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권 역사
讀史新論
大東帝國史敍言
朝鮮上古文化史
1.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미 구한말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한 후 이어서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敍言)』·『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그 밖에 다수의 역사 연구논문들을 집필하고 발표하여 한국근대사학을 근대민족주의사학으로 성립시킨 위대한 업적을 내었다.
단재(신채호)는 해외에 망명하여 민족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연구해서 집필하고, 별도로 간행은 국내에서 동지들이 했기 때문에 집필연도와 간행연도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집필 순서로 보면 『독사신론』이 1908년, 『대동제국사서언』이 구한말, 『조선상고문화사』가 1910년대(1915년?), 『조선상고사』가 1921~1924년이고, 그 밖에 다수의 논문들과 미간행 저서들이 1910~20년대에 집필되었다.
그러나 간행발표는 『독사신론』(1908), 『조선사연구초』(1930), 『조선상고사』(1931), 『조선상고문화사』(1931~1932)의 순서로 간행되었고, 『대동제국사서언』은 간행되지 않았다.
이번 『단재 신채호전집』 제3권에는 집필 순서에 따라『독사신론』(1908) →『대동제국사서언』(구한말) →『조선상고문화사』(1910년대)의 초기 저작 3책을 수록하고 이를 각각 해설하기로 한다.
종래에는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발표 후에 보다 정밀한『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의 큰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 내용의 분석에 치중하여 『독사신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느낌이 있었다.
『독사신론』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재된 저작으로서 애국계몽운동기에 사학계뿐만 아니라 전 문화계에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큰 ‘충격’을 준 저작이었다. 이 저작의 착상과 내용은 그 이전의 역사서와 당시 역사교과서류 등과 대비해 보면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독사신론』의 내용과 관점이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점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어서 신채호가 1910년 4월 국외로 망명한 후 최남선(崔南善)이 이를 잡지 『소년(少年)』에 전재하면서『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고 이름 붙여 ‘사론’임을 강조할 만큼 그것은 당시의 통념적 국사관에서 볼 때 ‘이단적’이고 또 ‘혁명적’인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종래의 구사(舊史)와는 전혀 다른 최초의 ‘신역사’였다. 단순화시켜서 표현하면 우리나라의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의 체계화는『독사신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1908년 시급하게『독사신론』을 집필하여『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한 동기로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아직도 중세유학의 영향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다수의 국사서들은 ‘존화사관(尊華史觀)’·‘소중화사상’·‘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지나)을 주인으로 하고 자기 나라를 객(客)으로 하여 주객을 거꾸로 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둘째, 일본 역사가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여 무설(誣說)을 퍼뜨리고 있는 점. 예컨대 ㉠ 한반도는 항상 북방 제 민족의 세력, 서로 지나(중국)의 세력, 남으로 일본의 세력이 교충(交衝)하는 지점이어서 한국 민족은 북·서·남의 강한 민족에 복속하여왔다는 무설 ㉡ 소위 일본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침공하고, 가야(伽倻)에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했다는 무설…등 초기 식민주의사관을 지어 퍼뜨리고 있는 점.
셋째, 한국인이 지은 근대 국사서 또는 ‘역사교과서’까지도 자기 민족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밝히지 못하고, 어떤 교과서는 아직도 존화사관에 젖어 있거나 또는 일본 사학의 무설을 받아들여 자기 민족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점.
역사를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 배양의 첫째가는 부문이라고 보는 신채호의 역사민족주의와 역사는 민중의 애국심과 민지를 계발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신채호의 애국계몽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중세적 역사서들이나 비주체적 국사서들을 완전히 극복하여 추방시켜 버리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애국심이 저절로 우러나와서 배양되고 용솟음치며, 한국 민족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당당하게 밝히는 ‘신역사’를 쓰는 것이 국권회복과 민족의 영구한 발전을 위하여 가장 긴급하고 중요하며 절박한 과제로 인식된 것이었다.
신채호는 스스로 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의 근대 시민적 민족주의·애국계몽사상에 의거하여 ‘신역사’를 쓰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 화급한 요청에 응하여 쓰여진 것이 『독사신론』인 것이다.
현재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직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약간의 이유가 있다고 보여 진다.
첫째,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이후에 『조선상고사』(『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연재됨)와『조선상고문화사』(『조선일보』, 1931년 10월 15일~12월 31일까지 그 일부가, 그리고 나머지는 1932년 5월 27일~5월 31일까지 40회에 걸쳐 연재됨)의 보다 정밀하고 고증적인 대작을 썼기 때문에 그 내용의 평면적 비교분석에 치중한 결과 『독사신론』의 중요성이 가려져서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인 점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둘째, 『독사신론』이 통상적 교과서와는 달리 ‘사론적(史論的)’ 신국사서(新國史書)이기 때문에 ‘고증’에 전혀 치우치지 않고 사론적 국사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증사학’의 엄격성과 과학성의 한 면만을 보고 역사의 다른 한 면의 본질을 외면하는 입장에서는 『독사신론』은 경시되기 쉬운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셋째, 『독사신론』이 ‘미완성’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시 다른 국사교과서들이 대체적으로 고대부터 조선왕조 말기까지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일단 다룬 데 비하여『독사신론』은 발해 문제까지 다루고 미완인 채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 점도『독사신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게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서’에 대해서까지도 일관되게 역사주의적 고찰을 할 필요가 절실함을 강조하고 싶다. 『독사신론』이 1908년경에 국사학과 국권회복운동에 미친 영향 및 공헌과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가 1931~1932년의 국사학과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및 공헌은 현저하게 다른 것이며, 각각 그 시대의 학문적 발전 조건과 사회적 조건에 관련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이야말로 근대국사학을 창건한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독사신론』은 사론적 저술이지만 학술적으로도 종래의 학설을 뒤집는 혁명적 새 학설을 다수 정립하여 제시하였다.
예컨대 ① 부여-고구려 주족설(主族說), ② 단군-추장시대론, ③ 기자조선설 부정, ④ 기자일읍수위설(箕子一邑守尉說), ⑤ 만주영토설, ⑥ 초기 대일관계신론, ⑦ 임나일본부설 부정, ⑧ 삼국문화의 일본에의 유입설, ⑨ 초기 대북방민족관계 신론, ⑩ 초기 대중국관계 신론, ⑪ 삼국 흥망원인 신론, ⑫ 삼국통일 및 김춘추 비판론, ⑬ 발해·신라 양국시대론, ⑭ 김부식 비판론 등 새 학설들과 그밖에 작은 주제들에 대한 다수의 신해석들이었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부여족(고조선족)을 중심으로 하여 안으로는 조선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진화과정을 밝히고, 밖으로는 사린의 타민족들과 어떻게 교섭과 투쟁을 전개해 왔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1924년의 『조선상고사』「총론」에서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관은 이미 『독사신론』에서 실제로는 서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한국 근대민족주의 국사학 성립의 저작이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그 몇 가지 일반적 특징과 종래의 몇 가지 오해라고 생각되는 관점에 대하여 해설하려고 한다.
첫째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처음부터 ‘민족주의’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며, 따라서 ‘민족주의 사관’이 수립되어 일관되게 발해시대까지의 국사를 ‘재해석’한 국사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독사신론』은 ‘근대민족주의’에 의거하여 국사를 해석하고 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근대민족주의를 보급·계몽하려고 의도한 새로운 국사서인 것이다.
신채호가 누차 그 절박한 필요성을 강조한 ‘신역사’는 바로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으로 해석된 역사를 의미한 것이었다.
둘째, 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다루어진 ‘신역사’의 단위 주체는 ‘민족’이었으며,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민족적 주체성’이었다.
단재(신채호)가 다른 국사교과서들처럼 연대나 기술하며 인명·지명이나 기술하는 역사를 반대하고 ‘일정주의(一定主義)’·‘일관정신(一貫精神)’이 살아 있는 역사를 주장한 것도 ‘민족주의 사관’에 의거하여 ‘민족주체성’이 있는 역사서술을 강조한 때문이었다. 김춘추나 김부식이 ‘민적(民賊)’·‘공구(公仇)’로서 가혹한 비판을 받은 것도 신채호의 이러한 관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셋째,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의 민족주의 사관은 중세사학을 철저히 비판·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채호는 예컨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등을 “일성(一姓)의 전가보(傳家譜)”로 밖에 보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왕조사를 철저하게 비판하여 소위 왕조의 정통을 따지며 공자의 ‘춘추’의리니 주자의 ‘강목’의리를 논하는 사학을 완루(頑陋)한 ‘구사’라고 비판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김부식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발해국을 떼어내어 포기해 버린 것도 김부식이 고려왕조를 정통으로 만들고 당시의 자기 군주에게 아첨하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분석하고 ‘왕조사’의 폐해를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모든 종류의 중세사, 특히 춘추강목체사학을 ‘구사’라고 보고 있으며, 자기 시대는 ‘신안공(親眼孔)’으로 ‘신역사’를 써야 할 시대임을 극히 명확하게 자각하였고 주장했으며 실천하였다. 일부의 역사학도들이 한말까지는 단재(신채호)가 중세사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한 것이다.
넷째, 단재(신채호)는 자신의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의 역사관을 이룬 민족주의의 ‘민족’의 구성요소로서 언어·종족(또는 혈연공동체)·국토(토지)… 등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이 중에서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언어의 문제는 자명한 것으로 보아 다루지 않았다. 그가 이 저작에서 심각하게 다룬 것은 종족과 국토의 문제였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주로 고대사를 다루다가 중단된 저작이기 때문에 다수의 부족국가들의 인종문제 또는 부족문제에 부딪쳤다. 널리 아는 바와 같이 고대에는 근대에서와 같은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고대사를 연구하고 기술하려 할 경우에는 이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인 것이었다. 신채호는 고대사에서의 이 문제를 ‘주족’과 ‘객족’으로 구분하고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종족으로서 ‘부여족’을 제시하여 그 계통으로서 ‘부여-고구려 주족론’을 제기함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한국민족의 기원을 부여족에서 구하고 그것을 한국민족의 고대의 대명사로 쓰면서 부여족이 ‘토족’을 정복·흡수하여 고대국가를 수립·발전시키는 과정과 ‘객족’인 선비족·지나(중국)족·말갈족·여진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이 경우에 ‘부여족’을 한국민족 고대의 주종족으로 선택하고 부여족을 한국민족의 고대 대명사처럼 사용한 이유는 부여·고구려가 가장 강성했으며 다른 민족(객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여러 차례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고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고도의 문명국가를 수립하여 다수의 고대 동아시아 부족들을 지배했으며 강대한 중국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경쟁하고 중국민족의 대규모 침략을 여러 차례 패배시킨 사실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사회진화론’을 그의 역사학의 이론적 배경으로 한 신채호에 있어서는 고대에서 가장 강성한 종족이 주종족으로 중요시된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사회과학적 민족형성론이나 역사적 사실의 연구결과와 완전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견해는 한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시민적 사회과학인 사회진화론의 논리, 즉 강대한 종족의 정복에 의한 고대 문명국가 형성론을 그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시대의 자주부강한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그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투사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함에 있어서 사회진화론에 의거한 진화사관을 수립하여 적용했으며, 인류 역사가 국가생활의 발달의 측면에서는 ① 추장시대 ② 귀족시대 ③ 전제시대 ④ 입헌시대의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일부의 역사학도들이 단재(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나 ‘주족(主族)-객족(客族)’ 구분론을 두고 신채호가 중세유가적 정통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관찰이라는 사실이다. 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 등은 주자학적 정통론에 의거하여 나온 학설이 아니라 시민적 사회과학인 사회진화론과 시민적 근대민족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나온 것이었다. 또한 그의 ‘주족-객족’ 구분론은 본질적으로 시민적 근대민족주의에 기초한 강렬한 ‘민족적 주체성’을 역사서술에 투사한 것이었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주의 사관은 ‘국토’ 문제에 있어서 만주를 시종일관하여 한국민족 형성의 구성요소 안에 포함하는 큰 특징을 갖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만주는 우리 국토의 일부이며 한국민족 구성요소의 한 부분인 것이었다. 신채호가 이같이 만주를 우리 민족의 국토로 본 사실은 상호보완적으로 그의 고대 사관과 고대사의 구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 만주를 우리 국토로 발견하게 함과 동시에 만주를 국토로 보는 관점이 부여-고구려 주족론에 대한 그의 입론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한국 고대사의 영역과 주 무대를 지리적으로 반도로부터 만주의 넓은 대륙 벌판으로 옮겨놓는 작용을 했으며, 우리나라 고대사를 더욱 웅장하게 만들게 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이러한 관점은 또한 그 후 김춘추의 삼국통일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데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후 한국 역사에서 요동과 만주를 수복하려는 운동과 인물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중요시한 관점을 낳도록 했음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최영을 한국 역사상 삼걸의 하나로 보는 신채호의 관점도 물론 이와 관련된 것이다. 신채호의 이러한 관점은 또 발해국을 재발견하여 국사에 편입하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기를 ‘양국시대’라고 보는 독특한 그의 사론을 정립케 하는 데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발해를 국사에 편입한 것은 신채호가 처음은 아니고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등에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한국 역사에의 발해의 중요성에 대한 신채호의 강조와 그 역사적 의미의 중요성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매우 강도가 높으며 이례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신채호가 만주를 우리 국토 안에 포함시켜 강조한 사실이 비단 고대사의 재구성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만주를 국권회복운동 기지로 설정하려는 신채호의 현실적 의도가 강력하게 투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독사신론』을 쓸 무렵 이미 만주 이주민들에게 만주가 한국 국토의 일부임을 설명하면서 그곳에서 민족문화를 간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몽하였다.
여섯째,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통하여 민중에게 ‘민족주의’·‘애국심’·‘민족적 자부심’을 교육하고 배양하려 하였다. 그는 역사가의 취미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나약한 자를 일어서게 하고 완매(頑?)한 자를 깨우치게 하는 역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바로 계몽사학의 강조였다. 그는 자기 시대의 모든 목표의 초점을 국권회복에 두었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애국심’·‘민족주의’·‘자강’·‘용기’·‘영웅적 투쟁’·‘발분’을 고취하는 애국계몽 사학을 주장하고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신국민’·‘애국심’·‘민중’이 강조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영웅’·‘위인’의 행적이 강조된 것은 이러한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채호의 애국계몽사학의 특징 때문이었다.
일부의 역사학도 중에는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을 쓸 무렵에 몇 개의 영웅전을 쓴 사실과 그 내용에 주로 큰 인상을 받고 애국계몽운동기에 신채호는 ‘영웅중심 사관’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피상적 관찰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재(신채호)는 예컨대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을 번역한 데 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상의 삼걸로 『수군제일위인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1908),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1909),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1909)을 썼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민중에 대한 계몽과 교육을 목적으로 한 저작이었다. 정작 단재(신채호)의『독사신론』의 내용은 결코 영웅주의 사관에 지배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시종일관하여 시민적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한 민족주의 사관이 본질적으로 관철되어 있다.
단재(신채호)가 영웅·위인들의 전기를 쓴 것은 당시 국권회복의 목적과 관련하여 한국의 국민들이 낱낱이 ‘신국민’들이 되고 청년들이 과거의 영웅·위인들의 행적을 학습해서 낱낱이 무수한 신영웅들이 되어 국권을 되찾는 데 영웅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계몽한 교육상의 목적 때문이었음을 거듭 지적하고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단재(신채호)가 정작 『독사신론』에서 때때로 논급하는 영웅에 대한 찬양은 시민적 민족주의 사학이 영웅의 역할을 주목하는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주로 고대사를 다룬 사서이다.
단재(신채호)는 고대에는 한 나라의 원동력이 한둘의 영웅호걸의 지휘 여하에 달려 있었으나 자기의 시대에는 한 나라의 흥망은 국민 전체의 실력에 있고 한둘의 호걸에 있지 않으며, 만일 한둘의 영웅이 나와서 나라를 구제해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라고까지 단언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서 고대에 있어서는 근대와는 달리 영웅호걸의 역할이 매우 큼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대사를 다룬 그의 『독사신론』에서 관점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민족이며 관철되고 있는 것은 시민적 민족주의 사관인 것이다. 당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기에는 그의 사관으로서의 민족주의 역사관과 교육목적의 영웅전기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을 쓴 애국계몽운동기에는 이미 신국사서가 다수 간행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신채호가 이러한 신국사교과서들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던 측면은 영웅숭배라든가 고증이 부족한 점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강조한 민족주의 역사관과 민족적 주체성이 부족하다고 본 점들이었다.
일곱째, 단재(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쓸 무렵에 이미 연대나 기술하며 인명·지명이나 기술하는 역사를 반대하고, ‘민족진화’의 상태를 기술하며 국가치란의 인과를 분석하는 역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단재(신채호)가 역사의 근대과학화 또는 사회과학화를 주장하고 당시의 최신의 사회과학이론에 기초하여 역사를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기술하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가장 많이 원용한 당시의 진보적 사회과학이론은 허버트 스펜서·벤자민 키드 등의 사회진화론과 서구의 지리환경영향론과 우리나라의 전통적 역사지리론을 종합하여 그 자신이 발전시킨 지리영향설 등이었다. 당시 사회진화론이나 지리영향설 등은 서구에서도 역사연구에 널리 원용되고 있던 대표적인 시민적 사회과학이론이었다.
단재(신채호)는 사회진화론과 지리영향설의 큰 영향을 받고 역사에 있어서의 진화사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고대사 기술에서도 민족이 진화·진보해가는 과정을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단순한 사실의 서술에 그치지 아니하고 당시의 사회과학이론에 기초하여 집요하게 사실의 인과분석을 추구하였다. 이 점이 신채호의 『독사신론』과 그 이전 및 동시대의 다른 국사서들과의 현저한 차이점이다. 신채호에 있어서는 고증은 역사서술의 준비단계이고, 인과분석을 하는 ‘해석’ 사학에 치중하여 『독사신론』을 씀으로써 한국에서 시민적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한국에서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을 성립시킨 업적으로서 1908년의 『독사신론』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1931~1932년에 간행된 그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서에서도 우리는 역사주의적 고찰을 전개하여 각각 그 역사적·사회적 역할의 다름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하여 지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의 기본 뼈대는 이미 『독사신론』에서 만들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사신론』은 그 내용과 역사관이 근대국사학을 성립시킨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신역사’였기 때문에, 신민회 및 청년학우회 기관잡지로 역할하던 최남선 관리의 잡지 『소년』제3권 제8호(1910년 8월호, 이탈리아 재건영웅 카블 100주년 기념호)에「국사사론[國史私論(고대)]」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가들과 선각자들이 『독사신론』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단기 4244년(서기 1911년) 10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재미한인소년서회(在美韓人少年書會)에 의해 순국문(한글전용)으로 발행되었다. 해외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역사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순국문으로 발행되어 널리 애독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단재신채호전집』제3권에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 『신한국보(新韓國報)』에 연재된 『독사신론』, 잡지 『소년(少年)』에 전재된 『국사사론』, 그리고 재미한인소년서회의 순국문판 『독사신론』을 원문대로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2.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敍言)」은 단재(신채호)가 『국사신론』을 발표한 직후인 1909~1910년 망명 직전에 집필하다가 중단된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의 첫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1924년경 집필) 총론에서 거금(距今)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하면서, 사평체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지상에 발표하며, 이어서 수십 학생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중국식)의 연의(演義)를 본받은 비역사 비소설인 『대동사천년사』란 것을 짓다가 양역(兩役)이 사고로 인하여 중지되고 말았다고 기록하였다. 단재(신채호)가 여기서 짓다가 중단했다고 하는 『대동사천년사』의 이미 지은 부분이 이번에 새로 전집편찬위원회가 발굴한 『대동제국사서언』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도서인 이 책은 구한말~일제강점기 초기 어떤 이가 단기 4248년(서기 1915년) 을묘 6월에 『신채호저·무애산고(無涯散稿)』라는 표제로 단재(신채호)의 구한말 작품 몇 점을 등사로 필사해서 모아 놓은 필사집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이 작품이 단재(신채호)의 저작임은 단번에 알 수 있다.
『대동제국사서언』에 수록된 목차와 내용 범위는 다음과 같다.
一. 국사는 국민의 필수물
二. 구사가의 류견(謬見)
三. 금일 저사(著史)의 곤난
四. 본사(本史) 기(其) 수채(搜採)의 재료
五. 국명
六. 기원
七. 시대구별
八. 본론
단재(신채호)는 자신을 ‘신사씨(新史氏)’라고 호칭하면서 4천년 통사를 쓰려니 대표적 국명이 마땅치 않아서 편의상 ‘대동’을 택하여 쓴다고 하였다. 서언의 「기원」까지는 내용의 문제의식이 『독사신론』의 문제의식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중복을 피하여 여기서는 「시대구별」부터 간단히 해설하기로 한다.
단재(신채호)는 『대동사천년사』를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구분하였다.
① 태고사 : 단군 건국부터 삼왕조 분쟁에 지함.
② 상세사 : 삼왕조 분쟁부터 발해 멸망에 지함.
③ 중세사 : 발해 멸망부터 만주 입구(入寇)에 지함.
④ 근세사 : 만주 입구부터 불구(佛寇) 격퇴에 지함.
⑤ 최근세사 : 불구 격퇴부터 금일에 지함.
이어서 단재(신채호)는 태고민족사 부문을 다시 다음과 같이 6기(期)로 구분하였다.
제1기 : 고립시대 - 역 각 개인 경쟁시대
제2기 : 족장시대 - 역 각 가족 경쟁시대
제3기 : 추장시대 - 역 각 부락 경쟁시대
제4기 : 신국시대 - 역 각 신권 경쟁시대
제5기 : 봉건시대 - 역 각 군웅 분치시대
제6기 : 귀족시대
단재(신채호)의 태고사의 이 시기구분은 구한말에 단재(신채호)가 인류사를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① 추장시대 ② 귀족시대 ③ 전제시대 ④ 입헌시대를 거치면서 진화됐다고 설명한 틀 가운데 ① 추장시대와 ② 귀족시대 이전까지의 역사를 세분해서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본론에 들어가서 「동방고대의 각 인종」을 서술했는데, 편찬위원들 사이에 이 부분이 독립논설이라는 주장도 있어 합의가 되지 않았으므로 「동방고대의 각 인종」은 전집 제6권 「사론·논설」편에 수록하기로 했다.
3.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1931년 10월 15일부터 12월 3일까지, 그리고 이듬해 5월 27일부터 5월 31일까지 모두 40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1931~1932년에 활자화되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집필연대는 1910년대의 작품이다. 단재(신채호)의 연보에 보면 1915년에 만주 거류 동포 계몽을 겸해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재로 『조선사』를 발간했다고 했는데, 그 일부가 『조선상고문화사』가 아닌가 추정된다. 동창학교는 만주 환인현에 윤세복[尹世復(후에 대종교 3세 교주)]이 세운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동포 교육을 위한 학교였다.
『조선상고문화사』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단재(신채호)가 1910년대에 서술한 ‘고조선 역사’이다. 이 저서는 단군의 건국 직전에 중단된 『대동제국사서언』에 이어지는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다음과 같이 5편으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제1편 : 단군시대
제2편 : 단군조의 업적과 공덕
제3편 : 아사달왕조 시대와 단군 이후의 분열과 식민지의 성쇠
제4편 : 진한의 전성과 대외전쟁
제5편 : 조선열국 분쟁의 초기
제1편 「단군시대」에서는 서언과 같은 편인데, ‘조선’이라는 이름의 뜻과 조선 역대문헌의 화를 입음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은 음이 ‘주신(珠申)’과 같고 또 ‘숙신(肅愼)’과 같으니, 조선=주신=숙신이 한 나라였고 동일한 기원의 국명이라고 보았다. 또한 고조선은 3경5부제를 실시했는데, ‘고구려’·‘고려’ 등은 단군조선의 중부의 이름이라고 지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지금의 하북성·요서·요동지방에 진한·변한·마한의 삼한(북삼한·전삼한)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단군조선의 영역 안이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북삼한이 뒤에 한강 이남의 남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하였다. 이 관점은 그의「전후삼한고」와『조선상고사』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부여·낙랑 등도 단군조선의 3경9부 가운데 성 또는 부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신라·백제·가락·발해·태봉 등도 단군시대부터 명칭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조선 역대문헌의 화액(禍厄)」에서는 조선역사의 문헌들이 진개(秦開)·모돈(冒頓)·위만(衛滿)·유철[劉徹(한무제)]·설인귀(薛仁貴)·소정방(蘇定方)·호종단(胡宗旦) 등 외국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소멸된 것을 개탄하였다. 또한 그는 역대 문헌이 국내의 내란에 의해서도 소멸되고, 김부식 등 사대적 본국인들에 의해서도 다수 소실되었음을 각종 사례들을 들면서 지적하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새벽하늘의 별처럼 드문 부족한 사료를 가지고서도 ‘유증(類證)’·‘호증(互證)’·‘추증(追證)’·‘반증(反證)’·‘변증(辨證)’의 방법으로 실증적으로 조선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제2편 「단군조의 업적과 공덕」에서는 먼저 단군이 아들 부루(夫婁)와 신하 팽오(彭吳)를 황하 유역에 보내어 우(禹)에게 치수방법을 가르쳐 주어 우의 치수사업을 성공케 했음과 고대 중국과의 교류를 중국 고문헌 등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어서 단재(신채호)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이를 삼왕자라 하지 않고 구태여 ‘삼랑’이라고 하는 것은 단군을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고 기록한 곳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단군조선의 낭가신앙과 관련된 것이며, 신라의 ‘화랑’과 고구려의 조의선인(?衣仙人)의 연원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신지(神誌)』는 단군의 역사서로서, 그 저자를 책 이름에서 취하여 신지라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고조선의 문자를 신지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신지』의 역사가 곧 고조선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고조선 문자는『신지』역사책보다 훨씬 먼저 창제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고조선 문자를 만든 시조를 신지라고 하는 것은 정확치 않은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단군조선의 후예인 부여·고구려·신라·마한·가락·고려 등에서 10월 3일은 단군 탄신일이라 하여 기리고, 10월·3월·5월에 대회(대축제)를 여는 공통의 관습이 있게 된 것은 고조선 시기부터 형성된 관습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그 축제의 내용 관습에 ① 한맹(寒盟) ② 수박(手搏) ③ 검술 ④ 궁시(弓矢) ⑤ 격구(擊球) ⑥ 금환(金丸) ⑦ 주마(走馬) ⑧ 회렵(會獵) 등의 경기를 한 것은 시대에 따라 변경과 가감이 있을지라도 그 대부분은 단군왕조가 창시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단군의 통치방식은 5부를 두고 중부대가(中部大加)가 정권을 담당하되 3년에 한 번씩 교체하며, 동서남북의 4부의 제가(諸加)가 교대로 갈아들게 하는 방식이었다. 단군조선은 이 방식으로 아무런 쟁투 없이 거의 1천 년을 번영하였다. 이러한 단군의 5부의 통치방식은 상고시대의 중국에 수출되었다. 5부 대가의 별명을 ‘지’라고 했으므로 마가(馬加)를 ‘막리지(莫離支)’라고 했는데, 중국 상고의 ‘제(帝)’도 고조선의 ‘지’의 이름을 가져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단군 이후 1천여 년 동안의 고조선은 그 치제의 선미(善美)가 고대에 으뜸이었고 문화의 발달도 이웃 각 민족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제3편에서는 단군조선이 아사달로 천도한 아사달 왕조시대와 그 이후 분열, 그리고 중국에 있던 “식민지”의 성쇠를 다룬 편이다. 고조선은 단군 건국 이후 3경5부제를 실시하면서 1천여 년을 크게 번성하더니, B.C. 1334년(단군 1000년)경부터 B.C. 234년~B.C. 134년(단군 2100년~2200년) 사이에는 쇠미하게 되었다. 그 가장 큰 요인은 내부에서 갈등이 격화되어 불통일 상태에 빠졌고, 이를 통일할 큰 인물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단재(신채호)는 지적하였다.
B.C. 1154년~B.C. 1144년경에 주(周)의 문왕(文王)이 은(殷)의 주(紂)를 쳐서 은이 멸망하고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오자 조선왕은 이를 받아들여 현재의 만주 광녕현(廣寧縣)에 있는 한 고을의 군수를 맡기었다고 단재(신채호)는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기자일읍수위설(箕子一邑守尉說)을 더욱 확고히 정립하고, 사마천(司馬遷)의 ‘무왕봉기자(武王封箕子)’ 등 각종 기자조선설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반고(班固)의『한서(漢書)』에서 이를 빼고 다만 “기자가 조선에 피지(避地)하였다”라고 하여 사마천을 비판한 것을 지지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고죽국(孤竹國)이 단군 5부의 후손으로서 조선의 9족의 하나인데 주 무왕이 고죽을 멸하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형제가 주의 녹(祿)을 거절하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음은 그가 조선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당시 조선족이 식민하여 가장 번성한 곳은 ① 산동(山東) ② 산서(山西) ③ 하북(河北) 지방인데 주 무왕이 이를 공격하여 이 지방에서 부여족(조선족)의 교민과 지나족[支那族(중국족)]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주의 대공격으로 산동지방에 있던 조선족의 식민국인 엄(奄)과 우(?)는 싸웠으나 패전하여 망하고 내(萊)는 수백 년간 저항하면서 중국족인 제(齊)와 서로 대치하였다.
회하(淮河) 부근에서는 조선족의 서국(徐國)에서 서언왕(徐偃王)이 나와 크게 번영해서 그에게 조공하는 제후들이 36국에 달하게 되었다. 주가 비밀리에 초(楚)와 동맹을 맺고 조선족의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공격하여 결국 당하지 못해서 서국도 패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산동·회하지방의 고조선족 소국들의 역사를 쓰기 위해 실제로 이 지방을 답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는「대서제국(大徐帝國)의 흥망」이라는 절에 “팽성(彭城) 등지에 철문관(鐵門關)·주마당(走馬塘) 등의 지명이 있는데, 본토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양지(兩地)는 다 서언왕의 말로의 유적이라. 철문관이 명말부터 인민이 교통의 불편으로 말미암아 전체를 파고 뚫으므로 그 유적을 찾을 수 없으나, 고대에는 양석(兩石)이 좌우에 우뚝 서서 철문과 같은 고로 철문관이라 이름하며, 그 안에는 사면이 꽉 막히고 수백가의 살만한 벌이 있는데, 언왕(偃王)이 이 속에서 초병(楚兵)에게 피위(被圍)되었더니, 얼마 아니되어 감사대(敢死隊)로 선봉을 삼아 관문에 나와 주마당에 이르러서는 말타고 달린 고로 ‘주마당’의 이름을 얻음이라 하더라.”라고 서술한 곳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제4편 「진한의 전성(全盛)과 대외전쟁」에서는 고조선의 요서지방의 구역에 진한(진조선)이 발흥하여(전삼한설) 중국의 제(齊) 등과 싸운 사실을 서술하였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고조선은 아사달 왕조부터 통일이 깨어져 열국이 나뉘어 다투었으므로 해외 식민의 여러 소국들이 비록 지나(중국)족의 무력 공격을 만나도 이를 구원할 겨를이 없다가 요서지방에 진한의 진왕이 나서 B.C. 634년에 무력으로 조선열국의 맹주가 되어 고조선의 제왕(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지나(중국)족에서는 제의 환공(桓公)이 재상 관중(管仲)을 얻어 부강해지자 맹주가 되어 지나(중국)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두 민족의 각각의 연합군이 연경(燕京)지방에서 만나 민족적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진한(진조선)의 진왕이 B.C. 706년에 연의 항복을 받고 남으로 나아가 제를 치니 제가 진왕에게 굽히어 세공을 바치고 현제(玄帝)의 존호를 올리매 이에 진한의 세력이 지나(중국)에 덮이어 주(周)·노(魯)·위(衛)·조(曺)·송(宋)·허(許) 등 지나(중국)족의 열국이 제를 따라 진한을 상국으로 높이니, 이 시기가 진한의 전성시기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서 ‘기조(箕朝)’의 전설이 있었다고 했으나, 뒤에 쓴 『조선상고사』에서는 이 부분이 잘못 기술된 것이라고 모두 취소하였다. 즉 전사(『조선상고문화사』)에는 단군왕검 1220년 후에 “기자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됨이 아니요,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나니 이는 제2편 제2장에 기재하려니와, 이제 사실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하노라.”라고 서술하였다.
진왕이 제를 친지 44년 후인 B.C. 663년, 이미 진왕은 죽고 그 후손의 통치기에, 제 환공이 고조선족의 내(萊)를 급습하여 멸망시키므로 진한의 왕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제를 공격하니 양 민족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이 전쟁은 후에 고구려와 수의 전쟁보다도 더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패는 결정되지 못했으나 제는 진왕에게 현제 칭호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지나(중국)족의 연이 힘을 길러 연의 진개(秦開)가 B.C. 334년에 고조선의 진한을 공격하여 고조선의 고죽(孤竹)과 선비(鮮卑)를 잃게 되었다. 여기서 고조선이 난하 이서지방을 연에 잃게 되었다. 뒤이어 진이 지나(중국)족을 통일하면서 B.C. 254년에 연을 멸하고 만리장성을 만들어 고조선 세력과의 경계선을 만들었다.
제5편 「조선열국 분쟁의 초기」에서는 고조선의 속국이었던 흉노(匈奴)가 자립하여 지나(중국)족들을 위협하고, 지나(중국)에서는 한(漢)의 유방(劉邦)과 초(楚)의 항우가 대립하다가 한이 통일한 시기의 고조선의 상태를 서술하였다. 일찍이 진시황이 지나(중국)족을 통일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이 진시황과 협정하여 중립공지(中立空地)를 설정했었는데, 진이 망했으므로 부(否)의 아들 준왕(準王)은 이 협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위만(衛滿)이 망명해 오므로 준왕은 중립공지에 받아들여 서번(西藩)을 삼았더니, 위만이 망명자를 모으고 밖으로는 흉노와 맺어 반란을 일으켜서 준을 공격하고 만주 요동의 광녕현에 있는 준의 수도(북평양)를 점거하였다. 위만 조선이다. 준왕의 세력은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세우니 이에 따라 진한·변한도 남천하여 후삼한시대가 시작되었다. B.C. 109년에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의 영토였던 요동·요서지방에 진번(眞番)·임둔(臨屯)·현토(玄?)·낙랑(樂浪)의 한의 4군을 설치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위만조선의 영토는 압록강 이북 요동·요서지방이었으며 그 수도도 요동의 광녕현이었고, 한사군도 모두 압록강 이북의 요동·요서에 있었다고 논증하였다. 이어서 부여에서 발흥한 고구려가 요동·요서에서 설치된 한사군을 쳐서 멸하고 동부여의 항복을 받으며 남평양에 수도를 두었던 동남의 낙랑국[국왕 최리(崔理)]도 멸하여 매우 강성한 나라로 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여기까지 쓰고 ‘미완’이라는 글자와 함께 중단되고 있다. 단재(신채호)의 그 후의 집필은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새로이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그 동안 연구한 결과와 함께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이미 상세히 서술한 부분들은 간략히 요약하고, 새로 연구한 부문은 상세하게 서술 가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선상고문화사』가 1910년대에 먼저 저술되고, 그 다음에 1910년대 말~1920년대 초기(1924년경)에 걸쳐 『조선상고사』가 후에 저술된 것을 알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체계화한 고조선사의 고전이라 할 것이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대동제국사서언』·『조선상고문화사』는 (『조선상고사』와 함께) 그가 근대역사학의 방법과 역사관으로 한국민족사의 초기형성과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체계화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것이다.
제4권 역사
乙支文德
水軍第一偉人李舜臣
수군제일 거록한 인물 이순신전
東國巨傑崔都統
동국에 제일영걸 최도통전
伊太利建國三傑
1. 영웅 전기물의 저술 배경과 의의
본권에 수록된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한글판 『을지문덕』, 국한문본 『동국거걸최도통(東國巨傑崔都統)』,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水軍第一偉人李舜臣)』,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국한문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등의 저작은 1900년대 중·후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역사학자로 발신(發身)하여 활동하던 초기 역사관과 애국계몽사상가로서 활동하던 시기 그의 민족주의 사상의 특징과 편린을 선명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전기물들이다.
발표 시기면에서 보면, 1907년 10월 25일 서울 광학서포(廣學書?)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태리건국삼걸전』(양계초의 원저명은 『의태리건국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이 비록 역술본(譯述本)이긴 하나 가장 빠르고, 처녀작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1908. 5. 2~8. 18)과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1908. 6. 11~10. 24)이 각각 연재되고, 또 그런 와중에서 1908년 5월 30일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같은 해 7월 5일 한글판 『을지문덕』을 잇달아 서울 광학서포에서 각각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의 무장 최영(崔瑩)의 영웅적 활동을 그린 『동국거걸최도통』이 역시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1909년 12월 5일에서 1910년 5월 27일까지 가장 뒤늦게 연재 발표됨으로써 고구려·고려·조선시대를 각각 대표하는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의 영웅전기 3부작은 비록 일부가 미완이긴 하나 신채호가 구상한 민족사적 3걸의 얼개가 대충 마무리된 셈이다.
1900년대 중·후반 애국계몽운동기에 신채호는 국사를 민족사로 파악하는 한편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 이후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난극복과 한국사를 빛낸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애국심으로 무장한 영웅들의 역사전기물을 통해 역사자강·민족자강의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한의 희망」(1908),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1908), 「영웅과 세계」(1908), 「기회는 불가좌대(不可坐待)」(1908), 「20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1909), 「20세기 신국민」(1910) 등의 논설을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표하고, 앞의 역사전기물과 함께 일제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적 전야(前夜)나 다름없는 한말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국민적 영웅의 출현을 열렬히 대망하고 국민 모두가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해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불법적 강권으로 체결된 을사늑약과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사건을 계기로 순종에게 양위(讓位)한 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8월 구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민족적 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전후해서 일제의 식민지화 기도에 대해 저항하기 위한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고, 신채호·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 등 애국계몽사상가들의 활동이 전개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된 1905년 전후 시기에 대한제국의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현실을 우리 민족이 직면한 최악의 역사적 위기로 파악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 국민이 좌절하지 말고 역으로 민족적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가운데 희망·애국심, 그리고 역사에 대한 원력(願力)과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많은 애국계몽 논설과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 이후에 집중적으로 발표된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민족사적 3걸(傑)에 대한 역사전기물은 모두 자주독립된 민족국가 건설과 역사의 부활을 열렬히 희구하는 신채호의 역사의식과 시대적 처방전(處方箋)으로써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민족을 역사 주체로 인식하는 역사학자로서 그의 학문적인 사명감과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점으로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한말은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침략으로 일찍이 우리 민족이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증유의 식민지 전야와 같은 민족적 위기를 노정(露呈)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현실을 해소하기 위한 혁명적 변화를 주도하면서 대세를 역전시킬 구국적 영웅의 출현을 열렬히 대망하면서, 그 모범적인 사례를 고대와 중세의 역사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의 역사전기물들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처한 대한제국기의 시대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애국계몽사상가로서 국민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계몽하는 데 1차적 목표를 두고 있다. 아울러 그가 역사학자로서 발신하여 이후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창건하는 데 그 출발점이자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907~1910년에 발표된 신채호의 역사전기물에 대해 편의상 발표순에 따라 내용과 역사적 의의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신채호가 애국계몽사상가·역사학자로서 1900년대 중·후반 대한제국이 처한 역사적 위기를 타개할 국민적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고, 국민 모두에게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분발할 것을 갈망하는 의도에서 역술된 책이 바로 『이태리건국삼걸전』이다. 1907년 10월 25일 서울 광학서포에서 본문 94면으로 발행된 이 책은 신채호의 처녀작과 같은 단행본 저술로써 원저자인 양계초[(梁啓超), 호 임공(任公), 1873~1930]의 『의태리건국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을 번안, 장지연(張志淵)의 교열(校閱)로 출간한 것이다.
이 역술본의 서문은 교열자인 장지연이 썼고, 수편(首篇) 서론(緖論)에서 종편(終篇) 결론에 이르기까지 모두 28절의 목차 아래 그 내용이 국한문 혼용의 논설체로 서술되어 있다. 원저자인 양계초는 일찍이 1898년 4월 강유위(康有爲) 등과 함께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하고 국정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민족혁명을 고취하고 공화제의 필요성을 선전하면서, 그해 8월 강유위 등과 함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양계초는 손문의 혁명적 입장과는 달리 청조의 개조 강화를 주장했으며, 경학(經學)·사학·불교학 등에 박통하였다. 그의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은 한말 지식인들에게 민족자강사상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신민설(新民說)』과 『중국역사연구법』 등의 저술은 신채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채호는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서론과 결론에서 ‘무애생(無涯生)이 왈(曰)’이라는 그 자신의 관점과 평언(評言)을 붙여 한말의 위기적 현실에 빗대어 애국자 대망론을 펼치면서,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민족국가 통일운동기에 활약한 세 역사적 인물의 혁명적 위업과 애국적 활동을 소개하였다. 즉, 이탈리아 국민적 애국주의의 상징적 존재이자 통일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운동을 주도했던 마찌니[瑪志尼(Giuseppe Mazzini, 1805~1861)], 가리발디[加里波的(Giuseppe Garibaldi, 1807~1882)], 카부르[加富爾(Camillo Benso di Cavour, 1810~1861)] 등 3걸의 활동을 통해 철저한 조국애와 민족주의 사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운동에 헌신한 애국적 영웅의 표본으로 삼으려는 관점을 드러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혁명가 마찌니는 일찍이 카르보나리(Carbonari) 당원으로 입당, 뒤에 망명하여 마르세이유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을 결성하였다. 그는 1848년 귀국하여 밀라노의 혁명에 참가한 뒤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등 통일 이탈리아 건설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정열적인 애국자 가리발디는 일찍이 청년 이탈리아당에 가입, 공화파의 이탈리아 혁명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1860년 ‘붉은 셔어츠대’ 1천여 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과 남부 이탈리아를 공략, 사르디니아(?的尼亞)왕에게 바침으로써 마찌니·카부르와 함께 이탈리아의 근대 국민국가 통일운동의 3대 위인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독립운동가 카부르는 뒤에 사르디니아의 수상직에 올라 활약하였다. 그는 조국통일을 위해 나폴레옹 3세와 손잡고 1859년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뒤 롬바르디아를 해방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이탈리아의 완전 통일을 이루기 직전 애석하게도 별세하였다.
이 역술본 역사전기물은 19세기 이탈리아의 국민국가 통일과정에서 활약한 세 영웅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철저하고도 탁월한 애국심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가를 그 역사적 배경과 함께 국한문 혼용의 논설체로 서술한 것이다. 즉, 그들의 출생에서 성장과정,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 영웅의 생애와 활동상을 그 시대적 배경 하에 묘사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3걸이 단순히 근대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주도한 타국의 영웅으로만 그치지 않고, 1900년대 중반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상황을 척결하고 국운을 소생·부활시킬 민족영웅의 상징적 표본으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데 번안자의 참다운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이 역술본에서 ‘무애생의 왈’이라는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과 평언을 붙여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펼쳤다. 그에 의하면 19세기 중반 당시 이탈리아가 당면한 역사적 조건이 20세기 초 식민지적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형편과 비슷하다고 인식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격차 또한 멀지 않고, 비록 타국의 과거사라 할지라도 그 역사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난 극복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을 짙게 드러냈다. 비록 이 역술본에서는 19세기 통일 이탈리아의 국민국가 건설과정에서 나타난 빈(wien)체제의 붕괴과정과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상황에 대한 인식, 즉 제국주의적 국제정치상황 사이에서 노정되는 커다란 역사조건의 괴리 등에 대한 역사인식이 드러나 있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인식과 객관적 서술이 결여되어 있는 등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신채호가 일제의 악랄한 무력적 침략이 가중되는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통일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에 헌신한 세 영웅의 활동상이 크게 어필하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이탈리아 3걸의 생애와 활동상을 통해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배양하고 자강론적(自强論的)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려 했다는 데 이 책을 번안한 역술자의 진정한 저술 의도와 목표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들 마찌니·가리발디·카부르 등 세 영웅의 생애와 애국적 활동을 이탈리아와 19세기라는 공간적·시간적 조건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민들에게 민족적 위기의 해소와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새로운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1900년대 초 당시로써는 최초의 역사전기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이 세 영웅의 생애와 활동상을 곧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의 사회적·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상징적 구국의 영웅상(英雄像)으로 크게 부각시켰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역술자로써는 이 3걸을 통일 이탈리아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을 주도하며 헌신한 지역적·시대적 특수성이나 그 사례로 한정시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경쟁과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대한제국의 국운을 바로잡고 국권 회복(恢復)과 함께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한 민주공화의 정체를 골간으로 하는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열렬히 대망했다는 데 이 저술을 번안하게 된 배경과 동기가 있었다.
신채호는 그 서론에서
무애생(無涯生)이 왈(曰), 위재(偉哉)라 애국자(愛國者)며 장재(壯哉)라 애국자여. 애국자가 무(無)한 국(國)은 수강(雖强)이나 필약(必弱)하며, 수성(雖盛)이나 필쇠(必衰)하며 수흥(雖興)이나 필망(必亡)하며 수생(雖生)이나 필사(必死)하고, 애국자가 유(有)한 국은 수약(雖弱)이나 필강(必强)하며 수쇠(雖衰)이나 필성(必盛)하며 수망(雖亡)이나 필흥(必興)하며 수사(雖死)이나 필생(必生)하나니, 지재(至哉)라 애국자며 성재(聖哉)라 애국자여. 기국(其國)의 편토촌양(片土寸壤)이 무비(無非) 애국자의 완(腕)·비(臂)·지(趾)·지(指)로 소개척자야(所開拓者也)며, 기국의 척신신자맹(隻身身子氓)이 무비(無非) 애국자의 심혈누제(心血淚悌)로 소잉조자(所孕造者)며, 산하(山河)의 일초엽(一草葉)과 수저(水底)의 일어별(一語鼈)이 무비 애국자의 정신기백으로 소화육자야(所化育者也)며…
라고 열정적인 애국심과 헌신적인 애국자의 표본을 이 역술본 도처에서 발견하고 강조하려고 하였다.
신채호는 이 책에서 헌신적이고 참다운 애국적 지도자의 출현은 민족자강과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필수요건이자 원동력임을 전제, 그 필요성을 크게 주장하고 있다. 이 역술본에서 신채호가 대망하는 애국자의 상(像)은 결코 입과 붓으로 그치는 형식적인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뼈·피·살갗·얼굴·모발 등 신체 각 조직조차 철저하리만큼 심신 모두가 애국심으로 절여지고 무장된 애국자였다. 즉 “와시(臥時)의 염(念)도 국야(國也)며 좌시(坐時)의 상(想)도 국야며 기가야(其歌也)도 국야며 기소야(其笑也)도 국야며 기곡야(其哭也)도 국야라”고 할 정도의 심신 모두가 민족애의 열정으로 점철(點綴)된 철저하리만큼 헌신적이면서도 식견이 뛰어난 애국자의 상(像)인 것이다.
신채호는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서론 말미에서 이 책을 역술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간략히 밝혀 놓았다.
오호(嗚呼)라. 문명의 등(燈)은 6주(洲)에 찬란하고 자유의 종(鐘)은 사린(四?)에 요란한데 아배(我輩)는 하죄(何罪)완대 독(獨) 차(此) 지옥(地獄)고 망산하이참목(望山河以慘目)하고 앙창천이비규(仰蒼天以悲叫)타가 유정(有情)의 일필(一筆)로 이태리 애국자 3걸의 역사를 술(述)하노니, 기(其) 국난(國難)이 여아상류(與我相類)하고 기(其) 연조(年祚)도 거금불원(距今不遠)이라. 기(其) 간고경력(艱苦經歷)이 방불왕래우오흉(彷彿往來于吾胸)하고 기성음소모(其聲音笑貌)가 돌올봉현어오전(突兀捧現於吾前)하는도다. 약(若) 차서(此書)의 인연과 차서의 소개로 대한(大韓) 중흥(中興) 삼걸전(三傑傳) 혹 삼십걸(三十傑) 삼백걸전(三百傑傳)을 경장(更張)하면 차(此)는 무애생 무애(無涯)의 혈원야(血願也)로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 세계의 선진 각국은 문명의 진보와 민주공화를 기반으로 한 자유가 날로 신장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만이 캄캄한 어둠 속에 놓인 채 망연자실해 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적 시대현실 속에서 근대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운동에 헌신한 마찌니·가리발디·카부르의 그 영웅적 활동과 애국심을 통해 이를 본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국민의식 또한 크게 각성됨으로써 국난 극복과 우리나라를 중흥시킬 민족사적 영웅 3걸, 30걸, 아니 3백걸전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이것이 곧 번안자(무애생)가 의도한 피끓는 염원이라고 독자들에게 간곡히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국권극복을 선도할 수 있는 애국심에 투철한 민족영웅의 출현을 갈망하는 신채호의 염원과 찬송은 그의 시대가 당면한 사회적·역사적 현실의 특성과 요구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영웅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등 영웅사관(英雄史觀)에 기초한 그의 초기 자강론적 민족주의와 역사 민족주의의 발상과정과 그 사상적 특성·경향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이는 1900년대라는 간난과 위기의 시대를 만나 국민 모두에게 국권회복의 용기를 북돋고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 기본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바램을 강조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신채호의 관심은 통일 이탈리아 건설운동을 주도한 이들 3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투철한 애국심으로 대외투쟁에 승리, 조국 수호에 큰 역할을 한 민족사적 3걸에 대한 관심으로 전위(轉位)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참고로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총 28절, 본문 94면으로 구성된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차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편(首篇) 서론(緖論), 제1절 3걸 이전의 이태리 형세, 제2절 소년 이태리의 창립(?立), 제3절 카부르(加富爾)의 궁경(躬耕), 제4절 마찌니(瑪志尼)와 가리발디(加里波的)의 망명, 제5절 남미주(南美洲)의 가리발디, 제6절 혁명 이전의 형세, 제7절 1818년의 혁명, 제8절 로마(羅馬)공화국의 건설과 멸망, 제9절 혁명 후의 형세, 제10절 산디니아(?的尼亞)왕의 현명, 제11절 카부르의 내정개혁, 제12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1단, 제13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2단, 제14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3단, 제15절 이오(伊奧: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개전(開戰)의 준비, 제16절 이오(伊奧: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제17절 가리발디의 사직, 제18절 카부르의 재상(再相), 제19절 당시 남(南)이태리의 형세, 제20절 가리발디의 이태리 감정(戡定), 제21절 남북 이태리의 합병, 제22절 제1국회, 제23절 카부르의 장서(長逝), 제24절 가리발디의 하옥(下獄)과 유영(遊英), 제25절 가리발디의 재체(再逮), 제26절 이태리의 대일통(大一統)이 성(成)함, 종편(終篇) 결론.
3.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한글판 『을지문덕』
신채호는 자강론적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대외전(對外戰)에서 한국사의 영광과 긍지를 선양한 삼국시대의 민족영웅을 부각시키는 작업으로 1908년 5월 30일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같은 해 7월에는 한글판 『을지문덕』을 서울 광학서포에서 매당(邁堂) 변영만(卞榮晩) 교열로 각각 발간하였다.
무애생(無涯生) 신채호의 필명으로 저술된 국한문판의 원제는 ‘대동사천재 제일위인 을지문덕 대동사천재(大東四千載) 제일위인(第一偉人) 을지문덕(乙支文德)’이며, 권두에는 변영만·이기찬(李基燦)·안창호(安昌浩) 등의 서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본문 43면으로 이루어진 한글판에는 책의 맨 앞에 을지문덕의 입상 초상화가 덧붙여 있으며, 이들 인사의 서문이 모두 생략된 채 실려 있지 않다.
먼저 변영만은 순한문체로 집필된 서문에서 고래로 우리나라는 정주(程朱)의 성리학과 한유(韓愈)·소식(蘇軾)·소철(蘇轍)·이백(李白)·두보(杜甫) 등 중국 당송(唐宋) 8대 가류의 문장만 읊조리며 의존하고 숭상하는 사대주의적 폐풍이 전해져 그 결과 날이 갈수록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이 쇠퇴하고 노예학(奴隸學)에 길들여지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살수(薩水)에서 수군(隋軍)을 격파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의 전기야말로 대동(大東) 4천년의 자주독립의 민족정신을 선양한 전국민의 필독서로서 우리나라 서적계의 효시를 이루는 역사전기물로 뜻깊은 회심의 쾌작(快作)이라고 상찬하였다.
신채호의 벗인 이기찬 또한 그 서문에서 을지문덕이야말로 “우리 대동 4천여년 역사상에 제일되는 위인이니 그 독립적 기상(氣像)과 건투적 정신이 실로 우리 대동민족의 대표적 인물이며 모범적 인물이다”라고 전제, 영웅을 숭배하고 연구하는 자는 대영웅 을지문덕의 위업, 곧 그 ‘성공한 역사와 그 인격의’ 자취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저자의 웅혼탁영(雄渾卓瑩)한 문장으로써 윤색을 가하여 살수의 굉렬(轟烈)한 전황(戰況)과 을지공(을지문덕)의 심의(沈毅)한 인격을 묘사한” 신채호의 이 역사전기물이야 말로 그 독립적 기상과 건투적 정신을 국민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안창호는 해외 각국에서 워싱톤(華盛頓)과 나폴레옹(拿破倫)과 같은 영웅의 전기를 통해 수많은 후세의 영웅들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역대 우리나라는 을지문덕과 같은 민족적 대영웅의 기록과 사적이 미진하여 후세인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영웅의 활동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미진한 가운데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그 논단(論斷) 또한 매우 정밀하게 서술한 저자 신채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하여 이 역사전기물을 통해 “조국의 명예역사를 거(擧)하여 비열자(卑劣者)를 경성(警醒)함이며…선민(先民)의 위대사업을 찬(贊)하여 국민의 영웅 숭배심을 고취함이며…2천년 전의 풍운전쟁을 한가롭게 앉아 노래함이 아니라 열성적·모험적의 옛사람의 지난 자취를 묘화(描畵)하여 2천년 후 제2 을지문덕을 환기함이니…”라고 이 전기물의 시대적·계몽적 역할과 선구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당시 국난을 타개할 민족적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는 1900년대 위기적 시대현실 속에서 애국심 배양을 위한 그 계몽적 역할에 한결같이 주목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권두에 저자의 범례가 있고,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17장에 본문 7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 내용의 서술 체제는 관련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논문에 가까운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의 차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론(緖論), 제1장 을지문덕 이전의 한한(韓漢)관계, 제2장 을지문덕시대의 여수(麗隋)형세, 제3장 을지문덕시대의 열국(列國)상태, 제4장 을지문덕의 의백(毅魄), 제5장 을지문덕의 웅략(雄略), 제6장 을지문덕의 외교, 제7장 을지문덕의 무비(武備), 제8장 을지문덕의 수완(手腕)하에 적국(敵國), 제9장 수구(隋寇)의 성세(聲勢)와 을지문덕, 제10장 용변호화(龍變虎化)의 을지문덕, 제11장 살수(薩水) 대풍운의 을지문덕, 제12장 성공 후의 을지문덕, 제13장 구사가(舊史家) 관공(管孔)의 을지문덕, 제14장 을지문덕의 인격, 제15장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을지문덕, 결론.
먼저 저자는 범례를 통해 “우리나라 4천년 인물 가운데 그 웅위민활(雄偉敏活)한 수완을 발휘하여 굉대휘혁(宏大輝赫)한 공업을 세운 자를 헤아리건대 부득불 을지문덕에게 첫 손가락을 꼽을 터인데, 그럼에도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려 있는 을지문덕의 역사가 수십 귀절에 불과하니 이가 어찌 후인의 책임이 아니리오?”하고 영웅 경시의 풍조를 개탄하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에 관한 일련의 사적을 가능한 정밀하게 수집하고 널리 채록하여 사료에 입각한 충실한 ‘을지문덕전’이 되도록 노력했음을 밝혀 놓고 있다.
이어서 저자는 본문「서론」에서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공업(功業)과 우리 민족성의 강용(强勇)함이 침략군 수군(隋軍)을 전멸시켜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의 영웅적 활동에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년동안 이소사대(以小事大) 사대주의에 찌든 우유(迂儒)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史籍)에는 위대한 영웅의 강의불굴(强毅不屈)의 역사는 거의 축소되거나 매몰 제외되어온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개탄하면서 일대 민족적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신채호는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발간 이후 그가 재직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1908. 5. 2~8. 18)에 국한문 혼용의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을, 역시 『대한매일신보』(1909. 12. 5~1910. 5. 27)에 국한문 혼용의 『동국거걸최도통』을 각각 연재 발표하는 등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을 한국사를 빛낸 민족사적 3걸로 간주하는 역사전기물을 잇달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한문에 소양이 없는 일반민중과 부녀층을 상대로 그들을 계몽하고 널리 읽히기 위해 1908년 7월 서울 광학서포에서 한글판 『을지문덕』을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한편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을 『대한매일신보』(1908. 6. 11~10. 24)에 연재 발표하였다.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민족사를 빛낸 이들 세 영웅은 모두 수(隋)·명(明)·왜국(倭國) 등 침략적의 외세와의 투쟁에서 크게 승리한 민족적 위인들이며, 애국심으로 무장한 대표적인 구국의 영웅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단(但) 일국(一國)의 강토는 기국(其國)의 영웅이 신(身)을 헌(獻)하야 장엄케 한 자며 일국의 민족은 기국의 영웅이 혈(血)을 유(流)하야 수호한 자라. 정신은 산립(山立)이며 은택(恩澤)은 해활(海闊)이거늘 기국의 영웅을 기국의 민족이 불지(不知)하면 기국이 국(國)됨을 기득(豈得)하리오. 고로 대가(大家)의 사필(史筆)로 영웅의 진면목을 사전(寫傳)하며 재자(才子)의 사부(詞賦)로 영웅의 대공덕(大功德)을 찬미하고 노(爐)의 행(香)과 단(壇)의 고(鼓)로 영웅의 하강(下降)을 기도하며…내(乃) 아국(我國)은 영웅 숭배하는 근성이 하여시(何如是) 박약(薄弱)한지 금고무쌍(今古無雙) 진정영웅(眞正英雄)은 악착(齷齪) 사필하(史筆下)에 초초매장(草草埋葬)하고 기혹(其或) 영웅으로 신앙하는 자는 지록이마(指鹿爲馬)함과 무이(無異)하여 장혁악습(墻?惡習)으로 동족(同族)과 상전한 자도 왈(曰) 시영웅(是英雄)이라 하며, 낙천주의로 외구(外寇)을 미사(媚事)한 자도 왈 시영웅이라 하며, 심지어 적국창귀(敵國?鬼)로 조국을 반서(反?)한 자[설인귀(?仁貴)의 유(類)]도 왈 시영웅이라 하야 인간 구비(口碑)와 한청유적(汗靑遺蹟)이 차유인(此類人)에게 상다(常多)하니 아(我)가 영웅 2자를 위하여 일곡(一哭)함이 가하도다.
신채호는 이 책의 서론에서 “일국의 민족은 그 나라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라”고 영웅의 역사적 역할을 전제하면서 민족영웅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신앙을 크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기왕의 사서가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권 수호에 헌신한 각 역사시기에 활약한 영웅의 행적이나 활동상을 소홀히 하거나 왜곡시켰음을 깊이 개탄하였다. 그는 역사전기 『을지문덕』의 서론과 결론에서 한민족의 국력이 강성하고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던 고대세계에 깊은 향수를 나타내면서, 민족사를 빛낸 “지나간 영웅을 기록하여 장래의 영웅을 부르노라”고 하여 국권 회복과 민족 중흥의 구국적 영웅상의 도래(到來)를 열렬히 희구해 마지않았다.
이처럼 신채호가 한말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과거의 영웅을 사(寫)하여 미래의 영웅을 초(招)하노라”고 하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역사적 영웅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러한 영웅들의 존재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민족의 사표로써 각 시대마다 위기적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국민들에게 국난 극복을 위해 무궁하리만큼 용기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깊이 인식하였다.
신채호는 역사전기 『을지문덕(乙支文德)』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한중(韓中)관계, 고구려와 수나라의 형세, 열국상태를 논설체로 개관하고, 을지문덕의 웅략·외교·무비·전술·인격 등과 살수대첩의 경과와 고구려의 승전 사실을 비교적 소상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612년(영양왕 23) 수양제(隋煬帝)의 총지휘하에 1백여 만에 이르는 대규모의 군단으로 고구려를 침공한 역사적 상황에 주목하였다.
즉, 수나라 육군이 고구려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성(遼東城)에 쇄도하여 포위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이 이끄는 3만 5천명의 별동부대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신책(神策)에 가까운 용변호화(龍變虎化)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압록강과 살수(현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깊이 들어왔다가 지치고 굶주리게 되어 헛되이 철수하던 중 마침내 살수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았다. 이 살수대첩은 수장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케 하고 수군 2,700명의 생존자만이 겨우 돌아갈 정도의 대전과를 거두어 고구려군에게 대승리를 가져다 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이 싸움에서 수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로 말미암아 내란으로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고대 한민족의 대외투쟁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을지문덕과 같은 영웅의 전기물을 낸 것은 일제의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기에 처한 시대현실 속에서 국민과 청소년들이 강용(强勇)한 영웅들의 사적을 본받아 외세를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위한 영웅적 투쟁의 필요성을 고취하기 위한 애국계몽적 관점이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애국적인 영웅들의 무장투쟁 활동을 통해서 애국계몽운동과 함께 당시 전개되고 있던 항일 의병무장투쟁을 고무 격려하려는 의도도 직·간접적으로 은밀하게 담겨져 있었다. 일례로 한글본 『을지문덕』에 서술된 다음과 같은 내용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무장투쟁의 당위성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고로 나의 권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보호할 따름이오, 나의 권리가 이미 떨어지거든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찾아올 따름이며, 설혹 형극 속에 비참한 일을 당하여 회계에 부끄러움을 잠시도 참지 못할 경우를 당하면 마땅히 날마다 섶에서 자고 때때로 쓸개를 맛보아 칼과 피로 전국 인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하거늘…
신채호는 한글판 『을지문덕』 결론 부분에서 “…지금은 일폭 금수강산이 파쇄가 되어 단군 이후에 사천년을 전래하던 중심기지까지 남에게 사양하여 우리집 형제들은 발을 디딜 곳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압록강 서편을 생각이나 하여 보리오. 슬프다. 이십세기 새 대한에 을지문덕의 탄생이 어찌 그리 더디뇨.” 하고 고대세계의 웅비(雄飛)했던 영웅의 활동과 현재의 암담한 역사적 상황에 대비하면서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 책 말미에 “슬프다. 만일 다른 나라의 진보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진대 중고시대에 그렇게 강한하던 민족이니 지금 당하여 세력이 마땅히 세계에 으뜸이 될 것이어늘 무슨 연고로 그 타락한 경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나뇨. 내 이제야 알괘라. 그 나라 인민의 용맹하고 나약함과 넉넉하고 용렬함은 전혀 그 나라에 먼저 깨달은 한 두 영웅이 고동하고 권장함을 따라서 진퇴하는 바로다” 라고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위기의 시대를 구원할 민족영웅의 메시아적 역할을 대망하는 영웅사관의 일단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하였다.
4.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水軍第一偉人李舜臣)』과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신채호가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한글판 『을지문덕』 발간에 이어 금협산인(錦頰山人)이란 필명을 써 『대한매일신보』(1908. 5. 2~8. 18)에 국한문 혼용의 역사전기물로 연재 발표된 것이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이다. 이어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민중과 청소년·부녀층을 계몽하려는 의도에서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을 국문판 『대한매일신보』(1908. 6. 11~10. 24)에 잇달아 연재 발표하였다.
먼저 국한문 혼용으로 서술된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의 차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서론(緖論), 제2장 이순신의 유년(幼年)과 급(及) 기(其) 소시(少時), 제3장 이순신의 출신과 기후곤건(其後困騫), 제4장 방호(防湖)의 소역(小役)과 조정의 구재(求材), 제5장 이순신의 전역(戰役) 준비, 제6장 부산해(釜山海) 부원(赴援), 제7장 이순신의 제1전玉浦, 제8장 이순신의 제2전唐浦, 제9장 이순신의 제3전見乃梁, 제10장 이순신의 제4전釜山, 제11장 제5전 후의 이순신, 제12장 이순신의 구나(拘拿), 제13장 이순신의 입옥(入獄)·출옥(出獄)간에 국가의 비운(悲運), 제14장 이순신의 재임(再任) 통제사(統制使)와 명량(鳴梁)의 대전첩(大戰捷), 제15장 왜구의 말로, 제16장 진린(陳璘)의 중변(中變)과 노량(露梁)의 대전(大戰), 제17장 이순신의 상환(喪還)과 급(及) 기(其) 유한(遺恨), 제18장 이순신의 제장(諸將)과 공의 유적(遺跡) 급(及) 기담(奇談), 제19장 결론.
한편 신채호는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 서론에서,
오호(嗚呼)라. 도국수종(島國殊種)이 대대(代代) 한국의 혈적(血敵)이 되어 일위상망(一葦相望)에 시선(視線)이 독주(毒注)하고 구세필보(救世必報)에 골원(骨怨)을 심각(深刻)하여, 한국 사천재(四千載) 역사에 외국 내침자를 역수(曆數)하면 왜구(倭寇) 2자가 기호(幾乎) 십지팔구(十之八九)에 거하여…
라고 하면서, 역대 왜구의 침략을 구체적으로 예거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의탁하여 한반도를 무력으로 보호국화한 뒤 식민지화 기도를 획책하는 1900년대 초 일제의 침략적 마수(魔手)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이어서 역사상 일본과의 대외전에서 승리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신라 태종, 고려시대의 김방경(金方慶)과 정지(鄭地), 조선시대 이순신의 위업을 열거하면서 특히 이순신을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대일전을 승리로 이끈 탁월한 민족사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다시 이 책의 결론에서 충무공(忠武公)을 영국의 넬슨[乃利孫(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과 견주어 그 위대성을 평가한 다음, “오호라, 영웅의 명예는 항상 그 나라의 세력을 따라서 높고 낮음이로다”라고 하여, 충무공보다 넬슨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까닭을 막강한 군사력과 국력의 신장(伸張) 여하에 따라 평가되고 있기 때문임을 상기시켰다.
신채호는 계속하여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결론」에서 “대저 수군의 제일 유명한 사람이 있고 철갑선을 창조한 나라로 오늘날에 이르러 저 해군의 가장 강한 나라와 비교하기는 고사하고, 필경 나라라는 명색조차 없어질 지경에 빠졌으니…”라고 망국의 징후를 보이는 대한제국기의 심각한 나라 형편을 개탄하였다. 그리고 당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한말의 한심한 민족 현실과 고통 속에 헤매는 한국민의 일대 분발을 촉구하면서 “20세기 태평양에 둘째 이순신을 기다리자.”고 하며 제국주의가 발호하는 해양시대를 맞아 외경력(外競力)을 갖춘 새로운 민족영웅의 출현을 대망하였다.
특히 신채호는 임진왜란이라는 7년전쟁기에 대(對)왜구 해전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이순신의 활약상과 전술에 주목하여 동서고금의 역대 인물들과 비교하여 충무공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즉, 이 전기물 제19장「결론」부분에서 강감찬(姜邯贊)·정지(鄭地)·제갈량(諸葛亮)·한니발(漢尼拔) 등 동서고금의 인물들과 비교하여 무장 이순신의 뛰어난 애국심과 전술전략을 높이 평가하였다. 다만 1805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트라팔가르 앞바다에서 격멸한 영국의 넬슨 제독과 견줄만 하나 오히려 취약한 군비와 병력으로 해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 충무공의 전략전술과 사적이 크게 특기할 만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이 『이순신전』이 널리 읽혀져 고통에 빠진 한국민들이 일대 분발하여 “형천극지(荊天棘地)를 답평(踏平)하며 고해난관(苦海難關)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을 간절히 희망하였다.
5. 국한문본 『동국거걸최도통(東國巨傑崔都統)』
국한문 혼용의 『동국거걸최도통』은 고려 말 원(元)·명(明) 교체기에 마지막까지 고려왕조의 영광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비운의 죽음을 맞은 무장 최영(崔瑩)의 사적을 논설체로 서술한 미완의 역사전기물이다. 이 전기물은 금협산인(錦頰山人)이란 필명으로 『대한매일신보』(1909. 12. 5~1910. 5. 27)에 연재 발표된 민족사적 3걸의 영웅전 가운데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이 영웅 전기는 저자 신채호가 1910년 4월 조국을 탈출하여 해외망명을 단행함에 따라 끝내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이 미완의 역사전기물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차례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緖論), 제2장 최도통 이전의 아족(我族)과 외족(外族), 제3장 최도통의 전반생(前半生), 제4장 지나(支那)의 풍운(風雲)과 최도통의 북행(北行), 제5장 최도통 북벌정책의 시착수(始着手)와 왕의 반복(反覆), 제6장 양(兩) 적국(敵國)의 교침(交侵)과 최도통의 재기(再起), 제7장 양차(兩次) 홍건적란(紅巾賊亂)의 최도통, 제8장 최도통의 어몽고책(禦蒙古策).
신채호는 고려 말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 환경과 새로운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국내 정세의 갈등 속에서 나라의 영광을 위해 북벌(北伐)을 꾀하고, 고려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과 왜구를 정벌하는 등의 활약을 한 무장 최영의 생애와 활동상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간단없이 고려왕조를 위협하는 국내외 환경 속에서 70평생을 통해 고려왕조의 존립과 국위 선양을 위해 동정북벌(東征北伐)의 무장활동과 자주독립의 민족의식을 선양한 최영의 강용(强勇)·청렴한 인간상을 바람직한 영웅상으로 인식, 그의 업적과 활동상을 크게 찬양하였다.
신채호는 이 전기물 제1장 서론에서 고려 말 공민왕·우왕대에 침입이 잦던 왜구·홍건적·반란군 등을 토벌, 동정북벌의 애국적인 무장으로 명성이 드높던 최영을 “국가의 정신을 발휘하여 배외(拜外)의 완몽(頑夢)을 타파하고 아(我) 단군자손의 진면목”을 발휘한 거금 7백년간을 대표하는 역사적 위인으로 손꼽았다. 그는 『고려사』와 정도전(鄭道傳) 등이 최영의 북벌계획을 ‘효패(孝悖)’와 ‘광망(狂妄)’이라 폄하한 것을 노예두뇌의 소치라 크게 분개, 최영이야말로 부여족의 역사와 ‘고대 최명예적(最名譽的)의 역사’를 현양한 역사적 위인으로서 작금에 겪고 있는 ‘부여족의 고통’을 구원할 ‘절대거걸(絶對巨傑) 애국위인 최도통’이라고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최영은 일생을 통해 애국적인 탁월한 무장으로 외침과 내란을 평정한 후 만년인 1388년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는 1374년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 1377년 육도도통사(六道都統使)·삼사좌사(三司左使),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 1388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활약한 국가 보위를 위한 대내외 무장활동에 크게 역점을 두어 이 전기물에도 ‘도통(都統)’이란 제호(題號)를 택해 쓴 것 같다.
특히 신채호는 고려 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며 북변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8도도통사로 취임 활동한 사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최영이 우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李成桂) 등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요동 정벌이 좌절된 사실에 대해 신채호는 크게 애석해 마지 않았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이에 최영은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가 패전, 체포되어 공료죄(攻遼罪)로 참형(斬刑) 당한 이후 일반 민중들이 최영을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그 원혼(怨魂)을 기리고 있는 사실도 신채호에게 크게 어필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최영은 고려의 사직을 보위하려는 구파 세력의 마지막 보루로서 신흥사대부들이 후원하는 가운데 신진세력 이성계의 군벌(軍閥)과 대결, 시종일관 고려왕조를 지키려 한 강용·청렴한 장군이었다. ‘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그의 유명한 속설이 후세에까지 유전할 정도로 청렴·강직했던 최영의 죽음과 함께 고려왕조도 종말을 고했으며, 그의 원혼은 후세인들의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민중들의 뇌리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었다.
신채호는 이 미완의 전기물을 통해 최영이 살았던 고려 말의 사회를 “전국 인심이 부패비열의 극도에 달했던 시대”라 보고 애국적 열정과 신념으로 외침과 내란을 평정하는 데 헌신한 무장 최영의 사적을 역대 고려왕조를 대표하는 탁월한 역사적 위인으로 평가하려 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이 전기물은 1910년 4월 신채호의 해외망명으로 인해 고려 공민왕대 대몽(對蒙)정책과 대(對)홍건적·왜구정책에 골몰하는 최영과 정세운(鄭世雲)·승현린(僧玄麟) 등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제8장 최도통의 여몽 고책」(『대한매일신보』, 1910. 5. 27)을 끝으로 더 이상의 집필이나 신문 연재가 중단,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미완의 역사전기는 앞서 집필 발표된 을지문덕·이순신 등의 전기물이 그러하듯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논설체로 서술되었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된 목차는 크게 서론부와 대내외의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는 최영의 영웅적 활동과 사적을 평면적으로 서술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고려 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국내외 정세, 곧 원명(元明)교체기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애국적 무장 최영의 활동을 서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내란을 평정하는 가운데 대원(對元)·대명(對明)의 북벌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그의 군사활동과 정치적 지도력, 그리고 구국영웅으로서의 고뇌·갈등 등이 강조되어 있다.
6. 역사전기물과 영웅사관(英雄史觀)
신채호가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 간행 이후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역대 영웅들의 사적을 전기화하려 한 것은, 한국사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자긍심에 기초하여 1900년대 초 민족·국가·역사자강사상을 고양시키려는 데 출발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전기물들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읽혀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한국민의 일대 분발과 용기를 촉구하고자 하는 애국계몽적인 의도가 짙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신채호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국민적 애국심의 표본으로 부각시킨 민족사적 3걸은 모두 국난 극복의 영웅들이다. 이들은 특히 대외투쟁에서 승리한 외경력(外競力)을 갖춘 무장들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한결같이 위기적 민족현실을 타개하고 반사대주의적인 자주독립의 민족의식을 선양·실천하려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두드러진 특성이 발견된다. 이는 일본·청국·러시아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 등 외세의 침략으로 시달리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성된 한말의 시대정세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일제의 무력적 침략으로 조성된 위기의 시대에 국권 회복과 국운 개척을 위한 상징적 표본으로 구국의 영웅상을 대망하는 신채호의 애국적 염원과 자강론적 민족주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유념해야 할 점은 1900년 초 애국계몽운동기 이후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에 출발점이 된 역사전기물과 영웅사관의 관련 문제이다.
일찍이 신채호는 “영웅만이 역사를 창조한다”고 주장한 카알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웅숭배론(원제 영웅 및 영웅숭배)』을 영문 원서로 읽을 만큼 역사의 중요성과 함께 영웅의 능력과 역사적 역할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그는 민족사적 3걸의 역사전기를 집필 발표할 무렵,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라. 고로 사필(史筆)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고 사필이 무(武)하여야 민족이 무(武)하는 배이어늘…
하고 상무적(尙武的)인 강건한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요청하면서 민족과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였다. 그러한 신채호의 발상은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민족사적 3걸 모두가 역사상 대외투쟁에서 승리한 애국적 무장이며, 각 전기물마다 그들의 영웅적 활동이 크게 강조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역사의 주체로서 영웅에 대한 인식은 앞의 역사전기물들에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같은 시기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영웅과 세계」(1908), 「기회는 불가좌대」(1908), 「20세기 신동국지영웅」(1909) 등 논설에 반복해서 강조되어 있다. 이미 국한문판 『을지문덕』에서, “국가의 강약은 영웅의 유무에 있고, 장졸중과(將卒衆寡)에 부재하도다”라고 역사주체로서 영웅의 존재와 역할에 주목한 바 있었다.
또한 신채호는 한글판 『을지문덕』에서 “일국 강토는 그 나라 영웅이 몸을 바쳐서 위엄이 있게 한 것이며, 일국의 민족은 그 나라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라” 하여, 민족의 선양(宣揚)과 강토(疆土)의 보존은 모두 영웅의 활약 여하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지나간 영웅을 기록하여 장래의 영웅을 부르노라”고 국권회복운동에 진력할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펼쳤다. 한국사의 영광을 실현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영웅들에 대한 관심은 이 시대의 급박한 위기적 현실을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초기 신채호의 역사와 사회 주체에 대한 인식이 영웅사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의 영웅대망론은 당시의 일반 민중과 청년 학생들이 역사상 위대했던 영웅의 활동을 본받아 국민 모두가 각 분야에서 투사가 되어 참여하도록 그 분발을 촉구하려는 애국계몽적 발상이 내포된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신채호는 애국계몽 논설에서
영웅이 기회를 조(造)하고 기회가 영웅을 산(産)하나니, 영웅과 기회는 호상대(互相待)하며 호상위용(互相爲用)하는 바로다. 수완(手腕)은 풍운(風雲)을 질타(叱咤)하고 일세를 뇌총(牢寵)하며 거적(巨敵)을 최(?)하고 망국(亡國)도 흥(興)케 함이 시왈(是曰) 영웅이라.
고 썼다. 신채호가 말하는 영웅은 시대추세에 대한 능동적 대응과 창조적 역량의 발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기회와 영웅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망국도 부흥케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존재이자 외경력을 갖춘 민족영웅이었다.
신채호는 또 다른 논설에서 “영웅자(英雄者)는 세계를 창조(創造)한 성신(聖神)이며, 세계자(世界者)는 영웅의 활동하는 무대라”고 하여 영웅의 존재와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이 시대는 영웅의 분몌흥기(奮袂興起)할 때”라고 보았다. 또, 20세기 초 현재의 국제 상황은 열국경쟁시대이므로 국가는
반드시 세계와 교섭하며 분투함으로써 세계 속에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나라에 세계와 교섭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교섭할지며, 세계와 분투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분투하리니, 영웅이 없고야 그 나라가 나라 됨을 어찌 얻으리오.
라 하고 세계(외국)와 교섭하고 외경력 있는 구국적 영웅의 역할과 그 출현을 갈망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영웅이란 일차적으로 을지문덕·연개소문(淵蓋蘇文)·케사르·한니발 등 세계사와 한국사를 통해 혁혁한 대외투쟁과 영토 확장전에서 전공을 세운 무장들만의 대명사로서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종교가·정치가·실업가·문학가·철리가(哲理家)·미술가 등 각 분야의 걸출한 존재들로서 국운 개척에 헌신적인 역할과 위업을 남길 인물들을 지칭하였다.
신채호의 영웅대망론은 뒤에 「20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이란 논설 속에서 한층 더 구체화되어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을 정립시키기에 이르렀다.
고금 수천재(數千載)에 인문(人文)이 대벽(大闢)하며 동서 6대주에 철혈(鐵血)이 분비(紛飛)하여 목하(目下) 기절괴절(奇絶怪絶) 장절참절(壯絶慘絶)의 20세기 대무대를 개(開)하고, 세계 풍운아의 연극을 시(試)할새, 강자는 상(賞)을 몽(蒙)하여 점점(點點) 영토를 양반구(兩班球)에 기치(?置)하며, 약자는 벌을 수(受)하여 애애도조(哀哀刀俎)에 재활(裁割)을 시공(是供)하나니 영웅 영웅 20세기 신동국 영웅이여.
이처럼 신채호는 자기의 시대를 약육강식(弱肉强食)·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진화론적 원리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자행되는 시대로 보았다. 따라서 힘의 논리가 지배되는 국제질서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강론적 민족주의 사상 아래 외세의 도전에 대해 효과적인 응전을 수행할 영웅, 곧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20세기 초 탁월하고 진취적인 능력을 지닌 한민족의 영웅상을 고대하였다. 그는 워싱턴·카부르·마찌니·크롬웰·비스마르크 등 서구 각국의 근대 영웅들과, 광개토대왕·연개소문·최영·이순신 등 민족사적 영웅들의 역할과 위업을 열거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척결한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을 열렬히 대망하였다.
한편 신채호는 1909년 신민회의 이론가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근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상, 입헌·공화의 국민주권사상 등 근대적인 정치의식이 성숙됨에 따라 사회와 역사의 주체로서 ‘신국민(新國民)’상을, 사상적으로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대논설 「20세기 신국민」(1910)에서 중고적(中古的) 영웅의 한계를 지적, 20세기 국가경쟁의 원동력은 한둘의 영웅에 있지 않고, 정치·종교·실업·무력(武力)·학술 등 사회 각 부문에서 활약하는 국민적 역량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민 각계각층의 대내외적 외경력의 발휘를 촉구하였다.
신채호는 그의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천연(天演)의 공례(公例)에 기초한 국민의 외경력이 요청되는 시대로 보고, 한둘의 영웅이 국운을 좌우하던 중고시대와는 달리 20세기는 국민 모두가 각 분야에서 외경력을 발휘할 때임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애국계몽운동 초기에 부각시킨 영웅사관·영웅대망론이 군권시대(君權時代)의 역사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 것이라면, 이후 그가 내세운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英雄像)인 ‘신국민’은 양계초가 『신민설』에서 제안한 ‘신민(新民)’과 마찬가지로 자강력(自强力)과 입헌·공화의 국가사상을 가진 ‘유신(維新) 국민’이었다. ‘신국민’이야말로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기풍을 지닌 새로운 ‘국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장차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데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5권 신문·잡지
1. 『신대한(新大韓)』과 신채호(申采浩)
(1) 『신대한(新大韓)』의 창간 배경
『신대한』은 1919년 10월 신채호에 의해 상해에서 창간되었다. 『신대한』은 신채호가 상해 임시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창간한 잡지였다. 따라서 『신대한』은 신채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당대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단재(신채호)는 조부의 권유로 당시 대한제국 관료였던 신기선의 제자가 되고 1898년 그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언론활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단재(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활약하면서 1905년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신민회에 가입했던 신채호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이 결정되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1917년에 잠시 조선에 잠입했던 일을 제외하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일생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과 함께 많은 저작활동을 병행했는데 『조선상고사』(1931년), 『조선상고문화사』(1931년)가 대표적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시작되자 신채호도 여기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승만과의 불화로 인해서 임시정부를 떠나게 된다. 1920년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신채호는 1921년 북경에서 잡지 『천고』 1권 1호부터 7호까지 발행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만행을 언론을 통해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최광식,『역주 단재 신채호의 천고』, 아연출판부 2004). 한편 북경에 근거지를 둔 신채호는 다물단을 조직하는 등 무장투쟁론에 입각한 ‘즉시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의 요청으로 그의 독립사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는 「조선혁명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단재(신채호)는 임시정부 창조파로 활동하게 된다. 신채호가 아나키스트로 사상을 전환한 것은 1925년경으로 보인다. 1927년에는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발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만 기륭항으로 향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단재(신채호)는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년간의 옥고 끝에 1936년에 순국하였다(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4, 256~259쪽 ; 김삼웅, 「연보」, 『단재 신채호 평전』, 2005, 501~516쪽).
『신대한』의 창간은 3·1운동 직후부터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가담하여 이승만의 독립청원운동에 반대하며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북경으로 떠났던 시기를 전후하여 창간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신채호는 북경에서 상해로 건너가 신익희·이광수·조소앙·최근우·이시영·신석우·여운형·조완구를 포함하여 29명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승만을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로 선출하자는 데 신채호는 반대했다. 단재(신채호)는 이승만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람이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 이에 신채호는 강한 불만을 표현했지만 그래도 임시정부에 계속 몸을 담고 있었다. 이후 제6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통합임시정부가 재조직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신채호는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고 임시정부 반대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1919년 10월 신채호는 신규식과 남형우의 지원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임시정부 쪽에서는 회유의 표시로 독립신문의 사장으로 신채호를 초청하고자 했으나 신채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단재(신채호)는 동지 30여 명을 규합하여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 탄핵 파면을 요청하는 등 점차 反임시정부 계통의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정윤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소크라테스형 지식인의 한 예-」,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240~241쪽).
신채호가 이승만에게 반대한 것은 독립운동의 방법론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주된 독립운동 방법론은 이른바 ‘준비론’이었다. 당장의 독립이 어려우므로 민심의 통일과 지덕의 준비, 국민개조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승만의 경우에는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외교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노선 때문에 이미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박용만·신채호 등이 임시정부의 노선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임시정부의 혁신을 놓고 무장투쟁론은 전개하며 임시정부의 해체와 새로운 정부수립을 주장했던 ‘창조파’와 실력양성론과 외교론에 입각한 ‘개조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창조파에 속해있던 신채호는 임시정부와 마침내 결별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와의 결별 후 신채호는 다시 언론투쟁의 길로 뛰어들었고 『신대한』은 그 결과물이었다. 1919년 10월 28일 상해 보강리에서 1주 2회 발행을 원칙으로 하여 『신대한』을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보고서와 기록을 보면 임시정부는 『신대한』의 창립을 불편하게 여겨서 이를 폐간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일제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사설에서 『독립신문』이 『신대한』을 불편하게 여겼다는 것은 충분히 감지된다. 『신대한』은 상해와 중국의 한인(韓人)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폭압을 규탄하고 또한 외교정책과 실력양성론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임시정부를 거세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무장투쟁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결국 『신대한』은 임시정부 쪽의 압력에 의해 1920년 초에 폐간되고 만다. 이미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였던 신채호는 『신대한』 폐간 직후 미련 없이 상해를 떠나 활동장소를 북경으로 옮겼다(김상웅, 「연보」, 『단재 신채호 평전』, 2005, 228~241쪽). 북경으로 옮긴 후 1921년 1월부터 7월까지 『천고』1권 1호부터 7호까지 발행하였다.
(2) 『신대한(新大韓)』의 주요 내용
현재 『신대한』은 창간호(1919.10.28)·제17호(1920.1.20)·제18호(1920.1.23)가 전해지고 있다. 『신대한』의 기사구성은 크게 3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해외의 사정을 알리고, 한국과 관련된 국내·외 사정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것이다.
1) 1919. 10. 28일자 창간호
창간호인 제1호의 1면은 창간사로 시작하고 있다. 창간사에서는 『신대한』이 창간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신채호는 사회주의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이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관계와 계급전쟁을 논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에서 ‘일본(日本)의 반성(反省)을 요구(要求)하자’나 ‘외교(外交)에 신뢰(信賴)하자’와 같은 방법론 등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한다. 말미에는 ‘칼’과 ‘붓’으로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자는 말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어서 3·1운동에 대한 견문록이 실려 있으며, 남대문정차장에서 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가한 폭탄테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 범인으로 밝혀진 의사(義士)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2면에서는 국민의회의 선포를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이들의 선포문과 포고문 그리고 각 정부 부처들의 명단까지 실어서 세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총독부가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탈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유도 자세히 설명하며 일본의 식민통치의 수탈성을 폭로하고 있다. 이어서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삼국 동맹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중추원에서 제출한 ‘자치론’을 기사로 제시하고 있다.
3면에서 주목해야 할 기사는 ‘간독원흉(奸毒元凶)한 왜(倭)의 정책(政策)’이다. 이 기사는 3·1운동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변화(헌병제의 철폐와 관직명 개칭)가 이전보다 더 가혹한 억압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이외에 3면에서는 주로 해외의 정치상황과 국내외 한인의 동향을 알려주고 있다.
4면에서는 국내외의 한인들의 소식을 전하는 ‘우리 통신(通信)’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기사는 ‘국제연맹(國際聯盟)에 대(對)한 감상(感想)’이다. 여기서 신채호는 외교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중점적으로 밝히고 있다. “평화회의(平和會議)에서 그 성언(聲言)한대로 각민족(各民族)의 자결(自決)의 요구(要求)에 응(應)한 자(者)가 얼마나 되느뇨”, “민족자결(民族自決)을 허(許)함은 그 표면(表面)뿐이오 내용(內容)의 진의(眞意)는 열강국(列强國)의 이해(利害)를 (前提前提)함이 아닌가 하는 허다(許多)이 의문(疑問)이 있도다”, “그러니 우리 조선(朝鮮)은 강력자(强力者)에 대(對)한 요구(要求)보다 신기리(新氣理)에 향(向)하야 춤추며 평화신(平和神)에 대(對)한 환영(歡迎)보다 적(敵)에 향(向)하야 분국(奮國)함이 더욱 신성지고(神聖至高)한 의무(義務)라 하노라” 등의 내용은 국제연맹을 통한 독립청원이 얼마나 덧없는 행동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2) 1920. 1. 20일자 제17호
먼저 1면과 2면에서는 각각 한 편의 장문 사설이 신문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1면의 첫 글은 ‘여론(輿論)을 제조(製造)할 일’이다. 이어서 1면에는 주로 독립운동이나 일본의 식민정책과 관련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기사들이 제시된다. 주요 기사로는 1년 전의 경성에서 ‘결의단(結宜團)’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어 ‘자산가(資産家)’들에게서 자금을 얻어내려다 실패한 사건[결의단(結宜團)의 조난(遭難)], 신의주의 감옥이 파옥된 사건[신의주파옥상보(新義州破獄詳報)]이 소개되고 조선의 현실과 관련해서는 일제 식민당국이 조선시대의 유습인 역둔토(驛屯土)를 임의로 처분하는 것을 비판하는 기사와 조선에 있는 여학교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움직임이 있는지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2면에는 ‘언(言)과 행(行)을 일치(一致)하여라’는 사설이 실렸다. 사람은 언행을 일치시켜 행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인데,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도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단재(신채호)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그 외에 2면은 1920년 당시 전 세계적인 이슈의 하나였던 러시아 내의 적군(볼셰비키)과 백군 내전에 관한 작은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연해주까지 와 있었던 체코군인들의 귀환 문제, 미국·일본 등의 시베리아 출병 문제 등에 대한 기사들이다. 러시아의 내전은 동아시아와 관련 있는 연해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치열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그만큼 단재(신채호)의 관심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3면의 머리에는 국제 소식들이 실려 있다. 국제연맹, 미국에서의 공산당 검거, 필리핀 독립 청원 문제, 애란(愛蘭, 아일랜드)의 독립투쟁, 이탈리아의 피우메 점령 소식 등이다. 3면 중간부터는 국내 소식과 독립운동에 관련된 기사들이 실려 있다. ‘대한적십자(大韓赤十字) 제일회회원(第一回會員) 대모집경쟁회(大募集競爭會) 총성적(總成績) 발표(發表)’, ‘북간도(北墾島)의 실황(實況)’ 등의 큰 기사들에서부터 국내외 등지에서 독립과 관련된 작은 기사까지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조선 국내에서 조선인 경영의 신문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기사도 보인다[소위(所謂) 한인경영(韓人經營)의 삼신문(三新聞)이 우장출세(又將出世)]. 3면 마지막에는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이전의 한일관계사료를 여러 연대기에서 뽑아서 정리해 놓고 있다.
4면에서 눈에 띄는 기사는 ‘왜정부(倭政府)의 간책(奸策)과 봉천(奉天)의 흑막(黑幕)’과 ‘한국(韓國)의 진상(眞相)(속續) (육六) 나단열·페퍼 저(著) 제오(第五) 겸구령(箝口令)’이다. 전자는 필자가 직접 자기 목소리로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나단열·페퍼라는 외국인이 쓴 것을 번역하여 실은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다. 특히 후자는 조선의 현실과 관련하여 사회에서의 언론 자유가 탄압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3) 1920. 1. 23일자 제18호
1면에는 ‘신구인물(新舊人物)의 대사(代謝)’라는 사설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진화하려면 사회가 변해야하고 사회가 변하려면 구인물(舊人物)에서 신인물(新人物)로 바뀌어야 하는데, 신구(新舊) 인물은 사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조선의 역사에서 사상계의 신운동(新運動)이 있던 시기를 정조(正祖)시대, 갑신정변 전후, 갑오을미(甲午乙未) 이후, 갑진을사(甲辰乙巳) 이후, 독립운동(獨立運動) 이후 5시기로 분류하여 조선이 진보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또 각 시기의 인물들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영친왕이 입국한다고 하였으나 오지 못했다는 기사와 길림(吉林)에서의 활동 기사가 보인다. ‘서북간도(西北墾島)·상해(上海)·야소교(耶蘇敎)·천도교(天道敎)·불교(佛敎)·○○○會와 관계(關係)’ 기사들이 있는데 서북간도와 상해지역에서 또 각 종교와 단체가 연계하여 전개한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2면에는 프랑스(法國) 외무성에서 프랑스·영국 등의 나라와 독일(德國) 대표자간의 강화조약 부속의정서를 조인했다는 ‘조약비준교환(條約批准交換)’과 윌슨대통령이 제1회 국제연맹회의를 소집하자고 한 ‘연맹회의소집(聯盟會議召集)’ 등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외국의 통신을 인용하여 전달하고 있다. 또 세묘노프 장군에 관한 기사나 시베리아 등지에서의 미국·일본과 같은 나라의 군사이동과 변동사항에 관한 기사, 미·일군 주둔지역에서의 반미일 감정 등 군사문제에 관하여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관계사료집(日本關係史料集) [십(十)]’도 보이는데 여기서는 고려시대 왜(倭)가 쳐들어온 사실과 고려가 그에 대항하는 모습을 정리하였다.
3면에서는 ‘신성(神聖)한 독립군(獨立軍)’ 이라는 글이 있는데 진정한 독립군은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후에는 ‘미국(美國)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회답(回答)’, ‘가주우배일운동(加州又排日運動)’ 등 2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외국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또 ‘영국혁명(英國革命)의 음모(陰謀) [삼(三)]’이라는 글이 있는데 영국혁명에 대해 준비주밀(準備周密)·혁명적(革命的) 출판물(出版物)·문자험악(文字險惡)·혁명론자(革命論者)·음모조직(陰謀組織)·대동소이(大同小異)·중심인물(中心人物)·여력완력(?力腕力)·유래원대(由來遠大)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4면에서는 페퍼가 쓴 ‘한국(韓國)의 진상(眞相)’이라는 글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3·1운동에 관한 국내소식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3·1운동의 주모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은 당하면서도 의연하고 또 전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내용이 담겨있다. 이어서 ‘혁명(革命)의 심리(心理)’라는 글에서는 법란서(法蘭西, 프랑스) 대혁명(大革命)의 사례를 들어서 특권을 일당(一黨)에 주어서 또다시 대중의 분노를 사지 말고 일파(一派)에 이익을 주어 다른 파(派)의 불만을 사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3) 신채호의 독립운동에서 『신대한(新大韓)』의 위치
신채호는 구한말에서부터 1930년대까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며,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신채호의 독립운동에서는 무엇보다 ‘민족’이 언제나 핵심에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서 취했던 시기별 정치사상에는 몇 단계의 변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채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시기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기 1905년에서 1910년까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서 논설과 저술에 매진했던 시기. 제2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기지 설치운동과 계몽활동을 했던 1910년대. 제3기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1922년 김원봉의 요청으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3년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때까지의 시기. 제4기 1924년 이후 승려생활, 북경군사통일회, 무정부주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1936년 순국할 때까지의 시기(정윤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 -소크라테스형 지식인의 한 예-」,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29~230쪽).
한편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언론활동기(1905~1910년), 민족운동 및 한국고대사 연구기(1910~1925년), 무정부주의사상기(1925년 이후)로 나누기도 하며(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59쪽), 또는 크게 보아 1910년을 전후한 사회진화론적 역사관에 입각했던 시기와 1920년 이후의 혁명적 역사관에 입각했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김기승, 「신채호의 진화사관과 혁명사관의 대치」,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143쪽).
이러한 신채호의 활동시기 구분을 살펴볼 때 『신대한』이 독립운동사상의 일대 변화를 확연히 보여주는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의 바로 전 단계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20년대 초 신채호가 보여주는 정치사상의 변화상을 살펴봄으로써 『신대한』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는 1905~1910년의 언론활동기에 비록 사회진화론과 자강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력양성론과 준비론을 비판하며 ‘즉시독립론’에 입각하고 있기도 했다. 이는 신채호의 일생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독립관이었다.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에서 실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오직 실력을 양성한 후에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오히려 “부강이 독립의 전제를 작(作)한다 하기보다 오히려 독립이 부강의 전제가 된다함이 가(可)하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김명구, 「한말·일제강점 초기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194~195쪽).
신채호의 1910년대 논설을 살펴보면 아직 사회진화론과 자강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1910년대의 신채호는 약자가 강자가 되기 위한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선진국이 된 문명국을 모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채호는 강자가 되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이후 신채호는 민중직접혁명론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김기승, 「신채호의 진화사관과 혁명사관의 대치」,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152쪽).
『신대한』은 시기적으로 신채호가 사회진화론을 벗어나 혁명론으로 전환하는 1920년대 초의 문턱에서 간행되었다. 우리는 『신대한』을 통해서 신채호의 사상적 변화의 단초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10년대 말 신채호는 즉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더욱 힘을 실었으며, 무엇보다 타협론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1919년 10월 『신대한』 창간의 배경이나 목적 역시도 준비론과 외교론 등의 타협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채호의 독립운동 노선을 더욱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는 타협론의 유형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비판하고 있다. 첫째는 외교론이다. 신채호는 사대주의적 외교를 비판하고 이승만의 독립청원론을 일본의 속국에 있던 한국을 미국의 속국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안창호가 주장했던 준비론이다. 신채호는 독립쟁취를 위한 준비에 동의하면서도 일본이 과연 우리가 준비하도록 놓아두겠느냐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셋째는 ‘내정독립’, ‘자치’, ‘참정권’을 주장하는 타협론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마지막은 문화운동에 대한 비판이다. 신채호는 문화운동 역시 한국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악영향을 미친다고 이해했다(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84쪽).
기존까지는 이러한 신채호의 비타협적 독립운동사상을 읽을 수 있는 자료로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을 주목했지만, 1919년 10월에 창간한 『신대한』을 통해서 이미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사상의 단면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신대한』은 신채호의 독립운동사상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 아주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1920년 『신대한』 폐간 직후 신채호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 1921년 한문체 잡지인 『천고(天鼓)』를 발간하게 된다. 『천고』에는 중국인 글도 실었으며, 중국인도 독자층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순한문으로 발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조선과 중국이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최광식, 『단재 신채호의 천고』, 17~44쪽).
이처럼 『신대한』이 1921년 북경에서 『천고』가 발간되기 직전에 발행된 신문이라는 점에서도 『천고』에 나타난 신채호의 독립운동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2. 『천고(天鼓)』에 보이는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
『천고(天鼓)』는 단재 신채호가 1921년 북경에서 발행한 한문체 잡지로 1호에서 7호까지 발간되었다(중국인이 쓴 논문과 중국신문에서 발췌한 기사는 백화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북경대도서관에 1호·2호·3호만 수장되어 있다. 필자는 1999년 1학기 북경대 초청으로 역사계(사학과)에서 한국고대사를 강의하게 되어 북경대학교에 갔다가 『천고』 1-3호를 열람하고 그 중 고대사부분을 복사할 수 있었다(입수경위에 대해서는 『역사비평』 48호에 소개한 바가 있다. 최광식, 「단재 신채호가 북경에서 발행한 잡지 『텬고』」, 『역사비평』 48, 역사비평사, 1999).
『천고』 1호는 도부학(渡部學) 교수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 보내주어 그 일부가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별집(단재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형설출판사, 1977)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천고』 1호 내용 전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중국편-에 영인되어 있다(윤병석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중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한편 『천고』 2호는 대한매일신문의 김삼웅 주필이 2000년 6월 연변에서 찾아 복사를 하여 공개하였다(김삼웅, 「‘천고’ 제2호 연변서 첫 발굴」, 『대한매일신문』 2000년 6월 28일자. 필자는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의 배려로 복사본을 구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를 근거로 하여 2004년 『천고』 역주본을 간행한 바가 있다. 한편 최근에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남덕 여사가 『천고』 3호를 필사하여 공개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천고』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논설과 독립운동 기사와 아울러 고대사를 비롯한 한국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천고』는 한문과 백화문으로 간행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독자층으로 겨냥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천고』의 내용 중에는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의 단결을 부르짖는 내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인들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천고』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논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각 호당 고대사 논문이 하나씩 실려 있다. 단재 신채호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 단재 신채호선생탄신100주년기념논집, 1980과,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단재신채호선생순국50주년추모논총, 1986에는 각각 논문이 20편이 실려 있는데 고대사 관계 논문은 각각 2편씩이 있을 뿐이다) 정작 그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가 않다(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그리고 종래의 연구는 『독사신론』(1908), 『조선상고사』(1931), 『조선상고문화사』(1931)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1910년대와 1920년대 초반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2편의 논문이 있다. 한영우, 「1910년대의 신채호의 역사인식」, 『한우근선생정년기념사학논총』 1981;조인성, 「신채호의 낭가사상에 대한 일고찰 '동국고대선교고'를 중심으로」, 『경대사론』 창간호, 1985). 필자는 1921년에 발행된 『천고』 고고편을 통하여 1920년 전후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을 살펴본 바가 있다(2000년 12월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2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천고』의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인식」을 발표하였으며, 그 글이 2001년 3월 『한국사학사학보』 3집에 수록되었다).
여기서는 『천고』의 고고편과 아울러 다른 한국사 관련 논문을 통하여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천고(天鼓)』의 목차와 내용
『천고』 제1권 제1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卷首揷圖; 獨立運動時之犧牲者獨立運動流血之女士
天鼓新年新刊祝 本社同人 1
天鼓創刊辭 編輯人 1
祝大朝鮮軍政署之大破倭兵 大弓 4
朝鮮獨立及東洋平和 震公 8
日本帝國主義之末運將至 我觀 14
論日本之有罪惡而無功德 鐵椎 18
天鼓與新年 新人 22
考古篇 志神 23
波蘭光復之略史 同淚 30
華友寄送之兩大著 34
爭自由的雷音 種樹 34
論中國有設中韓親友會之必要 天涯恨人 36
大韓獨立軍破倭露佈 大弓 39
悼姜宇奎先生 肖民 41
謀殺前皇太子之奇聞 大弓 43
軍政署布告戰況 大弓 46
內國時聞 肖民 62
海外雜俎 世眼 62
『천고』의 신년 신간축사는 본사동인(本社同人)이, 『천고』의 창간사는 편집인(編輯人)이 쓴 것으로 둘 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보인다. ‘대조선 군정서가 왜병을 대파한 축사’는 大弓(대궁)이 쓰고,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는 진공(震公)이 쓴 것으로 이 글들도 신채호가 쓴 것이다. ‘왜가 이른바 친선이라는 것은 이와 같다’는 절굉생(折肱生)이, ‘일본 제국주의의 말운(末運)이 이르렀다’는 아관(我觀)이, ‘일본의 유죄와 무공덕을 논함’은 철추(鐵椎)가, ‘천고와 신년’은 신인(新人)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신채호가 쓴 것이다. ‘고고편(考古篇)’은 지신(志神)이 쓴 것으로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다(『천고』 3호에는 고고편의 필자가 신지(神志)로 되어 있다. 신지는 대종교에서 고조선의 역사가로 보고 있는 인물이다. 신채호가 대종교에 입문하고 나서부터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폴란드의 광복 약사’는 동루(同淚)가, ‘중국인 친구가 보내준 두 책’은 종수(種樹)와 천애한인(天涯恨人)이 쓴 것으로 이것들은 중국인 친구가 보내준 글이다[『천고』 2호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은 단결해야 한다’는 글에서 신채호는 천애한인(天涯恨人)이 쓴 ‘중국에 중한(中韓) 친우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글을 읽고 감격하여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몰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이 왜를 파한 것을 알림’과 ‘전황태자(前皇太子)를 모살(謀殺)하는 기문(奇聞)’, ‘군정서의 포고 전황’은 대궁(大弓)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다. ‘강우규선생 추도사’와 ‘내국시문’은 초민(肖民)이 쓴 것으로 필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내국시문(內國時聞)은’ 국내소식을, ‘해외잡조(海外雜俎)’는 해외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천고』 1권의 2호는 1921년 2월 1일 발행되었는데 그 목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首揷畵(2)
韓漢兩族之宜加親結 震公 8
古朝鮮之社會主義 上同 12
?陳日軍殘暴之公文 半面生 16
古魯巴特金之死之感想 南溟 20
萬里長城 神志 26
見聞雜感 大弓 26
兩島血戰之鱗爪 一記者 28
倭奴之勾結馬賊 一記者 30
最近一朔內獨立運動之進行 鐵椎 31
琿春事件之彙報 一記者 37
海外消息 肖民 48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은 마땅히 단결해야 한다’와 ‘고조선(古朝鮮)의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진공(震公)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의 글이 확실하다. ‘일군의 잔폭함을 보이는 공문’은 반면생(半面生)이, ‘크로포트킨의 죽음에 대한 감상’은 남명(南溟)이 쓴 것으로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내용을 보면 신채호가 틀림이 없다.
無政府主義 非吾所講究也 豈曰不可 抑無暇也 此身 爲賊所執 身首手足 皆爲鐵鎖所縛 運動屈伸 無以自由 當是時 所急者 在逐賊 隣家 雖有山珍海錯 充滿羅列 吾奚暇願此也 余非唯無政府主義未究 卽其歷史之顚末 未及詳覽也 非唯古魯巴特金之死於何日之不知 卽其生年之爲何年 …… 중략 …… 其所著之書 吾只得見其日譯漢譯之斷片的文字而已 未嘗誦其書聞其言 而遽論其人 可乎 嗚呼吾之爲此文也 非欲論其人也 將以書吾之所感而已
『천고(天鼓)』1권 2호, 대어고로파특김지사지감상(對於古魯巴特金之死之感想)(이 글은 단기 4254년 1월 29일 밤 등불 아래에서 썼다고 되어 있어 단재 신채호의 글임이 분명하다. 『천고』는 매달 1일자 발행으로 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원고 청탁을 하여 글을 받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고 청탁을 하고, 원고를 받고, 편집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이 사망한 날이 1월 28일이며, 신채호가 사망기사를 본 것은 1월 29일인 것이다)
위의 글에 의하면 단재(신채호)가 무정부주의를 깊이 있게 연구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나라를 빼앗겨 이러한 사상에 심취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이 태어난 해나 사망한 날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이 지은 책은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것을 단편적으로 보았을 뿐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기 때문에 크로포트킨 자신보다는 크로포트킨의 책에 대한 소감을 쓰겠다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신채호는 일찍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서적을 일본어나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접하기는 하였으나 이때까지는 아직 무정부주의에 대한 사상적 수용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이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수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이호룡,『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단재(신채호)가 행덕추수(幸德秋水)와 유사복(劉師復)의 책을 통하여 아나키즘에 접하기는 했으나 아나키즘을 자기의 사상으로 수용한 것은 『천고』의 ‘크로포트킨의 추도사’를 통해 볼 때 1921년 이후인 것이 확실하다.
한편 ‘고조선(古朝鮮)의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신채호가 직접 쓴 것으로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신지(神志)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며, 만리장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사실상 한국고대사의 영역을 논하고 있다. ‘견문잡감(見聞雜感)‘은 대궁(大弓)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며, 간도 학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양도혈전(兩島血戰)의 편린(片鱗)’과 ‘왜노(倭奴)가 마적(馬賊)과 결탁함’, ‘혼춘(琿春)사건의 휘보(彙報)’는 일기자(一記者)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개 훈춘사건에 대한 내용들이다.
‘최근 한달간 독립운동의 진행’은 철추(鐵椎)가 썼는데, 국내와 해외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해외소식’은 초민(肖民)이 필자이고, 인도의 독립운동, 아일랜드인의 어려움, 일본정부가 일본화폐를 배척하는 중국에 대해 질문하는 공문, 일본 노동계의 파업, 일본 정부가 사회주의를 경계하는 글, 일본 병사가 미군함 선원을 해한 사건, 영일동맹과 일본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다.
『천고』 3호의 목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揷畵(3)
韓漢兩族之宜加親結 震公 8
第三回三一節普告同胞 大弓 1
各地第三回三一節紀念 記者 5
獨立運動中一大快報 震生 7
獨立宣言首領之近況 克公 12
馬克齊君之公函 14
祈戰死 浣生 16
考古篇 神志 19
壬辰倭亂人物之一 耳溪 23
二月以後獨立運動之進行 一民 29
和龍縣居留同胞被禍一覽表 上同 35
琿春事件之彙報 記者 46
中美俄三國與日本關係 記者 49
日本之時局 記者 54
世界特聞 記者 58
‘제3회 3·1절을 동포에 알림’은 대궁(大弓)이 필자이므로 신채호가 쓴 것을 알 수 있다. ‘각지의 제3회 3·1절 기념’은 기자가 쓴 것으로 누가 썼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독립운동중의 일대 쾌보’는 진생(震生)이 필자로 되어 있어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다. ‘독립선언 수령의 근황’은 극공(克公)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극로(李克魯)일 것으로 추측한다. ‘마극제군의 편지’는 마극제(馬克齊)가 보내온 편지이며, ‘전사자를 기도함’은 완생(浣生)이 필자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고고편(考古篇)’은 신지(神志)가 쓴 것으로 신채호의 저술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인물의 하나’는 이계(耳溪)가 필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輯)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월 이후 독립운동의 진행’과 ‘화룡현 거류 동포의 피해 일람표’는 일민(一民)이 필자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훈춘사건의 휘보’, ‘중국·미국·러시아 3국과 일본관계’, ‘일본의 시국’, ‘세계특문’ 등은 기자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역시 누가 쓴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세계정세에 대한 논설을 많이 싣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2) 『천고(天鼓)』의 한국사 관련 내용
1) 『천고(天鼓)』의 고고편(考古篇)
신채호는 『천고』 1권 1호에 고고편을 쓰고, 3호에 이어서 고고편을 서술하였다. 한편 2호에는 진공(震公)이라는 필명으로 ‘조선고대(朝鮮古代)의 사회주의(社會主義)’라는 논설을 기고하고 있다(목차에는 ‘古朝鮮之社會主義’라고 되어 있고, 내용에 들어가서는 ‘朝鮮古代之社會主義’로 되어 있다).
『천고』 제1권 1호 고고편은 ‘승군(僧軍)’과 ‘화랑(花郞)’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그 앞의 인언(引言, 머리말)에서 고고편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唾棄國粹而 不欲復道 固人之情也 然吾國果何如 遺忘三寶 自高麗焚棄九? 自李朝 記歷代 則始箕子而去夫餘 論地志則劃鴨綠而遺渤海 尊祀古賢 定方 先於階伯 論述武功仁貴 偉於蓋金 辰卞列國 固蔚然乎當時稱覇之大邦也 而讀史者 不知其源委 南永諸郞 固儼然乎千年間支配思想界之大聖也”
[『천고(天鼓)』 1권 1호 고고편(考古篇) 인언(引言)]
신채호는 먼저 국수론(신채호는 Nationalism을 국수론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고 하였다. 국수론(國粹論)은 위험성이 있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를 버리면 삼보(三寶)를 버리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면서 고려시대에 구경(九?)을 태워버린 것과 조선시대에 기자로부터 역사를 서술하여 부여(夫餘)를 빼어 버린 것, 지리를 논하면서 압록강에 국한하여 발해(渤海)를 빠트린 것을 비판하였다. 부여와 발해를 중요시하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이 나타나 있다. 또한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과 설인귀를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나 백제의 계백장군 보다 존숭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을 비판하였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변진(弁辰) 열국(列國)은 대국인데도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역사연구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남랑(南郞)=영랑(永郞) 등 화랑은 천 년 동안 사상계를 지배한 성인인데도 이에 대한 인식을 못하고 있음을 통탄해 하고, 1,000년간 신라의 사상계를 지배해 온 화랑도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고 국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화랑도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인언(引言)에는 다음과 같은 점도 주장하고 있다.
“雖然尊孔之烈易至於復? 尙古之弊 必及於退化 守舊不化 又久爲內外所?病 如中華者 不屑國粹 固不足怪也 若吾人則 不然 知人而不知我 其害爲媚外 知今而不知古 其弊爲誣先”
[『천고(天鼓)』 1권 1호 고고편(考古篇) 인언(引言)]
단재(신채호)에 따르면 공자(孔子)와 같은 성현을 공경하는 것이 마치 복벽(復?)을 하는 것 같고 퇴보하는 것 같으나 우리는 중국과 달라서 우리의 것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그 피해가 크다고 하였다. 중국은 국수(國粹)가 필요하지 않지만 우리는 옛 것을 모르면 선조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 고증을 하여 고고편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천고』 1권 1호 고고편에는 승군(僧軍)과 화랑(花郞)에 대해 서술하고, 『천고』 1권 2호에는 고고편이 없이 고대사 논문으로 ‘조선고대(朝鮮古代)의 사회주의(社會主義)’라는 글이 있으며, 『천고』 1권 3호 고고편에는 진왕(辰王)과 소도(蘇塗)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최광식, 「『천고』의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한국사학사학보』 3집, 2001).
2) 한중관계사 인식
신채호는 『천고』 2호에 실려 있는 ‘한한양족지의가친결(韓漢兩族之宜加親結)’이라는 논문에서 현실에 있어서 한중관계를 논하기 앞서 한중관계의 역사를 논하였다. 먼저 한국과 중국의 산수(山水)를 논하며 한중관계의 친연성(親緣性)을 강조하였다.
從地圖之書 觀韓中兩國之山水 朝鮮之若鴨綠大同白馬蟾津等大江 及其他細流 皆奔注而西向於中華 中華之水 若江淮河漢等大水 及其他支河 皆奔注而東向於朝鮮 兩國之山脈亦然 有若相卽 而不欲相離者 此非兩國親愛之表徵 而天之所命也乎
지도를 보면 한국의 강물은 모두 중국을 향해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중국의 강물은 모두 조선을 향해 흐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산맥들도 그러하여 마치 서로를 향해 나아가려 하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과 중국 양국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은 서로 교류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往者兩國人之相交也 朝鮮人有一失 中國人亦有一失 其失也同 而其所以失不同 前者失於大謙 後者失於自尊 時也
옛날에 한중 양국이 서로 교류함에 잘못이 있었으니 조선인은 지나치게 겸손하였으며, 중국인은 자존의식이 강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고쳐야 진정한 한중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인의 한국사 왜곡문제를 논하고 있다.
以劒 割我舊土者 吾未能與抗 以筆誣我舊土者 吾乃偏欲與之言 其尤宜爲人笑也 然我兩國人 不可不親結 旣欲親結 不可不開心相見 我願此後朝鮮人 勿以謙卑 圖皮面之交際 中國人勿以古史之妄筆 據作正史而侮於相愛之地也
칼로 우리의 옛 영토를 나누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붓으로 우리의 옛 영토를 농락하면 대항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중 양국은 친하게 지내고 힘을 모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논문에서는 고조선의 옛 영역을 치밀하게 고증하고 있다.
淮南子 論秦之長城曰 北擊?水東結朝鮮 然則長城 當時朝鮮與中華之分界也 則長城者 可以與言古朝鮮之一斑矣 作萬里長城考 高句麗蓋蘇文 自夫餘築長城 南之海凡千餘里 此國史上城之崔長者 羅馬該撤以北寇頻逼 築城於菜因河北 其長至數百里 此西洋史上城之崔長者也
『회남자(淮南子)』를 인용하여 장성이 당시 조선이 중국과 더불어 나눈 경계라 하였다. 즉 장성은 고조선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만리장성을 진시황 이전의 장성, 진시황 이후의 장성, 진시황의 장성 등 셋으로 나누어 상세하고 논하였다.
匈奴傳 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活將十萬之衆 北擊胡悉收河(羊白河)南地 因河爲塞 四十四縣城 臨河徒適戍以充之 通直道自九原至雲陽 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 紀臨?至遼東萬餘里 蒙活傳 起臨?至遼東 延?萬餘里 此則秦始皇之長城也 以上所述 中華歷代長城之略史也
『사기』 흉노전과 몽염전을 고증하여 진시황의 장성이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위략」을 인용하여 요동의 위치를 고증하고 있다.
魏略所云滿藩汗者 卽漢武帝所分爲汶藩汗二縣 而其名見於漢書遼東郡志者也 卽今蓋平海城等地也 所云拓地二千餘里者 自上谷(今宣化府)至襄平(今奉天城西北) 其程可再折而南 至於蓋平海城 其程可二千里而有餘也 然則燕郡之遼東 秦長城所至遼東 亦可知 而弟三問題結矣
「위략」의 기록을 통하여 만번한을 지금의 개평과 해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숙신·조선·부여·예·동호 등을 한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徒?一二與中國接觸之事實 以共好寄者之賞玩而已 故或一國之名 訛爲數國(如肅愼朝鮮夫餘濊東胡等 實皆一國 而其名稱 煩訛至此)
한나라의 이름을 여러 나라로 잘못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즉 숙신, 조선, 부여, 예, 동호 등은 실제로 한나라인데 여러 나라로 잘못 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호를 우리나라로 인식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3. 맺음말
이상으로 『천고』에 보이는 한국사 관련 논설을 통하여 이 시기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종래는 『독사신론』(1908)을 통하여 1900년대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으며, 『조선상고사』(1931)와 『조선상고문화사』(1931)을 통하여 1920년대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천고』(1921)를 통하여 1910년대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핌으로써 단재의 한국사 인식의 변화과정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를 보는 관점이 민족주의인 점은 계속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와 불교에 심취하여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일대의 사건」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에 대한 이해는 매우 초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사회주의」에서 정전제를 사회주의로 인식한 것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크로포트킨의 죽음에 대한 감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아나키즘에 대한 사상적 수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에 환멸을 느낀 그가 조직이나 단체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천고』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상호 협조 하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있으며, 그런 주장을 역사적 맥락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은 종래와 같은 사대적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친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조선의 위치를 요동지역으로 비정함으로써 중국과 고조선이 대등한 입장이라는 것을 실례로 들고 있는 것이다. 민족자존의 역사를 견지하면서 중국과 대등하게 협조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실증한 것이라 하겠다.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천고』 1호와 2호 전부와 3호중 신채호 선생의 저술이 확실한 부분을 번역하기로 하였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 역주 작업을 하였다. 앞으로 『천고』4·5·6·7호도 발견되어 민족독립운동사와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연구하는데 많이 활용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