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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3) 2024. 5. 5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사도행전1:9-11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하신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무시면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셨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행1:3).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0일이 지나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가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승천하시던 당일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자신들을 떠나가심을 눈치챈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의 때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줄곧 가르치셨던 그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 임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구원의 복음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이때입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질문은 정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한 보다 성숙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7)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이스라엘 안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은 모든 민족과 나라들에게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얼마나 오랜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 또는 어떤 특별한 ‘카이로스’의 사건으로 임하시게 될는지,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 권한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한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찰 때까지,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 사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사명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사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이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결산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부름 받았고 그 일을 위해 성령님과 각종 은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신 후,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몇 가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단어들이 있습니다.
첫째,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이 제자들이 ‘보는데’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승천이 신화나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제자들이 실제로 경험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제자들이 ‘보는데’ 실패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일정한 높이만큼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구름이 나타나 예수님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나타난 이후 예수님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이후 예수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이 나타날 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름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에 항상 동반되는 현상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십계명을 받으러 갈 때, 구름이 가득하였습니다. 성막에 하나님이 임하실 때 구름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출 40장에 보면 성막을 다 완성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을 보내서 성막을 덮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40:34~35).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 지어서 봉헌할 때도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8:10~11).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 대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로 더러워진 인간이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태양 빛이 우리에게 얼마나 포근하고 고마운 빛입니까? 태양 빛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이 고마운 태양 빛을 우리가 용감하게 약 5분만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도 없겠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눈은 큰 상처를 입고 더 이상 그 기능을 영원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태양 빛은 직시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아야 고마운 빛이지, 직시하면 죽음의 빛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이 사 6장에 나옵니다. 웃시야 왕이 죽고,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자, 예언자 이사야가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성전을 찾습니다(1절). 이때 이사야는 놀라운 신비 체험을 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종교의 핵심은 인간이 신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을 ‘누미노제’(Numinose)라고 불렀습니다(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길희성 옮김, 39). 루돌프 오토는 인간이 신을 경험하는 것을 ‘압도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와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ns)로 요약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이러한 하나님 체험을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에서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압도적인 신비를 경험한 이사야는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이렇게 절규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성전에 스랍들이 있습니다(2절) ‘스랍’은 히브리어 ‘세라핌(שרפים)’을 한국어로 음역한 말인데, ‘불타다’(burn)라는 뜻을 지닌 동사, ‘사라프(שרפ)’의 명사형입니다. 불타는 것과 같은 천사적 존재입니다.(「ESV 스터디 바이블」, 1324) 스랍들은 날개를 여섯 개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고 있습니다.(2절)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절대 거룩’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발을 가리는 이유는 가장 더럽고 부끄러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데,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의로운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은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주의 깊게 보니 그가 살 수 있었던 힌트가 남아 있었습니다. 스랍들의 찬양하는 소리로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보존해 주기 위하여 연기(구름)를 통해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구름으로 가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서 예수님의 승천이 역사적(경험된) 사건이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신비롭고 장엄한 사건이었음을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다실 오실 예수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10절을 읽겠습니다.
10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제자들은 계속해서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저라도 계속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신비로움에 넋을 잃었을 것이고, 또 주님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곁에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천사들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모습과 같습니다(눅24:4).
여기에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날개가 달려있다거나 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구별된 천사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대개의 경우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과 천사들도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창18:2).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모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주의 사자를 통해서 수태고지를 받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들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제자들도 그들 사이에 천사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빈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말을 할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첫째 메시지는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부른 것은 열 한 명의 사도들이(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출신의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바울 - 오백여 형제), 특별히 제자 공동체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네 현실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언제나 ‘초막 세 개’(변화산)를 짓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영적 체험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관심 갖지 말고” 예수님이 마지막 명령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둘째 메시지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씀은 같은 방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구름에 쌓여 승천하셨듯이 그대로 구름에 쌓여 재림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승천이 경험된 사실이듯, 주님의 재림도 역사적 사실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허한 말의 장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6)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승천은 곧 재림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늘의 개념>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승천을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사” 하실 때 하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늘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간적 의미’의 하늘입니다. 즉 땅의 반대말로서 땅 위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sky’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하늘에 오르사”)이 의미하는 하늘은 이 공간적 의미의 하늘이 아닙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천문학자 ‘라플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에게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한참 동안 별자리를 들여다본 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별자리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쯤인가?!” 나폴레옹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 살고 계신다’고 생각했던 같습니다. 1962년 2월 20일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러시아의 ‘유리 가가린’은 우주여행 소감을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우주에 올라가 보니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나 유리 가가린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아마도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 계실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차원적 의미’의 하늘입니다. 보이는 땅의 세계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Heaven’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신앙고백에서) 하늘은 이 차원적 의미의 하늘을 뜻하는 것입니다(영어 성경은 하늘을 ‘Heaven’으로 쓰고 있습니다. “He ascended into Heaven”)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는 단순히 공간적인 하늘(‘sky’)로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승천이란, 땅의 시간에서 하늘의 시간으로, 육의 시간에서 영의 시간으로, 3차원의 공간에서 4차원의 공간으로 옮겨가신 것입니다. |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넋 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다리는 것은 재림을 준비하는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증인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열심히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승천의 의미>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성도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첫째, 예수님의 승천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거해 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본래 자기의 본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온 자’라고 여러 번 밝히셨습니다.
요 3장에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와 이야기를 나누실 때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13절)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요 6장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51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하며 수군거리니 예수님이 한 발 더 나가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1-62절). 승천하실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자신의 지상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자랑스럽게 승천하신 것은 자신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음을 증거해 줍니다.
셋째, 승천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의 형태로 계속 계셨다면,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한 작은 모퉁이에서 소수의 사람들과만 함께 계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계실 수 있는 지역은 극히 제한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극히 제한됩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고 대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사람 가운데, 영원토록 거하실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요16:5-8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사건은 인간세계로부터 완전히 떠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세계 안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임재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 된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넷째, 승천은 성도들이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누릴 영광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님이듯이, 승천의 첫 열매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도 부활하여 예수님과 같이 승천, 곧 하나님께로 갈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소망을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했습니다.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이 경험한 실제적 사건이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이 승천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장차 때가 차면 다시 오실 것을 확신하며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도 장차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림 받을 것을 소망하면서, 날마다의 삶의 현장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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