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김일순
반갑지 않은 벌레 습격
시도 때도없이 굼실되고
거친 비가 몇 몇 날 계속되도
밭고랑에 누워 산달처럼 차오른 몸
근황이 궁굼해 똑똑 노크해 보니
통통 속 울음 수신호는 통 알 수 없다
겉만보고 알 수 없는 속 사정
복불복이다
쩍. 시퍼런 칼 끝에 놀라 지레
쪼개진 살 빛 붉다
촘촘한 씨앗들 까만 눈동자 굴리며 쏱아진다
고열로 시달린 여름 한 가운데
쟁반위 달디 달은 조각들이
땀을 식혀준다
외등
김일순
산 모퉁이 돌자 뜸금없 듯 서 있는
가로등 하나
외눈박이처럼 서 있어도 외롭지 않다
이른 아침 떼까치들이 아랫마을에서 물고온 소식들 수도꼭지 처럼 쏱아 놓거나
그악스런 까마귀가 꺼이꺼이 부고장
알리 듯 빙빙 돌 때
길 잘못 찾아온 차가 멋쩍게 돌아가는 걸 보며
찜찜한 기운도 달려 보낸다
요란한 경운기 소리가 산비탈에 오르면
발목까지 얼어 붙었던 눈덩이
목줄까지 끌고 온 집 나온 개가 지리고 간
오줌발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지난 해 보다 몸 굼뜬 아낙이
봄부터 가을까지 산비탈에 엎드러
씨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동안
해 저물고 계절 넘기는 가을까지 거두지
못하는 눈
까무륵 졸다 고양이 발자국에도 눈
환해지는 가로등
오늘도 산골 일상을 자세히 살피는
든든한 등대같은 불 빛
다이어트
김일순
헛헛한 마음을 메우는 건
달달한 음식이다
꾸역꾸역 밀어넣고 후회하지만
허기를 이기는 건 당기는 입맛이다
무시무시한 살과의 전쟁
사나흘도 넘기지 못한 맹세
얘야, 속이 든든해야 사는 힘도 생기는 거란다
난 어머니 말씀만 실천한다
다세대 주택
김일순
웃자란 나무처럼 치올라간 아파트 틈에 끼어
이도저도 못해 버려진 세간처럼
남은 몇 채의 다세대 주택
어느 날부터인가 햇빛도 인색해졌다
눞고 넓은 아파트를 돌다온 햇살
쥐구멍에 볕 비추 듯 잠깐 머문다
산 아래 사람들처럼
아파트 숲속에 옹기종기 모여
옛 고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손바닥만한 화단에 공동으로 심은
온갓 채소들 풍성해지면
넓다란 평상위에 지글거리는 삼겹살
불러 내지 않아도 냄새로 모여들면
잔치날이 따로없다
아직도 항아리를 고집하는 할머니가
장독에서 퍼온 된장 고추장이 오르고
기초수금 나왔다며 막걸리 댓병
당당하게 내놓는 아저씨
저녁상에 올릴 김치 찌게 냄비째 들고 나온 후덕한 아줌마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귀가 하는
성실한 가장을 단체로 환영하며
엄마 아빠 대신 할머니 품에서
자라는 유치원 꼬마
맘껏 뛰고 노래해도
층간소음이 아닌 숲속에 새소리처럼
들리는 도심속에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