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의 3남이며 휘는 징(澄), 시호는 양정(良靖)이며 학천군(鶴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대군 자손 중 성격이 가장 활달하고 무골 기질이 있었으며 13세에 산원(散員)에 임명되어 낭장(郎將)을 지냈다. 1396년(태조 5) 1월 문과에 급제했다. 정헌대부이며 공조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1412년(태종 12) 5월 우군총제에 임명되었으며 1414년(태종 14) 9월 하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7년(태종 17) 7월 동지돈녕부사에 발탁되었으며 이듬해 4월 좌군도총제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7월 표전(表箋)을 받들고 북경을 다녀오라는 어명을 받아 북경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10월에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5월 지돈녕부사가 되었고 12월에는 경상도 좌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25년(세종 7) 중군도총제로 발탁되었다. 1426년(세종 8) 절일사(節日使)로 3월에 북경에 다녀와서 6월에는 유후사선위사(留後司宣慰使)의 자격으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 1429년(세종 11) 판좌군부사, 1432년(세종 14) 3월 판중추원사, 1434년(세종 16) 9월 지돈녕부사로 임명되었다. 1435년(세종 17) 8월에 별세하니 세종대왕은 군의 별세를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2일간 정지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제문을 내렸다. 묘소는 양주 누원 뒷산에 모셨으나 계유정난 때 가문의 피화로 실전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의안대군 사우 경내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