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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중국 전래설
천주교의 중국 전래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명나라 천계(天啓) 5년(1625) 서안(西安)에서 출토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대진(大秦)은 로마를 가리킴)에는 당나라 정관(貞觀) 9년(635)에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이고, 실제로는 당나라 이전에 여러 차례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노득개교시말기 路得改敎始末記』(路得은 '루터'의 음역)에는 서기 34년에 바빌론이 유태인을 학살하자 유태인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마원(馬援)이 교지(交趾, 베트남 북부 지역)를 정벌할 때 서로 만나 천주교도도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연경개교략 燕京開敎略』에 의하면, 서기 65년에 로마 황제 네로가 천주교도들을 학살하고 69년 예루살렘이 패망하자 천주교도들은 재난을 피해 동으로 왔다고 한다. 또 마라버 주교의 저작인 『가륵저사 迦勒底史』에 의하면, 천국의 복음이 도처에 확산되어 결국 중국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주장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나 믿을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만 전설 정도로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 확실히 고증해 낼 수 있는 것은 7세기 경교(景敎)의 유물로부터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천주교는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651)와 거의 동시 혹은 좀 더 빨리 유입된 것으로 간주한다. 천주교의 중국에서의 전래와 발전은 약 5단계로 구분된다.
경교의 유입
제1단계는 당대(唐代)이다. 천주교의 역사를 보면, 431년 에페소(Ephesus)의 3차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Nestorious, 중국어 음역은 섭사탈리(聶斯脫利))파와 알렉산더파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를 인간으로서, 알렉산더파는 예수를 신으로서 숭배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알렉산더파의 지도자 시릴(Cyril)은 네스토리우스파를 동로마제국 황제와 교황에게 보고하여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추방했다.
네스토리우스파의 학설은 페르시아 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아 페르시아에서 인도·중앙아시아·중국 등지로 점차 파급되었다.[1] 경교 선교사인 아라본(阿羅本)이 이 교를 중국으로 들여오자 당 태종은 남달리 이를 환영하여 경사(京師)에 있는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를 세워주었다. 이 교파는 당시 ‘경교(景敎)’라고 불렸으며, 200년의 발전과정을 통해 일정한 규모를 갖추었다. 따라서 중국에 들어온 경교란, 네스토리우스파의 천주교를 말한다.
경교는 당 태종부터 무종까지 210년 동안 그 당시 제왕들과 대신들의 옹호를 받았다. 비문에 적힌 태종·고종·현종·소종·대종·덕종 등은 모두 경교에 대해 상당한 경의를 표했다. 당 정관 9년(635)에 “제가 재상 방현령에게 명하여 서역에서 온 귀빈들을 영접하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정관 12년(638)에는 사찰을 세우라는 칙명도 있었다. 고종도 경교에 대해 동일한 경의를 표했다. 비문에 “고종은 선왕을 지극히 공경하고 신을 숭상해서 모든 주에 경교사찰을 세우고 아라본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추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종은 녕국(寧國) 등 다섯 왕에게 명하여 왕들이 친히 경사(景寺)에 가서 단장(壇場)을 설치하고 5대 선왕들의 초상을 사원에 진열해 놓도록 명했다. 대종은 예수 탄생일에 향사찬(香賜饌)–황제가 내리는 음식–을 내려 경축했다. 덕종도 경교를 숭상했으며 기념비도 세웠다.
이렇게 경교가 중국에 전파될 수 있었던 요인은 경전번역과 질병치료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당 태종이 아라본을 영접할 때 “경전을 번역하시오”란 명을 내렸고 훗날 비문을 작성한 경정 같은 사람도 번역사업에 전력하여 30부권(部卷)을 번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서(唐書)에 예종의 아들이자 현종의 동생인 황제가 자리를 내놓자 헌(憲)이 병에 걸렸다. 이때 경교 선교사인 숭일(崇一)이 치료해 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천주교는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비교적 작았고 교인도 3만 명이 넘지 않았다.
당 무종(武宗) 회창(會昌) 5년에 이르러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였는데, 경교 역시 배척되어 세력이 축소되었다. 여기서 그들이 불사(佛寺)를 훼손한 이유는 순전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도사(道士) 조귀진(趙歸眞)의 권유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교는 이렇게 해서 결국 멸망하게 되었으나, 경교도들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일부는 몽골로 들어갔다.
원시기 천주교: 야리가온
제2단계는 원대(元代)이다. 당
무종 때 외래종교들이 탄압을 당하자 한동안 중국 내부에서 천주교는 자취를 감춘 듯했으나, 실제로 중국의
서북방과 남방지역에 천주교 선교사들의 발자취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북방의 몽고는 유럽의 천주교 국가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고의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자 천주교 선교사들도
중국으로 들어와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특히 원나라 태조는 유럽에 십자군 전쟁이 발생했을 당시 로마교황에게
구원병을 보낸 바 있어 이 두 나라 사이에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 시기의 천주교 명칭은 '야리가온(也里可溫)'이었다. 야리가온이란 말은 원래 몽고어로
'인간에게 복을 나누어준다' '인연이 있는 사람' 혹은 '복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원
왕조가 건립된 이후 원 세조(世祖)는
종교에 대해 당 태종과 같이 관대하여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를 허용하였다. 특히 그의 모친 별길태후(別吉太后)가 천주교도였기 때문에 세조는 마르코 폴로가 알현했을 때 교황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었는데, 이 친서에는 훌륭한 선교사 100명과 예수묘 앞에 놓는 등유(燈油)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1239년 프란치스코회(方濟各會)
선교사 요한 몬테일미로(約翰 孟德高維諾)가 로마교황 니콜라스 4세의 승인을 받고 중국에 들어와 로마천주교의 중국
선교활동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가 중국에서 선교한 지 30여
년 만에 북경총교구와 천주(泉州)교구가
설치되었으며, 신도 수도 3만 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원의 멸망과 함께 천주교는 또 한 번 자취를 감추었다.
명청 시기의 천주교
제3단계는 명대와 청대 전기이다. 16세기 이후 산업혁명에 따른 서구세력이 발전하면서 천주교의 시선은 다시 중국으로 향했으며, 각 수도회–예수회, 프란시스코회,
도미니코회(多明我會) 등–는 이전과 다른 강력한 세력으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초기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 동남 연해지역에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후에 천주교는 이전의 선교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선교방식을 바꾸었는데,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문화를 연구하며 서구식만을 고집하던
이전의 행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명 만력(萬曆) 연간(1573~1619)에 예수교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 利瑪竇)가 중국 선교에 첫발을 디뎠다. 마테오 리치는 유학자가 입는 옷을 입고, 유학자가 쓰는 관을 쓰고, 중국어를 배우고 한학을 연구하였으며, 아울러 서방과학지식을 매체로 하여 중국 사대부와 교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만력 황제의 예우를 받았다. 마테오 리치에 이어 천주교의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더욱 더 조정과 사대부계층의 신임을 얻어 10여
개의 성(省)에서 선교의 자유를 승인 받았는데, 이로 인해 천주교 세력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청 강희(康熙) 연간(1662~1722)에 이르러서는 신도 수가 15만 명에 달했으며 그
중 대다수가 예수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통치자가 서방세력에 대해 경계를 함으로써 천주교의 세력도 경계받기
시작하였다. 명청 시기에 두 차례에 걸쳐 신도와 외국인 선교사 사건에 대한 조정의 엄중한 조치가 있었다. 한 번은 명 만력 44년(1616)
때이다. 예부시랑 심최(沈漼)가 천주교 세력의 확장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국가의 음환(陰患)으로 여겨 남경에서 신종 황제에게 세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신도가 구속되고 외국인 선교사는 모두 축출되었다. 또 한 번은 청 강희 43년(1704)에
발생하였다. 흠천감 관리자인 양광선(楊光先)이 천주교가 중국 전통의 윤리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구금되었고 관원 역시 공범으로 몰려 면직되었다.
강희 말년에는 중국에 있던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간의 중국인의 제사행위와 공자숭배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이른바 '예의 논쟁(禮儀之爭)'이라고 한다. 예수회의 주장은 중국의 천(天)과 천주교의 하느님은 동일한 것으로 중국 사람들이 공자를 숭상하고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천주교 의식과 결코 상반되는
것이 아니며, 천주교 성서와 중국의 경서는 상통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집에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마교황청은 특사를 파견하여 천주교도가 제사 지내는 행위에 대해 금지령을 하달하여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로마교황청의 이러한 행위는 내정간섭으로 여긴 강희황제의 분노를 사 파견된 특사가 구금되었고, 중국교회 총주교를 포함한 중국 내 대부분의 선교사가 축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외래 선교사의 중국 내 선교활동도 금지되었다.
특히 건륭(乾隆, 1736~1795) 연간에 외래 선교사의 중국 내 선교활동 금지뿐만 아니라 전면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천주교의 예수회와 기타 수도회를 포함한 중국 내에서의 선교활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결국 교황의 예수회 해산 명령으로 예수회는 소멸되었지만, 다른 수도회의
천주교는 여전히 활동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 라자로 수도회는 남경과 북경에서, 작은 형제회는 섬서에서, 미시옹스 수도회는 사천에서, 도미니코 수도회는 복건에서, 포르투갈 소속 수도회는 마카오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근대 시기의 천주교
제4단계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부터 중화민국 시기까지이다. 1842년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맺은
후 망하조약(望厦條約, 1844), 황포조약(黃埔條約, 1844), 천진조약(天津條約, 1858), 북경조약(北京條約, 1860), 신축조약(辛丑條約, 1901) 등이 이어서 체결되었다. 이러한 조약들의 체결에는 중국 내에서의 신앙생활 및 선교활동금지를 취소하라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망하조약 제17조에서는 “선교사가 5개 항구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성당을 건립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였으며, 황포조약 제23조에서는 “중국이 프랑스 성당과 묘지를 훼손시킬 경우 지방관이 조례에 따라 구속되고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북경조약에서는 외국 선교사가 “각 지역에서 농지를 세주고 매입할 수 있으며 교회를 지을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의 문호는 개방되었고
천주교는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신도를 확장시킬 수 있었기에 1900년에는 72만 명, 1921년에는 200여
만 명, 1945년에는 300여 만 명까지 증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천주교의 수난
제5단계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중국 정부는 종교의 인민에 대한 영향력 약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1947년 ‘토지법대강(土地法大綱)’을 통해 모든 천주교 토지소유권을 박탈하여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1949년에는
‘토지개혁운동(土改運動)’을 통해 모든 종교의 토지를 완전히 몰수하였다. 또한 천주교의 로마교황청(敎延) 대표 리베리(Anthony
Riberi, 黎培理) 공사는 추방당했으며,
체포된 신부와 신도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다.
1951년 중국공산당은 각급 정부 내에 종교사무부를 설치하고 각 종교 내에 대리인을 선출하여 완전히 통제 가능한 종교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국천주교애국회(1957)를 결성하여 ‘애국운동’이라는 구호 하에 천주교와 서방세계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끊었으며, 민간사회로 하여금 공산당 지도를 더욱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모든 천주교인이 애국교회에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지하교회(地下敎會)’
형식으로 공산당의 감시를 벗어나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1957년에는 ‘대약진운동’ 실시로 각 개인들은
동원되어 경제생산에 투입되었는데 이러한 생산활동에 참가하지 않는 종교는 공개적인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정책 아래 정치경제정책의 격렬한 변화로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은 소멸정책으로 변하였다. 이에 천주교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정상적인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종교는 착취계급이 이용하는 도구로 반드시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문제를 처리한다”는 종교소멸정책으로 당의 모든 종교사무부문을 완전히 폐쇄시켜 각 지방 종교단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각 지역의 홍위병들은 각 성당에 들어가 건물을 부수고 경전을 태우는 등 경전 읽기·기도·종교활동을
모두 금지시켰다. 이에 중국에서의 공식적인 종교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개혁개방과 천주교의 활성화
이러한 종교억압정책은 개혁개방정책으로 완화되기 시작했고, 1978년 중공 제11기 3중전회의
종교정책에 있어서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 이전의 온건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제한적으로 종교존재를 용인하였다.
1980년에는 천주교 활동이 회복되어 새롭게 수정된 조직장정을 통해 ‘애국애교’를 강조하였고, “정부의 종교신앙자유정 책에 협조하고, 교회의 합법적 권익과 국가안정 보호를 위해, 사회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건설을 위해, 조국통일 실현을 위해 그리고 국가 간의 우호적 왕래를 전개시키고 세계평화를 보호하기
위해 공헌”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계간지인 『중국천주교
中國天主敎』를 발간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불교, 도교, 이슬람교에서 출간하는 간행물들은 국내외에 공개적으로 발행한
반면, 천주교와 천주교 관련 서적은 해당 종교의 내부 발행으로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천주교애국교회가 활동을 회복하면서 천주교애국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천주교, 즉 지하교회
역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지하교회의 대표격인 범학엄(范學淹)
주교도 석방되었고, 1979년에는 비밀리에
세 명의 주교에게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지하교회의 주교는 1991년 51명에 이르렀고, 신부가 210명으로 18개
성(省)에 분포하고 있으며,
신도 수도 70만에서 500만으로 늘었으며 주로
산악지대나 농촌에서 활동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지하교회 탄압에 대한 저항이 격렬해지자 10여 명의 지하주교와 수십 명의 신부 그리고 신도를 체포하였고, 교회당
개방과 재정지원 측면에서 애국교회를 지원해 주었다. 교황청은 박해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 아직 지하교회를
승인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지하교회의 신학생이 애국교회가 장악한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해 점점
성직자와 교우의 세대가 교체됨에 따라 통합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천주교인의 수는 1991년의 정부측 자료에 의하면
360만 명이다. 그러나 홍콩 성신연구센터(聖神硏究中心)의 1996년과 1999년의
천주교인 총수는 각각 1천만 명과 1천 2백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통해 지하교회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개혁개방과 천주교의 활성화 (중국 종교의 역사-도교에서 파룬궁까지, 2006.11.30, ㈜살림출판사)
첫댓글 신부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7.14 1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