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기④|빼재에서 삼도봉까지]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산엔 예상보다 빨리 어둠이 찾아왔다. 영하 20。C를 넘나드는 추위에 랜턴 배터리까지 방전됐다. 눈은 허리까지 차오르고 방향도 길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고립무원. 어느 시인은 ‘산은 몇 백 번을 만나도 붙잡지 않는 상큼한 자유’라 했건만. 모든 걸 운명에 맡긴 채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하산한 지 4시간여. 멀리 한 점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2002년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어떤 사람들은 세계 4강신화를 창조해낸 감격적인 한일월드컵을 기억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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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산에서 바라본 대덕산 전경
치락뒤치락하던 제16대 대통령선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산꾼이라면 2002년이 UN이 정한 ‘세계 산의 해’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축구와 정치에 파묻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구촌 곳곳에서는 산에 관한 축제와 토론이 잇따라 열렸다.
그해 5월 한국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단법인 대한지리학회가 주최한 춘계학회가 바로 그것. 이 자리에서는 한국의 산을 주제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됐는데, 상당수는 백두대간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가 새삼 백두대간에 관심을 갖고 종주 계획을 세우게 된 것도 이때 발표된 글 때문이었다. 각론이 궁금한 분은 당시의 발제문을 정리해 출간한 ‘백두대간의 자연과 인간’(산악문화)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최근 백두대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무엇보다 언론과 환경단체의 노력이 컸다. 환경부가 2002년 실시한 백두대간에 대한 중요도 조사(5점 척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조사결과 한국인들은 ‘백두대간이 생물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하다(4.24)’고 응답했고 풍수지리적 관점(4.14), 역사지리적 관점(3.89), 문화적 관점(3.54)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은 야생동물의 희생과 희귀생물의 멸종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강추위, 폭설 그리고 山行
2004년 1월23일, 음력으로는 정월 초이틀.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남쪽으로 밀려내려오면서 한반도 전역은 영하 20。C의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었고 설상가상으로 남부지방에는 폭설까지 퍼부었다. 평소 같으면 무덤덤하게 남편을 떠나보냈을 아내도 이날만큼은 걱정이 많은 표정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방한장비를 꼼꼼히 점검하며 산행을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을 정도. 하지만 필자에겐 꼭 설날 연휴에 백두대간에 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산꾼들은 보통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시산제란 산신제의 일종으로 한 해 동안 안전한 산행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동안 필자는 남들이 지내는 시산제에 참석한 적이 있을 뿐, 직접 시산제를 지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마당에 시산제를 올리지 않는다면 왠지 불경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출판기획자 김준영씨에게 제문 초안을 부탁해 시산제를 준비했다. 비록 제물에 돼지머리가 빠져 아쉽기는 했지만 북어와 삼색 과일, 탁주와 떡을 정성스레 챙겼다.
이번 산행에는 대학후배 손석현씨가 동참했다. 눈길을 걸어야 하는 고된 산행인 만큼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더없이 든든한 일이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점심 무렵이 돼서야 거창터미널에 도착했다. 백두대간에 오르기엔 이미 늦은 시각. 우리는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신원면으로 향했다. 삼남지방치고 어지간한 사연 하나 없는 동네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 중에서도 거창군 신원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으로 꼽힌다. 1951년 2월에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을 두고 하는 얘기다.
낮에는 국군의 명령에 따르고 밤에는 빨치산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한국전쟁 후반부, 남한정부와 국군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빨치산을 제압하기 위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계획했다. 당시 제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이 내린 작전명령이 ‘견벽청야(堅壁淸野)’. 이것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아군의 성은 굳건히 지키되, 포기할 곳은 모두 정리하는 초토화 작전’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 700여명이 ‘통비(通匪)분자’라는 이름으로 거창군 신원면 신원중학교로 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희생자 719명 가운데 14세 이하 어린이가 절반이 넘는 359명이라고 하니 전쟁의 광기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뿐인가.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고,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군인들은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은 채 공직에 복귀했으며,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희생자들의 합동위령비마저 땅 속에 파묻어버렸다 참으로 우리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아닐 수 없다.
‘小兒合同之墓’ 앞에서
1988년 여름 필자는 1주일간 거창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농민들은 저녁때만 되면 거창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막걸리를 따라주곤 했는데, 필자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해 봄 유족들이 궐기대회를 열고 땅 속에서 위령비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알았다(김영삼 정부시절인 1996년 1월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법률’이 제정됐다).
신원중학교 뒷동산의 사건현장에는 3개의 비석이 있다. 전쟁의 공포는 유족들이 시신을 거두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건발생 3년 뒤인 1954년이 돼서야 주민들이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이때 뼈의 크기에 따라 남, 여, 어린이 묘로 나누어 안장했다고 한다. ‘남자합동지묘’ ‘여자합동지묘’ ‘소아합동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묘소에 소주를 붓고 참배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다녀갔는지 쓰레기통 안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멀리 도로 건너편으로 공사가 한창인 거창사건 희생자 묘역 및 기념공원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세운 모양의 조형물 양옆으로 추모하는 군인과 오열하는 유족의 동상이 보였다. 조형물 뒤편에 새겨진 표성흠 시인의 글이 나그네의 마음을 또 한 번 착잡하게 만들었다.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이들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두 번 울었던 희생자들. (중략) 길손들은 여기 이곳을 그냥 무심코 지나지 마시라. 무언가 생각들을 좀 해보시라.’
버스를 타려고 시내 쪽으로 걸어 나오다가 구멍가게에 들렀다. 소주와 컵라면을 주문하자 가게 주인이 김치를 안주로 내놓았다. 추위를 이기려 연신 소주를 들으켜면서 53년이라는 세월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반세기가 지나서나마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공원이 들어선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제2의 거창사건’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그것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수승대 저녁풍광에 취하다
신원면에서 거창을 경유해 수승대(搜勝臺)로 향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수승대를 지나쳐 덕유산 방면으로 달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 내려오는데 오른쪽으로 펼쳐진 계곡이 절경이다. 이곳이 바로 위천이다. 덕유산은 깊은 골짜기만큼이나 멋진 풍광의 계곡을 여럿 품고 있다. 무주의 구천동, 함양의 화리동, 거창의 위천이 손꼽힌다. 수승대는 위천의 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과거 이곳은 거창신씨 문중의 터였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이 수없이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나무기둥 하나도 그냥 세우지 않았다. 실제로 수승대를 거닐다 보면 주변의 풍광과 완벽하게 어우러진 정자인 요수정을 만나게 된다. 수승대의 명물이 거북바위인데, 요수정에서 계곡 쪽을 바라보면 거북의 형세가 그대로 드러난다.
수승대는 본래 수송대(愁送臺)로 불렸다 한다. 신라의 국력이 강성하던 무렵까지도 거창은 백제의 영토로 남아 있었는데, 당시 신라로 떠난 백제의 사신은 온갖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백제에서는 수송대에서 사신을 위한 송별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수송대는 ‘근심으로 떠나 보낸다’는 뜻이다.
수승대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황은 이곳을 방문하려다 갑작스런 왕명을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이때 이황이 거창신씨 문중의 신권에게 보낸 시에 ‘수승이라고 새롭게 이름을 바꾼다’라고 썼다. 지금도 수승대에는 이황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호방한 문장에서 새삼 대학자의 풍류를 짐작할 수 있다.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1월24일. 아침 일찍 국밥을 사먹고 택시를 탔다. 무주-거창간 37번 국도의 중간지점인 ‘빼재’가 백두대간 종주 네 번째로 이어지는 산행의 출발점이다. 추운 날씨 탓에 도로에 쌓인 눈이 녹지 않아 택시는 거북걸음으로 비탈을 올랐다. 빼재는 사냥꾼들이 동물을 잡아먹고 뼈를 쌓아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수령(秀嶺)’이라는 글씨가 있고 이곳이 ‘신풍령(新風嶺)’으로도 불리는 걸 보면, ‘빼어난 고개’라는 데서 빼재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택시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방한용품으로 중무장을 했는 데도 벌거벗은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가장 먼저 올라야 할 수정봉을 바라보니 산 전체가 거대한 빙벽처럼 느껴졌다. 택시기사는 우리에게 고개 뒤편으로 오르는 길을 알려줬다. 조금이라도 쉽게 산행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빙벽 대신 뒤편의 넓은 길을 택했다.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대간 마루금을 만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지도를 꺼내 방향을 살펴보고 나서야 산중턱 갈림길부터 반대로 걸었음을 알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걷다가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능선을 10여분쯤 올라서 겨우 백두대간 능선을 찾았다. 조금 편하게 가려던 것이 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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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 요수정에서 바라본 거북바위.
려 화를 부른 셈이다. 수정봉에서 된새기매재를 지나 호절골재로 이어지는 길은 평탄한 코스였다. 눈만 아니라면 가볍게 뛰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에 눈이 흩 날리면서 길이 사라져버려 새롭게 러셀(Russell, 본래 제설차를 뜻하지만 맨 앞에서 눈길을 헤치면서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다는 의미도 갖고 있음)을 하다 보니, 평상시보다 시간이 2배 정도나 걸렸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기분이 상쾌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비마저 시원치 않은 후배의 입에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삼봉산(1254m)은 조망이 뛰어났다. 북으로는 거창삼도봉과 대덕산이, 남으로는 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산 전체가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덕유산을 보고 있자니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무룡산(봉황산)부터 삼봉산까지가 덕유산이다. ‘크고 넉넉한 산’이라 해서 덕유산이라 했던가. 삼봉산을 끝으로 덕유산 자락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몹시 서운했다. 필자는 김정옥 시인의 ‘덕유산’을 읖조리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산은 자유다. / 몇 백 번을 만나도 붙잡지 않아 / 붙잡히지 않는 상큼한 자유다. /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고 / 헤어지고 싶을 때 헤어질 수 있어 / 부작용 없고 부담 없는 자유다. / 산은 자유다. / 속박당할 염려 없는 깔끔한 자유다.’
삼봉산에서 하산을 시작할 무렵 한 무리의 산악회 사람들이 다가왔다. 대전에서 왔다는 그들도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러셀을 양보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삼봉산에서 소사고개로 떨어지는 급한 내리막길에서 아마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 지면을 빌려 앞에서 길을 만들어준 9명의 종주대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오후 1시30분. 예정보다 3시간이나 늦게 소사고개에 도착했다. 대전에서 온 종주자들은 매점 마당에 점심상을 차렸고, 우리는 옆쪽 나무 테이블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뜨거운 라면 국물이 금세 살얼음으로 변할 만큼 추운 날씨였다. 필자가 오후 산행을 재촉하자 후배는 “더 이상 갈 수 없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냥 밀어붙이기엔 장비가 너무 부실했다. 아쉬운 이별이었다.
그 대신 대전의 종주자들과 함께 대덕산을 넘어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도 회의 끝에 오후산행을 포기했다. 그들은 필자에게 포도주와 매실주를 권하며 “대덕산은 눈이 많다. 야간산행을 감수해야 한다”고 잔뜩 겁까지 주었다.
이제 혼자 남았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필자는 음력 정월 초사흘에 맞춰 지어놓은 시산제 제문을 떠올리며 서둘러 거창삼도봉 자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삼가 엎드려 비옵니다”
거창삼도봉으로 가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눈만 아니라면 30분이면 족할 거리였지만 1시간30분이나 걸렸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말처럼 여럿이 함께 걷다가 혼자 가려니까 힘이 곱절로 드는 것 같았다. 필자는 몇 번이나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끌렸지만 그때마다 “가자! 가자!”고 외치며 눈길을 헤쳐나갔다.
거창삼도봉(1250m) 정상엔 똑바로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카메라로 전경을 담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배터리가 방전됐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안부 쪽으로 내려서서 시산제를 준비했다. 본래 시산제는 유교식 제례를 따라 강신, 참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헌작, 음복, 소지 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혼자서 지내는 시산제인 데다 바람까지 불어 약식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제물을 차리고 향을 피운 뒤, 큰 소리로 제문을 읽어 내려갔다.
“유세차 단기 4337년 1월3일 불초 산꾼 육성철은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천지신명님, 삼도봉 신령님 전에 삼가 엎드려 비옵니다.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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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고개로 내려가는 측백나무 숲길.
것도 모르고 그저 산이 좋아 시작한 산행이 어언 스무 해로 접어드매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습니다. (중략) 다가온 새해에도 모쪼록 안전하고 뜻 깊은 산행이 되게 하시어 불초로 하여금 산의 덕을 조금이나마 펼칠 수 있는 아량을 베풀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중략) 이제 한잔 술을 올리나니 천지신명, 삼도봉 산신령께서는 상향하여 주시옵소서.”
시산제의 마지막 순서인 소지를 끝내고 제물로 썼던 막걸리를 한잔 따랐다. 입 속에서 얼음이 씹혔다. 들짐승을 위해 북어포를 눈 위에 던져놓고 서둘러 짐을 꾸렸다. 잠시 지체했을 뿐인데 해는 벌써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시산제 중반부터 조금씩 날리던 눈가루도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대덕산(1290m)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석양의 붉은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바람과 눈 때문에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어둠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필자는 랜턴을 켜고 백두대간 표지에 의존해 하산을 서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잃고 말았다. 표지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고, 이따금씩 산짐승의 발자국만 보일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우선 랜턴 배터리가 방전됐다. 추운 날씨 탓이다. 여분의 건전지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등산장비가 하나둘 문제를 일으켰다. 바위를 통과하다가 스틱이 부러졌고, 내리막길에선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아이젠 하나를 잃었다. 오후부터 조금씩 이상 징후를 보이던 등산화마저 방수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악전고투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필자는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한 발짝씩 전진했다. 이따금씩 백두대간 표지가 나타났지만 이내 놓쳐버리곤 했다. 아득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서 조그마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만 아니라면 단숨에 내칠 거리였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은 산속의 나그네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엄습했다. 초콜릿을 잘라 입안에 털어넣었지만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 때 바위로 삼면이 가려진 안락한 쉼터 같은 곳이 나타났다. 저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잠시 일었다. 실제로 바위 곁에 몸을 기대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러다가 덜컥 겁이 났다. 수많은 조난사고가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일시에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긴장이 되살아났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눈 속에 파묻혀 하산한 지 4시간여. 평탄한 능선이 끝나는가 싶더니 아래로 뚝 내려섰다. 무주-김천간 30번 도로가 지나는 덕산재였다. 긴 한숨이 터져나오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택시를 부르고 싶었지만 휴대전화 배터리도 방전된 지 오래였다. 필자는 잠시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무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명절연휴였지만 지나가는 자동차마저 없었다. 그래도 넓은 아스팔트길이어서 산속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더 이상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지쳤을 무렵 불빛이 새나오는 농가의 문을 두드렸다. 한 할아버지가 문을 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필자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랫목에 요를 깔고 이불을 폈다. 그리곤 필자의 등산장비를 모두 들여놓고는 닭도리탕을 안주로 술상까지 차려냈다.
“이곳을 거쳐간 산꾼이 많으니 걱정하지 마소. 그냥 하룻밤 묵어가시오. 돈 받을 생각이면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으니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소.”
그러나 어찌 빈손으로 받아만 먹을 것인가. 필자는 배낭 속의 과일과 술을 꺼내 할아버지께 드렸다. 할아버지는 필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70년 세월의 희로애락을 풀어냈다.
“일본에서 UN군으로 차출돼 6·25전쟁에 참전했다네. 인형공장을 운영하면서 5남매를 대학에 보내고, 10여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혼자서 과수원을 가꾸고 있는데….”
다음날 아침, 필자는 화장실에 가려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 대덕산이 보였다. 밝은 날 보니 산은 지난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당초엔 이 날도 계속 산행을 할 계획이었지만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 무리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 이상 민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을 챙기는데, 할아버지가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남의 집에 와서 아침도 들지 않고 가는 결례가 어디 있나? 아무리 바빠도 해장은 하고 가게나.”
할아버지는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닭도리탕을 안주로 소주와 막걸리를 차려냈다. 그러고는 수건에 물을 묻혀 주시면서 “우리 집에는 수도가 없어. 먼 길을 가야 하니 이걸로 세수라도 하게”라고 말했다. 막잔을 비울 무렵 택시가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택시기사에게 “잘 모셔다 드려야 한다”며 수차례 부탁하고 돌아섰다. 필자는 함박눈을 맞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를 빠져나왔다.
다시 덕산재에 서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2월1일 새벽. 김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주행 버스를 탔다. 승객은 필자를 포함해 2명. 필자의 옆에 앉은 40대 중반의 여성도 등산복 차림이었다. 필자가 “어느 산을 가느냐”고 묻자 “덕유산에 코스 답사를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회원이 200명 정도 되는 여성산악회의 회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산을 주제로 여러 얘기를 나누던 중 새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실감났다. 경기도에서 자란 필자는 경기도의 산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산악회장이라는 중년 여성은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에 자주 오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우리는 내 집의 보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의 집 물건만 열심히 보러 다닌 셈이다.
오전 8시, 다시 덕산재에 섰다. 1주일 전에 비해 추위는 누그러들었지만 바람은 여전했다. 대간으로 들어서자 앞서 간 발자국이 하나 보였다. 눈이 무릎까지 빠질 지경이었지만 누군가 지나간 발자국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김천과 무주를 연결하는 부항령을 지나 야트막한 오르막에 이르자 40대 초반의 등산객이 보였다. 그가 바로 발자국의 주인공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필자와 똑같이 2003년 10월3일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진도는 필자보다 두 배나 빨랐다. 부산에 산다는 그는 매주 산행을 하는데 폭설 때문에 덕산재-우두령 구간을 빼놓았다가 이번에 보충하는 중이라고 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이번에는 필자가 앞에서 러셀을 했다. 그러자 1주일 전처럼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170m봉을 지나 목장지대를 통과하다가 눈 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정말이지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은 더 걷고 싶지 가 않았다. 부산 아저씨는 서둘러 우두령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필자는 이미 이때 코스를 단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삼도봉에서 미니미골까지
삼도봉(1176m)으로 가는 길은 긴 오르막이라서 지치기 쉬운 코스다. 하지만 멀리 서쪽으로 시원하게 솟아오른 민주지산과 석기봉이 있기에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민주지산은 비록 백두대간 줄기에서는 살짝 비켜서 있지만 산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산으로 유명하다. 산 이름은 ‘산세가 민두름(밋밋)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지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운산으로 기록돼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영남과 호남, 충청의 경계는 삼도봉이다. 하지만 언어·풍습·음식 등 문화적 분기점은 민주지산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삼도봉이라는 이름을 자주 보게 된다. 첫 번째는 지리산 화개재와 임걸령 사이에 있는데 이곳은 전남 구례, 경남 하동, 전북 남원의 분기점이다. 두 번째는 소사고개와 대덕산 사이에 있는데 이곳은 경북 김천, 경남 거창, 전북 무주의 갈림길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민주지산 자락에 있는 삼도봉으로 충북 영동, 경북 김천, 전북 무주의 경계선이다. 충청·호남·영남을 삼도로 이해한다면 마지막 삼도봉이 실질적인 삼도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곳에는 삼도의 화합을 기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10월10일이면 ‘삼도봉 만남의 날’ 행사가 열린다.
삼도봉 아래쪽 안부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필자와 부산 아저씨는 영동 물한리계곡 쪽으로 내려섰다. 이 코스는 길이 평탄하고 계곡의 풍광도 아름답기 때문에 삼도봉이나 민주지산 등반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이 길을 우습게 여겼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물한리계곡은 일기변화가 극심해서 순식간에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일도 허다하다. 이 때문에 1998년에는 국군 특수부대 장병들이 동계훈련 도중 집단 동사한 일까지 있었다.
물한리계곡은 흔히 미니미골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니미골에는 후방에서 고립된 인민군 1개 사단과 빨치산 부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밤낮으로 계속된 포격으로 전원 몰살당했다고 한다. 미니미골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 할아버지는 “인민군 시체가 계곡을 뒤덮었다”며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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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盛喆 |
●1969년 경기 안성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중앙대 사회복지학 석사 ●일요신문·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저서 : ‘왜 클럽축구가 더 재미있을까’ ●연구논문 : ‘노숙자 지원서비스의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 | |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미니미골도 지금은 전국적인 관광지다. 쭉쭉 뻗은 침엽수림과 굴곡이 완만한 계곡은 가족나들이 코스로 손색이 없어 여름철이면 넓은 주차장에 차댈 곳이 없을 만큼 인파로 붐빈다고 한다. (끝)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발행일: 2004 년 03 월 01 일 (통권 534 호)
[백두대간 종주기③|복성이재에서 빼재까지]
장엄한 해돋이, 드넓은 구름바다 … “산은 보일 때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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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산 운해.
이른 아침 엷게 언 땅 ‘사각사각’ 밟으며 산 정상에 오르니 온통 억새 천지다. 정상인지 평원인지 모를 봉화산에서 중치 지나 백운산까지는 줄곧 오르막. 산 아래 펼쳐진 산죽밭 배경 삼아 해 넘어가고, 하루를 뒤돌아보니 온종일 아무도 없는 산속을 혼자 걸었다.
지난해 12월9일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이 마침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률은 그동안 관련 부처마다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표류를 거듭해왔었다. 국회는 일단 ‘환경부가 산림보호 기본계획의 원칙과 기준을 수립하고, 산림청이 보호지역 지정·관리를 맡는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국회가 백두대간의 오염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수용해 무분별한 개발에 제동을 건 것은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백두대간 보호는 법률 제정보다도 실천이 더 중요하다. 벌써부터 각 정부부처는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을 달리 해석하고 있어 업무조정 단계에서 자칫 갈등을 빚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인다. 또한 백두대간 개발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시민단체와 지역주민의 이해관계가 여전히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특히 백두대간 보호지역 가운데 약 36.8%는 사유림이어서 재산권 분쟁도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백두대간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한반도 곳곳에서 백두대간의 지형을 변형시키고 있는 각종 위락시설과 채석장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백두대간을 단순한 하이킹 코스 내지는 관광단지 정도로 여기는 우리네 의식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필자는 백두대간의 상처를 발견할 때마다 덕유산의 어느 골짜기에 붙어 있는 문구를 떠올리곤 한다. ‘오지 않았던 것처럼 머물다 가십시오’. 백두대간 보호의 첫걸음은 바로 그렇게 내디뎌야 하지 않을까?
무진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진장’. 전라북도 사람들은 동북쪽의 산간지역을 흔히 그렇게 부른다. 무주 진안 장수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무주는 전북에서 경작지 면적이 가장 적고, 진안은 산지의 비율이 80%에 달하며, 장수는 평균 해발고도가 430m에 이른다. 이렇게 보면 무진장이 ‘전라북도의 지붕’으로 불리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12월27일 새벽. 이따금씩 들르던 남원역 근처 식당은 문을 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시외버스터미널로 발길을 돌려 24시간 김밥집을 찾았다. 순두부찌개에 김밥 한 줄을 추가로 시켜 먹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문득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아저씨의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의 배낭보다 3배는 더 무거울 것 같아 보이는 초대형 배낭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는 그에게 한 수 배우고 싶었으나, 그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왠지 그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원에서 인월까지 버스로 이동한 뒤, 인월에서 택시로 갈아타고 복성이재에 도착했다. 아침 7시40분. 산속이라 그런지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첫걸음은 무겁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멀리 지리산 쪽에서 해가 떠올랐고, 몸에서 적당히 땀이 배어나면서 발걸음도 빨라졌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땅속의 물기가 지면을 밀어올려 흙 속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사이에 엷은 얼음이 들어선 탓이다.
아침 9시10분. 봉화산(920m)에 올랐다.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에 걸쳐 있는 이 산은 철쭉이 곱기로 유명하다. 타지역 사람들은 인근의 바래봉 철쭉을 더 높이 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봉화산 철쭉이 바래봉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한다. 봉화산의 또 다른 명물은 억새다. 봉화산 정상 언저리에는 키가 2m를 넘는 억새가 거대한 평원을 이루고 있는데, 늦가을에 찾아가면 제대로 취할 수 있다.
월경봉에서 중치(중재)로 가는 길은 얕은 구릉을 오르내리는 편안한 코스다. 중치 표지판 앞의 너럭바위에 앉아 남원에서 사온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필자가 “백두대간을 간다”고 하자, 김밥집 아주머니는 “탈이 나면 큰일”이라며 은박지로 겹겹이 싸서 비닐봉투에 넣어주셨다. 덕분에 산속에서도 마르지 않은 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온종일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중치에서 백운산으로 가는 길은 고단했다. 어지간한 산이면 오르내림이 반복되게 마련인데, 백운산은 줄곧 오르막이다. 중치를 출발할 때만 해도 눈앞에 백운산 정상이 들어왔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이 묻히는 느낌이었다. 눈 쌓인 응달을 통과하면서는 몇 번이나 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백운산은 과연 지리산과 덕유산을 연결할 만한 준봉이었고, 해방 전후의 빨치산들이 주요 근거지로 활용할 만한 심산이었다.
가쁜 숨을 토해내고 정상에 오르자 가장 먼저 까마귀떼가 맞아준다. 수십 마리가 산 정상 주위를 떼지어 선회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흉조’로 알려져 있는 까마귀지만 산꼭대기에서 만나서일까, 그리 싫지가 않았다. 더욱이 까마귀떼가 날아다니다 잠시 머무는 곳을 바라보면 반드시 멋진 조망이 펼쳐졌다. 필자는 책을 펴들고 봉우리의 이름을 하나씩 맞춰보았다. 동쪽으로 기백산, 북쪽으로 덕유산, 서쪽으로 팔공산, 남쪽으로 지리산…. 이제서야 사람들이 백운산을 명산으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백운산에서 영취산으로 가는 길은 온통 산죽(山竹)밭이다. 얼마나 많던지 산죽을 헤치며 가느라 예정보다 1시간이나 더 지체했다. 하지
만 새옹지마라던가. 덕분에 필자는 영취산(1076m)에서 장엄한 일몰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영취산은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이 갈라지는 산이어서 호남과 충청의 산줄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빠른 속도로 기울던 해가 산 너머로 숨자 먼 산부터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붉은색에서 분홍으로, 분홍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회색으로. 그리고 마지막 절차인 검은색으로 변할 무렵 겨울 하늘에 초생달이 떴다. 이젠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시간이다. 필자는 달빛에 의지해 무령고개를 따라 영취산을 내려왔다.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이래 처음으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갔다.
‘무진장’ 중에서도 장수 사람들은 예로부터 자부심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그 한복판에 바로 논개가 있다. 일찍이 수주 변영로 선생은 불꽃처럼 살다 간 논개를 이렇게 노래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기왕지사 장수 땅으로 들어온 이상 논개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지날 수는 없는 노릇. 필자는 아침 일찍 택시기사에게 “논개가 태어난 집으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주논개님 생가를 찾으십니까?”라며 필자의 무례함을 꼬집고 나서, 논개의 삶과 죽음을 구수한 사투리로 풀어냈다. 그는 “장수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다 압니다”라면서도, “사람들이 진주 남강의 촉석루 때문에 주논개님을 진주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학계에서는 논개의 실제 출생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장수 사람들은 논개가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 주장에 따르자면 논개의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돼 이후 인근지역에 새롭게 복원한 것이고, 현재의 생가터는 논개의 할아버지가 서당을 운영하던 곳이다.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논개의 무덤에 얽힌 야사다. 진주성 싸움이 끝난 뒤 논개의 시신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경남 함양 땅에 묻혔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씨 문중이 왜병의 추격을 두려워했다는 설과 논개의 신분이 기생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무튼 논개의 묘는 순절한 지 382년 만인 1975년이 돼서야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다른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어떤 향토사학자는 “논개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이야 어떻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논개의 정신이 어찌 변질될 수 있을 것인가? 논개가 어디서 태어났든, 또 어디에 묻혔든, 논개의 생가에 들어선 바에야 그의 아름다운 영혼에 빠져볼 일이다. 필자는 논개 생가 입구에 새겨져 있는 만해 한용운의 시 ‘논개의 애인 되야서’를 읽으며 한동안 감상에 젖었다.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깃대봉의 점심식사
아침 9시, 영취산 정상에서 깃대봉을 향해 산행을 시작했다. 군데군데 쉬어갈 만한 바위도 많고 굴곡이 없는 능선이어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면 이쯤에서 사람 구경을 했으면 했는데, 여전히 인적은 찾을 수 없었다. 멀리서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정작 벌목공은 보이지 않았다.
영취산과 깃대봉 중간 지점 북바위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서쪽으로 대곡호수와 논개 생가가 한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지역을 조망할 수 있다. 필자는 북바위에 앉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왼쪽은 논개의 고향이요, 오른쪽은 논개의 무덤이라…. 경남 함양군 서상면에 살던 논개의 할아버지가 바로 이 북바위를 지나 논계의 생가 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니, 북바위 밑을 뚫고 지나가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무상하게만 느껴졌다.
점심 무렵 어렵잖게 깃대봉(1014.8m)에 도착했다. 화창한 날씨 탓에 북편의 장수덕유산과 남덕유산이 훤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내일이면 저 장쾌한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에 두근거렸다. 필자는 큰 산에 들기 전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일찌감치 육십령 쪽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만 될 것인가. 필자는 깃대봉 아래 헬기장을 지나다가 진주에서 온 등산객들과 어울려 나른한 오후를 보냈다. 겨우 라면 한 봉지를 보태고, 대신 맛깔스런 반찬을 푸짐하게 얻어먹었으니 이만하면 빚을 져도 단단히 진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필자는 육십령에서 진주 등산객들의 자동차에 편승해 서상면의 논개 무덤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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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이 핀 장수덕유산 상고대.
논개의 묘는 들꽃과도 같았던 그의 삶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진한 갈색 우레탄이 깔려 있는 진입로와 대리석 계단은 거부감마저 일게 만들었다.
서상터미널에서 2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타 저녁 늦게 육십령휴게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필자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틀 전 남원의 김밥집에서 마주친 아저씨를 다시 만난 것이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지리산에서부터 백두대간 연속종주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필자는 아껴두었던 포도주를 따르며 고수의 특강을 경청했고, 그는 맥주로 답례하며 우리의 재회를 자축했다. 백두대간을 세 번째 종주하고 전국의 웬만한 명산은 다 올랐다는 그는 백두대간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 했다. 필자는 그를 기꺼이 ‘송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 입은 백두대간
육십령. 이곳은 예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예전에는 이 고개에 도적들이 많아 60명 이상 떼를 지어야만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도 안의와 장계를 연결하는 26번 국도가 육십령 고개를 지나는데, 이 지역은 특히 난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20여년째 육십령휴게소를 지키고 있는 조정자 할머니(64)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얼굴이 눈에 익으면 공짜로도 재워준다는 할머니의 넉넉한 인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드물지만 육십령으로 신혼여행을 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2월30일 아침 일찍 육십령휴게소를 나섰다. 송선생이 앞서 걷고 필자는 뒤를 따랐다. 30분쯤 갔을까. 새벽의 정적을 깨는 굉음이 들려왔다. 인근 채석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쉴새없이 트럭이 드나들며 돌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자 채석장은 흉측한 모양을 드러냈다. 이쯤 되면 지도의 모양도 바꾸어야 할 판이란 생각이 들었다. 채석장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나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불쾌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남쪽에서 덕유산을 오르려면 먼저 할미봉을 통과해야 한다. 이곳은 덕유산 전구간에서 가장 까다로운 코스로 알려져 있다. 송선생은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고, 필자는 숨도 고를 겸해서 할미봉 턱밑에 있는 ‘대포바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육십령을 넘어왔다가 어마어마한 대포를 보고 놀라 달아나서 호남지방이 화를 면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드디어 공포의 할미봉 내리막길. 로프가 매달려 있지만, 올이 헝클어져 있어 그냥 매달리기엔 불안했다. 그래서 힘을 반쯤만 주고 내려가려니 눈길이 미끄러워 위태로웠다. 할 수 없이 배낭을 먼저 떨어뜨리고 네 발로 기어서 겨우 내려설 수 있었다. 멀리 송선생이 봉우리를 두 개쯤 넘어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어떻게 저리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싶었다.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람만 강하게 불더니 구름이 앞을 가리고 간간이 눈보라까지 날렸다. 필자가 걱정됐던지 송선생은 덕유산교육원 삼거리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구름 속을 가는 기분으로 덕유산 자락을 걸었다. 똑같은 산이지만 북벽과 남벽은 천양지차였다. 북벽엔 백색의 상고대가 절경을 이루었지만, 남벽엔 가을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우리는 가을에서 겨울로, 다시 겨울에서 가을로 넘나들며 덕유산에 빠져들었다.
장수덕유산(1510m)에는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이곳에서 덕유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겠지만, 짙은 구름과 눈발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남덕유산 정상의 일기는 장수덕유산보다 더 불순했다. 바람은 더 세졌고 시야도 갈수록 좁아졌다. 우리는 일정을 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내공의 차이는 컸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산은 보일 때 걸어야 제 맛이다.’
“왜 산을 타세요?”
월성치에서 삿갓봉으로 가는 길은 달력 속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늑하다. 흔히 등산객들이 여기까지 오면 피로를 핑계삼아 삿갓봉(1418m)을 우회하곤 한다. 하지만 송선생은 백두대간 마루금을 지나야 한다며 삿갓봉으로 코스를 잡았고, 삿갓봉 정상을 밟고 나서야 비로소 배낭을 풀고 긴 휴식을 취했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아주 평범한, 그러나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왜 산을 타세요?” 그의 대답이 곧 그의 내공을 말해주었다.
“저도 때로는 왜 이 짓을 하나 싶어요. 아마 누가 돈 주고 하라고 하면 절대로 안 할 겁니다. 내 돈 쓰면서 하니까 기분 좋게 하는 거죠. 하루종일 걷다가 저녁이 되면 ‘아, 내가 오늘은 이만큼 걸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잖아요. 세상을 살면서 그런 느낌을 갖기가 쉽지 않거든요. 아마 그 때문에 걷는 것 같아요.”
삿갓봉에서 내려서자 삿갓재대피소가 보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수도가 터졌다고 걱정이었지만, 산중에서 하룻밤 쉬어가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송선생과 누룽지와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녘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에 잠이 깼다. 대피소 밖으로 나가보니, 어느새 구름이 모두 걷히고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내일은 기분 좋은 산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삿갓재 일출에 무룡산 운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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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생가 복원 터.
12월30일 아침. 왠지 조짐이 좋았다. 송선생이 배낭을 꾸리는 동안 필자는 삿갓재대피소에서 황점 방향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에 기대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번지는 햇살이 예사롭지 않더니 과연 장엄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됐다. 작은 홍점이 반구를 이루고 다시 원형으로 바뀌는 데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삿갓재에서 40여분쯤 걸어서 무룡산에 올랐다. 우리는 무룡산 정상에서 또 하나의 큰 선물을 받았다. 동서로 드넓게 운해가 펼쳐졌고, 남북으로 백두대간의 주능선이 훤하게 열렸다. 9km 정도 떨어져 있는 덕유산 정상(향적봉·1614m)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서는가 하면, 멀리 가야산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덕유산(德裕山)’의 한자를 풀어보면 ‘크고 넉넉한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이 환란을 겪을 때마다 백성들이 이 산으로 숨어들면 적군이 찾지 못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에 걸쳐 있는 덕유산은 남북으로 30km에 이르고 10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20개를 거느리고 있으니 실로 엄청난 규모다.
필자는 어제 무리하게 야간산행을 강행하지 않고 삿갓재대피소에서 묵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악천후를 뚫고 밀어붙였다면 목표지점까지 도달할 수는 있었겠지만 아침 덕유산의 그 비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하산했을 것이다.
무룡산에서 동엽령까지는 편안한 내리막길이다. 앞쪽으로 향적봉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라 상쾌하고, 대간의 좌우를 바라보는 느낌도 시원하다. 동엽령에서 왼쪽으로 하산하면 도중에 칠연계곡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구한말 전북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신명선이 왜군과 격전을 치르다가 부하 150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뒷날 주민들이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해 안성면 공정리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칠연의총이다.
동엽령에서 백암산에 올라 송계삼거리에 이르면 백두대간은 덕유산 정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여기서부터는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덕유산 자락을 빠져나가는 코스다. 지봉과 대봉을 지나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신풍령 가까이에 있는 아담한 오솔길과 시원한 소나무 숲은 산행의 피로를 깨끗이 씻어주었다.
나흘 동안 걸어서 빼재까지 왔다. 무주와 거창을 잇는 727번 도로 위에 내려섰을 때, 송선생은 필자를 1시간 동안 기다렸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필자도 제법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는데, 그는 나보다 훨씬 무거운 배낭을 지고 1시간이나 먼저 도착한 것이다. 그는 역시 체급이 다른 선수였다.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간이 됐다. 우리는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전을 기원했다. 송선생과 동행한 것은 불과 이틀이었지만, 필자는 아주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스키족과 등산객의 분기점 무주
무주리조트와 무주구천동은 백두대간 마루금과 무관하다. 하지만 덕유산을 통과하면서 이곳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필자의 어머니가 오래 전부터 무주구천동에 가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2004년 1월4일 새해 첫 일요일을 맞아 무주리조트는 북새통을 이뤘다. 이곳에서 덕유산 정상까지는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산 타는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겠지만, 곤돌라를 타고 10여분 올라가서 다시 10분 정도 걸으면 손쉽게 향적봉에 닿을 수 있다. 향적봉에서 50m쯤 내려가면 향적봉산장이 있다. 무주리조트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요긴한 대피소였지만, 지금은 투숙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이 향적봉산장은 리조트에 놀러온 사람과 덕유산 등산객을 가르는 심리적 분기점이기도 하다. 곤돌라 타고 놀러온 사람들은 대개 이쯤에서 돌아가고, 등산객 역시 리조트 쪽으로는 애써 눈길을 거둔다. 아주 묘한 일이다. 스키족들은 힘겹게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추운데 무슨 고생이야”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등산객들은 리조트 쪽을 바라보며 “저 놈의 스키장이 산을 다 망가뜨린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일단 향적봉에 올랐다면 중봉까지 가볼 일이다. 향적봉에서 중봉에 이르는 지역엔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아고산 식생대가 분포하고 있으며, 능선 주변에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 군락지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중봉에 올라서야만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제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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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盛喆 |
●1969년 경기 안성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중앙대 사회복지학 석사 ●일요신문·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저서 : ‘왜 클럽축구가 더 재미있을까’ | |
향적봉에서 무주구천동으로 내려가는 길의 중간쯤에 조선시대 선승들이 머물렀던 백련사가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백련사에서 구천동 관광단지까지는 약 6km 정도인데 넓고 평탄한 길이라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계곡,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 빛을 발하는 이 코스는 사시사철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무주구천동 제1경(나제통문)부터 제33경(향적봉)까지 하나씩 밟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
발행일: 2004 년 02 월 01 일 (통권 533 호) |
[백두대간 종주기②|성삼재에서 복성이재까지]
“이보게!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가파른 능선 따라 굽이굽이 올라 산봉우리 두드리니 아침이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산자락 감싼 치마폭 안개가 걷히는가 싶더니 이내 백두대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리산 마지막 ‘대간 봉우리’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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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봉에서 바라본 일출
고리봉을 넘어 백두대간은 잠시 쉬었다 간다. 여원재, 사치재, 새맥이재, 복성이재까지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반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에는 모두 487개의 산(山), 령(嶺), 봉(峰), 재(峙)가 있다. 특기할 것은 500번 가까이 오르내리는 동안 단 한 번도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백두대간을 설명할 때 흔히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조선 영조시대 백두대간을 그린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서 인용된 문구다.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산이 솟은 이유와 물이 흐르는 사연을 되새겨보게 된다. 그곳에는 서로를 범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는 군자의 풍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백두대간을 능선의 연속으로만 파악한다. 그래서 백두대간의 주능선 코스만을 보존하는 것으로 우리 국토의 건강성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리체계를 자세히 뜯어보면 백두대간이 일련의 산줄기를 넘어 한반도 전체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백두대간은 지역을 구분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창출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수없이 바꿔왔다. 그런 측면에서 백두대간을 보호한다는 것은 곧 한국인이 자연의 면전에서 겸손함을 되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성삼재에 서다
11월이다. 전라선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은 필자는 취기를 빌려 잠을 청하려 식당칸으로 갔다. 지리산 늦가을로 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1주일간 지리산에 묻히기 위해 휴가를 냈다는 한 중년 여성이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배낭에 기댄 채 열심히 지도에 줄을 긋고 있었다. 아마도 1주일 동안 돌아다닐 코스를 정하는 모양이다. 그에게 “왜 지리산인가?” 물었더니,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이 지리산 답사를 마치고 내린 결론이 날아왔다. “산은 지리산이다.”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죽을 때까지 ‘지리산 중독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팔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은 설악산이었다. 지리산이 설악산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은 1994년이고, 이후로는 한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설악산이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객을 많이 유치한 반면, 지리산은 거대한 마니아 집단을 갖고 있다. 백두산과 금강산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서지 않는 한, 지리산은 앞으로도 국내 제1의 국립공원 자리를 지켜나갈 듯하다.
구례터미널에서 성삼재로 올라가는 길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굴곡이 심하다. 혹자는 이 길을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의 아흔아홉 굽이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맛은 성삼재 코스가 한 수 위다.
특히 여름철 장마 끝에 이 길에서 맛볼 수 있는 구름바다는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지리산 종주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 화엄사에서부터 등반을 시작해야 마땅하지만, 한번쯤은 차량으로 성삼재까지 드라이브도 해볼 만하다. 감히 말하지만 이 길은 한반도 남쪽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아침 6시20분. 다시 성삼재에 섰다. 오른쪽 길을 따라 노고단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을 뒤로하고, 필자는 인적은 물론 불빛조차 없는 왼쪽 철창문으로 들어섰다. 만복대로 가는 입구다. 멀리 반야봉 쪽에서 해가 떠오르면서 산 아래쪽에 치마폭처럼 둘러쳐 있던 안개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삼재에서 40여분쯤 오솔길을 걸어가자 헬기장 가장자리에서 야영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중년의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텐트 위의 물기를 제거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묘봉치다. 지리산 서부능선을 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장소다. 묘봉치에서 곧장 내려가면 위안리가 나오고 그 길을 계속 걸으면 지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지리산 온천랜드가 있다. 지리산온천은 한겨울이 제맛인데, 그 중에서도 눈이 내리는 날 노천탕에서 즐기는 좌욕이 으뜸이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만 마지막이 늘 힘들다. 필자는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아무리 낮은 봉우리도 쉽게 머리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을 무수히 되새겼다. 만복대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내달릴 거리였지만, 세 번이나 숨을 고르고 밧줄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만복대에 섰다.
여전히 후덕한 산골인심
말 그대로 만복대다. 필자에게도 복이 찾아들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중년의 아저씨들이 더덕술을 따라주며 배를 안주로 내놓았다. 필자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생각이라고 말하자, 백전노장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겁부터 먹였다. 설악산에서 얼어죽은 모 산악회 총무의 얘기에서부터 혼자서 대간을 종주하다 다리를 못 쓰게 됐다는 친구의 사연까지 흘러나왔다. 서둘러 짐을 챙기는 필자에게 그분이 던진 충고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보게 젊은이. 산 잘 타는 놈은 숲에서 죽고, 글 잘 쓰는 놈은 필화로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서 죽는다네. 아무쪼록 조심해서 가게나.”
9시30분. 만복대에서 곧장 30분 동안을 내려와 정령치(鄭嶺峙·1172m)에 이르렀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岩記)’에 따르면 정령치는 기원전 84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지키게 한 데서 유래했다. 이렇듯 삼한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에서 후일 신라의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근방에 있는 개령암지마애여래불상군(보물 1123호)이 더 유명하다.
정령치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 큰고리봉(1305m)이다. 이곳에서 계속 달리면 바래봉과 팔랑치가 나오는데, 백두대간은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하산을 시작한다.
주촌마을로 내려가는 경사가 급한 오솔길은 혼자 걷기에 호젓한 코스다. 가을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여름의 신록을 그대로 간직한 소나무와 황갈색 측백나무가 마주보고 서 있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종류의 나무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들에겐 똑같이 겨울이 찾아들 것이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살아가는 이치는 다 같은 모양이다.
11시30분. 주촌리에 도착했다. 멀리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면서 한적한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백두대간이 다시 산과 만나는 노치마을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마당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곶감을 꿰느라 바쁜 손을 놀렸다. 필자가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가에서 라면을 끓이자, 녹두를 털던 할머니는 슬며시 콩밥을 한 공기 내밀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산골 인심은 여전히 후덕한 것 같다.
힘이 남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코스를 단축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다. 도중에 갈림길도 많았지만, 먼저 지나간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표지 덕분에 길을 잃지는 않았다. 특히 ‘남원 뚜벅이’라고 적힌 리본의 도움이 컸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이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냥 지나칠 여원재가 아니로다
수정봉에서 여원재로 가는 길은 잡목이 많고 탁 트인 전망도 없다. 마치 산 속에 갇혀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능선을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운봉면인데, 이곳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동편제 창시자인 송흥록이 운봉 태생이고,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제자들이 모두 운봉 땅에서 득음했다.
운봉은 또한 수 년 전까지 양을 기르는 목장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여름철이면 유럽대륙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가 없다. 양떼가 사라진 운봉목장에서는 요즘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시간 이내. 쉬운 길이지만 필자는 이상할 정도로 피로를 느꼈다. 급하게 먹은 점심이 얹히기라도 했는지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러다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여원재에 도착해서 배낭을 점검해 보니 방풍 파카가 없어진 것이다. 덥다고 벗어서 배낭 위에 얹은 것까지만 기억나고,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필자는 파카를 찾으려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 1시간쯤 걸어가자 등산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분들에게 파카에 대해 물었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여원재로 돌아왔다. 파카 속에 들어 있을 비상금을 빼고 나니 서울까지 갈 교통비도 빠듯하다. 할 수 없이 근방에 사는 친구에게 SOS를 쳤다. ‘이쯤 되면 산행은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남아 있는 비상식량으로 요기를 하고, ‘여원재’라는 지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동학군의 접주 김개남이 영남지방으로 진격하기 위해 동학군 1만명을 이끌고 나섰다가 수많은 희생자만 남기고 남원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땅. 여원재 전투의 충격 탓에 동학군은 결국 영남지방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다. 또한 여원재에는 임진왜란 때 왜구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던 조선여인이 이곳에서 스스로 젖가슴을 도려내고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말 그대로 여원재의 여원(女院)이 ‘여원(女怨)’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그 여원재에서 아내의 선물을 잃고 일찌감치 귀경길에 올랐다.
눈이 내리지 않은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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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서부능선. 초겨울 메마른 잡목과 풀만 무성해 쓸쓸함을 더한다.
11월29일 필자는 백두대간 산행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한 일이 있다. ‘신동아’ 신년호 산행르포라면 당연히 눈 덮힌 겨울산의 풍경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주일을 기다려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기온이 갑작스레 떨어져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졌을 뿐, 겉으로 본 산의 모양새는 여전히 가을이었다.
12월7일 새벽 4시30분. 남원역 근처의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을 주문했다.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일어난 중년의 주인 부부는 주방과 식당을 분주히 오가며 첫 손님을 맞았다. 잠시 후 10여명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들이닥쳤다. 겨울 등산객치고는 너무 짐이 가벼워 보여 걱정스럽게 물으니, 도리어 추운 날씨에 산에 오르는 나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리산 온천에 때 밀러 가요. 때 벗기고 시간 나면 노고단에 들러볼까 합니다.”
다시 여원재에 섰다. 해가 뜨려면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서둘러 고남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또 탈이 나고 말았다. 노루가 편안하게 놀았다는 데서 연유한 장동(獐洞)마을까지는 잘 찾아갔는데, 산길로 접어들면서 그만 ‘백두대간’ 표지를 놓치고 만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40여분을 헤매다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따라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함양-남원간 24번 국도가 나타났다. 지루한 아스팔트길을 걸어서 다시 여원재에 이르니 아침 7시. 한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필자는 여원재 표지판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대간으로 올라섰다. 이번에는 장동마을의 개들이 일제히 필자의 뒤로 따라붙었다. 깜짝 놀라 골목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자, 농기구를 챙기던 농부가 단 두 마디의 호통으로 개들을 멀리 쫓아버렸다. 고마워하는 필자에게 그가 던진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 봐. 개를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산을 타는가. 허벅다리쯤 개한테 먹이로 준다고 생각하면 걱정할 게 없어. 귀신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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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자들 사이에 유명한 매요휴게소 할머니
고남산으로 가는 길은 알고 보니 쉽고 편안한 코스였다. 처음에는 잡목을 뚫고 나가는 것이 지루하더니, 능선으로 올라서자 시원한 소나무 숲길이 펼쳐졌다. 멀리 장동마을에서는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 올랐다. 비록 겨울산에 눈이 없는 것이 ‘옥의 티’였지만,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북의 산줄기는 아침산행의 맛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했다.
고남산에서 매요리까지는 줄곧 내리막길이다. 매요리 입구의 밭고랑에는 김장배추와 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길 가는 아주머니의 넋두리에서 농촌의 달라진 세태를 읽을 수 있다. “예전에는 다 주워다 먹었어요. 지금은 밭떼기로 팔아 넘기니까 약도 많이 치고, 서울 사람들이 차로 실어가고 돈 받으면 끝이죠. 아깝지만 인건비도 안 나오니까 그냥 내버리는 겁니다.”
매요리에는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등산객이라면 누구나 들러가는 쉼터가 있다. 바로 폐교된 운성초등학교 앞쪽에 위치한 매요휴게소다. 이곳에 사는 신순남 할머니(68)는 백두대간 종주자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하다. 길 가는 사람 붙들고 라면을 끓여주는가 하면, 밤길에 지친 나그네에게 거실을 내어주고, 10마지기 농사로 7남매를 가르치며 살아온 인생역정도 들려준다.
매요휴게소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앞마당 오른편에 걸린 광목에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써놓은 문구가 그것이다. 이번 산행에서 필자의 눈과 귀를 붙잡은 것은 다소 철학적인 문구였다. “산은 내려가야 올라갈 수 있다” 아마도 지금 필자는 좀 심각한 마음으로 백두대간을 밟고 있는 모양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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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치마을에서 감 따는 아주머니
매요리에서 사치재로 가는 길은 낮은 야산이다. 필자는 산악구보를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뛰면서 사치재를 넘었다. 사치재에서 복성이재로 가려면 88고속도로를 건너야 한다. 건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쉽게 가려면 주민들이 다니는 지하의 우회로를 이용하면 되고, 점잖게 걸으려면 2km를 돌아서 고가도로를 지나면 된다. 문제는 세 번째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단체 등산객들이 이 방법을 쓰는데, 다짜고짜 고속도로를 막고 무단횡단하는 것이다. 88고속도로가 상대적으로 교통량이 적은 길이라지만, 더없이 무모한 행동이다.
필자의 속을 상하게 만든 풍경은 또 있었다. 사치재에서 가파르게 올라서면 697m봉이 있는데,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한숨만 나왔다. 1994년과 1995년 연이어 산불이 난 탓에 나무들이 모두 타죽은 것이다. 숯덩이로 변한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죽은 나무 밑에서는 잡목들이 힘겹게 새 생명을 키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써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멀리 아래쪽으로 지리산휴게소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에 우뚝 선 88고속도로 준공탑은 지리산의 산세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추물 중의 추물이다.
이 코스의 위안거리는 오로지 억새뿐이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억새들은 쉼없이 몸부림치고, 그들의 몸부림이 빚어낸 묘한 효과음이 지친 다리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흥부의 마을에서 걸음을 멈추다
예전에 우마차가 다녔다는 새맥이재에서 복성이재로 가는 길은 온통 철쭉밭이다. 오르내리면서 철쭉 가지에 옷가지와 배낭끈이 수 차례 걸려 그때마다 풀어내는 수고를 다하고 나면 눈앞에 아막성터가 보인다. 이곳은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신라가 맞붙었던 격전지다. 역사서를 보면 백제에서는 아막성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무너져내린 돌덩이들이 등산로의 계단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을 뿐이다.
아막산성 너머로 보이는 긴 길이 바로 복성이재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왼쪽이 전북 장수 땅이고, 오른쪽이 남원 땅이다. 필자는 복성이재로 내려서면서 줄곧 오른쪽을 응시했는데, 이곳이 바로 고대소설 ‘흥부전’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제비가 물어준 박씨로 부자가 됐다는 곳이 바로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의 상성마을이다. 때문에 최근 이 지역에서는 흥부전을 모태로 한 테마파크 개발이 한창인데, 과연 마을의 길목마다 흥부를 연상케 하는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갔다는 화초장바위거리나 흥부가 배를 곯다가 쓰러졌다는 허기재 등은 한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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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盛喆 |
●1969년 경기 안성 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중앙대 사회복지학 석사 ●일요신문·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저서 : ‘왜 클럽축구가 더 재미있을까’ | |
오후 4시. 더 가자니 부담스럽고 끝내자니 아쉬운 시간이다. 복성이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끊기로 했다. 겨울산에서 무리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기 때문이다. 혹시 눈이라도 내렸다면 마음이 동할 수도 있겠지만, ‘겨울 속의 가을산행’이라면 이쯤에서 접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병에 담아간 위스키를 들이켜며 흥부의 마을로 걸어내려오는 데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
발행일: 2004 년 01 월 01 일 (통권 532 호) | |