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후기 정치의 문란함에 개탄하여 출사하지 않은 은사(隱士).
개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해 1360년(공민왕 9)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원천석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원천석이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이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과 우왕·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 있다. 이 시에서 원천석은 만일 왕씨 혈통의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