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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박물관이 아니라 도서관이 연 전시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지난 해 12월 초, ‘이븐 할둔’이라는 이름으로 정보를 뒤지다가 우연히 이븐 할둔과 관련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이븐 할둔의 책『역사서설』을 다룬 전시회를 연다는 이야기였다.
(인용 시작)
*아랍 무슬림 사상의 정수, 이븐 할둔과의 만남
- 아랍어 원서, 동시대 연구 자료 전시
: 이동권 기자(suchechon@voiceofpeople.org)
아랍 무슬림 사상가로 서아시아 이슬람사를 체계화한 '성찰의 책'의 저자 이븐 할둔의 아랍어 원서와 동시대 연구 자료가 전시된다.
이븐 할둔은 14세기 아랍의 위대한 역사철학가이며, 정치·외교 방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378년 '성찰의 책,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탁월한 군주들에 관한 초기 및 그 후대 역사의 집성'이라는 역사서를 완성했다. 이중에서 서문에 해당되는 '역사 서설'은 인류역사의 형성과 변화, 순환법칙을 고찰한데다 문화사의 근본적인 여러 문제에 해답을 부여한 세계적 명저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는 쿠테타에 관여한 것이 화근이 돼 정치적으로는 타격을 입었으나 학자로서는 명성이 쇠퇴하지 않았으며, 티무르가 시리아원정에 나서 다마스커스를 포위했을 때도, 그의 명성을 들은 티무르로부터 정중한 예우와 대우를 받았으며, 이후 여러번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븐 할둔의 이러한 학문적 업적은 튀니스의 하프스왕조 궁정, 페즈의 마린왕조, 스페인의 그라나다 궁정 등을 돌아다니면서 보낸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나왔다. 정치가로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왕조를 유랑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체계화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튀니스로 망명한 명문 할둔 가문 출신으로 처음 하프스 왕조의 비서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그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린 왕조에서 음모에 가담했다 옥고를 치뤘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세 번째로 나스르 왕조 무하마드 5세가 총애하는 신하가 돼 중요됐으나, 그의 지위가 높아지자 다른 세력과 알력이 생겨 물러났다. 그는 다시 지방도시정권인 베자야에서 중용됐으나 연이어 일어난 전란 속에서 베쟈야정권은 괴멸되고, 전쟁에서 패한 왕을 대신해 적인 자이얀 왕조에게 도시를 넘겨주는 일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2006년 튀니지 국립도서관과 교류협정을 체결해, 2008년 튀니지 국립도서관에서 '한국의 고인쇄 문화 1300년'전을 개최했고, 이번에는 이븐 할둔전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개최하게 됐다. 이번 전시는 그의 고국 튀니지에 한정되지 않을 이슬람권의 여러 나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이슬람문화의 역사·문화적 이해와 소통을 넓히는 기회도 제공해 줄 것이다.
12월 31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로비
- <이동권 기자 suchechon@voiceofpeople.org>
저작권자 © 한국의 대표 진보 언론 <민중의소리>
: <민중의소리> 2010년 12월 9일자 기사
(인용 끝)
평소 이븐 할둔을 존경했고(그를 알고 지낸 지 8년이 넘는다는 것만 밝히겠다),『역사서설』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다짐을 실천하려면 쉬는 날까지 기다려야 했고, 결국 12월 19일에야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전시회를 볼 수 있었다.
그럼 ‘도대체 이븐 할둔이 누구기에 이렇게 야단법석인 거지?’라고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이븐 할둔과『역사서설』, 그리고 전시회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자.
(인용 시작)
이븐 할둔 Ibn Khaldun (1332. 5. 27 ~ 1406. 3. 17)
역사가, 정치가, 사상가.
주요저서 :『성찰의 책,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탁월한 군주들에 관한 초기 및 그 후대 역사의 집성(Kitab al - ibar)』그 중 서문에 해당되는『역사서설(歷史序說)』(al - Muqaddimah)
역사철학을 발전시킨 14세기 아랍의 위대한 역사철학가. 정치/외교 방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함.
튀니스(튀니지) 출생으로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 궁정이나, 페즈(모로코의 도시 이름 - 옮긴이) 마린 왕조, 스페인의 그라나다 궁정 등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냄.
1375~1378년『성찰의 책,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탁월한 군주들에 관한 초기 및 그 후대 역사의 집성(Kitab al - Ibar)』이라는 역사서 완성. 이 책의 서문에 해당되는『역사서설(歷史序說)』(al - Muqaddimah)』은 인류역사의 형성과 변화, 순환법칙을 고찰하였고, 문화사의 근본적인 여러 문제에 해답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으로 세계적 명저임.
<이븐 할둔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
“학문으로 취급되지 않던 역사를 학문으로 정립한 최초의 인물” - 토인비
“역사 이론가로서 이븐 할둔은 3백년 뒤 지오바니 비코가 태어날 때까지 어느 시대에서도 그와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투스도 마찬가지다.” - 로버트 프린트
(인용 끝.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나눠준 팸플릿에서 인용)
(인용 시작)
*『역사서설』
아랍 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국가, 문화, 특히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총체적으로 고찰한 거대한 문명론으로서, 타의 비교를 허용하지 않는 위대한 역사서이다. 그것은 또한 거시적인 주제와 그 주제를 서술하는 방법 그리고『역사서설』이 가지는 의미와 제기하는 의문이 14세기의 당대를 넘어서 지금도 현재적인 데에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역사가’로서 이븐 할둔의 탁월한 역량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음은 물론이며, “투키디데스(고대 헬라스[영어 이름 ‘그리스’]의 역사가 - 옮긴이)가 역사학을 창시한 사람이라면, 이븐 할둔은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적) 학문으로 정립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븐 할둔의『역사서설』이 남긴 영향이 결코 역사학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치학 분야의 마키아벨리(근세 이탈리아의 정치가. 음모와 권모술수를 다룬 책인『군주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옮긴이), 사회학 분야의 콩트나 뒤르캥, 경제학 분야의 아담 스미스(스코틀랜드 출신인 경제학자.『국부론』을 써서 보호무역과 규제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시장에서 마음껏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옮긴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서구 근대의 학자들보다 먼저 핵심적 개념들을 적출하여 논의했다는 지적과 함께,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고, ‘할둔주의자(Khaldunian)'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이다.
분명 이븐 할둔은 14세기 이슬람 세계, 아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지성이 낳은 거대한 봉우리이지만, 그의 사상은 이슬람권의 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고독한 천재(solitary genius)‘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가 토인비는『역사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 “그는 자신의 세계사에 첨부한『역사서설』속에서 독자적인 역사철학을 생각하고 형상화했는데, 그것은 이제껏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누구에 의해서 논의된 것보다 가장 위대한 작업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용 끝.『역사서설』을 우리말로 옮긴 김호동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가 책에 붙인 「해설 : 이븐 할둔과『역사서설』」에서 인용)
(인용 시작)
* 전시회를 열며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튀니지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아랍 무슬림 사상가 이븐 할둔”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2006년 튀니지 국립도서관과 교류협정을 체결하여, 2008년에는 튀니지 국립도서관에 “한국의 고인쇄 문화 1300년” 전시회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이번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슬람의 대학자인 이븐 할둔의 아랍어 원서와 동시대 연구자들의 자료가 소개됩니다. 이븐 할둔의 자료를 통한 이슬람 역사에 대한 만남은 튀니지에 한정되지 않은 이슬람권의 여러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 사회는 다문화사회로의 변화 시기로, 이번 전시회는 새로운 문화로서 이슬람 문화를 만나고 역사/문화적 이해와 소통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인용 끝. 국립중앙도서관의 팸플릿[:소책자]에서 인용)
내가 인용한 글 세 편을 읽은 사람은 이제 국립중앙도서관이 왜 이 사람을 다룬 전시회를 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나는『역사서설』의 원서(물론 표준 아랍어로 쓰여진 책 말이다)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했고, 그것 말고는 딱히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전시회를 보러 갔다. 더 이상 서설이 길어지면 지루하실 테니, 이제는 전시회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소개하겠다.
우선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이 갖고 있는 이븐 할둔과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나는『역사서설』이 8년 전(서기 2003년)에야 한국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줄 알았는데, 천만 뜻밖에도 그 이전에(그러니까 김호동 교수가『역사서설』을 우리말로 옮기기 22년 전인 서기 1982년에) ‘김용선’ 씨가『역사서설』을『이슬람 思想』이라는 이름을 붙여 우리말로 옮겼던 것이다(설명문에 따르면, 김용선 씨는『역사서설』이 이슬람 문화권을 대표하는 저서이기 때문에『이슬람 사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일찍 소개된 책이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진 까닭이 뭔지 의아했다(책 이름 때문에 편견을 품고 멀리한 것일까?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슬람 문화를 잘 알지 못했고, 서양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아랍은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한국인이 이븐 할둔의 사상을 다룬 논문을 썼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는데, 국립중앙도서관은 서기 2005년 충남대학교의 대학원생이었던 ‘박재형’씨가 낸 석사학위논문(「이븐 칼둔의 연대의식('a abiyya)과 역동적 이슬람 정치사상」)을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 전시회를 맞아 (그것을) 내놓았다. 박씨는 “이븐 할둔의 문명론 중 정치와 관련된 그의 견해, 즉 연대의식을 중심으로 한 국가형성론과 역동적인 성격을 지니는 이슬람 정치사상에 한정하여 그의 견해를 살피고 있다(도서관의 설명문).”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이븐 할둔을 연구해 논문을 쓴 사람이 딱 한 사람(그러니까 박씨)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랍인이 아닌 프랑스 백인들도, 영국 백인들도, 일본인들도 아랍 무슬림(이슬람교도를 일컫는 말.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인 이븐 할둔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데(서기 2010년 현재 튀니지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븐 할둔을 다룬 논문은 약 300건 이상인데, 이중 약 158건이 튀니지 연구원들의 논문이고, 180건은 외국인 연구원들의 논문이다. 그리고 튀니지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븐 할둔 연구자료는 33책인데, 그 중 26책은 아랍어 자료고, 7권은 프랑스어 자료다), 서(西) 아시아(‘중동中東’이라는 표현은 ‘유럽에서 보았을 때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아시아’라는 뜻이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와 교역하면서 그들의 위인과 그들의 업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장사를 하건 외교를 하건 교류를 하건 상대방과 사이좋게 지내려면(그리고 상대방에게 “나를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려면) 상대방에 대해 잘 알고 상대방을 연구하며 먼저 상대방을 이해해야 할 텐데, 전혀 연구하지 않는 상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먼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거나 존중해 줄까? 한 편밖에 없는 한국어 논문을 보면서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 마치『사기열전』같은 고전이 우리말로 여러 번 옮겨졌듯이 ―『역사서설』을 다시 우리말로 옮겨서 펴낸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호동 교수가『역사서설』을 ‘아랍, 이슬람, 문명’이라는 부제를 달아 다시 우리말로 옮겼고, ‘까치’라는 출판사는 그것을 서기 2003년에 펴냈다. 이 책은 가로쓰기라 세로쓰기인『이슬람 思想』과는 달리 읽기 편하고, 책 이름도『역사서설』이라는 정식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아랍어 원잔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역본을 번역한 책”이라는 약점도 있어 안타까웠다. 무릇 다른 나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려면 그 나라의 책을 직접 옮겨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제 3의 언어로 옮겨진 책을 다시 우리말로 옮길 경우 글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시리아에서 표준 아랍어로 쓰여진 책을 우리말로 옮길 경우, 우리말을 그대로 아랍어로 옮기기 때문에 ‘우리말과 아랍어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만 신경쓰면 된다. 하지만 시리아에서 펴낸 책을 프랑스어로 옮긴 뒤, 그 번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옮기는 사람은 아랍어뿐 아니라 프랑스어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문화적인 차이나 언어의 차이 때문에 프랑스어로 옮기지 못한(또는 잘못 옮긴) 부분이 무엇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아랍어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알아야 하고, 잘못 옮긴 부분이 없는지 알기 위해 원문과 프랑스어로 쓰여진 부분을 모두 읽어야 한다. 자연히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아지고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잘 실감이 안 가실테니,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흔히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로 알려진 ‘아나키즘Anarchism'은 원래 옛 희랍어[헬라어]인 “안An[없다]”과 "아르케Arche[지배자]"를 합친 말인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지배자가 없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정부가 없는 사상’이라는 뜻을 지닌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 다시 말해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하는 상태를 추구하는 - 사상’인 ‘자유연합주의自由聯合主義’로 옮겨야 한다. 그런데 이 사상을 처음 접한 한국인들은 서양의 원전을 직접 읽은 게 아니라, 일본인들이 일본어로 옮긴 서양의 책을 읽었다.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대학생인 ‘게무리야마 센이치로[煙山專太郞. 연산전태랑]’인데, 그는 서기 1902년 도쿄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아나키즘을 소개한 책『근대 무정부주의[近代 無政府主義]』를 쓰면서 이 말을 처음 썼고, 이후 아나키즘은 그가 붙인 이름 때문에 ‘혼란스럽고 질서가 없으며 어지러운 상태를 부추기는 이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만약 한국인들이 게무리야마의 책을 읽는 대신 프루동이나 크로포트킨의 책을 직접 우리말로 옮겨서 읽었다면 이런 오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전시회를 처음 볼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우리말로 된 책이 다시 나왔으니 나중에 아랍어 원전을 우리말로 옮긴 완역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기로 했다(김 교수의『역사서설』도 완역본[내용을 완전히 다 번역한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이븐 할둔 관련자료 가운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또 있었는데, 프랑스 백인 남성이자 세계적인 지정학(地政學 : 지리적 조건이 한 나라와 국제정치의 권력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학문) 학자인 ‘이브 라코스트’가 쓴 책『이븐 할둔 - 역사의 탄생과 제 3 세계의 과거』(노서경씨가 우리말로 옮겼고, ‘알마’가 서기 2009년에 펴냄)였다. 라코스트 교수는 이븐 할둔의 사상을 분석한 연구서를 썼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제 3 세계의 저개발 문제에 대해 14세기 이슬람의 대 역사가 이븐 할둔의『역사서설』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도서관의 설명문에서 인용).” 그러니까 이 책은 이븐 할둔의 이론을 이용해, 오늘날 제 3 세계가 왜 가난해졌는지, 왜 발전을 멈췄는지를 분석했다는 말이다.『사기열전』을 통해 오늘날의 중국인들을 분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듯이, 아랍인이자 북아프리카 사람이 쓴 책『역사서설』을 통해 오늘날의 서아시아/북아프리카를 분석하는 것, 나아가 모든 제 3세계를 분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책을 우리말로 옮긴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한국 독자들이 서양에 편중된 정신상태에서 벗어나 조금씩 조금씩 다른 세계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증거라 반가웠다(제 3 세계를 막연히 깔보거나 불쌍히 여기는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전시회에는 우리말로 된 이븐 할둔 관련자료 말고도 볼 것이 많았다. 서기 1954년 ‘무흐신 마흐디(Muhsin Mahdi)’가 쓴 박사학위 논문인「이븐 할둔의 역사철학(Ibn Khaldun's philosophy of history)」(서기 1957년에 책으로 출판됨)은 “이븐 할둔의 역사 철학에 관한 연구자료”인데, 비록 논문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기 20세기 중반에도 이븐 할둔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전시회에는 이븐 할둔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븐 아라파 알 - 와르가미(Ibn Arafa al - Warghami)'나 '리산 알 - 딘 이븐 알 - 카팁(Lisan al - din Ibn al - Khatib)', '이븐 아르바샤(Ibn Arbasha)'의 책도 나왔는데(모두 튀니지 국립도서관이 갖고 있던 책들이다), “이들은 열성적인 집필노력으로 명성을 떨쳤고, 박학다식함으로 그 시대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사족을 달자면 ‘이븐 아라파 알 - 와르가미’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별칭이다. ‘이븐’은 표준 아랍어로 ‘~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알’은 영어의 정관사 The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이븐 아라파 알 - 와르가미’는 ‘와르가미라는 집안에서 아라파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거나, ‘와르가미라는 곳에 사는 아라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리산 알 - 딘 이븐 알 - 카팁’은 ‘카팁 집안의 아들이자 올바른 신앙인인 리산’이라는 뜻이고, ‘이븐 아르바샤’는 ‘아르바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정약용이 본명인 정약용 대신 ‘다산’으로 불리고, 박지원이 본명 대신 ‘연암’으로 불리는 것과 비슷하다)
알 와르가미의 본명은 ‘무함마드 벤 아라파 알 - 와르가미’(‘벤’은 튀니지 사투리로 ‘이븐’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알 와르가미의 이름은 ‘무함마드’다. 아랍인 남성의 이름은 이름이 맨 앞에 나오고 그 다음 ‘이븐 + 아버지의 이름’이 붙으며 맨 마지막에 집안의 이름[우리식으로는 성씨]이 붙는다)인데, 그는 이븐 할둔이 죽기 5년 전인 서기 1401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또 서기 1369년에 죽은 ‘아흐마드 벤 알리 벤 카타마’가 남긴 책이나(참고로 이븐 할둔은 서기 1378년에『역사서설』을 썼다. 그러니까 벤 카타마는 이븐 할둔보다 9년 전에 책을 쓴 셈이다), 서기 1374년에 죽은 ‘리산 - 알 - 딘 이븐 알 - 카팁’의 책도 전시되었는데, 640년 전의 원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서 느낌이 남달랐다(설명문에는 서양 달력 - 그러니까 서기西紀 - 과 이슬람 달력이 함께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슬람 국가에서 쓰여진 책을 소개할 때 이슬람 달력을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도서관의 배려가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헤지라(아랍어로 “성스러운 도망”이라는 뜻.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의 예언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알 쿠라이시”가 박해를 피해 달아난 사실을 기리려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라는 달력을 쓰는데, 헤지라 원년은 서기 622년이라 올해가 헤지라로 몇 년인지 알고 싶으면 서기에서 622년을 빼면 된다).
옛 책의 향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고, 200~300년 전에 인쇄된 우리 옛 책들을 보았을 때처럼 친근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책들은 가로쓰기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며(이 점은 우리 옛 책과 비슷했다), 검은색 잉크로 글을 썼지만, 강조해야 할 부분이나 인용한 부분은 빨간색/파란색 잉크로 글을 써서 구분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단락을 구분하고 소(小) 제목을 달았기 때문에, (만약 아랍 글자를 읽을 줄 안다면)글 읽는 사람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역사서설』의 원본을 비롯한 중세 아랍의 책들(모두 필사본[:손으로 쓴 글을 엮은 책]임)은 종이 위에 붉은 네모를 그린 뒤 그 안에 글자를 적어넣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동아시아의 옛날 인쇄본[:인쇄한 책]을 떠올렸다(종이 위에 네모난 틀이 찍혀져 있고, 틀 안에 세로로 -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 줄이 그어져 있으며, 글자가 그 안에 들어가 있음). 어떤 필사본은 ‘네모꼴(사각형)’ 옆에 식물이나 추상적인 도형을 그려넣어서 매우 아름다웠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중세 서유럽의 필사본도 글 가장자리에 식물이나 동물을 그렸으므로, 책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본능이 이런 작품을 낳은 게 아닌가 한다. 또 원본에는 네모꼴 밖에도 짧은 글이 따로 적혀 있었으며, 어떤 글은 본문 옆에 세로로 적혀 있었는데, 이는 각주나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보였다. 아마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적은 것이리라.
이것이 낯설지 않았던 까닭은 이미 3년 전(서기 2009년)에 비슷한 사례를 접했기 때문이다. 박종기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가 찾아낸『고려사』는 조선 후기(서기 18세기)의 학자인 안정복(安鼎福) 선생이 가지고 있던 책이었는데, 그 책에는 안정복 선생이 작은 글씨로 쓴 글들이 구석구석에 적혀 있었다. 그 글들은 “주로『고려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들을 추가로 적은 내용이었다(박종기 교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고려사』에 나오는 사람들의 “출생과 사망 연도, 자호(字號. 이름 대신 부르는 별칭 - 옮긴이), 과거 급제와 관직 제수, 가족 및 혼인 관계 등 열전에 실린 인물들의 생애를 보완하는 내용뿐 아니라 해당 인물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과 그에 대한 순암(안정복의 호 - 옮긴이)의 개인적인 생각 등이 담겨 있었다(박종기 교수).”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 있는 전혀 다른 두 문화권(동아시아 문화권과 서아시아 - 북아프리카 문화권)에 살고 있던 지식인들이 책을 읽고 책에 자신의 글을 덧붙이는 관행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고, 이는 사람이 사는 곳과 그 문화는 달라도 인간인 이상 비슷한 요소(보편적인 요소)가 있다는 가설을 입증해 주는 사실이라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중요한 발견이다.
다시 전시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전시회의 설명문에 따르면 서기 2006년에 튀니지 국립도서관이 그 해를 ‘이븐 할둔의 해’로 선포하고 다양한 축제와 세미나를 열었으며, 국가 연구기간임을 선포했다고 했는데, 처음에 그 설명문을 읽었을 때는 ‘아, 이 때도 이븐 할둔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구나!’라고만 생각했지, 왜 하필이면 그 해가 이븐 할둔의 해였는지를 몰랐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숫자를 다시 살펴보니까, 서기 1406년이 이븐 할둔이 세상을 떠난 해였고, 서기 2006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0년이 되는 해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서기 2006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기억하게 되었다.
전시회를 보고 나서 이븐 할둔과『역사서설』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새로 알게 되었다는 점도 덧붙여야겠다. 나는 이븐 할둔을 역사와 문명을 다룬 학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지식 범위는 교양을 비롯하여 사회과학, 철학, 역사, 종교, 신학, 교육학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했으며(이는 르네상스 시절의 유럽 지식인들이 미술, 철학, 역사, 음악, 정치학, 경제학, 군사학을 골고루 알았던 것과 비슷하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학문에 골고루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전근대사회에서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역사서설』에는 연금술을 다룬 부분도 있다.”고 했다(비록 전시회에서는 설명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만유인력과 물리학의 세 가지 법칙을 만들어낸 영국인 과학자 아이작 뉴턴도 연금술에 몰두했다. 뉴턴은 이븐 할둔이 죽은 지 237년 뒤에 태어났음에도 이랬다). 이 정도면 그를 ‘만능 천재’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안타까운 것은 튀니지 국립도서관이 갖고 있는『역사서설』과『성찰의 책,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탁월한 군주들에 관한 초기 및 그 후대 역사의 집성』(줄여서『성찰의 책』)의 원본은 대부분 훼손된 것이라는 사실과, 이븐 할둔이 처음으로 쓴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지금 전해지는 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1767년, 그러니까 서기 18세기 말(헤지라 12세기 말)에 필사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책이 쓰여진 지 400년 뒤에야 나온 필사본만 남아있고, 그것조차도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렇다면『역사서설』도 후대의 위작이 아닙니까?”라고 묻겠지만,『역사서설』의 원고는 “아랍어 및 이슬람 종교학의 권위있는 튀니지 학자 ‘알 - 아자리 알 - 카프시’가 ‘자이투나(Zaituna)' 모스크(무슬림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건물)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시중에 흩어져 있던 ”여타 원고들과 비교“하고 ”필사본 원고 모음의 검토 및 수정 작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 결과물을 오류 없는 정확한 사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역사서설』이 서기 18세기 말 계몽사상가(당시 계몽사상가는 모두 유럽의 백인이었다)의 책이라면 아랍인이 모스크에 이 책을 보관할 리 없고, 서기 18세기 말의 책이라면 서기 14세기 말의 사실뿐만 아니라 서기 18세기 말의 사실도 나와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또한 유럽의 계몽사상가들은 - 볼테르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태어날 때 코뚜레와 굴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송아지와도 같다.”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 종교를 비판하거나 부정했으므로, 만약 유럽인이 이븐 할둔의 이름을 빌려서『역사서설』을 썼거나,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아랍인이 책을 썼다면 무신론이 나와야 할 텐데, 정작『역사서설』을 읽어보면 이븐 할둔은 “신께 찬미를! 신은 힘이 있고 강하시다.”고 말하고 “너희(인간 - 옮긴이)가 원래 받은 지식은 참으로 적도다.”라는『꾸란』(서양에서는『코란』으로 불리는 이슬람교의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는 등 이슬람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역사서설』이 서기 18세기 이전의 책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삼국사기』도 고려 중기인 서기 1145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조선 중기인 서기 1512년의 것이다. 서기 12세기 중반의 원본은 전하지 않고 그보다 368년 후에 나온 책인 서기 16세기 초의 인쇄본만 전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책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쓰여진 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치『삼국사기』가 조선시대에도 여러 번 인쇄되었듯이(그리고 한漢나라 때 사마천이 쓴『사기』가 후대에도 계속 인쇄되었듯이), 이븐 할둔 이후의 아랍인들은『역사서설』을 꾸준히 베꼈는데, 서기 1767년에는 튀니지 학자인 ‘알 - 사쿨리’와 ‘알 - 와슬라티’가『역사서설』을 필사(筆寫 : 손으로 베껴씀)했고, 서기 1851년에도『역사서설』의 필사본이 만들어졌다. 서기 1847년 프랑스 백인인 ‘드 슬란(De Slane)’은『역사서설』을 알제리에서 인쇄본으로 출판했고(이것이 맨 처음 나온 인쇄본이라고 한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는 서기 1830년 프랑스에 점령당했다), 서기 1867년에는 미스르(영어 이름 ‘이집트’. 나일 강 유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미스르’라고 부른다)의 ‘불락(Bulak)'에서 인쇄본이 출판되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전은 계속해서 인쇄되는 법이라, 가장 최근에는(그러니까 서기 2006년에는) ‘이브라힘 샵보(Ibrahim Chabbouh)' 교수가 논평한『역사서설』의 인쇄본이 출판되었다. 고전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 고전을 사랑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동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이 자기 힘으로 책을 인쇄하지 못하고, 그 땅을 침략/점령한(그리고 그 땅에 얽힌 온갖 선입견을 퍼뜨린) 프랑스 백인들이 책을 인쇄해서 내놓았다는 대목을 보며, 서기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일본 학자들이 “점령한 식민지”인 한국 땅에서 우리 고대사와 중세사를 연구하였던 사실이 떠올라 씁쓸했다는 점은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튀니지 사람들이 아무 일도 안 하고 팔장끼고 있었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마치 한국 학자들이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들을 세계에 꾸준히 알리듯이, “튀니지 대학들은 이븐 할둔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학술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튀니지 학자들은 대학자 이븐 할둔의 저작물에 논평과 주석을 달아 출판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학자들이 조선시대 학자들의 책을 꾸준히 연구하고 국역본을 내놓거나 논문 또는 책을 내놓는 것과 비슷하다.
그 결과 “이븐 할둔의 저술들은 한국어, 터키어(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며 아랍어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 옮긴이), 우르두어(파키스탄의 표준어. 역시 아랍어와는 다른 말이고 오히려 힌디어나 페르시아어와 비슷하다 - 옮긴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드리드 주변에서만 쓰이는 ‘카스티야’어 - 옮긴이), 이태리어(이탈리아 정부가 정한 ‘표준 이탈리아어’. 이탈리아는 중국이나 바라트[:영어 이름 ‘인디아’]처럼 지방마다 쓰는 말이 다르기 때문에, 시칠리아 섬 사람의 말을 로마 시민이 알아듣지 못한다 - 옮긴이) 등의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특히 프랑스어 번역본은 베르베르족(북아프리카의 원주민. 베르베르족은 로마인이 붙인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자유인’이라는 뜻을 지닌 ‘이마지그’다 - 옮긴이)과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왕조들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이븐 할둔의 자서전』”과 “수피즘(Sufism. 이슬람 신비주의. 개인이 명상하고 수행해서 신과 직접 만난다는 사상이다. 경전 구절에 매달리거나 형식을 지키는 기존 교단의 방침에 반발해서 나타난 사상이다. 이슬람교가 온 세계로 퍼지는 데에는 이 사상을 받드는 수도승들 - 수피Sufi 라고 불리웠다 - 의 공이 컸다. 오늘날 이슬람교 광신도들[예컨대 탈레반이나 알카에다나 무슬림 형제단]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옮긴이)에 관한 책도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는데, 나는 이 전시회에 들르기 전에는 이븐 할둔이 자서전을 썼다는 걸 전혀 몰랐고, 정통 무슬림인 그가 이슬람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도 알지 못했으니, 이것은 뜻밖의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하긴『역사서설』을 보면 그는 유태교의 경전인 『토라』- 흔히『구약성서』로 불리는 책 - 나 기독교의 경전인『신약성서』도 인용하고, 고대 헬라스[영어 이름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하더라. 그런 걸 보면 아랍세계가 처음부터 폐쇄적이었던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이쯤 되면 “이븐 할둔은『역사서설』에서 역사적인 시각으로 사건을 비판했고, ‘역사 철학’ 및 ‘인류 문명’을 정희한 바 있다. 그것은 새로운 학문의 시작이었으며 역사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했고,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을 불러 일으켰다.”는 전시회의 설명문은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전시회는 한국인에게 낯선 역사가인(그러나 아주 중요한 학자인) 이븐 할둔을 소개했다는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의미 있는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과는 별도로, 전시회가 기획의도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전시회는『역사서설』과『역사서설』과 비슷한 시대에 쓰여진 책들을 전시하면서도, 아랍어 원문을 우리말로 옮긴 설명문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그저 책을 전시하고, 거기에 책 이름과 지은이와 쓰여진 연대만 나와있는 작은 설명문을 옆에 붙인 뒤 그걸로 끝이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한국에서 아랍어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게다가 책을 쓴 사람들은 아직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지식인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도서관은 원서만 보여줄 게 아니라 원서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뒤 그것을 우리말로 옮겼어야 했다. 책 내용이 뭔지 알아야 칭찬하고, 감동하고, 공감하고, 비판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가령『역사서설』에는
“오늘날(서기 14세기 말 - 옮긴이) 이 분야(역사학 - 옮긴이)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정치의 원리와 사물의 성질은 물론 민족이나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 생활방식, 성품, 관습, 교파, 학파 등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서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서도 모든 방면에 걸쳐 포괄적인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역사가 - 옮긴이)는 현재와 과거의 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類似性 : 닮은 점 - 옮긴이)과 차이점을 비교해야만 하며, 그래서 어떤 경우에 유사성이 나타나고 어떤 경우에 차이점이 보이는지 그 원인을 알아내어야만 한다. 그는 왕조와 종교의 상이(相異 : 서로 다름 - 옮긴이)한 기원과 발생, 그리고 그것들이 생기게 된 이유와 동기 및 그것들을 지탱했던 사람들의 상황과 역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목표는 모든 현상들의 이유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고 모든 사건들의 기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자신이 알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전승되어온 보고의 내용을 검토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 보고가 요구조건을 충족시킨다면 그것은 건전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역사가는 그것을 엉터리로 간주하여 폐기해야 한다.”
는 대목이 있고,
“역사학의 은폐된 함정은 민족과 종족이 처한 상황이 시대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변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정말 뿌리 깊은 통증이고 깊이 숨겨져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눈에 띄게 되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세상과 민족, 관습, 교파 등의 상황이 동일한 형태로 혹은 항구적인(영원한 - 옮긴이)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으며, 시대와 시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고,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인과 시대와 도시에도 적용되며, 지역과 지방과 시기와 왕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는 대목도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야심이 있는 사람들이 현(現) 왕조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들은 전(前) 왕조의 관습에 의존하게 되고 그 대부분을 채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기가 속한 종족의 관습도 무시할 수 없게 되니, 이렇게 해서 신(新) 왕조의 관습과 구(舊) 왕조의 옛 관습 사이에 약간의 괴리가 생긴다. 그러다가 다시 또 다른 왕조가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면, 관습은 그 새로운 왕조의 관습과 더욱 혼합되어 더 큰 괴리가 생기고, 새로운 왕조와 첫 번째 왕조와의 사이의 차이는 첫 번째 왕조와 두 번째 왕조 사이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더 커지게 된다. 차별의 정도가 심해지는 과정은 계속되고, 궁극적으로 전혀 다른 관습과 제도의 출현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서로 다른 종족들이 왕권과 정부를 계승하는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는 한, 관습과 제도의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오늘날(서기 2011년 현재)의 사람들이 보아도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은 이론까지 실려있다(이븐 할둔의 글을 좀 더 읽어보고 싶은 분은 이 카페의 게시판인 ‘문화/도서(시/소설) 사랑방’에 실린 내 글「▩역사를 배우는 사람이 꼭 알아두어야 할 말들」( http://cafe.daum.net/root2?t__nil_cafemy=item )과 ‘[역사마을] 역사이야기 마당’에 있는 내 글「▩[퍼온 글]고증을 시도한 역사가들 (3) - 이븐 할둔 편 : 끝」( http://cafe.daum.net/root2?t__nil_cafemy=item )을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만약 국립중앙도서관이『역사서설』의 원본을 전시하면서 이 대목들을 적은 설명문을 따로 붙여놓았다면, 전시회를 찾아온 사람들은 설명문을 읽고 왜 역사학계가 이븐 할둔을 위대한 역사가라고 불렀는지를 보다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븐 아라파 알 - 와르가미(Ibn Arafa al - Warghami)'나 '리산 알 - 딘 이븐 알 - 카팁(Lisan al - din Ibn al - Khatib)', '이븐 아르바샤(Ibn Arbasha)'의 책들을 전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책들의 구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절이나, 오늘날 읽어보아도 공감이 갈 만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서 따로 설명했다면, 그 부분들을『역사서설』의 대목과 견주어 볼 수 있었을 것 아닌가(또한 왜 그 책을 쓴 사람들이 위대한 학자였는지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국립중앙도서관은 그렇게 하지 않고 원본만 전시한 것이다. 이건 칼로 썰지 않은 수박을 던져주고는, 껍데기만 핥아보고 맛이 어떤지를 알아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책 내용을 모르는데 어떻게 이 전시회가 “이슬람 문화를 만나고 역사/문화적 이해와 소통을 넓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가? 만약 전시회의 목적이 정말로 “이슬람권의 여러 나라를 이해”하는 것이었다면, 이 전시회는 실패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 국립중앙도서관은『역사서설』의 역사관을 다른 문화권의 다른 역사책들에서 나타나는 역사관과 견주어 보았어야 했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의 역사관이라던가,『사통(史通)』(주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의 모든 역사서를 소개하고 그 내용의 참과 거짓을 가린 책)을 쓴 유지기(당나라의 역사가)의 역사관이라던가,『명이대방록』(봉건사회의 제도를 비판한 책)을 지은 중국 역사가 황종희 선생(명나라의 옛 신하)의 역사관이라던가, 성호 이익 선생이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역사관과 이븐 할둔의 역사관을 함께 소개했다면 세계사에서 이븐 할둔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다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이븐 할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더라. 그리고 끝.”이다. 어쩌란 말인가? 그냥 외우라고? 안 그래도 역사 교과서가 재미없다고 난린데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더 안겨주려는 건가? 웬만하면 독설은 안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겠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헛짓거리를 했다. 무릇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보아야 알 수 있는 법인데, 그걸 무시했으니 말이다.
이븐 할둔이 연금술을 연구했다는 말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좋은 설명이었다. 연금술은 돌이나 납을 금으로 바꾸는 기술인데, 이것은 오늘날에는 비과학적인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런 보충설명 없이 이 설명만 읽은 사람은 이븐 할둔을 비롯한 중세의 아랍 무슬림들이 비과학적인 멍청이였다고 믿을 것이다. 내가 설명문을 썼다면 ‘옛날 사람들은 왜 연금술에 몰두했나.’를 이야기하고, ‘흔히 과학과 이성의 요람으로 여겨지는 유럽에서도 연금술을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이븐 할둔이 죽은 뒤 200년 뒤에 태어난 유럽의 과학자들도 연금술을 믿었다.’는 말을 덧붙였을 것이다. 도서관의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서양 달력(서기) 옆에 이슬람 달력(헤지라)을 함께 쓴 건 잘한 일이나, 이슬람 달력이 무엇인지, 이슬람 달력을 계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왜 이슬람 달력을 함께 썼는지를 밝히지 않은 것도 성실하지 못한 설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가 서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해는 서기 1962년(그러니까 50년 전)이고, 그 전에는 ‘대한민국 기원’이나 ‘단기(檀紀. “단군 기원”을 줄인 말.『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는데, 이 해를 기준으로 삼아서 날짜를 계산한 방법이다. 단기 원년은 서기전 2333년이고, 서기전 2333년에 서기를 더하면 단기가 된다. 올해는 단기 4344년이다)나 육십갑자를 바탕으로 한 달력을 썼다는 것을 소개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에는 자기만의 고유한 달력이 있다고 설명했다면 (대부분 무슬림이 아닌) 한국인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부디 내 글이 도서관에 알려져 다음부터는 더 좋은 전시회를 열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
※참고 자료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 지음, 웅진닷컴, 서기 2001년)
―『역사서설 - 아랍, 이슬람, 문명』(이븐 할둔 지음, 김호동 옮김, 까치, 서기 2003년)
―『삼국사기 1』(김부식 지음, 이재호 옮김, 솔, 서기 1997년)
― 국립중앙도서관의 팸플릿(안내용으로 만든 작은 책자)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박종기 지음, 고즈윈 펴냄, 서기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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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븐 할둔에 대해서 자세히 알 게된 유익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평범한 글이 road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