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 해탈한 인생
이제 우리는 먼저 제1편 소요유(逍遙遊)를 연구하기 시작하겠습니다. 소요(逍遙)라는 두 글자는 서문정(西門町: 대북시 지명/역주)의 그 목욕하는 소요지(逍遙池)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소요지도 장자 내편의 의미를 좀 취했습니다. 중국문화에서 ‘소요’라는 두 글자는 장자가 먼저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늘 말하기를, “사람은 소요 좀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소요는 항상 수도자의 이상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소요할 것인지는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이 해탈을 추구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많은 수도자들이 소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갈수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봅니다. 저 수도하고 정좌하는 사람들은 채식도 하고 계율도 지키고, 이렇게 저렇게 하는데 그런 것을 도라고 부를까요? 살펴보면 그는 조금도 소요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들도 조금도 해탈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장자의 제목을 보고서 특별히 주의해야합니다.
장자 제1편은 소요유를 제시합니다. ‘소요유’에서 는 소요는 소요고 ‘유’는 유입니다. ‘소요’를 해야 ‘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가(佛家)의 관념을 차용하면 인생을 해탈할 수 있어야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얻을 수 있으며, 감히 인생의 경계 속에서 유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해탈을 얻지 못하면 그 인생은 처음부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떻게 소요할 수 있을까요? 철학 관념에서 말하면 무엇이 인생일까요? 우리들은 답을 하나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고통의 누적을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여 없앨까요? 바로 소요의 해탈을 얻어야 합니다. 즉, 장자가 제시한 소요유라는 것입니다. 소요유 전편의 내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생은 고견(高見)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이 말하는 견지(見地) ․ 견해(見解) ․ 안목(眼目) ․ 사상(思想)입니다. 어떤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고 견해가 없으면서 어떤 사업에 성공하고 싶어 하거나 하나의 아름다운 인생을 완성하려 한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뒷날 중국의 선종도 무엇보다 먼저 구견(具見)을 중시했습니다. 먼저 도를 보아야[見道] 도를 닦을 수 있습니다. 만약 도를 닦는 사람이 도를 보지 못했다면 무슨 도를 닦겠습니까? 우리가 금덩어리를 보아야 방법을 생각해서 금덩어리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금조차도 보지 못했고 그저 허튼 생각만 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를 닦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도를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인생을 이해해야만이 비로소 어떻게 올바른 사람이 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먼저 구견을 제시합니다.
구견(具見)과 비유
그렇다면 무슨 견(見)을 갖추어야 할까요? 소요유에서는 우리들에게 해탈의 견을 갖추라고 일러줍니다. 인생이 물질세계에, 현실의 환경에 갇혀 괴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 물질세계에 속박된다면, 현실 환경에 갇혀 괴로워하다면, 그런 인생의 견해는 이미 수준 미달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인생은 고통의 누적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보통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약 높고 먼 견지를 갖출 수 있다면, 만약 물질세계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다면, 만약 인생의 고통스런 환경에 곤혹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람은 초월할 수 있으며 승화(昇華)할 수 있습니다.
이 소요유편에는 두 가지 큰 중점이 있습니다. 십중팔구의 곳의 비유는 우리들에게 인생과 진정한 수양 방법을 일러줍니다. 장자의 비유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도리는 사람의 감정처럼 어떤 언어문자로도 표현해 낼 길이 없습니다. 저는 늘 말하기를, 사람과 사람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은 단지 언어문자가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정감을 표현해 낼 길이 없을 때에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울면 다른 사람이 비로소 이 사람은 정이 많고 상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가 울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람의 정감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하하 크게 웃어서 기절할 정도로 웃으면, 다른 사람은 그가 기뻐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도리도 바로 인생철학입니다.
그밖에 또 가장 고명한 방법이 있는데,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에둘러서 비유로써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세계에서 가장 고명한 몇 사람의 대 종교가들, 예컨대 석가모니불이나 예수 같은 분은 모두 비유를 잘 썼습니다. 장자도 늘 비유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여러 곳에서 비유를 쓰지 않으면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몹시 예쁘다고 얘기하는데 어느 정도로 예쁠까요? 양귀비보다 훨씬 예쁘다고 합니다. 양귀비가 도대체 얼마나 예쁜지 우리들도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양귀비를 가지고 비유하여 그 예쁜 정도를 설명합니다. 이렇게 하면 곁에 사람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장자의 소요유에는 두 가지 중점이 있는데 많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 중점은 구견입니다. 두 번째 중점은 물화(物化)입니다.
물화(物化) 피화(被化) 자화(自化)
물화(物化)는 중국문화 속에서 하나의 대 제목입니다. 도가에서는 우주속의 모든 생명, 일체(一切) 만물은 모두 물(物)과 물(物) 사이의 상호변화라고 봅니다. 예컨대 우리 사람들도 물화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로부터 다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변화해 나왔습니다. 또 우리들 생명이 살아있는 것은 소고기나 흰쌀밥이나 빵이나 채소나 무 등에 의지하여 변화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들의 배설물은 또 비료로 변하고, 비료는 또 만물로 변화합니다. 일체 만물은 상호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또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변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물화입니다. 그러므로 도가의 관념 속에서 천지우주 전체는 시간과 공간이 형성하고 변화하는 하나의 거대한 보일러입니다. 우리들은 이 변화하는 보일러 속에서 피화(被化)―변화를 당하고, 변화를 받는[受化] 하나의 작은 분자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단지 우주의 천변만화[萬化] 가운데 떨어진 아주 작고 작은 변화 당하는 물(物)에 불과할 뿐입니다. 크게는 우주, 작게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를 최초에 그리고 영원히, 변화시킬 수 있는 작용[能化作用]을 일으키는 그것은 누구일까요? 변화시킬 수 있는 그자, 그것을 붙들어 쥐면 도(道)를 얻고, 소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시종 여전히 변화를 당합니다. 우리들은 변화시키는 주인이 되지 못하며, 조화(造化)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조화의 주인을 틀어쥐어야 물외(物外)에 초연할 수 있습니다. 즉, 만물변화의 범위 밖으로 뛰어 넘은 것입니다.
하지만 장자는 또 우리들에게 일러주기를, 사람도 만물의 하나이며 사람은 자화(自化)―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도를 얻기 이전에는 변화 당하지만, 만약 우리가 구견, 즉 도를 본다면 우리들은 스스로 변화할 수 있어서, 이 유한한 생명을 무한한 생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 우리들의 유한한 기능[功能]을 무한한 기능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화의 도리는 우리 천천히 다시 토론하겠습니다. 제2편 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말해줍니다. 사람은 자기를 하나의 초인(超人)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초인으로 변할까요? 초인은 가장 평범함 속에서 변화합니다. 이것을 해내어야 진정으로 소요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원칙을 틀어쥐고 토론합시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 선생님들, 여러 학우님들은 장자를 연구해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 원문을 보겠습니다. 장자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글이 많이 있으며 대단히 높은 문학경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