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여년 전,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를 샀다. 어린 시절 부유한 친구네 집에서 가지고 놀아본 게임기는 나에게 신세계였다. 불량한 아이들만 간다는 동네 오락실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게임을 할 수 있었고, 게임이 끝날 때마다 동전 투입구에 50원씩 넣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만큼 게임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에 대한 충격과 동경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비디오 게임기는 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되면 사고싶은 여러 물건 중에 하나가 되었다.
2. 막상 어른이 되어 돈을 벌어도 당장 게임기를 사지 못했다. 결혼 전에는 동생들이 쓸 데 없이 돈을 쓰는 것을 배울까 겁이 났었고, 결혼 후에는 내 집 마련이 우선이어서 매달 가계부를 쓰며 아끼고, 절약해서 사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3. 점점 게임기에 대한 생각이 잊혀지는 듯 하다 아들이 태어나자 다시 게임 속 캐릭터들이 나의 욕망을 흔들어 댔다. 아들이 좀 더 크면 둘이 나란히 앉아 TV 화면을 보며 게임하는 상상을 아내에게 설명하며 게임기를 사겠다고 했다. 내 용돈을 모아서 산다고 하니 아내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검고 작은 직사각형의 게임기가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4. 처음 게임기를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누를 때 너무 행복했다. 드디어 나만의 게임기가 생긴 것이었다. 게임기 주인이었던 친구의 은근한 유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이라도 더 하고 싶어 비굴하게 웃어주었던 나의 서러운 기억들을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우려는 듯 한동안 퇴근하고 매일 게임을 했다.
5. 아무리 재밌는 것이라도 혼자서 하는 건 오래가지 못했다. 게임기는 2명이 할 수 있지만 아들은 게임을 하기엔 너무 어렸고, 아내는 게임을 즐기지 않았다. 아들이 잠든 후에 게임을 했어야 했기에 밤 늦게까지 하기엔 몸도 피곤했다. 매일 하던 게임은 주말에 한 번, 그러다 한 달에 한두번 하며 먼지가 쌓여갔다. 그래도 TV 밑에 놓여져 있는 게임기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전원 버튼을 누르고 게임을 할 수 있었으니까.
6. 그냥 보기만해도 기분 좋은 장식품이 되어가던 중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토리가 있는 게임은 연령에 맞지 않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축구 게임은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가 게임 조정기를 들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으니 아들이 옆에서 관심을 보였다.
“아빠랑 같이 할래?”
“네”
이 한마디와 함께 아들은 나와 게임 메이트가 돠었다.
7. 드리블은 조종기 스틱을 이렇게 움직이고, 패스는 이 버튼, 슛은 저 버튼. 처음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주며 게임을 진행했다. 너무 못하면 흥미를 잃을까봐, 일부러 공도 빼앗기고, 골도 먹어주며 아들에게 져주는 게임을 했다. 아빠가 아들에게 고의로 져준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막상막하의 게임을 유지했다. 그렇게 때로는 이기며 때로는 질 때 기쁨과 아쉬움도 연기를 했다. 그게 잘 먹혀 들어갔는지 아들은 자주 게임을 하자고 했다. 그 때마다 적절하게 횟수를 조절하며 기꺼이 응해주었다.
8. 매번 게임을 할 땐 내가 아들을 위해 적당히 난이도를 조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임의 승패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여기던 어느 날 내가 이기려던 경기를 졌다. 분명 초반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고 가고 있었는데, 후반엔 나름 최선을 다 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바로 이어 한 경기를 더 해서 이기긴 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조종기를 움직이는 손가락이 아플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9. 비록 비디오 게임이지만 조정기를 쥔 손에 땀이 나고, 손가락이 아플정도로 진지하게 임했음에도 아들에게 지는 횟수가 늘어났다. 더욱 게임에 질 때, 흥분하는 지점이 아들은 항상 손흥민이 속한 토트넘 팀을 선택해서 하는데, 나는 그 보다 레벨이 높은 팀을 선택하고도 진다는 것이다. 아들의 환심을 끌기 위해 게임 중간 내뱉던 기쁨의 환호성과 안타까운 탄식도 더 이상 연기가 아니라 진정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 외치는 나를 발견했다.
10. 일찍 집에 온 날은 아들이 학교간 틈을 이용해 혼자 게임기를 켜고 게임 기술을 익히며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너무 집중해서 연습하다 아들이 온 줄도 몰랐다. 안방 문을 열고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본 아들이,
“아버지, 이렇게 연습하는 건 반칙 아닙니까?”
하는 소리에’
“야, 아빠가 이렇게 안하면 너한테 못 이길거 같아서 그런다.”
하며 멋적게 웃으며 게임기를 끈 적도 있었다.
11. 비록 내가 가지고 싶어서 산 게임기지만, 고3 아들이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와서 아빠와 축구 게임 한 판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아 내 것이 아닌 아들을 위한 게임기처럼 느껴진다. 조그만 손으로 내가 하라는대로 따라 했던 꼬맹이가 이젠 나에게 게임 특성과 기술을 가르쳐 준다. 나는 예전 하던 실력 그대로 멈추어 있는데, 아들은 화려한 기술을 사용하며 점점 나보다 앞서 나간다. 일개 게임일 뿐이지만, 일취월장, 청출어람을 보며 아들이 커가는 것을 느낀다.
12. 고3 힘든 시기에, 나와의 게임 한 판이 아들의 쉼터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아들의 기억 속에 아빠와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매주 집에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아들과의 일전을 기대한다. 나는 언제든 골을 넣은 후 기쁨의 환호성이든 게임에 져서 아쉬움의 탄성을 지르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아들아,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첫댓글 선생님
게임기로 아들과 더 돈독해지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학생을 둔 선생님, 아들과 좋은 시간 많이 가지시길 바랍니다. 다 한때이니까요. 그리고 좋은 아버지인 듯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