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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역사 개론 (1) : 초기~란상왕국~19세기
History of Laos to 1945
1945년 이전의 라오스 역사 (상편)
라오스라는 국가가 탄생한 것은 겨우 1945년부터이다. 특별히 구분된 라오 민족주의라는 관념은 19세기에 형성됐고, 그것은 서양에서 형성된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관념이 동남아시아에 전파되면서부터이다. 또한 라오어(다이어[Dai]의 방언. 아래 참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웃의 양대 팽창주의 국가들인 시암(Siam: 태국)과 안남(Annam: 베트남) 사이에 끼어 있던 때이기도 했다. 현재의 라오스 영토 국경선은 프랑스 식민당국이 1893~1904년 사이에 걸쳐 확정한 것이다.
오늘날의 공식적인 라오스 역사는 1353년에 건국된 란상(Lan Xang) 왕국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현실 속의 라오족은 시암인들(태국민족)이나 여타 따이어 사용 민족들과 공통적인 역사를 공유하며, 외부의 세력이 도래하기 전에 광범위한 언어 문화적 통일성을 갖고 있던 이 지역에서, 란상 왕국은 [후대에 출현한] 수많은 따이족 왕국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1. 초기의 역사
1.1. 초기역사 개론
따이족(Tai 혹은 Dai)이란 중국 남부에서 기원한 어족군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라오스 주류민족인] 라오족(Lao), [태국의 주류민족인] 타이족(Thai), 미얀마(버마) 북동부에 거주하는 샨족(Shan), 중국 광시성(Guangxi, 广西)에 거주하는 장족(Zhuang people, 壮族), 베트남 북부에 거주하는 토족(Thổ people) 및 눙족(Nùng people), 그리고 "색깔로 표시되는" 따이족 분파들인 따이 담(Tai Dam: 검은 따이), 따이 댕(Tai Daeng: 붉은 따이), 따이 루(Tai Lu: 흰색 따이) 족들도 포함된다.
중국에서 한족(Han Chinese, 漢族)이 팽창하자, 기원 무렵부터 따이족들은 동남아시아로 이주를 시작했다. 라오스 지역 초창기의 따이족은 거대한 돌 항아리 등 철기문화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라오스 중부의 항아리 평원(Plain of Jars)은 바로 그 항아리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메콩 강(Mekong River: 따이어-'매남 꽁'[Mae Nahm Kong])은 오늘날의 라오스 지역을 따라 흐르며, 주요한 이주의 루트로 이용됐다. 하지만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의 강력한 힘은 따이족들이 메콩 계곡(Mekong Valley: 메콩 유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대신 따이족은 짜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 계곡(유역)을 주된 정착지로 삼았고, 그곳에서 고대 왕국에서 오늘날의 시암 및 태국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왕국들을 형성했다.
라오스 최초의 법률적 문서는 <쿤 보롬(Khun Borom 혹은 Khun Bulom)의 법률>이라 불리는 것으로, 아직도 사본의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주1) 또한 이 문서는 라오족의 존재에 관한 최초의 사회학적 증거이기도 하다. <쿤 보롬의 법률>은 암송용의 토착적인 무운시(blank verse, 無韻詩)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고, 이르면 9세기 무렵의 원형-라오족(proto-Lao) 및 원형-타이족(proto-Thai) 사회의 국가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 문서는 아마도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 남방불교, 소승불교)가 도입되기 이전의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며, (베트남 북서부에서) 오늘날의 라오스를 포함한 남방 지역으로의 이주가 발생하기 이전 혹은 이주 동시대의 사회상도 반영되어 있다.
대부분의 라오스인들은 쿤 보롬을 신화 속의 인물로만 여긴다. 하지만 서양 학자들은 그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 존재 사실과 <쿤 보롬의 법률>에 나타난 매우 원초적인 왕국에 관한 묘사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쿤 보롬의 법률>에 사용된 일상적인 용어들은 농경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은 생계형 농업(subsistence agriculture)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가축화된 물소인 가얄(gayal)이 농사에 이용됐다. 이웃의 코끼리를 훔치거나 죽인 자에게는 엄중한 처벌이 부과된 점은 당시에 코끼리가 귀중하고도 중요한 소유물이었다는 증거이다.
라오스 정부가 교과서에 채택하고 있는 공식적인 '라오스 역사'는 통상 파 움(Fa Ngum: 1316~1393 [재위] 1353~1373) 국왕이 1353년 란상 왕국을 건국한 시기부터 시작한다. 라오스가 자국의 역사를 란상 왕국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은, 자국 역사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원사시대(proto-history [역주] 선사와 역사 시대의 중간)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태국의 역사 기록학(historiography)에 비해 상대적으로 겸허한 태도를 취한 것이라 할 만하다.
14세기 경 라오스의 "공식적인 역사"가 시작됐을 때, 초창기 라오어 연관 언어들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현재의 라오스 지역에서 그들보다 1~2세기 가량 앞서 거주하던 이들 속에 상당한 인구학적 근거를 확립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파 움 국왕이 자신의 태국계 혼혈 아들에게 왕위를 양위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가치를 갖지는 못한다. 새로운 국왕은 삼센타이(Sam Sen Thai: 재위 1372~1417)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을 직역하는 "30만 타이족"이라는 뜻으로, 당시 거주자들이 태국민족이었고, 그들의 충성심을 신뢰한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초창기의 라오스 국기 역시 시암의 국기를 모방하여, 중앙에 코끼리를 형상화한 붉은색 깃발을 사용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는 드와라와띠(Dvaravati, 드바라바티) 왕국을 건설했던 몬족(Mon) 같은 오스트로-아시아 어족(Austroasiatic languages) 계열 언어 사용자들이나 [캄보디아 역사를 형성하는] 원형-크메르족(proto-Khmer) 같은 초창기 거주민들이 라오스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강조됐다. 하지만 식민지 이후의 역사기록학은 그러한 방법 대신 라오스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을 동등하게 "토착적인"(indigenous) 민족들로 묘사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남쪽의 캄보디아 계통 왕국들이 라오스보다 고대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라오스의 초창기 역사가 그러한 캄보디아 계통 왕국들과 복잡한 상호 교섭을 가졌다는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라오스의 원형-크메르족을 현대 역사에서 프랑스 및 미국에 맞서 싸웠던 영웅적인 "라오 민족주의자"라며 칭송하고 있다. (1902년에 시작됐던 엉 깨우의 반란 사건[Ong Keo Rebellion]을 참조하라.).
프랑스 식민 당국의 역사 기술과 포스트-식민지(=공산당 정권) 시대의 역사 기술은 양자 모두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명백한 인종 차별적인 역사관을 바꾸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이전 시대의 역사관은 라오족이 현재의 라오스 지역으로 들어와 원주민 거주자들을 정복하여 예속시켰다는 단순한 관점이었다. 그러한 방식의 서술에 나타나는 원주민들은 주로 원형-크메르족이며, 비하적 어감을 가진 '카탓'(Kha-That)이란 명칭으로 표현됐다. (크무족[Khmu people] 항목 및 란상 왕국의 기원에 관한 맥카시[McCarthy]의 설명 부분을 참조하라.) 그러한 전통적 관점은 사실적 근거를 거의 갖추지 못한 것이지만, 구전되는 유사-역사를 통해 흔히 들어볼 수 있는 내용이며, 교실에서 교사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고 대처하거나 교정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는 와타나 폰세나(Vatthana Pholsena)가 2006년에 출판한 <전후의 라오스: 문화, 역사, 정체성의 정치학>(Post-war Laos: The Politics of Culture, History, And Identity)에서 역사기록학적 개관을 제시한 바 있다.
라오스에서 상좌부불교가 우월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란상 왕국의 포띠사랏(Photisarath: 1501~1547) 국왕이 불교를 중흥시킨 16세기 무렵까지도 늦춰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들은 그러한 공식적인 역사관에 변화를 줄 가능성이 존재한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는 [남방불교의 경전 기록어인] 빨리어(Pali) 비문들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는데, 그 연대가 이르면 9세기로도 소급된다. (참조: JPTS, Vol. XXIII, 1997. Peter Skilling, "New Paali Inscriptions from Southeast Asia").
고대의 라오스에서는 정령신앙(animism) 및 부분적으로는 [힌두교의 주력 분파인] 시와신앙(Shaivism, 샤이비즘)이 널리 신봉됐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명의 국왕이 갑작스레 이 나라에서 불교의 우위를 부여했다기보다는, 길고도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불교의 우월성이 확립됐다는 증거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그와는 반대의 과정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참빠삭(Champasak) 도에 위치한 왓푸 사원(Vat Phou)에서 출토된 조각상들과 비문들의 역사적인 층위들을 살펴보면, 가장 오래된 것은 시와 신(Shiva) 신을 숭배하는 내용의 산스끄리뜨어(Sanskrit) 비문이다. 그리고 후대의 유물들은 불교에 관한 것이고, 이어서 정령신앙을 위한 유물로 시기적 역전이 발생하고 있다. (가장 후대의 조각상들은 단순히 거대한 코끼리나 도마뱀만을 묘사하고 있고, 인도에서 발생한 어떠한 조직화된 종교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산스끄리뜨어나 빨리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다.).
라오스에 관한 공식적인 모든 역사 서술들이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민간신앙(Chinese folk religion)이 가진 (실제 혹은 가능한) 영향력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다. 12간지를 사용하는 라오스나 태국의 음력 달력(참조: 태국 음력)은 모두 중국의 달력에서 차용한 것이며, 인도 역법의 영향이 아니다. 이러한 역법들은 금석학(epigraphy)을 통해 보존되는 [왕정의] 국가 종교(royal religion)의 일부이며, (점복을 통해 나타나는) 수 세기 동안의 대중적 민간신앙의 일부인 것도 분명하다.
1.2. 기원 후 1천년 동안의 시기
기원 후 첫번째 1000천년 동안의 시기에, 따이족들은 므웡(muang: 므앙)이나 만달라(mandala)라고 불리는 소규모 정체를 구성하여 느슨한 조직화만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크메르인들과 서쪽 인도의 힌두(Hindu) 문화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주변 문화권이 지니고 있던 보다 진보된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따이족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힌두교에 귀의했고, 그 흔적은 오늘날의 라오스 지역 사람들의 관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6~9세기 사이에는 따이족들의 거주지역에 불교가 전래됐는데, 아마도 버마를 거쳐 들어왔을 것이다. 불교는 이후 이 지역에서 주도적인 종교가 됐다. 하지만 라오인들은 불교 전래 이전의 정령신앙의 관습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따이족들이 이 지역의 기성 민족이 되고나자, 이들은 다시금 많은 수의 언어적 분파들로 갈라졌다. 여기에는 따이-라오족(Tai-Lao)도 포함된다. 따이-라오족은 11~12세기에 메콩계곡의 중부지역을 따라 퍼져나갔고, '이싼'(Isan, 이산지방)이라 불리면서 오늘날 태국 북동부 지방을 이루고 있는 코랏 고원(Khōrāt Plateau) 지역으로도 가로질러 나갔다. 그리고 메콩강을 따라 남하하던 이들의 이주는 크메르인들에 의해 참빠삭에서 가로막혔다. 크메르인들은은 참빠삭에 왓 푸(Wat Phū 혹은 Vat Phou)라는 거대한 사원을 건립한 바 있다.
(사진) 크메르제국이 건설했던 '왓푸 사원' 유적지. [☞ 확대사진 바로가기]
라오족은 이제 메콩강을 기준으로 자신들이 거주하는 위치에 따라 더욱 세분화된 그룹으로 갈라졌다. 그들이 바로 라오-롬(Lao Loum 혹은 Lao-Lum: 계곡 평원의 라오족), 라오-텅(Lao-Thoeng 혹은 Lao Theung: 능선의 라오족), 라오-숭(Lao Soung 혹은 Lao-Sūng: 산 정상의 라오족)이다. 라오-숭은 따이어와는 아주 멀게만 친척 관계인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소수부족들을 포함한다. 라오-롬은 최상의 농경지를 갖고 메콩강을 이용한 운송 접근성도 가장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따이-라오족 가운데 가장 부유한 집단이 됐다. 이러한 구분은 라오스 역사 내내 따라다녔고,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많은 라오-텅 및 라오-숭 사람들은 라오-롬이 지배적인 국가에 미약한 충성심만을 갖고 있다.
다양한 초창기 라오족 국가들의 흥망성쇠는 이제 신화적인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역사상 확인되는 최초의 라오족 지도자는 쿤 로(Khun Lô)로서, 아마도 12세기에 따이족이 아닌 민족이 지배하던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을 정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라오스 지역을 흐르는) 메콩강은 유속에 따라 3가지 항해 포인트가 구별되는데, 루앙프라방~위앙짠(Vientiane, 비엔티안) 구간과 위앙짠~사완나켓(Savannakhet, 사반나켓) 구간으로 구분되어, 이들 3곳의 도시들이 라오-룸 만달라들 중 중심지가 됐다.
이러한 패턴은 1253년 몽골 군대가 이 지역을 침입하면서 어지러워졌다. 쿠블라이 칸(Kublai Khan: 1215~1294)이 파견한 군대가 크메르제국을 토벌하기 위해 메콩강을 따라 남진했던 것이다. 몽골이 퇴각하는 와중에서, 시암인들(=태국인)은 새로운 국가인 수코타이 왕국(Sukhothai kingdom: 건국 1238년)을 세웠다. 그리고 나중에 보다 강력한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 건국 1351년)이 출현해 수코타이 왕국의 뒤를 이었다. 오늘날의 태국 북부지방인 치앙마이(Chiang Mai)에 근거지를 둔 란나 왕국(Lanna kingdom: 건국 1292년)의 백성들은 시암인들과 라오족 방계들이 합쳐진 양상을 보였는데, 란나 왕국이 개국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루앙프라방(당시엔 '시앙동 시앙통'[Xiang Dong Xiang Thong]이라 불림)의 따이-라오족 통치자들도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이 국가는 명목상 중국의 몽골인 황제들에게 복속(조공국)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라오족 사회를 주도하는 권력이 됐다.
1271년경 이 국가를 통치한 것은 '프라야'(Phrayā)라고 불리던 왕조이다. 1350년경, 이 왕조의 왕자였던 파 움은 부왕의 왕실에서 분쟁이 발생한 후 [오늘날의 시엠립(Siem Reap)인] 앙코르(Angkor)에 도읍을 두고 있던 크메르제국으로 도망쳤고, 그곳의 공주와 결혼했다. 1353년, 파 움은 (필시 크메르제국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와 시앙동 시앙통을 장악하여 새로운 라오족 왕국을 세웠다. 이 국가는 메콩계곡에서 라오어가 통용되는 지역 전체를 포괄했다. 새로운 왕국의 이름은 '란상'이었고, "백만 마리의 코끼리"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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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란상왕국의 개조 파 움 국왕 상. 위앙짠 국립역사박물관 소장. |
2. 란상 왕국 (1354~1707)
파 움 국왕은 개국 후 10년 동안 모든 라오족을 자신의 권위 하에 복속시키려 했다. 그는 코랏 고원 지역 대부분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베트남 북서부 지역까지 정복했다. 크메르 제국은 파 움을 자국의 제후라고 여겼지만, 파 움은 참빠삭에서도 라오 왕국의 통치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고, 아마도 오늘날 캄보디아 북부지방인 스떵 뜨라잉(Stung Treng)까지도 남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라오스에 상좌부불교를 도입한 사람은 파 움의 아내였다고 알려져 있다. 상좌부불교는 13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온 포교단이 시암에 전한 후, 크메르제국으로도 퍼져나간 것이다. 1368년, 파 움의 아내가 사망했고, 그 직후 중국의 몽골 왕조 원나라(Yuan Dynasty, 大元)가 전복됐다. 이 2가지 사건은 모두 파 움의 권력유지와 핵심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다. 1373년, 궁전 내부의 음모에 의해 파 움은 실각했고, 그의 아들인 오운후완(Oun Huan 혹은 Unheuan)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오운후완은 즉위 후 삼센타이('30만 타이족의 군주'라는 의미)로 개명했다.
란상 왕국은 현대의 언어가 지닌 의미로서의 국가가 아니었다. 시앙동시앙통의 국왕은 그 도시 및 주변지역만 직접 통치하면서 세금을 거뒀다. 그리고 지역적 만달라들의 영주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조세를 걷고 자유롭게 통치했다. 영주들이 국왕에 대해 갖는 의무는 제후가 된다는 것에 동의하고, 왕실의 주요한 의례들에 참석하며, 전쟁이 발생할 경우 국왕을 지원하기 위해 자기 지역의 군사력을 모으는 정도였다. 따라서 란상은 중앙집권적인 왕국이었다기보다는 느슨한 봉건적 연맹체였다. 이러한 특징은 대단한 유연성을 부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국가적 응집력이 국왕의 인격적, 종교적 권위에 의존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1416년 삼센타이 국왕이 죽은 후 약 반세기 동안, 여러 명의 연약한 왕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란상의 위상은 실추됐다. 15세기경, 모든 따이족들은 점차 강성해지는 이웃국가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동쪽으로는 베트남이 있었고, 서쪽에는 버마가 있었다. (이 시기에 시암인들의 국가인 아유타야 왕국은 1431년 크메르제국을 멸망시켰다.) 1478년,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베트남의 위대한 왕 레 탄 똥(Lê Thánh Tông, 黎聖宗: 1442~1497, [재위] 1460~1497)이 란상을 침략하여 루앙프라방을 약탈했다. 그리고 이후 1년 이상 왕국을 점령했다.
이후 란상의 국왕 위슌(Vixun 혹은 Visunarat: [재위] 500~1520)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요한 2가지 사업을 벌였다. 첫째, 왕조의 정통성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왕실 연대기인 <니타 쿤 보롬>(Nithān Khun Bôrum: 쿤 보롬 이야기)의 편찬을 명했다. 둘째, [크메르제국의 수도인] 앙코르로부터 진귀한 금불상인 프라방(Phra Bāng: '성스러운 붓다'라는 의미)을 란상으로 가져왔다. (전통적인 믿음은 이 불상이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주조되어 나중에 크메르제국의 왕들에게 바쳐진 것이라 전해진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은 이 불상이 크메르제국 시대에 크메르제국 내에서 제작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2가지 사업은 란상 왕의 통치권을 강조한 것으로서, 전설적인 쿤 보롬 국왕의 후예로서 선천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과 불교의 핵심적인 개념인 축적된 공덕(puñña)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위슌 왕 이후에는 2명의 강력한 왕들이 출현하여 란상 왕국의 힘과 위상을 강화했으니, 그들이 바로 포띠사랏(재위: 1520~1548) 왕과 그의 아들 세타티랏(Setthathirath 혹은 Xētthāthirāt: 1534~1572, [재위] 1548~1571) 왕이었다. 하지만 1558년 버마의 제1차 연속적인 침입 사건들이 발생했다. 버마는 치앙마이를 약탈했고, 그 결과 란나 왕국이 [란상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란상 왕국의 서부 지역은 폐허가 됐다.
이에 대응하여, 세타티랏 왕은 아유타야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1560년에는 방어가 용이하고 시암의 조력을 받기도 쉬운 위치에 있는 위앙짠으로 천도했다. 그는 이곳에 '호 쁘라 깨우'(Ho Phra Kaeo)라는 새로운 대형 사원을 창건하고, 치앙마이에서 가져온 고대의 숭앙받는 불상 에메랄드 붓다(Emerald Buddha: [역주] 현재는 태국 방콕에 위치)를 안치하여 자신의 치세의 새로운 상징으로 삼았다. 하지만 '프라방' 불상은 도시의 수호신으로서 시앙동시앙통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시앙동시앙통은 오늘날 '루앙프라방'이라 불리는데, "위대한 프라방(성스러운 붓다)"이라는 의미이다.
(지도: WHKMLA) 1570년 무렵의 란상 왕국의 영토. 현재의 라오스 서쪽 국경선인 메콩강을 건너 태국 북동부지방(이싼)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569년, 버마인들이 다시금 침략을 해왔다. 그들은 [시암 지역의] 아유타야를 약탈한 후, 란상을 직접 노출시켰다. 1570년 버마는 위앙짠을 잠시 동안 점령했다. 하지만 몇 개월 후 세타티랏 왕은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그의 위상은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세타티랏은 이듬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그 과정에서 왕 자신도 거의 죽을 뻔 했으며, 그의 군대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 재난은 란상 왕국이 버마의 공격을 방어할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고, 이후 60년간 란상은 버마의 조공국으로 전락하여 때로는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다. 이 가간 중에는 란상의 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몇 차례 있었고, 라오스는 시암이나 버마에 병합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637년, 란상의 위대한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수리냐웡사(Surinyavongsā 혹은 Sourigna Vongsa: [재위] 1637~1694)가 왕위를 천명하고 독립 왕국을 재건했다. 그는 아유타야 왕국의 [위대한 왕인] 나라이(Narai: 1633~1688, [재위] 1656~1688) 왕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들의 동맹관계는 여러 해 동안 버마와 베트남의 침략을 막기에 충분했다. 수리냐웡사 국왕의 치세에서 란상은 점차 번영해나갔고, 위앙짠에는 많은 수의 사찰들과 궁궐들이 세워졌다(현존하는 것은 거의 없다). 위앙짠은 불교학의 중심지가 됐고, 시암과 캄보디아에서 온 승려들이 이곳의 여러 와트(wat: 승원, 불교학교)들에서 공부했다.
라오스가 유럽인들과 최초로 접촉한 것도 수리냐웡사 국왕의 치세였다. 1641년경, 네델란드 상인 게리트 반 부이스토프(Gerritt van Wuysthoff)가 프놈펜에서 배를 타고 메콩강을 거슬러올라 란상에 도착했다. 반 부이스토프가 전한 란상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새롭게 발견되는 민족들에 가장 먼저 접근하고자 노력하던 제수이트(Jesuits: 예수회[Society of Jesus]) 선교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반 부이스토프가 프놈펜으로 돌아긴지 얼마 안 있어, 최초의 선교사인 지오바니-마리아 레리아(Giovanni-Maria Leria)가 란상에 도착하여 6년간 머물렀다. 그는 라오스의 언어를 배우고, 종교와 관습도 공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란상 왕국의 이후 역사는 대부분 레리아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란상에서 기독교 개종자를 별로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외부세계에 라오스의 왕국을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란상 왕국의 멸망에는 2가지 조건이 결합됐다. 먼저 수리냐웡사 국왕에겐 외아들 밖에 없었지만, 심각한 간통을 저질러 처형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1694년 수리냐웡사 왕이 사망하자 후계자가 없는 상태가 됐다. 이내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됐고, 곧 이웃국가들을 끌어들였다. 둘째는 란상 왕국이 고립돼 있었다는 점이다. 시암과 베트남은 란상보다는 훨씬 일찍 유럽인들과 접촉했고, 그들을 통해 선진적인 군사무기들을 획득하고 있었다. 반면, 란상은 내륙에 고립되어 유럽과 직접적인 교역을 할 수가 없었다.
란상은 분열되고 지도자도 없는 상태에서, 총기와 유럽인 군사고문들을 보유한 시암을 결코 대적할 수 없었다. 베트남의 뜨린 깐(Trịnh Căn, 鄭 根: 1633~1709, [재위] 1682~1709) 왕이 란상에 군대를 파견하자, 아유타야 왕국의 페트라차(Petratcha: 1632~1703, [재위] 1688~1703) 왕도 파병을 했다. 이후 10년간의 전쟁과 무정부 상태를 거쳐, 1707년 란상은 3개의 부분으로 분할됐다. 그것은 시암의 제후국들인 루앙프라방, 위앙짠, 참빠삭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위앙짠과 참빠삭은 시암과 베트남 모두에 조공을 했다. 이 점은 훗날 중요한 사실로 대두한다.
오늘날 라오스의 공식적인 역사기록학은 란상 왕국을 하로스 민족국가로 묘사하며, 현대 라오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는 상당한 단서를 달아야만 한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시암인, 라오인, 그리고 여따 따이어 계열 언어사용 민족들 사이에 참다운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는 거의 동일했고, 사용하는 언어들 역시 밀접한 친연관계를 갖고 있었다. 란상의 왕들은 라오-롬(계곡 평원의 라오족) 출신이었지만, 그들이 통치하는 백성들은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 여기에는 시암인(태국 민족), 크메르인, 다양한 라오-텅 및 라오-숭 사람들과 여타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 부족들이 포함된다.
라오-롬 인들은 고산의 라오족을 동포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보다 하급의 계층으로 여겨, 그들을 '카'(khā: 노예, 종)나 '매오'(maeo: 야만인)라고 불렀다. 왕권의 근거는 왕조와 종교에 있었지 민족이나 인종적 기반에 있지 않았다. 필요할 경우 란상의 왕들은 민첩하게 시암, 베트남, 버마, 혹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시암인들이 민족적 우월성 같은 일부 유럽적 관념들을 수용하여 라오스의 위앙짠을 준-식민지처럼 통치한 것은 란상의 멸망 이후의 일이다. 라오스에서 민족주의 의식이 나타난 것도 시암인들의 준-식민적 통치 이후의 일이다.
3. 시암과 베트남의 지배
란상이 멸망한 후 유럽인들의 라오스에 관한 관심도 쇠퇴했고, 18세기에 라오스를 방문한 유럽인들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라오스 지역 국가들의 내부 상황에 관해 알려진 것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라오스 지역은 그리 오래 방치되지 않았다. 1763년, 버마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침공을 시작했다. 버마는 라오스 전역을 정복했고, 1767년에는 시암의 아유타야 왕국도 붕괴했다. 따이족들은 다시 한번 버마의 지배 하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암인들은 거의 그 즉시로 수복을 했다.
아유타야 왕국의 화교(중국계 태국인 ) 장군이었던 딱신(Taksin: 1734~1782, [재위] 1767~1782)은 버마를 격퇴한 후 오늘날의 방콕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톤부리 시대), 자신이 따이족들의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딱신은 1774년 북쪽에 있던 버마인들을 공격했고, 1776년에는 치앙마이를 함락시켜 란나왕국을 영구적으로 시암에 통일시켰다. 이 전쟁에서 딱신의 신하들 중 최고위 장수는 '짜오프라야 짜끄리'(Chaophraya Chakri) 칭호를 제수받은 텅 두웡(Thong Duang: 1737~1809, 후일의 라마1세, [재위] 1782~1809)이었다. 1778년 텅 두웡은 다시금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의 정벌군은 위앙짠을 함락시키고, 라오스를 시암의 지배 하로 편입시켰다.
시암의 군대는 라오스의 해방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위앙짠을 철저하게 약탈했고, 이 나라 최고의 보물이었던 '에메랄드 붓다'를 빼앗아 방콕으로 가져갔다. 에메랄드 붓다는 현재도 방콕에 안치되어 있다. 위앙짠의 왕은 도망쳤지만,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이후 시암의 꼭두각시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라오스의 여러 명문가들은 강제로 시암 지역으로 끌려가 그곳에 정착해야만 했다.
동부 산악지대에 있던 라오스의 몇몇 만달라들은 여전히 후에(Hué)에 도읍을 두고 있던 베트남의 조공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참빠삭 역시 시암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1792년, 시암은 루앙프라방도 함락시켰지만, 그들은 이 고대 도시를 위앙짠보다는 부드럽게 다뤘다. 약탈은 하지 않았고, 도시의 수호신인 '프라방' 불상도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루앙프라방의 국왕 역시 시암에 복속한 후 왕위를 그대로 유지토록 했다.
1782년, 짜오프라야 짜끄리는 딱신의 왕위를 찬탈하여 시암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태국에서 유지되고 있는 '짜끄리 왕조'(Chakri dynasty)를 개국하여 라마 1세 국왕(King Rama I)이 되었다. 서양의 영향력이 증대해오자, 짜끄리 왕조의 국왕들은 시암을 전통적인 만달라 체제에서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린 느리고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라오스의 왕국들은 처음에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방콕에 조공을 바치고 종교적 복종을 하거나, 아니면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지도: WHKMLA) 1782년 무렵의 라오스 지역 왕국들.
1795~1828년 사이에 라오스는 안남(Annam: 베트남)의 제후국이 됐다. 1802년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 1802~1945)가 위앙짠을 공격해 황폐화시켰고, 북부 라오스를 장악했다.
1804년 위앙짠에서는 아누웡(Chao Anouvong: 1767~1829, [재위] 1805~1828) 국왕이 즉위하여, 베트남의 은밀한 지원 하에 왕국의 국력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시암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라오스 부활의 상징으로서 왓 시사껫(Wat Si Saket)이라는 훌륭한 사찰을 창건했다. 1823년 무렵이 되자, 아누웡 왕은 이제 자신의 힘을 이웃국가들로도 팽창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위앙짠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손쉽게 획득했으며, 그의 아들 역시 이미 참빠삭의 통치자가 되어 있던 상태였다. (아누웡이 여러 전투들에서 시암에 조력하자 짜끄리 왕조의 라마 2세(Rama II: 1767~1824, [재위] 1809~1824) 왕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아누웡의 아들을 참빠삭의 제후로 봉했다.)
아누웡의 라오스 군대는 메콩강을 건너 시암의 북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당시의 아누웡은 시암을 정복하던가 아니면 최소한 시암이 두번 다시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방콕을 철저히 파괴시키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라오스의 이 군벌은 시암의 주요 도시 코랏(Korat: 나콘 라차시마)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코랏의 백성들은 아누웡의 라오스 군대에 반란을 일으켜 단기간에 독립을 선언했다. 이누웡의 행운은 여기까지가 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앙프라방의 왕이 시암의 편에 섰고, 베트남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시암의 새로운 국왕 라마 3세(Rama III: 1787~1851, [재위] 1824~1851)가 군대를 동원해 반격을 가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1827년, 위앙짠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라오스 군대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시암은 일부 불교 사찰들만 제외하고는 이 도시 전체를 불태웠고, 이 도시의 거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듬해 아누웡도 생포되었고, 그는 방콕에서 옥사했다. 위앙짠 왕국은 완전하게 폐지됐고, 시암의 도로 편입됐다. 이러한 일은 따이족 역사에서 새로운 전개였고, 유럽의 관념들이 점차로 강화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지도: WHKMLA) 1828년 무렵의 라오스 지역.
위앙짠 지역이 시암의 영토(노란색)로 변했다.
19세기 중반은 라오스 역사에서 최저점을 찍는 시기였다. 1848년, 라오스는 다시 한번 베트남의 조공국으로 복귀했다. 루앙프라방의 왕은 시암은 물론이고 중국과 베트남에도 조공하면서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오스의 나머지 지역은 시암의 직접 통치를 받았는데, 시암이 근대 국갇로서의 토대를 더욱 발전시켜나가자, 이 지역에 대한 통치 역시 보다 세밀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변해갔다. 강제이주로 인해 라오스 지역에는 인구가 감소했고, 도시들은 중국과 베트남에서 온 이민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만일 아누웡의 반란이 진정한 의미의 라오스 민족주의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면, 1860년대 무렵의 라오족은 독자적인 민족적 존재감을 곧 상실할 것처럼 보였고, 시암 왕국 내의 또 다른 국지적 방계 민족으로 전락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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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번읽어보니,,
동남아쪽의 옛역사와 영토구분이 한눈에 쫘악 들어옵니다,,
감사드립니다,
ㅎㅎ
그것도 꼬르 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시고
주변국들에 대한 사전 지식도 충분히 공부하셔서 그런 것이죠..
아마도 동남아 역사 처음 읽는 분들은 무척 헷갈리실 겁니다.. (^.^)
요즘 꽃보다 청춘으로 인해서 라오스가 많이 홍보 되고 있는데
이런 역사적인 부분을 알고 관광을 한다면 좀더 도움이 많이 될것 같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