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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상 김근학 원문보기 글쓴이: 김근학
[一] | |
奔走猶存犬馬誠3) |
분주히 견마와 같은 정성을 지니고서 |
與人何事奉書牲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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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함께 무슨 일이든 서생(書牲)을 받들었다 |
千年幸際風雲契5) |
천년 만에 다행히도 풍운의 계합 열었으니 |
聖主賢臣復會盟 |
성주와 현신이 다시 회맹하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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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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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來家風忠孝誠 |
본래부터 가풍은 충효와 지성인데 |
君臣會盟決犧牲 |
군신의 회맹에서 희생하기를 결심했네 |
子孫相繼6)花樹會7) |
자손들은 서로 화수회를 이어가고 |
千年斯道8)共守盟 |
천년토록 이 길을 함께 지키자 맹세하네 |
1) 김정준(金廷雋) : 본관이 나주이다. 조선 태조에서 정종, 태종, 세종대까지 벼슬한 인물로 경기좌도 경력(판관), 전농판사, 회양부사(淮陽府使), 상호군(2군5위의 최고 지휘관), 광주목사(廣州牧使), 제주목사, 제주도 안무사, 호조참의 경차관, 전라관찰사, 해주목사, 함길도 관찰사, 전주부윤 등을 지냈다. 이 시는 나주김씨 족보에 실려 있으며 다른 자료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2) 회맹연 : 왕조 때 공훈이 있는 사람을 책훈할 때 군신이 모여서 맹세하던 잔치
3) 견마성 : 견마지성, 임금이나 나라에 비치는 자기의 정성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4) 서생 : 회맹하는 글을 쓰며 희생하기로 한 것을 말함
5) 풍운의 계합 : 명군과 현신이 서로 만나 의기가 투합한 것을 말함
6) 상계 : 서로 이어가다.
7) 화수회 : (친목 따위를 위하여) 일가끼리 모이는 모임이나 잔치
8) 사도 : (학문이나 기예 등에서의) 이 길, 이 분야, 이 방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전주부 역원조
월당원(月塘院)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金廷雋)이 세우고, 재호(齋號)는 월당(月塘)을 따서 이름으로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 읍에 전하니 월당(月塘)의 맑음이여.” 하였다. 피계원(皮界院)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送全羅監司金廷雋。次人韻。 -成石璘1)-
전라감사 김정준을 보내며. 다른 사람의 시에 차운함.
予又何違斯 |
내가 또 어찌 이 사람과 이별할까 |
爲酬明主知 |
이별주 나누는 것을 주상은 아시겠지 |
爲臣匪躬2)日 |
신하된 자 나라 위해 몸 바치는 날이요 |
適我3)未衰時 |
나에게 밀려드는 일 줄어들지 않을 때로다 |
志氣虹千丈 |
뜻과 기개는 천 길 무지개 같은데 |
離情酒一巵 |
이별하는 심정 한 잔 술로 달래네 |
贈言慙老耗 |
시를 지어주면서도 늙은 것이 부끄럽지만 |
見義莫三思4) |
의를 보거든 세 번까지 생각지 마소 |
1) 성석린(1338 ~ 1423 세종 6년) :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본관 창녕 호 독곡, 공민왕 때 문과 급제, 문장과 글씨에 조예가 깊음, 태조 이성계의 비문 글씨를 씀. 조선 개국 9공신 중 한분 태조 이성계가 친구로 여김 좌⦁우의정, 영의정 역임, 이 시는 1414년 독곡 선 생이 정준 선조가 전라관찰사로 부임 할 때 지은 송별시임.
2) 匪躬 : 신하가 국사를 돌봄에 있어서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국사에만 힘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周易 蹇》
3) 適我 : 시경 북문(北門)에 ‘王事適我 政事一埤益我(나라 일이 나에게 몰려들거늘 정사가 한결같이 나에게 더해지는구다)’라는 말에서 따온 듯하다. 適은 之의 뜻.
4) 三思 : 노(魯)나라 계문자(季文子)가 어떤 일이든 “세 번 생각한 뒤에 행한다.〔三思而後行〕”라는 말을 공자가 듣고는 “두 번이면 된다.〔再斯可矣〕”라고 말한 고사가 《논어》 〈공야장〉에 나온다.
제목: 17세손 총제공 김정준(金廷雋) 조선실록 발췌
순번 |
내용 |
순번 |
내용 |
1 |
태조 7년 2건 |
9 |
태종 15년 5건 |
2 |
태종 2년 1건 |
10 |
태종 18년 2건 |
3 |
태종 4년 1건 |
11 |
세종 1년 2건 |
4 |
태종 6년 1건 |
12 |
세종 2년 1건 |
5 |
태종 11년 1건 |
13 |
세종 3년 1건 |
6 |
태종 12년 1건 |
14 |
세종 4년 1건 |
7 |
태종 13년 1건 |
15 |
세종 8년 1건 |
8 |
태종 14년 4건 |
16 |
세종 15년 1건 |
※제공: 중앙종친회 회장 김 근 학
1.《 태조 7년 .... 2 건 》
태조 015 07/09/01(계유) / 임금이 수정포도를 먹고 싶어 했는데 경력 김정준이 바치다
태조 015 07/09/01(계유) / 김정준을 전농 판사로 삼다. 친왕자를 공으로, 종친을 후로, 정1품을 백 으로 봉하다
임금이 수정포도(水精葡萄)를 먹고 싶어 하여, 조순(曹恂)을 명하여 세자와 여러 왕자에게 교지를 전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영자(影子)를 그려서 사모(思慕)하게 되는데, 내가 비록 쇠약하나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너희들은 다행한 편이다. 지금 병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수정포도를 먹고자 한다.”
세자와 여러 왕자들이 모두 소리를 높여 울면서 즉시 상림원 사(上林園史) 한간(韓幹)에게 명하여 유후사(留後司)와 기내 좌도(畿內左道)에 널리 구하였는데, 경력(經歷) 김정준(金廷雋)이 산포도가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것을 한 상자를 가지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원전】 1 집 136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재정-진상(進上)
김정준(金廷雋)을 승진시켜 전농 판사(典農判事)로 삼았다. 비로소 친왕자(親王子)를 공(公)으로 삼고, 여러 종친을 후(侯)로 삼고, 정1품(正一品)을 백(伯)으로 삼았다. 익안공(益安公)을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로, 회안공(懷安公)을 좌군 절제사(左軍節制使)로, 지금 전하를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로, 복근(福根)을 봉녕후(奉寧侯)로, 양우(良祐)를 영안후(寧安侯)로, 이백경(李伯卿)을 상당후(上黨侯)로, 심종(沈淙)을 청원후(靑原侯)로, 이화(李和)를 판문하부사 겸 영의흥삼군부사(判門下府事兼領義興三軍府事) 의안공(義安公)으로, 심덕부(沈德符)를 영삼사사(領三司事) 청성백(靑城伯)으로, 조준(趙浚)을 좌정승 평양백(平壤伯)으로, 김사형(金士衡)을 우정승 상낙백(上洛伯)으로, 권중화(權仲和)를 예천백(醴泉伯)으로,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 판호조사(門下侍郞贊成事判戶曹事)로, 이지란(李之蘭)을 문하 시랑찬성사 판형조사 의홍삼군부 중군 절제사 청해군(門下侍郞贊成事判刑曹事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靑海君)으로, 이무(李茂)를 참찬문하부사 판예조사 의흥 삼군부 좌군 절제사(參贊門下府事判禮曹事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로, 장사길(張思吉)을 참찬문하부사 판공조사 의흥 삼군부 우군 절제사 영가군(參贊門下府事判工曹事義興三軍府右軍節制使永嘉君)으로, 조박(趙璞)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하윤(河崙)을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이거이(李居易)를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로, 조영무(趙英茂)를 판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중군 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로, 조온(趙溫)을 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좌군 동지절제사(中樞院使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使)로, 김노(金輅)를 동지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우군 동지절제사(同知中樞院事義興三軍府右軍同知節制使)로, 장사정(張思靖)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이천우(李天祐)를 동지중추원사 겸 병조 전서 의흥 시위사 상장군 지삼군부사(同知中樞院事兼兵曹典書義興侍?司上將軍知三軍府事)로, 정탁(鄭擢)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장철(張哲)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남재(南在)를 의령군(宜寧君)으로 삼고, 이문화(李文和)를 그전대로 도승지로 삼아 상서 윤(尙瑞尹)을 겸무하게 하였다.
【원전】 1 집 13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王室)
2.《 태종 2년 .... 1 건 》
《 태종 004 02/11/08(정해) / 태상왕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다고 전한 회양 부사에게 말 1필을 내려 주다 》
회양 부사(淮陽府使) 김정준(金廷雋)에게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정준이 와서 고하기를,
“태상왕의 거가(車駕)가 철령(鐵嶺)을 지났습니다.”
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원전】 1 집 250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3.《 태종 4년 .... 1 건 》
《 태종 007 04/04/03(계유) / 올량합 만호 파을소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상호군 김정준에게 사신 응대할 준비를 시키다 》
올량합(兀良哈) 만호(萬戶) 파을소(波乙所)와 백호(百戶)에게 옷과 포(布)를 주었다. 만호에게는 겹옷과 갓[笠]·신[靴] 각각 하나, 면포(쭜布)·흑마포(黑麻布)·백저포(白苧布) 각각 한 필씩을 주고, 백호 세 사람에게는 각각 흑마포 한 필, 백저포 한 필을, 통사(通事)에게는 흑마포 한 필을 주고, 상호군(上護軍) 김정준(金廷雋)·호군(護軍) 조가물(趙可勿) 등을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어 사신(使臣)에게 응대(應對)할 사의(事宜)를 일렀으니, 왕가인(王可仁)이 장차 이르기 때문이었다. 파을소(波乙所)는 곧 파아손(把兒遜)이다.
【원전】 1 집 293 면
【분류】 *외교-야(野) / *왕실-사급(賜給)
4.《 태종 6년 .... 1 건 》
《 태종 011 06/01/27(무오) / 동북면을 평정한 공로에 따라 좌군 총제 김계지 등에게 전지와 노비를 하사하다 》
좌군 총제(左軍摠制) 김계지(金繼志)와 우군 총제 이밀(李密) 등 10인에게 전지(田地)와 노비를 차등 있게 하사하고, 임오년(壬午年) 동북면(東北面)의 공을 기록하였다. 임금이 하지(下旨)하였다.
“김계지와 이밀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의(義)를 위하여 적중에 깊이 들어가서 환난(患難)을 막았으므로 공이 1등이 될 만하니, 전지 50결(結)과 노비 5구(口)를 하사하며, 상호군 박순(朴淳)과 호군 송유(宋琉)는 의(義)에 몸바쳐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환난을 막으려 하다가 몸이 죽는 데 이르렀고, 상호군 김옥겸(金玉謙)은 마음을 다해 의(義)에 몸바쳐 맨먼저 와서 고하였으므로 2등이 될 만하니, 전지 40결과 노비 4구(口)를 하사하며, 경상도 도관찰사 김희선(金希善)·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여칭(呂稱)·전 광주 목사(廣州牧師) 김정준(金廷雋) 등은 마음을 다해 의에 몸바쳐 미리 준비하여 안녕을 도모하였고, 상호군 안우세(安遇世)·최저(崔沮)는 마음을 다해 의에 몸바쳐 어려운 데를 도망해서 돌아왔으므로 3등이 될 만하니, 전지 30결과 노비 3구(口)를 하사한다.”
【원전】 1 집 34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신분-천인(賤人)
5.《 태종 11년 .... 1 건 》
《 태종 022 11/07/27(병술) / 말의 양축에 관한 사의를 제주 목사가 상언하니 그대로 채택하다 》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정준(金廷雋)이 그 지방의 사의(事宜)를 올리었다. 상언(上言)은 이러하였다.
“제주(濟州)에 동서(東西) 두 도(道)가 있는데, 말을 기르는 자가 모두 둔(屯)을 지어서, 매둔(每屯)에서 해마다 말 1필을 바치는 것이 예(例)입니다. 지금 보건대, 토성(土性)이 푸석하고 들떠서, 곡식을 파종하는 자가 반드시 말과 소를 모아 그 땅을 밟아서 땅이 반드시 단단하여진 뒤에 종자를 뿌리니, 공사(公私)의 소와 말이 이 때문에 곤피(困疲)하여집니다. 공가(公家)에서 비록 금령(禁令)이 있으나, 몰래 목자(牧子)와 짜고서 말을 병들게 합니다. 이제부터는 매 1둔(屯)마다 상마[雄] 1필에 피마[雌] 9필을 남기고, 그 나머지 거세(去勢)한 말은 모두 조정에 바치는 것으로 해마다 상례(常例)를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1 집 597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공물(貢物) / *교통-마정(馬政)
6.《 태종 12년 .... 1 건 》
《 태종 023 12/04/06(경신) / 형조에서 선박 침몰 사고의 책임을 물어 제주 사람 낭장 안방현의 죄를 청하다 》
형조에서 제주(濟州) 사람 안방현(安邦顯)의 죄를 청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제주 도안무사(濟州都安撫使) 김정준(金廷雋)이 해임되어 올 때에 마필과 토물(土物)을 실은 배가 풍랑을 만나 뒤집어져서 인마가 많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명령하기를, “김정준이 반드시 잡물(雜物)을 많이 실어서 뒤집어지게 된 것이니, 마땅히 국문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청하였다.
“제주 도안무사가 보낸 전 낭장(郞將) 안방현 등이 잡물을 많이 실었으므로, 뒤집어져서 격군(格軍) 김석(金石)이 빠져 죽었으니, 원컨대, 안방현의 고신(告身)은 거두고 국문하여 과죄(科罪)하소서.”
거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원전】 1 집 631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교통-수운(水運)
7.《 태종 13년 .... 1 건 》
《 태종 026 13/07/16(계사) / 말 사육 문제로 전흥·권만·김정준 등을 경차관으로 파견하다 》
경차관(敬差官)을 나누어 보냈다. 순금사 대호군 전흥(田興)을 경기·충청도에 보내고,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 권만(權蔓)을 경상도·전라도에 보내어 말을 기를 만한 땅을 상지(相地)하게 하였다. 호조 참의 김정준(金廷雋)을 제주(濟州)에 보내어 먼저 양마(良馬) 1백여 필을 추쇄(推刷)하여 오게 하였다.
【원전】 1 집 677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육운(陸運)
8.《 태종 14년 .... 4 건 》
태종 027 14/01/13(무자) / 이천우·이숙번·김여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태종 028 14/09/16(병술) / 전라 도관찰사 김정준이 진도 목장이 말 사육에 적합치 않음을 아 뢰다
태종 028 14/09/09(기유) / 어가가 횡천 화동에 머무르다
태종 028 14/10/18(무자) / 진도가 목장으로써 적당한가를 조사·의논하다
《 태종 027 14/01/13(무자) / 이천우·이숙번·김여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이천우(李天祐)를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으로, 이숙번(李叔蕃)을 의정부 찬성사로, 유정현(柳廷顯)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이응(李膺)을 병조 판서로, 심온(沈溫)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안등(安謄)을 대사헌으로, 김여지(金汝知)를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으로, 김정준(金廷儁)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정간(鄭幹)을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全羅道水軍都節制使)로 삼았다. 임금이 김여지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갑자기 이 직위를 제수하였다.
【원전】 2 집 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태종 028 14/09/16(병술) / 전라 도관찰사 김정준이 진도 목장이 말 사육에 적합치 않음을 아뢰다 》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金廷雋)이 진도(珍島) 목장의 사의(事宜)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도내 진도(珍島)는 풀이 무성하지 않아서 마필(馬匹)이 점점 파리하여지는데, 만약 눈이 깊을 때를 만나면 더욱 목양(牧養)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빌건대, 모두 육지로 내보내어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지난날에 아뢰기를, ‘진도 목장은 수초(水草)가 두루 족(足)하고 풍토(風土)가 제주(濟州)와 다름이 없습니다.’고 하였던 까닭에, 성자(城子)를 쌓도록 명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가 살면서 목마(牧馬)하게 하였다. 지금의 아뢰는 바가 전일과 다른 것은 어찌해서인가? 파리하고 약한 마필(馬匹)을 골라서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게 하고, 그 나머지 마필은 그대로 방목하고, 근교(近郊)의 풀을 많이 거두어서 겨울철에 대비하도록 하라.”
【원전】 2 집 36 면
【분류】 *교통-마정(馬政)
《 태종 028 14/09#09(기유) / 어가가 횡천 화동에 머무르다 》
어가(御駕)가 횡천(橫川) 화동(禾洞)에 이르렀다.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金廷雋)이 경력(經歷) 이종화(李種華)를 보내어 말 1필을 바치었다.
【원전】 2 집 39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재정-진상(進上)
《 태종 028 14/10/18(무자) / 진도가 목장으로써 적당한가를 조사·의논하다 》
대호군(大護軍) 전흥(田興)과 중관(中官) 노희봉(盧希鳳)에게 명하여 가서 진도 목장(珍島牧場)을 보게 하였다. 처음에 전 총제(摠制) 홍유룡(洪有龍)·병조 참의 권만(權蔓) 등 아뢰기를,
“진도(珍島)는 목장(牧場)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여, 전년(前年)에 목책(木柵)을 설치하도록 명하고 백성들을 옮겨서 거주하게 하고, 이어서 군수(郡守)가 우도 수군 도만호(右道水軍都萬戶)를 겸하게 하였다. 임금이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보고에 인하여 내섬 소윤(內贍少尹) 이위(李衛)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위가 지군사(知郡事) 이각(李恪)과 함께 와서,
“섬의 풀이 모두 띠[茅]이므로 말이 먹지 못하여 파리하였습니다.”
하니, 김승주(金承켼)가 아뢰었다.
“진도(珍島)의 풍토(風土)는 비록 제주(濟州)와 같지 않으나, 반드시 각처 목장에 못지 않을 것이니, 가볍게 버릴 수 없습니다.”
임금이, “김정준(金廷雋)·이각(李恪)·이위(李衛) 등이 모두 말하기를, ‘수초(水草)가 부족하여 목장(牧場)의 땅으로 마땅하지 않다.’고 하므로, 이 때문에 이를 버리고자 한다.”
하였으나, 김승주가 굳이 청하니 임금이 뜻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드디어 전흥과 노희봉 등을 보내었다. 전흥 등이 복명(復命)한 것도 또한 이위 등의 말과 같았다.
【원전】 2 집 42 면
【분류】 *교통-마정(馬政) / *호구-이동(移動) / *군사-군정(軍政)
9.《 태종 15년 .... 5 건 》
태종 029 15/02/12(경진) /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이 양마를 바치다
태종 029 15/02/19(정해) / 김정준이 죄수 계본을 보고하지 않아 박습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삼다
태종 029 15/03/01(기해) / 전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과 도사 권극중을 외방으로 유배하다
태종 029 15/04/11(무인) / 김정준을 경외 종편하게 하다
태종 030 15/12/14(정축) / 교지를 따르지 않은 죄로 김정준·김공·전사리 등을 파직하다
《 태종 029 15/02/12(경진) /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이 양마를 바치다 》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김정준(金廷雋)이 양마(良馬) 2필을 바쳤다.
【원전】 2 집 53 면
【분류】 *재정-진상(進上)
《 태종 029 15/02/19(정해) / 김정준이 죄수 계본을 보고하지 않아 박습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삼다 》
박습(朴習)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형조 판서 심온(沈溫)이 상언하였다.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金廷雋)과 도사(都事) 권극중(權克中)이 금일에 이르도록 겨울 3삭(朔) 동안의 죄수 계본(罪囚啓本)을 보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도사(都事)를 소환하여 그 연고를 묻고자 하나, 도사는 병이라 핑계하고 오지 않으니, 마땅히 관찰사를 소환하여 교지(敎旨)를 따르지 않은 죄로서 논하여야 하겠습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그 죄는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 의논하기로 하라.”
하고, 즉시 박습을 관찰사로 삼고 권전(權專)을 경력(經歷)으로 삼았다.
【원전】 2 집 5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태종 029 15/03/01(기해) / 전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과 도사 권극중을 외방으로 유배하다 》
전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金廷雋)과 도사(都事) 권극중(權克中)을 외방(外方)으로 유배하였다.
【원전】 2 집 54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태종 029 15/04/11(무인) / 김정준을 경외 종편하게 하다 》
명하여 김정준(金廷雋)을 경외 종편(京外從便)하였다.
【원전】 2 집 57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태종 030 15/12/14(정축) / 교지를 따르지 않은 죄로 김정준·김공·전사리 등 파직하다 》
해주 목사(海州牧使) 김정준(金廷雋)·판관(判官) 김공(金鞏)·연안 부사(延安府使) 전사리(田思理) 등을 파직하였다. 처음에 전사리가 연안부 사람 전 소감(小監) 정사현(鄭思賢)의 전지를 빼앗아 박희종(朴希宗)에게 주었는데, 정사현은 전사리가 ‘전지(田地)는 백근(白根)을 따르라’는 교지(敎旨)를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도관찰사 이발(李潑)에게 고소하였다. 이발이 그 송사를 해주(海州)에 이송하였는데, 김정준과 김공이 또한 전사리의 판결과 같이 하였다. 이발은 보고한 것에 의하여 시행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헌부(憲府)에서 핵실하여 죄를 청하니, 김정준 등은 파직하고, 이발과 경력 김습(金習)은 김정준·전사리에 비하면 죄가 경하기 때문에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이발이 이 때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이것으로 본부의 탄핵을 당하여 직사에 나오지 못하였다.
【원전】 2 집 9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농업-전제(田制)
10.《 태종 18년 .... 2 건 》
태종 035 18/05/23(임신) / 김정준을 함길도 도관찰사로 삼다
태종 035 18/05/23(임신) / 사헌부에서 남금과 김정준 등이 감사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다고 상소하다
김정준(金廷雋)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삼았다. 이관(李灌)이 곧 떠나려는데,
임금이 어미의 나이를 물었다. 이관이 아뢰기를,
“83세입니다.”
하니, 임금이,
“어미의 나이가 늙었는데 어찌하여 말하지 않고 떠나려는가?”
하였다. 이관이,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김정준으로써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원전】 2 집 22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사헌부에서 상소(上疏)하기를,
“강원도 도관찰사 남금(南琴)은 성질과 행동이 잔혹(殘酷)하고, 김정준(金廷雋)은 소행이 거칠고 음란하니, 모두 감사(監司)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순량(循良)한 사람으로써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원전】 2 집 22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11.《 세종 1년 ....2 건 》
세종 005 01/10/20(신묘) / 수강궁 진선장에 신이라 칭하지 않은 삭주 도호부사 김소를 국문하다
세종 005 01/10/24(을미) / 조비형·이안우·하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삭주 도호부사(朔州都護府使) 김소(金紹)가 수강궁 진선장(進膳狀)에 신(臣)을 칭하지 아니하여, 병조에서 계하기를,
“법사(法司)에 옮겨 국문케 하소서.”
하니, 선지하기를,
“김제(金?)로 그를 대신하게 할 것이요.”
하였으며,
“의주 목사(義州牧使) 우균(禹均)이 명사(明使)에게 욕을 당하고, 또 함부로 형벌을 써서 살인한 죄에 걸렸으니, 전 절제사 김정준(金廷雋)으로 그를 대신하게 할 것이라.”
하였다.
【원전】 2 집 34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조비형(曹備衡)을 우군 총제(右軍摠制)에, 이안우(李安遇)를 인녕부 윤(仁寧府尹)에, 하연(河演)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이흥제(李興濟)를 중군 동지총제에, 홍섭(洪涉)을 좌군 총제에, 성억(成抑)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에, 윤자당(尹子當)을 칠원군(漆原君)에, 신개(申죏)를 전라도 도관찰사에, 성엄(成헩)을 강원도 도관찰사에, 김정준(金廷雋)을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 겸 판길주목사(判吉州牧使)에, 이흥발(李興發)을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 겸 판안주목사에, 노원식(盧元湜)을 판의주목사에, 김종서(金宗瑞)를 사간원 우정언(右正言)에 각각 임명하였다.
【원전】 2 집 34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12.《 세종 2년 ....1 건 》
《 세종 007 02/02/01(기해) / 충청도 병마도절제사 이천 등이 지방 특산물을 바치다 》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 이천(李쾸)·경상도 관찰사 이발(李潑)·우도 병마 도절제사 우박(禹博)·함길도 병마 도절제사 김정준(金廷雋) 등이 각기 사람을 보내어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원전】 2 집 373 면
【분류】 *재정-진상(進上)
13.《 세종 3년 ...1 건 》
《 세종 012 03/05/16(정축) / 상왕의 생일을 기념하여 이안우 등 52인의 회수한 직첩을 돌려주도록 하다 》
이안우(李安遇)·김정준(金廷雋) 등 52인의 고신(告身)을 돌려주었다. 임금이 상왕의 생신을 위하여 은혜를 베풀고자 하여, 이에 전에 직첩(職牒)을 회수한 것을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모두 돌려주도록 하였다.
【원전】 2 집 433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14.《 세종 4년 ....1 건 》
《 세종 018 04/12/26(기묘) / 이등·정간·윤회·이육·하경복·김정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이등(李登)을 개성군(開城君)으로 삼고, 정간(鄭幹)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윤회(尹淮)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이육(李?)을 이조 참의로, 하경복(河敬復)을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로, 김정준(金廷雋)을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삼았다.
【원전】 2 집 5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15.《 세종 8년 ....1 건 》
《세종 8년 병오(1426, 선덕 1) 7월25일 (병진) 》
대사헌 권도(權蹈)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수령을 옳은 사람을 얻으면 백성이 그 복을 받고,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이 그 화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나라 선제(宣帝)는 일찍이 말하기를, ‘전리(田里)에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는 것은, 행정이 공평하고 송사를 잘 다스린 탓이니, 나와 더불어 나라를 같이 다스릴 자는 오직 그 법을 잘 지키고 치적을 올리는 이천석(二千石)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하다면 이 직임이 생민과 관계됨은 옛날로부터라 하겠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요순(堯舜)같이 밝으신 지인지감(知人之鑑)으로 더욱이 인선을 중히 여기시어 신중히 선정 임명하시고, 또 폐사(陛辭)할 때에는 친히 접견하시니, 그 사람을 택하는 정밀하심과 백성을 걱정하시는 뜻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는 그 직임에 상부하지 못한 능력 없는 자가 으젓이 섞이어 있는 우환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쇠 혼매(昏昧)하거나, 연약 용렬한 무리들이 그 사이에 끼어 요행히 전최(殿最)를 넘기고 구차스럽게 세월을 지내면서 그 관직을 헛되게 하고, 우리 백성에게 화환(禍患)을 줌이 큽니다. 신 등이 성상의 지우(知遇)를 입고 풍헌(風憲)의 직임에 충당되어 감히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우선 들은 바를 소(疏)로 갖추어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들을 모두 파출(罷黜)하고 순량(循良)한 신하를 대체하시와 백성을 다스리는 그 부탁을 더 중히 하시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나이다. 전주 부윤 김정준(金廷雋)·연안 부사 유직(劉直)·순흥 부사 김겸·선산 부사 안질(安耋)·양양 부사 정윤(鄭倫)·지고원군사 박조(朴操)·지면천군사 조회(曹繪)는 늙고 혼매하여, 그 권한이 아전의 손으로 돌아가 있사오며, 지용강현사 최택(崔澤)·금천 현감 김조(金祚)는 연약하고 용렬하여 간사한 아전들이 권한을 잡고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이조에 내리었다.
16.《 세종 15년 ....1 건 》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4월3일 (병술) 》
총제 김정준(金廷雋)이 졸(卒)하니, 부물(賻物)을 보내서 조상하였다.
18세손 해판공 김양 조선실록 발췌
세종 104 26년 5월 /02일 (신해) / 충청도 관찰사 김조와 도사 한질 등에게 말과 옷 등을 하사하다
충청도 관찰사 김조(金)에게 안장 갖춘 말 1필을, 도사 한질(韓)에게 옷 두 벌[領]을, 도차사원(都差使員) 청주 목사 박효함(朴孝)과 판관 김양(金壤)에게 각각 옷 한 벌씩을 하사하였다.
세종 106 26/09/21(병신) / 청주 목사와 판관에게 옷을 하사하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박효함(朴孝)과 판관(判官) 김양(金壤)에게 옷 한 벌씩 내려 주었다.
세종 118 29/12/04(임술) / 혼사를 회피한 전 판관 김양 등을 국문하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다경령(多慶令) 유강(有康)이 그 누이를 전 판관(判官) 김양(金壤)의 아들에게 출가시키려 하여 단자(單子)를 바치었기에, 양(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자식이 나이 지금 15세인데 금년 3월에 정읍 현감(井邑縣監) 양연(楊淵)의 집에 약혼하였다.’ 하므로, 곧 양연의 집에서 혼서(婚書)를 가져다가 보니 이미 정혼한 것이 사실입니다. 예조에서 수교(受敎)한 것을 상고하건대 남자는 16세, 여자는 14세라야 바야흐로 성혼할 수 있고 혼서를 받는 절차는 없습니다. 오직 수교(受敎)한 가운데에, ‘글을 통한 뒤에 두어 달이 못되어 성혼하면 혼수를 졸지에 판비하기 어려우니, 납채(納采)한 뒤에 기년(朞年)을 지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김양(金壤)의 아들이 혼서를 만들어 보낼 때에는 나이 비록 만 16세가 못되었으나, 납채한 뒤 기년 안에는 나이 만 16세가 되니, 위의 혼서를 양연(楊淵)의 집에 주어 허혼하오리까. 교지(敎旨) 안의 남녀 연한에 의하여 김양(金壤)의 혼서를 쓰지 마오리까.”
하니, 양연의 집에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조금 뒤에 김양이 추후하여 혼서를 만들어서 피한 것을 듣고, 드디어 양(壤)과 연(淵)을 의금부에 내려 고문하고 종부시 관리도 아울러 국문하여 죄주었다.
단종 005 01/03/23(경진) / 안평 대군이 해주로 가다
이용(李瑢)이 해주(海州)로 가니 종자(從子) 60여 인이 공름(公)을 먹었고, 중[僧] 5, 6인도 또한 역마(驛馬)를 타고 공름을 먹었다. 김말생(金末生)이 모든 일을 주장하니, 관찰사·절제사로부터 여러 읍에서 공궤(供饋)가 매우 성(盛)하였고, 뇌물도 세일 수 없이 많았다. 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소집하니 기약대로 이르고 모두 초대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었다. 수령이 모이자 활을 쏘며 사냥하니, 인마(人馬)의 성함과 공돈(供頓)의 번거로움이 대가(大駕)가 임한 데 비길 만하였다. 이용(李瑢)은 관찰사(觀察使) 이축(李蓄)에게 안장 갖춘 말을 주고, 해주 판관 김양(金壤)에게는 옷 1습을 주었다. 이날 기악(妓樂)을 크게 벌이니, 김양이 내려 준 옷을 입고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이용(李瑢)이 이르는 곳마다 큰 사냥을 벌여서 군대를 동원하여 짐승을 몰게 하고 <온정에> 목욕은 하지 아니하였다. 이현로(李賢老)는 사사로이 이용을 연안부(延安府)에서 뵈었다. 이용은 김말생으로 하여금 평안도 관찰사의 처소에 왕래하게 하여 박비(朴妃)를 맞아오게 하니, 처음에 이용(李瑢)이 평양에 있을 때 사랑하였던 기생 박비가 가서 그를 맞이하지 않았음에서였다. 세조가 오래 평양에 머물러 있었고, 그가 해주에 가서 목욕한 것도 모두 다 박비를 위해서였다.
*** 김양의 사위가 은진송씨 송요년으로 동춘당 송준길의 선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