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비를 아끼려면 경유를 피할 수 없다. 터키에서 두바이로, 다시 두바이에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호주에 도착한 날, 나는 생각보다는 덜 녹초가 된 나를 보고 약간 의아하였다. 미얀마에서 터키로 갔을 때만 해도, 경유지 포함 1박 2일이 소요되는 이동에 도착 후 일주일은 아무것도 못했을 만큼 탈진했었는데 슬슬 '여행'에 몸이 적응을 하는 듯 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정희씨를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두 달 동안 익숙해진 터키식 인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지인이 있는 곳의 방문은 수월하였다. 두어 달 먼저 와 있던 정희씨와 또 몇 해 먼저 호주 경험이 있는 다지(-정희씨의 지인)의 도움으로, 며칠 간의 도미토리 생활을 청산하고 쉐어 하우스 생활을 시작하였다. 호주 멜번의 유명한 도미토리인 그린하우스는, 화장실을 오갈 때에도 카드열쇠를 사용해야 하는 첨단(!) 시스템으로, 쉐어 하우스로 옮긴 후에야 호주의 추위를 체감할 만큼 난방 시설 확실하고, 보안도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첨단 기술은 어찌나 정확하고 융통성이 없던지, 매번 받은 와이파이의 비밀번호는 물론이고 카드열쇠 또한 유효작동시간이 철저하여, 모든 여행자가 거대한 공장 속 부품이 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물론, 터키의 2배가 넘는 호주의 물가도,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아낙네 같은 나와 동행에게는 매번 놀라운 일이기도 하였다.
첫 쉐어하우스의 동거인이자 안주인, 지쉘(그리고 애완동물 그럼피)
콜롬비아에서 온 까밀로와 지쉘은 20대 초반의 동거커플로, 7월 초 방문 예정인 까밀로의 엄마가 올 때까지, 비어있는 방 하나를 세 놓았다. 달랑 침대 하나만 있던 그 집에서, 호주에 사는 젊은 커플의 생활방식을 엿보았고, 늘 추위에 떨었다. 더군다나 호주의 음식은 어찌나 끔찍하던지......
가공식품의 천국, 호주: 수퍼마켓 안의 풍경
수퍼마켓에서조차 라면을 팔지 않는 터키에서 온 내게, 오만 가지 음식이 다 존재하지만, 그 모두가 가공식품이거나 비싼 식당음식인 호주환경은 유감스런 일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호주는 세계 각국의 식재료며 식당이 모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넓지 않는 멜번 시내에서조차 스시집, 중식당, 인도식당, 태국식당, 베트남 식당....각종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 등이 넘쳐난다. 싱싱하고 값싼 야채가 넘쳐나던 터키와 너무 다른 환경에 나는 그만 한동안 요리 의욕을 잃고 말았다.
까밀로와 지셀과 함께 보낸 약 한 달의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는 트램이며 메트로 타는 법을 배웠고, 천천히 길눈이 늘었으며, 무엇보다 전혀 들리지 않던 호주식 영어도 조금씩 적응되어 갔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정희씨를 만나고픈 마음이 컸던지라 함께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졸졸 따라다녔다. '오늘은 무얼할까' 고민할 짬이 없었다는 것이 정직한데, 호주의 날씨며 음식이며 물가며, 무엇하나 여행객에게 친절한 환경이 아니다 여긴 정희씨는 늘 전전긍긍, 나와 동행의 생활에 신경을 써 주었다. 두 번의 집 구하기도 정희씨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었고, 도착한 다음날 옷가지와 도시락을 싸들고 오는가 하면, 휴대전화(-호주에서는 구글맵과 GPS가 거의 필수였다) 개통, 각지(!-거의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 이용이며, 프로젝트 리스펙트와의 연결 등 정희씨의 동선을 따라움직이기만 해도 일주일이 벅찬 나날이었다.
한국여자 5명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프로젝트 리스펙트의 공동체 식사장면
<호주생활의 활력소가 되어준 '나이트 캣'-댄스클럽인데 일요일마다 살사파티가 있다. 게다가 무료입장!! 야간 이동이 쉽지 않아 7월에는 클럽 바로 옆(Fitzroy)으로 이사해서 매주 출근도장을 찍었다>
'Project respect'에서 기금마련 바자회를 열던 날
주말마다 열리는 지역 벼룩시장이나, 구세군(Salvation Army-진짜 'Army'다!) 가게구경은, 일상에서 맛보는 소소한 재미였다. 미얀마를 떠나며 겨울옷을 모두 한국으로 부친 터라 입을거리가 절실하던차, 중고물품 거래가 활성화되어 있는 그곳 환경은 구경도 재미나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물론 내 눈길은 '실용'보다 화려한 댄스 드레스에 더 팔렸지만!)
피츠로이의 벼룩시장 풍경
출장차 온 정희씨는 늘 일종의 강박에 시달리는 듯 하였고(-월급 받으면서 놀면 안된다!! 하나라도 더 해야 한다!는 식의...) 누가봐도 확실한 일 중독이었다. 가장 큰 과업이었던 '살림-프로젝트 리스펙트 공동 주관 워크샵'을 준비하던 과정과, 진행 도우미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일, 멜번 생활을 마감하는 날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던 과정은, '성매매'와 '성매매 합법화'에 관한 내 견해를 재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차라리 합법화하는 것이 낫지 않나'하는 생각을 막연히 지니기도 했던 나는, 이렇다할 견해가 없는 채로 그때까지 지내 왔었는데, 거기에는 성매매현상과 산업을 둘러싼 복잡한 사회 구조적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성매매'란 이슈에 대한 정서적 불편함이 핵심적인 걸림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프로젝트 리스펙트를 드나들면서, 한국 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지역 여성들과 대면하고, 정희씨와 함께 다니며 관점과 이론들을 곁에서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합법화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거구나, 건너고 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이구나'란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내게 호주 생활은, 다른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매개역할을 하였다. 종교, 종교성, 신, 기독교.....매개의 저쪽을 뭐라 아울러야 할 지 혼란스럽지만, 중요한 체험의 시작은 역시 호주였던 것 같다. 터키에서 무슬림의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볼 때만 해도, '종교성'은 막연한 주제였다. 호주는 영국에 뿌리를 둔 성공회와 맥을 같이 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많은 교회들이 선교차원에서 무료영어강좌를 열고 있다.
정희씨의 소개로 알게 된 멜번 시내의 교회에 짬짬이 나가다가, 목요일 마다 '도이니'의 집(-원래는 삼촌인 '로렌'의 집인데 로렌이 휴가 간 동안 도이니가 맡아서 진행하였다)에서 소규모 모임이 열리니 오면 좋겠다는 초대를 받았다. 호주유학생의 집이 아니라, 호주시민(?)의 생활이 궁금하기도 했던 나는, 선뜻 초대에 응했고 이후로 '목요모임'은 내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 교회에서 진행하는 모임이건, 목요모임 같은 소규모 성경공부 모임이건 일종의 진행 형식이 있는데, 단조로울 만큼 어김이 없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이야기하거나 낭독한다->어떤 의미일지 각자 이야기해 본다->일상에서 유사한 경험을 갖거나 목격한 적이 있는지 나눈다->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전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나의 관심은 신이나 예수보다 '크리스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21세기에 아직도 신을 저리 절실하게 말하고 믿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가 첫번째 호기심이었고, 나머지는 종교 자체에 관해 오랫동안 간간이 던져왔던 물음들을 다시 만나는 계기로 생각하였다. 한국에서 영어성경을 낭독하는 습관을 들였던 것, 가끔씩 알 수 없는 감동을 느꼈던 것도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호주의 크리스천들을 만나면서, 기독교(도)에 대한 내 불신과 비호감의 정도가 상당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그 대부분이 한국 크리스천들의 행태에서 비롯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편견과 인상을 지우고 만나는 기독교는 과연 어떤 얼굴의 종교일지 궁금함이 조금씩 커져 갔다. (여기에 대한 실마리는 이후에 떼제 공동체에 가서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온 30대 여성 카디자는, 첫날부터 나와 마음이 맞아 주어진 시간이 매번 짧게 느껴질 만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카디자는 내 어설픈 영어에 실린 거칠고 다소 무례한 질문마저도 잘 포용하고 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늘 진지하고 성실하게 응답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고운 성품을 지닌 여성'인데, 그이의 개인사는 퍽 놀라운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무슬림 집안출신인 카디자는, 16살 때 혼자 성경을 읽고 개종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슬림 집안에서, 그것도 딸이 개종을 선언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이후 카디자는 집을 떠나 호주로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호주의 목사가 '가족을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기도 했지만,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부모와 다시 만나기도 했다는 카디자. 어떤 장애물보다 넘기 어려운 것이 가족일진대,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이지만, 그녀의 용기 만큼은 퍽 존경스러웠다.
<도이니의 남편 올리버와 러시아에서 온 카디자, 목요모임의 멤버들이다>
멜번을 떠나 시드니로 향하는 정희씨와 다지
피츠로이에 있는 이탈리아 유학생 '마리아와 마테오' 집으로 이사하여 다시 한달을 지내는 동안은 대체로 즐겁고 평온하였다. 30대 초중반인 이 이탈리아 커플은, 소심하고 수동적인 까밀로네와 달리 퍽 유쾌하고 활달한 데다, 쉐어하우스 경험도 많아 모든 면에서 주도적이었다. 곧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석 달 간 여행을 떠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마리아네는, 아무런 일정도 지도 한장도 없이 진행하는 우리의 여행에 큰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스페인어-영어 번역을 공부하며 짬짬이 제3세계 난민/이민자를 위한 봉사를 하고 있는 마리아는 또한 정희씨를 비롯한 프로젝트 리스펙트의 활동에도 관심을 표하였다. 두 달째 접어들면서 호주식 개인주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나는, '오늘은 청소를 나눠서 하자'거나 '오늘은 부동산 중개소에서 집을 보러 오니 미안하지만 몇 시까지 좀 비워줄 수 있겠느냐'는 등의 소소한 마리아의 부탁에 순순히 응하였고, 갑작스런 요통으로 고생하는 마리아에게는 침뜸 치료를 몇 번 해 주기도 하였다.
시간이 흘러 정희씨가 멜번을 떠나던 날, 부랴부랴 공항으로 가 길을 헤매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두 사람을 배웅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 지낸 두 달 사이에 터키식 인사습관(-정말로 아무런 성적긴장이나 거리낌없이, 타자를 덥썩 안고 반가워할 수 있었던)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음을 그 때 느낄 수 있었다. 터키에서 지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스르르 타자를 향해 열리려던 마음이, 호주 와 있는 동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하였다. 나는 내가 환경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는 사람임을 다시 확인하였다.
정희씨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혼자 멕시코를 향했고, 모종의 사고실험을 시작하였다. '나는 여전히 신을 믿을 수는 없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저 어딘가에 신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