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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 총론 (2) : 후기 왕조 시대
History of Vietnam
4. 후기 왕조 시대 Late dynastic epoch (존속기간: 939~1945, 식민통치 시작: 1887년)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10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1천년의 기간 중에, 베트남 사회의 기본적 본성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국왕은 정치적 권위의 궁극적 원천이었고, 사법과 법률의 최종적 제공자였으며,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종교적 제의의 관장자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행정을 담당하는 이들은 유교 경전들을 철저하게 공부한 관료들이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베트남은 전쟁기나 왕권 갈등의 시기만 뺀다면 매우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통치됐고, 행정 시스템 역시 필시 동남아시아의 그 어느 국가보다도 훨씬 진보된 상태였을 것이다.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도 발생하지 않았고, 귀족들에게 부여된 칭호 역시 순전히 명예였을 뿐 세습도 허용되지 않았다. 때로는 토지개혁을 단행해 대규모 토지 소유를 붕괴시킴으로써, 권세 있는 대지주의 출현을 방지하기도 했다. 관료 계급 외에는 어떠한 종교나 사제 계급도 출현하지 않았다. 변화가 별로 없었던 절대주의는 안정적이고 잘 조직화된 사회를 보장했지만, 그것이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혁신에 대한 저항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개혁자들은 영감의 원천으로서 오로지 과거를 살필 뿐이었다.
문자 해독력은 상류층의 조건으로서 존속했다. 처음에는 [고전 한문에 사용되던] 한자(漢字)가 기록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13세기 경에 이르면 쯔놈(Chữ Nôm, 字喃/𡨸喃)이라 불리는 한자의 파생 문자가 생겨나, 베트남 고유의 단어들도 표기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쯔놈'은 시가, 문학, 그리고 의술 같은 실용적 문헌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됐고, 국가나 관청의 모든 공문서들은 고전 한문(Classical Chinese, 古文)으로 기록됐다.
이 시기에는 약간의 광업이나 어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이 농업에 종사했다. 국가는 경제 발전이나 교역을 장려하거나 증진시키지 않았다.(주20)
4.1. 응오 왕조, 딘 왕조, 전례 왕조 (939~1009)
* 이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응오 왕조'(Ngô dynasty), '딘 왕조'(Đinh dynasty), '전례 왕조'(Early Lê dynasty)이다. 그 밖의 추가적인 정보는 '12 사군의 난'(12 Warlords Rebellion) 항목을 참조하라. |
[중국 세력으로부터의 독립 시대를 연] 응오 꾸옌(Ngô Quyền, 吳權: 897~944)은 짧은 통치기(939~944)만 거친 후 사망했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투쟁을 초래했다. 그 결과 베트남 역사 최초의 주요한 내전인 12 사군의 난(Loạn Thập Nhị Sứ Quân, 亂12使君)이 발생했다. 이 전란은 944년에 시작돼, 딘보린(Đinh Bộ Lĩnh, 丁部領: 924~979)의 세력이 다른 군벌들(12 장군들)을 평정하고 국가를 통일하는 968년까지 지속됐다.
딘보린은 딘 왕조(Đinh dynasty, Nhà Đinh, 丁朝: [재위] 968~979)를 개창하고, 스스로를 '딘띠엔황'(Đinh Tiên Hoàng, 丁先皇)이라 선언했으며, 이전에 사용되던 국호인 '띵하이꾸언'(Tĩnh Hải quân, 靜海軍)을 '다이꼬비엣'(Đại Cồ Việt, 大瞿越: 직역-'위대한 비엣의 땅')으로 바꾼 후, 그 도읍을 오늘날의 닌빈 성(Ninh Bình Province, 寧平省)에 해당하는 호아르(Hoa Lư, 華閭)에 두었다. 딘띠엔황 황제는 혼돈의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형법을 도입했다. 그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다섯 가문들에서 다섯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황후' 칭호를 주어, 동맹세력의 강화를 꾀했다.
979년, 딘띠엔황 황제와 딘 리엔(Đinh Liễn) 황태자가 함께 암살당하면서, 홀로 남은 딘떼엔황의 6세 된 아들 딘 또안(Đinh Toàn, 丁璿: 974~1001)이 황위에 올랐다. 이에 중국의 송(Song dynasty, 宋朝: 960~1279) 나라는 이러한 정국의 이점을 노려 '다이꼬비엣'을 침략했다. 국가의 독립성이 걸린 중차대한 시기를 맞이하자, [선대에서 병권을 위임받고, 섭정을 맡고 있던] '십도장군'(Thập Đạo Tướng Quân, 十道將軍) 레 호안(Lê Hoàn, 黎桓: 941~1005, [재위] 980~1005)이 왕위를 찬탈해 전레 왕조(Early Lê dynasty, Nhà Tiền Lê, 家前黎: 980~1009)를 건국했다.
레 호안은 유능한 전략가였고, 막강한 송나라 군대와 정면승부를 평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속임수를 써서 송의 군대를 '찌랑 협곡'(Chi Lăng Pass)으로 유인했고, 매복했던 병력을 이용해 송의 지휘관을 살해한 후, 981년 새로운 국가에 대한 외세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송은 군대를 철수시켰고, 레 호안은 자신의 시호를 '따이한 황제'(Đại Hành Hoàng Đế, 大行皇帝)라고 칭했다. 따이한 황제는 남쪽의 참파(Champa: 192~1832) 왕국을 향한 팽창정책을 시작한 최초의 베트남 군주이기도 했다.
1005년 따이한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왕권 다툼이 벌어졌다. 레 롱 딘(Lê Long Đĩnh, 黎龍鋌: 986~1009, [재위] 1005~1009)이 최종적인 승자가 됐지만,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폭군이 됐다. 그는 자신의 오락을 위해 죄수들에게 가학적인 처벌을 고안하기도 했고, 변태적인 성적 만족을 탐닉하기도 했다. 레롱딘은 불과 24세에 단명하는데, 말년에는 병이 너무 깊어 신하들을 접견할 때조차 누워 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4.2. 리 왕조, 쩐 왕조, 호 왕조 (1009~1407)
* 이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리 왕조'(Lý dynasty), '쩐 왕조'(Trần dynasty), '호 왕조'(Hồ dynasty)이다. |
1009년 레 롱 딘 황제가 죽자 [군권을 장악한] '궁궐 수비대 지휘관'(左親衛殿前指揮使)이었던 리 꽁 우온(Lý Công Uẩn, 이공온[李公蘊]: 974~1028)이 대신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오른 후, 리 왕조[후리 왕조](Lý dynasty, 李朝: 1009~1225)를 개창했다.(주21) 리 왕조의 개국은 이어진 위대한 왕조들과 더불어 베트남 역사에서 또 하나의 황금기를 연 사건이었다.
리 꽁 우온이 황위에 오르는 과정은 베트남 역사에서는 이례적인 과정에 속한다. 그는 수도를 지키는 고위급 장군이었고, 레 호안 황제의 죽음 이후 몇년간 이어진 혼란한 정국 속에서 권력 장악의 모든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이용하기보다는 의무감에 입각한 행동만 보였다. 대신들은 약간의 논의를 거쳐 합의에 도달했고, 리 꽁 우온을 황제로 "추대"(=선출)했다.(주22)
리 왕조는 전략적 비전을 제시하면서 베트남이란 국가의 구체적 토대를 닦았다고 평가된다. 기존의 도읍인 호아르는 산들과 강들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지만, 리 꽁 우온은 탕롱(Thăng Long, 昇龍: 오늘날의 하노이)으로 천도했다.(주23) 리 꽁 우온은 군사적 측면에서 방어적 태도를 보인 이전의 군주들과는 달리, 국가 생존의 열쇠가 될 강력한 경제를 꿈꿨던 것이다.
(지도) 서기 1010년 경의 '다이 베엣'(대월)의 영토(노란색). 연두색 부분은 참파 왕국이고, 회색 부분은 크메르 제국이다.
3대 황제 리 탕 통(Lý Thánh Tông, 李聖宗: 1023~1072, [재위] 1054~1072)은 국호를 '다이비엣'(Đại Việt, 大越)이라 개칭했다.(주24) 뒤를 이은 리 왕조의 황제들은 뛰어난 위업들을 이룩했다. 그들은 쌀농사 지역에 관개수로 시스템을 건설했고, 공자(孔子)의 사당인 '문묘'(Văn Miếu, 文廟)에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자감(Quốc Tử Giám, 國子監)을 설치했다.(주25) 또한 유능한 평민들이 공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매 3년마다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했고, 새로운 과세제도, 죄수들에 대한 인간적 처우방식도 수립했다.
왕실의 여성들이 세금 징수의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리 왕조에서는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리 왕조는 당시의 3대 사상적 줄기였던 불교, 유교, 도교에 대해 다원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긴 했지만, 특히 불교(Buddhism)를 육성했다.
리 왕조는 중국의 송 나라와 2차례 주요한 전쟁을 벌였고, 남쪽의 이웃국가인 참파 왕국 영토도 약간 정복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전쟁은 1075년 중국 영토 내에서 진행된 전투이다. 리 왕조는 송 나라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리 트엉 끼엣(Lý Thường Kiệt, 李常傑[이상걸]: 1019~1105)과 텅 단(Tông Đản)을 지휘부로 하는 10만명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선제공격을 가했다. '다이 비엣' 군대는 송 나라가 오늘날의 중국 광동성(Guangdong, 广东省, 廣東)과 광시 장족자치구(Guangxi autonomous region, 广西壮族自治区) 지역인 흠주(欽州), 염주(廉州), 옹주(邕州)에 설치한 군사시설 3곳을 파괴하고, 송 나라 군 10만명을 죽였다. 이에 복수하기 위해 송은 이듬해(1076) 다이 비엣을 침공했지만, '느응옛 강 전투'(Battle of Như Nguyệt River)에서 저지당했다. 느응옛 강은 오늘날 까우 강(Cầu river)으로 알려진 곳으로서, 현재의 수도 하노이에서 약 40 km 떨어진 박닌 성(Bắc Ninh, 北寧省)에 위치한다. 이 전투에서 양국 군대 모두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리 왕조가 휴전을 제안하자 송의 황제가 그 제안을 수용했다.
리 왕조가 송의 침략으로 인해 남쪽으로의 정벌을 위한 국력을 빼앗기면서, 당시 강성했던 크메르 제국(Khmer Empire)과 참파 왕국은 이러한 국제정세로부터 이익을 취했다. 크메르제국과 참파왕국은 동맹을 맺어 1128년과 1132년에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수십년 동안 여러 침략들이 이어졌다.(주26)
리 왕조의 말기에 오자, 외척이자 권신이었던 쩐 투 도(Trần Thủ Độ, 陳守度 [진수도]: 1194~1264)가 당시 국왕 혜종(Lý Huệ Tông, 李惠宗: 1194~1226, [재위] 1211~1224)을 강제로 불교 승려로 출가시킨 후, 혜종의 어린 딸 소황(Lý Chiêu Hoàng, 李昭皇: 1218~1278, [재위] 1224~1225)을 [베트남 역사 유일의] 여왕으로 즉위시켰다. 쩐 투 도는 이후 소황을 자신의 조카 쩐 까인(Trần Cảnh, 陳煚 [진경]: 1218~1277)과 결혼시킨 후, 소황이 황위를 쩐 까인에게 양위토록 만들었다. 쩐 까인이 바로 쩐 태종(Trần Thái Tông, 陳太宗: [재위] 1226~1258)이며, 이로써 쩐 왕조(Trần dynasty, Nhà Trần, 陳朝: 1225~1400)가 시작됐다.
쩐 투 도는 리 왕조의 왕족들을 악랄하게 숙청(멸족)시켰다. 그러자 리 왕조의 일부 왕자들이 바다로 도망쳐 한반도에까지 이르렀는데, 여기에는 [한국 화산 이씨(花山 李氏)의 실질적 시조인] 이용상(Lý Long Tường, 李龍祥: 1174~ ?)도 포함된다.
리 왕조의 후손들에 대한 숙청이 끝난 후, 쩐 왕조의 황제 대부분은 리 왕조의 왕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쩐 왕조 시대에 이뤄진 두드러진 업적에는 촌락 단위를 기반으로 하는 호적제도의 구축, 레 반 흐우(Lê Văn Hưu, 黎文休: 1230~1322)가 30권 분량으로 '다이 비엣'의 역사를 기술한 <대월사기>(Đại Việt sử ký, 大越史記), 베트남 고유어 표기를 위한 '놈 문자'(=쯔놈)의 위상이 향상된 일 등이 포함된다. 쩐 왕조는 새로운 황제들을 위한 독특한 수련 제도도 채택했다. 즉, 황세자가 18세가 되면 선왕이 황세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만, 선왕은 '태상황'(Thái Thượng Hoàng, 太上皇)이란 직책을 갖고 신임 황제의 멘토 역할을 담당했다. 참파-크메르 연합군이 지속적으로 베트남을 침입했지만, 쩐 왕조는 그들과 협상하여 여러 차례 평화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쩐 왕조기에는 몽골 제국(Mongol Empire: 1206~1368)이 여러 차례 침략해왔다. 몽케 칸(Möngke Khan: 1209~1259, [재위] 1251~1259)과 쿠블라이 칸(Kublai Khan, 元世祖: 1215~1294, [재위] 1260~1294)이 보낸 몽골 군대는 1258년, 1285년, 1287~1288년에 베트남을 침공했다. '다이 비엣'은 쿠블라이 칸 치세기의 원(Yuan dynasty, 元朝: 1271~1368) 나라 군대의 공격을 모두 격퇴했다. 3차례에 걸친 몽골 군대의 병력 수는 30만명~50만명에 달했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다이 비엣'이 몽골 군대에 승리할 수 있었던 핵심 전략은 개활지나 도시 지역에서 몽골 군의 전력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었고, 쩐 왕실은 도성과 여타 도시들을 모두 포기하고 피신했다. 그러자 몽골 군대는 결정적인 약점을 지닌 곳에서 '다이 비엣' 군대와 마주쳐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츠엉드엉(Chương Dương), 함뜨(Hàm Tử), 반키엡(Vạn Kiếp) 같은 습지들과, 반돈 강(Vân Đồn Giang)이나 박당 강(Bạch Đằng Giang, 白藤江) 같은 강들이었다. 또한 몽골 군대는 아열대 기후의 풍토병과 쩐 군대의 습격으로 인한 병참 물자 부족에도 시달렸다. 원-쩐 전쟁은 퇴각하던 원나라 함대가 1288년의 박당 강 전투에서 몰살당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 전투 승리의 지휘관은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陳興道 [진흥도]: 1228~1300)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쩐꾸옥뚜언(Trần Quốc Tuấn, 陳國峻 [진국준])이었다. 하지만 이후 쩐 왕조와 참파 왕국은 보다 재앙적인 침략을 면하기 위해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쩐 왕조의 황제들이 남쪽에 위치한 참파 왕국을 상대로 많은 전쟁들을 일으키면서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남진 정책을 이어간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 남진 정책은 '남띠엔'(Nam tiến, 南進: 남쪽으로의 팽창)이라 불리는데, 10세기에 중국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이 비엣'이 참파 왕국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참파 왕국은 1312년에 베트남의 조공국(=제후국)이 됐지만 10년 뒤에 다시금 독립국 지위를 회복했다. 그리고 참파의 국왕 체봉아(Chế Bồng Nga, [참파어] 뽀 비나수오[Po Binasuor]: ? ~1390, [재위] 1360~1390)가 이끄는 군대는 전투에서 쩐 왕조의 유종(Trần Dụ Tông, 陳裕宗: 1336~1369, [재위] 1341~1369) 황제를 죽였고, 1377년 및 1383년에는 다이 비엣의 수도인 탕롱을 포위해 공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쩐 왕조는 후옌쩐 공주(Huyền Trân, 玄珍公主 [현진공주]: 1289~1330년 이후 어느날)를 참파의 왕 자야 싱하와르만 3세(Chế Mân, Jaya Simhavarman III: [재위] 1288~1307)과 정략결혼(1307년)을 시키는 평화적 방식을 통해, 오늘날의 후에(Huế) 근처에 위치한 지방 2곳의 영유권을 획득(1306년)하기도 했다.
(사진) 쩐 왕조의 황제들이 전쟁에 나갈 때 사용하던 군기(軍旗).
참파 및 몽골과의 전쟁으로 베트남의 국력은 소진되고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자 대신 중 한명인 호뀌리(Hồ Quý Ly, 胡季犛 [호계리]: 1336~1407)가 쩐 왕조를 전복시켰다. 호뀌리는 쩐 왕조의 마지막 황제 소제(Trần Thiếu Đế, 陳少帝: 1396~ ?, [재위] 1398~1400)를 폐위시키고 1400년에 황제로 즉위하여(재위 1400~1401), 단명하게 될 호 왕조(Hồ dynasty, 胡朝: 1400~1407)를 개창했다. 그는 국호를 '다이우'(Đại Ngu, 大虞)로 바꾸고, 수도도 탕롱에서 오늘날 타인호아 성(Thanh Hóa, 淸化省)인 따이도(Tây Đô, 西都)로 천도했다. 탕롱은 '동도'(Đông Đô, 東都)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호뀌리는 국가를 분열 및 훗날 명(Ming dynasty, 明朝: 1368~1644)에 나라를 잃게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받긴 하지만, 그의 치세에는 실제로 진보적이고 야심에 찬 개혁들이 많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과거시험에 수학을 추가한 것, 유교 철학에 대한 비판의 개방, 동전 대신 지폐의 사용, 대규모 전함의 건조와 대포 제작에 대한 투자, 토지개혁 등이 그것이다. 그는 1401년에 자신의 아들 호한뜨엉(Hồ Hán Thương, 胡漢蒼 [호한창]: ? ~ 1407)에게 양위를 하고, 쩐 왕조의 왕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태상황' 지위에 올랐다.
(주21) Ngô Sĩ Liên(吳士連),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대월사기전서, 大越史記全書), (베트남어 역본, Nội các quan bản ed.), Hanoi: Cultural Publishing House, 2009, p.154.
(주22) 앞의 책, p.155.
(주23) 앞의 책, p.160.
(주24) 앞의 책, p.193.
(주25) 앞의 책, p.197.
(주26) Cœdès, George (1966). The Making of South East Asia (illustrated, reprint e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84. |
4.3. 명의 지배기 및 후레 왕조 (1407~1527)
* 이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중국의 제4차 베트남 지배'(Fourth Chinese domination of Vietnam), '후쩐 왕조'(Later Trần dynasty), '후레 왕조'(Later Lê dynasty)이다. |
1407년, 명나라 군대는 쩐 왕조를 복원시킨다는 명분으로 '다이우'를 침공(명-호 전쟁)하여 호뀌리와 호한뜨엉 부자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호 왕조는 7년간의 짧은 시대를 마감했다. 명의 점령군은 황위를 이어받을 쩐 왕조의 후예가 없다고 선언한 후, '다이우'를 명나라에 병합시켰다. 왕위 쟁탈전과 참파와의 전쟁으로 쇠약해져 있던 베트남은 금새 항복하고 말았다. 명의 베트남 정복은 가혹했다. 베트남은 중국의 한 지방으로서 직접 병합됐고, 문화적 동화이라는 오래된 정책 역시 강압적으로 다시 부과됐다. 그리고 베트남은 무자비하게 착취당했다.
그러나 이 무렵의 베트남 민족주의는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중국의 베트남 동화 시도들은 오직 추가적인 저항만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명이 베트남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거의 즉각적으로 쩐 왕조의 왕족 출신 2명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들이 시작됐다(이 시기를 '후쩐 왕조'라고 부름). 먼저 쩐응오이(Trần Ngỗi, 陳頠 [진위])는 1406년 스스로를 '간정제'(Giản Định Đế, 簡定帝)라 칭하고 대-명나라 저항운동을 시작해 약간의 진전을 보았지만, 휘하 장수 2명을 의심해서 살해한 후부터 진영 내부에 긴장이 조성됐고, 결국 1410년에 명의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됐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쩐뀌코앙(Trần Quý Khoáng, 陳季擴)을 중심으로 한 반란도 진행됐지만, 결국 1413년에 진압되고 말았다.
1418년, 부농인 레러이(Lê Lợi, 黎利 [여리]: 1384 혹은 1385~1433)가 명나라에 대적하여 자신의 근거지였던 람선(Lam Sơn, 藍山: 현재의 타인호아)에서 람선의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초창기의 많은 반격들을 극복하고, 대학자이자 전략가였던 응우옌 짜이(Nguyễn Trãi, 阮廌 [완채]: 1380~1442)의 조언을 받는 가운데, 마침내 승기를 잡았다. 레러이는 북쪽으로 진군해 명의 점령군이 도읍으로 삼았던 동꾸안(Đông Quan: 현재의 하노이)을 포위했다. 명의 황제는 원군을 보냈지만, 레러이의 군대는 찌랑(Chi Lăng)의 협곡에서 매복작전을 통해 명의 지휘 장수 리우산(刘山, 베트남어-Liễu Thăng)을 죽였다. 동꾸안에 있던 명나라 병력은 항복했다. 람선의 반군은 30만명에 달하는 명나라 군사들을 살해했다.(주27)
1428년 레러이는 왕위에 올랐고, 여태조(Lê Thái Tổ, 黎太祖)로서 후레 왕조(Nhà Hậu Lê, 後黎朝: 1428~1788)의 개창자가 됐다. 레러이는 국호를 다시금 '다이 비엣'으로 되돌렸고, 도읍도 다시금 탕롱(현재의 하노이)으로 재천도했다.
후레 왕조는 전후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리 왕조와 쩐 왕조의 왕들이 불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후레 왕조의 왕들은 유학을 공부했다. 강력한 친-유교 정책에 힘입어 포괄적인 사법체계인 <홍덕법전>(Hồng Đức code, 洪德法典)도 도입했지만, 여성의 권리 같은 보다 진보적인 일부 규정들도 포함했다. 후레 왕조의 예술과 건축 분야는 리 왕조나 쩐 왕조 시대에 비해 중국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다. 후레 왕조는 국토의 지도를 제작했고, 응오시리엔(Ngô Sĩ Liên, 吳士連)에게 레러이 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이 비엣' 역사를 저술하도록 허락하여 1479년 <대월사기전서>(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大越史記全書)가 출판되도록 했다. [베트남 역사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레 탄 똥(Lê Thánh Tông, 黎聖宗 [여성종]: 1442~1497, [재위] 1460~1497) 황제는 병원들을 열었고, 전염병이 도는 지역들에는 관리들을 파견해 의약품을 나눠주도록 했다.
(사진) <대월사기전서>(초판 1479년)의 1697년 발행본 표지.
과밀한 인구와 토지의 부족은 베트남인들이 남쪽을 향해 팽창하도록 만들었다. 1471년, 레 탄 똥 황제가 이끄는 후레 왕조의 군대는 참파 왕국을 침략하여 수도 위자야(Vijaya)를 점령했다. 짬족(Cham people, 참족)이 세운 몇몇 소국들이 이후로도 몇 세기 동안 존속하긴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강성한 국가로서의 참파 왕국은 사실상 끝나고 만다. 후레의 참파 공략은 짬족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지는 일을 촉진시켰다. 참파 왕국의 대부분 파괴되고 짬족들 역시 망명을 떠나거나 탄압을 받게 되자, 베트남인들(=낀족)은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지방에 대한 식민화를 별다른 저항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주해온] 낀족(Kinh people, 비엣족[người Việt]) 정착민들이 수에서 압도하면서 참파의 영토를 베트남 국가로 통합해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짬족 인구의 다수는 베트남에 남았고, 이들은 현재의 베트남에서 가장 중요한 소수민족 중 하나가 됐다.
베트남 군대는 메콩 삼각주(Mekong Delta) 지역으로도 쳐들어갔다. 국력이 기울어가던 크메르제국은 더 이상 이곳을 방어하지 못했다. 1600년에 건설된 도시 후에(Huế)는 한때 참파의 도성이었던 인드라뿌라(Indrapura)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다. 1479년, 레 탄 똥 황제는 라오스도 침공하여, 그 도성이었던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을 점령했다. 그는 이후 더욱 서진하여 오늘날의 미얀마(=버마) 지역인 이라와디 강(Irrawaddy River, 에야와디 강) 지역까지 갔다가 철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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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베트남 역사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레탄똥(성종) 황제의 공식 영정. 타인호아에 위치한 태묘(太廟, Imperial Ancestral Temple)에 봉안돼 있다. |
4.4. 막 왕조 및 복원된 후레 왕조 (1527~1788)
4.4.1. 개 요
* 이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후레 왕조'(Later Lê dynasty), '막 왕조'(Mạc dynasty), '베트남의 남북조 시대'(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of Vietnam)이다. |
1527년, 막 당 중(Mạc Đăng Dung, 莫登庸 [막등용]: 1483~1541)이라는 장군이 후레 왕조를 전복시켰다. 막 당 중은 [내전 끝에] 후레 왕조의 소종(Lê Chiêu Tông, 黎昭宗: 1506~1526, [재위] 1516~1524)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막 왕조(nhà Mạc, 莫朝: 1527~1592)를 열었다. 그는 이후 2년 동안 많은 반란들을 제압한 후, 쩐 왕조의 관행에 따라 자신의 아들 막 당 도안(Mạc Đăng Doanh, 莫登瀛 [막득영]: ? ~1540, [재위] 1529~1540)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의 직위로 올라갔다.
한편, 후레 왕조의 신하였던 응우옌 낌(Nguyễn Kim, 阮淦 [완감]: 1476~1545)이 막 왕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레 짠 똥(Lê Trang Tông, 黎莊宗 [여장종]: 1514년 출생, [재위] 1533~1548) 왕이 타인호아 지방에 후레 왕실을 복원하는 일을 도왔다. 그리하여 북조(北朝: 막 왕조)와 남조(南朝: 복원된 후레 왕조) 사이의 내전이 시작됐다. 응우옌 낌 진영은 타인호아 이남의 '다이 비엣' 남부를 통제했고, 막 왕조는 통킹(Tonkin)과 하노이를 포함하는 '다이 비엣' 북부를 통제했다.(주28)
1545년 응우옌 낌이 [막 왕조에서 항복해온 장수에게] 암살당하자, 남조의 군권은 응우옌 낌의 사위인 찐 끼엠(Trịnh Kiểm, 鄭檢 [정검]: 1503~1570)의 수중에 들어갔다.
(지도) 1560년 무렵 북조(막 왕조)와 남조(후레-찐 왕조)의 영토.
1558년 응우옌 낌의 아들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 阮潢 [완황]: 1525~1613)은 매형인 찐 끼엠이 권력을 위해 자신의 형을 죽인 것처럼 자신도 죽일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그는 찐 끼엠에게 오늘날 꽝빈 성(Quảng Bình, 廣平省)과 빈딘 성(Bình Định, 平定省) 주변에 해당하는 최남단 지역의 지방관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응우옌 호앙은 미친 척 했고, 찐 끼엠은 호앙이 무법지대인 남부 국경지대로 가면 혼란 속에서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호앙은 [남부지방에 주둔하던 막 왕조의 병력을 격퇴한 후] 남부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했고, 찐 끼엠과 그 아들 찐 뚱(Trịnh Tùng, 鄭松 [정송]: 1550~1623)은 막 왕조와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응우옌 호앙은 남조의 전쟁을 돕기 위해 자금과 병력을 북으로 올려보냈지만, 점차 더 많은 독립성을 확보해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영지에서 거둬들인 경제적 부를 이용해 그곳을 국제교역의 거점으로 바꿔놓았다.
1592년, 찐 뚱의 군대가 하노이를 함락시키고 막 마우 헙(Mạc Mậu Hợp, 莫茂洽 [막무습]: 1560~1592) 왕을 처형하면서, 북조(막 왕조)와 남조(후레-찐 왕조) 사이의 내전은 끝났다. 살아남은 막 왕조의 왕족들은 오늘날의 까오방 성(Cao Bằng, 高平省)인 북부 산악지대로 들어갔고, 찐 딱(Trịnh Tạc, 鄭柞 [정작]: 1606~1682, [통치] 1654~1682)이 이 지역을 최종적으로 정복하는 1677년까지 그곳을 계속해서 통치했다. 응우옌 낌이 복원시킨 후레 왕조의 왕들은 그저 명목상의 수장이었다. 막 왕조가 몰락한 후, 베트남 북부의 모든 실질적 권력은 찐 정권(Trịnh lords, 鄭王 [정왕]: 1545~1787)의 수중에 있었다. 한편, 중국의 명 나라는 베트남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길 꺼렸지만, 막 당 중이 보내온 조공물을 받아들였다.
4.4.2. 찐 정권과 응우옌 정권
* 이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찐 정권'(Trịnh lords), '응우옌 정권'(Nguyễn lords), '찐-응우옌 전쟁'(Trịnh–Nguyễn War)이다. 또한 '응우옌 정권의 화포'(Artillery of the Nguyễn lords) 항목도 참조하라. |
1600년, 응우옌 호앙은 '군주'(Lord: 공식-왕[王, Vương], 대중적으론 '주'[主, Chúa])임을 선언하면서, 더 이상 찐 정권을 돕기 위한 자금과 병력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한 수도도 오늘날의 후에,즉 푸쑤언(Phú Xuân, 富春 [부춘])으로 천도했다. 호앙은 1613년에 죽었고, 베트남 남부지방을 55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후계자는 여섯째 아들인 응우옌 푹 응우옌(Nguyễn Phúc Nguyên, 阮福源 [완복원]: 1563~1635, [통치] 1613~1635)이었다. 푹 응우옌 역시 찐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레 왕조의 왕에 대한 충성은 여전히 다짐하고 있었다.
(지도) 1650년경의 베트남.
- 분홍: 막 왕조.
- 주황: 부(Vu) 정권
- 회색: 찐 정권
- 노랑: 응우옌 정권
- 초록: 참파 왕국
한편, 찐 정권의 통치자 찐 뚱이 1623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찐 짱(Trịnh Tráng, 鄭梉 [정장]: 1577~1654, [통치] 1623~1654)이 후계자가 됐다. 찐 짱은 응우옌 푹 응우옌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명령했지만, 2번이나 거부당했다. 1627년, 찐 짱은 1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출병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찐 정권은 많은 인구와 더 큰 규모의 경제, 그리고 병력수 면에서 보다 강력했지만, 응우옌 정권(Chúa Nguyễn, 阮王 [완왕]: 1558~1777)을 압도하진 못했다. 응우옌 정권은 방어를 위해 2곳의 석성을 쌓아두었고, 포르투갈의 대포들도 구입해두고 있었다.
찐-응우옌 전쟁은 1627년에 시작돼 1672년까지 지속됐다. 찐 정권의 군대는 최소 7번의 공세를 가했지만 푸쑤언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했다. 1651년부터 잠시 동안은 응우옌 정권이 공세에 나섰고, 찐 정권의 영토 일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찐 정권의 새로운 지도자 찐 딱(Trịnh Tạc, 鄭柞 [정작]: 1606~1682, [통치] 1654~1682)은 1655년 응우옌 정권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찐 딱은 1672년 최후의 공세가 끝난 후 응우옌 푹 떤(Nguyễn Phúc Tần, 阮福瀕: 1620~1687, [통치] 1648~1687)과 휴전에 합의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실질적인 2개의 국가로 양분됐다.
4.4.3. 유럽인들의 도래와 베트남의 남진 정책
* 이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베트남의 기독교'(Christianity in Vietnam), '남띠엔'(Nam tiến) 항목도 참조하라. |
서구세계가 베트남에 알려지거나 베트남이 서구세계에 알려진 것은 로마 제국(Roman Empire)의 상인들이 도래한 서기 166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주29) 1292년에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베트남에 왔었고, 1516년 포르투갈인들이 도래한 이래 16세기에는 여타 유럽인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베트남에 들어왔다.(주29)
프랑스인으로 예수회(Jesuit, 제수이트) 사제였던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앞서서 만들어놓았던 기초를 바탕으로, [오늘날 베트남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하는 로마자 알파벳 문자체계] 꾸옥응으(Quốc Ngữ, 國語: 혹은 '쯔꾸옥응으'[Chữ Quốc Ngữ, 𡨸國語])를 더욱 발전시켰고, 그것을 1651년에 출판한 <안남어-라틴어 사전>(Dictionarium Annamiticum Lusitanum et Latinum)에 적용시켰다.(주30)
유럽인들은 베트남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는 잠시 동안 허용됐다. (베트남의 기독교 신자는 1700년 무렵 전체 인구의 10분의1 수준까지 증가할 정도로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관료들이 기독교가 유교적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선교는 금지당했다. [특히 19세기에 가톨릭 반란군들이 난을 일으킨 이후 공식적으로 금지당한다.] 베트남 권력층이 기독교를 반-유교적이라고 본 이유는 기독교가 조상 숭배를 우상숭배라면서 비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사회를 좀먹는 것이란 인식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과 기독교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태도도 더욱 경직돼 갔다.
(지도) 베트남의 남진(남띠엔) 정책에 따른 베트남 영토의 변천사. 1069~1757년 사이. 각 시기별로 획득된 영토의 색깔이 다르게 표시돼 있고, 회색 부분은 1834년까지 조공국(=제후국)으로 남아 있던 지역이다. 1834년의 시암(태국)-베트남 전쟁 직후에는 오늘날의 캄보디아 영토도 베트남과 태국이 양분했었다.
1627~1775년 사이의 베트남은 2개의 강력한 가문이 양분해 통치했다. 응우옌 정권은 남쪽을 다스렸고, 찐 정권은 북쪽을 다스렸다.
'찐-응우옌 전쟁'(1627~1673)은 유럽의 무역 상인들에게 양편에 무기와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포르투갈인들은 남쪽의 응우옌 정권을 지원했고, 네델란드인들은 북쪽의 찐 정권을 도왔다.
전쟁이 끝난 후 약 100년 동안 두 진영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고, 이 시기에 양편 모두 상당한 업적을 이뤘다.
찐 정권은 국가예산을 다루는 정부 조직의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화폐를 발행했으며, 도량형을 십진법으로 통일했다. 또한 인쇄소들을 세워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인쇄물의 양을 감소시켰고, 군사학교를 개교하고, 역사서들을 편찬했다.
응우옌 정권은 이 시기에 남진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참파 왕국의 영토들을 정복해나갔다. 낀족(=비엣족) 정착민들은 "수 첸라"(Water Chenla, 水真臘)라 불리던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으로 이주했다. '수 첸라'는 과거 '크메르 제국'의 영토 중 메콩 삼각주 하류 지역을 가리킨다. '크메르 제국'은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 사이에 내부의 권력투쟁 및 시암(Siam: 태국)의 침략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졌다. 응우옌의 통치자들은 오늘날의 호찌밍시(Ho Chi Minh City, 호찌민시) 주변 및 메콩 삼각주 지역을 획득하기 위해 정략결혼, 외교적 압력, 정치 군사적 혜택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했다. 과거 '크메르 제국'의 영토(=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응우옌 정권의 군대는 때때로 시암의 군대와 충돌하기도 했다.
(주29) "Brief History of Vietnam".
(주30) Davidson, Jeremy H. C. S.; H. L. Shorto (1991). Austroasiatic Languages: Essays in Honour of H. L. Shorto. p.95. |
4.5. 떠이선 왕조 및 응우옌 왕조 (1778~1945)
* 이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떠이선 왕조'(Tây Sơn dynasty),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 항목도 참조하라. |
1771년, 응우옌 정권의 통제 하에 있던 꾸이년(Quy Nhơn, 歸仁 [귀인])에서, [지방관의 전횡에 분노하여] 떠이선 일가(Nhà Tây Sơn, 家西山)가 의병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의 지도자들은 응우옌 냑(Nguyễn Nhạc, 阮岳 [완악]: ? ~1793),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 阮惠 [완혜]: 1753~1792), 응우옌 르(Nguyễn Lữ, 阮侶 [완려]: 1754~1787)라는 3형제였다. 이들은 '응우옌'(阮)이란 성씨를 사용했지만, 기존의 '응우옌 정권' 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이었다.
1776년, 떠이선 형제들은 '응우옌 정권'의 영토 전체를 장악했고, 기존의 왕족 거의 모두를 살해했다. 살아남은 왕족 중 [가장 고위급이었던] 응우옌 푹 아인(Nguyễn Phúc Ánh, 阮福暎 [완복영]: 1762~1820)은 [남부지방에서 계속 저항을 하다] 시암(짜끄리 왕조)으로 도망친 후, 시암의 국왕 라마 1세(Rama I: 1737~1809, [재위] 1782~1809)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어냈다. 응우옌 푹 아인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시암의 병력 5만명을 이끌고 되돌아왔지만, [베트남 역사 최대의 전승 중 하나로 기록되는] 락검-쏘이아뭇 전투(Battle of Rạch Gầm–Xoài Mút: 1785. 1. 20)에서 응우옌 후에가 지휘하는 떠이선의 군대에 패해 거의 모든 병력이 몰살당했다(생존자는 2천~3천명으로 전해짐). 응우옌 푹 아인은 그 직후 간신히 베트남을 탈출했지만, [이후 계속해서 베트남 남부지방에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1786년, 응우옌 후에가 지휘하는 떠이선의 군대는 '찐 정권'의 군주 찐 카이(Trịnh Khải, 鄭楷 [정해]: 1763~1786)와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내부 분열에 시달리던 '찐 정권'의 군대는 싸우려고도 하지 않고 와해됐고, 찐 카이는 소수의 농민들에게 사로잡히자 자살했다. 떠이선의 군대는 불과 두 달도 되기 전에 '찐 정권'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비록 명목상의 황제이긴 했지만] 후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 소통제(Lê Chiêu Thống, 黎昭統: 1765~1793, [재위] 1786~1789)는 청 나라(Qing dynasty, 清朝: 1644~1912)로 도망쳐 도움을 요청했다. 청의 황제 건륭제(Qianlong Emperor, 乾隆帝: 1711~1799, [재위] 1735~1796)는 소통제가 황위를 되찾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20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을 지원했다. 그러자 응우옌 후에는 스스로를 '꽝쭝'(Quang Trung, 光中: [재위] 1788~1792) 황제라 선언하고, 전통설날인 뗏(Tết: 구정) 기간 중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불과 7일이라는 놀랄만큼 짧은 기간에 청의 군대를 격퇴했다.
꽝쭝제는 재위기간 중 여러 가지 개혁을 구상했지만, 1792년 남쪽으로 진군하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향년 40세였다. 그가 재위하던 시기의 '다이 비엣'은 실질적으로 3개의 정치 권력으로 분할돼 있었다. 떠이선의 맏형인 응우옌 냑은 '타이득제'(泰德帝: [재위] 1778~1793)가 되어 '떠이선 왕조'의 수도 꾸이년에 머물며 국가의 중부지방을 통치했다. 그리고 꽝쭝제(응우옌 후에)는 푸쑤언(=후에)에 도읍을 두고 북부지방을 통치했다. 그리고 남부에서는 ['락검-쏘이아뭇 전투'에서 패한 바 있는] 응우옌 푹 아인이 이 지역에서 채용한 많은 수의 유능한 인재들의 조력을 받아, 1788년 [오늘날의 호찌밍시 지역인] 지아딘(Gia Định, 嘉定)을 점령하고 자신의 군대를 위한 강력한 근거지를 확보했다.
꽝쭝제의 사후 '떠이선 왕조'는 남아 있던 두 형제 상호간 및 꽝쭝제의 젖먹이 아들에게 충성하는 이들까지 서로 싸우면서 불안정한 상태가 됐다. 1799년, 응우옌 푹 아인은 함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떠이선 왕조'의 근거지 꾸이년을 함락시켰다. 1801년에는 푸쑤언도 함락시켰다. 그리고 1802년에는 탕롱(=현 하노이)을 함락시키고, 꽝쭝제의 어린 아들 응우옌 꽝 또안(Nguyễn Quang Toản, 阮光纘 [완광찬]: 1792~1802)을 '떠이선 왕조'의 여러 장수들과 관료들과 더불어 처형함으로써, 마침내 이 내전의 최종적인 승리자가 됐다.
응우옌 푹 아인은 황위에 올라 스스로를 '지아롱'(Gia Long, 嘉隆 [가륭]: 1802~1820) 황제로 칭했다. '지아'(Gia, 嘉)는 호찌밍시의 옛이름인 '지아딘'에서 온 것이고, '롱'(Long, 隆)은 하노이의 옛이름인 '탕롱'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지아롱'이란 말은 베트남의 통일을 의미한다. 지아롱 황제가 개창한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 Nhà Nguyễn, 阮朝: 1802~1945)는 바오 다이(Bảo Đại, 保大: 1913~1997, [재위] 1926~1945) 황제가 퇴위할 때까지 존속한다.
중국은 여러 세기 동안 '다이 비엣'을 '안남'(Annam, 安南)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지아롱 황제는 청의 가경제(Chia-ch'ing Emperor, 嘉慶帝: 1760~1820, [재위] 1796~1820)에게 자국의 국명을 '안남' 대신 '남비엣'(Nam Việt, 南越 [남월])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청의 황제는 지아롱 황제가 요청한 국명이 과거 찌에우 다(Triệu Đà, 조타[Zhao Tuo, 趙佗]: [생몰] BC 240~137, [재위] BC 203~137)가 세웠던 고대 왕국 남비엣(Nam Việt, Nanyue, 南越)과 혼동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글자의 순서를 바꿔 '비엣남'(Việt Nam, 越南, 베트남)이라 했다. 따라서 '비엣남'(베트남)이란 명칭은 지아롱 황제 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역사학자들은 베트남인들이 자국을 '비엣남'이라고 지칭한 고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베트남 역사에서 이 '분열의 시대'(Period of Division)는 많은 비극들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여줬고, 그 내용은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어 베트남 운문 문학의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응우옌 주(Nguyễn Du, 阮攸 [완유]: 1766~1820)가 1820년에 발표하여 '쭈언 끼에우'(Truyện Kiều, 傳翹 [전교]: 끼에우 이야기)란 제목으로 더욱 유명해진 서사시 <도안 쯔엉 떤 타인>(Đoạn Trường Tân Thanh, 斷腸新聲 [단장신성]: 끊어진 마음의 새로운 절규), 당 쩐 꼰(Đặng Trần Côn, 鄧陳琨 [등진곤]: 1710~1745)의 한시 <친 푸 응엄>(Chinh Phụ Ngâm, 征婦吟 [정부음]: 병사 아내의 노래) 및 그것을 여류시인 도안 티 디엠(Đoàn Thị Điểm, 段氏點 [단씨점]: 1705~1748)이 쯔놈으로 번역한 판본, "쯔놈 문학의 여왕"으로 불리는 호 쑤언 흐엉(Hồ Xuân Hương, 胡春香 [호춘향]: 1772~1822)이 지은 풍자적이고 에로틱한 시문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응우옌 푹 아인(=지아롱 황제)이 '떠이선 왕조'를 상대로 싸우고 있던 1784년, 프랑스 출신으로 로마 가톨릭(=천주교)의 고위 성직자였던 피뇨 드 베엔(Pigneaux de Behaine: 1741~1799)은 응우옌 푹 아인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피뇨는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 1774~1791)의 궁정에서 <베르사이유 소(小) 조약>(Little Treaty of Versailles: 1787년)이 성립되도록 중재 활동을 벌였다. 이 협정은 프랑스가 군사원조를 하는 대신 베트남은 프랑스에 양허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1789~1799)으로 인해 피뇨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이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의 폰디체리(Pondichéry)로 건너갔다. 그는 이곳에서 전함 2척, 인도 군 병력 1개 연대, 그리고 소수의 의용군을 모은 후, 1788년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피뇨가 모집한 의용군 중 한명인 장-마리 다요(Jean-Marie Dayot: 1759~1809)는 [프랑스 해군 장교 출신이었고,] 응우옌 푹 아인의 해군을 유럽식으로 재조직하여, 1792년 '떠이선 왕조'의 도읍인 꾸이년 공격에 참가했다. 몇년 후, 응우옌 푹 아인의 군대는 사이공(Saigon: 현 호찌밍시)을 점령했고, 피뇨는 1799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피뇨가 데려왔던 또 다른 의용군 올리비에 드 퓌마넬(Olivier de Puymanel)은 [축성 전문가였는데,] 훗날 사이공 중심부에 '지아딘 항구'를 건설한다.
응우옌 푹 아인(=지아롱 황제)은 1802년 '응우옌 왕조'를 개창한 후, 가톨릭에 관용적 태도를 보였으며, 일부 유럽인들을 궁정 고문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보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이었고, 서구화에 저항했다. 레 반 코이(Lê Văn Khôi, 黎文傀 [여문괴]: ? ~1834)가 일으킨 레반코이의 난(Lê Văn Khôi revolt: 1833~1835) 같은 사건들이 발생한 후부터, 지아롱 황제의 후계자들인 민 망(Minh Mạng, 明命 [명망제]: 1791~1841, [재위] 1820~1841), 티에우 찌(Thiệu Trị, 紹治 [소치제]: 1807~1847, [재위] 1841~1847), 뜨 득(Tự Đức, 嗣德帝 [사덕제]: 1829~1883, [재위] 1847~1883)는 모두 가톨릭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서양인들을 위협으로 간주하여 '쇄국'(closed door) 정책을 펼쳤다. '레반코이의 난' 당시, 프랑스 선교사인 조셉 마르샹(Joseph Marchand: 1803~1835)은 베트남인 신자들에게 가톨릭 교도 황제를 세우기 위해 이 반란에 가담하라고 독려했다.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베트남인 및 외국인 가톨릭 교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 시기에는 서양과의 교역도 감소했다. '왕우옌 왕조'에 대한 반란이나 소요사태는 상당히 빈번하여, 연대기들은 그런 사건들을 수백 건이나 기록했다. 이런 움직임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할 명분으로 이용됐다.
초기 '응우옌 왕조'는 그 이전에 진행되던 많은 건설사업들에 종사했다. 여기에는 도로 건설, 운하 굴착, 법전 편찬, 과거제 실시, 병자를 위한 보호시설 후원, 지도 및 역사서 편찬,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영향력 증대 등이 포함된다.
* 이하 부분의 주된 항목들은 '코친차이나 침공'(Cochinchina Campaign: 1858~1862), '지아딘 성'(Citadel of Saigon), '쯔엉 딘'(Trương Định, 張定), '판 딘 풍'(Phan Đình Phùng, 潘廷逢). '응우옌 쯩 쯕'(Nguyễn Trung Trực, 阮忠直), '판 탄 지안'(Phan Thanh Giản, 潘淸簡), '통킹 침공'(Tonkin Campaign: 1883~1886)이다. |
1858년,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1873, [재위] 1852~1870)의 명령을 받아, 리고 드 주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 1807~1873)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다낭(Đà Nẵng)의 항구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습도와 열대성 풍토병에 고전하면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드 주누이 제독은 남쪽으로 항해한 후, 1859년 방어가 약한 지아딘(현 호찌밍시)을 함락시켰다. 1859~1867년 사이에 프랑스 군대는 계속해서 세력을 팽창하여, 메콩 삼각주에 위치한 6개 성 전부를 통제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묶어 하나의 식민지로 만든 후 코친차이나(Cochinchina)라고 불렀다.
몇년 후, 프랑스 군대는 그들이 통킹(Tonkin)이라 부르던 베트남 북부지방에 상륙한 후, 1873년과 1882년 두 차례나 하노이(Hà Nội, 河內)를 함락시켰다.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 관리들이 고용한 흑기군(Black Flag Army, 黑旗軍)이란 [중국 남부 출신] 무장세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1873)와 앙리 리비에르(Henri Rivière: 1827~1883) 등 주둔군의 최고사령관 2명이 매복으로 살해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통킹에 대한 장악력은 가까스로 유지했다.
프랑스는 통킹 침공(Tonkin Campaign, 통킹 작전: 1883~1886) 이후 베트남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됐다. 1887년, 프랑스는 '안남'(Trung Kỳ [中圻]: 베트남 중부), '통킹'(Bắc Kỳ [北圻]: 베트남 북부), '코친차이나'(Nam Kỳ [南圻: 베트남 남부] + 캄보디아 + 1893년에 라오스 추가)를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 1887~1954)를 출범시켰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내에서, '코친차이나'에는 식민지 지위가 부여됐고, 아직도 '응우옌 왕조'가 통치하고 있던 '안남'에는 보호령(protectorate) 지위가 부여됐고, '통킹'에는 베트남인 관리들이 운영하는 지방 정부를 구성하고 프랑스인 지방장관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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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883년 7월 19일의 '남딘 전투'(Combat of Nam Định)를 기록한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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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마디로 말해..
드라마틱하네요.. ^^
귀중한 자료 즐겁게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캄보디아 앙코르왓에서 가이드로 활동하다가 벳남에 온지 한달반정도 됩니다.
알고싶던 자료였는데..정성스럽게 번역 된 자료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고갑니다.
아.. 베트남으로 가셨군요..
항상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
한마디로 벳남의 역사는 그냥 가만히 있는 역사가 아니군요
시원찮으면 그냥 뒤집어버리는,,,
강인한 국민성이 오래전부터 내려온것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자주 못 찾아뵈어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