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백년의 역사속 골목의 숨결]
개항 도시 목포의 빛과 그림자로 점철된 쌍곡선
30년대 도시 성장과 함께 윤락촌 급신장
도색노예 425명 종사…집장촌까지 번성
한국전쟁 피난민 러시안산 주변 모여들어
도시의 발전은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에게 빛과 그림자를 던져준다. 일본인에 의해 개항을 맞은 근대도시 목포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했던 곳 금화동. 서산동 러시아 산 주변 골목은 한국전쟁과 관련이 깊다. 피난민들이 목포에 몰려들면서 수협 공판장 인근에 집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외국인 거류민단촌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일본인들이 이곳을 윤락촌으로 조성했다. 조선인 마을 온금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목포에 유곽이 생긴 것은 1905년도의 일이다. 목포항이 1897년 10월에 개항했으니 개항 후 8년만이다. 유곽은 당시 죽동 지역, 흥선사(興禪寺)와 통조사(統照寺) 사이 저지대에 생겼다. 그 후 주거지가 확장되면서 1914년 현재의 금화동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곳이 바로 앵정(櫻町), 사쿠라마치다.
목포역에서 북항으로 가는 길, 목포 수산업협동조합 건너편인 금화동, 유달동 지역은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로서 그 뒷산에는 벚나무가 무성했다. 그래서 금화동이라는 이름보다는 사쿠라마치로 불렀다.
1930년대 금화동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곽으론 주길정(住吉亭), 현해루(玄海樓), 만직지루(萬直志樓), 삼교루(三橋樓) 등이 있었고,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곽으로는 일출정(日出亭), 명월루(明月樓), 영춘정(永春亭) 등이 있었다. 1936년 목포에는 요릿집이 12개소, 음식점이 336개소, 카페가 20개소, 청루가 7개소였는데, 이들 업소에는 수용된 도색노예는 모두 425명이었다. 종류별로 보면 예기(藝妓) 49명 내 조선인 21명, 여급 90명 내 조선인 31명, 창기(娼妓) 82명 내 조선인 48명, 작부(酌婦) 204명 내 조선인 202명으로 총 425명중 조선인인 302명이었다. 당시 한 잡지는 ‘목포는 도색노예의 도시로 문화의 쓰레기통이란 인상을 준다“고 전한다.
1935년 9월 22일자 ‘남국(南國)의 항구도시, 목포의 쌍곡선’이라는 제하의 『매일신보』기사는 목포의 비약적인 발전에 윤락사업이 번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상업도시 목포의 발전의 반영적 일면상(一面相)인 숫자적 통계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거니와 늘어나는 것은 음식점과 음주청년과 ‘거리의 신사’뿐이라고 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목포의 발전은 조선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즉 ‘목포의 발전=조선인의 희생’이란 등식 위에서 근대도시 목포가 성장했다. 그런데도 목포의 상업적 발전은 유흥의 발전으로 그 수준이 평가될 만큼 퇴행적 분위기로 흘렀다.
이런 유흥의 퇴행적 분위가 조성되는 데는 목포의 경기가 초호황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목포의 발전 그것은 목포의 빛이었다. 하지만 항구도시 목포의 퇴행성과 타락적 향락은 목포의 그림자로 남아 오히려 그 빛을 가리고 말았다.
당시 목포 사회상은 향락을 위해 주색, 기박(棋博), 마작이 발전했다고 전한다. 주색의 정도가 지나쳐 도색노예 도시란 오명에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먹더리계, 처녀계 등이 유행했다. 이런 모임에는 주부에게까지 번져 일선 학교에선 모임을 자제하고 가정교육에 힘써주라는 경고문까지 광고를 낼 정도였다.<근대도시 목포의 역산 공간 문화>
금화동 유곽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조금씩 그 위용을 잃어갔다. 당시 일본인이 떠난 유곽들은 이웃 조선인들이 차지했거나 일본 시모노세키 등지에서 살던 조선들이 귀국 뒤 수용되면서 가정집으로 면모해갔다. 일부 일본인들은 곧 한국에 돌아올 것이라며 유곽에서 일하던 한국인등에게 일시 위임해놓고 떠나기도 했다.
지금도 금화동 12-5호를 비롯해서 금화동 지역에슨 2층짜리 옛 유곽 4채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남아 있다. 광복 이후 60년이 지나면서 모양은 조금씩 변했지만 옛 유곽의 모습을 그대로 유추할 수는 있다. 금화동 12-5호의 유곽의 경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ㅁ자 형태 한에는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로, 세로 각각 4m 정도인데 나무 난간과 함께 유리벽으로 막아놓았다고 한다. 이 유곽의 경우 광복 후 호남전업사에서 사택으로 쓸 요양으로 구입을 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청진 등에서 배를 타고 피난 온 피난민들의 대피소가 됐다.<홍성철작 유과의 역사>
당시 각 1가국에 방 1개씩을 썼는데, 24가구가 머물렀을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크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이곳에 살던 4살짜리 꼬마가 물에 빠져 죽자 어른들이 나서서 연못을 메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방 2개를 만들어서 다른 피난민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김경자(52)씨는 ‘당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면서 ‘하지만 집이 얼마나 튼튼한지 앞으로도 몇 십 년은 족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봄마다 벚꽃이 활짝 피었던 유곽 뒷산 즉 러시안산도 피란민들이 점령하면서 벚나무를 뿌리 뽑고 그 자리에 판자촌을 세우기 시작했다. 서모(80)씨는 ‘당시 이북에서 온 피란민뿐 아니라 시모세키에서 쫓겨난 재일조선인들도 유곽에 집단 거주했다’고 회상했다. 서 씨는 ‘해방 직후 바로 유곽이 없어 진 것이 아니라 몇 년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유곽이 번성하다가 전쟁 즈음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전했다.
일제시대 목포에는 히빠리마치라는 하급 유곽도 존재했다. 조선민들은 옛 하급 유곽이 있던 현재의 만호동 항동시장 일대를 지금도 히빠리마치, 히빠리골목이라 부른다. 힛빠리(引つ張り)라는 말은 일본어로 ‘잡아당긴다’는 말로, 호객행위를 뜻한다. 해방 이후 사꾸라마치의 여성들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1970년대까지 히빠리골목은 좌우 200m정도로 길게 성매매 업소들이 늘어섰다.
지금은 민중약국과 만호쌀가게에서 해운모텔 인근까지 길게 이어진 이 골목은 1970년 초 성매매 업소가 삼학도로 집단 이주하면서 사라졌다. 지금도 히빠리골목에는 신안군보건소가 위치해 있다. 당시 성매매 여성들의 질병을 관리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셈이다.
삼학도에서 삼학사 가는 길에 위치함 난영공원 입구에 있던 성매매 업소들은 히빠리라는 일본어 대신에 영어로 ‘옐로우 하우스’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거리가 멀어 손님들의 왕래가 뜸해진데다 1990년대 들어 목포시가 삼학도 복원공사에 나서면서 이마저도 헐리게 됐다.
2006년 말 목포시에는 뚜렷한 성매매 집결지는 없다. 그렇다고 이 지역이 성매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지역 주민들은 목포역 인근 여인숙촌과 함께 티켓다방 여성들이 기존 앵정 유곽과 히빠리 골목 여성들의 역할을 대체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곳 러시아산 주변은 목포 유곽의 역사와 그 괘를 같이한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이 모여들고 살았다. 이런 모습은 러시아산을 오르는 골목길에 그대로 나타나있다.
*러시아산=금화동 뒷산을 통칭 러시아 산이라 하였다. 목포가 개항되어 각국거루지가 획정되자 러시아가 영사관 기지로 금화동 일대를 사들였다. 여기에 영사관을 짓고 석탄저장고를 설치하여 러시아 군함의 기항지로 만들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나, 러·일전쟁의 패망으로 일반에게 불하하였다. 이로 인하여 러시안산이라 불리어 졌고 일본인들은 아침gork 가장 먼저 비치는 곳이라 하여 旭(아침해 욱)山이라 하기도 하였다.
사진설명
목포사쿠라마치
당초 목포 중동에 자리 잡았던 유곽은 1914년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사쿠라마치(櫻町, 현 금화동)로 옮겼다. 벚나무가 올창했던 당시 사쿠라마치에는 일본인들의 노래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945년 일본 패망 이루 유곽은 폐쇄됐지만 금화동에는 지금도 유곽 건물 서너 채가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