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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한단고기], [삼성기], [태백일사] 등에서는 배달국의 건국에 관하여 한웅께서 지상에 홍익인간하여 광명 세계를 열고자 천부인(天符印) 3개와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일반적으로 백두산으로 봄)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한다. 한운은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 하였고,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교화하고 인간 세상을 크게 도왔으니 사람들이 한웅천왕이라고 불렸다.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山海經)] [회남자]등을 보면 당시 중국의 동남방에서부터 동북 쪽에는 大人國,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각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한웅천왕의 배달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또 후대에는 고조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 |||||||||||||||||||||||||||
치우(蚩尤)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을 일컫는 마린데 치우란 우레와 비를 크게 일으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며, 동양의 군신(君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보면 치우천왕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투구와 갑옷을 입은 모양) 중국의 화아제(皇帝 : 중국 역사의 시작인 3황5제중 5제의 첫째를 연전연파하여 청구를 개척하고 땅을 넓혀 중국 땅이 대부분이 우리에게 속했다. 중국의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동이족의 중심지가 산동성이라 하였고,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4천년전...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구려(九黎)의 군주는 치우라 했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이다',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함향성(산동반도)안에 있다. 그 높이는 7장(丈)으로 백성들이 늘 10월에 제를 올린다' 등으로 적고 있다. | |||||||||||||||||||||||||||
한웅천왕이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 되었다. 3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 명의 제왕을, 5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 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3황5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 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 들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 중국 사학자들이 공동 편찬한 [고사변(古史辯)]에서는 은(殷)나라 사람이 동이(東夷: 조선족)와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고 하고, 삼화오제 가운데 태호, 제준, 제곡, 제순, 소호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라고 한다. 우리의 기록인 [한단고기][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면 3황 중 태호 복희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한웅의 12아들 중 막내이며 염제 신농은 웅씨(熊氏)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 소전(少典)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5제 중 요.순 시대라 하여 태평 성대의 대표로 꼽는 요임금과 순임금에 관하여 보면 요임금은 배달국의 말기와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대에 걸쳐 있었는데 대홍수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제위를 불려 주었고 순임금은 상국(上國)인 조선에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단군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보내 오행치수법을 전해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 한자의 뿌리가 된 세계최초의 문자 녹도문 고대문명의 중요한 조건이 문자의 사용이다. 문자는 살아있는 유물이다. 살아 꿈틀거리는 고대유물인 동시에 그 변천 과정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포함한 우리 나라의 고대사회에서 일찍이 문자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BCE 2000~1500년경의 도화문자(圖畵文字)) 동아시아지역에서 문자가 창제되기 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도 통용되었다. 고조선이 개국되기 훨씬 전인 신시배달 건국 때부터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배달국 환웅천황은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 神誌文字)을 창제하였다. BCE 39-38세기경에 창제된 이 녹도문은 이집트 상형문자(BCE 3000년경),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 script, BCE 3000년경)보다 몇 세기 앞서는 세계최초의 문자다. 환단고기「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img/src=http://www.scjnet.co.kr/int/chan/changhil2.jpg> 왼쪽부터 낭하리 고각, 영변지에 실린 녹도문, 창힐문자,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의 문자, 은나라의 갑골문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의하면 5세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가 녹도문을 개량하여 용서(龍書)를 만들고 이것을 주양(朱襄)씨가 육서(六書)로 남겼다고 한다(朱壤仍舊文字而始傳六書). 이것이 이른바 삼황오제시대의 상고금문(上古金文)이다. 참고로 ^^)... 금문(金文)이란 문자가 창안된 역사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나무류와 동물의 껍질, 뼈다귀, 돌, 금속에 새겨진 글자를 총칭한다. 시대별로 상고금문(上古金文?五帝金文: 삼황오제시대로부터 하(夏)왕조 때까지의 문자), 은주금문(殷周金文: 은(殷)나라 갑골문, 주나라 대전(大篆)), 춘추금문(春秋金文: 진시황 때의 소전(小篆))으로 나눌 수 있다. (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27-28쪽)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것을 집중 연구한 중국학자 낙빈기(駱賓基)는 자신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상고금문이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밝혀내고 그 문자들을 만들어 사용한 주체가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고 있다.(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상고금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조(漢朝) 때 한자(漢子)로 완성되었다. 배달국에서는 숫자로서 산목(算木)이 통용되었고 14세 자오지 환웅천황 때는 화서(花書: 佃目)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바로 아래 그림). < img/src=http://www.scjnet.co.kr/int/chan/munja1.jpg> 자오지 환웅천황의 동방통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전부터 개량돼오던 신지문자(녹도문)가 중원에도 전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창힐문자(倉?文字: 鳥跡書)다. 현재 창힐의 고향 백수현 사관촌(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위 사진의 중간에 있는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에 새겨진 글이 창힐문자다. 창힐은 헌원의 신하로 새 발자국을 보고 문자(鳥跡書)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자오지 환웅천황의 제후로서 배달국 문자(鹿圖文)를 서방에 전하여 동서문화 통합을 시도한 동이족이었다. 창힐문자가 배달국 녹도문과 모양이 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창힐문자는 복희?주양씨 이래 중원지역에서 사용되던 옛 문자(六書)와 뒤섞여 은나라 갑골문의 뿌리가 되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하며 지금의 난하유역에 정착했다. 그는 갑골문자를 들고와 유통시켰다. 고조선에서 사용되던 신지문자보다 개량된 다소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가림토(加臨土)문자, 하나는 신지문자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고조선시대에 사용되던 신지문자(녹도문)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서토지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갑골문 및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갑골문을 개량한 주나라 문자) 사용이 빈번해지자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BCE 8세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더욱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면서 한자가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고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되었다. http://cafe.daum.net(카페 / 한국고대사) ----------------------------------------------------------------------- 치우천황에 대한 자료 치우천황 - 중국에서의 연구동향 (조육대) 5000년 전 중국의 하북성 탁록에서는 산하를 뒤엎을 만한 전쟁이 발생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탁록대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바로 黃帝, 炎帝, 蚩尤의 세 위대한 시조가 대표하는 부락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원시사회 말기 부락간에 생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 때에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ꡐ이긴 자는 왕이 되고 진 자는 도적이 된다ꡑ.는, 정통사학가들의 비유물주의 관점이 적용되지 않았어야 했음에도 지금까지 비유물주의적 사관에 의해 판단되어 왔다. 치우가 비록 전쟁에서 지기는 했지만 그도 우리 조상 중의 한 사람이므로, 마땅히 공평하게 평가해서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최근 관련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황제가 치우와 큰 싸움을 벌였던 장소는 지금의 탁록현 반산진의 황토원이다. 당시 치우군이 주둔했던 ꡐ치우채ꡑ를 보면 지형에 따라서 남채, 중채, 북채의 세 요새가 있으며, 현재 이 흙으로 된 요새는 아주 잘 보존되어 있고,ꡐ치우성ꡑ에는 아직 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ꡐ치우채ꡑ아래에 있는 유물관리인이 석촉, 동촉, 구려족의 전형적인 도기등을 수집 하였다. 외이에도 탁록에서는 일련의 치우와 관련된 전설이 채집되었다. 탁록에는 3기의 치우분이 있는데, 남치우분이 치우의 진짜 무덤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탁록은 이미 두차례에 걸쳐 ꡒ중국 탁록 炎黃蚩 三祖文化 학술연구 토론회ꡓ를 개최한 바 있는데 이 회의에서 경륜과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들은 치우가 위대한 선조중의 한사람이 라는것과 탁록이 중화민족의 발상지이며, 근본을 존중하며 뿌리를 찾아 조상을 알현하는 聖地라는 공통된 인식을 보였다 조육대_ 중국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치우- 도깨비형상과 치우(윤열수)가천박물관 학예실장 우리 생활 주변에 도깨비 설화는 물론 도깨비의 형상은 邪 信仰 등에서 매우 다양하게 등장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도깨비는 용이나 호랑이만큼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친숫한 느낌을 주는 존재이다. 권선징악의 설화에 나타난 한국 도깨비의 모습은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도깨비에 대해서 한국인 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자신 있게 생각하지만 막상 도깨비의 근원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중국측 기록에서 蚩尤天皇은 도깨비 부대를 이끌고 黃帝族과 73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으나, 74번째 싸움인 탁鹿之戰에서 패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동이계열 종족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황제가 치우상을 그려 천하를 진정시켰고, 재앙을 물리치는 벽邪神像으로 삼았는데, 아마 도깨비를 치우 천황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치우의 形象을 그린 圖象은 중국 중심의 문헌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아있지는 않으나, <述異記> <文選> <史記> <韓非子> <管子> 등의 문헌을 통해 어느 정도는 유추해 볼수 있다. 양나라 任昉의 <술이기>에 의하면 ꡒ치우는 뿔이 있고, 銅頭鐵額이며, 耳髮은 劍戟과 같다. 눈이 네 개이고 팔이 여섯 개이며, 사람의 몸인데 소의 발굽을 지녔다.ꡓ고 한다. 그 이후의 귀면와, 해치 등 도깨비의 형상에는 이런 특징들이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치우천왕과 도깨비의 관계는 <山海經> <大荒南經>등 여러곳에서 확인이 되고 우리 생활속 한국인의 마음속엔 일찍부터 도깨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도깨비의 특징이 치우천 황의 특성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음을 본다. 고구려 고분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삼국시대 귀면와에서 꽃을 피웠고, 그 맥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문헌 속에서의 치우는 대부분 황제와의 관계속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의 이야기중 치우의 역학이 어떠한가에 따라 치우의 형상이나 출현 모습이 약간씩 달라지고 있음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우리 도깨비의 얼굴 형상들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대체로 용의 얼굴과 유사하다. 용과 도깨비의 유사성은 어디서 기인하며 그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그리고 치우 천황과 용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는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치우 - 탁록전쟁과 동아시아 상고문명권의 재편과정 고찰 - 박선식 탁록전쟁은 동아시아 상고시기의 전쟁으로서 한.중 두 민족의 始原과 그에따른 문명권의 변화상을 추정케 하는 단초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의 발생원인과 경과과정 그리고 결과에 관한 양국의 기록은 매우 다르다. 정밀한 연구과정에 의해 정확히 밝혀지겠으나, 기존 역사자료의 재해석과 관련 고고학적 성과를 견주어 일말의 해결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탁록전쟁이 발생한 시점은 대략 서기전 27세기경으로, 한국 고고학 편년으로는 신석기시대 말이지만, 북한에서 서기전 30세기경의 비파형 청동창끝 발견이나 천문관측 고인돌판 발굴이 있었고, 반구대 암각벽화의 고래잡이 조직과 그 도구인 쇠뇌와 대형작살 등은 탁록전쟁에서의 금속무기 사용과 대규모 군사동원에 대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 탁록전쟁의 원인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는 신농씨(神農) 계 유망(楡罔)의 통찰력이 부족하여 일대 혼란국면이 있었다고 하고 있으나, 위서시비가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삼성기> <태백일사>등의 기록에는 ꡐ황제가 신시 이래의 교화이념을 등한시했기 때문ꡑ에 정벌했음을 분명히 하는 등 탁록전쟁의 원인과 그 경과과정에 관해 오히려 <사기>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의 기록물을 찬찬히 헤아려보면, <사기>에 담긴 기록은 사실의 본질이 가려진 것임을 헤아리게 된다. < 태백일사>등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 신농은 고시씨로부터 비롯됐던 인물로, 소전의 후예인 헌원도 그와 같은 계보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치우를 ꡐ구려(九黎)의 임금ꡑ이라고 기록한 여러 사료에 따라 우리측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 치우는 구려의 이념인 교화 및 치세이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치우와 훤원이 다같이 자기 후예들을 당대 최고 지성인 자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케 한점, 훤원이 전쟁을 하면서 동문수학한 대요의 무리(치우계열)에게 동맹적 관계를 제시한점 등은 연맹국인(?)신시 안에 있었음을 짐작케 하여 특별히 주목된다. 그런 가운데 치우는 유망정권의 난맥상을 지켜보며, 본래 같은 계보로부터 비롯됐던 神農之國을 경장(更張)하고자 서진(西進)계획을 추진한다. 그 같은 계획은 기존의 신시후예를 포괄하는 신정(新政)체제의 구현을 꾀하는 것으로, 필자는 이를 신시대아주의(神市對我主義) 곧 신시글로벌리즘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시 치우의 이념에 맞서 싸운 헌원은 서토 소아주의(西土小我主義, 여기서의 서토를 북애자는ꡐ규원사화ꡑ에서 <中土>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헌원세력이 동방세력의 반대집단인 점을 착안하여 태백일사의 표현대로 <서토>로 하고자 함.) 에빠진 ꡐ서토 쇼비니즘ꡑ의 주창자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기나긴 대회전은 이념적으로 신시 글로벌리즘 對 서토 쇼비니즘의 문화 대충돌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후 신시계열은 약 300년간 서토세력과의 소강기를 거친뒤, 다시 분화과정을 겪었다. 이는 신시 문화권의 재평과정으로서, 신시세력은 다시 단군왕검을 정점으로 하는 신시 문화권의 새로운 정착기를 갖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_ 따라서 치우 대에 표면화된 신시 글로벌리즘은 단군왕검 대에 안정기로 접어들었고, 이후 산동지역과는 사뭇 다른 한민족 문화기를 열었다고 헤아려진다. 박선식-군사학회 연구위원 치우 - 고고학 발굴 자료로 본 치우의 금속사용 역사 - 나선화 고고학은 과거 인간이 남긴 물질적 흔적, 즉 유적(遺蹟), 유구(遺構), 그리고 유물(遺物)을 통하여 인간의 과거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문헌 기록이 적거나 불확실한 상고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크게 기여한다. 따라서 동방 최초의 금속 사용자라는 치우에 대한 기록도 이러한 고고학 발굴자료를 통해 그 사실성이 검증될수 있다. 지금까지 치우의 기록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발굴조사는 없었으므로 이직은발굴자료와 연구자료가 부족하여 치우가 생존하였던 시기의 사회상을 복원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자료를 보완할 수 있는 많은 잠재력은 가지고 있다. 치우(蚩尤)가 황제(黃帝)와 겨룬 시기를 하(夏)나라 시작 연대와 비교하면 대체로 기원전 23-24세기경의 인물로서, ꡐ치우가 로산의 금을 얻어 다섯가지 병기를 만들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ꡑ(史記,管子인용),ꡐ치우씨 형제들은 모두 동두철액(銅頭鐵額)이었다..ꡑ치우때는 쇠를 달구어 병기를 만들었다..ꡑ야련을 시작한 사람은 치우이다..ꡑ(述異記, 太平御覽) 등 수많은 금속사용 기록이 있는데, 과연 당시가 청동기 시대였을 것인지를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통해 검증해본다. 인류는 기원전 7-6천년 경 근동(近東)과 소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구리제품을 사용했고, 중국의 용산문화(龍山文化), 제가문화(齊家文化) 등과 같은 신석기시대 문화들에서 헝동과 청동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감숙성(甘肅省 東鄕 林家, 馬家窯期)에서는 기원전 2천 5백년으로 편년되는 주조(鑄造)칼이 출토된 바 있다. 요서지방과 내몽고 일대에서도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라고 불리는 청동기 문화가 방사성 탄소연대에 의해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14세기까지 존재했었다. 또한 최근에는 요녕성(遼寧省 建平縣 紅山 牛河粱) 유적에서 기원전 3천년 경에서 청동기를 제작하였다는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어 주목된다. 시베리아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천년경의 아파나시예보 문화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주변 상황과 유물을 비교해볼 때 치우와 황제가 서로 자웅을 겨루었던 시대는 아직은 단순한 바늘, 송곳, 칼, 장식품 등을 생산하였고, 단검이나 도끼와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물품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 시대에 진입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현재까지의 발굴성과로는 기원전 17.8세기에 중국본토지역이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에 접어드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 활발한 발굴조사를 통해 더 많은 자료가 축척된다면 치우 시기에도 풍부한 청동기가 사용되었음을, 그리고 치우시대 문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선화:이화여대 박물관 관장. 치우 - 단오의 <적령부(赤灵符)>와 치우천왕(蚩尤天王) : 박희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소외된 치우천왕을 되살리는 일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이자, 동북아시아 상고사의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일이다. 기록 속에 등장하는 치우천왕은 주로 무신(武神)으로 나타나는데, 치우천왕에 관한 가장 다양한 기록을 보여주는 우리측 사서는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이고 , 중국 측 자료는 <산해경>이다. 여기서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는 학자들간에 위서시비에 휘말려 있고, <산해경>은 중국에서는 고대사 연구가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재야 사학자들이 인용하는 문헌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듯 고대사의 문헌자료에 대한 검정과 발굴성과를 통한 고대사의 정립에 발목이 잡혀있을 때, 이웃 중국에서는 우리가 잊은 상고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일찍이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ꡒ지금 세상에는 치우씨에 관하여 자세히 캐묻는 사람이 없다. 이는 국사책이 흩어진데도 원인이 있기는 하나 후대의 학자들이 소홀히 했다는 질책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ꡓ고 염려했던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여 이 글은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를 포함한 여러 사서와 문집에 나오는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의 진위보다는, 그 기록들이 담고있는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또,민간에 전승되는 신화나 풍속은 문자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민속, 특히 단오풍속에 만아있는 치우천왕 연관내용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치우천왕을 찾고자 한다. 먼저 단오풍속의 출발과정에서 부적의 기원이 된 치우천왕과 적령부의 관계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단오풍속인 차부적, 차륜병, 애호, 각저희 등을 통하여 오늘까지 전승되고 있는 염제신농,황제훤원의 상징코드를 읽어, 태양의 아들인 치우천왕과 태양의 아들을 표방한 황제훤원과의 전쟁인 탁록전쟁이 ꡐ대립이 아닌 포용과 조화의 모습ꡑ으로 단오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천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살펴본다. 또 다양한 기록을 통해 붉은색이 가지는 벽사의 의미와 치우천왕의 상관관계에서 적색이 치우의 상징색으로 된 연원과 치우천왕이 수행하는 군신(軍神)으로서의 기능성을 살펴보고, 끝으로 령(靈)과룡(龍)의 문자학적 개연성을 통해 밝혀지는 치우천왕의 형상이 용으로도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우리나라 귀면와가 적령, 즉 적룡의 형상을 한 치우천왕을 새긴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자 한다. 이와같이 적령부를 통하여 치우천왕의 실체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 신화, 민속, 문자학, 미술사학, 그리고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만, 본인은 이 글이 해답이 아니라 나와 상고사를 연구하는 여러분께 던지는 새로운 질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면 한다. 박희준: 치우학회 학술위원장 치우 - 치우에 관한 한.중 기록의 분석 (오정윤) 우리나라측의 치우에관한 자세한 기록은 위서 논쟁에 휘말려 있는 <桓檀古記>의(삼성기) (태백일사) 와 조선 숙종때 북애자가 저술한 <揆園史話> 정도 뿐이다. 반면 치우는<史記>를 비롯한 중국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치우가 활동했던 시대를 확인해 보면 <삼성기>의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에 치우는 바로 14대 자오지환웅으로 서기전 2706년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서기전 2598년에 물러날 때까지 109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중국측의 <竹書紀年>과 <帝王年代歷>에는 동시대인인 황제훤원이 서기전 2698년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서기전 2599년에 물러날때까지 100년동안 재위하였다고 전한다. 치우(蚩尤) 의 이름은 한국측에서 치우씨, 자오지, 지위천 등으로 불리우며 『옛천자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중국측은 蚩尤라고 표기하고 『해신(海神), 수신(水神)의 성격을 지닌 치미( 尾)』(何光岳) 『뱀, 용, 이무기의 의미와 검은 소 (물소)의 의미가 결합된 이름』(王大有) 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치우족의 토템과 관계 있는 듯하다.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하고, 어깨에는 외날 칼(儉), 몸통은 갑옷(鎧), 양손에 모(矛), 극(戟)을 지닌 전형적인 기마무사(騎馬武士)의모습으로 기술된다. 이런 중무장의 모습을 처음 본 중토(中土)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치우를 괴물처럼 묘사하였고, 그 형상이 도깨비, 도철,치미등 여러 가지로 전해진 듯하다 금속의 사용에 대해서는 <태백음경> (太白陰經)에 『복희는(伏羲) 나무로 병기를 만들고 신농(神農)은 돌로 병기를 만들었으며, 치우는 금속으로 병기를 만들었다.』고 하여금속무기의 원조가 치우임을 밝히고 있었다. 실제로 치우 시기인 서기전 27세기경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미 청동이 사용되고 있었음이 고고 유물로 밝혀지고 있으며, 치우가 사용한 금속무기들은 당시로서는 월등한 무력이었을 것이다. 탁록전투는 동아시아 지역이 황제집단과 치우집단으로 양분되어 패권을 다툰 최초의 국제 전쟁으로서, 그 승패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측이 서로 자기 쪽이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의 기록만으로는 정확히 누가 이겼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치우의 무덤에 대해서 한국 측은 중국의 기록을 인용하여 『산동 동평군 수장현에 있다(漢書)』고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 책에는 이외에도 진나라 때부ㅜ터 치우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한나라 선제는 치우사(蚩尤祠)를 지었고, 한무제는 장안에 치우사를 지어 병주(兵主)로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이는 양측의 공통점은 1.치우는 금속병기의 발명자 2.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으로 구려(九黎), 구이(九夷)의 수령(한국 기록에는 신시시대 14대 환웅인 자오지라고 명기) 3.치우집단으로 풍백, 우사를 언급 4.치우의 후예로 구려(九黎), 삼묘(三苗), 구이(九夷) 동이(東夷),묘만(苗蠻), 북만(北蠻)등을 거론 5.치우의 시대에 대해서 양쪽의 기록의 연대가 거의 동일 등이며, 양쪽 기록의 다른 점은 1.치우를 중국측은 흉폭하고 난을 일으켰다(作亂) 고 하였지만, 한국의 기록에 는 천도(天道)를 준수하고 애민(愛民)과 영토개척의 이상을 지녔다고 묘사되 고, 2.탁록전투에서 중국측은 치우세력이 패퇴하여 뿔뿔히 남쪽,북쪽,서쪽으로 흩 어졌다고 하였지만, 한국 기록에는 황제헌원이 패퇴하고 항복하면서 신시(神 市)의 규범(規範)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뒤 물러났다고 전한다. 따라서 치우에 대한 연구는 단순하게 한 영웅의 이야기를 캐나가는 작업에 그치는 게 아니라,현재 한국, 중국, 티벳, 중국남부의 여러 민족인 묘족, 이족, 여족, 요족, 장족의 상고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출발점으로서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정윤-한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치우 - 치우천왕과 민족사관 (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교수 환인.환웅.단군은 일제식민사관학에 의해 한때 말살의 위기에 놓였다가 8.15광복으로다시 살아났다. 일제식민 사학자들은자국(일본)의 상고사는 무비판적으로 시인하면서,한.중 두 나라의 상고사는 역사가 아니고 (허구적인 날조)라고 부정했다. 이같은 일제식민사관의 역사 훼손은 해방후 역사.고고.인류학 등 여러분야에서의홣발한 연구를 통하여 상당부분 복원되었으나, 한.중.일 3국의 각각 오래 전해 내려온사대주의 사관, 중화사관,황국사관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역사관 때문에 아직은 미흡한 단계다. 어떤 역사가도 순수하게 객관적인 역사기술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역사사실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사실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고 그 해석속에서 역사가의 주관이섞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은 나라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이고, 사료가 희소한 상고사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치우천왕은 환웅시대의 인물이다. 그런데 치우천왕에 대한 원천적인 역사 왜곡은 중국의이른바 중화사관에 의해 자행되었고, 일제가 단군을 말살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왕조의사대주의 사관에 의해 이 왜곡된 치우상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즉,사마천은 치우천왕을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일개 지방 폭군)으로 매도하였고, 끝내 헌원의 (정의의 칼에 맞아 죽는 반역도)로 평가하고 있다. 이후 훤원은 중화민족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치우는 우리의선조로 인식되다 보니,그 이기고 진 사실이 한.중. 두 민족의 자존심과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지난 1천년간 겉으로 중화사관의 중압에 못 이겨 훤원의 우위를 시인하여 왔다. 그러기에 치우는 귀면와라든지 장승,벅수,수살막이,심지어는 미륵으로 까지 둔갑 되어 전해 내려 왔던것이다. 그리고 소국을 자처하면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등 삼조선만을 인정하면서 그 이전의 환웅.환웅의 역사는, 많은 석학마저도 황당한 전설로 내어 던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이 치우천왕은 우리나라 특유의 군신신앙으로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불행중 다행으로 이런 집권층의 사대주의 사관에 반대하는 자주적.민족저주의적 사관을 가진 지식인들이 있어 (규원사화)(환단고기)와 같이 당시의 왜곡된 국가 사관에 도전하는 역사기술을 남겼다. 그들은 (고기)를 토대로 환웅은 환국(환인)이라는 실존국가에서, 풍백 운사 우사와 3.000명의 무장집단을 이끌고 태백산 부근에 이주하여 온 배달유민들의 지도자로 이해하였다. 치우천왕의 문제는 이처럼 중국의 중화사관과 일본의 황국사관 그리고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이 교차하는 사각지대라 할 수 있고, 그 국제 정치적 의미는 미묘하다. 그속에 약육강식의 비수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치우 - 蚩尤는 누구인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蚩尤는 黃帝와같은 시대인물로서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書經> 呂刑篇에 보인다. 그리고 <管子> <列子> <莊子> <山海經> <戰國策> <韓非子> <抱朴子> <史記> 등과 같은 옛 중국고전에 광범위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초기 동양문화상에서 蚩尤의 위치와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말 해준다. 현대 중국역사학자들은 上古시대의 동북아시아에서 華夏族.東夷族, 苗蠻族이라는 세 개의 대표적인 部族集團이 있었다고 본다. 華夏族은 시조인 黃帝族이 발전하여 오늘의 漢族이 되었다. 東夷族은 중심세력이 黎에서 九黎, 九夷로 발전하였고, 그 後裔가 바로 오늘의 韓民族이다. 따라서 夫餘나 句麗라고 할때의 餘와 麗는 모두 東夷의 九黎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苗蠻族은 중국 남쪽 지방에 중국 남쪽 지방에 거주한 종족으로 역시 九黎族의 後裔인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黃帝가 西方의 陜西省을 中心으로 黃帝族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東方에서는 蚩尤가 九黎國의 天子로서 東方의 帝國을 이끌고 있었다. ꡒ九黎國의 임금을 蚩尤라 한다(九黎之君 號曰蚩尤)ꡓ 『書經.孔傳』 ꡒ 蚩尤는 고대의 天子이다.(蚩尤古天子)ꡓ『書經.』ꡒ 阪泉氏 蚩尤는 炎帝의 后裔이다. (阪泉氏蚩尤 姜性 炎帝之后裔也 )ꡓ 『史記..五帝本紀』 등의 기록이 이를 증명해 준다. 따라서 원래 치우란 이름은 ꡒ 우주를 다스린다.ꡓ라는 뜻의 治宇나 東方을 다스린다는 뜻의 治隅였을 가능성이 높다. 黃帝와 蚩尤가 싸움을 벌린 鹿은 蚩尤가 다스리는 九黎族의 영토였으며, 黃帝族이 서방에서 동쪽으로 전진하는 과정 중에 中原에 거주하는 蚩尤가 거느리는 黎族과 苗族의 저항을 받아 발생한 전쟁이 鹿戰爭이다. 따라서 黃帝는 도덕주의자가 아닌 무력주의자. 침략자였다. 蚩尤가 黃帝와 싸울 때 거느렸다는 風伯 雨師는 檀君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거느렸던 風伯 雲師 雨師와 일치하는 등 蚩尤가 우리 韓民族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증거는 많다. 우리가 東夷 九黎國의 天子 蚩尤의 후손이l라면 우리 韓民族의 뿌리는 上限線을 檀君보다 더 위에서 찾아야 할 것 이며, 사대사관이나 식민사관에 매여 있지 말고, 우리 자신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복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올바로 확인 할수 있을 때 통일의 위업과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고 나아가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치우천왕(蚩尤天王) - 인터넷에서 떠도는 讚揚詩. 그는 신처럼 용맹하였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 그의 눈빛은 선하고 강렬했으며 그의 마음은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꿰뚫었다. 그의 머리는 지혜로 빛났으며 가슴은 뜨거웠고 온 몸은 힘에 넘쳤다. 그가 말을 타고 대륙을 달릴 때 그의 갑옷과 어깨에 맨 외날 칼(儉)은 태양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는 양손에 모(矛), 극(戟)을 쥐었다. 탁록전투에서 그가 중국 황제 헌원과 맞서 싸울 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신명을 바쳐 싸웠다. 그는 천도(天道)를 지켜냈다. 황제 헌원은 그에게 항복하였고 신시(神市)의 규범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야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중토(中土)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그를 괴물로 도깨비로 묘사하였다. 복희는(伏羲) 나무로 병기를 만들고 신농(神農)은 돌로 병기를 만들었지만 치우는 금속으로 병기를 만들었다. 그는 큰비와 우뢰를 일으켜 산과 강을 바꾸는 자였으며 우주를 다스리는 자였다. 그는 4천년 전 중국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의 주인이었으며 동이족의 제왕이었다. 치우는 천수를 다하고 전쟁의 신(神)이 되었다.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가 깃발처럼 휘날리면 사람들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는 국가를 수호하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릉에 조각하였다. 그가 바로 배달국 14대 천왕 자오지(慈烏支)환웅이다.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치우천왕은 부활하였다. 붉은 악마들의 깃발 위에 그의 성난 얼굴이 있다. 싸움에 있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자 신명을 다하는 자 이제 그가 2002년에 붉은 악마들과 함께 한국을 지킨다. 치우천왕 그는 도깨비가 아니다. 그는 환웅 할아버지이며 우리 겨레의 영웅이다. *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스터클럽 [붉은 악마]의 깃발이 바로 치우천왕기 입니다. ----------------------------------------------------------------------- 치우천왕(蚩尤天王) 치우천왕(蚩尤天王)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천왕으로서,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편에 의하면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 자오지(慈烏支)환웅이라고도 한다.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그는 신처럼 용맹이 뛰어났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광석을 캐어 철을 주조하는 병기 제작술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치우천왕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단고기』는 치우천왕이 중국의 황제와 73회 싸워 다 이겼으나, 74회 탁록 전쟁 때 탁록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치우천황은 도깨비 부대를 이끌었고, 황제는 귀신부대를 이끌었다. 치우천왕을 도깨비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황제는 싸움에서 이기자 치우천왕의 시신을 다섯 토막 내어 다섯 방위에 각각 묻었다. 무속에서 굿을 할 때 군웅거리에서 청제, 적제, 황제, 백제, 흑제의 5제를 청하는 것은 5방위에 흩어져 있는 치우천왕의 신명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군웅신으로 무속의 병굿에서 오방신은 바로 치우천왕이고, 치우천왕이 백마신장인 증여곤에게 명하여 귀신을 잡아들이는데 귀신은 바로 그의 적인 황제의 별신이 된다.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또 그의 귀 밑 털이 칼날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는 설도 있다.
중국의 치우천왕 중국인 학자 왕동령이 저술한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 의하면 4천년 전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라 기술되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서인『사기(史記)』를 당나라의 장수절이 주해한 책에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이다' 라고 되어 있고, 같은 『사기』를 송나라의 배인이라는 인물이 주해한 책에 따르면 '치우는 옛 天子이다'라고 하여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치우천왕은 고대 중원에서 군신(軍神), 병주(兵主)로 추앙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 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사기』봉선서에 의하면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은 전쟁에 나아가기에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하였다고 하며, 그 후 한나라를 세운 뒤에는 치우의 사당까지 세웠다고 한다.
대만의 역사학자 원가(袁珂)는 그의 『중국고대신화(中國古代神話)』에서 고전에 의하면 치우는 72인의 형제가 있었으며, 황제가 여러 차례 협상하려 하였으나 치우가 거절하였다고 썼다. 치우는 막강한 군세를 가지고 있어서 황제군은 전투마다 참패를 거듭하였고, 한번은 황제의 군대가 치우천황군의 철통같은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었는데 때마침 풍후(風后)가 만든 지남거(指南車)가 계속 남쪽을 가리키므로 치우가 뿌려놓은 유황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가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치우천왕 관련 설화 『한단고기(桓檀古記)』의 ‘황제와 싸운 치우’
황제가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신들의 세계는 이미 황제의 선배격인 염제(炎帝) 신농(神農)이 지배하고 있었다. 신들의 세계에서 신농과 황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권능의 소유자들이었다. 즉 신농은 태양신으로서 불을 통해 능력을 발휘함에 반해, 황제는 뇌우(雷雨)의 신으로서 물로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농에게 도전하였고 양군은 지금의 하북(河北)성에 위치한 판천(阪泉)의 들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황제는 호랑이, 표범, 곰 등을 길들여서 선봉으로 삼고 독수리, 솔개, 매 등을 깃발처럼 날려 신농군을 공격하였다.
세 차례의 전투에서 황제군은 모두 승리하였고, 신농은 패배하여 남방으로 쫓겨 갔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가의(賈誼)의 『신서(新書)』등 한(漢) 나라 때에 지어진 책들은 이 전쟁을 두고 신농이 제후들을 침략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했기에 황제가 징벌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신농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판천의 전투는 오히려 훨씬 더 큰 전쟁의 서곡에 불과했다. 그것은 신농의 용맹한 신하 치우(蚩尤)가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치우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형제가 많아 72명이라고도 하고 81명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의 용감하고 강인한 성품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또 그의 귀 밑 털이 칼날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는 설도 있다. 소의 발굽을 했다거나 머리에 뿔이 돋았다는 설은 신농이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가 신농의 혈통임을 암시한다.
치우는 훌륭한 무기제작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일족은 갈로산(葛盧山)과 옹호산(雍狐山)이라는 곳에서 구리를 캐서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많이 만들었고 무장한 군사력으로 신농 신족 내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된다. 어떤 학자들은 치우 일족의 이러한 기능에 주목하여 그들이 고대 중국의 변방에 살던 대장장이 집단이고 치우가 우두머리 무당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당시 신농은 이미 은퇴를 했고 그 후손인 유망(楡罔)이라는 신이 신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치우의 세력이 커져서 유망의 자리를 넘보게 되고 결국 유망이 패하여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치우와 황제간의 전쟁이 벌어졌다고도 한다.
치우는 전군을 동원하여 황제의 영역인 탁록으로 진격하였다. 탁록은 지난번 황제와 신농이 싸웠던 판천 근처의 땅이다.
치우의 군대에는 앞서 말한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72명 혹은 81명의 용맹한 형제들과 바람의 신 풍백(風伯), 비의 신 우사(雨師)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하고 다리가 넷인 이매 등의 도깨비 무리가 대거 참여하여 사나운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황제 측에서도 호랑이, 표범, 곰, 독수리, 솔개, 매 등의 맹금(猛禽) 군단과 충직한 신하인 날개 돋은 용인 응룡(應龍), 황제의 딸이자 가뭄의 여신인 발(魃) 등이 군대를 이루어 치우군에 대항하였다.
전세는 처음부터 황제군에게 불리하였다. 일설에는 황제가 치우와의 처음 아홉 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마지막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치우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계속 치우군에게 밀리던 황제는 응룡을 시켜 천상에 엄청난 양의 물을 모아 두었다가 치우군에게 퍼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알아 챈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요청하여 그 물을 황제군에게 쏟아 붓도록 하였다. 황제군 위로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 닥쳐 병사들이 떠내려가고 우왕좌왕 혼란에 빠지자 황제는 딸인 발을 불러 지상에 내려오게 했다. 가뭄의 신이 나타나자 폭풍우는 곧 개었고 황제군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깨비 군단이 쳐들어 왔다. 이들은 신음하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어 황제군을 어지럽게 했다. 황제는 이에 호각을 크게 불어용의 울음소리를 내게 하였더니 도깨비 군단이 놀라 달아났다.
황제는 호각 외에도 신기한 북을 만들어 자기편의 사기를 돋우고 치우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는 외다리에 천둥소리를 내는 기(夔)라는 괴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택(雷澤)이라는 호수 가에 살던 뇌수(雷獸)의 뼈를 뽑아 북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을 두들겼더니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오백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손실을 본 치우는 이번에는 큰 안개를 일으켜 황제군으로 하여금 갈피를 못 잡게 했다. 황제는 이에 신하 풍후(風后)로 하여금 북두칠성을 본 따 지남거(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 수레는 북두칠성과는 정반대로 항상 남쪽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 있었다. 황제군은 지남거에 의지해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치우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토록 용감했던 치우 형제들도 하나 둘, 전사하고 치우만이 혼자 싸우다가 결국 힘이 딸려 응룡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운 뒤 즉각 처형하였다. 이로써 중국 신화에서 보기 드문 큰 싸움인 황제와 치우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치우는 목이 잘려 몸과 목이 따로 묻혔고 신농과 치우의 신족은 죽거나 변방으로 쫓겨 갔다. 그리고 황제는 이제 명실 공히 신들의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신화는 한(漢) 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민족의 정통성과 권위를 밑받침하는 역사 이야기로 탈바꿈 하였다. 즉 중국민족의 조상인 황제가 야만족인 치우를 물리침으로써 문명의 제국인 중국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치우는 얼마 안 있어 전쟁의 신으로 부활하였다. 그의 강렬한 투쟁 의욕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숱한 전쟁을 통해 한(漢) 왕조를 건설하였던 고조(高祖) 유방(劉邦) 조차도 치우의 힘을 빌기 위해 제사를 드렸다 한다.
치우는 또한 은(殷) 나라 때에 도철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치우의 이러한 형상과 역할은 신라 시대의 도깨비 모습을 새긴 귀면와(鬼面瓦)에까지 이어진다.
치우의 투혼과 그 후계자들 치우는 강인한 신이어서 처형당한 이후에도, 몸은 비록 죽었어도 기운은 살아 있어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으로 살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그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무렵부터 일어났다. 황제는 치우를 사로잡았을 때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꽉 채웠다. 그리고 치우의 목을 자르고 난 후 피 묻은 수갑과 족쇄를 풀어 내버렸는데 그것들이 나무로 변해버렸다. 그 나무의 잎사귀는 핏빛처럼 붉어서 치우의 처참한 죽음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단풍나무는 이렇게 치우의 넋이 깃들어 생긴 것이라는 말도 있다.
치우의 목이 잘린 지역은 몸이 분해 되었다고 해서 해현(解縣)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현에 있는 해지(解池)라는 호수는 물 빛깔이 붉다. 그것은 치우가 목이 잘릴 때 흘린 피 때문이라고 한다.
치우의 잘린 목과 몸체는 그의 본거지였던 산둥 땅의 수장현(壽張縣)과 거야현(鉅野縣) 두 지역에 따로 묻혔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따르면, 치우의 무덤은 그 높이가 일곱 자라고 한다. 진(秦)나라 한(漢)나라 때 사람들이 시월이 오면 여기 치우무덤에 와서 제사를 지내면, 그 때 그곳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나는데, 그것이 마치 붉은 비단 같아서 사람들이 그것을 치우깃발(蚩尤旗)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붉은 안개 같은 기운은 붉은 단풍, 붉은 호수와 마찬가지로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의 변형된 모습이지만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죽어서도 굴복하지 않는 치우의 기개와 투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치우는 고향인 산동에서 병주(兵主)로 숭배된다. 병주는 곧 군대와 전쟁의 신이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한(恨)이 깊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천문지(晋天文誌)』에 따르면, 치우깃발은 앞쪽이 꼬리별처럼 길고, 뒤쪽은 꼬부라지게 보이는데, 그 깃발이 보이는 바로 그 밑에 병란이 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치우천왕이 하늘위로 올라간 별이 되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한서병장도(漢書兵狀圖)』에 따르면, 치우기를 만들어서 그것을 중국군기(中國軍旗)로 삼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머리가 매장된 수장현의 주민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이 용맹한 신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치우 일족이 패망한 이후에도 신농의 자손은 중국 도처에 있어서 치우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형천(刑天)은 본래 신농의 신하로서 음악을 담당하던 신이라는 것 외에 그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신농에게 무척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끓는 피의 기질을 지녔던 신이었던 듯 하다. 치우가 실패하자 그는 다시 흩어진 신족(神族)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 잘 쓰는 무기인 도끼를 휘두르며 황제에게 덤벼들었다. 황제 역시 응수하여 두 신은 불꽃 튀는 대결을 벌였다. 교봉한지 얼마 안 되어 황제의 칼이 번득이더니 형천의 목이 날아갔다. 형천 역시 황제의 적수는 못 되었던 것이다. 황제는 형천의 목을 곧 땅에다 묻었다. 목이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목이 잘린 형천은 곧 쓰러질 것 같았는데, 무슨 조화인지 형천의 젖가슴이 눈으로 변하고 배꼽이 입으로 변하더니 그는 도끼와 방패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형천은 비록 목이 잘렸어도 황제에 대한 증오와 투쟁의 의지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서 마침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고만 것이다.
황제는 결국 치우와 형천 등 크고 작은 반란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신계(神界)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후 황제의 치세 동안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중앙의 신의 지위를 잠시 증손자인 전욱에게 물려주고 쉬고 있을 때 큰 사건이 발생한다. 신농의 후손인 공공(共工)이 치우와 형천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공공은 본래 수신(水神)으로 서북방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다가 전욱이 무리한 정사를 펼칠 뿐 아니라 과거 신농 계통의 신들을 탄압하는 것을 보고 최고신에 도전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마침내 공공은 아홉 개의 사람 머리를 지닌 구렁이인 신하 상류(相柳)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전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욱은 비록 폭정은 했지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강한 군사력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전욱군과 공공군은 맞붙었고 공공군이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성미 급한 공공은 초조해졌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늘을 지탱하고 있던 큰 산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쿵’하는 굉음과 함께 기둥 노릇하던 산의 허리가 꺾어져서 천하의 서북쪽이 올라가고 동남쪽이 내려앉아 버렸다. 이 때부터 이 산은 온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부주산(不周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주산의 허리가 꺾어짐으로 인해 세계는 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즉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지형을 보면 모든 강들이 지대가 높은 서북 지방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향해 흘러간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공공의 전쟁 신화는 겉으로는 신들의 다툼이지만 속으로는 중국의 지형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기원신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쟁신화는 중국의 신계(神界)를 크게 양분하였던 황제계와 신농계 신들간의 갈등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력의 구조는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이후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질서와 혼돈, 중심과 주변, 문명과 야만의 구분법이었다.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https://www.historyworld.org:54100/sub03/sub3.html?act=view&target=18997&keyfield=&key=&page=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