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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계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 생명을 유지하기위한최소한의 필요한 음식물, 수면,산소 그리고 배설의욕구 | 이욕구는 노인에게 적용되지만 특별히 노년기에는5가지욕구가 결핍되기쉬운 상황에 처하게됨 |
2 단계 안전의 욕구(Safety needs) | 신체의 안전과 동시에 심리적으로 협박당하거나 사회적으로 협박당하는것을 피하려는 욕구 | (예로서 노인은 경제활동에서 은퇴→소득단절→생리적욕구/안전의 욕구가 결핍되기쉬움 |
→ 3 단계소속감과애정의 욕구 (Belongingness and Love Needs) 4단계 존경의 욕구 (Esteem Needs) | 어떤단체에 소속되아 소속감을 느끼고 주위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욕구 다른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 | 일선에서의 은퇴→자녀들출가,친구들의죽음→고독,고립→사랑의욕구 결핍 노인의 욕구와 문제 특히 사회문제와 연관하여 노인 혹은 노후에 직면할수있는 각종의 욕구와 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하려는 사회적노력의 총화 |
5 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Self-Actualization Needs) | 자신의 가치관을 충실히 실현시키려는 욕구, 인생의의미, 삶에 보람을 느끼며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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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계: 생리적욕구(Physiological Needs)
욕구단계설의 첫 단계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생리적 욕구이다. 즉, 의 식 주와 성욕 등, 먹을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빵 한 조각이 전부인 것이다. 춥고 배고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다른 욕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인간은 이러한 것을 위해서만 산다면 가장 낮은 의식차원의 삶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동물에 불과하겠죠!
▷2 단계: 안전욕구(Safety Needs)이 욕구는 근본적으로 신체적 및 감정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해지기를 바라는 욕구이다.
메슬로우는 안전 욕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극도로, 또 상시적으로 안전을 추구한다면 그런 인물이야말로
안전만을 위해서 삶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다." 몸으로서의 삶 중심의 분리의식은 항상 두려움에 빠져 산다.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심리는 항상 공포를 느끼며 방어기제 안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당연한 듯이 보이는 이러한 안전 욕구는 방어라는 수단을 필요로 하면서 지나친 자기 방어가 공격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3 단계: 소속감과 애정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s)
일단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소속감이나 애정욕구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마디로 집단을 만들고 싶다·동료들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구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어디에 소속되거나 자신이 다른 집단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동료와 친교를 나누고 싶어 하고 또 이성간의 교제나 결혼을 갈구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의 원천에는 인간은 홀로 거할 수 없는 본질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홀로 독처하지 못하는 본질을 외면하고 홀로 존재 할 수 있다는 왜곡된 삶을 추구하면 외로움에 빠지거나 우울한 병증을 만들게 된다.
사람이라는 본질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 본질적인 원천의 상태를 깨달으면 결코 홀로 개별성individual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고 관계 맺음에 지혜로울 것이다.
관계란 성령이 주관 하신다. 성령은 나홀로 기거하는 집이 아닌 "관계로 지은 집"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4 단계: 존경욕구(Esteem Needs)
인간은 어디에 속하려는 그의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기 시작하면 어느 집단의
단순한 구성원 이상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이는 내적으로 자존·자율을 성취하려는 욕구(내적 존경욕구) 및 외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주의를 받고, 인정을 받으며, 집단 내에서 어떤 지위를 확보하려는 욕구(외적 존경욕구)이다. 이것은 자기 현시 내지는 과시로 왜곡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자신을 항상 존귀한 거룩한 자로 인지하며 존귀한 자로서 존귀한 자 형제를 알아보고 그 존귀한 자 형제에게 보내는 합당한 인사가 존경의 본질이다.
나는 항상 형제의 거룩함과 존귀로부터 함께 존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홀로 존경받으려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권위 찬탈 같은 환상에 집착하는 권력을 지향하는 왜곡심리가 있을 뿐입니다. 형제를 존귀히 여기는자가 함께 존귀를 받게 됩니다.
▷5 단계: 자아실현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일단 존경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나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 "자기 계발을 계속하고 싶다"는 자아실현 욕구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는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것 혹은 될 수 있는 것을 성취하려는 욕구이다.
즉, 계속적인 자기발전을 통하여 성장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자아를 완성시키려는 욕구이다. 이 또한 신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원천적인 본성의 발로 일 뿐이다.
심리학적인 이러한 고상한 욕구 이론을 이야기 하더라도 인간의 욕구 상황은 그 배경에 결핍을 느끼게 하는 부족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신의 창조에는 부족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부족의식 곧 결핍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메슬로우의 1단계~ 2,`3단계까지의 욕구 의식을 보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욕구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존을 위한 욕구와 함께 인간이 결핍의식으로 인한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몸부림은 결과적으로 부단한 경제 활동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본 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서 얼마나 고단한 삶 고난의 행군들~ 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인지??
성서에서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 는 인생의 고난은 인간 스스로 자초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티" 가 날 음 같다고 했으니까요!
허망하게 다 타버리고 제만 남아 바람에 흩어지는 “불티” 같음을 고난의 연속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묘사 했습니다.
결핍의식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상에 모든 나라 인간 세상의 결핍감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부족의식이 문제입니다.
인간은 왜! 태어나면서 소유욕에 집착하면서 아주 어린 아이의 행동에서부터 왕후장상의 자리에 있는,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억만 장자의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인간 군상들은 모두가 부족의식에 사로잡힌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부족의식은 결핍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지만 결핍감을 치유하고 없애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들 자신이 만족해지는 참 만족을 얻으면 될 것이지만!
성서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눅16장의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성서 해석에서 단서를 찾을 수가 있을 듯합니다.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 집을 뛰쳐 나선 이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집을 나온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 지 아십니까?
영원한 생명의 풍족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거하는 집, 천국 떠난 아들에게 첫 번째 찾아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분리불안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정의된 “분리 불안separation anxiety”은 유아들에게 서 생기는 불안증후군 증상인데 이것은 아이들이 엄마에게서 떨어졌을 때 찾아오는 불안감 입니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라는 두려움을 유발합니다.
태아가 모태의 복중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분리 불안 속에 웁니다.
하나님과 분리감을 느끼는 인간 군상의 어린아이들의 두려움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신 God” 과의 분리의식이 만들어낸 공포감의 근원적인 두려움이 만들고 있는 죄의식과 함께 일어나는 결핍감, 즉 부족의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에서 생긴 분리불안 증후군적인 두려움과 공포심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요한일서4장18절 진리의 말씀을 상기 한다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생은 하나님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는 오류의 환영에 불과 한 것이 아닙니까?
분리 불안의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진 자리에서 찾아오는 애정결핍의 근원적인 결핍증은 분리 불안인 것을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 어찌하여! 자꾸만 모든 것을 혼자서 독차지해서, 모든 것을 소유해야만 넉넉해 질 수 있다는 안전욕구를 채움으로 불안이 해소 될까요 그 자체가 분리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끌어안고 있어야만 느끼게 되는 안도감 같은 것, 돈이라도 잔득 담아놓은 통장이라도 끌어안고 살아야만 안전을 느끼게되는 그 심층에는 혼자라는 무의식적 생각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형놀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성인이 되어도 강아지, 고양이등, 반려 동물이라고 까지 하면서 품에 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 역시 분리불안의 투사적인 심리작용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무의식 자체를 치유 받아야 합니다.
결핍감은 부족의식의 뿌리에서 옵니다.
그 뿌리는 분리의식입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가 영원한 신의 아들의 자리에서 쫓겨난 탕자가 되었습니까?
탕자의 비유로 나오는 두아들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집알 나간 탕자는 에고로 살면서 하나님에게서 홀로 분리되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몸중심의 사고체계에 빠진 육체의 삶을 의미하고, 집에 있는 큰 아들은 원천에서 전혀 변화가 없는 영혼상태로 보면 재미있지 않습니까?
집을뛰쳐 나간 탕자나 범죄 이후 쫓겨났다고 생각하며 유리하고 방황하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그 꼴은 서로 비슷한 상황 전개가 아닙니까? 신께서 아들과 함께 우주를 창조하고 육체가 된 착각을 할 때 이미 분리의식이 우리들 의식 속에 들어왔고, 이것을 느끼는 참 나가 아닌 거짓된 실체가 바로 에고 “ego"라는 것입니다. 에고는 마음이 만들어낸 거짓자아 라는 것입니다.
에고는 지금 오류 상태에 있습니다.
에고 상태를 벗지 못하는 한 인간 군상은 영원히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분리의식을 느끼는 것은 에고 쪽의 지각의 오류인 것이지 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실재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뇌 안에서 지각이 겪는 오류인식에서 생긴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전혀 분리가 없는 아들과 아버지는 영원히 “하나”라는 실재“reality"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분리의식을 해결하면 함께 느끼는 결핍감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분리의식은==> 결핍의식을 만들고 결핍 의식은 ==>소유욕을 만들고 소유욕은 ==> “성장주의” 라는 지독한 경쟁의식의 병을 유발합니다.
경제적인 성장으로 포장된 인류의 부유에 대한 갈망 의식은 잘 살아보세~를 만들어냅니다.
어느 나라 개인 할 것 없이 더 많은 소유와 소비욕구를 불러오는 성장, 성장, 경제성장, 부유함을 그리워하는 인간 내면의 의식구조상 끝이 보이지 않는 욕구충족은 분리 불안의 병증 때문입니다.
냉장고를 끌어안고 먹어대면서 욕구 불안을 채우려는 기저 심리는 먹어서 채워지는 줄 알고 구강을 연속적으로 채우지만 그것은 정신 분석상 불안증의 원인을 해결해야만 하는 치유책인 것입니다.
불안의 원인은 분리입니다.
분리감을 없애는 것은 분리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고체계를 치유하는 길이 최선책입니다.
분리는 전혀 없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류는 어느 누구와도 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물처럼 엮임 속에 존재합니다.
문명이 여기까지 해석을 하고 있다면 이젠 우리가 할 일은 받아드리고 인정하고 사고체계를 수정 교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결핍증을 유발하는 분리의식의 치유의 수단은 오류의 사고체계를 교정하면 됩니다.
지구상 어느 누구도 그물망처럼 엮이지 않고 홀로 독존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육체가 느끼는 분리불안적인 공포감에서 오는 두려움은 어린아이 같은 인간 군상의 소아병입니다. ㅡ이것을 치유 받으면 지구촌은 풍족으로 넘칠 것입니다.
홀로 느끼는 만족은 결코 만족이 아닙니다.
소유욕을 투사하는 병리현상입니다.
소유욕을 채워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허상을 투영하는 악몽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이와 같은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소유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수준으로 소유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상대로부터 “얻음”을 통해서 채워지는 욕구라면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어떤 것을 뺏을 수도 있고 또는 뺏길 수 있다는 지각의 오류입니다.
영혼은 그 어떤 것도 뺏기지도 않고 뺏을 수도 없고 천국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 속에 함께 있는 그곳입니다. 영혼은 모든 것을 다가지고 함께 공유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진정한 진리입니다. 소유having 로서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만족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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