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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3) 2024. 7. 10
솔로몬의 대관식
왕상1:32-53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예전, 다윗이 성전 건축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하자 나단은 처음에는 찬성했지만, 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뒤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대신 ‘네 몸에서 날 네 씨가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라’(삼하7:12-13)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선한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으며, 다윗의 왕가를 영원히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씨’는 누구를 뜻하는 말입니까? 예, 바로 ‘솔로몬’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대상22:8-10). 다윗은 이 사실을 밧세바와 솔로몬에게 직접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차기 왕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위 계승 작업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다윗의 건강이 급속도로 약해진 것입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넷째아들이자 왕위 계승 1순위인 ‘아도니아’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실을 눈치챈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를 찾아가 속히 왕에게 나아가 솔로몬을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선포해 달라고 요청하게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자신도 다윗 왕을 찾아가 같은 말을 합니다. 나단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밧세바를 부르더니 자신의 약속대로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30절) 선언합니다.
<다윗의 명령>
다윗은 구체적인 실행 명령을 내립니다.
32~35절 “다윗 왕이 이르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니 그들이 왕 앞에 이른지라/ 3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34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35 그를 따라 올라오라 그가 와서 내 왕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그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지명하였느니라.”
다윗은 ‘사독’과 ‘나단’과 ‘브나야’를 급히 소집합니다. 이들 세 사람은 솔로몬의 대관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인물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자로(39절),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자로서 대관식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또한, 군부 실력자인 브나야는 그 예식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 브나야는 다윗의 전성기에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했던 인물입니다(삼하8:18).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은 외국인 용병으로 왕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있었고, 브나야는 이들의 대장이었습니다(대상 18:17). 본래 브나야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서(대상 27:5) 레위인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무용(武勇)으로 인해 다윗 왕의 시위 대장으로 발탁했습니다. 훗날 브나야는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의 반란 사건에 가담한 요압을 죽인 후 대신 군대 장관이 됩니다(2:28-35). |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도니야의 대관식에 모두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왕상1:8).
‘아도니야’가 판단할 때, 이 세 사람은 변함없는 다윗 왕의 충신으로 여겨졌기에, 처음부터 자신의 모의를 그들에게 비밀로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첫째는 솔로몬을 ‘왕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말’(馬)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노새만 해도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윗 당시에만 해도 노새는 수입해 들여온 것으로서(10:25, 겔27:14), 귀족 계급들이 주로 사용했던 교통수단이었습니다(삼하 13:29, 18:9). 일반 평민은 대부분 나귀를 사용했습니다(노새는 암말과 숫당나귀를 교배해 만들어진 잡종으로 새끼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새는 당나귀보다 크고 힘도 셉니다). 그런데 그냥 노새가 아닙니다. ‘왕의 노새’입니다. 오직 왕만이 탈 수 있는 노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솔로몬에게 ‘왕의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기혼’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하필 ‘기혼’일까요?
기혼에는 예루살렘 성의 주요 수원지(水源池)로 샘물이 있었습니다.
기혼 샘물은 예루살렘 성의 생명수나 마찬가지입니다. 훗날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물이 흐르도록 실로암 못까지 기혼 터널을 뚫었습니다(대하32:30). 전쟁을 치를 때 적군에게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다고 하더라도 물을 차단하지는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강변이나, 샘물 곁에 모여 살기 마련입니다. 기혼 샘물 주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광장). 그러니까 다윗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를 택해 대관식을 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소문도 더 빨리 퍼져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아도니야는 지금 어디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있었을까요?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이었습니다(9절). 거기에도 샘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떨어진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 사이에 있었습니다. 기혼에서 대관식을 하면 금방 들통이 날 것 같아,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멀찌감치 에느로겔 샘물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하고 외치라는 명령입니다. 한 마디로 ‘대관식’을 열라는 것입니다.
먼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합니다. 당시 '기름 부음'은 주로 통치의 직분에 취임하는 왕의 대관식 의식에서 행해진 공식 행사였습니다(삼상10:1, 삼하12:7). 그리고 이 기름 부음의 의식은 (1)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로서 그에게 권위가 주어지며, (2) 또한 이 권위를 부여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속에 내포된 사상은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린다는 사상입니다.
이어 ‘뿔 나팔을 불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뿔 나팔’(양각)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로 갑작스럽게 찢어지는 듯한 높은 소리가 납니다. 이는 전쟁에서도 사용되나, 특히 왕의 즉위식 때에 그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삼하 15:10, 왕하 9:13, 11:14). 따라서 다윗 왕은 솔로몬의 대관식 때에도 이것을 무리에게도 그 소리가 들리도록 하여 솔로몬의 왕위 즉위가 만천하에 공식 선포되고 드러나도록 조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35)로 지명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국가의 세력 판도가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유다’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다윗도 처음 7년 동안은 ‘유다’만을 통치하다가 나중에 사울 가문을 추종하던 ‘이스라엘’ 지파들을 통합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삼하 5:3-5). 그러므로 다윗의 여기 이 말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솔로몬은 현재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지파를 통치하는,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한편, 그러나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을 다시금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분리되고 맙니다(11:43~12:20).
<브나야의 대답>
다윗의 명령을 들은 브나야의 대답이 참 놀랍습니다.
36~37절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37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의 왕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왕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그의 말은 3가지 내용으로 요약됩니다. (1) 다윗의 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원한다는 것(36절), (2)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함께 계시기를 바라는 것(37a절). (3) 솔로몬의 왕위가 다윗의 그것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37b절)입니다. 이와 같은 브나야의 3가지 소원은 결코 아첨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경건한 소원으로서, 그가 비록 무관(武官)이었으나 매우 투철한 여호와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대관식>
다윗의 명령은 즉시 시행되었습니다.
38~39절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39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사독’과 ‘나단’과 ‘브나야’는 다윗의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를 태워 기혼 샘물로 데려갔습니다.
대제사장 사독은 성막 가운데서 기름을 담은 뿔을 가져와서 솔로몬에게 부었습니다. 그리고 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기혼 샘물 광장에 모인 백성들이 큰소리로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아도니야의 대관식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아도니야 대관식에서도 사람들은 ‘아도니야 왕 만세’를 외쳤습니다(25절).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기름 부음’입니다. 단지 몇몇 유력 인사들을 모아놓고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면서 스스로 왕이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기름 부음이 필요합니다. 사울 왕도, 다윗 왕도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왕이 되었습니다. 기름 부음은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택하여 세웠다는 증거이며, 그와 동시에 앞으로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동하며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다른 좋은 조건들을 아무리 차고 넘치게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선한 길로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무력을 앞세워서 정적을 제거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고 하는 다른 나라들의 포악한 왕들처럼 될 뿐입니다.
<뿔나팔 소리를 들은 요압>
솔로몬의 대관식 소식은 아도니야 진영에도 전해졌습니다.
40~48절 “모든 백성이 그를 따라 올라와서 피리를 불며 크게 즐거워하므로 땅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갈라질 듯하니/ 41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손님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뿔나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어찌하여 성읍 중에서 소리가 요란하냐/ 42 말할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오는지라 아도니야가 이르되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도다/ 43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과연 우리 주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셨나이다/ 44 왕께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솔로몬과 함께 보내셨는데 그들 무리가 왕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워다가/ 45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무리가 그 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읍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46 또 솔로몬도 왕좌에 앉아 있고/ 47 왕의 신하들도 와서 우리 주 다윗 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더 아름답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48 또한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내 왕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내 눈으로 보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 하니.”
솔로몬의 대관식에 참여한 백성들은 모두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땅이 갈라질 듯했다’라고 합니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웅장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는 기혼 샘물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에느로겔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특히 요압은 ‘뿔나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쟁터를 많이 경험한 노련한 군인답게 나팔 소리에 민감하였습니다. 지금 반역의 자리에 앉아 있는 요압에게 그 소리는 매우 불길한 소리였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성읍 중에서 소리가 요란하냐”며 불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나타났습니다. 아도니야는 그를 맞으면 반가운 소식을 기대합니다. 아도니야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기쁜 소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아버지 다윗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대관식 당일에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버지 살아생전에 스스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안 그래도 조금 찜찜했었는데, 기가 막히게 때를 맞추어 아버지가 죽었으니 말입니다. 이제는 거리낄 것 없이 왕 노릇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누구도 아도니야를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가져온 소식은 ‘아도니야’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우리 주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셨나이다”라고 전합니다. 다윗이 드디어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지명했고, 실제로 그 대관식이 성대히 거행되었고, 모든 백성이 그 일을 크게 즐거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제단 뿔을 잡은 아도니야>
이 소식이 전해지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49~51절 “아도니야와 함께 한 손님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51 어떤 사람이 솔로몬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한때 ‘아도니야 왕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아도니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방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도망가자 ‘아도니야’ 역시 살 궁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한 가지 묘수를 떠 올렸습니다. 예루살렘 성막으로 달려가 제단의 뿔을 잡는 것입니다(출21:14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제단 뿔은 곧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튀어나온 돌기 부분입니다(출 38:1-7). 제사를 드릴 때 여기에 짐승을 매기도 했고, 또 희생 제물의 피를 바르기도 하였습니다(출29:12). 그런데 성경에서 '뿔'(케렌)은 주로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신33:17, 삼상2:10. 시18:2, 75:10, 112:9). 그러므로 제단의 뿔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아울러 그러한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약자와 억울한 자 및 죄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제단 뿔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호소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도피성 제도와 비슷 - 민 35:9-34). 이러한 배경에서, 반역을 주도한 아도니야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단의 뿔을 잡는 것뿐입니다.
아도니야의 행동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그가 스스로 왕이 되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을 때는 하나님에게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름 부음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오히려 기쁜 소식으로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다급하게 되니까 인제 와서 제단의 뿔을 잡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내세우면서 ‘제단 뿔을 잡았으니 자기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입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시인하고, 자신을 그의 '종'으로 인정함으로써 이제 왕위(王位)을 포기했음을 고백합니다. 아도니야이 성품이 교만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도 함이 나타납니다. 만일 아도니야가 자신의 왕위 계승 자격을 굳게 확신했더라면 이토록 비루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아도니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나서 일이 잘못되면 그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며 도와달라고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그랬으니 우리 죄를 없던 거로 해주시고 이번 문제를 잘 해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겠다고 그럽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은 얼마 지속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반응>
아도니야의 요구에 대한 솔로몬의 반응이 궁금해집니다.
52~53절 “솔로몬이 이르되 그가 만일 선한 사람일진대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그에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고/ 53 사람을 보내어 그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리니 그가 와서 솔로몬 왕께 절하매 솔로몬이 이르기를 네 집으로 가라 하였더라.”
솔로몬은 ‘그가 만일 선한 사람이라면’, 즉 이제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불의한 욕심을 버리고, 더이상 선동적인 역모를 꾀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사적인 생활을 보낸다면 그의 생명은 확실히 보장될 것임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에서 ‘죽일 것이다’(I will kill him.)가 아니라 ‘죽을 것이다’(he will die.)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도니야를 살리거나 죽이는 행동의 주체는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에게 ‘네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경고의 의미가 큽니다.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명령을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면 언제나 징계, 연금의 의미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2:36, 삼하14:24). 그러므로 최소한 왕궁을 노리던 아도니야에게 사적 장소인 ‘네 집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가 담긴 것입니다. 앞으로는 분수에 넘는 짓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경고가 충분히 담겨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도니야의 대관식과 솔로몬의 대관식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기름 부음’의 여부입니다.
성령 강림 이후의 시대에서는, 성령의 임재가 곧 ‘기름 부음’입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으로 능력이 입혀질 때, 우리는 주의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사역이나 일보다 기름 부음이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죄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아도니야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솔로몬이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49절 “아도니야와 함께 한 손님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다 도망갔습니다.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귀신들이 사람들 속에서 지배하며 활동했지만,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떨며 쫓겨났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은 빛 앞에 꼼짝하지 못합니다. 물러가고 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무장할 때, 사단의 세력은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약4:7b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종말적으로는 죄의 종노릇 하며 살던 사람들이 잠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임할 때에 다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항상 무장하여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구원의 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아도니야가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제단의 뿔’을 잡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의 뿔’이 있습니다. 눅 1장에 보면, 사가랴가 엘리사벳(세례요한의 어머니)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예언을 합니다(눅1:67-80).
68~69절 “찬송하리로다 주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해 이 땅에 오는 메시아는 사단의 뿔을 꺾는 구원의 뿔이요, 어둠을 몰아내는 돋는 해라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림으로 그 핏값으로 대가를 지불함으로 죄와 사망의 종된 자들이 자유롭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인하여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의 뿔’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뿔을 놓지 않는 한 우리를 멸할 자가 없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사단의 세력을 굴복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뿔을 굳게 잡아 장차 오는 재림의 날을 당당히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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