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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부원군 왕요를 군주로 만든 9명은 위와 같다. 이들은 유럽의 선제후 마냥 흥국사에 모여 장시간의 토론을 거친 뒤[43] 군대, 백관, 왕실 일원을 모두 데리고 수창궁에 가서 왕대비 안씨를 통해 왕요에게 국인(國印)을 넘겨주었다.
자신이 우왕과 창왕을 대신해 등극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태조 진전을 참배했다. 당시 사용한 축문이 <공양왕 세가>에 남아있는데 거기에는 신라가 '조선(朝鮮)'이라고 지칭되어 있다. 당시 조선은 한국의 옛 왕조로서 신라를 고아(古雅)하게 부른 표현이었지만[44] 영 미묘하게 느껴진다.
《고려사》 <공양왕 세가>에는 공양왕이 옹립된 뒤에 잠도 못자면서 불안해했다고 한다.
《고려사》 <공양왕 세가> - 총서-에는 사람은 착한데 너무 우유부단했다며 은근히 디스한다.
재위 2년째인 1390년 8월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자신의 신하 옥지(玉之)를 사신으로 보내 칭신(稱臣)하고, 표문(表文)을 올린 뒤 특산물을 바쳤다.
재위 3년째인 1391년 7월 '섬라곡국'(暹羅斛國)이란 곳에서 특산물을 들고 사신을 보내왔다. 섬라곡국은 지금의 태국인데 사신들이 공양왕에게 국서를 바쳤으나 국서에 서명도 없고 포장지도 없으며, 단지 동그란 인장만 하나 박혀있었기에 고려는 가짜라고 의심했다. 그렇다고 고려가 좋다면서 온 외국인들을 문전박대하기도 그러니 공양왕은 국서는 거부하고 대신 직접 만나보기만 했다. 그들은 통역을 3차례나 거쳐야 대화가 가능했으며 일본에 1년 정도 거주했다고 했다. 지위가 낮은 자는 맨발이거나 윗옷을 벗고 있었고, 지위가 높은 자는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재위 3년째인 1391년 10월 왜구 문제로 일본의 규슈 절도사(九州 節都士)에게 보빙사를 보냈다. 규슈는 이에 승려 50여 명을 보내 답했는데 국서 양식을 표문(表文)[45]으로 하고, 공양왕을 '고려 국왕 전하'(高麗 國王 殿下), 자신들을 '신'(臣)이라고 칭했다. 고려를 '대국'(大國)이라 하고, 일본 규슈를 '일하이지'(日下夷地)[46]로 불렀다. 자신들은 중국이 칭신하랬을 때도 안했지만 고려에게는 자발적으로 칭신했다며 '천추만세만만세'(千秋萬歲萬萬歲)를 외치며 고려를 극도로 찬양했다. 이는 규슈가 굳이 고려와 불화가 생기는걸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왜구 문제에 있어 최대한 책임을 피해가려 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공양왕을 위해 수창궁에서 연회를 연 적이 있는데 즐겁게 논 공양왕은 이에 보답으로 이성계에게 비싼 갓끈, 말, 옷을 선물했고 이성계는 받는 즉시 옷을 입어 보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궁문을 닫자 이방원은 혹시라도 자신들을 죽이려는지 의심하여, 아버지를 데리고 몰래 궁을 나가버렸는데 신하가 군주에게 하직 인사조차 하지 않고 냅다 가버린 것이었다. 다음날 빡친 공양왕이 궁문을 열어준 신하를 가두어버리자 이성계는 내가 너무 취해서 문 열라 시켰다며 옹호해 공양왕은 별 수 없이 풀어줘야 했다.
이성계가 사냥 도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공양왕은 강연 중 소식을 들었는데 한 신하가
'이 시중은 나라의 장성(長城)과 같은 존재이니 그가 다친 것은 큰 손실입니다.'
조선의 여진족 회유는 고려 공양왕의 치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주도하여 북방에 방문을 붙였는데, 고려로 귀화하는 여진족은 큰 상을 주겠다며 선전했고, 이에 많은 여진족들이 호응하여 두 부족의 수장들인 알도리와 올량합이 고려로 왔다. 이 둘은 서로가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는데 알도리가
"시중 윤관이 우리 땅을 평(平)하고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 쓰인 비석을 세우니 경내(境內)의 우린 제군사(諸軍事)를 모화하여 왔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싸워도 의미가 없다."
공양왕과 신하의 강연 도중 늙은이와 과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공양왕은 장수하는 사람은 분명히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기에 오래 산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꿈에서 부처를 만난 뒤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신하는 맞장구를 쳐주는 동시에 유가(儒家)가 불가(佛家)를 싫어하지 않지만 굳이 배척하는 이유는 인군(人君)이 불교를 믿다가 정치를 소홀히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유교에 대한 강조로 넘어갔다.
제31대 공민왕때부터 공양왕의 아버지가 봉지로 하사받은 곳은 '정원'(定原)이었고, 공양왕 자신은 '정창'(定昌)이었으며, 공양왕이 군주가 된 뒤 동생에게 봉해 준 곳은 '정양'(定陽)이었는데, 모두 현 평안도 정주(定州)였다.[47] '고구려계 패서 지역 호족'이 만든 나라가 '고구려계 패서 지역에 봉해진 자'에서 끝난 셈이다.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전통적인 역사관대로 공양왕을 무기력하고 무능한 허수아비 군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정도전>에서는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군주로 그리고 있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중견배우 김영선[48]이 연기했다. 어보를 갖고 온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자신은 "왕 하기 싫다"[49]고 말하는 장면이나 이성계에 대한 암살을 주저하는 장면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의 공양왕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역사대로 폐위되었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는데 이 장면에서 "자신의 혈족들이 떼로 죽었으니 우리만 어찌 살아남길 바라겠냐"며 사약을 거부하고 "의연하게 죽고 싶다"며 단검으로 배를 갈라 스스로 할복한다. 이 장면에서 마지막 유언은 "왕씨의 혼령들이여!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을 잊지 말지어다!"[50] 이성계가 죽기 직전 꾼 꿈에서는 "어서오시오 대감. 고려를 죽인 이 원수!"라고 원한이 사무친 외침을 날린다.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박형준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대로 이성계에 맞서는데 첫 조정 회의에서부터 신하들 앞에서 이성계를 갈구며 '내가 왕이고 넌 신하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고 변안열과 이색을 등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대놓고 견제하는 등 첫 등장 당시에는 역대 사극을 통틀어 가장 강하게 묘사된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이방원의 협박에 굴복하거나 "이성계가 동북면을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 등 정치적으로 미숙한 면을 많이 드러내어 사실상 이전의 허수아비 군주 묘사를 그대로 답습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51] 이후 9회에서 군신 동맹 제의도 생략된 채 폐위되는 장면을 끝으로 허무하게 극에서 퇴장한다.
[1]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2] 공양왕릉은 현재 두 곳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된 사연은 관련 항목 참조.[3] 조선 태조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했다.[4] 이성계에게 양위를 하면서 조선이 건국된 지라 후대 (고려)군주들이 없어 시호를 받지 못했었다. 간혹 양위를 받아 새 나라를 세운 군주가 시호를 올리기도 했으나 고려 왕족의 경우 전부 몰살을 당했고, 그때 다른 왕씨와 마찬가지로 살해당하는 바람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이후 왕씨 몰살이 사그라든 조선 태종 16년에 겨우 시호를 '공양왕'으로 받았다.[5] 묘호는 없다. 망국의 군주인데다가 고려는 제25대 충렬왕 이후엔 몽골의 침입으로 원나라의 속국 취급을 받아 묘호를 받지 않았고, 원나라의 치하를 벗어난 군주였던 제31대 공민왕 역시 묘호를 받지 않았다. 이는 조선 초기 묘호에 대한 논의에도 영향을 주어 묘호를 받지 못했던 공정왕(정종)이라던지, 선대 군주의 묘호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성종의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6] 간성에 유배된 적이 있어 '간성왕'(杆城王)으로 불리기도 한다.[7] 작위가 정원군(定原君) → 정원백(定原伯) → 정원부원군 → 삼한국 인효대공(三韓國 仁孝大公) 순으로 바뀌었다.[8] 정화궁주의 아들 강양공의 3남 연덕부원대군의 외손자.[9] 다만 이인임은 고려말 최악의 권신 중 한 명이라서 이성계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훗날 이성계와 대립각을 세우는 최영이 직접 주도적으로 나서서 이성계를 끌어들여 이인임의 수족을 잘랐을 정도였다.[10] 고려 왕조 때 정양군(定陽君) →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이 되었다가 조선 왕조 때 마전군 귀의군(麻田郡 歸義君)이 되었다. 사후 시호는 '경희공'(景禧公).[11] 景靈殿. 제8대 현종이 만든 신전으로 태조 내외와 재위 중인 군주의 4대조, 총 10명의 초상화를 모셨다.[12] 적경원은 1392년 12월 16일에 헐렸다.[13] 다만 그렇다고 이색 등을 홀대한 건 아니다. <폐가입진론>에 따라 우왕과 창왕을 옹립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했지만 관련자들을 유배보내는 선에서 그치고, 유명한 종계변무의 시발점이 되는 윤이·이초의 옥사에서도 이색 등을 옥에 가두면서도 비가 와 감옥이 잠길 정도가 되자 하늘의 뜻 핑계를 대며 풀어주었다.[14] 특히 남은[15] 이성계의 우창비왕설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자가 다름아닌 정몽주였다.[16] 경대승이 겨우 100여명의 정예 사병인 도방으로도 이의민, 조원정 등 다른 정적들을 압도했다.[17]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의 책봉 이전이므로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이용했다.[18] '고려'라는 국호 자체는 2년 정도 지속되었다. 이미 내부에서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지만 명나라의 책봉을 못받아 새 국호를 대외적으로 쓰지 못했다.[19] 오늘날 강원도 고성군.[20]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7일 병진 3번째 기사.[21]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선 무장 출신 태조는 왕씨들에게 온건한 입장이었지만 유학자인 그의 공신들은 태조 즉위 과정에서의 명분 부족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해 이 건에 대해서는 정파 구분없이 똘똘 뭉쳤다. 이성계가 바랬던대로 가만히 도장이나 찍어주다 순순히 선양했다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꼭두각시가 될지언정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씨 사직을 위해 저항했고, 이것이 이성계의 즉위를 선양도 반정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만들었다.[22] 박위는 이때 이성계가 감싸 살아남고 관직도 계속 올라가지만 4년 후 무인정사 때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23] 오늘날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동막리와 근덕면 궁촌리로 가는 고개. 공양왕이 살해된 언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공양왕릉과 지척간이다. 궁촌1리 마을회관 근처.[24] 사위인 우성범(禹成範)과 강회계(姜淮季)는 공양왕이 폐위되었던 1392년 7월에 참수당했다.[25] 살아 있을 당시에 이렇게 불렸던 것이니 시호라기보다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존호(尊號)'로서 부여된 것이다. 물론 사망 후에는 '공양왕'으로 추봉되기 전까지 그것이 그대로 시호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어차피 존호도 시법에 따라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법상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남에게 그 자리를 넘긴 사람에게 주는 글자들로 구성된 '공양'군도 여기에 해당된다.[26] 인근에 식사동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공양왕을 알아본 동네의 승려들이 먹을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밥골'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그대로 한자화되어 이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전승에서는 '승려들이 정신을 차려 보니 공양왕이 곱게 죽어 있었다'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곳에서 조선측의 추격자들에 의해 시해당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27] 본래 왕릉보다 높은 곳에는 무덤을 못 쓰게 되어 있고, 근처의 숲에서는 나무도 함부로 자를 수 없을 만큼 예우받아야 하는데 공양왕릉은 근처 지역이 명당 자리로 꼽혀 왔다지만 왕릉을 대놓고 굽어보는 자리에 조선시대의 민간인과 사대부들의 묘가 수두룩해서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망국의 슬픔이 절절하게 와닿는 모양새이다.[28] 恭讓 : '공손할 공'에 '양보할 양'.[29] 여담이지만 시호가 공양왕(恭讓王)의 恭(공손할 공)과 비슷한 공민왕(恭愍王)도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여서 일을 망친 적이 있다.[30] 뒷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살아남을 확률은 고분고분하게 선양하고 넘기는 게 훨씬 높았다. 사실 대대적인 왕씨 숙청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도 이성계의 즉위가 선양도, 반정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명분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조위의 마지막 황제 원제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처럼 순순히 선양했다면, 명분만큼은 확실하니 다른 왕씨는 죽어도 공양왕 본인은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입장에서도 명분과 정통성을 위해서 공양왕은 살려두되, 모략을 꾸미지 못 하도록 수족은 다 잘라버리는 형식이 일석이조였다.[31] 김유신과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왕비인 문명왕후는 구형왕의 증손이었다. 즉, 제30대 문무왕은 구형왕의 4대손이었으며, 통일신라 중대의 태종 무열왕계 군주들은 모두 구형왕의 후손들이었다.[32] 신라의 경순왕은 탐라국의 자견왕보다 한술 더 나아가서 이후 태조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 혼인했으며, 그의 백부의 딸, 즉 사촌누이가 왕건과 혼인하여 서로 사돈을 맺었다. 신성왕후 김씨의 손자가 고려 제8대 현종인데, 이후 명군 현종이 고려 왕실의 중시조가 되어 이후의 고려 군주들은 제34대 공양왕까지 모두 이 사람의 후손들이었다. 거기다 경주 김씨는 김부식 대에 이르러 고려의 주요 문벌귀족 가문으로 부상하며, 조선시대에도 왕비까지 배출한 주요 양반 가문 중 하나였다.[33] 백제의 경우, 마지막 군주가 풍왕이냐 의자왕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의 사학자 순암 안정복은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풍왕을 의자왕에 이은 백제의 군주로 인정하고 기록했으며, 아울러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 이후 3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사를 백제의 역사로 포함시켰다.[34] 하지만 사직의 멸망 이후 당나라로 끌려간 뒤 사망한 기록과 연도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과 달리 풍왕과 대인선은 백제와 발해가 망한 이후 당나라, 요나라로 압송되어 끌려갔지만 이후 어떻게,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혀 없다.[35] 의친왕만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일반적인 대한민국 시민이 되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이나 리비아 같은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왕정 복고 주장이 힘을 받거나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36] 왕건에게 쫓기던 중 농민들에게 맞아 죽고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 시기 내내 일방적으로 격하되었다.[37] 왕위에 오르자마자 1년도 안돼 나라가 고려에게 멸망, 흡수당한 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조차 없다.[38] 참고로 후백제의 신검 같은 경우는 왕건이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는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학계에서는 끝까지 왕건에게 저항했던 신검이 좋은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사극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이 설을 채택해서 왕건이 신검에게 벼슬을 내렸다가 마음을 바꾸어 신검 형제에 대한 처형을 명령하는 내용으로 그렸다.[39] 발해가 요나라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멸망당한 이후, '발해 대씨 왕가의 후손'이란 명분을 앞세워 발해 유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옛 발해 땅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요나라가 지배하던 옛 발해 땅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요나라에게 대항했다가 요나라 대군의 공세와 내부 배신으로 1년도 채 못가고 요나라에게 멸망당했다.[40]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신라의 군주가 되지 못한 것에 분노가 폭발하여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결국 자결했다.[41] 적국 고구려의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멀어 조국에 대해 배신을 하려던 딸 낙랑공주를 죽여가며 사직을 지키려다 결국 고구려에게 나라를 빼앗겨버렸다.[42] 역사가 불분명한 최씨낙랑국 제외.[43] 이성계는 공양왕을 선택했으나 조준과 성석린은 그가 왕도를 모른다며 반대했다.[44] 다만 조선이 78개국으로 나뉜 뒤 삼국으로 정리되어 고려 태조가 평정하였다는 표현으로 보면 신라보다는 78개 소국으로 구성된 삼한(54개 소국으로 구성된 마한 + 12개 소국으로 구성된 진한 + 12개 소국으로 구성된 변한)을 염두에 둔 것으로 사료된다. 중세에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마한/진한/변한 삼한의 개념을 동일시하곤 했다.[45]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는 표(表)이고, 제후에게 올리는 문서는 전(箋)이다.[46] 해 아래에 있는 오랑캐의 땅.[47] 일종의 세습이다. 왜 '정원'(定原)을 쭉 봉하지 않았냐면 고려는 원칙적으로 세습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명을 조금씩 바꾸어 편법으로 봉지를 이어갔다. 유일하게 같은 지명으로 세습된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로 추존의 의미로 같은 지명을 봉한 것이다.[48] 성우 김영선과는 동명이인인데 성우 김영선은 <용의 눈물> 방송 당시 MBC 전속 신인 성우였다.[49] 결국에는 이성계에게 자신의 목숨만이라도 보전해달라는 조건하에 군주가 되겠다고 제안하지만 이마저도 무시당한다.[50] 고우영 작가의 만화 《오백년》에서는 더 비참하게 연출되었는데 자신을 죽이러 온 사자들에게 "내가 스스로 죽겠다. 칼을 다오"라고 외치는 것을 군사들이 무시하고 강제로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였다. 고우영 작가는 이를 두고 "죽음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공양왕. 그가 평생 왕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나?"라고 비판했다.[51] 물론 5회에서 "더이상 허수아비로 있지는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그건 정몽주 덕분이지 "그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첫댓글 15년 전 성남에서 만났는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연락처 아시면 010-5368-6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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