년(진평왕 22) 원광(圓光)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대비갑사(大悲岬寺)로 바꿨으며, 신라 말 고려 초 후삼국이 다툴 때 다른 4개 사찰과 함께 불에 탔다. 고려 인종(재위: 1123∼1149) 때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이 중창하였다. 본래는 박곡리 마을 내에 있었으나 학일이 중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타자 금천면에서 성금을 모아 응교(應敎)가 재건하였다. 대비사라는 절 이름은 불교의 대자대비에서 유래한 말인데, 언제 대비갑사가 대비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향로전·요사채가 있고, 산내 암자로 도솔암과 옥련암이 있다. 이 중 보물 제834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1685년(숙종 11) 중건했다는 기록을 담은 문서가 전한다. 향로전은 대웅전 오른쪽에, 요사는 왼쪽에 있다. 유물로는 절 입구 동쪽 산기슭에 소요(逍遼) 태능(太能: 1562∼1649)과 취운(翠雲) 학린(學璘: 1575∼1651)의 부도를 비롯한 11기의 부도가 모여 있다.


 

 

 삼족대

 

 동창천 위의 삼족대

 

1987년 5월 13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1519년(중종 14) 김대유(:1479∼1551)가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로 동창천 암벽 위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들인 조식()·박하담(주세붕(김응조(김극일()·신계승() 등과 강론하던 곳이며, 그의 호를 따라 삼족대라 이름지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사방에 토담을 쌓고 일각문을 두어 그 안에 정자를 배치하였는데 방 2칸과 부엌, 우물마루가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삼족대 밑에 1973년에 세운 김대유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의 중수기문()이 있다.

 

삼족이란 김대유가 동창천 암자위에 정자를 지을당시 벼슬(철원현감),나이 (당시62세) ,먹을것

이 세가지가 스스로 만족할 만큼 생각한다고 해서 그의호를 삼족당 이라 지엇다고 한다.

 

 

청도임당리 김씨고택(淸道林塘里 金氏故宅) ◆

지정번호 : 대한민국중요민속자료 제245호
지 정 일 : 2005. 1. 31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63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김판득

임당리(林塘里)에는 조선시대 궁중내시(宮中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金馹俊: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職牒)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임당리김씨고택은 강희25년(康熙) 병인(丙寅)윤사월(1686년)이란 연기가 있는 암막새기와가 망와(望瓦)로 사용되고 있으나 건물 전체의 구조 양식으로 보아서는 19세기 건축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물배치는 5칸 대문채가 마을 전체의 지세에 어울리게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대문간과 사랑마당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다. 사랑마당의 우측에는 토담으로 별곽(別廓)을 구성하여 사당을 서북향으로 배치하였다. 지형상 안채는 남서향 또는 동남향으로 배치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북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안채를 중심으로 한 안마당과 뒷마당을 튼 ㅁ자를 이룬 건물들과 토담으로 철저히 폐쇄되어있고 외벌 대 장대석 기단 위에 자연석주초를 놓아 각주를 세운 안채는 정면6칸, 측면2칸의 맞배기와 집이다. 중 사랑채는 정면4칸의 두줄배기 집으로 중앙의 2칸은 앞줄이2칸 마루이고 뒷줄은 통칸 온돌방으로 쓰이고 있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태기를 두른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아 각주를 세운 민도리집으로 상부가구는 5량가에 중도리 안쪽은 우물반자로 처리하였다. 큰 사랑채는 정면4칸 중 좌측2칸은 사랑대청이고 우측2칸은 반칸 깊이의 툇마루와 뒤쪽에2칸 통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갓 둘레를 돌린 기단을 설치하고 정면과 대청주위에는 원주를 세웠다. 주초는 화강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사용하였고, 지붕 귀쪽은 선자(扇子)서까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88. 9. 23 경상북도민속자료제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1.31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245호로 정함]


- 일반 班家와 다른 배치 및 공간구성을 보이는 내관가(內官家) -

문화재청(청장 유홍준·兪弘濬)은 경북 청도군 소재 「청도임당리김씨고택(淸道林塘里金氏故宅)」을 중요민속자료 제245호로 지정하였다.

「청도임당리김씨고택」은 대대로 내시(內侍)가 살았던 내관가(內官家)로 궁궐주변이 아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여러 대(累代)에 걸쳐 살면서 조성된 가옥으로 지방에서 내관가(內官家)가 조사된 사례로는 이 고택이 유일하다.

이 고택은 서북향의 몸채 배치, 안채의 노출을 꺼리는 공간구성 등 일반적인 반가(班家)와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주거건축 및 내시가(內侍家)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고 인정되어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게 되었다.

가옥의 실측조사 시 별묘(別廟)에서 발견된 「內侍付 通政金馹俊家世係」에는 시조부터 15世까지의 실직(實職)과 이름 및 본관, 산소의 위치와 좌향 (坐向)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시조가 이곳에 입향(入鄕), 정착한 시기(1500年代)와 이성독자(異姓獨子)로 상속되어 이어온 내시가계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으며 가첩(家牒)의 주인인 16世 金馹俊(1863~1954)은 그 벼슬이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기도 하였다.




 

 

  운강고댁

주소: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 문화재 지정:중요민속자료 제 106호(淸道雲岡古宅)

◈ 고택의 특징:조선 후기의 주택

◈ 풍수지리설:없음

◈ 거주 여부: 후손이 거주

청도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운문사 방면으로 가면, 동곡천과 동창천이 합수되는 지점 가까이에 금천리가 있다. 이곳에서 987번 도로로 우회전하여 금천교를 건너면 곧 신지 마을이다. 이곳에는 여러 채의 고택이 즐비하여 유서 깊은 마을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운강 고택은 1726년 박숙(朴淑)이 처음 짓고, 1824년 후손인 박시묵(朴時묵)이 중건하고, 또 손자가 중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호가 운강(雲岡)인 박시묵은 이황 학파에 속했던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1872년 강학소절목(講學所節目)을 마련하고 교육기관으로 기틀을 세웠다. 이 집은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한 박숙이 사당을 짓고서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고택 곁에는 박시묵의 아들인 박재충이 분가를 하면서 건립한 운남 고택(경북 문화재 제270호)과 손자인 박래현이 별서로 건립했다는 명중 고택이 함께 있다.

건물의 배열은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그 앞쪽에 두 개의 튼 입구자형으로 건물들을 결합시켜 9동 80칸에 이르는 큰 집이 되었다. 두 개의 넓은 안 마당과 사당 앞의 백류원(白榴園) 터, 안채 후원, 사랑채 후원 등 모두 넓은 공간에 위치한다. 이 집은 다양한 수장 공간과 내외를 분별하는 설비와 공간, 그리고 주인과 하인을 구별한 측간이 따로 있어 다양한 기능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주택이다.

 

 

 운강고택

 

 

 선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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