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So long as I am moving with you, there is a relationship.
S: 제가 당신과 함께 움직이는 한, 거기에 관계가 있습니다.
K: The moment I break that relationship, then begins my question: How am I to do it? If I am following exactly what you are saying--seeing that the image is hurt and then the escape, the violence--I am moving with you. It is like an orchestra, an orchestra of words, an orchestra of feeling, the whole thing is moving. As long as I am moving with you, there is no contradiction. Then you say 'Once you see this as a whole, the thing is over--am I with you?'
K: 내가 그 관계를 깨뜨리는 순간, 이러한 나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하지? 내가 당신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정확하게 따라하고 있다면, --- 내가 이미지가 곧 상처이다 라는 것과 그러면 도피와 폭력이 있게 됨을 보고 있다면, 나는 당신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향악, 말의 교향악, 느낌의 교향악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한 거기에 갈등이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당신이 이것을 전체로서 본다면, 그 일은 끝장납니다. - 제가 당신과 함께 있는 겁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S: It has not happened.
S: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K: I will tell you why. Because you have not listened.
K: 제가 이유를 설명 드리지요. 당신은 지금까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S: You mean to say that I have not listened for twenty years?
S: 당신 말은 제가 지난 20년을 들어 왔어도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다는 겁니까?
K: It doesn't matter. One day is good enough. You have not listened. You are listening to the word, and you are carrying along the reaction. You are not moving with him.
K: 기간은 중요하지 않아요. 하루면 아주 충분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귀를 기울여서 들은 게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말만을 들어왔고 반작용만을 날라 온 겁니다. 당신은 그와 함께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R: Is there a difference between that listening and the holistic view?
R: 귀 기울임과 전체적인 비춰 봄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K: No. Listen. Can you listen in the sense of no interpretation, no examination, no comparison?
K: 차이가 없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당신은 해석을 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교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까?
R: No expectation.
R: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K: Nothing, just listening. I am listening. It is like two rivers moving together there are as one river. But I do not listen that way. I have heard you say 'holistically' and I want to get that. Therefore I am no longer listening because I want that.
아무 기대도 없이 그냥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나는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강이 마치 하나의 강 인양 함께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분은 그런 식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네요. 당신들은 누군가가 “전체적‘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왔었고, 그것을 이제 갖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그것을 원하므로 더 이상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R: Therefore, the question of how to remain with whatever is, is a wrong question, isn't it?
R: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것이 뭐든 간에 함께 그대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는 거지요?
K: I am remaining with it.
K: 나는 그것과 함께 그대로 있습니다.
R: Yes, but the question itself is a movement away from remaining with it.
R: 그렇습니다. 그러나 질문 자체는 그것과 함께 그대로 있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입니다.
K: Of course.
물론이지요.
P: There is a feeling of intensity of sorrow and an observation to see that this sorrow is not dissipated by any movement away from it. In a moment of crisis there is an intensity of energy and to remain with it totally, the only action is the refusal to move away from it. Is that valid?
P: 슬픔이라는 강렬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에서 도피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한 에너지 분산이 없다는 것을 보고 있는 관찰이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에너지의 강렬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와 함께 전적으로 그대로 있으려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란 슬픔에서 도피하려는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타당합니까?
R: Does it not mean that one can only watch every movement which is away from it and not to say how am I to remain with it?
R: 사람은 오직 슬픔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지켜 볼 수만 있을 뿐이다 라는 의미인가요? 어찌하면 슬픔과 함께 그대로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묻지 않고 말입니다.
P: Sorrow arises and it fills you. That is the way it operates when it is something very deep. What is the action on that? What is the action that will enable it to flower without dissipation?
P: 슬픔이 일어나고, 그것이 당신을 채웁니다. 뭔가 아주 깊다고 할 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 그겁니다. 그것에 작용을 미치는 것이 무얼까요? 에너지의 분산 없이 슬픔을 꽃피우게 만드는 작용은 무얼까요?
K: If it fills you, actually, if your whole being is filled with that extraordinary energy called sorrow and there is no escape; but the moment you move away in any direction, it is a dissipation of that energy. Are you filled with that energy which is called sorrow completely, or is there a part of you, somewhere in you, where there is a loophole?
K: 만약 슬픔이 당신을 가득 채우면, 실제로 말입니다, 당신 존재가 슬픔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비상한 에너지로 가득 찬다면, 그리고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 방향이거나 움직이는 순간이 바로 슬픔의 에너지를 분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슬픔이라 불리는 에너지에 완벽히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불리는 당신의 일부가 당신 속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R: I think there is always a loophole because there is a fear of anything filling one's whole being. I think that fear is there.
R: 사람의 존재 전체를 가득 채우는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항상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두려움이 거기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K: So, sorrow has not filled your being.
K: 따라서 슬픔이 당신 존재를 완전히 채운 것이 아닙니다.
R: No, that is so.
R: 네, 그렇습니다.
K: That is a fact. So you pursue not sorrow but fear. The fear what might happen, etc. So you go into that, you forget sorrow and go into that.
K: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슬픔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등. 따라서 당신은 슬픔은 잊어버리고 두려움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D: The use of the word 'holistic' implies actuality. Actuality itself is the whole.
D: “전체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현실성을 내포합니다. 현실성 자체가 바로 전체입니다.
K: I am doing it. I do not know a thing about holistic. I do not know. I know the meaning of the word, the description of the word, what it conveys, but that is not the fact. The fact is that I am a fragment, I work, live, act in fragments, in myself. I know nothing about the other.
K: 내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체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모릅니다. 나는 그 단어의 뜻을 알고, 그 단어가 전달하려는 묘사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은 내가 조각나 있고, 나의 일, 삶, 행동이 이런 내 속의 조각남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FW: This brings us to the initial question: What is the meaning of our word apart from our communication now? In my daily life, to remember what you say that you should never be hurt, has it a meaning when I am hurt?
FW: 이런 내용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우리의 의사소통과는 별개로 우리의 말의 의미는 지금 뭘까요? 나의 일상생활에서, 당신은 결코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 내가 상처를 받을 때 의미가 있습니까?
K: No, I am hurt. That is all I know. That is a fact. I am hurt because I have an image about myself. Have I discovered that image for myself or has K told me that the image is hurt? That is very important to find out. Is it that the description has created the image or is that I know the image exists?
K: 아닙니다. 나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 그 이미지를 발견해 왔을까요 아니면 K가 이미지가 곧 상처다 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이것을 알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묘사가 이미지를 만들어 왔을까요 아니면 지금 이미지가 존재함을 내가 알고 있습니까?
S: One knows that the image exists.
S: 이미지가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K: All right. If the image exists, I am concerned with the image, not how to be rid of the image, not how to look at the image holistically. I know nothing about it.
K: 좋습니다. 만약 이미지가 지금 존재한다면, 나는 이미지에 지금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어찌하면 제거하는지, 혹은 어찌하면 이미지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는지 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지 제거나 전체적 조망과 같은) 그런 것에 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A: The discussion started on the very crucial question of authority. The point of starting this discussion on authority lies in this, that we make an authority of what you have said, then that is a barrier.
A: 지금 논의는 권위에 대한 매우 중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던 겁니다. 권위에 대한 이 논의의 출발점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말씀해 온 것들을 권위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장애가 됩니다.
K: Obviously.
K: 명백하게도 그렇습니다.
D: Something is missing in this.
D: 거기에는 뭔가가 빠졌습니다.
K: Look, sir, there is something very interesting which comes out of this. Are you learning or are you having an insight into it? Learning implies authority. Are you learning and acting from learning? I learn about mathematics, technology and so on and from that knowledge I become an engineer and act. Or I go out into the field, act and learn. Both are the accumulation of knowledge and acting from knowledge--knowledge becomes the authority. Either you accumulate knowledge and act or you go out, act and learn. Both are an acting according to knowledge. So knowledge becomes the authority, whether it is the authority of the doctor, the scientist, the architect, or the guru who says 'I know'--which is his authority. Now, somebody comes along and says: 'Look, acting according to knowledge is a prison; you will never be free; you cannot ascend through knowledge.' And somebody like K says: 'Look at it differently, look at action with insight--not accumulate knowledge and act but insight and action. In that there is no authority.'
K: 보세요, 여러 분. 이것으로부터 매우 흥미로운 뭔가가 도출됩니다. 당신은 학습하고 있습니까 혹은 그것에 대한 통찰을 가집니까? 학습은 권위를 내포합니다. 당신은 학습하고 그리고 그 학습에서 행동합니까? 나는 수학과 기술 등등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부터 기술자가 되어 행위합니다. 혹은 현장에 나가서 행동하고 학습합니다. 그 양쪽 다 지식의 축적이고 지식으로부터 행동하는 겁니다.--지식은 권위가 됩니다. 당신은 지식을 쌓고 행위하든지 혹은 밖으로 나가서 행동하고 학습합니다. 그 둘 다가 바로 지식에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식은 권위가 됩니다. 그것이 의사의 권위이건, 혹은 과학자의 권위이건 혹은 건축가나 “나는 안다.” 라고 말하는 구루의 권위이건 간에 말입니다. -- 그것이 바로 그의 권위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말합니다. “보세요, 지식에 따른 행동은 감옥입니다. 당신들은 결코 자유롭게 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결코 지식을 통해 상승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K와 같은 그 사람은 또 말합니다.“좀 달리 보세요. 통찰을 가진 행동을 보세요. 지식을 쌓은 후 행동하지 마시고 통찰하고 바로 행동하십시오. 거기에는 권위란 없습니다.”
P: You have used the word 'insight'. What is the actual meaning of that word?
당신은 “통찰”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 단어의 실제 의미는 무언가요?
K: To have insight into something; to grasp the thing instantly; to listen carefully. You see, you do not listen, that is my point. You act, after learning; that is, in learning there is an accumulation of information, knowledge and you act according to that knowledge, skilfully or non-skilfully. That is learning; accumulating knowledge and acting from it. ...........
뭔가에 대한 통찰을 한다는 것: 단박에 뭔가를 파악한다는 것: 신중하게 듣는다는 것. 아시겠지만, 당신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게 내 말의 요지입니다. 당신은 먼저 행동하고, 그 후에야 듣습니다: 즉, 배우는데 있어서, 정보와 지식의 축적이 있고 나서 그 지식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솜씨가 있든 없든 간에 말입니다. 그것이 학습입니다.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P: Is the word of K and the movement with that word essential? Can the revelation be without the word?
P: K의 말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움직임은 필수적입니까? 말없이도 그것이 계시될 수 있을까요?
K: All right. K says: 'Be a light to yourself.' It does not mean you become the authority. K says: 'Nobody can take you there; you cannot invite that.' K says: 'You can listen to K endlessly for the next million years and you will not get it.' But he says: 'Be a light to yourself and you see holistically that thing.“
To know oneself is one of the most difficult things because in the observation of myself I come to a conclusion about what I am seeing; and the next observation is through that conclusion. Can one observe the actual anger without any conclusion, without saying right, wrong, good, bad? Can one observe holistically? Self-knowledge is not knowing oneself, but knowing every movement of thought. Because the self is the thought, the image, the image of K and the image of the 'me'. So, watch every movement of thought, never letting one thought go without realizing what it is. Try it. Do it and you will see what takes place. This gives muscle to the brain.
K: 좋습니다. K는 말합니다. “당신 자신에게 빛이 되어라.” 이것은 당신이 권위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K는 말합니다. “아무도 당신을 거기에 데려 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초대할 수 없습니다.” K 다시 말합니다. “여러 분은 K의 말을 다음 백 만년 동안 끝없이 들을 수 있지만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겁니다.” 반대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자신에게 빛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 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관찰 속에서 나는 내가 보는 바에 따라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관찰은 그 결론에 따라서 행해집니다. 어떤 결론도 없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지 않고 실제 화를 관찰할 수 있습니까? 전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까? 자기지(自己知)는 자신을 아는 과정이 아니라 생각의 모든 순간을 아는 것입니다. 자아가 곧 생각이므로, 자아가 곧 이미지이므로, 자아가 곧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이미지와 나에 대한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각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에 지켜보십시오. 결코 한 생각도 어떤 것인지를 깨닫지 않고는 떠나보내지 마십시오. 시도해 보십시오. 해 보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두뇌에 힘을 부여합니다.
S: Would you say that in a single thought is the essence of the self?
S: 당신은 단 하나의 생각이 자아의 핵심이라고 말하시는 겁니까?
K: Yes, I will say 'yes'. You see, thought is fear, thought is pleasure, thought is sorrow. And thought is not love. Thought is not compassion. The image that thought has created is 'me'. The 'me' is the image.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me' and the image. The image is me. Now, I am observing the image which is me, which is, say, 'I want to attain nirvana,' which means I am greedy. That is all. Instead of wanting money, I want the other thing. It is greed. So I examine greed. What is greed? 'The more'? That means I want to change what is into the more, the greater. Therefore that is greed. So I say: 'Now why am I doing this?' 'Why do I want more?' Is it tradition, habit, is it the mechanical response of the brain? I want to find out. Either I can find out with one glance or step by step. I can observe it with one glance only when I have no motive, for motive is the distorting factor. ..................
K: 예,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보세요, 생각은 공포이고, 쾌락이고 슬픔입니다. 그리고 생각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비도 아니구요. 생각이 창조한 이미지가 바로 “나”입니다. “나” 와 이미지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미지가 바로 나입니다. 이제 이미지인 나를 관찰합니다. 그 이미지는 “나는 니르바나(열반)를 성취하길 원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탐욕스럽다는 뜻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돈을 원하는 대신에, 다른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또한 탐욕입니다. 따라서 나는 탐욕을 조사합니다. 탐욕이란 무얼까? “더 많이?”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더 많고 더 위대한 것으로 변경하기를 원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탐욕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 지금 왜 이것을 하고 있는거지?” “나는 왜 더 많을 것을 원하지?” 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전통이고 습관이며 두뇌의 기계적인 반응입니까? 나는 그것을 알아내길 원합니다. 한 눈(일별)에 알아낼 수도 있고 혹은 한 계단 한 계단 점진적으로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한 눈(일별)에 그것을 관찰하려면, 오직 동기가 없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동기란 왜곡하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한 눈에 관찰함이란 경험과 동기에 의한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형태의 동기는 우리들의 의식을 분열시키고 맙니까?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판단이란 인식의 관성(프로그램된 두ㅚ의 기억작용)에 빠져있는걸까요? 자아는 늘 조건반사적으로 작용 반작용의 함정에 걸려들고요. 자료에 감사드리며.
첫댓글 한 눈에 관찰함이란 경험과 동기에 의한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형태의 동기는 우리들의 의식을 분열시키고 맙니까?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판단이란 인식의 관성(프로그램된 두ㅚ의 기억작용)에 빠져있는걸까요? 자아는 늘 조건반사적으로 작용 반작용의 함정에 걸려들고요. 자료에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