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곳에도 바람 불지요?
체류 비자를 연장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한 부록 건너서 유난히 큰 우리 집 야자나무가 마치 ‘어서와 더운데 수고 했어’라는
듯이 하늘하늘 손을 흔드네요. 그 손짓 따라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옆집 철문 앞에
어떤 처자가 작은 물건들이 올망졸망 달린 합판을 안고 있었어요.
목에 걸거나 어깨에 메고서 손님을 찾아다니는 그들을 우리는 ‘현대판 보부상’이라고 불렀지요.
낯익은 풍경이라서 그냥 지나치는데 합판 너머로 이쪽을 쳐다보는 처자의 눈빛이 텅 비었더군요.
얼굴은 내 쪽이라 해도 딱히 나를 본다고 할 수 없는, 공허하고 허무한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겨우 서른 이쪽저쪽인 처자가 당달봉사처럼 텅 빈 눈이라니.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처자를 스쳐 간 세월의 부피와 눈빛의 불균형은 반갑지 않은
지난날을 불러왔습니다. 고국으로 보낸 물건을 받을 회사들이 시나브로 사라져 버리는 사건 말이지요.
대한민국이 통째로 흔들리던 그 혼돈의 시기를 우리는 아이엠에프 사태라고 명하며 비명을 질렀고,
다음은 두수없이 내가 사라질 차례가 되어버렸어요. 밀린 월급과 자제 값은 어쩌지? 설마 하는
찰나에 사채이자는 구르는 눈덩이처럼 몸피를 키우며 굶주린 백곰처럼 달려들었죠.
물건을 주문한 회사들이 시나브로 사라지면서 단란한 가정까지 무너지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대들보가 꺾이는데 서까래가 온전할 리 만무죠. 작은 서까래 깜냥도 안 되는 공장이었지만, 한 사내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 놓은 공든 탑 역시 아이엠에프 회오리에 휘말려 버렸죠. 그것도 이국땅에서.
어디에 보를 막고 어디에 물꼬를 내야 하는지 알수 없는 현실 앞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이 원망스러워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극단적 선택을 유혹하는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야반도주를 꿈꿀 때,
나는 늦게 돌아가는 술꾼도 아니었고, 놀음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아니었으며
도둑놈은 더욱 아니었지만 나도향이 그리던 그 ‘그믐달’을 보았죠. 조금 전 지나쳤던 처자에게서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망고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그믐달을 쳐다보던 나를 보았던 거예요.
‘머플러’가 뜨거운 오토바이를 집에 두고 경직된 몸을 이끌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내가 등 뒤로 바투 다가갔는데도 처자는 기척이 없더군요. 흡사 담을 쌓고 어쩌지
못해서 내버려 둔 돌 같았습니다. 왜 있잖아요? 페인트도 묻어있고 어느 공구에 맞았는지
한쪽은 떨어져 나간 돌멩이. 세모도 아니고 네모도 아니며 그렇다고 동그라미도 아닌….
예상한 대로 처자가 안고 있는 물건들은 길거리 상점 어디에나 있는 소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귀이개·손톱깎이·라이터·참빗·중국산 부채 그리고 선글라스 몇 개가 고작이었으니까요.
제품 위에는 부옇게 거리 먼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라도 팔았을까. 점심은 먹었을까.’ 오지랖 넓게 거리의 처자 일상을 가늠하면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렸습니다. ‘이 손님에게 물건 하나라도 팔아야겠다는 반딧불이처럼
푸른 삶의 빛을 처자에게 점화시키려는 요량으로.
처자가 작은 미소와 메마른 목소리로 이것저것 권했어요. 텅 빈 처자의 눈망울 속으로
뜨거운 거리에 버려졌던 자아들이 모여들었죠. 나는 속으로 아주 쾌재를 부르며 뇌까렸습니다.
‘옳지! 잘한다. 그렇게 가는 거야. 무슨 개뿔 무쏘의 뿔까지 찾을 일 있겠느냐.’
야반도주를 꿈꾸며 쳐다보았던 그믐달 잔량이 이국 처자에게서 미소를 끌어낸 거죠.
얼마짜리라고 가격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육 떡 좋은 ‘모나리자’ 미소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가냘픈 처자의 미소는 분명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흔들리는 들국화를 떠오르게 했으니까요.
고추잠자리가 날면 어김없이 월출산을 오르던 어린시절이 불현듯 떠올랐어요.
푸른 하늘과 가장 가까운 그곳에 들국화가 많았거든요. ‘너는 왜 낮고 따뜻한 곳을 두고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무서리에 떨며 나를 개고생시키는지 알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들국화를 캤습니다. 그냥 캐기에는 명감나무 속에서 찬 바람에 떠는 하얀 들국화가 너무
여리고 작았거든요. 어머님의 병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캐지 않을 수 없었고요.
의식이 고향 들국화를 찾아 산을 오를 때 처자가 노란 사각 상자를 내밀며 나를 월출산에서 끌
어내렸습니다. 555라는 영국 담배 회사 광고 제품이었죠. 담배도 넣고 또 라이터 기능도 있어
편리하다는 설명을 덧붙이더군요. 그런데 정작 라이터를 켜보니 불이 안 붙고, 담배가 나오는
곳을 누르니 뚜껑이 덜렁거렸어요. 처자가 자꾸만 더듬거려 얼른 손사래를 쳤습니다.
“나는 담배를 안 피워요. 다른 것을 볼게요.” 내버려 두면 그나마 작은 불꽃이 꺼져서 더욱
차갑게 굳어버리는 희나리가 되겠더라고요. 이것저것 들추며 먼지를 털다가 골프 선수들이
사용하던 선글라스 하나를 떼어 냈습니다. 가격을 물었더니 50.000동이라네요. 그거라도
살 요량으로 비닐을 벗기고 귀에 걸었습니다. 그때, 바로 그 순간, 처자가 지금껏 침잠했던
기분을 날려버리는 ‘멘트’를 날렸습니다.
“와! 안 랩짜이 와” 처자의 한마디를 우리말로 바꾸면 이렇게 돼요.
“오메! 오빠 정말 잘 생겼네” 50.000동에, 그러니까 우리 돈 2.500원 정도에
중늙은이가 졸지에 잘생긴 오빠로 둔갑을 한 거죠.
“하하” 고개를 발딱 젖히고 웃었네요. 물 한 모금 입에 문 병아리처럼.
햇볕이 목젖을 건드린 게 틀림없어요. 그러게 오빠 눈에 무지개가 떴겠죠.
마음속 응어리를 씻어내려고 주인 모르게 마음의 창이 물청소 한 거네요.
희망의 반딧불을 점화시키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기름 한 방울 뿌리지 않았는데도 횃불이 되어버렸어요.
고단한 삶을 어깨동무하며 헤쳐 온 동지만이 공유할 수 있는
끈끈하고 뜨거운 전선에 무지개가 떴어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그런데 말이죠. 웃음은 전염성이 엄청 강해서 처자도 비 맞은 선인장꽃처럼 활짝 피더라고요.
내려다보는 오빠와 올려다보는 처자의 그 작은 우주에 손톱만큼의 무지개를 만든 거죠.
창고가 가득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성인 말씀이 웃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어요. 이쑤시개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뜨거운 거리에 오토바이를 탄 이국
사내의 창고가 가득할 리 만무고, 염천에 시멘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초라한 물건 하나 팔려고
방시레 웃는 처자 의식이 풍족하다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 잘한다. 무슨 장사건 조금의 재주는 부리게 마련이지’라고 뇌까리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누이 동지! 많이 파셔 오빠 간다.”선글라스값을 지불하고 돌아섰는데 처자가 살갑게 인사를 하더군요.
“야! 깜언 안 땀비엣 (네! 감사합니다. 오빠 잘 가요)” 랩짜이 오빠 모습 그대로 집에 와서 허리에 손을
얹고 거울 앞에 호기롭게 큰소리쳤습니다. “타이거 우즈 나와라. 나하고 한 판 붙자” 뜨거운 거리를
달려 온 모습 때문에 까무잡잡한 골프 황제가 떠오른 거죠.
거리의 매연과 먼지를 씻고 창가에 앉았습니다. 처자가 사라진 거리에 어둠이 내려요.
진한 커피 향이 후각을 자극하는데 청아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오네요. 하늘이 푸른
이내에 들면 집을 떠나는 종소리는 유난히 처연하고 슬픈 남도창처럼 긴 여운을 남겨요.
애잔하게 흐르는 성당의 종소리에 오빠의 마음을 실어 보냅니다.
거리 누이도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평온한 밤 되시라고.
그림자처럼 뗄 수 없는 힘겨운 삶이 누이 가슴에 주홍 글씨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칠지도’보다도 더 가늘고 뾰족한 야자 잎사귀가 쉬지 않고 남국의 바람을 자르고 또 자르네요.
우리가 함께 무지개를 만들었듯이. 누구나 맘 놓고, 편안하며, 자유롭고 평등하게 들이킬 수 있도록.
“님이시여! 그곳에도 평등의 바람 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